선실 문이 열리는 순간, 신선한 공기가 권하윤의 폐부로 흘러 들었고 등 뒤에서 승무원 두 명이 하윤을 슬쩍 막아서면서 뒷줄에 있는 승객과 하윤을 갈라 놓았다.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하윤은 안내 방송을 듣자마자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비행기가 착륙한 위치는 공항과 거리가 꽤 멀었기에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하지만 하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경찰차가 와서 연행할 테니까.전에는 그저 혐의만 있었지만 해원에서 도망치는 순간 도주 죄가 추가되어 하윤은 곧바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심문실의 불이 켜지자 하윤은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이윽고 하윤의 맞은편에 앉은 경찰의 심문이 시작되었다.“수사 기간 왜 마음대로 해원을 떠났습니까?”“…….”“해원을 떠나 있는 동안 사건 수사에 방해되는 행동을 했나요?”“…….”“용의자 신분으로 수사 기간 마음대로 통제 구역을 벗어날 수 없으며 경고 전화를 받으면 곧바로 돌아와야 합니다. 지금 그쪽이 한 행동은 범죄 행위에 해당한다는 거 알고는 있습니까? 계속 묵비권 행사하면 구속할 수밖에 없습니다.”경찰의 강력한 태도에도 하윤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하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또 설명해도 될지 알 수 없었다.아직 하윤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만한 증거도 없는 마당에 많이 말할수록 실수를 범하기 쉬우니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게다가 하윤이 혐의를 벗는다 해도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 지 알 수 없었다.차라리 이대로 구속되는 게 낫지.……“찰칵.”하윤은 역시나 구치소에 수감되었다.구치소 안에는 하윤뿐만 아니라 약 열 댓 명 정도 더 있었다.심지어 아직 재판이 진행되지 않은 피고인이 있는가 하면 재판이 끝난 뒤 감옥으로 이송될 범인도 있었다.게다가 고작 사회 규범을 어긴 경범죄자도 있었다.하윤은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지라 수갑을 채워야 했다. 그 때문인지 구치소에 있는 사람들 모두 하윤을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봤다.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수군대기까지 했다.
여자가 말한 목숨줄은 고치소에서 나눠주는 음식이었다. 껍질을 벗기지 않은 감자와 배추를 한데 섞어 만든 음식과 찐빵 하나.권하윤은 음식조차 넘길 수 없어 찐빵을 손에 쥔 채 작게 한 입 씩 베어 물었다.여자는 하윤이 음식을 제대로 넘기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고 싱긋 웃었다.“여기 금방 들어온 사람들은 다 자기처럼 그러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아져. 우리 사건은 커서 아마 곧바로 형이 내려질 거야. 그러면 감옥으로 갈 건데, 그곳은 여기처럼 사람이 많지 않아.”여자의 낙관적인 말에 하윤은 끝내 정신이 조금 들었다.“걱정되지 않나요?”여자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걱정될 게 뭐가 있어? 여기서는 자고 싶을 때까지 자고 맞지 않아도 되는데 얼마나 좋아.”히죽거리는 여자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눈가에 난 상처와 팅팅 부은 오른쪽 뺨은 여자의 지난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 지 그대로 설명해 주고 있었다.그런 여자의 낙천적인 모습을 보자 하윤도 더 이상 죽상을 하고 있을 수 없어 억지 웃음을 지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그 후 며칠 동안, 하윤은 여자의 이름이 장옥분이고 해원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장옥분이 그 마을에 관해 말할 때 하윤은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을 받았지만 순간적으로 떠오르지 않았다.며칠 동안 구치소에 있던 일부 사람들은 감방으로 옮겨졌고 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기도 했다.매일 거의 잠도 자지 못하는 하윤은 가끔 잠이 들 때면 꿈에서 도준을 만나곤 했다.때로는 구조되어 자기를 데리러 온 도준을 만나기도 했고.때로는 도준을 끝내 찾지 못해 망망대해를 보며 엉엉 울고 있는 자신을 보기도 했다.그렇게 폐인처럼 연속 며칠을 지내던 어느 날 아침, 웬 젊은 여자가 구치소에 새로 수감되었다. 상황을 들어보니 여자애는 형에 불만을 품고 집행관들과 충돌이 있고 그 결과 또 재 심판 받게 되었다고 한다.장옥분은 사연 있는 듯한 눈빛으로 그 여자애를 바라보며 같은 말을 중복했다.“비
권하윤은 나지막한 소리로 위로를 계속했다.“걱정하지 말아요. 만약 제가 나가면 언니 딸 꼭 보살펴 줄 테니까.”똑 같은 처지인 하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솔직히 설득력이 없었다.하지만 장옥분은 큰소리 치는 하윤을 비난하기는커녕 그녀의 손등을 두드렸다.“자기도 인생이 고달팠을 텐데, 건강하게 버티고 있는 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해. 내가 도와줄게.”그때,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중년 여성이 슬쩍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 들었다.“저 며칠 뒤면 풀려 나는데 언니 딸애 전화 번호가 뭐예요? 제가 언니 대신 꼭 말 전해 줄게요.”“저도 곧 있으면 나가요. 저도 언니 대신 딸애 돌봐 줄게요.”장옥분의 처지를 알게 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떠는 대신 오히려 서로 위로의 말을 전했다.그러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이시윤, 나와.”“…….”밖으로 나온 순간 하윤은 당연히 또 심문실로 끌려갈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면회실에 도착한 하윤은 외외로 낯익은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하윤은 의자에 앉아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오랜만이네요, 아주버님.”“오랜만이네, 다섯째 제수씨.”민재혁은 증오의 눈빛을 한 채 태연한 척 인사했다.“아, 이제는 둘째 제수시라고 해야겠네?”이윽고 민재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직 축하주도 마시지 못했는데 과부가 된 것도 모자라 이 꼴이 되었다니 참 안 됐어.”민재혁의 말도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않은 탓에 하윤의 낯빛은 창백하다 못해 거의 투명해질 지경이었고 옷 태가 살기는커녕 옷걸이에 옷을 걸어 둔 첫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하지만 하윤은 오히려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맞아요. 제가 어떻게 아주버님처럼 소탈한 태도를 취할 수 있겠어요? 저는 아버지의 죽음에 꿈쩍도 하지 않는 누구처럼 파렴치한이 아니거든요.”하윤의 도발에 민재혁은 대수롭지 않은 듯 미소 지었다.“제수씨, 충고까지 해준 사람한테 너무 쌀쌀맞은 거 아
민재혁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훑어보더니 시선을 권하윤에게 멈췄다.“도피처로는 꽤 지낼만 하겠네. 그런데 그건 알아야지, 언젠가 햇빛을 볼 날이 올 거라는 거.”맞는 말이다.현재 조관성이 아직 완전히 직위를 박탈당한 게 아닌 데다, 해원에서 손을 썼다가 꼬투리라도 잡힐까 봐 아직은 몸을 사리고 있는 추형탁 때문에 지금은 그나마 상황을 늦출 수 있지만 조솬성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다면 이 곳도 더 이상 하윤을 보호하지는 못할 거다.하지만 하윤은 민재혁을 보며 비아냥거렸다.“추형탁은 아는지 모르겠네요. 아주버님이 겉으로는 자기와 손을 잡고 뒤에서는 이런 짓이나 꾸미고 있는 거.”하윤의 말에 민재혁은 여전히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제수씨인데 내가 설마 무슨 짓이라도 할까? 칩을 다른 사람 손에 넘기는 것보다야 나한테 넘기면 내가 제수씨 남은 평생 잘 살게 도울 수도 있는데.”민재혁의 같잖은 말에 하윤은 웃음만 나왔다.“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해요?”“도준이 이미 목숨 부지할 수 있는 부적 적도는 준 거로 아는데. 이대로 죽으면 그 재산도 물거품이 된다는 거 잊지 말아야지.”‘재산…….’‘동림 부지를 말하는 건가?’그제야 하윤은 도준이 기어코 그 땅을 하윤의 명의로 바꿔 놓은 이유를 알았다.그것은 단지 재산일 뿐만 아니라 하윤을 지켜줄 부적이기도 하다.만약 도준이 언젠가 하윤을 보호해줄 수 없게 되면 그 땅을 이용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테니까.도준은 언제나 제멋대로이며 남의 목숨, 심지어는 자기 목숨마저 벌레 보듯 하는 사람이다.다른 사람 같으면 한번 길을 떠날 때마다 경호원을 줄줄이 데리고 다니겠는데 도준은 늘 로건만 데리고 심지어 가끔은 로건조차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그런데 그런 그가 하윤을 위해 보호막을 겹겹이 쳐준 거다.순간 눈시울이 시큰거려 눈물이 흘러내리려 했지만 하윤은 애써 참았다.“칩을 갖고 싶다고요?”민재혁은 하윤이 이제야 생각을 고쳤다고 생각했는지 환한 미소를 지었다.“그래.”“좋아요. 칩은 도
모두가 자고 있는 탓에 그 누구도 하윤이 발버둥 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점차 적어지는 산소에 눈앞에 환각이 생겨 나고 급기야 눈 앞이 하얗게 변하기까지 했다.‘안 돼, 이렇게 죽을 수 없어.’권하윤은 점차 발악을 멈췄다.“…….”그제야 하윤의 입과 코를 막고 있던 사람들이 눈빛을 교환하며 손의 힘을 풀었다. 하지만 그때, 하윤이 눈을 뜨며 힘껏 소리쳤다.“사람…… 읍…….”하윤의 위에 있던 사람이 재빨리 옷으로 하윤의 입과 코를 다 시 막았지만 잠깐 사이에 내지른 비명에 다른 사람들이 이미 깨어났다.“당신들 뭐 하는 거야?”장옥분은 심각한 상황에 얼른 큰 소리로 외쳤다.“여기 사람 죽여요! 빨리 오세요!”소리를 들은 교도관은 곧바로 현장에 도착해 일을 벌인 두 사람을 데려갔다.하윤도 피해자로서 당연히 조사실로 끌려갔다.솔직히 하윤은 자기를 죽이려 했던 두 사람을 전에 만난 적이 없고 심지어 두 사람이 수감되기 전 대화 한 번 나누어 본 적 없다.그런데 두 사람은 한사코 하윤에게 원한이 있어 홧김에 그런 일을 벌였다고 주장했다.결국 두 사람은 곧바로 감옥으로 연행되었고 하윤은 다시 원래 방으로 돌아왔다.장옥분은 다시 돌아온 하윤을 무척 걱정했다.“자기, 괜찮은 거야?”“괜찮아요.”하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그 두 사람 미친 거 아니야? 구치소에 와서도 사람을 해치다니…….”하윤은 자기가 잠자던 곳을 보며 서늘한 눈빛을 내뿜었다.두 사람은 미친 게 아니다. 하윤에게 경고하는 거지. 구치소에 있다고 한들 절대 안전한 게 아니라는 경고.지금 생각해보면 두 사람은 하윤의 목숨까지 노린 것은 아닌 듯했다.하지만 만약 생명이 위독해지면 하윤은 병원으로 이송될 거고 그러면 당연히 구치소에서 벗어나게 될 테니 놈들이 손쓸 기회가 더 많아질 거다.‘또 만재혁인가 보네. 나를 밖으로 몰아내려고.’한 번의 위기는 넘겼지만 하윤은 조금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미재혁은 한 번 실패하면 또 다시 시도할 테니까.이번에 행운이 따랐다
오랜만에 느끼는 따스함에 권하윤은 순간 멍해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코트에서 나는 깊은 우드 향을 맡았다.순간 실망감이 밀려왔고 얇은 코트가 마치 태산처럼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공태준은 하윤의 초췌한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봤다.“괜찮아요?”하윤은 태준의 부축을 치하며 그를 빤히 쳐다봤다.“지금 나 꺼내 주는 게 설마 칩 때문이야?”태준은 하윤의 등에 손을 얹으며 문을 열었다.“저는 그저 윤이 씨가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에요.”쨍쨍 내리 쬐는 햇볕 아래, 신선한 공기가 얼굴을 스치자 달짝지근한 내음이 느껴졌다.오랜만에 느끼는 햇살 때문에 눈시울이 시큰거리며 눈물이 흘러내렸다.눈 앞을 막고 있는 문을 나서면 자유이자 모험이 기다리고 있었다.태준은 하윤을 재촉하지도 강요하지도 않고 대신 문을 받친 채 하윤의 선택을 기다려 주었다.태준의 이런 신사적인 모습에 하윤은 뜬금없이 웃음이 났다.‘나한테 선택의 기회가 있기는 할까?’사건에 새로운 진전이 있다면 언젠가 풀려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오늘은 태준이 왔다지만 내일은 또 민재혁이 올 수도 있었다.……구치소를 떠나는 차 안에서 하윤은 길가에 우뚝 솟은 건물들과 사람들을 관찰했다. 참으로 낯서면서도 익숙했다.하윤을 감싸고 있던 껍데기가 점점 벌어지면서 가장 연하고 부드러운 상처를 드러낸 채 시련을 이겨내라고 강요하는 듯했다.하윤의 옆에서 하윤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태준도 수많은 감정이 스쳐지나는 듯했다.그러다가 차가 어느 한 곳을 지날 때, 하윤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차 세워요.”운전석에 앉아 있는 이남기는 백미러로 태준을 힐끗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을 본 후에야 차를 길가에 세웠다.하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해변가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이것은 작은 해변가다. 갈라진 물줄기가 먼 곳으로 이어지는 바다.바다의 비린내가 섞인 바람이 자꾸만 하윤의 얼굴을 때렸다.“그날 시험 훈련을 하던 곳 여기 아니에요.”하윤도 알고 있다. 그저 도준과 조금이나마 가까이 있
이남기를 제지하고 난 공태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신경 쓰지 마요. 이번 훈련이 실패한 게 영향이 꽤 크고 또 기밀과 관련이 되어 있기도 하여 대외적으로는 비밀이거든요. 제가 한번 알아보고 소식이 있으면 알려 줄게요.”그 말에 잠깐 생각하는 동안 이남기의 한마디가 권하윤을 일깨워 주었다. 지금 태준은 하윤에게 빚 진 게 하나도 없다고, 하윤을 곁에 두는 건 오히려 함께 안 좋은 일에 연루될 수 있다고 말이다.밖을 내다보던 하윤은 웬 호텔을 지날 때 입을 열었다.“여기서 내릴 게. 당신 뒤에는 공 씨 가문도 있잖아. 당신과 있으면 내가 불편하니까 먼저 가 볼 게.”말을 마친 하윤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잠깐만요.”마침 그때 태준도 다른 차 문으로 내리면서 미소 지었다.“불편할 거 없어요. 저 지금 공 씨 집안 가주가 아니에요.”“그게 무슨 뜻이지?”“저는 지금 그저 공태준이라는 뜻이에요. 제가 그저 오래 알고 지낸 친구라 생각하고 잠시 얹혀 산다 행각하면 안 돼요?”나무가 울창한 숲길, 태준은 놀란 듯 묻는 하윤을 지그시 바라봤다.이윽고 하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더니 약 한 걸음 정도 남은 거리에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던 씨도 지금 구조 작업 중이잖아요. 살아 있어야 좋은 소식도 듣지 않겠어요?”“…….”공씨 저택.하윤은 제 발로 이 곳을 다시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두터운 대문, 담장 너머로 자란 나뭇가지들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하윤의 기억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그때의 어두운 기억들과 가족을 위해 죽어라 뛰어다녔던 나날들이 눈앞에 선했다.문이 열리자 장미꽃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정열의 붉은색이 기억 속 고풍스러운 석상을 대체했다.하윤은 공 씨 저택에 이렇게 강렬한 색감이 쓰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장미꽃 정원뿐만 아니라 값비싼 나무로 만든 창문 틀마저 커다란 통 유리창으로 바뀌어 있었고 곳곳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한 번도 밝은 적 없던 하윤의 기억 한구석을 비추었다.전혀 다른 인테리어에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이 들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전화는 연결되었다.계속 이어지는 연결음에 하윤은 자기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의아해 몇 번이고 전화 번호를 확인했다.“뚜- 뚜-“연결음이 이어지는 동안, 온 몸의 피가 귀로 몰려드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그러다가 연결음이 끝나며 차가운 기계음이 들려왔다.“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십시오…….”하윤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또다시 걸어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설레던 심장도 점차 진정되었다.‘혹시 도준 씨가 전투기에 탑승할 때 핸드폰을 두고 탑승했나?’‘아무리 핸드폰을 미처 챙기지 못했다고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지나면 베터리가 나갔을 텐데, 왜 전화가 통하는 거지?’분명 민도준이 아직도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지만 전화 연결음이 들린다는 것만으로도 하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생긴 거나 마찬가지였다.하윤은 그동안 하고 싶은 말들을 적으면서도 또 지금 핸드폰을 갖고 있는 사람이 도준 본인이 아닐 수도 있어 많은 말은 보내지 못했다.결국 삭제하고 또 삭제한 결과, 꼴랑 몇 글자만 보내게 되었다.[보고 싶어요.]그 문자를 보낸 뒤 하윤은 한참 동안 핸드폰 액정을 바라봤다.하지만 1분1초 흘러 액정이 검게 변하더니 다시 밝아지지 않았다.하윤은 심지어 샤워할 때도 핸드폰을 갖고 욕실로 들어가고, 머리를 말릴 때도 놓칠까 봐 시선은 계속 액정에 고정했다.그 덕에 핸드폰 액정이 다시 번쩍이는 순간 하윤은 얼른 손에 들고 있던 드라이기를 내동댕이 쳐버리고 핸드폰을 잡아 들었다.문자 하나가 도착했지만 모두 알아볼 수 없는 코드로 되어 있어 아무리 봐도 풀 수 없었다.하윤은 알파벳을 조합하고 발음대로 조합하고, 첫 글자로 조합하며 머리를 굴러봤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그렇게 한참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똑똑-하윤은 문을 여는 대신 건너편에 대고 물었다.“누구세요?”“아가씨, 점심 드세요.”“저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