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해요.”권하윤은 민도준의 팔짱을 끌어안으며 다급히 말렸다.방금 도준이 자기 때문에 공범으로 몰렸다는 것을 들은 것만으로도 이미 혼란스러워 미칠 지경인데 만약 공아름한테 무슨 일이 있다면 그 결과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도준은 눈물이 글썽한 하윤을 바라보며 총을 든 손으로 하윤의 허리를 툭툭 건드렸다.“됐어. 다름 사람도 있는데 왜 떼쓰고 그래? 죽일 사람부터 죽이고 같이 놀아줄게.”마치 닭 잡이를 하려는 것처럼 가벼운 말투였다.하윤은 계속 말리고 싶었지만 도준이 하윤의 뒷덜미를 잡아 옆으로 밀어버렸다.“저쪽에서 기다려.”공아름은 눈 앞의 광경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시뻘게진 두 눈을 부릅 뜬 채 도준을 바라볼 뿐.하지만 도준은 공아름의 그런 눈빛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입술로 잔인한 곡선을 그리며 총기를 천천히 공아름의 머리에 댔다.“독한 말을 하겠으면 다음 생에는 자기 주제부터 파악해.”도준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밖에서 갑자기 사이렌이 울렸다.눈깜짝할 사이에 그 소리는 펜션 밖에 도착했다.하윤은 낯빛이 크게 변하더니 다급하게 도준의 팔을 끌어당겼다.“이제 어떡해요?”‘공아름이 경찰에 신고했을 수는 없어. 설마 그 깡패들인가?’이미 수많은 죄명을 짊어지고 있는데 또 사람을 다치게 하면 끝장날 게 뻔했다.“총 이리 주고 안으로 들어가요.”공아름은 바닥을 짚고 일어서면서 도준의 손에서 총을 빼앗아 들더니 몸을 돌려 안으로 들이닥치는 경찰들을 마주했다. ……“꼼짝 마!”“누군가 총기를 소지했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서로 잠깐 동행해 주시죠.”공아름은 손에 총을 들고 있었기에 곧바로 중요 대상으로 지목되었다.하지만 더러워진 옷차림에 끌려 가면서도 공아름은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제가 그랬어요. 같이 갈게요.”“…….”떠나기 전 공아름은 고개를 돌려 창가 쪽을 바라봤다.단면 유리 너머로 하윤은 공아름의 눈에 드리운 경멸을 읽을 수 있었다.그 눈빛은 마치 하윤에게 ‘너는 도준 씨를
가벼운 마음의 민도준과 달리 권하윤은 걱정이 가득했다.해원을 떠난 이후로 줄곧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아버지의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해서부터 오나영이라는 실마리로 엄석규의 범죄를 밝혀내고 또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한 뒤 살인 사건에 연루되기까지 마치 누군가 미끼로 자기를 유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 함정에 빠지지 않는 이상 그런 계략을 세운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현실이 답답했다.길게 뻗은 길의 끝자락과 이어진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봐서는 당장 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았다.공기 속의 습한 열기가 가슴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호흡마저 가빠졌고 내뱉는 숨결마저 끈적끈적해지는 느낌이었다.하윤은 심호흡을 몇 번 한 뒤에야 끝내 자기 목소리를 되찾았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지난 번에 강원에서 제대로 못 놀았잖아. 이번에 제대로 놀러 가는 게 어때?”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하는 도준을 보자 하윤은 마음이 조급해 났다.“제가 지금 놀러 갈 기분이겠어요? 차라리 저 내버려 두고 혼자 경성 돌아가요. 저는 해원으로 돌아갈 테니까. 사람은 제가 죽인 것도 아닌데 그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하겠어요?”“끼이익.”갑자기 방향을 튼 차 때문에 하윤은 하마터면 차 밖으로 내동댕이 칠 뻔했다.이윽고 차가 멈춰 서자 하윤은 도준의 짜증 가득한 눈과 마주했다.“내가 너무 오냐오냐 해줘서 이제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거야? 돌아가자는 한 마디에 돌아갈 거면 요 며칠 동안 내가 왜 고생했겠어? 아예 여기서 죽는 게 해원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덜 번거롭지 않겠어?”하윤은 도준의 무서운 모습에 놀라 입을 뻐끔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솔직히 말하면 하윤도 공아름이 떠나기 전의 눈빛 때문에 자극을 받았다.공아름은 도준을 위해 모든 것을 내걸 수 있는데 자기는 그저 도준에게 짐만 되니까.하윤은 도준이 자기 때문에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게 누구보다 싫었다. 자기 때문에 도준이 다치는 것도 싫었다.만약 하윤이 아
“응.”짤막한 콧소리에 권하윤의 마음에는 큰 파도가 일었다.이윽고 하윤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저한테 말 안하는 건 제가 알면 위험할까 봐 그러는 거예요? 아니면 제가 무슨 반응을 할까 봐 그러는 거예요?”민도준의 눈 밑에 순간 그늘이 졌다. 하지만 하윤이 그 원인을 읽어내려고 하려던 그때, 도준이 하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쓸데없는 생각 그만 하고 내 말만 들어.”하윤의 마음은 순간 커다란 돌덩이가 가라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애써 미소를 유지해야 했다.“제가 도준 씨한테 짐이 될까 봐 그러죠.”도준은 피식 웃으며 소가락으로 하윤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짐이 아니라 쇠덩이라도 아령처럼 양쪽 손에 들고 있을 거야.”하윤은 도준의 말에 피식 웃더니 마치 화가 난 것처럼 콧방귀를 뀌었다.“뭐예요? 저 하나로는 모자라다는 거예요? 뭐가 두 개씩이나 필요해요?”그 말에 도준은 하윤의 목덜미 아래로 손을 점점 내리며 주물러 댔다.“여기 있잖아. 뭐 하러 찾아.”“지,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입 다물어요!”떠들썩한 소리는 방금의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주어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에 환희를 더해주었다.하윤은 도준의 말에 담긴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너무 힘들고 피곤해 모른 척했다.게다가 더 이상 추측하고 싶지 않았다. 예전의 일들을 짚어보면 매번 답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마다 하윤의 일부분이 망가져 버렸으니 말이다.도준이 이미 도피처를 만들어 줬다면 그 안에 숨어 있다가 사고가 발생할 그 날을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운전석에 앉은 도준을 보자 하윤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이제는 정말 도준 씨가 없으면 안 되겠네.’……강원은 두 사람이 묵었던 마을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했다.두 사람은 지난 번에 묵었던 별장에 묵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두 사람이 더 추가되었다.그 중 한 명은 예전에 만난 적 있던 장욱이었고 다른 산 사람은 정장 차림에 반질반질 윤이
‘주림 선배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상대가 계속 주림 선배를 괴롭히는 거지?’아마 이 모든 건 그 전화를 해봐야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전화 번호의 존재를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권하윤은 고개를 숙이고 고분고분 대답했다.“알았어요.”그때 민도준이 하윤의 턱을 들어 올리며 손가락으로 하윤의 입술을 문질렀다.“알면 됐어. 내일 내가 가면 여기 꼼짝 말고 있어. 어디 다른데로 새지 말고.”“간다고요? 어디 가요?”도준은 창백한 하윤의 입술이 빨갛게 변할 정도로 문지르고 나서야 만족한 듯 손을 뗐다.“우리 겁쟁이가 저질러 놓은 일을 처리해야지.”그제야 하윤은 도준이 말하는 게 해원 쪽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도준의 손을 덥석 잡았다.“안 돼요. 공아름이 말했잖아요. 지금 도준 씨도 도주범이라고. 도준 씨가 돌아가면 위험해요!”“위험하다고? 오히려 재밌네.”도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그 곳은 해원이에요!”아무리 강한 사람도 지방 조무래기를 당하지는 못하는데, 도준이 경성에서 얼마나 강할지 몰라도 해원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도준은 하윤이 자기를 걱정하는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하윤을 끌어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됐어. 이렇게 쓸데없는 일 생각할 시간에 제대로 된 걸 생각하는 게 어때?”도준은 저를 밀어내려고 애쓰는 하윤의 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살짝 깨물더니 말을 이었다.“예를 들면 내가 해원에 가 있는 며칠 동안 하고 싶으면 어떡할지라던가…….”“좀 진지해져 봐요!”하윤은 도준의 어깨를 꽉 잡아 도준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거리를 두고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도준은 그런 하윤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고개를 소파에 기댄 채 날카로운 턱선과 볼록한 목젖을 훤히 드러냈다. 단단한 뼈가 살갗위로 뻗어 나올 것처럼 선명한 라인은 사람을 매료시켜 하윤은 저도 모르게 멍 때렸다.“진지하라며? 왜 멍 때리고 있어?”도준의 농담은 마치 하윤을 공제하는 듯했다. 하윤은 그런 도준의 말에 김
권하윤은 민도준의 말이 믿기지 않아 순간 얼떨떨했다.하윤이 전에 했던 일이라면…….도준을 배신하고, 도준에게 독을 타고, 또 심한 말로 도준을 상처 준 것까지…….스스로 돌이켜 봐도 용서받지 못할 일투성이다.상대가 도준이 아니라 평범한 남자라도 이런 일을 한 사람은 절대 용서하지 못했을 텐데.생각할수록 하윤은 눈시울이 시큰거려 저절로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그런데 전에 제가…….”“착하지,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해.”“…….”짤막한 몇 글자로 하윤은 순간 엉엉 울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물론 도준이 지금껏 하윤의 말을 들어주고 하윤이 하자는 대로 했지만 그간 하윤이 했던 거짓말들은 항상 그림자처럼 곁을 따라다녔다.그런 느낌은 마치 실수로 상대에게 칼자국을 남겨 상대가 용서해줬지만 남아 있는 흉터가 계속 잘못을 깨우쳐 주는 것 같았다.그런데 그 오래된 흉터와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이 순간 새살이 돋아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건 용서를 받았기에 느낄 수 있는 홀가분한 마음이고 두 사람의 새출발을 의미하기도 한다.애써 참고 있던 눈물이 끝내 뚝뚝 떨어져 도준의 손에서 흩어졌다.“그런데 그러면 도준 씨가 너무 억울하잖아요.”흐느끼며 내뱉은 하윤의 말에 도준은 피식 웃으며 하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남자인 내가 어린 여자한테 그깟 일로 시비라도 걸까 봐 그래?”이 시각 하윤은 도준의 농담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손을 뻗어 도준을 끌어안을 뿐.“역시 도준 씨밖에 없어요.”도준은 미세하게 떨리는 하윤의 등을 쓸어주며 위로했다.아직도 한창 울어야 할 줄 알았더니, 하윤은 몇 분도 안 되어 바로 고개를 쳐들며 물기 머금은 눈동자로 도준을 바라봤다.“저 샤워하고 싶어요.”“샤워하는 것도 나한테 보고해?”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이에 하윤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야릇한 눈빛을 보냈다.“도준 씨랑 같이 씻고 싶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도준은 혀를 입안에서 굴리며 하윤의 등을 누르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정말이야?”
결국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하윤은 차에 오를 때부터 내릴 때까지 내일 아침 도준을 위해 직접 만두를 빚겠다며 호언장담했다.그렇게 슈퍼에서 이것저것 잔뜩 사왔지만 반죽을 만드는 과정부터 하윤은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이에 하윤은 문에 기대 구경하는 도준을 돌아보며 슬쩍 말을 건넸다.“혹시 만두 만드는 방법 좀 검색해 줄 수 있어요?”“핸드폰 보고 싶어?”어깨를 누르며 묻는 도준의 말에 하윤은 순간 멍해졌다. 솔직히 그 문제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반죽 만드는 방법을 알고 싶었을 뿐.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이내 표정을 풀며 하윤의 핸드폰을 건넸다.하지만 하윤이 손을 뻗으려 할 때 도준이 손을 다시 뒤로 뺐다.“참, 잊을 뻔했네.”이윽고 도준은 하윤이 보는 앞에서 전화 카드를 빼 버리더니 하윤의 의아한 눈빛에 입꼬리를 올렸다.“지금 도주범이라는 거 잊었어? 그런데도 핸드폰 켜려고?”하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주민수가 준 전화 번호를 걸렸다고 생각했으니까.그제야 안심한 듯 핸드폰으로 방법을 검색한 하윤은 자신만만하게 작업을 시작했다.그리고 시작하기 전 앞치마를 꺼내 도준에게 묶어 달라고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도준이 뒤에서 앞치마를 묶어주자 하윤은 순간 영화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허리를 끌어안고 긴 머리카락을 묶어주는 장면은 상상만해도 로맨틱했다.하지만 하윤의 상상이 끝나기도 전에 도준은 앞치마를 묶고는 하윤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됐어.”‘이게 끝이라고?’‘뭐야? 드라마랑 완전 다르잖아.’하지만 그 시각, 등 뒤에서는 도준이 하윤의 가는 허리를 느긋하게 훑어보고 있었다.흰색 원피스에 파란색 앞치마를 하고 있는 데다 긴 머리가 축 늘어져 있으니 언뜻 보기에 현모양처 같아 보였다.도준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혼자 할 수 있겠어?”한창 핸드폰을 보며 고심에 빠져 있던 그때 갑자기 들려온 도준의 말에 하윤은 고개를 홱 돌려 반박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요? 저 뭐
문이 닫혔다.고개를 돌려 텅 빈 별장을 보자 권하윤의 마음도 덩달아 허전했다.결국 혼자서 꾸물거리며 어수선한 부엌을 정리하며 방금 전의 흔적을 지워야만 했다.냉동실에 보관되어 있는 만두를 보자 하윤의 마음은 더 다운되었다.하지만 민도준이 이렇게 갑자기 떠난 것도 이유가 있을 거다. 그 이유는 아마 하윤이 벌인 일과 관련이 있을 거고.때문에 도준을 탓할 수 없었다.쓸쓸히 계단을 올라 방 침대에 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전화벨이 울렸다.‘응?’소리를 따라 확인해 보니 유선전화에서 울리는 소리였다.하윤은 번호를 슬쩍 확인하고는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하윤은 손가락으로 전화선을 칭칭 감았다.“제가 도준 씨를 위해 힘들게 만두 빚었는데 먹지도 않고 가버렸잖아요.”“주식을 먹었으니 반찬은 안 먹어도 괜찮아.”“…….”주식이라 불린 하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전화 건너편에서 브레이크 소리가 들렸다.“떠나는 거예요?”“응. 내가 떠나 있는 동안 되도록이면 밖에 나가지 마. 어디 갈 거면 장욱한테 같이 가달라고 하고. 말 잘 들어, 걱정하게 하지 말고, 알았지?”도준의 당부에 하윤의 마음 한 켠은 달콤해졌다. 하지만 결국은 ‘알았어요’라는 한 마디로 목까지 차 올랐던 수많은 말을 대신했다.“참, 주림 선배와 주민수 할아버지도 강원에 있어요? 걱정이 돼서 보고 싶어요.”“지금 안전한데 굳이 가보겠다면 안전은 장담 못해.”“네.”기어들어간 목소리만 들어도 하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어둠 속, 도준은 전용기 옆에 서 있는 우원준을 향해 고개를 까딱거리며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됐어. 기운 차려. 못 보게 하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돌아가면 같이 보러 가자.”“정말요? 역시 도준 씨밖에 없어요.”전화 건너편에서 들리는 쪽 하는 소리에 도준은 또 몇 마디 농담을 더했다. 그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원준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헤어진
전화를 끊은 뒤 권하윤은 유선전화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봤다.그러다가 손바닥에 꼭 쥐고 있던 작은 천 조각을 보며 고뇌에 잠겼다.민도준이 너무 급히 떠나는 바람에 하윤은 그에게 솔직히 고백할 타이밍도 놓치고 말았다.솔직히 이 기회에 천 조각에 적힌 번호로 전화하고 싶었지만 이대로 전화한다면 또 도준을 속인 일이 하나 늘어나는 것이 된다.‘그동안 도준 씨를 믿지 못해 다른 사람의 입에서 진실을 들으려고 한 건데.’하윤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끝내 천 조각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아니야. 일주일 뒤면 도준 씨가 나랑 같이 주민수 할아버지 찾으러 간다고 했는데 이러면 안 돼.’떳떳하게 진실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두고 뒤에서 도준 몰래 일을 꾸미고 싶지 않았다.‘고작 일주일인데 그 정도 기다리는 건 아무 일도 아니야.’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하윤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그러다가 심심한 나머지 또 레시피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도준이 돌아오면 직접 요리를 해주고 싶어서였다.도준이 좋아하는 음식 몇 가지를 떠올리며 내일 장 볼 채소를 정리한 뒤 하윤은 단잠을 청했다.다음날.씻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보니 소파에는 사람 한 명이 앉아 있었다.“어…….”하품하고 있던 장욱은 하윤을 보자 침을 꼴깍 삼켜 참고는 손가락 두개를 이마 앞으로 들어 올리며 멋쩍게 인사했다.“좋은 아침입니다.”그 모습을 보자 하윤은 순간 느끼한 음식을 먹은 것처럼 속이 불편했다.“어, 여긴 어떻게?”“저 오늘부터 하윤 씨의 경호원이자 보모이자 친구이니 하고 싶으면 말씀하세요.”장욱은 윙크를 하며 대답했다.그러더니 또 다시 윙크를 한번 날리더니 말을 보탰다.“저는 하윤 씨 결정에 따를게요.”그런 장욱을 보고 있자니 하윤은 왠지 모르게 한민혁이 보고싶어졌다.하지만 하윤은 티를 내지 않고 장욱과 함께 슈퍼로 향했다.물론 운전하는 동안에도 장욱의 입은 쉴 틈이 없었다. 하윤은 맨 처음 예의상 웃으며 대꾸하던 데로부터 어느새 미소가 점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