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는 더 이상 아까처럼 긴장감이 맴돌지 않아 하윤은 팅팅 부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도준 씨 잘못 맞잖아요. 제가 사실대로 말했는데도 믿어주지 않고.” “믿으라고?” 도준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공태준 따라 간 게 누구였더라? 게다가 같이 식사도 하고 왔으면서.” 하윤은 말문이 막혔다. 도준의 말이 맞다. 태준을 아무리 우연히 만났다고 할지라도 그를 따라가기로 한 건 하윤이 선택한 거니까 따지고 보면 크게 다리지는 않았다. 하윤이 넋을 잃고 있을 때 도준이 그녀의 이마를 튕겼다. “자, 그러면 두 사람이 뭘 말했는지 얘기해 봐. 뭘 말했길래 그렇게 넋을 놓고 집에 사람이 있는 것도 몰랐어?” 하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그동안 태준을 오해했던 것 같다고, 태준이 그동안 자기가 괴롭힘을 당했을 때 가만히 있었던 건 도와주지 않은 게 아니라 도와주지 못한 거였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하윤이 머뭇거릴 때 도준은 그녀의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말했다. “미리 경고하는데, 나 지금 많이 참으면서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꿍꿍이 부릴 생각 하지 마. 안 그러면 다른 방법으로 대화할 테니까.” 하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저도 사실 공태준 따라가서 밥 먹으려는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제 아버지가 고소를 당한 게 공씨 가문과 상관 있는 건지 알고 싶어서 따라 갔어요. 공태준 말로는 그때 공씨 개인 저택에 공태준 혼자만 있었던 게 아닐라 공천하도 있었대요. 그러니까 이 일은 공천하 짓인 것 같아요.” 하윤은 고개를 들지 않았기에 도준이 지금 어떤 눈빛으로 자기를 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 눈빛은 날카롭다 못해 조금만 스쳐도 살이 베일 것만 같았다. 하윤은 말을 마친 뒤 도준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가 마침 그의 무서운 눈빛을 봐 버렸다. “왜 그렇게 봐요?” 하윤이 오싹해 몸을 움찔할 때 도준은 갑자기 웃음
오후 3시, 하윤은 로건의 차에 앉아 목적지로 출발했다. 로건이 하윤의 경호를 맡은 뒤로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거였다. 하지만 대충 인사만 했던 터라 로건은 갑자기 호칭을 정하기 난감해했다. “하윤 씨…….” “아니, 아니지. 이시윤 씨…….” “아니, 아니야. 사모님!” 로건은 90도로 인사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저 로건이 잘 모시겠습니다!” 하윤은 로건의 호칭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로건 씨, 그럴 필요 없어요. 예전처럼 불러요.” 로건은 연신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저 요즘 경호원에 관한 책을 사서 공부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한테 시키실 일 있으면 마음대로 부리세요. 가장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테니까!”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하윤은 그 사람이 입만 번지르르하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로건이 말하니 오히려 다르게 느껴졌다. 부리부리한 두 눈은 마치 1800와트 짜리 전구라도 갈아 끼운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으니까. 로건의 진지한 모습에 하윤은 멋쩍게 웃었다. “그래요.” 이윽고 조수석에 안장 안전벨트를 매자 로건이 또 말을 걸어왔다. “잘 앉으세요. 출발합니다. 좋은 여정 되시 길 바랍니다.” 하얀 이를 드러네며 환하게 웃는 로건을 보자 하윤은 웃는 것조차 어색해졌다. “그, 그래요.” ‘돌아가서 희연 언니한테 물어봐야 겠네. 대체 무슨 책을 봤다는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하자 로건은 또 책에서 배운 서비스 기술을 선보이면서 하윤을 룸까지 경호했다. “여기까지 데려다 주면 돼요. 이따가 도준 씨 차로 갈테니까 먼저 가 봐요.” “네? 아, 알겠습니다.” 방금 까지만 해도 태양처럼 활짝 웃고 있던 로건은 잔뜩 풀이 죽어서는 몇 걸음 걷고 뒤를 돌아보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에 하윤은 뭔가 생각난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도준 씨 보고 싶어서 그래요?” 그 말에 멀리까지 걸어갔던 로건은 한순간 하윤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래도 돼요?” 마치 주인한테 버림받은 덩치
로건이 떠나자 권하윤과 민도준만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분명 매일 같이 살고 있는 두 사람이지만 도준은 낮과 밤이 거이 바뀌다시피 출근하는데다 하윤이 잠이 든 뒤 집에 돌아오고 하윤은 매번 도준을 일부러 피하는 바람에 거의 대화를 하지 못했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둘만 있는 상황이 되니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불안한 하윤과는 달리 도준은 오히려 하윤을 대놓고 훑어보았다. 비교적 공식적인 자리라 그런지 하윤은 오늘 연한 계열의 슈트를 입고 있었다. 허리 라인까지 오는 상의에 같은 색의 스커트. 분명 단아한 차림이었지만 가는 허리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더해졌다. 그러던 그때 도준이 하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다른 사람이 없으니 하윤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작은 손을 도준의 커다란 손바닥에 얹는 순간, 몸 전체가 도준에게로 끌려갔다. 리클라이닝 의자는 두 사람을 수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기에 하윤은 도준의 가슴 위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도준은 마치 아이를 달래듯 하윤의 등을 토닥였다. “왜 더 마른 것 같지? 요즘 밥 제대로 안 먹었어?” “먹었어요. 아주머니가 하는 밥 맛있어요.” 도준은 하윤의 허리를 문질렀다. “혼자 있기 심심했지? 파트너랑 계약 맺으면 해외로 나가야 하는데 그때 하윤 씨도 데려갈게.” 하윤은 놀란 듯 되물었다. “해외요?” “응.” 도준은 손을 들어 하윤의 머리카락을 쓸며 피식 웃었다. “참, 파트너 회사가 마침 중부 유럽에 있다는데 나중에 시간 나면 하윤 씨 가족도 데려올 수 있겠다.” 그 말에 하윤의 몸은 순간 굳어버렸다. ‘가족을 데려온다고?’ 하윤은 지금이 가족을 데려오는 좋은 시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아직 도준이 가족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솔직히 도준이 하윤을 지금까지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건 순전히 두 사람의 관계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의 가족마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대
권하윤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때, 문밖에서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 사장님, 손님이 도착했는데 들여보내도 될까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하윤은 민도준이 일전에 미리 당부해 두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도준은 몸을 일으켜 세워 정신이 혼미해진 여자를 빤히 내려다보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가를 쓱 문지르며 대답했다. “들여보내요.” 문이 밖에서 열렸다. 먼저 들어온 여인은 도준이 혼자 있는 걸 발견하자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부인도 함께 왔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어디 가셨죠? 설마 부인이 있다고 한 것도 우리 회사 여직원들이 민 사장님께 반하기라도 할까 봐 한 거짓말이었나요?” 이 말을 꺼낸 사람은 마리라는 여자인데 이번에 협업하기로 한 회사의 사장이다. 마리의 간단한 두 마디에 어색한 분위기가 이내 풀어졌고 동행한 임원진들마저 웃으며 맞장구 쳤다. 그때 부사장이 어눌한 한국어 발음으로 말을 꺼냈다. “딴 마음 품은 거 혹시 마리 본인 아니에요?” “들켰네요.” 마리는 투항하듯 두 손을 들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발음은 몇몇 외국인들 중 가장 정확했다. 말을 마친 마리는 도준을 힐끗 바라봤다. “그래서 저한테 기회는 있나요?” 마리는 전형적인 중유럽 미녀다. 예쁜 외모에 금발을 갖고 있는데다 완벽한 콜라 병 몸매를 소유하고 있고 심지어 도준을 볼 때의 눈빛도 매혹적이었다. 도준은 마리가 지금껏 본 남자 중에 가장 섹시한 남자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숨길 수 없는 야성적인 분위기가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전에는 계약 건을 따내야 한다는 목적 때문에 프로패셔널한 모습만 보이며 한 번도 선을 넘은 적이 없는데 이제는 계약도 체결되었기에 하룻밤이라도 함께 보낼 수 있다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기의 외모에 대해 항상 자신하는 마리였기에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금발을 귀 뒤로 넘겼다. 도준이 자기를 거절할 이유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도준의 눈빛은 마리의 뒤를 향했다. “뭘 꾸물대고 있어
권하윤은 이번 식사가 지루할 줄 알았는데 마리 덕분에 잘 어울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술까지 마셨다. 그러다가 민도준이 술잔을 빼앗아 가자 하윤은 확실히 쪼잔한 남자가 맞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헤어지기 전 마리는 하윤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며 아쉬워했다. “다음에 다시 봤으면 좋겠네요.” 명함 아래 적힌 알파벳을 보는 순간 하윤은 왠지 모르게 어디에서 봤던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마리는 하윤이 자기 회사 이름을 빤히 쳐다보자 으쓱해하며 말했다. “그건 우리 회사 이름 이니셜이에요. WM. 저희 회사는 중유럽에서 가장 큰 해운 회사인데 출항할 때면 바다에 떠 있는 대부분 배에 WM이라는 글자를 새겨져 있어요. 심지어 파도도 가장 먼저 WM이라는 글자를 배워야 한다는 말도 있어요.” 술을 마신 탓에 하윤은 마리의 말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지만 애써 눈을 뜨며 실례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심지어 마리의 말이 끝나자 손뼉을 치며 칭찬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술에 취해 눈이 몽롱하면서도 맞장구 치는 하윤의 모습에 마리는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발그스름한 하윤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 하지만 닿기도 전에 손목이 힘껏 잡히더니 내팽개쳐졌고 다시 확인하니 하윤은 이미 도준의 품에 안겨 있었다. 도준은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 술 깼죠? 아직도 안 깼으면 팔이라도 부러트려 정신이 번쩍 들게 도와드릴 수 있는데.” 마리는 아픈 손목을 털며 과장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매너는 어디 갔어요?” 그때 마침 도준의 품에서 고개를 삐죽 내민 하윤은 아픔을 호소하는 마리를 보자 앞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왜 그래요?” 하지만 마리와 닿기도 전에 도준이 하윤을 들어 안다시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가자.” 억지로 집에 가게 된 하윤은 도준의 어깨 너머로 마리한테 손을 흔들었고 마리는 손 키스를 퍼부어 댔다. 바람을 맞으니 가뜩이나 어지럽던 머리가 무거워지며 눈 앞이
“보스,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민 사장도 다음 주에 기술팀을 데리고 회사로 방문하여 우리 회사 선박의 내비게이션 기술 시스템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겠다고 했고요…….” 마리는 보고를 할 때도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녀의 보스가 누군가와 밀폐된 공간에 함께 있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오늘 그가 오늘 얼굴을 내비치지 않은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마리는 오히려 의아했다. 얼굴을 비추지 않을 거면 여기까지 따라올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때 청회색의 눈동자가 마리에게로 옮겨지더니 채 마르지 않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마리의 젖은 어깨 위에 멈췄다. 물에 젖은 자국이 마치 얼룩처럼 셔츠 어깨 라인을 따라 점점 퍼져 남자의 마음은 오히려 심란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짜증나는 듯 시선을 다른 데로 옮겼다. “알았어. 나가 봐.” 마리도 자기 어깨에서 점점 번지는 물 자국 때문에 보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걸 눈치채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급히 나오다 보니. 저는 이만 돌아가서 선박 모델에 관한 정보를 정리하겠습니다. 내일 귀국할 텐데 비행기 티켓 예약할까요?” ‘귀국…….’ 남자는 자기의 메일과 부재중 전화 기록을 샅샅이 살폈지만 낯선 번호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소원이 없나?’ 그렇다면 그도 번거롭게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래. 내일 오후 2시 거로 예약해.” “네.” …… “솨…….” 욕실의 따뜻한 물줄기가 도자기처럼 하얀 피부 위에 떨어지더니 여자의 긴 머리카락과 남자의 손등을 지나 바닥에 떨어졌다. 원래는 아름답고 온화해야 할 분위기가 정신이 혼미 해 있는 여자 때문에 깡그리 망가졌다. 머리를 씻을 때 잔뜩 취한 하윤이 글쎄 사레까지 들린 거다. 심지어 혼잣말로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저 이대로 죽는 거 아니에요? 저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도준은 잔뜩 울상이 된 하윤의 모습에 오히려 피식 웃더니 샤워기 헤드를 내려 거품이 가득한 하윤의
일어나 앉은 민도준은 권하윤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뭐가?” 하윤은 다른 걸 신경 쓸 겨를 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알면서 뭘 물어요?” 도준의 시선이 하윤의 쇄골 아래로 흘러내렸다. 심지어 그 눈빛은 노골적이기까지 했다. “잊어버렸는데.” “아니!” 하윤은 목이 메어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제 그렇게 미친 듯이 해댔는데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어떡하지?’ 하윤은 자기의 일만으로도 혼란스러워 미칠 지경인데 만약 여기에서 다른 일까지 더해지면 아마 살아갈 수 있을 지도 의문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하윤은 얼른 바닥에 흐트러진 옷을 대충 몸에 걸치고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발을 떼기도 전에 도준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왜 이렇게 심하게 반응해?” 하윤은 마구 버둥댔다. “이거 놔요.” 지금이라도 당장 나가 약을 하고 싶었다. 더 늦었다간 효과가 없으면 안 되니까. 도준은 조급해하는 하윤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녀를 침대 위에 내팽개쳤다. “왜? 내 아이 갖는 게 그렇게 싫어?” 하윤도 순간 욱해졌는지 버럭 소리쳤다. “애를 낳든 말든 제 자유예요. 아무리 도준 씨라도 제가 모르는 상황에서 임신하게 할 자격 없다고요!” 어제부터 오늘까지 너무나 많은 일이 예상을 빗겨 나갔다. 도준이 가족을 모셔오겠다는 말도, 저도 모르는 사이에 도준과 잠자리를 가진 것도. 더욱 두려운 건 하윤도 완전히 빠져 버렸다는 거다. 물론 알코올의 작용도 있겠지만 눈 앞의 남자를 거절할 수 없다는 게 더욱 컸다. 하윤의 몸과 마음은 이미 도준을 담고 있기에 계기만 있다면 어렵게 쌓아 올린 벽이 모두 무너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 하윤은 도준한테 화나는 동시에 자기한테 더 화가 났다. 분명 모든 사실을 알아낼 때까지 도준과 거리를 두고 절대 흔들리지 않으려 했건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게 분했다. 끝내 참고 있던 눈물이 눈시울을 넘쳐나 창백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구는 하윤을 보자
현격한 힘의 차이로 인해 버둥대는 게 소용없자 권하윤은 화가 난 듯 자기 옆을 짚고 있는 민도준의 팔을 물어버렸다. 하지만 도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하윤을 내려다봤다. 분노의 물결이 반짝이는 하윤의 눈을 보자 순간 길들지 않는 늑대 새끼를 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의 팔에 붙은 살을 뜯어낼 것처럼 물고 있는 걸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만도 했다. 한참 뒤 도준이 더 이상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한 하윤은 그의 팔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빨간 피는 이미 하윤의 입술선을 타고 옆으로 퍼졌다. 깊숙하게 파인 이발 자국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걸 보고 나서야 하윤은 순간 흠칫했다. ‘내가 이렇게 세게 물었다고?’ ‘아니지. 도준 씨는 통증도 못 느끼나? 왜 움직이지도 않지?’ “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하윤의 눈빛에는 약간의 당혹함이 묻어 있었다. 심지어 입안에서 번지는 피비린내에 불안감까지 더해져 감히 도준을 바라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도준은 피가 흘러나오는 상처를 힐끗 바라봤다. “하, 독하네.” 하윤의 분노는 어느새 사라져 침대 아래로 내려가려고 버둥댔다. “제가 소독해 줄게요.” “됐어. 독이라도 탈까 봐 오히려 무서워. 얼른 씻고 밥 먹어.” 나란히 세면대에 서서 손을 씻을 때 하윤은 도준의 팔을 힐끗 바라봤다. 이미 진정을 되찾은 하윤은 그제야 약은 도준이 떠난 뒤 사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확실히 이렇게 모순을 격화할 필요까진 없었다. 더욱이 도준은 오히려 약한 태도를 보여야 약하게 나오는 사람인데 말이다. 하지만 방금 그렇게까지 한 건 순전히 아이를 낳아줄 여자가 널렸다는 말에 화가 나서였다. 한바탕 소란을 피운 덕분인지 아침 식사를 할 때 하윤은 많이 조용해졌다. 물론 여전히 눈을 굴리며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지만. 하지만 도준은 마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하윤에게 음식을 집어 주었다. “많이 먹어. 이렇게 말라서 어떡해? 힘만 쓰면 부러질까 봐 겁나.” 하윤은 묵묵히 식사를 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