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은 공태준을 본 순간 방금 그가 아래층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순간 함부로 입을 놀린 자신이 미워졌다.이에 하윤은 어렵사리 누그러든 분위기가 또 나빠질까 봐 조심스럽게 옆에 서 있는 민도준을 바라봤다.두 사람 사이에 아까와 다른 알콩달콩한 기류가 흐르자 원래도 표정이 다채롭지 않은 태준의 입가에 차가움이 맴돌았다.하지만 태준은 도준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하윤에게 고개를 돌렸다.“우리 이제 떠날까요?”하윤은 입을 뻐금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따지고 보면 그녀가 먼저 태준에게 전화를 걸었고 먼저 함께 떠나겠다고 말했다.그런데 상대를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고 이제 와서 번복하면 아무리 봐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원래대로라면 사실 하윤은 태준에게 이런 복잡한 감정까지 느낄 리 없다. 하지만 생사의 고비에서 상대가 자기를 구해주던 기억을 떠올리고 지금껏 태준이 자기를 대하던 태도를 되새겨보자 원래처럼 차갑게 대할 수 없었다.그렇다 한들 지난날의 일을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때문에 태준과 말할 때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지금처럼.하윤은 깊은 숨을 들이켜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우리 며칠 어디 좀 다녀오기로 했으니…….”슬쩍 도준을 힐끗 바라본 하윤은 도준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말을 이었다.“나중에 해원으로 갈 때도 도준 씨가 데려다 줄 거야.”그 말을 들은 순간 태준의 얼굴에 맴돌던 마지막 따스함도 싸늘하게 식어버렸다.공기는 몇 초간 조용해졌다.하윤은 태준이 저를 방해할 거라 생각했지만 태준은 오히려 차에서 우산 하나를 꺼내 하윤에게 건네주었다.“요즘 장마철이니 옷 껴입는 거 잊지 마요. 해원에서 기다릴게요.”앞으로 쑥 내민 우산을 하윤은 받아 들기도 그렇다고 받지 않기도 애매해 곤욕을 치렀다.하지만 하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을 때 커다란 손이 옆에서 쑥 나오더니 태준이 건넨 우산을 받아 들었다.“고마워요.”도준은 태준을 슬쩍 살피더니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아참, 해원
열심히 짐을 싸고 있던 권하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몸이 기우뚱해지면서 그대로 캐리어 안으로 넘어졌다.이에 고개를 홱 돌린 채 토라진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웠다.“왜요?”하지만 말을 내뱉자마자 부드러운 모습으로 상대를 감동하게 하겠다던 계획을 떠올리자 이내 말투를 누그러뜨렸다.“도운도 안 주면서 왜 방해하고 그래요.”민도준은 몇 초 사이 바로 태도를 바꾸는 하윤의 모습이 재밌어 피식 웃고는 하윤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됐어. 거기 가서 모자란 게 있으면 사람을 시켜 사 오게 하면 그만이야.”“그런데 남이 준 게 마음에 안 들면 어떡해요?”하윤은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를 인식한 듯 눈을 번쩍 들었다.“잠깐만. 도준 씨 강원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설마 거기 옛 애인이 있다거나 그런 거예요?”누그러든 척하다가 곧바로 다시 본성을 드러내는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왜? 그 여자들과 교류라도 해보려고?”‘여자들? 교류?’순간 하윤은 가슴이 욱신거렸다.‘역시 남자는 믿을 게 못 돼. 아까까지만 해도 나한테만 관심이 있다더니 강원 쪽에 애인이 있었던 거네.’화가 났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자 하윤은 고개를 돌린 채 다시 짐을 싸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자기 옷은 고이 개어 넣고 도준의 옷은 대충대충 뭉텅이 채로 넣어버렸다. 마치 사람한테 풀지 못한 화를 옷에 푸는 것처럼.전용 비행기에 올라탈 때 하윤은 겨우 부글거리던 마음을 조절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좌석에서 립스틱을 발견했다.아까 도준이 강원에 여자를 숨겨놨을 수 있다는 생각하면서 하윤은 질투가 나긴 했지만 어느 정도 믿지 않기도 했는데 이제 립스틱까지 버젓이 나타나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이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 모습을 보고 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이제 곧 이륙할 텐데 그렇게 뛰어다니다가 넘어져.”“저 뒤에 가서 앉을래요.”두 사람이 탄 전용 비행기는 큰 기종이 아니기에 안에 4개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때문에
권하윤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자 민도준은 느긋하게 의자에 기댔다.“정찰 다 마쳤어? 어디에서 사과하는 게 좋은 거 같아?”도준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지만 그가 보내는 눈빛에서 하윤은 이번 사과를 몸으로 때워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다.지레 겁을 먹은 하윤은 슬금슬금 도준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마치 천적을 피하는 동물처럼.하지만 그 동작은 얼마 지속되지 못 하고 곧바로 제지당했다.남자의 손이 하윤의 허리를 감쌌고 뜨거운 손의 온도가 옷감을 뚫고 살에 전해져 손이 닿은 곳은 살갗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이에 하윤은 얼른 손을 내밀어 도준의 손을 잡았다.“잠깐만요…….”“뭘?”하윤은 널찍한 탓에 더 훤히 보이는 기내를 둘러보더니 창밖을 가리키며 고래를 저었다.“여기는 하나님과 너무 가까워서 이건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에요.”도준은 하윤의 말에 약 2초간 멈칫하다가 끝내 웃음을 터뜨리며 하윤의 허리를 주물렀다.“이런 핑계도 생각해 낸다고?”하윤은 간지러운 탓에 몸을 옆으로 피하며 이대로 넘어갔다는 안도감에 고집 있게 밀어붙였다.“틀린 말도 아니잖아…… 아!”갑작스러운 남자의 동작에 놀라 하윤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대다가 아까 자기와 도준을 서비스해 주던 승무원이 커튼 뒤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내 입을 막았다.그러면서 도준에게 눈빛을 쏘아대며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다고 꾸짖었다.그때 귀 뒤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며 목소리가 들려왔다.“그거 잘됐네. 나 원래 하나님한테도 시비 걸기 좋아하거든.”하윤은 몸부림치는 데 실패하자 소리가 새지 않게 입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준을 째려보는 눈에 눈물이 촉촉하게 맺혀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사람을 유혹했다.더욱이 도준은 악랄하게 하윤을 달래기 시작했다.“내 비위 맞춰서 마음 돌리려 하는 거 아니었어? 이렇게 좋은 기회를 이용해야지.”하윤은 순간 자기가 상대의 계략에 빠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자기가 도준을 두고 소심한 계략을 세우고 있었는데 오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하윤은 옷을 갈아입었다.그도 그럴 게, 입고 있던 옷이 뼈마디가 선명한 손에 잡혀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기 때문이다.아마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그 모습을 보고 두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지 바로 눈치챘을 거다.두 사람이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에이프런에는 이미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하윤이 마치 서치라이트저럼 눈을 번뜩이며 주시하는 가운데 차 문이 열렸고 안에서 사람 한 명이 걸어내렸다.하지만 그 사람은 하윤이 생각했던 예쁜 여자가 아니라 팔자걸음으로 껄렁하게 걸어오는 문신남이었다.“이게 누구십니까? 존경하는 우리 민 사장님 아닙니까?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 늘 그리웠습니다. 이번에 재가 제대로 대접해 드리죠.”문신남은 입꼬리를 올리며 도준에게 말을 걸면서 눈은 하윤을 살폈다.그 시선에 불편해진 하윤은 옷매무새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아 망신이라도 당하는 건 아닌지 당황해하기 시작했다.그때문에 단아하고 우아하던 얼굴에 오히려 색다른 분위기가 가미되었고 여전히 발그스름한 눈꼬리까지 더해지자 사람의 넋을 빼앗았다.그때 손 하나가 한참 넋을 잃고 있던 장욱의 뒤통수를 가격했다.“뭘 빤히 보고 있어?”고개를 돌리자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있는 도준의 모습이 장욱의 눈에 들어왔다. 그 미소에서 위기감을 느낀 장욱은 얼른 허허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신기해서요.”하지만 하윤이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걸 바로 깨달은 장욱은 하윤에게 감히 무례하게 대할 수 없어 얼른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 장욱입니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하윤은 이내 예의 있는 미소를 지었다.“그냥…….”“내 제수씨야.”도준은 하윤의 말을 끊어버리고는 눈을 둥그렇게 뜬 장욱을 보며 느긋하게 말을 보탰다.“지금은 나랑 교제 중이고.”“?”너무나도 큰 충격에 장욱은 차에 오른 뒤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뒷좌석에 앉은 민도준이 나른한 목소리로 고요함을 깨트렸다.“네 보스는 어디 갔어?”“보스…
별장은 경치를 감상하기 무척 편리했다. 창문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주위의 우거진 숲과 파란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별장의 3층 창문 앞에 서서 멀리 내다보자 아까까지 꾹꾹 눌러두었던 불만도 완전히 사라졌다.“경치 진짜 아름답네요.”권하윤은 넋을 잃은 듯 창밖을 바라봤다.완전히 창문에 바싹 붙어 얼굴을 유리에 대고 경치를 감상하는 하윤의 모습에 민도준의 눈에는 또 장난기가 더해졌다.“그러네.”한창 경치를 감상하고 있을 때 남자의 손이 하윤을 유리창과 팔 사이에 가두었다. 이윽고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하윤을 감싸 안았다.“여기에서 특별한 추억 만들어 줄까?”“싫어요.”하윤은 고개를 뒤로 젖혀 도준의 가슴에 한참 동안 조용히 기대 있더니 나지막하게 감탄했다.“앞으로 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좋겠네요.”“안 될 것도 없지. 경성으로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지내면 되겠네.”하윤은 도준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 투덜거렸다.“거짓말.”“진짜야.”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남자의 목소리는 사람을 홀릴 정도로 고혹적이었다.“그렇게 여기가 좋으면 안 돌아가면 되잖아.”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는 말에 도준 특유의 농담 섞인 말투가 섞이자 하윤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정신을 차렸다. 여긴 별장보다 조금 아름다운 철창일 뿐이지 별장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꿈틀거리던 마음이 다시 평온을 찾자 하윤은 입을 열었다.“경성에 할 일도 많으면서 어떻게 저와 함께 다른 곳에 짱박혀 있을 수 있어요?”더욱이…….오빠를 포함한 식구들이 해원에서 기다리고 있는데.하윤은 말을 채 끝맺지 않았지만 도준은 그 속에 숨은 뜻을 이내 알아챘다.그래서인지 다시 입을 여는 순간 도준의 말에는 웃음기가 조금 지워지고 의미심장한 톤만 남았다.“착하네.”헤아릴 수 없는 분위기 때문에 방금 전까지 따뜻하게 느껴지던 포옹도 족쇄처럼 느껴졌고 자꾸만 느껴지는 불안감에 하윤은 도준의 품 안에서 빙글 돌더니 손으로 목을 끌어안았다.“주위 경치가 예쁜
빙빙 에둘러 말하려 했지만 하윤의 속내는 도준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이에 도준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윤을 쳐다봤다.“또 뭘 영탐하려고?”하윤은 속마음이 들키자 아예 억지를 부리며 어깨로 도준의 탄탄한 몸을 부딪혔다.“에이, 영탐이라니요?”도준은 아직 한참 남은 산길을 힐끗 거리며 무심한 듯 대답했다.“응? 그럼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전 도준 씨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이러는 거잖아요. 예전에 고생했을까 봐.”도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기를 위해 변명하는 하윤을 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어디 만져봐야겠네.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하지 마요.”하윤은 도준의 손을 피하며 다급히 돌계단을 두 층 뛰어올라갔다.도준의 큰 키 때문에 평소에도 까치발을 자주 해야 하는 하윤이었기에 이렇게 두 계단 위에 올라서 상대를 내려다보자 왠지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거리가 멀어지고 높이가 높아져서인지 도준한테서 자주 느끼던 압박감도 산속에서 부는 바람을 따라 날아가 버렸다.때문에 다시 입을 열었을 때 하윤의 목소리에는 우쭐거림이 묻어있었다.“얼른 말해요. 더 위험한 곳이 어디였는데요?”하윤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도준이 그녀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하윤은 두 계단 더 올라가려고 했지만 채 올라가지 못한 채 상대의 팔에 잡혀 뿌리칠 수도 없게 되었다.그 순간 방금전까지 득의양양해하던 기세는 사라지고 이내 애교를 담아 도준의 팔을 흔들었다.“말해 봐요.”그때 도준이 흔들거리는 하윤의 팔을 잡았다.“더 농땡이 부리다가 날이 어두워져.”잡아당겼지만 상대가 움직이지 않자 하윤의 작은 얼굴에는 원망이 가득 더해졌다.도준은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모처럼 하윤의 말에 순종했다.“가면서 얘기해줄게.”“역시 도준 씨밖에 없어요.”비스듬히 비친 햇살 아래 나무 그늘 아래에서 활짝 피어난 하윤의 미소는 마치 이 계절에 없는 꽃 같았다.그리고 그 순간 도준은 깊은 눈동자에 그 예쁜 미소를 담았다.“우리 가요.”하윤
사실 권하윤은 산길을 오르는 사이 민도준의 신비로운 과거를 캐낸 다음 나무에 소원을 빈다는 핑계로 도준에게서 약속을 얻어낼 생각이었는데 그런 생각도 험난한 산길 때문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사실 오기 전부터 장욱은 산길이 험난해 오르기 어렵다고는 했지만 이건 보통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너무 어려웠다.발바닥 크기만 한 계단도 모자라 바람에 흔들대는 흔들다리를 보자 하윤의 가슴은 콩닥콩닥 쉴 새 없이 뛰었다.이에 발걸음도 머뭇거리기 시작했다.“저기, 날도 어두워 월하노인이 있대도 진작에 퇴근했을 것 같은데 우리도 돌아가요.”도준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커다란 손으로 하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가슴이 이렇게 콩알만 해서 어쩌려고 그래?”하윤을 등진 넓은 어깨가 살짝 앞으로 쏠리더니 허리를 활처럼 휜 도준이 입을 열었다.“업혀.”그 순간 잠시 멍해 있던 하윤은 잔뜩 흥분한 듯 당장이라도 도준에게 업히고 싶었지만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저 업고 가려고요?”하윤이 대시 확인하기도 전에 도준은 다리를 굽혀 앉아 하윤을 자기 등에 업었다.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하윤은 남자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그때 도준이 고개를 살짝 돌리며 입을 열었다.“안 그러면? 하윤 씨더러 혼자 올라가라고 하면 월하노인이 아니라 저승사자를 먼저 만날 것 같은데 그럼 어떡해?”하윤은 더 이상 발아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자 잔뜩 긴장했던 몸도 나른해졌다.“좀 예쁘게 말하면 안 돼요?”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선이 높아지니 볼 수 있는 풍경이 더 많아졌다.이윽고 도준의 옆모습을 보니 언제나 오만하고 거칠던 사람이 한껏 자세를 낮춘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하윤은 자기 팔에 꽉 눌린 도준의 어깨를 힐끗 보더니 그의 팔에 들려 있는 자기 다리를 살짝 움직이며 편안한 자세로 기댔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붕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때 하윤이 꿈틀대는 걸 느낀 도준이 입을 열었다.“나를 올라타고 있으니 아주 좋아 죽겠지?”분명 평범한 한마디였지만 도준의 말투 때문인지
발이 땅에 닿을 때 하늘은 마침 노을로 붉게 물들어 나무에 걸린 수많은 붉은 실과 한데 어우러졌다.권하윤은 잔뜩 신이 나서 부업으로 나무 팻말을 판매하는 농민들한테서 팻말을 구입해 자기 이름을 쓰고는 도준에게 건넸다.그 눈빛은 너무 간절하여 입을 열지 않아도 뭔 말을 하려는 건지 설명해 주었다.살짝 교활함을 띠고 있는 눈빛은 어둑해지는 하늘보다 빨리 별빛을 반짝였다.하윤의 얼굴을 따라 내려가 보니 작은 나무 팻말 위에 적힌 이름 세 글자가 눈에 보였다.[이시윤.]하윤은 표정을 감추고 있었지만 속은 조마조마했다.이 작은 팻말은 아무 의미도 없지만 또 하윤에게는 어느 정도 의미가 있었다.왜냐하면 이건 그녀가 내디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남자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자 하윤은 또다시 불쌍한 눈빛을 내보내며 손바닥만 한 나무 팻말을 도준 앞으로 쑥 내밀었다.“여기까지 왔는데 적어요.”하윤도 소리 없는 가랑비가 만물을 적신다는 도리는 알고 있다. 때문에 일부러 이름은 말하지도 않고 그저 속으로만 천지신명께 부탁했다.끝내 도준이 하윤이 건넨 작은 나무 팻말을 받아들었다. 원래도 작은 팻말이 남자의 손안에 있자 귀여울 정도로 작아 보였다.도준은 작은 팻말을 받아쥐고는 입안에서 혀를 굴리며 재밌다는 눈빛으로 하윤을 바라봤다.그러더니 끝내 하윤의 기대에 찬 시선 속에서 붓을 들어 이름을 썼다.도준의 글자체는 주인을 닮아 자유분방했다.하윤이 작은 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소원 팻말을 받아쥐려고 했지만 손이 닿기 전에 도준이 팻말을 뒤로 뺐다.“갖고 싶어?”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묻는 도준의 말에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 팻말을 나무에 걸기만 하면 소원이 없을 테니까.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가 이름을 쓴 나무판자를 훑더니 손은 하윤의 턱을 들어 올렸다.“자기한테 득 되는 것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잊어버린다 이거야? 또 무슨 꿍꿍이지?”붉은 칠을 한 나무 팻말로 들어 올려 확인한 하윤의 얼굴은 잔뜩 찔려하는 모습이었다.하지만 눈 깜짝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