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하윤은 옷을 갈아입었다.그도 그럴 게, 입고 있던 옷이 뼈마디가 선명한 손에 잡혀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기 때문이다.아마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그 모습을 보고 두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지 바로 눈치챘을 거다.두 사람이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에이프런에는 이미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하윤이 마치 서치라이트저럼 눈을 번뜩이며 주시하는 가운데 차 문이 열렸고 안에서 사람 한 명이 걸어내렸다.하지만 그 사람은 하윤이 생각했던 예쁜 여자가 아니라 팔자걸음으로 껄렁하게 걸어오는 문신남이었다.“이게 누구십니까? 존경하는 우리 민 사장님 아닙니까?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 늘 그리웠습니다. 이번에 재가 제대로 대접해 드리죠.”문신남은 입꼬리를 올리며 도준에게 말을 걸면서 눈은 하윤을 살폈다.그 시선에 불편해진 하윤은 옷매무새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아 망신이라도 당하는 건 아닌지 당황해하기 시작했다.그때문에 단아하고 우아하던 얼굴에 오히려 색다른 분위기가 가미되었고 여전히 발그스름한 눈꼬리까지 더해지자 사람의 넋을 빼앗았다.그때 손 하나가 한참 넋을 잃고 있던 장욱의 뒤통수를 가격했다.“뭘 빤히 보고 있어?”고개를 돌리자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있는 도준의 모습이 장욱의 눈에 들어왔다. 그 미소에서 위기감을 느낀 장욱은 얼른 허허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신기해서요.”하지만 하윤이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걸 바로 깨달은 장욱은 하윤에게 감히 무례하게 대할 수 없어 얼른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 장욱입니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하윤은 이내 예의 있는 미소를 지었다.“그냥…….”“내 제수씨야.”도준은 하윤의 말을 끊어버리고는 눈을 둥그렇게 뜬 장욱을 보며 느긋하게 말을 보탰다.“지금은 나랑 교제 중이고.”“?”너무나도 큰 충격에 장욱은 차에 오른 뒤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뒷좌석에 앉은 민도준이 나른한 목소리로 고요함을 깨트렸다.“네 보스는 어디 갔어?”“보스…
별장은 경치를 감상하기 무척 편리했다. 창문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주위의 우거진 숲과 파란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별장의 3층 창문 앞에 서서 멀리 내다보자 아까까지 꾹꾹 눌러두었던 불만도 완전히 사라졌다.“경치 진짜 아름답네요.”권하윤은 넋을 잃은 듯 창밖을 바라봤다.완전히 창문에 바싹 붙어 얼굴을 유리에 대고 경치를 감상하는 하윤의 모습에 민도준의 눈에는 또 장난기가 더해졌다.“그러네.”한창 경치를 감상하고 있을 때 남자의 손이 하윤을 유리창과 팔 사이에 가두었다. 이윽고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하윤을 감싸 안았다.“여기에서 특별한 추억 만들어 줄까?”“싫어요.”하윤은 고개를 뒤로 젖혀 도준의 가슴에 한참 동안 조용히 기대 있더니 나지막하게 감탄했다.“앞으로 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좋겠네요.”“안 될 것도 없지. 경성으로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지내면 되겠네.”하윤은 도준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 투덜거렸다.“거짓말.”“진짜야.”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남자의 목소리는 사람을 홀릴 정도로 고혹적이었다.“그렇게 여기가 좋으면 안 돌아가면 되잖아.”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는 말에 도준 특유의 농담 섞인 말투가 섞이자 하윤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정신을 차렸다. 여긴 별장보다 조금 아름다운 철창일 뿐이지 별장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꿈틀거리던 마음이 다시 평온을 찾자 하윤은 입을 열었다.“경성에 할 일도 많으면서 어떻게 저와 함께 다른 곳에 짱박혀 있을 수 있어요?”더욱이…….오빠를 포함한 식구들이 해원에서 기다리고 있는데.하윤은 말을 채 끝맺지 않았지만 도준은 그 속에 숨은 뜻을 이내 알아챘다.그래서인지 다시 입을 여는 순간 도준의 말에는 웃음기가 조금 지워지고 의미심장한 톤만 남았다.“착하네.”헤아릴 수 없는 분위기 때문에 방금 전까지 따뜻하게 느껴지던 포옹도 족쇄처럼 느껴졌고 자꾸만 느껴지는 불안감에 하윤은 도준의 품 안에서 빙글 돌더니 손으로 목을 끌어안았다.“주위 경치가 예쁜
빙빙 에둘러 말하려 했지만 하윤의 속내는 도준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이에 도준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윤을 쳐다봤다.“또 뭘 영탐하려고?”하윤은 속마음이 들키자 아예 억지를 부리며 어깨로 도준의 탄탄한 몸을 부딪혔다.“에이, 영탐이라니요?”도준은 아직 한참 남은 산길을 힐끗 거리며 무심한 듯 대답했다.“응? 그럼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전 도준 씨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이러는 거잖아요. 예전에 고생했을까 봐.”도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기를 위해 변명하는 하윤을 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어디 만져봐야겠네.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하지 마요.”하윤은 도준의 손을 피하며 다급히 돌계단을 두 층 뛰어올라갔다.도준의 큰 키 때문에 평소에도 까치발을 자주 해야 하는 하윤이었기에 이렇게 두 계단 위에 올라서 상대를 내려다보자 왠지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거리가 멀어지고 높이가 높아져서인지 도준한테서 자주 느끼던 압박감도 산속에서 부는 바람을 따라 날아가 버렸다.때문에 다시 입을 열었을 때 하윤의 목소리에는 우쭐거림이 묻어있었다.“얼른 말해요. 더 위험한 곳이 어디였는데요?”하윤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도준이 그녀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하윤은 두 계단 더 올라가려고 했지만 채 올라가지 못한 채 상대의 팔에 잡혀 뿌리칠 수도 없게 되었다.그 순간 방금전까지 득의양양해하던 기세는 사라지고 이내 애교를 담아 도준의 팔을 흔들었다.“말해 봐요.”그때 도준이 흔들거리는 하윤의 팔을 잡았다.“더 농땡이 부리다가 날이 어두워져.”잡아당겼지만 상대가 움직이지 않자 하윤의 작은 얼굴에는 원망이 가득 더해졌다.도준은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모처럼 하윤의 말에 순종했다.“가면서 얘기해줄게.”“역시 도준 씨밖에 없어요.”비스듬히 비친 햇살 아래 나무 그늘 아래에서 활짝 피어난 하윤의 미소는 마치 이 계절에 없는 꽃 같았다.그리고 그 순간 도준은 깊은 눈동자에 그 예쁜 미소를 담았다.“우리 가요.”하윤
사실 권하윤은 산길을 오르는 사이 민도준의 신비로운 과거를 캐낸 다음 나무에 소원을 빈다는 핑계로 도준에게서 약속을 얻어낼 생각이었는데 그런 생각도 험난한 산길 때문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사실 오기 전부터 장욱은 산길이 험난해 오르기 어렵다고는 했지만 이건 보통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너무 어려웠다.발바닥 크기만 한 계단도 모자라 바람에 흔들대는 흔들다리를 보자 하윤의 가슴은 콩닥콩닥 쉴 새 없이 뛰었다.이에 발걸음도 머뭇거리기 시작했다.“저기, 날도 어두워 월하노인이 있대도 진작에 퇴근했을 것 같은데 우리도 돌아가요.”도준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커다란 손으로 하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가슴이 이렇게 콩알만 해서 어쩌려고 그래?”하윤을 등진 넓은 어깨가 살짝 앞으로 쏠리더니 허리를 활처럼 휜 도준이 입을 열었다.“업혀.”그 순간 잠시 멍해 있던 하윤은 잔뜩 흥분한 듯 당장이라도 도준에게 업히고 싶었지만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저 업고 가려고요?”하윤이 대시 확인하기도 전에 도준은 다리를 굽혀 앉아 하윤을 자기 등에 업었다.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하윤은 남자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그때 도준이 고개를 살짝 돌리며 입을 열었다.“안 그러면? 하윤 씨더러 혼자 올라가라고 하면 월하노인이 아니라 저승사자를 먼저 만날 것 같은데 그럼 어떡해?”하윤은 더 이상 발아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자 잔뜩 긴장했던 몸도 나른해졌다.“좀 예쁘게 말하면 안 돼요?”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선이 높아지니 볼 수 있는 풍경이 더 많아졌다.이윽고 도준의 옆모습을 보니 언제나 오만하고 거칠던 사람이 한껏 자세를 낮춘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하윤은 자기 팔에 꽉 눌린 도준의 어깨를 힐끗 보더니 그의 팔에 들려 있는 자기 다리를 살짝 움직이며 편안한 자세로 기댔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붕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때 하윤이 꿈틀대는 걸 느낀 도준이 입을 열었다.“나를 올라타고 있으니 아주 좋아 죽겠지?”분명 평범한 한마디였지만 도준의 말투 때문인지
발이 땅에 닿을 때 하늘은 마침 노을로 붉게 물들어 나무에 걸린 수많은 붉은 실과 한데 어우러졌다.권하윤은 잔뜩 신이 나서 부업으로 나무 팻말을 판매하는 농민들한테서 팻말을 구입해 자기 이름을 쓰고는 도준에게 건넸다.그 눈빛은 너무 간절하여 입을 열지 않아도 뭔 말을 하려는 건지 설명해 주었다.살짝 교활함을 띠고 있는 눈빛은 어둑해지는 하늘보다 빨리 별빛을 반짝였다.하윤의 얼굴을 따라 내려가 보니 작은 나무 팻말 위에 적힌 이름 세 글자가 눈에 보였다.[이시윤.]하윤은 표정을 감추고 있었지만 속은 조마조마했다.이 작은 팻말은 아무 의미도 없지만 또 하윤에게는 어느 정도 의미가 있었다.왜냐하면 이건 그녀가 내디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남자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자 하윤은 또다시 불쌍한 눈빛을 내보내며 손바닥만 한 나무 팻말을 도준 앞으로 쑥 내밀었다.“여기까지 왔는데 적어요.”하윤도 소리 없는 가랑비가 만물을 적신다는 도리는 알고 있다. 때문에 일부러 이름은 말하지도 않고 그저 속으로만 천지신명께 부탁했다.끝내 도준이 하윤이 건넨 작은 나무 팻말을 받아들었다. 원래도 작은 팻말이 남자의 손안에 있자 귀여울 정도로 작아 보였다.도준은 작은 팻말을 받아쥐고는 입안에서 혀를 굴리며 재밌다는 눈빛으로 하윤을 바라봤다.그러더니 끝내 하윤의 기대에 찬 시선 속에서 붓을 들어 이름을 썼다.도준의 글자체는 주인을 닮아 자유분방했다.하윤이 작은 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소원 팻말을 받아쥐려고 했지만 손이 닿기 전에 도준이 팻말을 뒤로 뺐다.“갖고 싶어?”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묻는 도준의 말에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 팻말을 나무에 걸기만 하면 소원이 없을 테니까.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가 이름을 쓴 나무판자를 훑더니 손은 하윤의 턱을 들어 올렸다.“자기한테 득 되는 것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잊어버린다 이거야? 또 무슨 꿍꿍이지?”붉은 칠을 한 나무 팻말로 들어 올려 확인한 하윤의 얼굴은 잔뜩 찔려하는 모습이었다.하지만 눈 깜짝할
권하윤이 허튼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뜨거운 손바닥이 하윤의 차가운 볼을 어루만졌다.그 뜨거운 온도에 하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잘 생각해야 할 거야. 지금 그 얘기 할 거야?”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민도준이 눈빛과 말투에 섞인 싸늘함을 느끼는 순간 하윤은 상대가 하려는 말이 자기가 원하는 대답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아직 닷새나 있는데 첫날부터 틀어지면 안 돼.’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하윤을 당황하게 했다. 이에 손을 뻗어 도준을 와락 껴안은 뒤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이렇게 중요한 걸 대충 대답하면 안 되죠. 적어도 며칠 정도 생각할 시간을 줘야죠…….”하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심지어 먹이의 유혹을 참지 못 하고 포획 틀 주위를 조심스럽게 어슬렁거리면서 유혹과 안전이라는 어려운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는 새끼 짐승 같았다.도준은 손가락으로 하윤의 머리카락을 쓸며 짙고 어두운 눈으로 하윤을 빤히 바라봤다.그때 함참동안 마음을 추스른 하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쳐들고 손에 나무 팻말을 들고 있는 도준을 바라봤다.“그럼 그건…….”방금 전 상황 때문에 하윤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 하고 도준을 빤히 바라보며 작은 팻말을 처분할 권리를 도준에게 넘겼다.어제까지만 해도 날아갈 것처럼 좋아하던 여자가 잔뜩 겁을 먹은 걸 보자 도준은 끝내 자비를 베풀었다.그는 팻말에 빨간 실을 달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어디에 걸고 싶어?”하윤은 작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한 곳을 가리키고는 이내 손을 거두었다.하지만 두 사람의 이름이 적인 팻말이 자기가 가리킨 나뭇가지에 걸린 걸 보자 마음이 따뜻해졌다.문제는 다음 순간 나뭇가지에 매단 팻말이 탁하고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입꼬리를 말아 올릴 새도 없이 바닥에 떨어진 팻말을 보자 하윤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확인해 보니 빨간 끈이 끊어진 거였다.너무 오랫동안 이곳으로 여행 오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조금 낡은 끈이라 견고하지 않은 모양이었다.하윤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
민도준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권하윤은 고개를 번쩍 쳐들며 듣고 있다는 걸 표시했다.하지만 도준은 이번에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말해주기 시작했다.“몇 년 전 내가 민씨 저택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다른 세력과 한창 경쟁을 벌이고 있었거든. 그때 신변에 있던 스파이가 민용재와 함께 짜고 내가 광산에 있을 때 동굴을 막고 날 죽이려 했거든.”분명 이미 오래된 일이지만 하윤은 듣는 내내 가슴을 졸이며 온 신경을 도준의 말에 집중했다.“그래서요?”“그 광산이 개발되기 전에 사람들이 부르는 다른 이름이 있었거든 저승문이라고. 너무 위험해서 가면 죽을 수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었거든.”모래언덕과 절벽 위에 좀게 난 산길에서 조금이라도 잘못 주행하면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을 수 있다는 묘사에 하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심지어 듣는 내내 너무 긴장한 나머지 도준의 팔을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가해졌다.“그래서요? 그곳에서 도망쳤어요?”“도망?”도준은 안정된 걸음걸이로 산길을 내려가면서 잔인하고 피비린내 나는 목소리로 낮게 읊조렸다.“자기야, 그런 곳에서는 도망쳐도 소용없어. 그냥…….”‘남의 뼈와 피를 밟고 올라갈 수밖에 없어.’도준은 하윤이 너무 긴장하자 그다음 한 마디를 말하지 않았다.하지만 하윤은 듣고 있다가 도준이 갑자기 말을 잇지 않자 재촉했다.“그냥 뭐요?”그때 손이 하윤의 머리를 톡 건드렸다.“밤중에 귀신 이야기 듣다가 잠 못 자면 어쩌려고 그래?”하윤은 콧방귀를 뀌었다.하지만 도준이 말하지 않아도 그다음 상황이 얼마나 위험하고 잔인할지 짐작이 갔다.게다가 그런 위험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을 거다.자기 목을 끌어안고 있던 손이 더 조여오자 도준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랐다.“왜? 마음 아파?”“네.”하윤은 작은 얼굴을 도준의 목덜미에 비벼댔다.“고생했어요.”“말은 참 잘해.”그 말에 하윤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진심이거든요.”낮은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하윤의 달리를 걸치고 있던 손이 야릇하게 하윤
“고개 돌려 봐.”허스키한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더 낮게 들려 보기 드문 온정이 담겨 있었다.하지만 권하윤은 그 말에 불만인 듯 민도준이 했던 말로 대꾸했다.“도준 씨 얼굴에 해가 떠 있는 것도 아닌데 제가 왜 도준 씨를 봐야 하죠?”“지는 법이 없네.”다음 순간 도준은 재잘대는 하윤의 입을 그대로 막아버렸다.머리가 커다란 손에 잡혀 옴짝달싹 못하는 데다 입술까지 눌리자 하윤은 순간 눈을 둥그렇게 떴다.눈앞에 먼 산에 걸린 태양보다 더 뜨거운 남자의 눈이 보인 순간 하윤은 앞으로 해돋이를 볼 때마다 도준을 생각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리고 그 순간 따뜻한 햇빛이 하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이제 남은 날은 4일.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운 하윤은 깜빡 잠이 들어 다시 눈을 떴을 때 머리가 어질해 났다.하지만 시간을 확인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듦과 동시에 표정이 어두워졌다.오후 3시였다.하루를 제대로 보내지도 못했는데 벌써 반나절이 넘게 지나갔다니.‘왜 자 버린 거야?’하윤은 침대에 엎드린 채 속으로 소리쳤다.밖에서 들어온 도준은 마침 침대에 엎드려 발을 퍼덕이는 하윤을 보고 피식 웃으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안 답답해?”하윤은 여전히 팔과 다리를 퍼덕거렸다.“왜 저 깨우지 않았어요?”도준은 버둥대는 하윤의 가는 팔을 잡았다.“밖에 비가 저렇게 많이 오는데 나갔다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려고?”아니나 다를까 커튼을 걷어 보니 밖은 흐린 날씨 때문에 우중충했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방 안에 있은 덕에 비를 맞지는 않았지만 창가에 앉아 고개를 살짝 내밀어 확인하는 사이 하윤은 이미 물에 빠진 생쥐나 다름없어졌다.그때 도준은 시무룩해하는 하윤의 어깨를 손으로 내리눌렀다.“밥 먹으러 가자.”이곳은 도심과 거리가 먼 탓에 배달 음식을 시키는 것도 불편해 장욱이 사다 줬다.야채 볶음을 포함한 몇 가지 음식과 삼계탕이 있었는데 음식이 담백하고 신선했다.하지만 하윤은 많이 먹지 않고 도준을 위해 음식을 집어줬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