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돌려 봐.”허스키한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더 낮게 들려 보기 드문 온정이 담겨 있었다.하지만 권하윤은 그 말에 불만인 듯 민도준이 했던 말로 대꾸했다.“도준 씨 얼굴에 해가 떠 있는 것도 아닌데 제가 왜 도준 씨를 봐야 하죠?”“지는 법이 없네.”다음 순간 도준은 재잘대는 하윤의 입을 그대로 막아버렸다.머리가 커다란 손에 잡혀 옴짝달싹 못하는 데다 입술까지 눌리자 하윤은 순간 눈을 둥그렇게 떴다.눈앞에 먼 산에 걸린 태양보다 더 뜨거운 남자의 눈이 보인 순간 하윤은 앞으로 해돋이를 볼 때마다 도준을 생각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리고 그 순간 따뜻한 햇빛이 하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이제 남은 날은 4일.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운 하윤은 깜빡 잠이 들어 다시 눈을 떴을 때 머리가 어질해 났다.하지만 시간을 확인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듦과 동시에 표정이 어두워졌다.오후 3시였다.하루를 제대로 보내지도 못했는데 벌써 반나절이 넘게 지나갔다니.‘왜 자 버린 거야?’하윤은 침대에 엎드린 채 속으로 소리쳤다.밖에서 들어온 도준은 마침 침대에 엎드려 발을 퍼덕이는 하윤을 보고 피식 웃으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안 답답해?”하윤은 여전히 팔과 다리를 퍼덕거렸다.“왜 저 깨우지 않았어요?”도준은 버둥대는 하윤의 가는 팔을 잡았다.“밖에 비가 저렇게 많이 오는데 나갔다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려고?”아니나 다를까 커튼을 걷어 보니 밖은 흐린 날씨 때문에 우중충했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방 안에 있은 덕에 비를 맞지는 않았지만 창가에 앉아 고개를 살짝 내밀어 확인하는 사이 하윤은 이미 물에 빠진 생쥐나 다름없어졌다.그때 도준은 시무룩해하는 하윤의 어깨를 손으로 내리눌렀다.“밥 먹으러 가자.”이곳은 도심과 거리가 먼 탓에 배달 음식을 시키는 것도 불편해 장욱이 사다 줬다.야채 볶음을 포함한 몇 가지 음식과 삼계탕이 있었는데 음식이 담백하고 신선했다.하지만 하윤은 많이 먹지 않고 도준을 위해 음식을 집어줬다가
한참을 생각한 권하윤은 끝내 공태준에게 전화하기로 결심했다.전에 하윤은 민도준이 자기 핸드폰에 도청 장치를 넣었다고 의심했기에 지금껏 마음대로 사용하지도 못했다.만약 전화를 걸었다가 위치를 노출하면 손해이니.때문에 도준이 식구들에 대한 태도가 어떤지 알아내기 전에 오빠의 위치를 노출하는 건 옳지 못하다.하지만 공태준은 원래부터 관계가 안 좋기에 어찌 되든 상관 없었다.생각을 마친 뒤 하윤은 살금살금 화장실 문을 닫고 수도꼭지를 틀고 전화를 걸었다.거의 전화를 건 찰나 연결되었다.“여보세요?”이렇게 빨리 받는 걸 보니 아마 하윤이 전화를 할 거라는 걸 미리 계산해 둔 모양이다.더욱이 하윤이 가족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아무리 도준을 사랑해도 자기 가족을 그한테 완전히 맡기지는 못한다는 것도 말이다.한참 동안 마음을 정리한 뒤 하윤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나는 왜 찾았는데?”아주 카리스마 있는 물음이었다. 분명 전화를 건 사람은 본인이면서 오히려 상대를 추궁하면서 말이다.하지만 태준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사과를 했다.“미안해요. 방해하려던 의도는 없었는데.”“의도가 없었다고? 귀신을 속이지 그래?”하윤의 분노에 상대는 영향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가볍게 웃었다.그 순간 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공태준도 정상은 아니네.’태준도 자기가 갑작스럽게 웃었다는 걸 알아챘는지 고개를 들어 먼 곳 나무 그늘에 가리워진 별장을 바라봤다.“저 이미 사람을 해외로 보냈어요. 공씨 집안사람이든 민 사장이든 윤이 씨 가족 해칠 수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요. 우리가 해원에서 자리를 잡으면 바로 윤이 씨 가족도 데려와요.”하윤은 이렇듯 확정 짓는 듯한 태준의 말투를 가장 싫어한다. 이건 마치 그녀에게 돌아갈 길조차 남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게 했으니까.하지만 상대가 자기를 도와준다는 것 때문에 하윤은 화를 내지는 못 하고 심호흡을 몇 번 한 후에야 몇 글자를 내뱉었다.“고마워. 다른 할 말 없으면 끊을…….”“강원의 경치는 아름답나요
위에서부터 떨어지는 무거운 시선에 권하윤은 어깨에 무거운 물건이 눌린 듯 저절로 안으로 굽었다.“왜 아무 말도 안 해요?”하윤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눈을 드는 순간 또다시 남자의 차가운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민도준의 시선은 하윤의 얼굴에 고스란히 떨어져 그녀의 눈에서부터 아래로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하윤은 말없이 훑어보기만 하는 도준의 시선을 참지 못해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그러다가 도준이 자기를 꾸짖을 거라고 생각하던 그때, 도준은 손으로 축축하게 젖은 하윤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밖에 나가고 싶다며?”하윤은 도준이 손을 든 순간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도준의 말을 듣고는 다시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 틈새로 상대를 바라봤다.“그런데 밖에 지금 비 오지 않나요?”“그쳤어.”도준의 말을 듣고 밖에 나가보니 역시나 아까까지 주룩주룩 비를 쏟아붓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갰다.하윤은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산속 날씨는 참 빨리 변하네요.”“아무리 빨리 변한들 사람 마음만 할까?”도준의 말에는 약간의 조소가 담겨 있었다.이에 불안해 난 하윤은 고개를 돌려 도준을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 때 환심을 사려는 듯 말을 내뱉었다.“도준 씨에 대한 제 마음은 영원히 변하지 않아요.”“영원히?”도준은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더니 사늘하게 말을 내뱉었다.“난 영원이라는 말은 믿지 않아.”하윤은 순간 멍해져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양옆에 축 드리운 손을 꼭 그러쥐었다 다시 펴더니 숨을 몇 변 들이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고백할 게 있어요.“응.”하윤은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방금…… 저 공태준한테 전화했어요.”하윤은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도준의 낯빛을 살폈다. 그랬더니 역시나 알았다는 듯한 도준의 태도에 방금 화장실에서 했던 짓을 이미 들켰다는 걸 알아차렸다.그 순간 후회되면서 안도감이 들었다.그나마 지금이라도 말했으니 망정이지 그
턱이 꽉 잡힌 탓에 권하윤은 눈앞의 남자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오싹한 웃음에 등골이 서늘해져 설명을 하려 했지만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아무리 봐도 닷새가 지나면 곧바로 깔끔하게 헤어질 것만 같으니 사정하는 게 안 되면 자극적인 방법을 사용해도 괜찮지 않을까?’그런 생각이 들자 하윤은 이내 입을 삐죽거렸다.“도준 씨도 공태준이 좋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지 않으면 왜 계속 저를 해원으로 쫓아내는데…… 아, 아파요…….”턱이 꽉 잡혀 으스러질 것만 같은 고통이 전해지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신음을 냈다.하지만 속으로는 도준의 이런 반응에 몰래 기뻐했다. 불쌍한 척이 안되면 독점욕을 자극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기쁨이 2초도 유지되지 않았을 때 도준이 하윤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꿍꿍이가 있는 듯한 표정을 미처 거두어들이지 못 하고 그대로 드러나자 도준은 코웃음을 쳤다.“아주 발전했네. 자극요법도 쓸 줄 알고?”하윤은 그 말에 이내 모르쇠로 일관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아닌 척하지 마. 내가 하윤 씨를 곁에 두고 가족마저 모셔 왔으면 해서 그러는 거잖아?”도준이 너무 손쉽게 자기 목적을 까발리자 하윤은 순간 난감했다.이윽고 작은 발걸음으로 도준의 앞에 다가가며 낮게 중얼거렸다.“도준 씨한테는 아무것도 숨기지 못하겠네요.”하윤이 분위기를 보며 슬슬 기어오르려 하자 도준은 이내 손을 들어 하윤을 자기 몸에서 떼어냈다.“날 떠받들면 넘어갈 줄 알아? 솔직해져 봐.”여전히 꾸짖는 말투였지만 아까처럼 무섭지는 않았다.이에 하윤은 도준의 허리를 안지 못 하자 팔을 끌어안으며 애교 부렸다.“범인 심문하는 것도 아니고 저 계속 세워둬서 힘들어요.”도준은 불쌍한 척하며 곁눈질로 그의 표정을 살피고 심지어는 껌딱찌처럼 찰싹 달라붙어 애교를 부리는 하윤을 빤히 바라봤다.그때 여전히 도준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하윤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저 다리 아파요. 우리 저기 가서 얘기하면 안 돼요?”
오랫동안 내리쬔 햇볕이 비 때문에 습해진 공기를 건조하게 해주었다.그때 나무 그늘 아래 남자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가주님, 방금 비가 와서 위험합니다. 뭘 원하시는데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이남기가 말려댔지만 소용이 없었다.“괜찮아. 여기서 기다려.”태준은 돌계단을 밟으며 천천히 위로 올라가며 자학하는 듯 권하윤과 민도준이 함께 이 길을 가는 모습을 상상했다.‘두 사람이 함께 가면 혼자 가는 것보다는 훨씬 쉽겠지?’똑같은 나무 아래 다른 사람.태준은 나무 아래에 서서 빗물에 씻긴 나무 팻말들을 빤히 바라봤다.그 순간 나무에 매단 붉은 실들이 붉은 치마로 연상되면서 아름다운 호를 그렸다.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려던 찰나 시선이 가장 특이한 매듭을 한 붉은 실에 멈추더니 표정이 이내 굳어졌다.그 실과 연결된 팻말은 다른 것과는 달리 새것이라는 걸 이내 알 수 있었다.그때 마침 바람이 불어오면서 팻말이 빙글 도는 사이, 그 위에 적힌 이름이 눈앞에서 휙 지나갔다.태준은 자기가 왜 이렇게 놀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곳까지 왔으면 당연히 소원을 빌고 팻말을 거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하지만 특이한 매듭을 한 팻말은 자기에게 닥친 위험도 감지하지 못한 듯 흔들거리며 춤을 추는 듯했다.길고 고운 손가락이 그 팻말에 닿으려는 찰나, 태준의 뒤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저씨, 소원 팻말 하나 구매하실래요?”약 열한 살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여자애가 광주리에 가득 담은 팻말을 들어 올리며 공태준을 바라봤다.팻말을 팔기 위해 여자애는 열심히 소개했다.“하나 사세요. 이거 엄청 효과 있어요. 여기 소원 빌러 오는 커플들이 끊이질 않아요. 그러니 아저씨도 하나 써봐요.”태준은 멈칫하다가 손을 내렸다.“아니야. 아저씨가 같이 이름 쓰고 싶던 상대가 다른 사람이랑 이미 이름 적었거든.”하지만 여자애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태준을 설득했다.“월하노인은 누가 더 진심으로 소원을 비는지 확인하고 소원을 들어준대요. 여기까지 왔으면
이 소식에 하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오빠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됐으니 민재혁이 회복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하지만 민재혁이 다시 돌아오면 민도준에게 불리할까 봐 걱정이었다.하윤의 질문에 도준은 느긋하게 대답했다.“아마 그럴지도.”“그럼 어떡해요?”도준은 잔뜩 걱정하는 하윤의 표정을 보더니 뒤로 몸을 기댔다.“무서워할 거 뭐 있어? 다시 부러트리면 그만이잖아.”“…….”그 말을 들은 하윤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참, 이미 민용재의 죄증을 잡았는데 시영 언니가…… 그때 당한 일을 고백할 필요까진 없지 않나요?”민시영의 일은 홍보팀에서 나서서 잠재우지 않은 탓에 알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떼문에 평판을 중요시 여기는 재벌가의 세상에서 민시영이 받은 비난은 결코 적지 않다.그 말을 들은 도준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내더니 손가락으로 하윤의 이마를 튕겼다.“미리 자백하지 않으면 영상이 흘러나오기를 기다릴까?”하윤은 그제야 뭔가를 알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민용재가 없다 해도 아직 민재혁이 남아 있기에 만약 민시영이 미리 말하지 않으면 그녀를 상대하려는 목적이든 아니면 복수를 하려는 목적이든 그 영상은 세상에 폭로될 게 뻔하다.하지만 민시영이 직접 자기 상처를 대중 앞에 공개했기에 이런 상황에서 영상이 나오면 오히려 죄증밖에 되지 않는다.낡은 것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새것을 세울 수 없다고, 민시영의 성격에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보아하니 시영 언니도 매력적인 껍데기 뒤에 항상 불같은 모습을 숨기고 있었네. 하루 만에 모든 걸 잿더미로 만든 걸 보면.’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한숨을 쉬었다 하는 하윤의 모습에 논담조로 말했다.“보살님의 동정심이 또 발동했나 보네?”하윤은 그 말에 입을 삐죽거렸다.“전 그저 고생했겠다 하고 생각하는 것뿐이에요.”민시영이 애초에 하윤에게 접근했을 때 목적이 있었지만 매번 모든 걸 솔직히 하윤 앞
민시영의 말은 권하윤을 바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게 했다.민시영이 바로 자기 아버지가 가르쳤던 음악원 학생이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윤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더욱이 낯이 익다는 말에 놀랐던 모습을 떠올리자 시간이 참 빨리 지났다는 게 실감 났다.하윤은 도준을 힐끗 살피더니 핸드폰을 몰래 다른 손으로 바꾸어 쥐었다. 민시영의 말 때문에 도준과의 만남도 애초부터 짜놓은 시나리오였다는 걸 들킬까 봐.더욱이 배신했었다는 걸 다시 기억나게 할까 봐…….그때 마침 담배를 피운 도준이 눈썹을 올리며 하윤을 관찰했다. 그 눈길은 마치 왜 멍때리고 있는지 묻는 것 같았다.“듣고 있어요??”갑자기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시영의 목소리에 하윤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네네. 여기 신호가 좀 안 좋네요.”이 말을 내뱉은 뒤 하윤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본론으로 들어갔다.“혹시 요즘 잘 지내나요?”하윤은 상대의 상처를 들추기 싫어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민시영은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혹시 그 스캔들 때문에 충격받았을까 봐 그래요?”시영은 환하게 웃었다.“사실 오히려 괜찮아요. 사람마다 저를 동정의 눈길로 바라보면서 뒤에서 돕는 모습 보는 것도 꽤 흥미진진하니까. 오늘도 제가 제기한 프로젝트가 만장일치로 통과됐거든요.”“게다가 제일 좋은 건 매일 저 불러내서 차 한잔 마시자던 귀부인들이 사라지니까 귓가가 조용하고 편해요. 매번 곤란했거든요. 안 가면 합작 건에 영향을 받을까 봐 걱정이고, 가면 그 귀부인들이 저한테 짝을 소개해 준다고 오지랍을 부려 머리가 아팠었는데 요즘 편해요.”시영의 목소리에서 발랄함이 느껴졌지만 하윤은 오히려 가슴이 쓰라렸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하윤의 목소리가 너무 힘없어 보였는지 시영이 오히려 하윤을 위로하기 시작했다.“저 때문에 속상해할 거 없어요. 이 일에 영향받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그 정도로 심각하지 않아요. 나쁜 일이 일어나기 전에 걱정하면 오히려 점점 나쁜 방향으로 일이 발전
민도준의 팔을 밀어버린 권하윤은 자기의 가는 몸을 다시 이불 속으로 파묻었다.도준은 정수리에서 연기가 나는 듯한 하윤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음, 이번엔 완전히 삐졌나 보네.’‘뭔 인내심이 이렇게 없어? 이틀도 못 버텨?’하윤은 도준이 뭐라 말이라도 할까 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버리자 역시 희망을 품으면 안 됐다고 생각했다.‘됐다, 됐어. 눈에 안 보이면 심란한 것도 덜하지.’이미 짐을 싸 들고 멀리 떠나버릴 궁리를 하고 있는데 옆에서 들리는 나른한 목소리가 하윤을 다시 현실로 끌어들였다.“속으로 나 욕하는 거야?”하윤은 갑자기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지만 이내 원망 섞인 말투로 투덜거렸다.“제가 어떻게 감히 도준 씨를 욕하겠어요? 도준 씨한테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이라 칭찬을 하면 모를까.”그 말이 떨어지자 낮게 깔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자성을 띤 듯한 웃음소리는 어둠 속에서 유난히 사람의 마음을 끌었다.그때 어깨가 잡히더니 힘 있는 손가락이 어깨에서부터 목덜미까지 쓸고 지나가 하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그만 화 풀어. 이리 와봐, 내가 달래줄게.”달래준다고 했으면서 어깨 위에 얹혀진 손은 하윤에게 반항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몸 대부분이 침대 매트리스에 푹 꺼져 들었고 하윤을 달래주겠다던 사람이 하윤을 아래에 가두어 그늘을 드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윤은 상대의 날카로운 눈을 똑똑히 보고는 이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달래주기는 무슨. 제멋대로 하려고 그러는 거면서.”“응, 총명하네.”하윤은 도준의 뻔뻔함에 화가 나 버둥대며 그를 밀어버렸다.“저 그럴 기분 아니니까 저리 비켜요.”하지만 도준은 그렇게 고분고분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었기에 거절하는 하윤의 손을 잡아 손등을 깨물었다.“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어? 어제 내 위에 그렇게 오래 타고 있었으면 오늘은 내가 돌려받아야 할 차례잖아.”“그게 무슨!”하윤은 도준의 악랄함에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