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비밀 결혼 3년 차, 도아린은 늘 남편 배건후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고 독수공방에도 원망이라곤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배건후의 첫사랑이 귀국한 당일, 먼저 이혼 합의서를 건네는 도아린. 하지만 되돌아오는 건 배건후의 코웃음뿐. “왜? 다른 남자 생겼어?” 도아린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 “네. 건후 씨는 날 아내로 인정하지 않아도 다른 남자는 내 남편이 되길 원하더라고요.” 많은 남자의 대시를 받는 도아린을 보고서야 배건후는 뼈저리게 깨닫는다. 도아린은 오래전부터 그의 마음속에 깊게 박힌 아름다운 장미라는 것을.
View More안민아는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말랐다. 한 잔 마시고는 또 한 잔 따라 마셨다. 이번에는 도아린의 말처럼 달콤한 맛이었다. 설마 내가 찻잔을 잘못 집어 든 걸까?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지정된 찻잔을 언니한테 건네줬었는데...생각하면 할수록 무서웠고 점점 식은땀이 나고 잔을 들고 있던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왜 그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간 거야?”도아린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의 이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급히 뒤로 물러나면서 안민아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괜찮아요, 그냥 좀 더워서요.”“그래? 몸이 불편하면 재민 씨한테 말하고 먼저 돌아가자.”도아린이 서재로 통하는 계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아니에요.”급히 도아린의 손을 움켜쥐던 그녀는 재빨리 손을 뺐다. 그녀는 눈 밑의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고 발을 들어 도아린에게 보여주었다.“아침에 정원을 구경하다가 뒤꿈치가 닳았어요. 반창고 좀 가져다줄래요?”도아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애원하는 그녀의 눈빛에 도아린은 결국 하인에게 부탁했다. ...“젠장, 사람을 어떻게 이리 깔볼 수가 있는 거야?”도유준은 문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들어와서 밥도 먹지 못하게 하더니 이제는 남은 음식까지 내놓지 않는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들도 어엿한 강씨 가문의 일원이고 구걸하는 거지가 아닌데 말이다. “그만해. 힘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쓰란 말이야.”강홍련은 화장대 거울을 보며 이마에 반창고를 붙였다.“나중에 또 뭐요? 화장실도 못 가는데 무슨 일을 더 해요?”문을 향해 발을 걷어차고는 그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상처를 처리한 뒤, 강홍련은 뒤돌아서서 도유준을 쳐다보았다. “도아린이 그 일을 알고 있는 한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도아린을 이대로 둘 수는 없어. 아주 처참히 짓밟아서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만들어야 해.”주먹을 불끈 쥔 채 이를 악물던 그가 음흉하고 흉악한 눈빛을 보였다.도아린을 짓밟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 같았지
강씨 가문의 남매는 긴 테이블의 양 끝에 앉았고 손보미는 배지유와 한쪽에, 도아린은 안민아와 한쪽에 앉았다. 그들은 식사를 하면서 가볍게 얘기를 주고받았고 분위기도 꽤 좋은 편이었다. 잠시 후, 하인이 들어와서 강재희의 귓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였다.강재희는 도아린을 힐끔 쳐다보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정신을 잃었으면 그냥 돌려보내요. 문 앞에서 얼쩡거리게 하지 말고.”“네.”한편, 하인에게서 그 일을 듣고도 손보미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올 때 보니까 강홍련 모자가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데 무슨 일인가요?”“새언니한테 미운털이라도 박힌 거예요? 연성에서도 그러더니 해남까지 와서도 날뛰는 건 마찬가지네요.”얼핏 들으면 강홍련 모자를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도아린을 비아냥거리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맞장구를 치는 와중에도 도아린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안민아를 향해 물었다.“새우 먹을래?”갑작스러운 물음에 안민아는 당황한 얼굴이었고 고개를 끄덕이다가는 다시 급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테이블 위에 있는 새우는 한 사람당 한 마리씩이었고 그녀는 이미 한 마리 먹었다.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는 걸 언니가 눈치챈 걸까?“내 거 먹어.”도아린은 자신 앞에 있던 새우를 안민아에게 건네주었고 안민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때, 손보미가 팔꿈치로 배지유를 건드리며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도아린을 쳐다보았다.“몸매가 좋은 건 다 이유가 있다니까. 아린 씨 식단 조절 하나 봐?”“하긴 건후 씨가 식단 조절하니까 그렇지. 건후 씨 식단 같이 먹으면 몸매가 더 좋아질 거야.”손보미는 사람 가슴에 비수를 꽂은 일을 참 잘한다. 그녀의 빈정거림에도 도아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배건후의 얘기만 나오면 손보미는 몸이 근질근질하였다. 문득 생각이 떠오른 도아린이 입을 열었다.“어제 보미 씨가 산 물건들을 건후 씨가 안 받겠다고 하던데. 결국 어떻게 처리했어?”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보미의 손에 힘이
“허튼소리 하지 마. 지금 나와 정국 씨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거야?”바닥에서 일어난 강홍련은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있던 탓에 다리가 저려 비틀거리다가 다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도씨 가문으로 들어온 후, 엄마는 몇 번이나 임신한 적 있었죠. 그러나 뱃속의 아이가 여자아이라는 이유만으로 도정국은 엄마한테 아이를 지우길 강요했었어요. 그러다가 엄마가 지현이를 임신하였고 도정국은 임산부한테 좋다는 이유로 대량의 보양식을 엄마한테 먹게 하였고 결국 뱃속의 아이가 보통 아이들보다 훨씬 많이 컸었죠.”“출산 당일, 제왕절개를 해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에도 도정국은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거부하였고 결국 최적의 치료 시간을 놓친 탓에 엄마는 양수색전증으로 사망하게 되었어요.”도아린은 싸늘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그녀의 말에 강홍련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모든 것들을 당신이 도정국한테 시킨 거죠?”강홍련이 아니라면 남자인 도정국이 어찌 아이를 낳는 위험에 대해 이리 잘 알 수가 있었겠는가? 두 사람은 정은채를 죽이고 정은채의 재산을 가로챈 것도 모자라 정은채의 하나뿐인 아들마저 잘 키우려 하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지던 강홍련은 계단 모서리에 이마를 부딪혔고 순식간에 피가 흘러나왔다. 힘겹게 일어서는데 핏방울이 얼굴을 타고 눈 속으로 흘러 들어가 참기 힘들 정도로 따끔거렸다.이때, 도유준이 달려와 그녀를 부축하면서 도아린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무슨 증거가 있어 이러는 거야?”도아린의 차가운 시선이 강홍련에게서 도유준의 얼굴로 향했다. 그녀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검은 눈동자를 치켜들고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난다고 하더니. 지현의 다리가 어떻게 부러졌는지 지현이가 왜 그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지 도유준 넌 잘 알고 있잖아.”손에 힘이 풀리는 탓에 강홍련은 또 바닥에 주저앉았고 계단에 머리를 부딪히게 되었다. 오른쪽과 왼쪽 이마에 상처가 생겼고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문으로 가정부들이 드나들면서 강씨 가문의 전체 사람들이 그들의 추태를 보게 되었고 앞으로 강씨 가문에는 그들의 지위가 사라지게 된 셈이다도아린이 아버지가 공개 사과를 하게 억지를 부리지 않을 수만 있다면 강홍련 같은 먼 친척 한 명쯤은 체면이 깎여도 상관없었다.강씨 가문의 뒤뜰에는 아카시아 꽃을 넓게 심었고 작은 꽃봉오리가 꽃을 피워 공기 속에는 꽃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안민아는 일부러 늦게 걸으면서 셀카를 몇 장 찍었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때 위치까지 설정했다.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도아린과 강재민은 멀리 가 있었다.도아린은 오늘 옅은 색의 몸에 딱 붙는 셔츠에 진한 색의 청바지를 입었고 가방을 가로 메고 있었다. 뒤에서 봤을 때 허리가 유독 가늘어 보였고 힙업이 돋보였다.안민아는 자신의 허리를 만져보았다. 그녀는 도아린보다 살집이 적었지만, 몸매가 좋지는 않았다.남자가 아닌 자신이 봐도 도아린의 몸매가 탐이 났다.강재민은 안민아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사촌 동생은 아직 마음을 접지 않았나 봐요.”도아린은 허리를 숙여 꽃을 하나 따고는 천천히 말했다.“일을 좀 깔끔하게 처리해요. 저를 방패막이로 삼지 말고 재희 씨를 오해하게 만들지도 말아요. 우리는 함께 할 수 없어요.”강재민은 그녀의 손에서 꽃을 건네받고는 중지로 그것을 으깼다.“이혼 숙려 기간이 곧 끝나가요. 아린 씨도 깔끔하게 처리했으면 좋겠어요.”“...”도아린은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강재민은 눈썹 뼈가 튀어나왔고 눈이 깊었는데 어머니의 유전이었다.입체적인 오관은 도도한 느낌을 주었고 도아린을 쳐다볼 때 더 단호한 눈빛이었다.“엠파이어 빌딩의 고객 자료는 배지유가 준 거죠.”도아린이 말했다.“재민 씨는 진작에 배건후를 노렸던 거예요. 일부러 저에게 관심이 많은 척하는 건 배건후의 화를 돋우는 수단일 뿐이죠. 건후 씨의 사업을 빼앗고 여자까지 빼앗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다 충격을 주려는 거죠.”강재민은 한참 침묵하더니 갑자
“도아린, 강씨 가문의 사람들이 말하는데 끼어들지 마!”강홍련은 화를 냈다. 당장 주머니에 들어올 돈이 날아 나서는 절대 안 된다.“네가 도정국을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가씨가 준 돈도 손을 대지 마!”강홍련은 당당하게 말했다.“나는 정국 씨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지만, 아들을 낳아줬고 십몇 년을 함께 살았기에 사실혼 사이야. 아가씨가 준 돈은 반드시 내가 관리해야 해!”도아린은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에 강홍련은 소름이 끼쳤다.그녀는 못마땅하게 도아린을 째려보고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강홍련을 쳐다보았다.“아가씨, 정국 씨는 도아린의 함정에 빠져 빚을 지게 된 거예요. 정국 씨에게 새로 시작할 기회를 준다면 반드시 아가씨의 은혜에 보답할 거예요!”강재희는 강홍련이 멍청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방금 자신이 도아린의 의견을 묻는 것을 못 봤다는 말인가? 강홍련은 강재희가 불쾌해하는 것이 도아린 때문인 줄 알고 더 의기양양해서 말했다.“도아린, 진씨 가문에서는 네가 허영에 눈이 먼 속물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그때가 돼서 진씨 가문에서 쫓겨난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찾아올 생각은 하지 마!”강재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도아린을 보며 물었다.“합의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도아린은 찻잔을 들었다. 강재희는 한참을 기다려도 도아린이 대답하지 않자 불쾌함이 더 증가했다.체면을 봐주니까 더 허세를 부리고 있는 모양이다.“강씨 가문 사람들이 얘기하고 있는데 도씨 성을 가진 사람한테 물어서 뭐해?”강재민이 느긋하게 말했다.강재희는 강재민을 흘겨보고는 강홍련을 쳐다보았다.“당신과 도정국 씨가 사실혼 관계라면 그 사람의 채무도 두 사람의 공동채무가 되는 거죠. 당신과 도정국 씨가 함께 갚아요.”강홍련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아가씨, 방금 한 얘기는...”“제가 도아린 씨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끼어들지 마세요.”강홍련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그들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이었지만 강재희가 왜 도아린을 감
강재희는 이 일이 도아린과 연관되었다고 믿지 않았다. 그녀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하지만 주주총회가 끝나고 강재희는 출처가 없는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바로 강태식이 공개적으로 아현에게 사과하라는 내용이었다.아버지는 명망이 높은 인물인데 어떻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할 수 있겠는가!그것도 도아린처럼 명성도 없는 사람에게 사과하게 된다면 훌륭한 제자들의 체면은 어떻게 되겠는가 말이다.강재희는 오해가 있을까 봐 강재민에게 도아린을 집으로 부르라고 해서 탐색해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도아린일 줄은 몰랐다.강재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가 한참이 지나 헛웃음을 터뜨렸다.“도아린 씨, 친구가 많으면 그만큼 가능성도 커지는 겁니다. 그렇게 몰아세울 필요는 없잖아요.”그녀의 시선은 안민아에게로 향했다.“양보하겠다고 하면 도유준한테 안민아 씨에게 고개 숙여 사죄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도아린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누나, 도유준을 어떻게 아버지랑 비교하는 거야.”강재민은 주전자를 들어 강재희에게 물을 따랐다.“아니면 내가 사과의 뜻으로 장가를 갈게.”“강재민!”강재희가 소리쳤다.“재민 씨!”안민아가 소리쳤다.강재희는 안민아를 흘겨보았다. 여기는 안민아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배씨 가문에 그 땅을 뺏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네가 나 몰래 땅을 손에 넣은 일에 대해서도 아직 너한테 책임을 묻지 않았어!”강재민은 소파에 기대앉아 몸을 도아린 쪽으로 기울며 느긋하게 말했다.“누나가 약속한 거지, 내가 한 게 아니야.”“너는 강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야?”“데릴사위일 수도 있지.”강재희는 이를 악물고 원수를 보듯 도아린을 노려보았다.이렇게 훌륭한 자신의 동생이 결혼을 한번 했던 여자의 데릴사위로 들어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도대체 자신이 미친 건지, 강재민이 미친 건지 모를 일이다. “재희 씨, 재민 씨 돌아오셨어요.”강홍련이 아들을 데리고 들어오면서 난리를 피우려던 강재희를 저지하게 되었다.강재
안민아는 우물쭈물하며 말하지 못했다. 그녀는 오늘 반드시 도아린을 강씨 가문에 데리고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니면 일이 복잡해진다.방안에서 벨 소리가 울렸고 도아린은 책상으로 가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받았다.안민아도 따라 들어갔고 불안하게 손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이유로든 먼저 도아린을 데리고 나가야 했다.“그래요, 알겠어요.”도아린은 전화를 끊고 불안한 모습인 안민아에게 말했다.“강재민 씨가 돌아왔대.”안민아는 멍하니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 기대와 환희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재민 씨가 우리를 초청했어요?”“나를 초청했어.”도아린은 소파에서 가방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만약 네가 반드시 따라와야겠다면 나도 거절할 수는 없어.”안민아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도아린의 일로 강씨 가문에 갈 수 있다면 목적은 도달한 셈이었다.강씨 가문으로 가는 길에 도아린은 계속 문자를 보냈다.안민아는 도아린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아예 없었다. 그녀는 도아린이 강재민과 메시지를 나누는지 보고 싶었지만, 도아린의 핸드폰에는 사생활 보호 필름이 붙어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강재민은 사전에 집안의 가정부에게 당부했기에 진씨 가문의 차가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이 열렸다.차창 너머로 강재민이 가정부에게 무슨 얘기를 하는 게 보였다.가정부는 고개를 숙인 채 당황한 표정이었다.강재민은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손짓을 했고 가정부는 뒤돌아 자리를 떴다.그는 차로 걸어와서 도아린 쪽의 문을 열었다.“제가 데리러 갔어도 됐었는데요.”“귀찮게 뭐 하러요. 이따가 저도 볼일이 있어서 제 차를 갖고 오는 게 더 편해요.”도아린이 차에서 내린 뒤, 강재민은 차 문을 닫고 안내하는 손짓을 했다. 마치 강씨 가문에 온 손님은 도아린 한 명인 것처럼 행동했다.도아린은 안민아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재민 씨, 안녕하세요.”안민아는 먼저 인사를 건넸고 그를 쳐다보는 눈빛에는 사모하는 마음이 가득했다.강재민은 예의상
“지유야, 나는 너를 여동생처럼 생각하니 보살피는 건 당연한 일이야. 뭘 하고 싶으면 직접 말해도 돼. 민망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오빠는 괜찮다고 해도 내가 불편해!”배지유는 짜증 내며 얘기했다.“오빠가 나를 안아서 이리저리 옮기는데 내가 앞으로 어떻게 시집을 갈 수 있겠어!”성대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배지유는 손보미한테 나쁜 물이 들었다.“지유야, 내 말 좀 들어봐...”“안 들을래. 나 피곤해. 쉬고 싶어!”배지유는 그를 밀어냈다.“여기서 나한테 매달리지 말고 얼른 가서 성씨 가문을 다시 일으킬 생각이나 해. 만약 파산한다면 오빠는 빈털터리가 되잖아!”성대호의 눈빛에는 증오의 빛이 서렸다.그는 배지유를 위해 연성을 떠났고 가문에게 등을 돌렸다.결렬한 것은 집안의 일이기 때문에 성씨 가문은 대외적으로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하여 예전에 성씨 가문과 협력했던 사람들이 성대호의 체면을 봐주고 있었다.그러므로 성대호는 배지유를 보살피면서도 조금씩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만약 성씨 가문이 정말 파산한다면 그는 빈털터리가 될 것이고 배지유도 그를 외면할 것이다.“지유야, 걱정하지 마!”성대호는 힘을 주어 배지유의 손을 잡았고 확신에 찬 눈빛으로 얘기했다.“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거야!”배지유는 마음속으로 무척 불쾌해했다.그때 오빠의 도움이 없었다면 성씨 가문은 절대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지금 오빠에게 버림받은 마당에 그는 무슨 수로 성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좋은 말로 무마했다.“그래. 얼른 가서 일으켜 세워. 오빠가 성과를 낸다면 아빠랑 오빠도 오빠를 다시 보게 될 거야!”배지유는 성대호와 함께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래도 좋은 소리를 했다.성대호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그 길로 연성으로 돌아갔다....이튿날 아침, 안민아는 일부러 도아린의 앞에서 알짱거렸다.도아린은 그게 눈에 보이지 않는 듯 조깅을 하고 뒷마당에서 넓은 곳을 찾아 운동했다.
“제가 왜 안 그러고 싶겠어요! 지금 마음으로는 도아린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어요!”배지유는 울면서 곁에 있는 이불을 내리쳤고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납작해진 이불을 쳐다보았다.“저는 지금 생리현상도 누군가가 보살펴주지 않으면 스스로 못하는데 어떻게 복수를 할 수 있겠어요! 다 성대호 때문이에요. 쓰레기 같은 놈, 저를 돕지 못할망정 저를 이렇게까지 망가뜨려 놨어요!”“...”성대호가 문밖에서 듣고 있었다.그는 훔쳐 들을 생각이 없었지만, 배지유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담뱃불을 붙이려던 성대호는 부들부들 떨면서 담배를 부러뜨려 버렸다. 손보미는 배지유의 멀쩡한 다리를 다독였다.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목소리를 깔고 얘기했다.“남자는 네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나무가 아니라 네가 위로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야. 사다리가 부실하다면 바꾸면 돼.”배지유는 점점 울음을 멈췄고 빨갛게 부은 눈에는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손보미가 말했다.“나랑 네 오빠의 혼사는 강씨 가문에서 추진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성사되지 않았어. 차라리 강씨 가문에 신경을 많이 써. 밖에 있는 저 쓸데없는 놈은 버리고.”배지유는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하지만 배지유는 또 생각에 잠겼다가 움츠러든 표정을 했다.“만약 제 다리가 아직 멀쩡하다면 반드시 강씨 가문 도련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지금... 그 사람은 아마 저를 보고 싶지도 않을 거예요.”“강씨 가문에는 남자가 또 있어.”손보미는 강홍련 모자와 강씨 가문의 관계를 얘기했고 배지유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안돼요! 제가 어떻게 도아린의 사생아 동생한테 좋은 일을 시키는 꼴을 봐요!”손보미는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작게 얘기를 했고 배지유는 분노하던 표정이 점차 사그라지더니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잠시 후, 배지유는 이불을 움켜쥐고 사악한 눈빛을 했다.“보미 언니,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사람은 언니밖에 없어요!”“바보야, 나는 네 새언니야. 내가 너를 생각해주지 않으면
“민재야, 도와줘...”“한 번 더 말해 봐!”도아린은 누군가에게 머리를 잡혀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뒤에 있는 남자의 싸늘한 이목구비를 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건후 씨? 건후 씨가 왜 여기에...”남자는 안개가 자욱한 유리 벽에 도아린을 밀어붙이더니 그녀의 아래턱을 잡고 눈을 마주쳤다.“여긴 내 방이야, 누구이길 바라는데? 응?”도아린이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이거 놔요. 놓으라고요...”“날 건드렸으면 끝까지 버텨야지.”남자는 도아린의 허리를 감싸 안고 마구 더듬었다.“으악...”쿵!도아린은 차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꿈에서 깼다.앞에 교통사고가 일어났는데 버스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길가의 배수구에 빠지면서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버스 안에는 온통 욕하는 사람들과 우는 사람들뿐이라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3년 전 그날 밤의 사고에 비하면 이번 사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아린은 그 사고만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날 밤 그녀는 배건후 때문에 병원에 가게 되었고 그러다가 배씨 가문 사모님이 되어 위기들을 해결하긴 했지만...“죽고 싶어요? 얼른 밖으로 기어 나와요!”누군가의 재촉에 도아린은 이미 망가진 케이크를 버리고 선루프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구급차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도아린은 구급차가 멀지 않은 곳의 아우디 밴 옆에 멈춰 있는 걸 발견했다.의료진들이 구급차에서 내려 차 안의 다친 환자를 부축했다. 그때 훤칠한 키의 한 남자가 상체를 숙이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여자를 안고 나온 후 구급차에 태웠다.찰나였지만 도아린은 그 남자가 바로 결혼한 지 3년 된 남편이라는 걸 알아봤다. 그리고 남편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는 늘 잊지 못했던 그의 첫사랑이었다. 그는 유학 간 그녀를 줄곧 잊지 못했다.도아린은 팔이 아픈 것도 참아가며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휴대전화 너머로 남자의 싸늘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용건만 간단히.”“오늘 집에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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