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비밀 결혼 3년 차, 도아린은 늘 남편 배건후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고 독수공방에도 원망이라곤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배건후의 첫사랑이 귀국한 당일, 먼저 이혼 합의서를 건네는 도아린. 하지만 되돌아오는 건 배건후의 코웃음뿐. “왜? 다른 남자 생겼어?” 도아린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 “네. 건후 씨는 날 아내로 인정하지 않아도 다른 남자는 내 남편이 되길 원하더라고요.” 많은 남자의 대시를 받는 도아린을 보고서야 배건후는 뼈저리게 깨닫는다. 도아린은 오래전부터 그의 마음속에 깊게 박힌 아름다운 장미라는 것을.
View More배건후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그의 초점이 도아린의 얼굴에 맞춰졌다가 이내 흐려졌다.복도에서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배건후의 눈빛이 점차 맑아졌다.도아린은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고 가볍게 그의 등을 두드렸다.“다 지나갔어요. 재희 씨가 겪은 일은 그저 예기치 못한 사고였을 뿐이에요.”배건후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도아린이 그의 손을 꼭 잡았다.“가요. 태희 씨 아이 보러.”배건후는 맞잡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도아린이 살짝 힘을 줘서 그를 안으로 이끌었다.민호준은 그들을 보자마자 눈물을 머금고 다가와 말했다.“감사합니다, 배 대표님. 아린 씨도 감사해요. 제 아내와 딸 모두 무사하대요! 전...”그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얼굴을 감싸 쥐고 울음을 터뜨릴 뿐이었다.“태희 씨는 아주 강한 분이세요.”도아린이 위로를 건넸다.“태희 씨가 먹을 수 있는 거라도 준비해 놓읍시다.”“네.”민호준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이미 산후조리원에 연락해 두었어요. 준비가 다 되면 곧 데리러 올 거예요.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산후조리원에서 유태희를 데려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도아린과 배건후는 자리를 떠났다.“운전할 수 있겠어요? 제가 일북을 시켜서 데려다주라고 할까요?”눈치가 빠른 일북이 일남을 꼬집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일남은 아마 반대 의견을 냈을 것이었다.배건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일북과 일남의 표정을 살펴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건후 씨 좀 데려다주고 올게. 물어볼 게 좀 있어서 말이야.”배건후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차 열쇠를 도아린에게 건네며 조수석에 앉았다.할 말이 있다고 했지만 도아린은 차 안에서 내내 침묵을 유지했다.거의 도착했을 때, 배건후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으며왠지 모를 쓰라린 감정을 담고 있었다.“내가 재희 씨를 찾았을 때 말이야. 재희 씨는 창고에 있었어.”그는 두 손을
“그럴 필요 없어요.”배건후는 몸을 돌려 차 키를 집어 들고는 빠르게 차에 시동을 걸었다.유태희는 도아린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저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 좀 무서워서...”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다시 진통이 시작되었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았다.도아린은 아무 말도 없이 뒷좌석에 올랐다.일북이 그녀의 지시를 기다리자 도아린은 서류 가방을 그에게 넘기며 뒤따라오라고 했다. 혹시라도 무언가 들어올려야 할 일이 생기면 사람이 많을수록 편하니까 말이다.민호준은 원래 아내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그녀가 도아린에게 더 의지하는 것 같았기에 조수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배 대표님, 이 은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오늘 일은 제가 꼭 기억하고 있을게요!”“별일 아닙니다.”배건후는 핸들을 꽉 잡으며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민호준은 병원에 전화를 걸어 미리 조치를 취했다. 그들이 예약한 병원에서는 산후조리까지 포함된 서비스를 제공했기에 연락을 받은 후, 수술실과 조리원 모두 즉시 준비 태세를 갖췄다.유태희가 너무 긴장하지 않도록 도아린은 그녀의 허리를 마사지해 주며 가벼운 대화를 이어갔다.민호준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아내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고 두 눈엔 걱정과 불안이 가득했다.배건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도아린은 제일 긴장하고 있는 건 배건후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차가 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의료진이 숙련된 손길로 유태희를 눕히고 수술실로 향했다.한 시간 정도 지나자 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오더니 말했다.“제왕절개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그 말을 들은 민호준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그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사인을 하는 손마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그는 마치 뜨거운 불가마 위 개미처럼 제자리에서 맴돌았다.주차를 하러 간 배건후가 올라오지 않자 도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문 너머로 한쪽에 기대어 서 있는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도아린은 조심스레 문을 밀었다.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밀어냈다.“하경 씨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해도 제가 건후 씨한테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예요. 영안실에 있는 건 분명 육하경이에요. 그 문신, 반은 제가 제 손으로 새긴 거니까요.”시간이 촉박해서 조작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어쩌면 육하경이 정말 미리 계획을 세우고 죽은 척 사라지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육하경을 돕던 사람이 그를 배신하고 그 계획을 이용해 육하경을 완전히 보내버렸을지도 모른다.배건후는 도아린의 눈에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어냈다.“육하경이 죽었는지 아닌지는 경찰이 조사할 거야. 나는 단지 네가 남의 잘못을 스스로 짊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야. 네 선택은 언제나 옳았어.”도아린은 순간 코끝이 찡했다.율이의 죽음은 그녀에게 놓고 말해서 평생 짐으로 될만한 일이었다.‘그때 율이의 아버지와 양육권을 두고 다퉜더라면 괜찮았을까? 비록 이길 가능성은 적다고 해도 시도라도 해봤다면 율이가 죽는 걸 막을 수 있었을까? 그때 경찰서에서 율이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눴더라면 육하경의 실체를 밝혀낼 수 있었을까?’하지만 아무리 가설을 한다고 해도 이미 일어난 일이었기에 달라지는 건 없었다.도아린은 갑자기 피로감이 밀려오는 듯했다. 요즘 모건 그룹과 JS 픽처스의 업무로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제대로 된 잠을 잔 적이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외로움과 털어놓을 곳 없는 이 막막함은 늪과 같이 그녀를 점점 깊은 곳으로 끌어당겼다. 밤이 깊어질수록 이런 복잡한 감정의 응어리들은 그녀를 괴롭히기만 했다.도아린은 이제 배건후를 완전히 놓은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해준 위로는 그 어떤 말보다도 효과가 있었다. 약간 서러워질 정도로 말이다.배건후는 그녀의 감정이 조금 누그러진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다독이려 했다.“아가씨!”한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일북이 아래층에서 소리쳤다.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도아린은 재빨리 배건후의 손을 피했다.
사진도 초등학교가 설립된 후 1기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거기에는 상세한 장부 기록, 기부금의 사용처, 고용된 교사들의 자격,증까지 포함되어 있었다.“이건...”도아린이 배건후를 올려다보았다.배건후는 그녀의 손에서 사진 한 장을 빼앗았다. 그 사진에는 모든 교사와 학생의 이름뿐만 아니라 사진을 찍은 날짜까지 적혀 있었다.“우리가 결혼하고 나서 내가 처음으로 기부한 초등학교야.”도아린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이 더 크게 떠졌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건후 씨가 기부한 학교라고? 하경 씨가 한 게 아니라?’배건후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고 그 말은 도아린을 더욱 충격에 빠뜨렸다.“우리가 결혼한 3년 동안 난 매번 결혼기념일마다 두 곳의 학교를 기부를 했어. 모든 돈의 출처도 기록되다 있거든. 믿기지 않으면 직접 가서 확인해 봐.”영수증을 쥐고 있는 도아린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했다.“하지만 하경 씨가...”“하경이는 워낙 오랫동안 남쪽 변방 지역을 돌아다녀서 교육 자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 이 초등학교도 하경이가 도움을 줘서 설립된 거야.”배건후의 진지한 표정을 보면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한 손으로 화장대를 짚고 다른 손으로 학교의 영수증을 꼭 쥐었다.한 장은 원본 영수증 다른 한 장은 복사본이었다.아래쪽에는 그의 사인이 적혀 있었는데 ‘배건후’라는 세 글자는 아주 세련되고 힘 있는 필체로 쓰여 있었다.도아린은 급히 다른 영수증들을 찾아 시간 순서대로 나열했다. 확인한 결과, 배건후가 말한 대로 매년 기부한 날짜는 모두 그들의 결혼기념일이었다.그들의 결혼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그들이 언제 혼인신고를 했는지 몰랐다.배건후는 도아린에게서 영수증을 빼앗아 다시 꺼내 놓고 비교했다.육하경이 초등학교에 기부한 날짜는 지난번 경매 행사 때였다. 그가 직접 나서서 기부한 것이 아니라서 사인도 없었다.전국에 있는 7개의 아린 초등학교가 있었다. 두 사람이 결혼을
배건후가 차에 타려 했을 때, 일북이 시간을 맞춰 도착했다.“아가씨!”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일남이 뛰어내리더니 앞으로 달려갔다.차는 배건후의 차 앞 1미터 거리에서 멈췄다.도아린이 재빨리 차에서 내렸고 배건후도 따라서 차에서 내렸다.“아린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그냥 널 데리고 가서 몇 가지 보여주려고 그런 거야.”도아린은 일남 뒤에 서서 짧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갑자기 변한 배건후의 태도에 그녀의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혹시라도 그녀가 가지 않으려 할까 봐 배건후가 다시 말했다.“아린 초등학교에 관한 거야.”도아린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약간 떨리는 손을 꼭 쥐었다.“길 안내해요. 전 제 차로 갈게요.”일남은 도아린이 차로 돌아가는 걸 확인한 후에야 빠르게 조수석에 올랐다.일북은 뒤로 후진하며 배건후에게 공간을 내줬다.배건후의 예상대로는 아니었지만 도아린이 함께 가기로 한 것만으로도 최선의 결과였다. 그는 차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저택을 빠져나갔고 일북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갔다.“아가씨, 괜찮으세요?”일남이 뒤돌아서 뮫자 도아린은 고개를 저었다.순간, 그녀는 배건후가 또다시 예전처럼 미쳐 날뛸까 봐 겁이 났다.“모건 그룹은 배건후 씨가 자진해서 아가씨께 넘긴 거예요.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배건후 씨가 입원해 있는 동안 모건 그룹은 이미 난장판이 됐을 거예요. 아가씨는 배건후 씨에게 빚진 게 없어요. 그냥 배씨 가문과 완전히 연을 끊을 수는 없나요?”일남이 억울해하며 말했다.일북이 일남를 한번 흘겨보며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일남은 입술을 깨물고 분한 듯 창밖을 바라봤다.“난 건후 씨에게 빚졌다고 생각하지 않아.”도아린이 천천히 말했다.“어머님이 말 너무 진심으로 대해 주셔. 그 마음을 난 무시할 수는 없어. 건후 씨가 회사에 들어오고 싶어 한다고 해도 상관없어. 불이익을 받을 각오만 하고 들어온다면 말이지.”“뭐라고요? 배건후 씨가 회사에 들어오려 한다고요?”일남은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아니에요. 오늘은 기온이 떨어져서 이만 가볼게요. 제가 계속 안 가면 어머님께서 계속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을 거니까요.”그녀가 신발을 갈아신자 배건후도 따라서 신발을 갈아신었다. 그는 문을 나서며 도아린을 바래다주겠다고 말했다.“배건후 씨, 그만 포기하세요. 저희는 원래 사이로 돌아갈 수 없어요.”도아린이 차 옆에 멈춰 서서 진지하게 말했다.배건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아니, 돌아갈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도아린은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그날 배에서 도아린의 스카프가 바람에 날려 배건후가 있던 배로 넘어갔었다. 그녀는 배건후가 자기 목에 있던 흔적을 봤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말이다.그 어떤 남자도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와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었다.비록 도아린은 자신이 육하경과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고 확신했지만 그런 흔적은 누구라도 오해하기 마련이었다.배건후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엄격할 뿐만 아니라 상대도 완벽하길 바랐다.‘그런 사람이 내 목에 있던 흔적을 신경 쓰지 않을 리 없지.’도아린이 화해할 생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있다고 해도 그날 일은 배건후의 마음에 가시로 남아 시간이 지나도 갈등이 생길 것이었다.도아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배건후는 이미 그녀의 의도를 이해한 듯했다.날카로운 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고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넌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 너한테 상처를 입힌 사람이 잘못한 거지.”도아린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배건후의 태도가 예상했던 것과 달랐던 것이다.그녀는 배건후가 차 문을 세게 내리치며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추궁이라도 할 줄 알았다. 아니면 참는다고 하더라도 얼굴에는 분노를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 사이로 죄책감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한참 지나서야 배건후가 입을 열었다.“만
“아린아, 그냥 평범한 직원이라고 생각하고 잘해주지 마.”주현정은 겉으로 이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들이었으니 말이다.보던 프로그램이 끝나기도 전에 유민정이 와서 밥을 먹으라고 했다. 식탁 위에는 다양한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배건후는 장갑을 낀 채 커다란 냄비를 가져왔다.“매운 거 좋아하잖아. 맛 좀 봐.”그는 냄비를 테이블 가운데에 올려놓았다.이틀 동안 회사 정리로 정신이 없었던 도아린은 매운 음식이 먹고 싶었지만 밥을 제대로 먹을 시간마저 없었다. 눈앞에 좋아하는 음식이 가득 차려지자 그녀는 군침을 꿀꺽 삼켰다.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주현정을 위해 유민정은 따로 다른 음식을 준비했다.“닭백숙인데 도련님께서 직접 만드신 거예요.”유민정은 국 한 그릇을 떠서 주현정 앞에 놓았다.주현정은 그대로 도아린에게 건네고 유민정에게 한 그릇 더 뜨라고 했다.“아린이도 맛 좀 봐.”“감사합니다.”숟가락을 들어 국을 한 모금 마신 도아린은 눈이 번쩍 뜨였다.배건후는 생활력이 없는 게 아니라 단지 누군가의 보살핌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었다.유민정은 도아린의 생각을 읽고 설명했다.“도련님께서 퇴원하시고 요리를 배우셨거든요. 그 과정에서 태워 먹은 닭만 해도 양계장 하나는 될걸요?”배건후의 얼굴에 잠시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그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도아린을 바라보며 맛 평가를 기다렸다.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괜찮네요.”괜찮다는 평가에 배건후는 살짝 실망한 듯했지만 도아린이 밥을 먹으러 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더 연습할게.”그는 공용 젓가락을 들었다.“고기부터 먹을래?”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그녀 쪽으로 냄비를 밀어줬다. 매운 육수가 끓기 시작하면서 온 방 안에 진한 향이 퍼졌다.주현정은 참지 못하고 기침을 했다. 그녀는 저녁을 별로 많이 먹지 않았다. 국 한 그릇과 채소 몇 젓가락을 먹고는 젓가락을 내려놨다.“다 아린 덕이네. 아린이가 아니었으면 30년을 더 기다려도 아들
한 번에 네 명을 면접 보고 나니 도아린은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 윤가인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마지막으로 한 명 남았어요.”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을 불러들이게 했다.마지막 면접자가 들어오자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본 도아린은 순간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떨어뜨렸다.“무슨 생각이에요?”“공정하게 면접을 보는 거죠. 저도 요구 조건에 부합되지 않나요?”배건후는 전혀 위축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가운데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도아린을 뚫다져라 바라보는 깊은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도아린은 그를 보고 싶지 않았기에 한 손으로 이마를 받치며 윤가인에게 질문하라고 했다.솔직히 말하면 오늘 면접을 본 면접자들 중에서 배건후의 이력서가 가장 뛰어나고 답변도 굉장히 독창적이었다.마지막으로 윤가인이 도아린의 의견을 물었고 그녀는 그제야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했다.“전에 모건 그룹 대표님이셨잖아요.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요? 조롱도 당할 거고 귀찮게 구는 사람도 많을 텐데 그래도 입사하고 싶다는 건가요?”“네.”배건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그가 굳이 이렇게까지 하겠다면 도아린도 받아들이기로 했다.“솔직히 말하면 전 건후 씨가 진짜로 일하러 온 건지, 아니면 회사를 망치러 온 건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다른 직원들보다 인턴 기간을 두 달 더 늘일 겁니다. 그래도 괜찮으신가요?”“전 상관없어요.”배건후의 눈빛은 아주 단호했다.설령 월급을 안 받는다 해도 그는 상관없었다. 모건 그룹에 들어가는 건 도아린 곁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었다.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윤가인을 바라봤다.“건후 씨를 데리고 가서 입사 절차를 밟으세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배건후는 단 한 순간도 도아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듯, 그녀에게서 아예 눈을 떼지 못했다.배건후가 운영 부서에 나타나자 직원들은 크게 당황했다. 모두 가시
아린 초등학교의 수금 영수증은 이틀 동안 도아린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문서를 하나 검토할 때마다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곤 했다.‘만약 그때 배 위에서 좀 더 강압적으로 나섰다면, 하경 씨한테 물이라도 뿌렸더라면 하경 씨가 정신을 차렸을까?’그녀는 육하경이 한 짓은 이해할 수 없었다.‘잔혹한 장기 밀매를 저지르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돈을 아린 초등학교에 기부했다니...’예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 일로 인해 확인해 보니 전국에는 총 7개의 ‘아린 초등학교’가 존재했다. 모두 외진 빈곤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겉으로 보면 그 기부금은 육하경과 전혀 관계가 없어 보였다. 만약 구현성이 그녀에게 영수증을 주지 않았더라면, 도아린이 육하경의 등에 새겨진 ‘아린’이라는 두 글자를 본 적 없었더라면 그가 기부한 돈이라는 걸 확인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도 대표님.”윤가인이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도아린은 영수증을 서랍에 넣으며 말했다.“들어오세요.”윤가인은 책상 앞까지 와서 보고했다.“육씨 가문이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육하경 씨는 세인트존스 호텔 사무실 서랍의 이중 바닥에 육씨 가문의 불법 운영, 탈세, 부정 경쟁의 증거를 숨겨두고 있었다고 하네요.”“이번 기회로 강 대표님은 최저가로 세인트존스 호텔을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육씨 가문의 다른 사업들도 주가가 3일 연속 하한가를 기록하는 중입니다.”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도아린은 생각에 잠겼다.육하경은 본인이 망한다고 하더라도 육씨 가문과 함께 무너지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동안 육씨 가문은 여러 차례 부정적인 뉴스에 휘말렸지만 증거가 없었기에 매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파장이 너무 컸기에 육씨 가문은 집중적으로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할머니 화 많이 나셨겠네...’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나영옥의 전화가 걸려 왔다.“아린아, 민재와의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좀 도와주면 안 되겠니? 이번 위기를 넘길 수만 있다면 내가 나서서 너랑 민재의 결혼을 성
“민재야, 도와줘...”“한 번 더 말해 봐!”도아린은 누군가에게 머리를 잡혀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뒤에 있는 남자의 싸늘한 이목구비를 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건후 씨? 건후 씨가 왜 여기에...”남자는 안개가 자욱한 유리 벽에 도아린을 밀어붙이더니 그녀의 아래턱을 잡고 눈을 마주쳤다.“여긴 내 방이야, 누구이길 바라는데? 응?”도아린이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이거 놔요. 놓으라고요...”“날 건드렸으면 끝까지 버텨야지.”남자는 도아린의 허리를 감싸 안고 마구 더듬었다.“으악...”쿵!도아린은 차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꿈에서 깼다.앞에 교통사고가 일어났는데 버스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길가의 배수구에 빠지면서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버스 안에는 온통 욕하는 사람들과 우는 사람들뿐이라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3년 전 그날 밤의 사고에 비하면 이번 사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아린은 그 사고만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날 밤 그녀는 배건후 때문에 병원에 가게 되었고 그러다가 배씨 가문 사모님이 되어 위기들을 해결하긴 했지만...“죽고 싶어요? 얼른 밖으로 기어 나와요!”누군가의 재촉에 도아린은 이미 망가진 케이크를 버리고 선루프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구급차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도아린은 구급차가 멀지 않은 곳의 아우디 밴 옆에 멈춰 있는 걸 발견했다.의료진들이 구급차에서 내려 차 안의 다친 환자를 부축했다. 그때 훤칠한 키의 한 남자가 상체를 숙이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여자를 안고 나온 후 구급차에 태웠다.찰나였지만 도아린은 그 남자가 바로 결혼한 지 3년 된 남편이라는 걸 알아봤다. 그리고 남편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는 늘 잊지 못했던 그의 첫사랑이었다. 그는 유학 간 그녀를 줄곧 잊지 못했다.도아린은 팔이 아픈 것도 참아가며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휴대전화 너머로 남자의 싸늘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용건만 간단히.”“오늘 집에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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