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은 홀로 쓸쓸하게 복도에 앉아있다가 응급조치를 마쳤다는 간병인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도지현은 다시 한번 저승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의사는 도지현의 각 수치가 한계에 도달했다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도아린은 의사에게 허리 굽혀 인사한 후 병실로 돌아와 남동생의 팔을 어루만졌다.“이모, 가서 쉬세요. 지현이랑 단둘이 있고 싶어요.”간병인은 도아린이 자존심이 강해서 남들에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럼 옆에 탕비실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불러요.”도지현은 무릎 밑으로 두 다리를 절단했고 허벅지 근육도 거의 다 수축해서 다리가 팔보다도 더 가늘었다.그녀보다 도지현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픈 몸 때문에 힘들어도 늘 밝았던 동생이었다.장애인 농구팀에 입단한 후에는 열심히 운동하고 생활을 공유하기도 했다. 절대 시합을 한 게임 졌다고 목숨을 끊을 사람이 아니었다. 하여 그녀는 도지현이 깨어나서 그날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말해주길 바랐다.두 팔을 다 마사지하고 나니 도아린의 손이 다 떨릴 정도로 저릿했다. 간병인이 와서 도지현의 몸을 닦아주었고 도아린은 옥상으로 가서 소유정의 전화를 받았다.“널 방해한 건 아니지?”“아니. 나 지금 병원이야.”도아린은 젖은 머리가 마르도록 풀어헤쳤다.“지현이...”“다시 살려냈어.”“그래. 의료 기술이 계속 발전하니까 언젠가 깨어날지도 몰라.”소유정은 그녀를 위로한 후 본론을 얘기했다.“나형욱 선생님이 또 날 찾아왔어. 네가 지난번에 수선한 자수 드레스가 엄청 마음에 든다면서 선생님 팀으로 들어오래.”나형욱은 수선 명인이었다. 그와 한 번만 손을 잡아도 몸값이 배로 뛰는 건 문제없었다. 그런 그가 도아린을 직접 스카우트하려 한다는 건 그녀의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도아린의 솜씨도 업계에서는 손꼽히는 정도였다. 배건후와 결혼한 후에는 가정에만 충실하다 보니 그저 손이 굳어지지 않으려고 세컨드 계정으로 일을 조금씩 받
도아린은 나형욱을 만나러 가던 길에 유명한 인삼 가게에서 고급 인삼을 들여왔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소유정은 전에 그녀에게 소유정의 능력을 알아준 송민혁이 야생 산삼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 소유정이 송민혁이 연출한 작품의 OST를 따냈기에 선물하고 싶었다.도아린이 후방 주차를 하려고 절반 정도 후진한 그때 뒤에 있던 빨간색 람보르기니가 먼저 주차했다. 여성 운전자는 차를 삐뚤게 세운 후 그냥 가버렸다.결국 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차를 좀 먼 곳에 세운 다음 걸어갔다. 그런데 아까 그 여성 운전자도 그 가게에 있었다.“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점원이 열정적으로 맞이했다.“방금 들여온 백 년 된 야생 산삼 보여주세요.”“죄송한데 이미 팔렸어요. 장뇌삼도 괜찮은 게 있어요.”도아린이 고개를 내저었다.“아니요. 됐어요, 그럼.”그녀가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도아린 씨죠?”여성 운전자가 다가왔다.“아린 씨가 운전한 그 카이엔 사실 손보미한테 선물하려던 거였어요. 차 번호도 손보미의 행운 숫자거든요. 그래서 알아요.”“...”도아린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봤다.점원은 야생 산삼을 포장한 후 종이와 펜을 건넸다.“수취인의 성함과 연락처 적어주세요. 나중에 배 대표님한테 확인해야 하니까요.”도아린은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 연성에서 야생 산삼을 살 수 있는 배 대표라면 생각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여성 운전자는 팔짱을 끼고 오만한 태도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청호상 후보에 오른 손보미 알죠? 배 대표님이 손보미를 위해 주문한 거예요. 연예인의 정보는 함부로 누설해서는 안 되니까 제 이름 적을게요. 전 손보미의 매니저 김지민입니다.”도아린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도, 분노한 기색도 없었고 차분하면서도 덤덤하기만 했다. 하지만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진 것처럼 아팠다.손보미는 이마가 살짝 긁혔을 뿐인데 배건후는 몸조리하도록 백 년 된 야생 산삼까지 사주었다. 역시 좋아하는 여자는 달랐다.도아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손 키스를 날리고 웃으며 말했다.“화내지 말아요. 튀르키예든 동경이든 파리든 건후 씨가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같이 갈게요.”배건후가 주먹을 꽉 쥐었다. 관절에서 뚜두둑 소리가 날 정도였고 가뜩이나 차갑던 이목구비가 더욱 차가워졌다.그가 도아린에게 이런 말을 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도아린이 그대로 하니까 전부 거슬렸다. 짜증이 나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점원은 옆에서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최대한 존재감을 없애려 노력했다.배건후가 뿜어내는 냉기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다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내 카드 긁으려고? 안 돼.”도아린이 얼마를 쓰든 배건후는 제한한 적이 없었다. 도아린도 좋은 식자재를 사는 것 말고는 대부분 남동생의 병 치료에 썼다. 그리고 배건후가 선물한 게 많아 도아린 자신에게 돈을 쓸 일도 거의 없었다.그녀가 비상금을 몰래 챙겼다고 해도 수십억을 챙길 리가 없었다. 그에게 마구 대들었으니 그를 떠나면 얼마나 힘들지 느껴보게 할 생각이었다.도아린은 손가락으로 배건후의 가슴팍을 튕겼다. 그러자 블랙 카드가 순식간에 그의 양복 주머니에 들어갔다.‘내가 진짜 기생충인 줄 아나.’그저 그 돈을 건드리기 싫었을 뿐이지, 한 푼도 없는 거지는 아니었다. 이번에 제대로 본때를 보여줘야 했다.도아린은 가방에서 평범한 은행 카드 한 장을 꺼내 점원에게 건넸다. 점원이 카드를 긁자 컴퓨터 화면에 지불 성공이라는 글씨가 빠르게 나타났다. 그녀는 점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후 휙 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배건후는 이까지 바득바득 갈았다.‘몰래 이렇게나 많은 돈을 숨겼다는 건 이혼하려고 진작 준비했다는 거네.’차 안으로 돌아온 후 도아린은 흥분됐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마치 공기 빠진 공처럼 축 처져 의자에 앉아있었다.카드 한 번 긁었다고 거의 전 재산을 탕진했다. 조금 전 홧김에 한 행동을 조금 후회하기도 했다.장뇌삼도 귀하긴 했지만
도아린은 밤새 푹 자고 이튿날 맑은 정신으로 나형욱을 만나러 갔다.소유정이 가는 녹음실이 그녀의 목적지와 한 건물이라 두 사람은 도착한 후 A 구역과 D 구역으로 흩어졌다.“안녕하세요. 실례지만 엘리베이터 눌러주실래요? 7층 가려고요.”“네...”프런트 직원은 절반 정도 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신작 오디션은 D 구역입니다.”요 며칠 손보미가 맡았던 역할의 오디션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이쪽으로 잘못 찾아오는 사람이 꽤 있었다.프런트 직원은 도아린을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오늘 이분은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괜찮은 것 같아. 분위기도 좋고 메이크업을 살짝만 해도 성형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겠어.’도아린이 덤덤하게 웃어 보였다.“전 LH 스튜디오로 가려고요.”프런트 직원은 그녀를 엘리베이터에 태운 후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보면서 어리둥절해 했다.‘LH 스튜디오는 옷을 수선하는 곳인데... 대부분 몸가짐에 신경을 쓰지 않는 중년이 많고. 근데 방금 그 여자는 젊고 또 예뻐. 그렇다면 무조건...’“천장에 뭐가 있어요?”한 잘생긴 남자가 그녀 뒤에서 웃으면서 농담을 건넸다.“샹들리에에 붙어있는 크리스털을 떼려고요?”빌딩의 대표 성대호가 밖에서 들어왔다. 성대호는 유머러스하고 시원시원한 사람이라 직원들이 많이 따랐다.“대표님이 샹들리에를 스와로브스키로 바꾸면 그때 뗄게요.”“잊지 않게 노트에 적어야겠어요...”성대호는 농담으로 어린 여자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뒤에서 구두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바로 대표의 카리스마를 뽐냈다.“나형욱 씨한테 전화해서 귀한 손님이 온다고 알려줘요.”“나형욱 씨 귀한 손님은 이미 올라갔어요.”“올라갔다고요?”성대호가 화들짝 놀랐다.“어떻게 생겼어요?”“엄청 예쁘고 분위기 있고 또 교양도 있는 여자였어요.”성대호의 두 눈에 교활함이 스쳤다. 돌아선 순간 배건후의 싸늘한 얼굴을 보고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으며 휴대전화를 꺼냈다.“내가 말할게요.”전화가 단번에 연
상대를 자극하는 말을 누가 할 줄 모르겠는가.“당신은 알 자격이 없어요.”도아린이 목을 빳빳이 쳐들고 말했다. 배건후는 서로 싸웠다간 상황이 더 안 좋아질 거란 생각에 두 주먹을 꽉 쥐었다.“어머니가 네 동생 상태가 어떠냐고 물었어. 돌아가서 말씀드리게 아무 이유나 준비해.”“그럴 필요 없어요.”도아린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모든 절차가 끝나면 자세하게 말씀드릴 거예요. 3년이나 꾹 참았으니 아무도 날 도덕적 잣대로 뭐라 할 수 없어요.”“참았다고?”배건후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대놓고 비웃었다.“좋은 것만 먹고 입었으면서 뭐가 억울하다고 그래? 쩍하면 삐지고 가출하고. 어머니는 지유보다 너한테 더 잘해줘. 그런데도 만족 못 해? 대체 어떻게 해야 만족할 건데? 빌딩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도울 디저트에 주면 그만할 거야?”“...”도아린의 심장이 칼로 쿡쿡 찌르듯 아팠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고통과 절망을 감추기 위해 시선을 늘어뜨렸다. 배건후의 눈빛도 어두워졌고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을 빤히 내려다보았다.잠시 후, 도아린은 귀에 한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천천히 뺐다.“건후 씨, 블랙 카드 돌려줬고 이 귀걸이도 돌려줄게요. 집에 있는 주얼리 하나도 안 가져갔으니까 처리하고 싶은 대로 처리해요. 그리고 바쁘겠지만 시간 내서 이혼 절차 진행해요, 우리. 그럼 난 앞으로 참을 일도 없고 당신도 나한테 쓰기 싫은 돈 쓸 필요 없어요.”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귀걸이를 건넨 후 재빨리 자리를 비웠다.D 구역에서 나온 소유정이 그녀에게 손짓하며 길가 쪽으로 오라고 했다. 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배건후를 돌아보았다.“건후 씨한테 아예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어.”배건후가 주먹을 쥐었다.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고 말았다.“도아린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야? 너랑 이혼하겠다고?”성대호가 또 옆으로 다가왔다.“너랑 상관없는 일이야.”배건후는 씩씩거리면서 차에 올라타더니 성대호의 처리 결과도 듣지 않고 휙 가버렸다.
“언제 수속하러 갈 건데요?”도아린은 문 앞까지 쫓아오다가 하얀빛이 번쩍이자 얼굴을 슬쩍 피했다.그녀가 품에 있는 쇼핑백을 자세히 들여다볼 때 배건후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계단 아래에서 들려왔다.“기분 봐서.”한편 조수현 기사가 차 문을 열고 배건후를 안으로 모시며 나지막이 말했다.“요즘 카풀앱으로 봉변당하는 여성분들이 꽤 많다고 하더라고요.”배건후는 3층 룸을 힐긋 보더니 허리 숙여 차에 올라탔다.“쟤는 사고당해도 싸.”도아린이 쇼핑백을 들고 나왔을 때 마이바흐는 어느덧 떠나가고 없었다. 배건후도 참, 그녀가 분명 싫다고 했는데 기어코 목걸이를 건넬 줄이야.그녀는 비록 갖기 싫었으나 개자식이 준 물건을 길바닥에 내다 버릴 순 없었다.도아린이 길옆에서 차를 기다릴 때 검은색 폭스바겐이 불쑥 앞에 세워졌다.“안녕하세요 사모님, 마침 근처에 있었는데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우정윤이 차에서 내려오며 말했다.마침이라고? 이런 우연을 누가 믿을까?다만 찜통더위에 땀으로 흠뻑 젖었던지라 도아린은 일단 차에 올라탔다.집에 도착한 후 소유정이 그 루비 목걸이를 보더니 3초 동안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 폭소를 터트렸다.“하하하...”그녀는 소파에서 굴러떨어진 채 도아린의 다리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이게 바로 배건후 그 개자식 취향이야? 하하... 역시... 하하하...”“웃다 숨넘어갈라.”도아린이 상자를 닫으며 말했다.소유정은 어느새 웃다가 눈물이 흘러내릴 지경이었다.“그건 그렇고 수백억대 목걸이라 꽤 소장 가치가 있어 보여. 이건 진심!”그녀는 목걸이를 꺼내 도아린에게 대보았다.“그래도 한번 착용은 해주라. 사진 찍어서 나중에 너 실컷 놀리게.”“찍고 싶으면 혼자 알아서 찍던가. 대신 찍을 바엔 여러 각도로 찍어. 모델용으로 쓰게.”“왜? SNS에 올리게?”소유정이 하찮은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도아린은 매번 배건후에게 선물을 받을 때마다 SNS에 지정된 몇 명을 맨션 해서 피드를 올리곤 한다.절친으로서
손보미의 스캔들이 세간을 발칵 뒤집어놓았고 그녀가 딱히 부인하지 않는 건 인정과도 다름없었다.도유준이 성급하게 돈을 요구하는 건 아마도 도아린이 차이면 이용가치가 없어질까 봐 걱정한 듯싶다.엠파이어 빌딩에는 각 분야의 엘리트들이 모였고 물론 훌륭한 변호사도 있었다. 도아린은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에 알고 지내던 변호사 한 분을 찾아가 취지를 설명했다.“재산을 절반씩 나누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장수현 변호사는 배건후의 변호사와 법정에 설 생각을 하니 식은땀이 저절로 났다.“제가 한발 물러서면요?”도아린은 애초에 돈을 가질 생각이 없었고 단순히 그를 엿 먹이고 싶었을 뿐이다.장수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중요한 건 배건후 대표님도 이혼 의사가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입니다. 만약 대표님이 이혼에 동의하지 않으면 아주 긴 법정 싸움이 될 거예요. 아린 씨가 상대방이 잘못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하는 한 법정에서는 화해를 도모할 거예요.”도아린은 가방끈을 꽉 잡았다. 배건후가 손보미를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어찌 그녀에게 명분을 주고 싶지 않을까.도아린과 배건후는 비밀 결혼이라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르는데 법정 싸움으로 번진다면 손보미는 고스란히 치욕을 당해야 할 것이다.그러니까 배건후가 이혼을 거부하는 거겠지.“그럼 이렇게 해요.”도아린이 큰 결심을 내린 듯싶었다.“내일 저 대신 건후 씨 한번 만나 뵙고 오세요. 건후 씨가 먼저 이혼을 언급한 것처럼 이혼협의서를 작성하라고 하세요. 재산 분할은 어떻게 하든 상관없으니 이번 일을 소리 없이 진행하고 그 사람 명예에 절대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장수현은 행동파답게 다음날 바로 배건후에게 소식을 전했다.모건 그룹은 오전 내내 먹구름이 가득하고 임원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비서실은 심지어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할 지경이었다.우정윤이 커피를 들고 들어오다가 담배 연기로 꽉 찬 대표이사 사무실에 하마터면 화재 신고를 할 뻔했다. 입사해서부터 지금까지 그는 대표님
지금 그가 먼저 도아린에게 짐을 싸달라고 부탁하고 있고 말투도 최근 들어 가장 누그러진 편이다. 이에 도아린은 문득 마음이 씁쓸해졌다.그녀가 아무 말 없자 배건후도 말을 잇지 않았고 두 사람은 휴대폰을 든 채로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요즘 SNS에 돌고 있는 밈이 하나 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만약 당신 남편이 달마다 용돈을 2천만 원씩 주는 대신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수 있나요?]이에 ‘좋아요’가 가장 많이 달린 댓글은 [1초라도 망설이면 그건 돈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였다.이 논리대로라면 배건후보다 더 완벽한 후보는 없다. 달마다 도아린에게 한도 제한 없는 카드를 줄 뿐만 아니라 고급 저택에 좋은 차, 게다가 도우미들까지 고용해서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으니까.어디 그뿐인가,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뭣 하나 빼놓을 게 없는 완벽한 남편감이었다. 두 사람의 신분 차이가 현저하지만 배건후는 도씨 일가에서 원하는 자원은 최대한 만족시켜주고 있다.돈도 몇 푼 못 벌면서 시답잖은 일만 벌이고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과 비하면 배건후는 너무 괜찮은 편이다.도유준은 그가 일편단심이라고 했는데 손보미에게 줄곧 일편단심인 건 사실이다. 그의 베프 성대호는 만났던 여자친구가 산을 이룰 지경이니까.어쩌면 도아린이 좀 더 ‘너그러워’진다면 이 결혼생활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 듯싶다.그녀가 이제 막 한 걸음 물러나려고 하는데 전화기 너머로 대뜸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건후 씨, 나 다 씻었어.”순간 도아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미친!’‘방금 나 스스로한테 가스라이팅한 거야?!’왜 굳이 흠집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완벽한 사람을 찾으려고 고집한 걸까?연성에 널리고 널린 게 훌륭한 남자들인데 말이다.“약속 꼭 지켜요.”말을 마친 도아린이 전화를 끊었다.그 시각 빨간색 람보르기니가 맞은 편에서 질주해 오더니 모건 그룹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도아린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배건후는 슬슬 짜증이 몰려왔고 짙은 얼굴에 싸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