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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다들 잠이 든 시간이라 복도부터 문 앞까지 어슴푸레한 등이 두 개만 켜져 있었다.

배건후가 현관 앞으로 나온 그때 거실 불이 갑자기 켜졌다.

“이 늦은 밤에 어딜 가?”

주현정이 걸어 나오면서 물었다.

“무슨 급한 일이길래 아린이까지 버리고 가?”

“...”

배건후는 불편한 몸을 참으며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

주현정은 주부로 살아왔어도 사리 분별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회사 일로 핑계를 댔더라면 말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게...”

배건후가 얘기하려는데 도아린이 다급하게 내려왔다.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도아린은 하도 급하게 내려오는 바람에 계단을 헛디딜 뻔했다. 내려오면서 머리를 매다가 주현정을 보고서야 발걸음을 늦추었다.

“어머님, 제 동생 상태가 안 좋아서 병원에서 오라고 해서요.”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본 주현정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래? 그럼 얼른 가봐. 건후야, 운전 조심하고.”

도아린은 그제야 문 앞에 서 있는 배건후를 발견했다. 그녀가 까발리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는지 얼굴이 어둡기 그지없었다. 배건후가 망신당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녀는 망신당하기 싫었다.

“얼른 가.”

주현정이 문 앞까지 나온 바람에 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배건후의 차에 탔다.

“건후 씨랑 같이 갈 생각 없으니까 저 앞에서 내려주면 돼요.”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어떻게 친동생을 저주해?”

배건후는 그녀가 한밤중에 집을 나오려고 핑계를 댄 거라고 생각했다.

“...”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너무도 피곤했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남동생에게 진짜 무슨 일이 생겨도 배건후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의 마음속에 그녀의 자리는 없었으니까.

가는 길 내내 차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도아린은 택시를 잡기 쉬운 곳에서 내린 후 빠르게 병원으로 달려갔다.

“제 동생 어떤가요?”

“환자분 의식 없이 3년이나 누워있어서 이젠 몸의 장기도 기능을 잃어가고 있어요.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도아린은 몸이 부들부들 떨려 몇 번 눌러서야 도정국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현이 응급실 들어갔어요.”

도정국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과 있으면 알려줘.”

“지금 안 오면 다신 지현이 못 볼 수도 있어요.”

“의사들은 항상 부풀려서 말하잖아. 매번 그렇게 말했는데도 3년이나 살았어.”

도정국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

“배건후한테 도울 디저트를 엠파이어 빌딩에 입주하고 싶다는 얘기 해봤어?”

도아린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하여 힘껏 숨을 들이쉬었다.

“생각해보겠다고 했어요.”

“...”

도정국의 요구라면 항상 들어줬었다. 왜냐하면 배건후는 도아린이 부탁하는 거라면 다 들어줬으니까. 그런데 이번에 생각해보겠다고 한 건 도정국더러 병원에 오라는 핑계일 뿐이었다.

“아린아, 넌 너무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해서 문제야. 지현이 저러고 있는 게 본인은 힘들지 않을 것 같아?”

도정국의 말투가 한껏 사그라들었다.

“그때 지현이는 존엄 있게 떠나고 싶어 했어. 이건 지현이가 원하는 게 아니라고.”

도아린은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꽉 쥔 채 병원 복도에 앉아있었다.

남존여비 사상이 심했던 도정국 때문에 어머니는 아들을 낳기 위해 여러 번이나 유산했었다. 그러다가 결국 40살에 아들을 갖게 되었는데 양수 색전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같은 해 도정국은 재혼하겠다고 했지만 도아린이 상 중이라고 허락하지 않은 바람에 하지 못했었다. 3년 후에 도정국이 다시 재혼하겠다고 했을 때도 도아린은 여전히 반대했다.

도아린은 도정국이 오래전부터 밖에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여자는 돈에 눈이 먼 여자라 절대 남동생에게 잘해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일주일 후에 도지현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목숨은 겨우 건졌지만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다.

그 후로 도정국은 아들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다. 도아린은 학교에 다니면서 남동생을 챙겼고 졸업한 다음 일자리를 찾아 남동생에게 더 좋은 삶을 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졸업식이 있던 그 날, 도지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투신했다.

만약 도아린이 배건후에게 시집가지 않았더라면 도정국은 아마 진작 연명치료 거부 동의서에 사인했을 것이다.

몇 년 동안 동생의 병원비는 전부 배건후가 부담했다. 만약 도아린이 이혼한다면 도지현을 살릴 방법이 없어지고 도정국도 더 막무가내로 나올 것이다.

...

보성 병원 VIP 병실.

배건후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문밖에서 화를 내고 있는 손보미의 매니저를 발견했다.

“무슨 일이에요?”

“사진 몇 장 가지고 점심부터 지금까지 밥도 안 먹고 자책하고 있어요. 내가 무릎까지 꿇고 사정해서야 대표님한테 전화하더라고요. 근데 하자마자 또 후회하면서 계속 울고 있어요.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어요.”

손보미는 문을 등진 채 침대에 앉아있었다. 매니저가 들어온 줄 알고 울면서 나가라고 했다.

“그만 얘기해. 무슨 일이든 내가 혼자서 감당할 테니까 건후 씨는 끌어들이지 마. 이미 결혼한 사람이야. 건후 씨 와이프가 보면 화낼 거라고.”

손보미가 가녀린 몸을 구부리고 어찌나 슬프게 우는지 보는 사람이 다 마음이 아팠다.

“그때 어쩔 수 없이 해외로 나가긴 했지만 내가 용기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야. 건후 씨 이젠 결혼했고 잘살고 있어. 절대 나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게 해선 안 돼. 기자한테 연락해서...”

돌아앉다가 배건후를 본 손보미의 표정이 더욱 서글퍼졌다.

“건후 씨 오늘 저녁에는 안 오는 줄 알았어.”

배건후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작은 일이야, 내가 처리할 수 있어.”

“그리 작은 일이 아니에요.”

매니저가 손보미의 말을 가로챘다.

“어제 교통사고 때문에 뒤에 있던 버스 한 대가 옆으로 기울어 넘어진 바람에 안에 있던 임산부 한 분이 제때 응급조치를 받지 못해서 아이를 잃었대요. 원래는 그리 큰일이 아니었는데 기자들이 보미가 다쳐서 병원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인터뷰하러 왔다가 이마만 다친 거 보고 연예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보미가 특혜를 받아 그 임산부가 아이를 잃은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어요.”

배건후의 표정이 확 굳어지더니 미간 사이에 분노가 가득해졌다.

“먼저 나가 있어.”

손보미가 매니저를 내쫓았다.

“건후 씨, 내가 공개로 사과하면 돼. 나 혼자 해결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다른 일 더 있어?”

배건후가 냉랭하게 물었다.

“없... 없어...”

“말해.”

손보미가 머뭇거리며 문 앞을 쳐다보자 매니저가 다시 들어왔다.

“기자들이 대표님이 보미를 안고 있는 사진이랑 밤새 병원에 있는 사진을 찍었어요. 그러고는 대표님이랑 다시 잘해보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내서 불쌍한 척한 거래요. 효과가 아주 좋았다면서 곧 결혼 발표도 할 거라고 했어요.”

배건후의 두 눈에 핏발이 선 것 말고는 다른 기색이 없었다. 그의 태도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던 손보미가 조심스럽게 떠보았다.

“이번 일이 내 일에 영향을 준다면 하늘이 나한테 주는 벌이라 생각할게.”

배건후는 라이터를 꺼내 빙빙 돌렸다. 탁하고 켰다가 다시 끄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미약한 불빛에 그의 차가운 이목구비가 밝아졌다가 또 어두워졌다.

한참 후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보미야, 공인이면 항상 자신에게 엄격해야 해. 한순간의 어리석은 행동은 네가 힘들게 쌓아온 명예와 지위를 몽땅 무너뜨릴 수 있다고.”

손보미는 그대로 멍해졌다. 배건후가 한밤중에 전화를 받고 걱정돼서 달려온 줄 알았다.

예전에 그녀가 물이 뜨겁다고 하면 컵 두 개로 따르면서 식힌 다음에 먹여주던 그였는데 오늘 저녁에는 위로가 아니라 꾸짖음이었다.

“건후 씨...”

손보미는 더욱 서글퍼졌다.

“내가 데리러 오라고 해서 탓하는 거야? 난 그저 건후 씨한테 얼굴 보고 사과하고 싶었을 뿐이야. 일이 이렇게 심각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고...”

배건후는 라이터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결백하다면 블랙박스를 언론에 넘겨.”

그의 모습이 복도에서 점점 사라졌다. 손보미는 화를 내며 베개를 매니저에게 던졌다.

“이 방법이 건후 씨한테 먹히지 않는다고 했지? 믿지 않더니... 이렇게 되면 어떻게 다시 건후 씨한테 다가가?”

매니저가 베개를 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헤어진 몇 년 동안 너무 보고 싶어서 옛 생각 하다가 교통사고 난 거라고 했어야지... 대표님 앞에서 못 잊은 척하면 무조건 감동할 텐데.”

손보미는 뭔가 생각난 듯 코웃음을 쳤다.

“지금 뭐라 말해봤자 소용없어. 구급차에서 내가 춥다고 안아달라고 했을 때도 건후 씨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어.”

매니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있었다.

“그때 네가 떠난 후에 대표님이 널 잊지 못해 맨날 술이나 마시다가 도아린이 기회를 얻은 거 아니었어?”

손보미의 눈빛이 점점 그윽해졌다. 그때 일이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조금 다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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