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은 홀로 쓸쓸하게 복도에 앉아있다가 응급조치를 마쳤다는 간병인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도지현은 다시 한번 저승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의사는 도지현의 각 수치가 한계에 도달했다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도아린은 의사에게 허리 굽혀 인사한 후 병실로 돌아와 남동생의 팔을 어루만졌다.“이모, 가서 쉬세요. 지현이랑 단둘이 있고 싶어요.”간병인은 도아린이 자존심이 강해서 남들에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럼 옆에 탕비실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불러요.”도지현은 무릎 밑으로 두 다리를 절단했고 허벅지 근육도 거의 다 수축해서 다리가 팔보다도 더 가늘었다.그녀보다 도지현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픈 몸 때문에 힘들어도 늘 밝았던 동생이었다.장애인 농구팀에 입단한 후에는 열심히 운동하고 생활을 공유하기도 했다. 절대 시합을 한 게임 졌다고 목숨을 끊을 사람이 아니었다. 하여 그녀는 도지현이 깨어나서 그날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말해주길 바랐다.두 팔을 다 마사지하고 나니 도아린의 손이 다 떨릴 정도로 저릿했다. 간병인이 와서 도지현의 몸을 닦아주었고 도아린은 옥상으로 가서 소유정의 전화를 받았다.“널 방해한 건 아니지?”“아니. 나 지금 병원이야.”도아린은 젖은 머리가 마르도록 풀어헤쳤다.“지현이...”“다시 살려냈어.”“그래. 의료 기술이 계속 발전하니까 언젠가 깨어날지도 몰라.”소유정은 그녀를 위로한 후 본론을 얘기했다.“나형욱 선생님이 또 날 찾아왔어. 네가 지난번에 수선한 자수 드레스가 엄청 마음에 든다면서 선생님 팀으로 들어오래.”나형욱은 수선 명인이었다. 그와 한 번만 손을 잡아도 몸값이 배로 뛰는 건 문제없었다. 그런 그가 도아린을 직접 스카우트하려 한다는 건 그녀의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도아린의 솜씨도 업계에서는 손꼽히는 정도였다. 배건후와 결혼한 후에는 가정에만 충실하다 보니 그저 손이 굳어지지 않으려고 세컨드 계정으로 일을 조금씩 받
도아린은 나형욱을 만나러 가던 길에 유명한 인삼 가게에서 고급 인삼을 들여왔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소유정은 전에 그녀에게 소유정의 능력을 알아준 송민혁이 야생 산삼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 소유정이 송민혁이 연출한 작품의 OST를 따냈기에 선물하고 싶었다.도아린이 후방 주차를 하려고 절반 정도 후진한 그때 뒤에 있던 빨간색 람보르기니가 먼저 주차했다. 여성 운전자는 차를 삐뚤게 세운 후 그냥 가버렸다.결국 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차를 좀 먼 곳에 세운 다음 걸어갔다. 그런데 아까 그 여성 운전자도 그 가게에 있었다.“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점원이 열정적으로 맞이했다.“방금 들여온 백 년 된 야생 산삼 보여주세요.”“죄송한데 이미 팔렸어요. 장뇌삼도 괜찮은 게 있어요.”도아린이 고개를 내저었다.“아니요. 됐어요, 그럼.”그녀가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도아린 씨죠?”여성 운전자가 다가왔다.“아린 씨가 운전한 그 카이엔 사실 손보미한테 선물하려던 거였어요. 차 번호도 손보미의 행운 숫자거든요. 그래서 알아요.”“...”도아린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봤다.점원은 야생 산삼을 포장한 후 종이와 펜을 건넸다.“수취인의 성함과 연락처 적어주세요. 나중에 배 대표님한테 확인해야 하니까요.”도아린은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 연성에서 야생 산삼을 살 수 있는 배 대표라면 생각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여성 운전자는 팔짱을 끼고 오만한 태도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청호상 후보에 오른 손보미 알죠? 배 대표님이 손보미를 위해 주문한 거예요. 연예인의 정보는 함부로 누설해서는 안 되니까 제 이름 적을게요. 전 손보미의 매니저 김지민입니다.”도아린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도, 분노한 기색도 없었고 차분하면서도 덤덤하기만 했다. 하지만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진 것처럼 아팠다.손보미는 이마가 살짝 긁혔을 뿐인데 배건후는 몸조리하도록 백 년 된 야생 산삼까지 사주었다. 역시 좋아하는 여자는 달랐다.도아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손 키스를 날리고 웃으며 말했다.“화내지 말아요. 튀르키예든 동경이든 파리든 건후 씨가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같이 갈게요.”배건후가 주먹을 꽉 쥐었다. 관절에서 뚜두둑 소리가 날 정도였고 가뜩이나 차갑던 이목구비가 더욱 차가워졌다.그가 도아린에게 이런 말을 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도아린이 그대로 하니까 전부 거슬렸다. 짜증이 나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점원은 옆에서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최대한 존재감을 없애려 노력했다.배건후가 뿜어내는 냉기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다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내 카드 긁으려고? 안 돼.”도아린이 얼마를 쓰든 배건후는 제한한 적이 없었다. 도아린도 좋은 식자재를 사는 것 말고는 대부분 남동생의 병 치료에 썼다. 그리고 배건후가 선물한 게 많아 도아린 자신에게 돈을 쓸 일도 거의 없었다.그녀가 비상금을 몰래 챙겼다고 해도 수십억을 챙길 리가 없었다. 그에게 마구 대들었으니 그를 떠나면 얼마나 힘들지 느껴보게 할 생각이었다.도아린은 손가락으로 배건후의 가슴팍을 튕겼다. 그러자 블랙 카드가 순식간에 그의 양복 주머니에 들어갔다.‘내가 진짜 기생충인 줄 아나.’그저 그 돈을 건드리기 싫었을 뿐이지, 한 푼도 없는 거지는 아니었다. 이번에 제대로 본때를 보여줘야 했다.도아린은 가방에서 평범한 은행 카드 한 장을 꺼내 점원에게 건넸다. 점원이 카드를 긁자 컴퓨터 화면에 지불 성공이라는 글씨가 빠르게 나타났다. 그녀는 점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후 휙 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배건후는 이까지 바득바득 갈았다.‘몰래 이렇게나 많은 돈을 숨겼다는 건 이혼하려고 진작 준비했다는 거네.’차 안으로 돌아온 후 도아린은 흥분됐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마치 공기 빠진 공처럼 축 처져 의자에 앉아있었다.카드 한 번 긁었다고 거의 전 재산을 탕진했다. 조금 전 홧김에 한 행동을 조금 후회하기도 했다.장뇌삼도 귀하긴 했지만
도아린은 밤새 푹 자고 이튿날 맑은 정신으로 나형욱을 만나러 갔다.소유정이 가는 녹음실이 그녀의 목적지와 한 건물이라 두 사람은 도착한 후 A 구역과 D 구역으로 흩어졌다.“안녕하세요. 실례지만 엘리베이터 눌러주실래요? 7층 가려고요.”“네...”프런트 직원은 절반 정도 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신작 오디션은 D 구역입니다.”요 며칠 손보미가 맡았던 역할의 오디션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이쪽으로 잘못 찾아오는 사람이 꽤 있었다.프런트 직원은 도아린을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오늘 이분은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괜찮은 것 같아. 분위기도 좋고 메이크업을 살짝만 해도 성형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겠어.’도아린이 덤덤하게 웃어 보였다.“전 LH 스튜디오로 가려고요.”프런트 직원은 그녀를 엘리베이터에 태운 후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보면서 어리둥절해 했다.‘LH 스튜디오는 옷을 수선하는 곳인데... 대부분 몸가짐에 신경을 쓰지 않는 중년이 많고. 근데 방금 그 여자는 젊고 또 예뻐. 그렇다면 무조건...’“천장에 뭐가 있어요?”한 잘생긴 남자가 그녀 뒤에서 웃으면서 농담을 건넸다.“샹들리에에 붙어있는 크리스털을 떼려고요?”빌딩의 대표 성대호가 밖에서 들어왔다. 성대호는 유머러스하고 시원시원한 사람이라 직원들이 많이 따랐다.“대표님이 샹들리에를 스와로브스키로 바꾸면 그때 뗄게요.”“잊지 않게 노트에 적어야겠어요...”성대호는 농담으로 어린 여자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뒤에서 구두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바로 대표의 카리스마를 뽐냈다.“나형욱 씨한테 전화해서 귀한 손님이 온다고 알려줘요.”“나형욱 씨 귀한 손님은 이미 올라갔어요.”“올라갔다고요?”성대호가 화들짝 놀랐다.“어떻게 생겼어요?”“엄청 예쁘고 분위기 있고 또 교양도 있는 여자였어요.”성대호의 두 눈에 교활함이 스쳤다. 돌아선 순간 배건후의 싸늘한 얼굴을 보고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으며 휴대전화를 꺼냈다.“내가 말할게요.”전화가 단번에 연
상대를 자극하는 말을 누가 할 줄 모르겠는가.“당신은 알 자격이 없어요.”도아린이 목을 빳빳이 쳐들고 말했다. 배건후는 서로 싸웠다간 상황이 더 안 좋아질 거란 생각에 두 주먹을 꽉 쥐었다.“어머니가 네 동생 상태가 어떠냐고 물었어. 돌아가서 말씀드리게 아무 이유나 준비해.”“그럴 필요 없어요.”도아린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모든 절차가 끝나면 자세하게 말씀드릴 거예요. 3년이나 꾹 참았으니 아무도 날 도덕적 잣대로 뭐라 할 수 없어요.”“참았다고?”배건후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대놓고 비웃었다.“좋은 것만 먹고 입었으면서 뭐가 억울하다고 그래? 쩍하면 삐지고 가출하고. 어머니는 지유보다 너한테 더 잘해줘. 그런데도 만족 못 해? 대체 어떻게 해야 만족할 건데? 빌딩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도울 디저트에 주면 그만할 거야?”“...”도아린의 심장이 칼로 쿡쿡 찌르듯 아팠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고통과 절망을 감추기 위해 시선을 늘어뜨렸다. 배건후의 눈빛도 어두워졌고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을 빤히 내려다보았다.잠시 후, 도아린은 귀에 한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천천히 뺐다.“건후 씨, 블랙 카드 돌려줬고 이 귀걸이도 돌려줄게요. 집에 있는 주얼리 하나도 안 가져갔으니까 처리하고 싶은 대로 처리해요. 그리고 바쁘겠지만 시간 내서 이혼 절차 진행해요, 우리. 그럼 난 앞으로 참을 일도 없고 당신도 나한테 쓰기 싫은 돈 쓸 필요 없어요.”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귀걸이를 건넨 후 재빨리 자리를 비웠다.D 구역에서 나온 소유정이 그녀에게 손짓하며 길가 쪽으로 오라고 했다. 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배건후를 돌아보았다.“건후 씨한테 아예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어.”배건후가 주먹을 쥐었다.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고 말았다.“도아린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야? 너랑 이혼하겠다고?”성대호가 또 옆으로 다가왔다.“너랑 상관없는 일이야.”배건후는 씩씩거리면서 차에 올라타더니 성대호의 처리 결과도 듣지 않고 휙 가버렸다.
“언제 수속하러 갈 건데요?”도아린은 문 앞까지 쫓아오다가 하얀빛이 번쩍이자 얼굴을 슬쩍 피했다.그녀가 품에 있는 쇼핑백을 자세히 들여다볼 때 배건후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계단 아래에서 들려왔다.“기분 봐서.”한편 조수현 기사가 차 문을 열고 배건후를 안으로 모시며 나지막이 말했다.“요즘 카풀앱으로 봉변당하는 여성분들이 꽤 많다고 하더라고요.”배건후는 3층 룸을 힐긋 보더니 허리 숙여 차에 올라탔다.“쟤는 사고당해도 싸.”도아린이 쇼핑백을 들고 나왔을 때 마이바흐는 어느덧 떠나가고 없었다. 배건후도 참, 그녀가 분명 싫다고 했는데 기어코 목걸이를 건넬 줄이야.그녀는 비록 갖기 싫었으나 개자식이 준 물건을 길바닥에 내다 버릴 순 없었다.도아린이 길옆에서 차를 기다릴 때 검은색 폭스바겐이 불쑥 앞에 세워졌다.“안녕하세요 사모님, 마침 근처에 있었는데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우정윤이 차에서 내려오며 말했다.마침이라고? 이런 우연을 누가 믿을까?다만 찜통더위에 땀으로 흠뻑 젖었던지라 도아린은 일단 차에 올라탔다.집에 도착한 후 소유정이 그 루비 목걸이를 보더니 3초 동안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 폭소를 터트렸다.“하하하...”그녀는 소파에서 굴러떨어진 채 도아린의 다리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이게 바로 배건후 그 개자식 취향이야? 하하... 역시... 하하하...”“웃다 숨넘어갈라.”도아린이 상자를 닫으며 말했다.소유정은 어느새 웃다가 눈물이 흘러내릴 지경이었다.“그건 그렇고 수백억대 목걸이라 꽤 소장 가치가 있어 보여. 이건 진심!”그녀는 목걸이를 꺼내 도아린에게 대보았다.“그래도 한번 착용은 해주라. 사진 찍어서 나중에 너 실컷 놀리게.”“찍고 싶으면 혼자 알아서 찍던가. 대신 찍을 바엔 여러 각도로 찍어. 모델용으로 쓰게.”“왜? SNS에 올리게?”소유정이 하찮은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도아린은 매번 배건후에게 선물을 받을 때마다 SNS에 지정된 몇 명을 맨션 해서 피드를 올리곤 한다.절친으로서
손보미의 스캔들이 세간을 발칵 뒤집어놓았고 그녀가 딱히 부인하지 않는 건 인정과도 다름없었다.도유준이 성급하게 돈을 요구하는 건 아마도 도아린이 차이면 이용가치가 없어질까 봐 걱정한 듯싶다.엠파이어 빌딩에는 각 분야의 엘리트들이 모였고 물론 훌륭한 변호사도 있었다. 도아린은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에 알고 지내던 변호사 한 분을 찾아가 취지를 설명했다.“재산을 절반씩 나누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장수현 변호사는 배건후의 변호사와 법정에 설 생각을 하니 식은땀이 저절로 났다.“제가 한발 물러서면요?”도아린은 애초에 돈을 가질 생각이 없었고 단순히 그를 엿 먹이고 싶었을 뿐이다.장수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중요한 건 배건후 대표님도 이혼 의사가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입니다. 만약 대표님이 이혼에 동의하지 않으면 아주 긴 법정 싸움이 될 거예요. 아린 씨가 상대방이 잘못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하는 한 법정에서는 화해를 도모할 거예요.”도아린은 가방끈을 꽉 잡았다. 배건후가 손보미를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어찌 그녀에게 명분을 주고 싶지 않을까.도아린과 배건후는 비밀 결혼이라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르는데 법정 싸움으로 번진다면 손보미는 고스란히 치욕을 당해야 할 것이다.그러니까 배건후가 이혼을 거부하는 거겠지.“그럼 이렇게 해요.”도아린이 큰 결심을 내린 듯싶었다.“내일 저 대신 건후 씨 한번 만나 뵙고 오세요. 건후 씨가 먼저 이혼을 언급한 것처럼 이혼협의서를 작성하라고 하세요. 재산 분할은 어떻게 하든 상관없으니 이번 일을 소리 없이 진행하고 그 사람 명예에 절대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장수현은 행동파답게 다음날 바로 배건후에게 소식을 전했다.모건 그룹은 오전 내내 먹구름이 가득하고 임원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비서실은 심지어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할 지경이었다.우정윤이 커피를 들고 들어오다가 담배 연기로 꽉 찬 대표이사 사무실에 하마터면 화재 신고를 할 뻔했다. 입사해서부터 지금까지 그는 대표님
지금 그가 먼저 도아린에게 짐을 싸달라고 부탁하고 있고 말투도 최근 들어 가장 누그러진 편이다. 이에 도아린은 문득 마음이 씁쓸해졌다.그녀가 아무 말 없자 배건후도 말을 잇지 않았고 두 사람은 휴대폰을 든 채로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요즘 SNS에 돌고 있는 밈이 하나 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만약 당신 남편이 달마다 용돈을 2천만 원씩 주는 대신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수 있나요?]이에 ‘좋아요’가 가장 많이 달린 댓글은 [1초라도 망설이면 그건 돈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였다.이 논리대로라면 배건후보다 더 완벽한 후보는 없다. 달마다 도아린에게 한도 제한 없는 카드를 줄 뿐만 아니라 고급 저택에 좋은 차, 게다가 도우미들까지 고용해서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으니까.어디 그뿐인가,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뭣 하나 빼놓을 게 없는 완벽한 남편감이었다. 두 사람의 신분 차이가 현저하지만 배건후는 도씨 일가에서 원하는 자원은 최대한 만족시켜주고 있다.돈도 몇 푼 못 벌면서 시답잖은 일만 벌이고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과 비하면 배건후는 너무 괜찮은 편이다.도유준은 그가 일편단심이라고 했는데 손보미에게 줄곧 일편단심인 건 사실이다. 그의 베프 성대호는 만났던 여자친구가 산을 이룰 지경이니까.어쩌면 도아린이 좀 더 ‘너그러워’진다면 이 결혼생활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 듯싶다.그녀가 이제 막 한 걸음 물러나려고 하는데 전화기 너머로 대뜸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건후 씨, 나 다 씻었어.”순간 도아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미친!’‘방금 나 스스로한테 가스라이팅한 거야?!’왜 굳이 흠집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완벽한 사람을 찾으려고 고집한 걸까?연성에 널리고 널린 게 훌륭한 남자들인데 말이다.“약속 꼭 지켜요.”말을 마친 도아린이 전화를 끊었다.그 시각 빨간색 람보르기니가 맞은 편에서 질주해 오더니 모건 그룹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도아린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배건후는 슬슬 짜증이 몰려왔고 짙은 얼굴에 싸늘한
배건후의 칼 같은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손보미를 위해 대역 자리를 얻으려고 할 때 성대호는 이미 도아린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고? 그렇다면 말을 했어야지!배건후의 시선에서 질책하는 의미가 너무 짙었던지라 묻지 않았어도 성대호가 스스로 대답했다.“내가 말했더라도 너는 빼앗아서 손보미한테 줬을 거잖아. 말을 했든 안 했든 똑같아! 네가 손보미와 다시 잘해볼 생각이라면 도아린이 먼저 이혼하겠다는 건 좋은 일이잖아.”“너는 말이 너무 많아.”육하경은 성대호를 밀었고 성대호는 불쾌하다는 듯 그를 째려보았다.“건후가 도아린이랑 이혼하더라도 너는 저 여자를 갖지 못해. 서로 친구인데 앞으로 만나면 얼마나 어색하겠어!”배건후의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은 빠르게 육하경을 훑었고 육하경은 담담하게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내일 구청에 데려다줄게.”그래, 잘하는 짓이다! 모두 그가 이혼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만 같았다.“아!”배건후가 뒤로 돌았을 때 누군가가 부딪혀와서 그는 무의식 간에 상대방을 부축했다.“건후 씨, 왜 나를 안 기다려줘...”손보미가 돈을 지급하고 돌아왔을 때는 사람이 다 떠났기에 경찰서에 와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상처가 감염되면 열이 날 수 있다고 의사가 얘기했어. 이 약들은...”배건후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고 손보미는 빠르게 따라갔다.“건후 씨가 팔을 다쳤으니 내가 운전할게.”배건후는 그녀의 손에서 약을 건네받아 조수석에 던지고는 펑 하고 차 문을 닫았다.“...”차를 후진해서 나가려는데 손보미가 다시 앞을 막아섰다.“건후 씨, 팔에 상처가 있는데 운전하는 건 너무 위험해. 내가...”차는 빠르게 움직여서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봤어?”성대호는 계단에 서서 가소롭다는 듯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가질 수 없는 것들이 항상 최고인 거야. 손보미가 돌아서니 이제는 건후가 아쉬워하지 않잖아.”육하경은 그의 손에서 담배를 뺏어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다시 돌려주었다. 그는 담배를 두 모금 피고는 말했다.“너는 건후가
“대호 씨, 제 동생이 다친 건 당신 책임으로 기억하겠습니다. 당신은 돈을 한 번도 가진 적이 없고 여자애들을 한 번도 괴롭힌 적이 없이 깨끗한 게 좋을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당신도 저기 들어가서 방우진과 함께 벌을 받게 할 거예요.”성대호는 퍼뜩 고개를 들었고 놀란 표정을 한 얼굴에서는 분노도 느껴졌다.성대호는 물론 비즈니스 업계에서 고위층의 사람들 아무나 데리고 와도 깨끗한 사람이 없었다.특히 성대호와 배건후의 관계가 이렇게나 좋은데 배건후와 가까이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대호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성대호가 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아도 앞에 내미는 사람들이 많았다.그리고 여자 문제에서는 성대호 본인도 여자친구를 몇 명이나 사귀었는지 셀 수가 없다. 모두 그의 돈을 보고 접근한 여자들인데 각자 필요한 것만 얻는 것이지 어떻게 괴롭혔다고 할 수 있겠는가?“아린 씨, 동생의 간병인을 고를 때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건 당신이에요. 이제 와 사고가 생겼으니 다른 사람한테 떠넘기려는 거예요?”“대호 씨가 혜진 씨한테 이렇게 하라고 부추긴 거잖아요?”도아린의 예쁜 얼굴이 엄숙해졌고 무척 공격적이었다.“...”성대호의 시선은 신속하게 배건후에게로 옮겨졌다.‘언제 말한 거야? 나를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려는 거야?’“온종일 고생했어. 돌아가서 쉬어.”배건후는 앞으로 가서 도아린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도아린은 빠르게 피했다.“건후 씨, 오늘 나 대신에 칼을 맞아줘서 고마워요. 치료비는 입금할게요. 내일 아침 8시에 구청으로 가서 이혼 절차를 진행하길 부탁해요.”육하경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성대호는 차가운 비웃음을 터뜨렸다.“아린 씨, 허구한 날 이혼을 입에 올리고 있으면 재밌어요? 정말 이혼하고 싶다면 지유의 합의서를 쓸 때 왜 이 요구를 제기하지 않았어요?”그는 배건후의 얼굴이 굳은 것을 눈치채지 못했고 육하경이 말리는 것도 무시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아린 씨가 지유를 용서한 것도 건후와 다시 잘해보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도아린은 눈앞이 까매지면서 단단한 품속으로 안겼고 코끝에서는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비수는 남자의 팔을 찔렀고 남자는 작게 신음을 내고는 뒤돌아 안혜진을 걷어찼다.“아!”안혜진은 넘어졌고 경찰들은 그녀를 제압하고는 그녀의 몸에 다른 흉기가 더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경찰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도아린은 그제야 곁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배건후였다. 배건후도 돌아왔을 줄은 몰랐다.안혜진한테 이런 일을 저지르게 부추기게 한 사람을 생각하면 배건후가 돌아올 것도 예상 밖의 일은 아닌듯싶었다.“건후 씨! 당신 다쳤어!”손보미는 도아린을 밀어내고 배건후의 팔을 잡고는 마음 아파했다.“세상에, 피가 이렇게나 많이 흘렀어!”진경수가 도아린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그녀를 보고 웃어 보이고는 배건후에게 말했다.“가서 상처를 치료하세요. 저희는 경찰서에 가야 해서요.”“도아린, 당신 너무한 거 아니야? 건후 씨가 다쳤는데 어떻게 걱정하는 말 한마디도 없어! 이렇게 다른 남자랑 시시덕거리기나 하고 말이야!”손보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노려보았다.도아린이 비웃으며 말했다.“건후 씨는 당신이랑 다정하게 다닐 수 있으면서 나는 남자랑 시시덕거리면 안 되나?”말을 마친 그녀는 다정하게 진경수의 손을 잡았다.“우리 가요.”손보미는 두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그녀는 진경수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을 입었다는 것을 보아냈고 진경수는 외모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배건후보다 못한 점이 없었다.‘왜! 왜 도아린은 계속 좋은 남자를 꼬드길 수 있는 거야!”손보미는 따라가서 진경수의 앞을 막았다.“저 여자의 외모에 속지 말아요. 저 여자는 남편이 있는 여자예요. 저 여자랑 함께 있으면 당신은 평판이 나빠질 거예요!”“사돈 남 말 하시네. 그쪽은 아내가 있는 남자랑 붙어 다니면서 평판이 나빠지는 게 두렵지 않으세요? 아, 그쪽은 두렵지 않겠네요. 더 낮아질 평판도 없잖아요.”진경수는 도아린과 함께 차에 올랐다.“...”손보미는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래졌
“네. 약속할게요.”도아린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는 저린 다리를 두드리면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제 동생을 놓아주세요. 동생의 다리는 무리하면 안 됩니다.”안혜진은 몸을 일으키려다가 갑자기 과도로 도아린을 가리켰다.“오지 말아요! 저한테도 합의서를 주세요!”그녀의 눈에는 경계가 가득했고 도아린을 가리키는 게 소용이 없자 다시 도지현에게 칼을 댔다. 도아린은 침대 곁으로 가서 멈춰서서 가방에서 볼펜과 종이를 꺼내 들고 허리를 굽힌 채 간이테이블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안혜진은 그녀가 무엇을 쓰는지 안 보이지만 도지현을 놓아줄 수도 없어서 까치발을 들고 목을 쭉 빼 들고 쳐다보았다.안혜진은 몸을 앞으로 기대다가 창밖에서 비추는 눈이 부신 빛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도지현을 끌고 다시 구석으로 숨었다.“나를 속였어! 나를 속였단 말이야! 맞은 편에 경찰이 있잖아. 당신은 날 죽일 생각이었어!”안혜진은 다시 이성을 놓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과도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도아린은 볼펜을 놓고 병실 문 앞으로 가서 밖에 대고 말했다.“맞은 편에 있는 사람들을 철수하세요.”경찰은 망설이다가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안혜진은 소리를 지르면서 밖에서 얘기하는 지령을 못 들었고 도지현은 일어서지 못해 그녀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팔이 또 칼에 긁혔다.“그만 해요!”도아린은 호통을 쳐서 그녀의 울음소리를 멈추었고 작성한 합의서를 들어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제 동생을 놔줘요!”안혜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보았지만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뭔가 생각난 듯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당신, 당신이 경찰한테 전화해!”“제가 그렇게 경찰을 함부로 부릴 수 있는 사람으로 보여요?”도아린은 문 앞으로 가서 현장에 있는 경찰 책임자를 불러 자신이 쓴 서류를 보여주었다. 그는 열심히 보고는 안혜진에게 말했다.“이 합의서는 유효합니다. 이 사건을 맡은 경찰서에 전해주겠습니다.”안혜진은 순간 힘이 풀렸다. 그녀가 허리를 숙이려던 때 도아린이 소리를 질
“혜진 씨! 저예요. 저 도아린이에요!”도아린은 문 앞에 서서 두 손을 들고 아무런 무기를 갖고 오지 않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도지현은 안혜진에게 잡힌 채 구석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에 바지에 오줌을 쌌다.그는 일부러 괜찮은 척 덤덤한 표정으로 있었지만, 도아린의 얼굴을 보자 순간적으로 감정을 참지 못했다. 그러나 도아린이 걱정할까 봐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저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요. 저도 이러려던 게 아니에요!”안혜진은 울면서 소리쳤고 이미 이성이 반쯤 나가 있는 상태였다.“혜진 씨, 지현이가 혜진 씨가 만든 죽을 아주 좋아해요. 힘든 일이 있으면 저한테 얘기해요. 지현이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상태가 아직 좋지 않아요...”도아린은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두 걸음 정도 이동하자 안혜진은 미친 듯이 과도를 휘둘렀다.“오지 말아요! 오지 말라고요!”“알겠어요. 안 갈게요. 진정하세요!”도아린은 바로 멈추었다. 그녀는 창문 쪽을 바라보았는데 맞은편의 빌딩에 창문이 열려있는 곳에서 반짝이는 점이 스쳐 지나간 것을 보았다. 아마 저격수일 것이다.안혜진과 도지현은 사각지대에 있어서 도아린은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안혜진이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전에 도지현을 진심으로 보살펴주었기에 도아린은 그녀가 목숨을 잃는 건 원하지 않았다.도아린은 무릎을 꿇고 안혜진과 시선을 마주했다.“혜진 씨,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저한테 얘기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반드시 도울 겁니다.”안혜진은 울면서 얘기를 시작했지만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자신은 좋은 의도였고 딸을 불구덩이로 밀어버릴 생각은 없었는데 운명의 장난이라고 얘기하다가 또 자신이 편애하여 하느님이 자신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라고 자신은 목숨을 내놓아서 속죄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결국, 도지현이 그녀에게 귀띔을 해주었다.“아주머니, 먼저 아들 얘기부터 하시죠.”안혜진은 흐느끼며 울음을 멈추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혜진 씨, 다 제 잘못입
진경수는 갑자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웃으며 말했다.“결혼하고 싶지 않아도 상관없긴 해. 진씨 가문은 너를 먹여 살릴 수 있어. 이 집에서 평생을 살아도 괜찮아.”“큰 형이 항상 굳은 얼굴이라고 달리 생각하지마. 표정이 없는 게 제일 좋은 거야. 만약 너한테 웃는 얼굴을 보인다면 그때는 조심해야 하는 거야.”진경수는 큰 형에 대한 불만을 봐주는 것 없이 다 털어놨다. 큰 형이 워커홀릭이고 강박증이 있다고 했다.사무실의 책상에 있는 볼펜조차 각도에 맞게 놓아야 하고 기사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똑같은 옷을 입어야 했다.말을 마친 그는 일남의 어깨를 툭툭 치며 공감하라고 했지만, 일남은 감히 큰 도련님에 대해 뭐라고 하지는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항상 그랬어요?”“... 음.”진경수는 그녀를 보면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도아린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저랑 관계되는 일이에요?”진수혁은 어렸을 때부터 여동생을 바랬었다. 하여 둘째가 생겼을 때도 그는 기대를 가득 품고 있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윤명희의 배에 대고 얘기를 하고는 했었다. 하지만 태어났을 때 자신과 똑같이 남자아이인 것을 보고 더 관심을 주지 않았다.이후 셋째를 가졌을 때 그는 또다시 기대에 부풀었고 자신의 용돈으로 여자아이의 옷이나 아기용품을 사기도 했었다.병원에서 의사가 여동생이 태어났다고 한 뒤로부터 진수혁은 여동생을 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았고 진범준이 딸을 안고 싶어도 진수혁이 학교 가기를 기다려야 했다.그는 세상의 최고로 좋은 것들을 동생에게 주고 싶었다. 생후 1개월이 되는 연회 날에도 그는 여동생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진수혁은 집안의 맏이였기에 축하하러 온 손님들이 그의 학업에 관해 묻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바로 그 10분 남짓한 시간이 지나고 그는 여동생이 사라졌다는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되었다.그 뒤로부터 진수혁은 감정 없는 로봇처럼 변해버렸다.그때 진경수는 어렸기에 큰 형만큼 슬퍼하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이 계속 여동생을 찾으니 본
“건후 씨, 좀 남자답게 굴면 안 돼요?”“내가 남자인지 아닌지는 네가 잘 알고 있잖아!”배건후의 단단한 몸은 산처럼 도아린의 앞을 막고 있었다.그는 도아린을 비추는 모든 빛을 막았고 그림자는 도아린의 비웃는 표정도 삼켜버렸다.배건후의 몸에서는 연초와 박하 향이 섞인 냄새가 났다. 도아린은 예전에 이 냄새가 좋다고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역겹기 그지없었다.도아린은 갑자기 실소를 터뜨렸다.배건후는 손보미를 아주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가 출국한 후에 바로 자신과 결혼했고 손보미가 돌아오니 또 좋다고 그녀를 따라다녔다.자신과 결혼하고 나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으면서 지금 이혼하려는 마당에 자신의 안전에 책임을 진다는 소리나 하고 있다.남자들은 왜 이렇게 멍청한 것일까. 손에 넣었을 때는 찌꺼기 대하듯 하더니 잃어버린 지금에 와서는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중히 대하고 있다.물론 배건후라면 그녀를 보물처럼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단지 이혼을 당하면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할 뿐이다.“건후 씨, 지금 인터넷에서는 손보미가 분명 자신이 불륜녀라는 것을 알면서도 불륜을 저지른다고 욕먹고 있어요. 만약 당신이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손보미 씨의 이미지를 위해서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내가 왜 그 사람을 도와줘야 해?”이게 지금 사람이 할 말인가, 손보미가 인터넷에서 애정행각을 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더니 문제가 생긴 다음에는 모르는 체하고 있다.“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잖아요?”도아린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웃음을 터뜨렸다.배건후는 굳은 얼굴로 부정했다.“그런 적 없어.”“당신 정말 답이 없는 쓰레기네요.”도아린은 이렇게 말하고 뒤돌아 떠나려고 했지만, 배건후는 그녀를 당겨서 품에 안았다. 도아린은 순간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배건후, 당신 뭐 하는 거야!”“나는 네 남편이야!”“우리는 이혼했어!”“아직 이혼 절차 안 끝났어!”두 사람이 싸우려는 기미가 보이자 우정윤이 다급하게 말했다
“너한테 초대장을 보내지는 않았어. 요즘 네가 해남에서 바쁘게 보내고 있으니 너를 신경 쓰이게 하지 말라고 네 친구가 얘기하더라.”김지민은 이에 대해 해명하려고 했지만, 전화에서 여자가 남자한테 분유를 타 달라고 부탁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남자는 대충 한마디 건네고는 전화를 끊었다.김지민은 상대방에게 도아린이 말한 것처럼 그랬었는지 묻지는 않았지만, 아이의 1개월 축하파티만 놓고 봐도 손보미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도아린은 병실로 돌아왔다. 주현정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물을 마시려 하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얼른 컵에 뜨거운 물을 받고는 적절한 물 온도 맞춰서 주현정에게 건넸다.“천천히 드세요.”“네가 수고가 많아.”“아니에요.”도아린이 밖에서 한 얘기들을 주현정은 다 듣고 있었다. 그녀는 도아린이 그것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무척 궁금했다.이 사실들은 도아린이 배석준에게 질척거리는 것을 알게 된 후에 서대은에게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서대은은 대외적으로 드레스 디자이너지만 공개되지 않게 거대한 관계망을 운영하고 있었다. 만약 서대은이 도아린을 도와 종적을 감추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쉽게 지난 3년을 숨어서 살지 못했을 것이다.이런 것들을 도아린은 주현정에게 말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저 그녀에게 몸조리를 잘하라고 당부했다.주현정은 오후에 죽을 한 그릇 정도밖에 먹지 않았기에 허기가 느껴졌다. 도아린은 아래층에 편의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 내려가서 오트밀을 사서 왔다. 돌아왔을 때는 병실에 두 사람이 와있었다.배건후와 금방 풀려난 배지유였다.배지유는 옷을 갈아입고 머리도 새로 했고 진한 메이크업으로 눈 밑에 생긴 시퍼런 자국을 감췄다.보름 정도 안에 있다가 나온 그녀는 피골이 상접했다.“도아린! 여기가 어디라고 와. 꼭 그렇게 엄마의 화를 돋워야 속이 시원해?”배지유는 달려가서 도아린을 잡으려고 했지만, 배건후한테 손목이 잡혔다.“나랑 약속한 거 잊었어?”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면
“회장님?”김지민은 병실 앞에서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고 답이 없자 살며시 문을 열었다.주현정은 잠이 들었고 병실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김지민은 의아하게 문을 닫고는 핸드폰을 꺼내 배석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배석준이 전화를 받지 않자 손보미에게 걸었다.“회장님께서 대표님이랑 있어?”“회장님은 병원에서 사모님을 돌보고 있잖아?”“아, 알겠어.”“왜 그래, 설마 멀쩡한 사람 하나 간수 못 하는 거야?”김지민은 손보미가 자신을 비아냥거리는 것을 듣기 싫어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낮은 소리로 비웃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여자랑 한편이 되다니, 어디 팔려가도 좋다고 굽신거릴 모양이네.”퍼뜩 고개를 돌린 김지민은 도아린을 째려보았다.자신과 손보미 사이를 이간질하려 들다니, 어림없다.김지민은 계속 앞으로 갔고 도아린은 계속해서 말했다.“손보미가 주목받기 시작한 그 뮤비, 감독님이 원했던 배우는 당신이었어. 네가 얼굴을 비추는 걸 원치 않는다고 손보미가 감독님한테 얘기한 거야. 그러고 나서 손보미가 감독님의 비위를 맞춰주니까 따내게 된 거야.”“...”김지민은 발걸음을 멈추었다.그녀가 금방 손보미의 업무를 맡았을 때 뮤직비디오 캐스팅을 접하게 되었는데 감독님은 이력서를 보지도 않고 동의했었다.그때 김지민은 손보미의 뒤에 있는 스폰서가 손을 쓴 거로 생각했는데 지금 도아린이 언급하는 내용을 듣자니 촬영이 끝나고 나서 감독님이 아쉬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던 게 생각났다.보온통의 손잡이를 잡은 김지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도아린은 벽에 기대서 계속 말했다.“5년 동안 사귀고 갑자기 헤어졌던 너의 그 남자친구는 너를 항상 많이 사랑했어.”“허튼 소리하지 마!”김지민은 뒤돌아 소리쳤고 눈가에는 상처가 스쳤다. 그녀는 바로 웃음을 지으며 마치도 우스운 농담을 들은 것처럼 말했다.“도아린, 나랑 보미 사이의 일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지어낸 이야기는 너무 터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