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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작가: 온유
다들 잠이 든 시간이라 복도부터 문 앞까지 어슴푸레한 등이 두 개만 켜져 있었다.

배건후가 현관 앞으로 나온 그때 거실 불이 갑자기 켜졌다.

“이 늦은 밤에 어딜 가?”

주현정이 걸어 나오면서 물었다.

“무슨 급한 일이길래 아린이까지 버리고 가?”

“...”

배건후는 불편한 몸을 참으며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

주현정은 주부로 살아왔어도 사리 분별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회사 일로 핑계를 댔더라면 말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게...”

배건후가 얘기하려는데 도아린이 다급하게 내려왔다.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도아린은 하도 급하게 내려오는 바람에 계단을 헛디딜 뻔했다. 내려오면서 머리를 매다가 주현정을 보고서야 발걸음을 늦추었다.

“어머님, 제 동생 상태가 안 좋아서 병원에서 오라고 해서요.”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본 주현정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래? 그럼 얼른 가봐. 건후야, 운전 조심하고.”

도아린은 그제야 문 앞에 서 있는 배건후를 발견했다. 그녀가 까발리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는지 얼굴이 어둡기 그지없었다. 배건후가 망신당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녀는 망신당하기 싫었다.

“얼른 가.”

주현정이 문 앞까지 나온 바람에 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배건후의 차에 탔다.

“건후 씨랑 같이 갈 생각 없으니까 저 앞에서 내려주면 돼요.”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어떻게 친동생을 저주해?”

배건후는 그녀가 한밤중에 집을 나오려고 핑계를 댄 거라고 생각했다.

“...”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너무도 피곤했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남동생에게 진짜 무슨 일이 생겨도 배건후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의 마음속에 그녀의 자리는 없었으니까.

가는 길 내내 차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도아린은 택시를 잡기 쉬운 곳에서 내린 후 빠르게 병원으로 달려갔다.

“제 동생 어떤가요?”

“환자분 의식 없이 3년이나 누워있어서 이젠 몸의 장기도 기능을 잃어가고 있어요.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도아린은 몸이 부들부들 떨려 몇 번 눌러서야 도정국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현이 응급실 들어갔어요.”

도정국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과 있으면 알려줘.”

“지금 안 오면 다신 지현이 못 볼 수도 있어요.”

“의사들은 항상 부풀려서 말하잖아. 매번 그렇게 말했는데도 3년이나 살았어.”

도정국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

“배건후한테 도울 디저트를 엠파이어 빌딩에 입주하고 싶다는 얘기 해봤어?”

도아린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하여 힘껏 숨을 들이쉬었다.

“생각해보겠다고 했어요.”

“...”

도정국의 요구라면 항상 들어줬었다. 왜냐하면 배건후는 도아린이 부탁하는 거라면 다 들어줬으니까. 그런데 이번에 생각해보겠다고 한 건 도정국더러 병원에 오라는 핑계일 뿐이었다.

“아린아, 넌 너무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해서 문제야. 지현이 저러고 있는 게 본인은 힘들지 않을 것 같아?”

도정국의 말투가 한껏 사그라들었다.

“그때 지현이는 존엄 있게 떠나고 싶어 했어. 이건 지현이가 원하는 게 아니라고.”

도아린은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꽉 쥔 채 병원 복도에 앉아있었다.

남존여비 사상이 심했던 도정국 때문에 어머니는 아들을 낳기 위해 여러 번이나 유산했었다. 그러다가 결국 40살에 아들을 갖게 되었는데 양수 색전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같은 해 도정국은 재혼하겠다고 했지만 도아린이 상 중이라고 허락하지 않은 바람에 하지 못했었다. 3년 후에 도정국이 다시 재혼하겠다고 했을 때도 도아린은 여전히 반대했다.

도아린은 도정국이 오래전부터 밖에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여자는 돈에 눈이 먼 여자라 절대 남동생에게 잘해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일주일 후에 도지현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목숨은 겨우 건졌지만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다.

그 후로 도정국은 아들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다. 도아린은 학교에 다니면서 남동생을 챙겼고 졸업한 다음 일자리를 찾아 남동생에게 더 좋은 삶을 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졸업식이 있던 그 날, 도지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투신했다.

만약 도아린이 배건후에게 시집가지 않았더라면 도정국은 아마 진작 연명치료 거부 동의서에 사인했을 것이다.

몇 년 동안 동생의 병원비는 전부 배건후가 부담했다. 만약 도아린이 이혼한다면 도지현을 살릴 방법이 없어지고 도정국도 더 막무가내로 나올 것이다.

...

보성 병원 VIP 병실.

배건후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문밖에서 화를 내고 있는 손보미의 매니저를 발견했다.

“무슨 일이에요?”

“사진 몇 장 가지고 점심부터 지금까지 밥도 안 먹고 자책하고 있어요. 내가 무릎까지 꿇고 사정해서야 대표님한테 전화하더라고요. 근데 하자마자 또 후회하면서 계속 울고 있어요.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어요.”

손보미는 문을 등진 채 침대에 앉아있었다. 매니저가 들어온 줄 알고 울면서 나가라고 했다.

“그만 얘기해. 무슨 일이든 내가 혼자서 감당할 테니까 건후 씨는 끌어들이지 마. 이미 결혼한 사람이야. 건후 씨 와이프가 보면 화낼 거라고.”

손보미가 가녀린 몸을 구부리고 어찌나 슬프게 우는지 보는 사람이 다 마음이 아팠다.

“그때 어쩔 수 없이 해외로 나가긴 했지만 내가 용기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야. 건후 씨 이젠 결혼했고 잘살고 있어. 절대 나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게 해선 안 돼. 기자한테 연락해서...”

돌아앉다가 배건후를 본 손보미의 표정이 더욱 서글퍼졌다.

“건후 씨 오늘 저녁에는 안 오는 줄 알았어.”

배건후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작은 일이야, 내가 처리할 수 있어.”

“그리 작은 일이 아니에요.”

매니저가 손보미의 말을 가로챘다.

“어제 교통사고 때문에 뒤에 있던 버스 한 대가 옆으로 기울어 넘어진 바람에 안에 있던 임산부 한 분이 제때 응급조치를 받지 못해서 아이를 잃었대요. 원래는 그리 큰일이 아니었는데 기자들이 보미가 다쳐서 병원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인터뷰하러 왔다가 이마만 다친 거 보고 연예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보미가 특혜를 받아 그 임산부가 아이를 잃은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어요.”

배건후의 표정이 확 굳어지더니 미간 사이에 분노가 가득해졌다.

“먼저 나가 있어.”

손보미가 매니저를 내쫓았다.

“건후 씨, 내가 공개로 사과하면 돼. 나 혼자 해결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다른 일 더 있어?”

배건후가 냉랭하게 물었다.

“없... 없어...”

“말해.”

손보미가 머뭇거리며 문 앞을 쳐다보자 매니저가 다시 들어왔다.

“기자들이 대표님이 보미를 안고 있는 사진이랑 밤새 병원에 있는 사진을 찍었어요. 그러고는 대표님이랑 다시 잘해보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내서 불쌍한 척한 거래요. 효과가 아주 좋았다면서 곧 결혼 발표도 할 거라고 했어요.”

배건후의 두 눈에 핏발이 선 것 말고는 다른 기색이 없었다. 그의 태도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던 손보미가 조심스럽게 떠보았다.

“이번 일이 내 일에 영향을 준다면 하늘이 나한테 주는 벌이라 생각할게.”

배건후는 라이터를 꺼내 빙빙 돌렸다. 탁하고 켰다가 다시 끄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미약한 불빛에 그의 차가운 이목구비가 밝아졌다가 또 어두워졌다.

한참 후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보미야, 공인이면 항상 자신에게 엄격해야 해. 한순간의 어리석은 행동은 네가 힘들게 쌓아온 명예와 지위를 몽땅 무너뜨릴 수 있다고.”

손보미는 그대로 멍해졌다. 배건후가 한밤중에 전화를 받고 걱정돼서 달려온 줄 알았다.

예전에 그녀가 물이 뜨겁다고 하면 컵 두 개로 따르면서 식힌 다음에 먹여주던 그였는데 오늘 저녁에는 위로가 아니라 꾸짖음이었다.

“건후 씨...”

손보미는 더욱 서글퍼졌다.

“내가 데리러 오라고 해서 탓하는 거야? 난 그저 건후 씨한테 얼굴 보고 사과하고 싶었을 뿐이야. 일이 이렇게 심각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고...”

배건후는 라이터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결백하다면 블랙박스를 언론에 넘겨.”

그의 모습이 복도에서 점점 사라졌다. 손보미는 화를 내며 베개를 매니저에게 던졌다.

“이 방법이 건후 씨한테 먹히지 않는다고 했지? 믿지 않더니... 이렇게 되면 어떻게 다시 건후 씨한테 다가가?”

매니저가 베개를 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헤어진 몇 년 동안 너무 보고 싶어서 옛 생각 하다가 교통사고 난 거라고 했어야지... 대표님 앞에서 못 잊은 척하면 무조건 감동할 텐데.”

손보미는 뭔가 생각난 듯 코웃음을 쳤다.

“지금 뭐라 말해봤자 소용없어. 구급차에서 내가 춥다고 안아달라고 했을 때도 건후 씨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어.”

매니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있었다.

“그때 네가 떠난 후에 대표님이 널 잊지 못해 맨날 술이나 마시다가 도아린이 기회를 얻은 거 아니었어?”

손보미의 눈빛이 점점 그윽해졌다. 그때 일이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조금 다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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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수속하러 갈 건데요?”도아린은 문 앞까지 쫓아오다가 하얀빛이 번쩍이자 얼굴을 슬쩍 피했다.그녀가 품에 있는 쇼핑백을 자세히 들여다볼 때 배건후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계단 아래에서 들려왔다.“기분 봐서.”한편 조수현 기사가 차 문을 열고 배건후를 안으로 모시며 나지막이 말했다.“요즘 카풀앱으로 봉변당하는 여성분들이 꽤 많다고 하더라고요.”배건후는 3층 룸을 힐긋 보더니 허리 숙여 차에 올라탔다.“쟤는 사고당해도 싸.”도아린이 쇼핑백을 들고 나왔을 때 마이바흐는 어느덧 떠나가고 없었다. 배건후도 참, 그녀가 분명 싫다고 했는데 기어코 목걸이를 건넬 줄이야.그녀는 비록 갖기 싫었으나 개자식이 준 물건을 길바닥에 내다 버릴 순 없었다.도아린이 길옆에서 차를 기다릴 때 검은색 폭스바겐이 불쑥 앞에 세워졌다.“안녕하세요 사모님, 마침 근처에 있었는데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우정윤이 차에서 내려오며 말했다.마침이라고? 이런 우연을 누가 믿을까?다만 찜통더위에 땀으로 흠뻑 젖었던지라 도아린은 일단 차에 올라탔다.집에 도착한 후 소유정이 그 루비 목걸이를 보더니 3초 동안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 폭소를 터트렸다.“하하하...”그녀는 소파에서 굴러떨어진 채 도아린의 다리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이게 바로 배건후 그 개자식 취향이야? 하하... 역시... 하하하...”“웃다 숨넘어갈라.”도아린이 상자를 닫으며 말했다.소유정은 어느새 웃다가 눈물이 흘러내릴 지경이었다.“그건 그렇고 수백억대 목걸이라 꽤 소장 가치가 있어 보여. 이건 진심!”그녀는 목걸이를 꺼내 도아린에게 대보았다.“그래도 한번 착용은 해주라. 사진 찍어서 나중에 너 실컷 놀리게.”“찍고 싶으면 혼자 알아서 찍던가. 대신 찍을 바엔 여러 각도로 찍어. 모델용으로 쓰게.”“왜? SNS에 올리게?”소유정이 하찮은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도아린은 매번 배건후에게 선물을 받을 때마다 SNS에 지정된 몇 명을 맨션 해서 피드를 올리곤 한다.절친으로서

  • 또 한 번의 거절   제12화

    손보미의 스캔들이 세간을 발칵 뒤집어놓았고 그녀가 딱히 부인하지 않는 건 인정과도 다름없었다.도유준이 성급하게 돈을 요구하는 건 아마도 도아린이 차이면 이용가치가 없어질까 봐 걱정한 듯싶다.엠파이어 빌딩에는 각 분야의 엘리트들이 모였고 물론 훌륭한 변호사도 있었다. 도아린은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에 알고 지내던 변호사 한 분을 찾아가 취지를 설명했다.“재산을 절반씩 나누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장수현 변호사는 배건후의 변호사와 법정에 설 생각을 하니 식은땀이 저절로 났다.“제가 한발 물러서면요?”도아린은 애초에 돈을 가질 생각이 없었고 단순히 그를 엿 먹이고 싶었을 뿐이다.장수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중요한 건 배건후 대표님도 이혼 의사가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입니다. 만약 대표님이 이혼에 동의하지 않으면 아주 긴 법정 싸움이 될 거예요. 아린 씨가 상대방이 잘못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하는 한 법정에서는 화해를 도모할 거예요.”도아린은 가방끈을 꽉 잡았다. 배건후가 손보미를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어찌 그녀에게 명분을 주고 싶지 않을까.도아린과 배건후는 비밀 결혼이라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르는데 법정 싸움으로 번진다면 손보미는 고스란히 치욕을 당해야 할 것이다.그러니까 배건후가 이혼을 거부하는 거겠지.“그럼 이렇게 해요.”도아린이 큰 결심을 내린 듯싶었다.“내일 저 대신 건후 씨 한번 만나 뵙고 오세요. 건후 씨가 먼저 이혼을 언급한 것처럼 이혼협의서를 작성하라고 하세요. 재산 분할은 어떻게 하든 상관없으니 이번 일을 소리 없이 진행하고 그 사람 명예에 절대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장수현은 행동파답게 다음날 바로 배건후에게 소식을 전했다.모건 그룹은 오전 내내 먹구름이 가득하고 임원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비서실은 심지어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할 지경이었다.우정윤이 커피를 들고 들어오다가 담배 연기로 꽉 찬 대표이사 사무실에 하마터면 화재 신고를 할 뻔했다. 입사해서부터 지금까지 그는 대표님

  • 또 한 번의 거절   제13화

    지금 그가 먼저 도아린에게 짐을 싸달라고 부탁하고 있고 말투도 최근 들어 가장 누그러진 편이다. 이에 도아린은 문득 마음이 씁쓸해졌다.그녀가 아무 말 없자 배건후도 말을 잇지 않았고 두 사람은 휴대폰을 든 채로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요즘 SNS에 돌고 있는 밈이 하나 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만약 당신 남편이 달마다 용돈을 2천만 원씩 주는 대신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수 있나요?]이에 ‘좋아요’가 가장 많이 달린 댓글은 [1초라도 망설이면 그건 돈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였다.이 논리대로라면 배건후보다 더 완벽한 후보는 없다. 달마다 도아린에게 한도 제한 없는 카드를 줄 뿐만 아니라 고급 저택에 좋은 차, 게다가 도우미들까지 고용해서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으니까.어디 그뿐인가,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뭣 하나 빼놓을 게 없는 완벽한 남편감이었다. 두 사람의 신분 차이가 현저하지만 배건후는 도씨 일가에서 원하는 자원은 최대한 만족시켜주고 있다.돈도 몇 푼 못 벌면서 시답잖은 일만 벌이고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과 비하면 배건후는 너무 괜찮은 편이다.도유준은 그가 일편단심이라고 했는데 손보미에게 줄곧 일편단심인 건 사실이다. 그의 베프 성대호는 만났던 여자친구가 산을 이룰 지경이니까.어쩌면 도아린이 좀 더 ‘너그러워’진다면 이 결혼생활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 듯싶다.그녀가 이제 막 한 걸음 물러나려고 하는데 전화기 너머로 대뜸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건후 씨, 나 다 씻었어.”순간 도아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미친!’‘방금 나 스스로한테 가스라이팅한 거야?!’왜 굳이 흠집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완벽한 사람을 찾으려고 고집한 걸까?연성에 널리고 널린 게 훌륭한 남자들인데 말이다.“약속 꼭 지켜요.”말을 마친 도아린이 전화를 끊었다.그 시각 빨간색 람보르기니가 맞은 편에서 질주해 오더니 모건 그룹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도아린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배건후는 슬슬 짜증이 몰려왔고 짙은 얼굴에 싸늘한

최신 챕터

  • 또 한 번의 거절   제580화

    스태프는 도아린에게 눈짓을 했고 잠시 후 그녀는 영문을 알아보러 갔다. 배지유는 득의양양한 눈빛으로 변슬기를 보다가 시선을 옮겨 서서히 도아린과 눈을 맞추었다.“도아린, 내가 여기 설 줄은 몰랐지?”그녀의 말은 두 가지 뜻이 있었다. 하나는 그녀가 변슬기의 작품을 망쳤는데도 대회에 참가했고 수상까지 했다는 의미였고 하나는 그녀의 다리가 일반 사람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였다.“너는 나를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싶겠지만 아쉽게도 너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어. 누가 뭐래도 나는 너보다 잘살고 모든 사람보다 다 잘 살 거야! 화나지?”배지유는 이 말을 물으면서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이 얼마나 오만한지 모른다.도아린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잠시 후에도 계속 이렇게 기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나는 남은 인생 다 이렇게 기뻐하면서 살 거야! 우리 오빠가 너 때문에 나를 처벌할 거로 생각했어? 전에 나를 다른 도시로 보낸다고 한 것도 다 너 속인 거야! 오빠는 동생이 나 하나뿐인데 나를 아껴줄 시간도 모자라!”배지유는 득의양양하여 방자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2분 정도 기다리다가 도아린이 그녀에게 상장을 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래, 지금 개인적인 원한을 이렇게 갚겠다는 거야?”육청아가 그녀의 손을 툭툭 쳤다. 배지유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서 보았는데 쟁반을 든 스태프가 무대 곁으로 돌아가서 조직위원회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게 보였다.누군가가 배지유를 쳐다보았는데 표정이 복잡했다.“무슨 일이죠?”배지유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침착해요. 아래에서 사람들이 영상을 찍고 있어요.”육청아는 관객을 향해 미소를 유지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마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에요.”“흥, 누군가가 일부러 저를 골탕 먹이려는 거겠죠.”배지유는 도아린을 째려보고는 고개를 쭉 빼 들고 조직위원회를 쳐다보았다.그런데 그들이 자신을 보는 눈빛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관객들도 문제가 생긴 것을 발견했다. 2등을

  • 또 한 번의 거절   제579화

    배건후는 그 말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강재민이 말끝마다 ‘우리 아린 씨’라고 해서 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는 두통을 참으면서 도아린의 눈에서 뭔가 읽을 수 있기를 바랬다.흑백이 분명한 도아린의 눈동자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잠시 후, 배건후는 뒤돌아 떠났다.강재민은 차갑게 피식거리고는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쳐다보았다.“이런 집안에서 어떻게 2년이나 버텼어요?”배건후는 넓은 곳으로 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니코틴이 폐에서 맴돌았지만, 가슴속의 답답함을 해소하지는 못했다.우정윤이 다가와서 담배를 적게 피우라고 일깨웠다. 요즘 담배를 너무 자주 피워 건강이 걱정되었다.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멀리서 육청아와 함께 대회장으로 들어가는 배지유를 보았다. 그녀는 의족을 착용했지만, 아직 적응하지 못해서 걸을 때 살짝 부축을 받아야 했다.하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저 발을 삐었다고 생각할 뿐 의족이라는 것을 보아내지 못할 것이다.“나는 공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도아린을 벼랑 끝으로 떠미는 것인 줄 몰랐어.”“...”우정윤은 상사가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배건후도 설명하지 않았고 담배를 뻑뻑 피우기만 했다.도아린이 떠나고 나서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들이었는지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어떻게 깨닫게 되었는가? 어쩌면 비서팀에서 자기들끼리 의논하는 얘기 중에서 깨닫게 되었을 수도 있고, 또 일을 처리하는 강재민의 완전히 반대되는 태도를 보고 깨달았을 수도 있고, 혹은 인터넷에서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 언론을 보고 그랬을 수도 있다...그는 눈이 뭔가에 가려져 있었던가?도아린을 곁에 두었을 때는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고 잃고 나서야 자신이 잘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배건후는 담배를 다 피우고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린 뒤 조직위원회 자리로 걸어갔다.도아린은 게스트석에 앉아있었는데 관중석을 마주하고 있었다. 강재민은 배건후와 나란히 앉아있었다.강재민은 배건후를 자극한 게 모자랐는지 굳이

  • 또 한 번의 거절   제578화

    배건후의 심장은 마치 들끓는 기름에 던져진 것 같았다. 분노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아 그는 다른 것들은 생각할 새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똑바로 좀 해요...”도아린의 화사한 웃음이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강재민은 한 손으로 도아린의 턱을 잡고 한 손으로 속눈썹을 들고 있었다. 눈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있었지만, 입가의 미소는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배건후 씨는 예의를 개나 줘버렸어요? 노크도 안 하시네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그런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 두 사람의 거리가 무척 가까운 것이 그를 아주 불쾌하게 했다.배건후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고 강재민은 기분이 갑자기 좋아졌다.그는 도아린의 얼굴을 바로 조절하더니 웃으며 말했다.“한 번만 더 기회를 줘요. 제대로 붙일 수 있어요.”도아린은 살짝 고개를 들고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그에게 맡겼다.강재민은 커플 간의 재미라면서 그녀에게 눈썹을 그려주고 싶었는데 도아린은 거절했다. 그녀의 눈썹은 색깔이 자연스러워서 진한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굳이 눈썹을 그릴 필요가 없었다.강재민은 진행자가 속눈썹을 붙인 것을 보고 굳이 도아린에게 붙여주겠다고 했다. 도아린은 그 속눈썹이 꽤 자연스러운 것 같아 동의했다.접착제가 꽤 세서 삐뚤게 붙였다가 뗄 때 진짜 속눈썹까지 몇 가닥 떼어져서 아팠다.“눈을 떠서 한번 봐봐요.”강재민은 한 손가락으로 도아린의 턱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자신의 작품에 무척 만족한 것 같았다.“예뻐요. 우리 아린 씨가 제일 예쁘네요.”그는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의 손에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어 웃음은 더욱 찬란해졌다.“제 영혼까지 다 빼앗긴 건 같네요.”도아린은 이렇게 돌직구 적인 강재민의 사랑표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가 외국에 있은 지 오래되어 성격이 많이 명랑하고 개방적이기에 말이 직설적이었다.이런 돌직구는 도아린이 예상치도 못하게 와서 꽂혀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시선을 피했고 아무

  • 또 한 번의 거절   제577화

    육청아는 자랑스럽게 말했다.“민간조직이죠. 조직에는 많은 대단한 분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세요.”비서는 서류를 갖고 들어왔다. 육청아는 비서가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계속했다.“배 대표님께서 LY와 합작하신다면 손해는 절대 없고 이득만 있을 겁니다.”배건후는 차갑게 피식거렸다.“이익이 없이는 사람이 움직이지 않죠. 원하는 게 뭡니까?”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육청아는 시선을 피했고 책상 위의 피규어를 바라보았다.배건후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피규어는 안돼요.”“...”육청아의 웃음이 굳었다.그녀는 오자마자 비서한테 배건후의 취미를 물었었다. 비서는 그의 책상 위에 컴퓨터와 서류만 있고 사진이 한 장도 없다고 했다. 예전에 그가 비밀리에 결혼했을 때 모두 루머라고 생각했으니 사모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하지만 손보미와 약혼한다는 소식을 발표한 후로 대표님의 책상에는 수제 피규어 인형이 하나 늘었다.그 피규어는 표백제를 사용했다는 것을 단번에 보아낼 수 있었다. 두 갈래의 땋은 머리가 없었더라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보아내기 어려웠다. 대표님이 첫사랑에 대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배 대표님 그렇게 손보미 씨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면서 왜 이미지세탁을 도와주지 않는 건가요?”육청아는 그 피규어를 훑어보았다. 피규어의 얼굴은 손보미와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물론 손보미 씨의 명성이 바닥을 치고 있지만, 대표님이 돕고 싶다면 아직 되돌릴 기회는 있잖아요.”배건후는 시선을 내려 서류를 보았고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육청아에게 건넸다.“청아 씨가 책임지고 진행하세요. 프로젝트를 따내고 나서 다시 합작에 관해 얘기합시다.”육청아는 서류를 받아들고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배 대표님께서 제 상사와 만나는 그 순간을 아주 기대하고 있습니다.”그녀는 얇은 허리를 흔들거리며 사무실을 나갔고 배건후의 눈동자는 따라서 어둡게 가라앉았다.주말, 해남대학교의 디자인

  • 또 한 번의 거절   제576화

    여자는 음식점에 들어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났다.안민아 모녀는 그 뒤를 따라 자리를 떴다.도아린이 무슨 볼거리가 남았냐고 강재민한테 물으려고 하는데 변슬기한테서 전화가 왔다.“도 선생님, 저 변슬기에요. 지금 바쁘세요?”“괜찮아요. 얘기하세요.”“제가 방금 민아와 민아 엄마를 봤는데 두 사람이 지금...”도아린은 변슬기가 그 음식점을 나오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사람이 적은 곳으로 가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저들이 누구에게 함정을 놓으려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안민아가 그 여자한테 돈을 주는 것을 봤어요. 그 여자한테 가서 유혹하라고 하던데 선생님의 남자친구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게 아닌가 걱정돼요.”“하하.”도아린이 웃었다.“고마워요. 경계할게요. 슬기 씨는 거기서 친구랑 식사하고 있어요?”“네?”변슬기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다.변슬기는 도아린이 2층 난간 쪽에서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바로 달려왔다.강재민과 만난 변슬기는 조금 어색해하는 것 같았고 강재민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면서 두 사람에게 얘기를 나눌 시간을 주었다.“아빠랑 현정 아줌마께서 쇼핑하고 계세요. 저는 병풍처럼 따라다니고 있었죠.”변슬기는 강재민의 뒷모습을 힐끔 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선생님 남자친구는 혼혈이세요? 정말 멋져요!”도아린은 떠보듯이 물었다.“두 분이 만나는 걸 슬기 씨 어머님께서는 괜찮으시대요?”“괜찮죠. 아줌마와 아빠의 관계는 남녀 사이의 감정을 훨씬 초월한 관계에요. 두 분이 쇼핑하는 건 아마도...”변슬기는 생각하다가 비교적 적절한 단어를 골랐다.“유명한 곳을 도장 깨기를 하러 다니시는 것 같아요. 두 분이 얘기를 나누시는 주제는 투자가 아니면 자식들 얘기세요. 두 분 본인의 얘기는 잘 안 하세요.”도아린이 계속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생각이 또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그녀는 주먹을 쥐었고 저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해졌다.“도 선생님, 주말에 우리 학교에서 디자인 대회를 진행할 텐데 와서

  • 또 한 번의 거절   제575화

    그는 안도하면서 마음에 든다는 듯 강재민을 쳐다보았다.진범준은 문득 도아린과 강재민이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드럽고 만만해 보이는 성격이지만 사실은 여우 같은 면이 있고 늘 생각지도 못한 수를 써서 상대의 화를 돋웠지만, 또 어쩔 수 없게 만들었다.“그들이 믿을 수 있게 아저씨는 요즘 무척 바쁜 척을 해야 할 겁니다.”“알고 있어!”진범준은 차를 다 마시고 일어서서 일부러 고뇌하는 듯 윤명희를 쳐다보았다.“나는 회사로 가봐야겠어. 요즘 일찍 출근하고 늦게 들어올 거야. 당신도 만날 사람이 있으면 가서 만나보는 게 좋아. 손실을 최소한도로 줄이자고.”“지금 바로 친구를 만나러 가려고요.”부부는 모두 외출했고 강재민도 도아린을 데리고 나왔다.집에는 차화영만 남아있었고 저녁 식사 때도 혼자뿐이었다.연달아 3일 동안 그녀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추궁 끝에 가정부는 모두 회사의 손실을 최소로 줄이기 위해 바쁘다고 했다.차화영은 입맛이 없어졌고 절대 아들이 피해를 보지 말기를 기도했다....“이 방법이 통한다고?”진옥경은 선글라스를 쓰고 딸과 함께 백화점의 음식점에 앉아있었다.“도아린의 시어머니가 바로 내연녀 문제로 이혼했어요. 삼촌의 돈이 모두 숙모한테 있잖아요? 문제의 근본을 해결하자고요. 두 사람이 이혼한다면 할머니는 무조건 삼촌에게 저희를 도와주라고 핍박할 거예요.”안민아는 자신이 미리 준비한 사람이 도착한 것을 보고 분석을 멈추고는 진옥경과 함께 지켜보았다.진범준은 매장에서 윤명희를 위한 마스크팩을 사고 있었다. 계산을 마치고 뒤돌자마자 누군가가 쏟은 주스에 진범준은 흠뻑 젖었다.“죄송해요! 죄송해요!”여자는 다급하게 사과했고 진범준의 몸에 입은 명품 정장을 보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제가 외투를 드라이해서 돌려드릴게요!”“괜찮아요.”진범준은 매장 직원이 건넨 휴지로 먼저 닦았다.“제가 화장실로 가서 씻어드릴게요. 건조기에 말리면 빨라요.”여자는 말하면서 진범준의 옷을 벗기려 했다.진범준은 빠르게 뒤로 한발 물

  • 또 한 번의 거절   제574화

    안민아는 크게 기뻐하면서 세게 진옥경을 밀쳐내고 강재민의 앞으로 달아갔다.그녀는 도발적으로 도아린을 쳐다보고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재민 씨, 제 말은 다 사실이에요! 언니가 배건후한테 넥타이 클립을 골라주었는데 엄청 비싼 제품이에요! 언니는 처음부터...”짝!안민아의 얼굴이 돌아갔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강재민은 매너가 좋기로 소문난 사람인데 그녀에게 손을 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이건 그저 경고일 뿐이에요.”강재민은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고는 쓰레기통에 툭 버렸다.안민아의 얼굴에 손을 댄 게 무척 더러운 것을 만진 것처럼 행동했다.“아린 씨를 모욕하는 말이 다시 내 귀에 들어온다면 이렇게 쉽게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진옥경은 딸의 한쪽 얼굴이 빠르게 부어오르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자신을 제일 아끼는 차화영을 쳐다보았지만, 차화영이 못 본 척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또 진범준 부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오빠, 올케, 민아가 맞고 있는 걸 보고만 있어?”“옥경 씨, 안과에 좀 가봐요. 민아가 맞은 것만 보이고 민아가 제 딸을 모욕한 건 안 보이나 봐요?”윤명희는 차갑게 피식거렸다.“그게 아니면 당신 딸의 체면은 중요하지만 제 딸의 체면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인가요?”진옥경은 그 말에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안민아가 강재민에게 도아린의 행실을 고발하는 건 잘못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누가 도아린한테 그렇게 행동하라고 했는가!안민아 한 사람만 본 것도 아니고 배건후의 현재 여자친구도 봤다고 하니 강재민이 알게 되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그래요, 그래요!”진옥경은 연달아 말을 반복했다.“우리 모녀는 오늘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그녀는 안민아를 끌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는데 마치 이 가문에서 그들에게 빚진 게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윤명희가 딸을 보호해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안민아가 그렇게 얘기하는 걸 듣고 강재민이 불쾌해할까 봐 걱정했다.그녀는 강재민의 반응을 계속 살폈고

  • 또 한 번의 거절   제573화

    안민아는 대답하지 않았고 시선이 요동쳤다.차화영은 외손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는 빠르게 딸의 손을 뿌리치며 선을 그었다.“옥경아, 얼른 돌아가. 사건이 해결되면 다시 와.”그녀는 남은 인생을 편히 보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두 아들에게 달렸다. 사건이 뉴스에 나올 정도로 심각한데 만약 진씨 가문이 사건에 연루되어 무너진다면 그녀는 농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그녀가 남편을 잡아먹었다고 말하던 고향 사람들은 이번에도 그녀에게 자녀들까지 잡아먹었다는 죄명을 씌워 그녀를 탈탈 털려고 들것이다.진옥경은 물러서지 않고 손을 뻗어 차화영을 잡았고 차화영은 빠르게 피했다.“엄마가 독하다고 탓하지 마. 이번 일은 너무 심각해!”차화영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딸을 쳐다보지 않았다. “엄마, 저를 도와 어려움을 해결해달라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저한테 돌은 던지면 안 되죠. 발을 붙이고 쉴 곳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저희를 나가 죽으라는 거잖아요!”“사기를 칠 때는 이런 결말일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어요?”강재민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나른하게 도아린의 곁에 앉아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당장 돌아가세요. 오늘 당신을 본 적 없는 것으로 하죠.”진옥경은 예의를 차릴 여유가 없었고 불쾌하게 강재민을 쳐다보았다.“재민 도련님, 제 오빠와 올케도 아무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저희 집안일에 참견하지 마시죠.”“아저씨와 아주머니께서 아무 얘기도 하지 않으신 건 당신의 체면을 고려해주었기 때문이죠. 당신이 스스로 분수를 알고 떠나길 바라는 거죠. 당신이 스스로 체면을 저버렸으니 저도 봐줄 필요가 없는 거고요.”강재민은 도아린을 힐끗 쳐다보았다. 요염한 그 시선에는 애정이 가득했고 다시 진옥경 모녀에게로 시선이 향했을 때는 한없이 차가웠다.“도유준이 안씨 가문과 함께 계략을 꾸며서 강씨 가문의 이름으로 사기를 쳤죠. 저는 이 사건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린 씨가 제 여자친구이기 때문에 아린 씨와 관련된 일이라면

  • 또 한 번의 거절   제572화

    “악!”진옥경이 비명을 지르자 거실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꽃다발을 들고 있는 강재민과 그걸 받아들려고 하던 도아린도 그녀에게로 시선이 향했다.“왜 그래요? 제 꽃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강재민의 얼굴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지만, 진옥경 모녀가 느낄 수 있는 불쾌감을 내뿜고 있었다.“아니, 아... 그게 아니라...”진옥경은 안민아를 쳐다보았고 안민아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꽃이 너무 예뻐서 놀라워서 그래요. 엄마가 기뻐서 그러시는 거예요.”“맞아요, 기뻐서 그래요.”진옥경은 딸의 말을 따라 한마디 덧붙였다.강재민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었고 꽃을 도아린의 앞으로 내밀었다.“아린 씨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붉은 장미꽃이 제 열정적인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해서 선택하게 되었어요. 아린 씨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고마워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도아린은 꽃을 받아들고 가정부에게 큰 꽃병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진옥경은 딸이 또 자기를 꼬집을까 봐 얼른 손을 차화영 쪽에 놓았다. 역시 안민아는 또 손을 잡으려 했지만, 허탕을 치고 나서야 엄마가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자신의 손목을 꼬집었다.도아린은 강재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늘 말해왔었는데 지금은 강재민이 선물한 꽃을 받아주었다. 그녀는 강재민을 완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넣기 위해 밀고 당기기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순진하게도 그녀의 말을 믿었다.강재민의 시선이 갑자기 안민아에게로 향했다. 안민아는 미처 질투와 분노로 얼룩진 눈빛을 감추지 못했고 강재민과 눈이 마주치자 빠르게 시선을 피하고는 애써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두 분은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진씨 가문에서 구멍을 메꿔주기를 바라는 거예요?”강재민은 짐짓 엄숙해져서 마치 그들을 금방 본 사람처럼 굴었다.진옥경은 서둘러 손을 저었다.“아니에요. 도유준이 잘못한 일은 본인이 책임져야죠.”“안민아와 도유준은 부부이고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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