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배건후의 차를 알고 있는 경비원이 허리 굽혀 인사했다.“대표님, 아린 씨도 자주 농땡이 치는 건 아니에요. 근데 다른 도우미로 바꾸고 싶다면 소개해드릴게요...”관리사무소 팀장은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배씨 가문의 도우미들은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썼다. 게다가 월급이 높을 뿐만 아니라 재벌 2세를 만날 기회가 많기에 도아린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사람이 많았다.배건후는 차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카리스마는 모두를 압도해 버렸다.환하게 웃던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연성의 7월은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지만 사람들은 마치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1분 후, 유리창이 서서히 내려오면서 배건후의 어두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할 일 다 하고 여기서 수다질이야? 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꺼져.”관리사무소 팀장은 놀란 나머지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고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배건후의 언행은 상업계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런 그가 관리사무소를 내쫓는다면 관리사무소는 연성에서 더는 발을 붙이기 어려울 것이다.사람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배건후의 날카로운 시선이 도아린에게 머물렀다.“타.”“난 할 일이 있어서요...”그러자 배건후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배건후와 거리를 유지하려고 차 문 쪽에 최대한 붙어 앉았다.마이바흐가 맨션을 나간 후 배건후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가 하얀 연기를 내뱉으며 싸늘하게 말했다.“평소에는 기고만장하다가 침대 위에서는 힘 한 번 쓰지 못하는 남자?”“...”도아린은 시선을 내리깔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담배를 다 피운 배건후가 서류를 툭툭 두드렸다.“이거 무슨 뜻이야?”도아린이 힐끔 쳐다보니 그녀가 작성한 이혼 합의서였다.“이혼하고 싶어요.”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숨 막힐 듯이 답답해졌다.운전기사 조수현은 당장이라도 도망
전화를 받으면서 도아린을 쳐다보는 배건후의 두 눈에 경멸과 조롱이 가득했다. 관리사무소 사람마저 그녀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데 무슨 자격으로 이혼 얘기를 꺼내겠는가?도아린은 배건후가 보는 앞에서 더러운 장갑을 팀장의 얼굴에 던져버렸다. 팀장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노트와 펜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관리사무소 팀장으로서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으면 처음부터 다시 배워요! 날 내쫓는다고 해도 당신은 에이트 맨션에 못 들어가요. 배건후 씨는 여우같이 교활한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당신도 여우 같긴 한데 나이가 너무 많아요!”어차피 곧 떠날 거라 참고 싶지 않았고 이참에 배건후를 한 방 먹이는 것도 나름 괜찮았다.배건후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도아린은 집 안으로 들어가 물을 따라 마셨다. 방문이 열려있었는데 무언가가 현관의 거치대에 놓여있었다.짐 정리를 다 마치고 나와서야 거치대에 놓여있는 물건이 그녀의 휴대전화라는 걸 알았다.‘내가 휴대전화를 건후 씨 차에 떨어뜨려서 다시 들어온 건가?’이번에 도아린은 약삭빠르게 차고에 있던 카이엔을 몰고 나갔다.카이엔은 두 사람이 결혼할 때 배건후가 준 예물 중 하나였다. 평소 그녀는 별로 외출하지 않았고 또 연성에 차가 막혀 계속 차고에 가만히 세워두기만 했다.배건후의 재산을 나눠 가지진 못하더라도 이 차는 혼전 재산이라 그녀의 것이었다. 무뚝뚝하고 매정한 남자를 곧 떠날 거란 생각만 하면 도아린은 기분이 너무 좋아 액셀을 미친 듯이 밟았다.운전하는 중에 절친 소유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기사를 보고 걱정돼서 전화한 것이었다. 도아린이 힘들어할까 봐 기분도 풀 겸 술 먹으러 가자고 하자 도아린은 모든 걸 정리한 다음에 다시 축하하자면서 거절했다.아파트 청소를 마치긴 했지만 도아린은 처음 자는 침대에 눕기 전에 침구청소기로 청소하는 버릇이 있었다. 침대 위에서 청소기를 돌리는데 부동산 중개인이 갑자기 들어왔다.“문 한참이나 두드렸는데 못 들은 것 같아서 문 열고 들어왔어요.”도
“걔가 작정하고 접근하지만 않았어도 오빠는 걔랑 결혼하지 않았을 텐데.”배지유가 화를 내며 말했다.“엄마가 아무리 좋은 한약을 먹여봤자 무슨 소용이에요? 오빠는 그 여자랑 애를 가질 생각이 전혀 없는데.”손을 닦으면서 나오던 도아린은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다시 뒷걸음질 쳤다.“오빠, 난 친구들 만나도 오빠가 결혼했다는 얘기를 못 하겠어요. 저런 여자라는 게 알려지면 오히려 망신이에요. 보미 언니 이젠 톱스타가 됐으니까 엄마도 더는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오빠가 말만 하면 내가 엄마한테 말해줄게요.”“보미 지금 한창 일할 때야...”배건후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역시 그녀의 예상대로 이혼을 동의하지 않은 건 손보미가 내연녀라는 욕을 먹을까 봐서였다. 배건후는 언제든지 항상 손보미의 이익을 가장 먼저 생각했다.도아린은 코끝이 찡하면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녀의 존엄 따위는 이미 배건후에게 짓밟혀서 가루가 되고 말았다. 지금 이대로 나간다면 체면마저 모두 잃을 것 같았다.“으악!”차를 내오던 도우미가 도아린과 부딪히고 말았다. 도우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사모님, 손이...”“괜찮아요.”도아린의 손이 뜨거운 물에 데어 시뻘겋게 됐다.그때 배건후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주방으로 끌고 가서 찬물로 헹궜다.가뜩이나 기분이 안 좋았던 배건후는 도아린이 데고도 찍소리도 하지 않자 더 답답하고 화가 났다.“내가 널 터치하지 않는다는 걸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어?”“...”도아린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사실 그녀는 말한 적이 없었다. 배지유가 에이트 맨션에 갔을 때마다 배건후가 없는 걸 보고 배건후가 도아린과 함께 살지 않는다고 확신했던 것이었다.거의 사실이나 다름없었기에 도아린은 아니라고 설명하지도 않았다.“내 말이 틀렸나요?”“난 너한테 관심이 없어.”“관심이 없으면서 왜 이혼 안 하는데요?”아무렇지 않은 도아린의 태도에 배건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담배를 꽉 쥐어 손등에 핏줄이 다 튀어
다들 잠이 든 시간이라 복도부터 문 앞까지 어슴푸레한 등이 두 개만 켜져 있었다.배건후가 현관 앞으로 나온 그때 거실 불이 갑자기 켜졌다.“이 늦은 밤에 어딜 가?”주현정이 걸어 나오면서 물었다.“무슨 급한 일이길래 아린이까지 버리고 가?”“...”배건후는 불편한 몸을 참으며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주현정은 주부로 살아왔어도 사리 분별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회사 일로 핑계를 댔더라면 말리진 않았을 것이다.“그게...”배건후가 얘기하려는데 도아린이 다급하게 내려왔다.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도아린은 하도 급하게 내려오는 바람에 계단을 헛디딜 뻔했다. 내려오면서 머리를 매다가 주현정을 보고서야 발걸음을 늦추었다.“어머님, 제 동생 상태가 안 좋아서 병원에서 오라고 해서요.”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본 주현정이 다급하게 말했다.“그래? 그럼 얼른 가봐. 건후야, 운전 조심하고.”도아린은 그제야 문 앞에 서 있는 배건후를 발견했다. 그녀가 까발리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는지 얼굴이 어둡기 그지없었다. 배건후가 망신당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녀는 망신당하기 싫었다.“얼른 가.”주현정이 문 앞까지 나온 바람에 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배건후의 차에 탔다.“건후 씨랑 같이 갈 생각 없으니까 저 앞에서 내려주면 돼요.”“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어떻게 친동생을 저주해?”배건후는 그녀가 한밤중에 집을 나오려고 핑계를 댄 거라고 생각했다.“...”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너무도 피곤했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녀의 남동생에게 진짜 무슨 일이 생겨도 배건후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의 마음속에 그녀의 자리는 없었으니까.가는 길 내내 차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도아린은 택시를 잡기 쉬운 곳에서 내린 후 빠르게 병원으로 달려갔다.“제 동생 어떤가요?”“환자분 의식 없이 3년이나 누워있어서 이젠 몸의 장기도 기능을 잃어가고 있어요.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도아린은 몸
도아린은 홀로 쓸쓸하게 복도에 앉아있다가 응급조치를 마쳤다는 간병인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도지현은 다시 한번 저승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의사는 도지현의 각 수치가 한계에 도달했다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도아린은 의사에게 허리 굽혀 인사한 후 병실로 돌아와 남동생의 팔을 어루만졌다.“이모, 가서 쉬세요. 지현이랑 단둘이 있고 싶어요.”간병인은 도아린이 자존심이 강해서 남들에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럼 옆에 탕비실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불러요.”도지현은 무릎 밑으로 두 다리를 절단했고 허벅지 근육도 거의 다 수축해서 다리가 팔보다도 더 가늘었다.그녀보다 도지현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픈 몸 때문에 힘들어도 늘 밝았던 동생이었다.장애인 농구팀에 입단한 후에는 열심히 운동하고 생활을 공유하기도 했다. 절대 시합을 한 게임 졌다고 목숨을 끊을 사람이 아니었다. 하여 그녀는 도지현이 깨어나서 그날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말해주길 바랐다.두 팔을 다 마사지하고 나니 도아린의 손이 다 떨릴 정도로 저릿했다. 간병인이 와서 도지현의 몸을 닦아주었고 도아린은 옥상으로 가서 소유정의 전화를 받았다.“널 방해한 건 아니지?”“아니. 나 지금 병원이야.”도아린은 젖은 머리가 마르도록 풀어헤쳤다.“지현이...”“다시 살려냈어.”“그래. 의료 기술이 계속 발전하니까 언젠가 깨어날지도 몰라.”소유정은 그녀를 위로한 후 본론을 얘기했다.“나형욱 선생님이 또 날 찾아왔어. 네가 지난번에 수선한 자수 드레스가 엄청 마음에 든다면서 선생님 팀으로 들어오래.”나형욱은 수선 명인이었다. 그와 한 번만 손을 잡아도 몸값이 배로 뛰는 건 문제없었다. 그런 그가 도아린을 직접 스카우트하려 한다는 건 그녀의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도아린의 솜씨도 업계에서는 손꼽히는 정도였다. 배건후와 결혼한 후에는 가정에만 충실하다 보니 그저 손이 굳어지지 않으려고 세컨드 계정으로 일을 조금씩 받
도아린은 나형욱을 만나러 가던 길에 유명한 인삼 가게에서 고급 인삼을 들여왔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소유정은 전에 그녀에게 소유정의 능력을 알아준 송민혁이 야생 산삼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 소유정이 송민혁이 연출한 작품의 OST를 따냈기에 선물하고 싶었다.도아린이 후방 주차를 하려고 절반 정도 후진한 그때 뒤에 있던 빨간색 람보르기니가 먼저 주차했다. 여성 운전자는 차를 삐뚤게 세운 후 그냥 가버렸다.결국 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차를 좀 먼 곳에 세운 다음 걸어갔다. 그런데 아까 그 여성 운전자도 그 가게에 있었다.“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점원이 열정적으로 맞이했다.“방금 들여온 백 년 된 야생 산삼 보여주세요.”“죄송한데 이미 팔렸어요. 장뇌삼도 괜찮은 게 있어요.”도아린이 고개를 내저었다.“아니요. 됐어요, 그럼.”그녀가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도아린 씨죠?”여성 운전자가 다가왔다.“아린 씨가 운전한 그 카이엔 사실 손보미한테 선물하려던 거였어요. 차 번호도 손보미의 행운 숫자거든요. 그래서 알아요.”“...”도아린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봤다.점원은 야생 산삼을 포장한 후 종이와 펜을 건넸다.“수취인의 성함과 연락처 적어주세요. 나중에 배 대표님한테 확인해야 하니까요.”도아린은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 연성에서 야생 산삼을 살 수 있는 배 대표라면 생각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여성 운전자는 팔짱을 끼고 오만한 태도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청호상 후보에 오른 손보미 알죠? 배 대표님이 손보미를 위해 주문한 거예요. 연예인의 정보는 함부로 누설해서는 안 되니까 제 이름 적을게요. 전 손보미의 매니저 김지민입니다.”도아린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도, 분노한 기색도 없었고 차분하면서도 덤덤하기만 했다. 하지만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진 것처럼 아팠다.손보미는 이마가 살짝 긁혔을 뿐인데 배건후는 몸조리하도록 백 년 된 야생 산삼까지 사주었다. 역시 좋아하는 여자는 달랐다.도아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손 키스를 날리고 웃으며 말했다.“화내지 말아요. 튀르키예든 동경이든 파리든 건후 씨가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같이 갈게요.”배건후가 주먹을 꽉 쥐었다. 관절에서 뚜두둑 소리가 날 정도였고 가뜩이나 차갑던 이목구비가 더욱 차가워졌다.그가 도아린에게 이런 말을 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도아린이 그대로 하니까 전부 거슬렸다. 짜증이 나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점원은 옆에서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최대한 존재감을 없애려 노력했다.배건후가 뿜어내는 냉기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다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내 카드 긁으려고? 안 돼.”도아린이 얼마를 쓰든 배건후는 제한한 적이 없었다. 도아린도 좋은 식자재를 사는 것 말고는 대부분 남동생의 병 치료에 썼다. 그리고 배건후가 선물한 게 많아 도아린 자신에게 돈을 쓸 일도 거의 없었다.그녀가 비상금을 몰래 챙겼다고 해도 수십억을 챙길 리가 없었다. 그에게 마구 대들었으니 그를 떠나면 얼마나 힘들지 느껴보게 할 생각이었다.도아린은 손가락으로 배건후의 가슴팍을 튕겼다. 그러자 블랙 카드가 순식간에 그의 양복 주머니에 들어갔다.‘내가 진짜 기생충인 줄 아나.’그저 그 돈을 건드리기 싫었을 뿐이지, 한 푼도 없는 거지는 아니었다. 이번에 제대로 본때를 보여줘야 했다.도아린은 가방에서 평범한 은행 카드 한 장을 꺼내 점원에게 건넸다. 점원이 카드를 긁자 컴퓨터 화면에 지불 성공이라는 글씨가 빠르게 나타났다. 그녀는 점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후 휙 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배건후는 이까지 바득바득 갈았다.‘몰래 이렇게나 많은 돈을 숨겼다는 건 이혼하려고 진작 준비했다는 거네.’차 안으로 돌아온 후 도아린은 흥분됐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마치 공기 빠진 공처럼 축 처져 의자에 앉아있었다.카드 한 번 긁었다고 거의 전 재산을 탕진했다. 조금 전 홧김에 한 행동을 조금 후회하기도 했다.장뇌삼도 귀하긴 했지만
도아린은 밤새 푹 자고 이튿날 맑은 정신으로 나형욱을 만나러 갔다.소유정이 가는 녹음실이 그녀의 목적지와 한 건물이라 두 사람은 도착한 후 A 구역과 D 구역으로 흩어졌다.“안녕하세요. 실례지만 엘리베이터 눌러주실래요? 7층 가려고요.”“네...”프런트 직원은 절반 정도 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신작 오디션은 D 구역입니다.”요 며칠 손보미가 맡았던 역할의 오디션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이쪽으로 잘못 찾아오는 사람이 꽤 있었다.프런트 직원은 도아린을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오늘 이분은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괜찮은 것 같아. 분위기도 좋고 메이크업을 살짝만 해도 성형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겠어.’도아린이 덤덤하게 웃어 보였다.“전 LH 스튜디오로 가려고요.”프런트 직원은 그녀를 엘리베이터에 태운 후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보면서 어리둥절해 했다.‘LH 스튜디오는 옷을 수선하는 곳인데... 대부분 몸가짐에 신경을 쓰지 않는 중년이 많고. 근데 방금 그 여자는 젊고 또 예뻐. 그렇다면 무조건...’“천장에 뭐가 있어요?”한 잘생긴 남자가 그녀 뒤에서 웃으면서 농담을 건넸다.“샹들리에에 붙어있는 크리스털을 떼려고요?”빌딩의 대표 성대호가 밖에서 들어왔다. 성대호는 유머러스하고 시원시원한 사람이라 직원들이 많이 따랐다.“대표님이 샹들리에를 스와로브스키로 바꾸면 그때 뗄게요.”“잊지 않게 노트에 적어야겠어요...”성대호는 농담으로 어린 여자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뒤에서 구두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바로 대표의 카리스마를 뽐냈다.“나형욱 씨한테 전화해서 귀한 손님이 온다고 알려줘요.”“나형욱 씨 귀한 손님은 이미 올라갔어요.”“올라갔다고요?”성대호가 화들짝 놀랐다.“어떻게 생겼어요?”“엄청 예쁘고 분위기 있고 또 교양도 있는 여자였어요.”성대호의 두 눈에 교활함이 스쳤다. 돌아선 순간 배건후의 싸늘한 얼굴을 보고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으며 휴대전화를 꺼냈다.“내가 말할게요.”전화가 단번에 연
의사가 급히 다가와 도아린을 확인하더니 주사를 한 대 더 놓았다. 그리고는 운전기사에게 속도를 빨리라고 재촉했다.“환자의 상태가 매우 위급합니다. 빨리 가주세요!”“도아린, 너 절대 죽으면 안 돼! 나랑 이혼할 때는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이렇게 죽으면 안 되지. 그렇게 자존심이 강하다며? 그럼 지금이 네 대단한 자존심을 보여 줄 때야!”배건후는 점점 더 초조해져서 말을 가리지 않고 마구 내뱉었다. 눈물은 통제할 수 없이 흘러내려 도아린의 이마 위로 떨어졌다.눈물이 상처에 닿자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중상 환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 쪽에서는 미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구급차가 도착하자마자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도아린을 들것에 올리고는 병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환자분도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한 의사가 배건후를 붙잡았다.“저는 괜찮습니다.”배건후는 의사의 팔을 뿌리치고는 다리를 절뚝이며 따라붙었다.“아내가 괜찮은지 먼저 확인해야 해요!”하지만 그 의사는 끝까지 배건후를 따라가면서 그의 상태를 관찰했다. 그는 팔과 다리에 골절 가능성이 있었고 귀에서 출혈이 있는 걸 봐서 뇌 손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의사가 뭐라 하든 배건후는 듣지 않았고 오직 도아린 곁을 지키려 했다.진경수를 비롯한 진씨 가문 사람들도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왔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도아린의 사고 소식을 접한 윤명희도 서둘러 병원으로 왔다.“배건후, 이 개자식아!”진경수는 배건후를 향해 주먹을 날리려 했으나 경찰이 막아서며 상황을 설명했다.“건후 씨의 빠른 판단이 없었으면 아린 씨는 더 큰 부상을 입었을 겁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사망했을 수도 있고요. 건후 씨가 트럭의 충격을 막아줘서 그나마 다행입니다.”“아린아, 조금만 버텨. 가족들도 다 너 보러 왔어. 아무 일도 없을 거고 무사할 거야.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윤명희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도아린에게 손을 뻗으려 했지만 혹여 그녀를 아프게 할까 봐 조심스러웠다.“건후야, 너도 치료
어떤 사람은 차 문을 열자는 생각에 찬성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힘을 써도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배건후의 간절함에 영향을 받았는지 다들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썼다. 모두가 차 안에 있던 도구를 꺼내 들고 힘을 합쳐 문을 열려고 했다.“하나, 둘, 셋! 하나, 둘, 셋!”“조금만 더 힘내요. 움직이기 시작했어요!”누군가가 이렇게 외치자 다들 이를 악물었고 어떤 이는 손에 들고 있던 도구를 부러뜨릴 정도로 힘을 썼다. 마침내 ‘쾅’하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렸다.“도아린!”문이 열리자마자 배건후는 앞으로 달려가서 안전벨트를 풀어주고 그녀의 몸을 일으켜주었다. 배건후는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고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어디 다쳤어? 어디가 아픈지 말해줘.”힘겹게 눈을 뜬 도아린은 배건후의 부어오른 눈, 갈라진 입술과 멍든 뺨을 바라보았다. 우아하고 단정했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배건후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다리가 끼이지는 않았는지 확인했다. 그때, 도아린은 그의 귀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며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배건후는 즉시 고개를 번쩍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있으니까 걱정 마! 곧 구급차가 올 거고 아무 일도 없을 거야.”배건후는 이렇게 말하며 직접 도아린을 안아 올렸다. 그러나 좌석에서 벗어나자마자 두 사람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그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이 다가와서 그들을 도왔다.어떤 이는 차량 뒤쪽에 경고 표지를 설치했고 어떤 이는 경찰에 신고를 했으며 또 어떤 이는 휴지를 찾아서 출혈을 막아주었다.구급차는 경찰차보다 먼저 도착했다.의사는 부상자가 두 명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구급차를 한 대 더 부르려 했다.“전 괜찮습니다! 제 아내부터 봐주세요. 부탁드립니다!”의사는 배건후가 걸을 수 있고 말도 조리 있게 할 수 있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을 함께 태웠다.도아린은 산소마스크를 쓴 채로 몽롱하게 잠에 빠지려 했다.그녀를 살펴본 의사는 표정이 심각
급커브를 빠져나가면 피할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급하게 액셀을 밟았다.차량 속도가 너무 빨랐기에 커브를 돌 때 브레이크를 여러 번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칫하면 차가 옆으로 넘어갈 뻔했다.도아린이 막 안도의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 맞은편에서 트럭 한 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뒤쪽 트럭도 경적을 울렸고 맞은편의 트럭도 그에 응답하듯 경적을 울렸다.맞은편에서 오는 트럭이 도아린의 차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해 왔다. 그녀는 순식간에 온몸의 혈액이 머리로 쏠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계획된 살인이었다.그녀는 필사적으로 침착하려고 했지만 몸은 이미 마비된 상태였다.옆에서는 또 다른 트럭이 밀어붙여서 도망칠 공간이 없었다. 브레이크를 밟거나 정면충돌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그렇다고 속도를 줄이면 뒤에 있는 검은색 밴에 부딪힐까 봐 걱정이었다.‘돌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여자는 정말 남자보다 판단력이 약한 것일까?’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인 듯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그 아슬아슬한 순간에 검은색 밴이 도아린의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검은색 밴은 급브레이크를 밟더니 도아린의 차와 트럭 사이를 가로막았다.맞은편 트럭 운전사는 이런 변수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반사적으로 핸들을 꺾어 버렸고 도아린 옆에서 나란히 달리던 트럭과 충돌해 버렸다.두 대의 트럭은 세게 부딪히고 나서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 트럭에 있는 트레일러가 검은색 밴을 세게 들이받았고 ‘쾅’하는 소리와 함께 도아린도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밴에 부딪혀 버렸다. 그 충격에 검은색 밴은 완전히 납작하게 눌려 버렸다.에어백이 터지면서 그녀는 온몸이 쑤셨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시야도 흐릿해졌다.그때, 부서진 검은색 밴의 문이 힘겹게 밀려 열리더니 한 남자가 굴러떨어졌다.배건후였다. 그의 팔은 피투성이였고 새하얀 셔츠도 온통 핏자국으로 물들어 있었다.그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힘겹게 도아린의 차 앞으로 걸어왔다.“도아린,
배건후는 도아린을 따라 아래층 정원까지 내려왔다.“도아린...”그제서야 입을 열었지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말을 끊어버렸다.“지금 소송 문제로 바쁘시잖아요. 더 이상 건후 씨 시간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도아린, 우리 제대로 이야기 좀 해.”“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배건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 앞을 막았다.“넌 그놈들의 이익을 건드렸어. 다들 널 가만두려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경찰에게 내가 제공한 정보라고 말해. 그러면 나를 찾아올 거니까.”도아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싸늘했다.어젯밤 그녀가 변슬기를 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경찰뿐이었다. 경찰 측에서는 피해자의 신변 보호를 위해 도아린과 진수혁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았다.주현정 역시 변슬기가 납치되었다는 사실만 듣고 그녀와 함께 병문안을 온 것이었다.하지만 배건후는 너무나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유민 씨가 말해줬어요?”배건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부정하지도 않았고 결코 인정하지도 않았다.그는 왠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배건후는 손을 뻗어 도아린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시선을 보고는 허공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손을 거두었다.“도아린, 넌 지금 보호가 필요해.”“보호가 필요하다고 해도 배 대표님의 보호는 필요 없어요.”도아린은 그가 건드리지도 않은 어깨를 툭 털어내고는 싸늘하게 말했다.“저희는 감정적으로 얽힌 사이도 아니고 경제적으로도 더더욱 아무 관계 없는 사이에요. 그러니까 앞으로 제 앞에 나타나지 말아 주세요.”“그럼 법정에는 왜 간 거야?”그녀가 법정에 온 걸 보고 배건후는 몇 날 며칠 동안 설레발을 쳤다. 하지만 그의 설레는 감정은 결국 바닥에 내팽개쳐져 처참히 짓밟히고 말았다.“법정에 간 건 저희 할머니 소송 때문이에요.”도아린은 그를 지나치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배건후가 뒤를
강재민은 등을 돌린 채 손을 휘저으며 강재희를 돌려보냈고 그녀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왔다.계단을 내려가던 그녀는 갑자기 위층에서 ‘쾅’ 하는 소리를 들었다.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였다....변슬기는 다치지 않았지만 극도의 공포를 겪은 탓에 밤사새 열이 올라 결국 병원에 입원했다.채원미가 밤새 그녀 곁을 지켰고 다음 날, 변우빈이 교대하러 왔다.그날, 도아린은 주현정과 함께 병문안을 왔다.“도 선생님!”변슬기는 도아린을 보자마자 눈물이 터질 듯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아버지, 저 도 선생님이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요.”“그래. 몸이 안 좋으면 바로 불러.”변우빈은 주현정과 함께 병실 밖으로 나갔다.도아린은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와 변슬기의 곁에 앉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어제 잡힌 건 기절한 두 놈뿐이에요. 나머지는 전부 도망쳤어요.”변슬기는 입술을 꾹 다물며 울음을 참았다.“대표님은 괜찮아요?”“몇 바늘 꿰매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대요.”도아린은 변슬기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슬기 씨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어제 다들 걱정했어요.”변슬기는 살짝 시선을 피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진 대표님도 제 걱정을 했을까요?”“당연하죠. 비서잖아요. 퇴근 후에 사고가 났으니 산재 처리해야 할지도 모르죠.”변슬기의 가슴 한구석에서 두근거리던 감정이 도아린의 한마디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아... 그렇군요.”도아린은 입꼬리를 살짝 내리며 변슬기의 반응을 살폈다.“오빠는 좀 눈치가 없는 편이라 어떤 감정이든 스스로 깨닫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러니까 슬기 씨, 오빠한테 마음이 있는 거라면 직진하는 게 좋을 거예요.”변슬기는 살짝 움찔하더니 도아린을 쳐다보았다. 놀람, 기쁨, 그리고 믿기지 않는 듯한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섞인 눈빛이었다.“도 선생님, 저... 저 같은 사람이 대표님이랑 어울릴까요?”“왜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죠?”도아린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슬기 씨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에요
변슬기는 겉옷을 벗은 후, 한쪽 어깨끈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재빨리 진수혁의 팔을 감싸서 지혈했다.무표정이던 그의 표정에 드디어 약간의 변화가 일었다. 진수혁은 굳어 있던 몸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뭐라고? 창고가 털렸다고?”전화를 받자마자 남궁 유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분노에 차서 주먹을 휘두르자 모니터가 박살이 났다.‘또 도아린, 그 여자야.’도아린은 그가 부자로 되어가는 길목에서 끊임없이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한, 그녀가 또 어떤 방해를 할지 알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가 났다. 해남에서 목장으로 위장한 불법 장기 매매 조직의 은신처가 발견되었으며 현장에서 두 명의 용의자가 검거되었다고 말이다.경찰은 구체적인 내용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이 지하 조직이 연성의 인신매매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 사람들은 어디에서든 이 사건을 화제로 삼아 얘기를 나눴다.강재희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강재민을 찾아갔다.“뉴스 봤어?”강재민은 1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손에는 얼음을 넣은 위스키 한 잔이 들려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뉴스 봤냐고 묻잖아!”강재희는 그 앞까지 걸어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따져 물었다.“너 계속 인신매매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잖아. 정말 몰랐어?”강재민은 천천히 눈을 떴다. 짙은 갈색인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강재민은 아무 말 없이 술을 한 모금 삼켰다.“대답해!”강재희가 날카롭게 말했다.“정말 몰랐던 거야? 아니면 그들과 같은 편에 선 거야?”강재희에게 인신매매 사건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였다. 그녀는 사람을 물건처럼 이용해 먹는 자들을 제일 증오했다. 그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은 사람의 장기를 강제로 빼앗아서 거래까지 하는 끔찍한 범죄였다.비록 강재민은 항상 아버지의 반대편에 서서 살아왔지만 사실 그는 그동안 암암리에 계속 이 사건을 추적하고 있었다.강재희를 구해
도아린은 지름길로 달려갔다가 하마터면 발을 헛디딜 뻔했다. 그녀가 물웅덩이 근처에 도착했을 때, 변슬기가 힘겹게 기어오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손 이리 줘요!”도아린은 바닥에 엎드려 팔을 길게 뻗고는 그녀의 손을 붙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변슬기의 손은 진흙투성이였기에 잡자마자 미끄러져 버렸다.그녀는 손을 옷에 문질러서 대충 닦은 후 다시 손을 뻗었다. 도아린은 위에서 힘껏 끌어당겼고 변슬기는 아래에서 발을 굴렀다. 마침내 그녀는 물웅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진수혁이 한 남자와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 남자는 쇠 파이프를 들고 있었기에 확실히 상대 쪽이 우세인 상황이었다.“일단 차로 가요!”도아린은 변슬기의 손을 잡고 황급히 뛰어갔다.차 안에서는 계속해서 남녀의 격렬한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변슬기는 금방 공포 속에서 탈출했다는 사실에 그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도아린 역시 음악을 끌 겨를도 없이 차에 시동을 걸고 진수혁 쪽으로 몰았다.갑자기 켜진 헤드라이트 불빛이 상대의 얼굴을 환히 비추었다. 순간, 그는 너무 눈부셔서 제자리에 멈춰섰고 그 틈을 타 진수혁이 상대를 발로 걷어찼다.차는 두 사람 앞으로 돌진하더니 급히 방향을 틀었다.“빨리 타요!”도아린이 소리쳤다.진수혁은 변슬기가 조수석에 앉았을 거라 생각해 본능적으로 뒷좌석 문을 열고 몸을 던졌다. 상대방은 그들이 도망치는 걸 보고 필사적으로 뒤쫓아왔다.그러자 도아린은 재빨리 후진했다. 문이 아직 완전히 닫히지도 않은 상태에서 차는 그들을 튕겨내듯 밀어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거칠게 액셀을 밟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목장에서 마을로 향하는 유일한 도로에서, 경찰차 한 대가 그들과 스쳐 지나갔다. 세 사람은 그제야 가까스로 살아남았다는 실감이 들었다.도아린은 속도를 늦추고 진수혁에게 문을 제대로 닫으라고 했다.주변이 조용해지자 차 안에서 남녀의 격렬한 신음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까까지 벌벌 떨고 있던 변슬기는 이 소리를 듣고 순간적으로 몸이
갑자기 나타난 차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고 차의 불빛도 순식간에 꺼져 버렸다.“가자. 가서 확인해 보자!”두 사람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고 나머지 한 명은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뭐가 그렇게 급해? 아프단 말이야. 좀 천천히 해.”“넌 나 안 보고 싶었어? 난 너 보고 싶어서 죽을 뻔했는데...”차 안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상태를 확인하러 나간 두 남자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었다.‘굳이 이런 곳까지 찾아오다니...’‘제 발로 굴러왔는데 놓쳐서야 되겠어? 본때를 보여줘야지.’두 사람은 손짓으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차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차와 점점 가까워질수록 소리는 더 선명해졌고 차까지 흔들리는 듯했다.하지만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너무 몰두하는 바람에 누가 다가오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중 한 명이 차 문을 열려고 손을 뻗었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그중 한 남자가 창문을 두드렸다.“여기서 뭐 하는 거죠?”다른 쪽에 있던 남자도 말했다.“여긴 개인 목장이에요.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요. 신분증 좀 봅시다.”“윽...”낮은 신음과 함께 창문을 두드리던 남자는 갑자기 힘없이 쓰러졌다. 그러자 반대쪽 남자도 뭔가 이상한 걸 느끼고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퍽’하는 소리와 함께 쇠 파이프가 남자의 등 뒤를 강하게 가격했다.도아린은 진수혁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목덜미를 때리면 잠깐 기절시킬 수 있다고 말이다. 그녀는 목덜미를 때리려 했으나 손이 너무 떨려서 목덜미 대신 등을 세게 때렸다.남자는 곧바로 몸을 돌려 도아린을 잡으려 했으나 그때, 진수혁이 나타나서 남자의 목덜미를 가격했다.그러자 그 남자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무슨 일이야!”문을 지키던 남자는 무언가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지만 밤이라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다들, 빨리 와! 그 여자가 도망쳤어!”안에서 남자의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자 문을 지키던 남
변슬기가 고개를 돌리자 흐릿한 시야 속에는 작은 수레가 하나 보였고 그 위에는 각종 의료 기기와 약품이 놓여 있었다. 수술용 칼과 크고 작은 핀셋들도 줄지어 있었다.코를 찌르는 강한 피비린내가 그녀로 하여금 단숨에 정신 차리게 했다.이곳은 환경이 극도로 열악한 수술실이었다.변슬기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막 수술대에서 내려오려는 순간,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오늘은 왜 이렇게 갑자기 소집했대?”“누가 알겠어? 어쨌든 일만 하면 돈을 받는 거잖아. 요즘 장기가 꽤 부족한가 봐. 이따가 피 뽑아서 상세 정보 올리면 바로 구매자한테서 연락이 올 거야.”“넌 네가 할 거 해. 난 얼음이나 가져올게. 저 여자 말이야. 아무래도 누굴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지? 살아 있는 상태로 수술하라니...”어떤 남자와 여자가 대화를 나누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변슬기는 다시 수술대에 누웠다. 너무 두려워서 그녀는 온몸이 저절로 떨렸다.비록 그들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는지는 몰라도 절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안민아는 그녀의 목숨을 원하고 있었다.‘뭐 얼마나 큰 원한이 있었다고...’예전에 변슬기는 혹시나 그녀가 괴롭힘을 당할까 봐 걱정되어 도유준을 때려준 적도 있었다.‘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렇게 비열한 방법으로 해코지하려 하다니...’그 여자는 얼음이 든 양동이를 들고 안쪽 욕실로 가서 욕조에 모두 부어 버렸다. 그리고는 욕조에 물을 틀었다.다른 남자는 변슬기 쪽으로 다가와 그녀의 팔에 붕대를 단단히 감은 뒤, 여러 개의 혈액 샘플을 채취했다. 너무 많이 해 온 작업이라 무감각해졌는지 그는 변슬기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피를 뽑은 후, 그가 자리를 뜨자 변슬기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거야.’욕실에 있는 여자는 여전히 욕조에 물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따금 혼잣말을 했다.“얼음을 한 통 더 가져와야겠네. 아직 온도가 부족해.”변슬기는 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