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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거절
또 한 번의 거절
작가: 온유

제1화

“민재야, 도와줘...”

“한 번 더 말해 봐!”

도아린은 누군가에게 머리를 잡혀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뒤에 있는 남자의 싸늘한 이목구비를 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건후 씨? 건후 씨가 왜 여기에...”

남자는 안개가 자욱한 유리 벽에 도아린을 밀어붙이더니 그녀의 아래턱을 잡고 눈을 마주쳤다.

“여긴 내 방이야, 누구이길 바라는데? 응?”

도아린이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이거 놔요. 놓으라고요...”

“날 건드렸으면 끝까지 버텨야지.”

남자는 도아린의 허리를 감싸 안고 마구 더듬었다.

“으악...”

쿵!

도아린은 차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꿈에서 깼다.

앞에 교통사고가 일어났는데 버스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길가의 배수구에 빠지면서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버스 안에는 온통 욕하는 사람들과 우는 사람들뿐이라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3년 전 그날 밤의 사고에 비하면 이번 사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아린은 그 사고만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날 밤 그녀는 배건후 때문에 병원에 가게 되었고 그러다가 배씨 가문 사모님이 되어 위기들을 해결하긴 했지만...

“죽고 싶어요? 얼른 밖으로 기어 나와요!”

누군가의 재촉에 도아린은 이미 망가진 케이크를 버리고 선루프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구급차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도아린은 구급차가 멀지 않은 곳의 아우디 밴 옆에 멈춰 있는 걸 발견했다.

의료진들이 구급차에서 내려 차 안의 다친 환자를 부축했다. 그때 훤칠한 키의 한 남자가 상체를 숙이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여자를 안고 나온 후 구급차에 태웠다.

찰나였지만 도아린은 그 남자가 바로 결혼한 지 3년 된 남편이라는 걸 알아봤다. 그리고 남편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는 늘 잊지 못했던 그의 첫사랑이었다. 그는 유학 간 그녀를 줄곧 잊지 못했다.

도아린은 팔이 아픈 것도 참아가며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휴대전화 너머로 남자의 싸늘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건만 간단히.”

“오늘 집에 들어와요?”

도아린은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일이 있어.”

한마디라도 더 하면 첫사랑에게 미안하더라도 한지 남자는 재빨리 전화를 끊어버렸다.

남편은 내연녀를 끔찍이도 아꼈지만 정작 자기 아내는 혐오할 정도로 싫어했다. 도아린은 입술을 꽉 깨물고 먼 곳의 구급차를 쳐다보았다.

배건후는 그녀의 생일은 기억하지 못해도 손보미의 수업은 다 기억했다. 오늘 배건후와 함께 생일을 보내려 했었는데 아무래도 그럴 필요가 없을 듯싶었다.

구급차가 버스 옆을 스쳐 지나갔다. 도아린은 차 위에 앉아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를 보았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배건후에 대한 그녀의 기대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사고 때문에 교통이 두 시간 넘게 마비되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임산부가 놀란 탓에 조산했고 다행히 도아린은 그저 타박상만 입었다. 병원에서 나와 집에 도착했을 땐 날이 다 어두워진 뒤였다.

도아린은 홀로 텅 빈 별장에 앉아서 생일을 보냈다.

...

보성 병원 응급실.

간호사가 손보미를 밀고 나오자 배건후가 재빨리 다가갔다.

“어떤가요?”

손보미는 이마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얼굴에 핏기라곤 없었다. 그리고 놀란 마음이 아직 진정되지 않았는지 부들부들 떨다가 배건후를 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의사가 말했다.

“가벼운 뇌진탕입니다. 예전에 척추를 다친 적이 있어서 한동안 가만히 누워서 쉬어야 해요.”

여자의 창백한 얼굴을 보던 배건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선생님...”

손보미가 부드럽게 물었다.

“이번에 귀국한 이유가 유명 감독님의 작품에 참여하기 위해서거든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러자 의사가 마스크를 벗고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 상태로는 절대 무리하게 일을 해선 안 돼요. 만약 꼭 해야 한다면 옆에 챙겨주는 사람이 항상 있어야 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렇게 할게요.”

손보미는 그렁그렁한 두 눈으로 배건후를 보면서 애써 웃음을 지었다.

“오늘 데리러 와줘서, 또 병원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 매니저가 내일 아침 일찍 오기로 했으니까 먼저 들어가서 쉬어.”

방금 의사가 옆에 항상 챙겨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했고 또 매니저도 없는데 배건후가 어찌 갈 수 있겠는가?

배건후는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급히 처리해야 하는 서류를 병원에 가져오라고 했다. 전화를 마친 후 또 손보미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는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푹 쉬어.”

손보미의 두 눈이 반짝였다가 이내 다시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나랑 병원에 있으면 아린 씨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냥 집에...”

“괜찮아.”

배건후는 간호사에게 손보미를 병실로 옮겨달라고 한 후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웠다.

이튿날에야 집으로 들어온 배건후는 밤새 자지 못해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신을 갈아신고 거실을 지나던 그가 갑자기 발걸음을 늦추었다.

평소 이 시간이면 도아린은 요가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준비한 다음 배건후가 오늘 입을 옷을 다림질하여 꺼내놓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집 안이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배건후가 안방 문을 열었다. 가뜩이나 어둡던 그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방에 아무도 없었고 커다란 침대 한가운데에 서류 하나가 놓여있었는데 바로 이혼 합의서였다. 하지만 배건후는 이런 수작 따위 신경 쓰지도 않았다. 도아린이 화를 낼 때마다 호텔에 가서 이삼일 정도 지내다가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손보미가 떠들썩하게 귀국하자마자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기사가 아마 쏟아져나왔을 것이다. 하여 도아린이 기사를 보고 삐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옷장 안에 옷들이 색깔 별로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오늘 그가 입을 옷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배건후는 옷장 문을 세게 닫더니 침대 위의 서류를 들었다. 서류의 내용을 확인하던 그의 얼굴에 차가움이 스쳤다.

“이 여자가 감히...”

...

도아린은 아침 일찍 나와서 살 집을 구했다. 이혼하겠다고 했으니 이제 더는 에이트 맨션에서 지낼 수가 없었다.

다행히 운 좋게 급히 파는 아파트 한 채를 구했다. 그리 크진 않았지만 가격이 적당했고 가구도 필요한 건 다 있었다. 계약금을 낸 후 도아린은 짐을 챙기러 집으로 갔다.

에이트 맨션은 고급 주택 구역이라 택시가 들어갈 수 없었다. 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밖에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

“시간이 몇 시인데 인제 들어와요? 대표님이 그러라고 월급 주는 줄 알아요?”

경비원이 도아린을 흘겨보며 말했다.

배건후는 집에 외부인이 있는 걸 싫어하기에 시간제로 청소하는 도우미를 딱 한 명 구했다. 도아린은 배건후의 의식주를 직접 챙기길 좋아했다. 청소하지 않아도 될 때는 도우미에게 휴가를 주기도 했다.

도아린과 배건후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양측 부모와 친구 몇 명만 알고 있었고 또 외부에서는 배건후가 손보미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도아린이 에이트 맨션의 안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다들 배씨 가문의 도우미로 알고 있었다.

“대표님의 첫사랑이 귀국했는데 어제 교통사고 당해서 대표님이 밤새 옆에 있어 줬대요.”

근무 상황을 점검하러 온 관리사무소 팀장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아린 씨는 3년 동안 기회도 잡지 못하고. 정말 아쉽네요.”

“아쉬울 건 없죠. 아린 씨도 재벌 남자 친구가 있잖아요.”

경비원이 웃으며 말했다.

“그 남자랑 결혼할 생각 있어요?”

도아린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느 날 늦은 밤, 배건후와 싸우다가 그만 발을 삐끗하고 말았다. 배건후는 그녀를 안고 집에 데려다준 후 다시 휙 나가버렸다.

마침 당직을 서던 관리사무소 팀장이 그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 후 팀장은 계속 도아린이 배건후에게 꼬리를 쳤는데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아린은 결국 배건후와 같은 옷을 입은 남자 친구라고 해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관리사무소에 그 소문이 퍼지고 말았다. 재벌 집의 도우미가 재벌 2세를 만난다고 하자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그 남자 별로라서 헤어졌어요.”

도아린이 직접 나서서 말했다.

“바람피우지 않는 남자는 없어요. 알아도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야죠. 재벌 2세랑 결혼하는 건 아린 씨 복이에요.”

관리사무소 팀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위로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청소나 하는 도우미 주제에 뭘 그렇게 따지냐고 비웃고 있었다.

그때 덜컥하고 문이 열렸다. 도아린은 걸어가면서 관리사무소 팀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별로라고 한 건 말 그대로 정말 별로란 뜻이에요. 평소에는 기고만장하다가 침대 위에서는 힘 한 번 쓰지 못하는 남자를 만나서 뭐 해요?”

“으악!”

도아린이 돌아서자마자 하마터면 마주 오는 자동차와 부딪힐 뻔했다.

맞춤 제작한 은색 마이바흐였는데 먼지 하나 없는 앞 유리 사이로 뒷좌석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배건후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고 날카롭고 그윽한 두 눈으로 도아린을 빤히 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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