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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전화를 받으면서 도아린을 쳐다보는 배건후의 두 눈에 경멸과 조롱이 가득했다. 관리사무소 사람마저 그녀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데 무슨 자격으로 이혼 얘기를 꺼내겠는가?

도아린은 배건후가 보는 앞에서 더러운 장갑을 팀장의 얼굴에 던져버렸다. 팀장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노트와 펜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관리사무소 팀장으로서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으면 처음부터 다시 배워요! 날 내쫓는다고 해도 당신은 에이트 맨션에 못 들어가요. 배건후 씨는 여우같이 교활한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당신도 여우 같긴 한데 나이가 너무 많아요!”

어차피 곧 떠날 거라 참고 싶지 않았고 이참에 배건후를 한 방 먹이는 것도 나름 괜찮았다.

배건후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

도아린은 집 안으로 들어가 물을 따라 마셨다. 방문이 열려있었는데 무언가가 현관의 거치대에 놓여있었다.

짐 정리를 다 마치고 나와서야 거치대에 놓여있는 물건이 그녀의 휴대전화라는 걸 알았다.

‘내가 휴대전화를 건후 씨 차에 떨어뜨려서 다시 들어온 건가?’

이번에 도아린은 약삭빠르게 차고에 있던 카이엔을 몰고 나갔다.

카이엔은 두 사람이 결혼할 때 배건후가 준 예물 중 하나였다. 평소 그녀는 별로 외출하지 않았고 또 연성에 차가 막혀 계속 차고에 가만히 세워두기만 했다.

배건후의 재산을 나눠 가지진 못하더라도 이 차는 혼전 재산이라 그녀의 것이었다. 무뚝뚝하고 매정한 남자를 곧 떠날 거란 생각만 하면 도아린은 기분이 너무 좋아 액셀을 미친 듯이 밟았다.

운전하는 중에 절친 소유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기사를 보고 걱정돼서 전화한 것이었다. 도아린이 힘들어할까 봐 기분도 풀 겸 술 먹으러 가자고 하자 도아린은 모든 걸 정리한 다음에 다시 축하하자면서 거절했다.

아파트 청소를 마치긴 했지만 도아린은 처음 자는 침대에 눕기 전에 침구청소기로 청소하는 버릇이 있었다. 침대 위에서 청소기를 돌리는데 부동산 중개인이 갑자기 들어왔다.

“문 한참이나 두드렸는데 못 들은 것 같아서 문 열고 들어왔어요.”

도아린이 물었다.

“무슨 일 있나요?”

“그게...”

중개인이 억지로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냐면요. 집주인이 아까 전화 왔는데 이 집을 팔지 않겠대요.”

“계약금 이미 냈는데요?”

“정말 죄송합니다. 계약금은 배로 돌려드릴게요.”

아침까지만 해도 급히 판다고 했다가 지금 갑자기 팔지 않겠다고 했다.

도아린은 집주인에게 전화하려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제야 통화 목록에 마지막 통화 상대가 집주인이라는 걸 발견했다.

그녀의 예상이 맞다면 배건후가 받은 게 분명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어찌 된 건지 다 알 것이다. 도아린은 침구청소기를 침대 위에 던졌다.

“집은 내가 사고 싶어서 산 거니까 배건후 씨는 대신 결정할 권한이 없어요.”

그러자 중개인이 미안한 웃음을 지었다.

“아린 씨, 월급 받고 일하는 제가 어찌 감히 거역하겠어요...”

모건 그룹 대표를 감히 건드릴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도아린이 무슨 말을 하든 중개인은 그저 웃으면서 고개만 내저었고 하룻밤 묵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짐을 챙기고 절친을 찾으러 갔다. 호텔에 묵을 돈이 없는 게 아니라 호텔에 트라우마가 있어서 갈 수가 없었다.

한창 샤워 중이던 소유정은 전화를 받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나왔다. 트렁크에서 커다란 캐리어를 꺼내는 도아린을 보고는 놀란 나머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그 쓰레기 같은 남자한테 상처받고 나니까 절친밖에 없다는 거 깨달았구나. 그나저나 우리 지금 도망치는 건 너무 이른 거 아니야? 일단...”

도아린이 흥분된 마음으로 캐리어를 꺼내다가 그만 손가락이 캐리어에 끼고 말았다.

“아야...”

“미안, 미안. 아직 이 손으로 박물관의 곤룡포도 수선해야 하는데. 네가 다치면 돌아가신 왕들이 무덤에서 깨어나 날 찾아오겠어.”

도아린은 소유정의 장난에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속에 드리웠던 먹구름도 말끔히 사라졌다.

“그럼 무덤에 찾아가서 춤추고 노래를 불러드려. 다들 좋아하실 거야.”

두 친구가 한창 재미나게 수다를 떨고 있던 그때 배건후의 어머니인 주현정이 전화 와서 도아린더러 밥 먹으러 오라고 했다.

“시어머니는 네가 집 나온 거 알아?”

소유정이 걱정스럽게 묻자 도아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양측 부모님들은 두 사람이 서로 존경하면서 잘 지낸다고 생각했다. 도아린은 시어머니에게 잘 보여서 도씨 가문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는 걸로 남동생의 목숨을 유지할 기회를 바꿔야 했다.

그나저나 시어머니 주현정은 친정 부모보다 그녀에게 더 잘해줬다. 배건후를 무시할 순 있어도 주현정에게 상처를 줘서는 절대 안 되었다.

도아린이 홀로 온 걸 본 주현정은 바로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이 자식은 정말 말을 안 들어. 건후한테 널 데리러 가라고 분명 얘기했는데 기어코 혼자 오게 했구나.”

배건후에게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주현정뿐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건후 씨 요즘 많이 바빠요.”

도아린이 시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몸은 괜찮으시죠?”

주현정은 딸 배지유를 낳은 후로 몸이 급격하게 나빠져 지금까지 한약을 달고 살았기에 몸에서 항상 한약 냄새가 났다.

“얼른 떡두꺼비 같은 손자 낳아주면 병이 다 나을 것 같아.”

주현정은 웃으면서 그녀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

“다 먹었어?”

주현정은 그녀에게 몸에 좋다는 한약을 많이 지어주었다. 말이 몸조리지 사실은 임신에 도움 되는 한약이었다. 도아린도 알고 있었지만 배건후가 터치하지 않는데 아무리 많이 먹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가끔 도아린은 한약을 퀵으로 회사에 보내서 배건후에게 먹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걱정해주는 주현정을 실망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다 먹었어요.”

도아린이 고분고분 대답했다.

“급한 거 없어.”

되레 주현정이 그녀를 위로했다.

“오늘까지 한 차례 치료 과정이 끝났어. 오늘 저녁에 건후랑 여기서 자. 그럼 애가 꼭 생길 거야.”

‘네?’

도아린이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도우미가 문을 열고 들어와 깍듯하게 인사했다.

“도련님과 아가씨가 오셨습니다.”

배건후는 도아린을 하찮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나랑 이혼하겠다고 하면서 어머니한테는 또 잘 보이려 하고. 정말 역겨워.’

“엄마, 이건 내가 엄마 주려고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취 펜던트예요.”

배지유는 케이스를 주현정에게 주면서 도아린을 보며 덤덤하게 보았다.

“새언니가 올 줄 모르고 선물 준비하지 못했어요. 서운한 건 아니죠?”

주현정 앞이라 그나마 이 정도지 단둘이 있을 땐 기고만장하기 짝이 없었다.

배지유는 항상 도아린이 오빠 배건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파렴치한 수단이 아니었더라면 절대 배씨 가문으로 들어오지 못했을 테니까.

주현정은 오랜만에 딸을 봐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사람들을 한데 불러 모아 식사하자고 했다.

도아린은 평소처럼 가족들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주현정에게 밥을 떠주고 자리에 앉았는데 배지유가 자기 밥그릇을 건넸다.

“난 절반만 떠줘요.”

도아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배건후가 식탁 밑에서 다리를 걸며 말렸다. 그녀가 멈칫한 사이 배건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매에 다녀오더니 손이라도 부러졌어?”

“어차피 오빠 밥을 떠줄 텐데 내 밥도 떠주면 어디가 덧나요?”

배지유가 불만을 터트렸다.

“난 저녁에는 쌀밥 안 먹어.”

배건후가 젓가락을 도아린에게 건넸다.

저녁에 쌀밥을 먹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바람에 도아린만 더 힘들어졌다. 도아린이 단호박을 삶아주면 너무 나른해서도, 너무 딱딱해서도 안 되었고 또 푸석하거나 너무 달아서도 안 되었다.

지금은 그나마 주현정 앞이라 평소보다 고분고분했다. 도아린은 이참에 그의 뜻을 거역하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후 씨 안 먹으면 내가 먹을게요.”

그러고는 배지유의 밥그릇을 받고 밥을 뜨러 갔다.

도아린은 배건후의 표정이 어두워졌음을 직감했다. 배지유를 도와줘서가 아니라 그의 뜻을 거역했으니까.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배건후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주현정도 그런 그를 신경 쓰지 않고 도아린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재미있는 듯 크게 웃던 주현정이 갑자기 맞은편을 보며 말했다.

“도우미한테 방 청소하라고 했으니까 저녁에 아린이랑 여기서 자고 가.”

배건후는 도아린을 흘겨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후 도아린은 설거지를 도왔고 주현정은 방을 검사하러 갔다. 배지유가 배건후의 옆에 앉아서 말했다.

“오빠, 보미 언니 돌아오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다는 건 아직 마음이 있다는 거예요. 어차피 오빠도 도아린 좋아하지 않잖아요. 차라리 도아린이랑 이혼하고 보미 언니랑 결혼해요.”

배건후가 배지유를 차갑게 쳐다보았다.

“방금 뭐라고 불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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