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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대표님!”

배건후의 차를 알고 있는 경비원이 허리 굽혀 인사했다.

“대표님, 아린 씨도 자주 농땡이 치는 건 아니에요. 근데 다른 도우미로 바꾸고 싶다면 소개해드릴게요...”

관리사무소 팀장은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배씨 가문의 도우미들은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썼다. 게다가 월급이 높을 뿐만 아니라 재벌 2세를 만날 기회가 많기에 도아린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사람이 많았다.

배건후는 차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카리스마는 모두를 압도해 버렸다.

환하게 웃던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연성의 7월은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지만 사람들은 마치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1분 후, 유리창이 서서히 내려오면서 배건후의 어두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 일 다 하고 여기서 수다질이야? 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꺼져.”

관리사무소 팀장은 놀란 나머지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고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배건후의 언행은 상업계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런 그가 관리사무소를 내쫓는다면 관리사무소는 연성에서 더는 발을 붙이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배건후의 날카로운 시선이 도아린에게 머물렀다.

“타.”

“난 할 일이 있어서요...”

그러자 배건후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배건후와 거리를 유지하려고 차 문 쪽에 최대한 붙어 앉았다.

마이바흐가 맨션을 나간 후 배건후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가 하얀 연기를 내뱉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평소에는 기고만장하다가 침대 위에서는 힘 한 번 쓰지 못하는 남자?”

“...”

도아린은 시선을 내리깔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담배를 다 피운 배건후가 서류를 툭툭 두드렸다.

“이거 무슨 뜻이야?”

도아린이 힐끔 쳐다보니 그녀가 작성한 이혼 합의서였다.

“이혼하고 싶어요.”

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숨 막힐 듯이 답답해졌다.

운전기사 조수현은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는 핸들을 꽉 잡고 최대한 앞만 보면서 귀를 닫으려 애를 썼다.

“이유가 뭔데?”

배건후의 말투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거기 정확하게 다 썼어요.”

도아린은 두 사람 사이의 거치대를 내렸다. 그가 당장이라고 이혼 합의서를 얼굴에 던질 것만 같았다.

배건후는 눈을 감고 천천히 말했다.

“결혼 3년 동안 남편은 금전 외에 정신 및 몸의 욕구를 만족해해 주지 못했다. 이런 순수한 사랑을 거절한다.”

그의 말투가 점점 차가워지더니 마지막 한마디는 거의 이를 갈면서 말했다.

“...”

다 사실이었다. 배건후와 결혼한 3년 동안 돈은 정말 부족하지 않게 줬고 명품 가방과 보석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3년 전 그날 밤 이후로 배건후는 도아린을 터치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에이트 맨션에서 지낸 날이 합쳐봤자 반년 정도였다. 몸의 위로는 둘째치고 일상적인 관심조차 없었다. 이런 관계라면 도아린이 직접 아내라고 밝혀도 믿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공부 머리가 남달랐던 배건후는 눈을 감고 다시 그대로 그 말을 반복했다. 잠시 후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3년 동안 넌 노력할 생각 따위 하지도 않고 맨날 놀았으면서 재산을 나눠 가지겠다고? 그럴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

그동안 도아린은 집에서 빈둥빈둥 논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몰래 비싼 드레스를 수선하는 일을 했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손이 굳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재산 분할은 그저 단순히 그의 화를 돋우기 위해서였다. 그가 먼저 내연녀와 역겨운 짓을 했으니까.

배건후의 독설에 진작 적응한 도아린이었지만 이런 평가를 들으니 기분이 좋진 않았다.

도아린이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내다보자 배건후는 그녀가 피하려는 건 줄 알고 손으로 머리를 확 돌려버렸다.

“그때 나랑 잔 것도 돈 때문이고 이혼도 돈 때문이야? 쌍스러운 건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비웃음이 날카로운 칼처럼 도아린의 마음을 쿡쿡 찔렀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시선을 늘어뜨렸다.

“건후 씨, 결혼 생활 3년 동안 건후 씨의 의식주는 다 내가 챙겼어요. 도우미를 구해도 월급은 줬을 거 아니에요.”

배건후는 그녀의 귀를 잡고 싸늘하게 말했다.

“도우미는 평생 일해도 이 귀걸이 못 사.”

도아린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귀가 꽉 잡혀있어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홧김에 귀걸이를 잡아당겼다가 귓불이 다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아프면서도 지지 않으려는 그녀의 표정을 보니 배건후는 더욱 짜증이 났다.

“혹시 널 만족해해 주는 남자를 만났어?”

“...”

도아린은 울먹일까 봐 아무 말도 못 했지만 배건후는 인정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힘을 거두고 귓불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결혼도 내 결정을 따랐으면 이혼도 내 결정을 따라야 해. 넌 자격이 없어.”

도아린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손보미가 이별을 고하고 해외로 떠났을 때 배건후는 홧김에 도아린과 결혼했었다. 이젠 손보미가 돌아왔는데 왜 이혼하지 않겠다는 걸까? 이혼하면 진짜 사랑하는 여자에게 가는 게 더 쉬울 텐데.

남자의 자존심 때문에? 아니면 이때 이혼하면 손보미에게 내연녀라는 소리를 듣게 하여 일에 지장 줄까 봐?

배건후가 사인하든 말든 도아린은 자신의 태도를 명확하게 밝혀야 했다.

“우리가 결혼한 거 아는 사람이 별로 없고 외부에서는 아직도 당신이 손보미 씨를 기다리고 있다고 해요. 이젠 손보미 씨가 돌아왔고 일도 잘 풀리고 있으니 다들 두 사람이 잘되길 바라고 있어요.”

배건후는 누군가에게 전화하려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너도 그러길 바라?”

도아린은 마음이 칼로 도려내듯 아팠고 눈가가 다시 촉촉해졌다.

“언젠가는 다시 만날 거잖아요.”

도아린이 얘기하지 않아도 손보미가 언젠가는 꺼낼 것이다. 배건후는 그녀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언제 이혼하는지는 내가 결정해.”

그러고는 이혼 합의서를 도아린에게 던졌다.

“네가 만든 쓰레기 알아서 처리해.”

“난...”

그녀가 뭐라 얘기하려는데 배건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임원 회의를 미루겠냐는 수석 비서의 전화였다.

“아니. 금방 도착해.”

배건후는 전화를 끊은 후 조수현에게 말했다.

“차 세워.”

택시 잡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대표의 말에 토를 달 수 없어 백미러로 도아린을 먼저 보았다. 그러자 도아린이 말했다.

“세워주세요. 거의 도착해서 걸어가도 돼요.”

차에서 내린 후 그녀는 차 안의 배건후에게 말했다.

“생각 바뀌면...”

탁!

배건후는 짜증 섞인 얼굴로 블랙 카드 한 장을 던져주었다.

“사고 싶은 거 알아서 사.”

도아린이 카드를 줍는 사이 마이바흐는 이미 멀리 떠나버렸다.

“오늘 저녁에 그 집에서 나올 거예요.”

그녀는 차를 향해 소리쳤다.

맨션 문 앞에서 얼굴을 인식할 때에야 도아린은 귀와 볼에 멍이 들었다는 걸 발견했다.

‘살살 좀 하지.’

에이트 맨션 문 앞에 도착한 그때 누군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아린 씨, 물이나 옮겨요.”

아무리 도우미라고 해도 관리사무소가 해야 하는 일은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배건후가 그녀를 업신여기고 일을 시키는 바람에 관리사무소 사람들마저 그녀를 막 부려먹었다.

관리사무소 팀장은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마음껏 비웃었다.

“대표님한테 한 소리 들었죠? 내가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발코니에서 일광욕하고 수영장에서 수영 좀 했다고 안주인이라도 된 줄 알아요? 사람은 자기 주제를 잘 알아야죠. 도우미는 그냥 도우미일 뿐이에요.”

도아린은 화가 난 나머지 실소를 터트렸다.

“배건후 씨 시중드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해요. 당신들은 사람 볼 줄도 모르면서 어디서 함부로 지적질이에요? 자기 주제가 뭔지 먼저 알고 말해요.”

이젠 배씨 가문 사모님 자리도 눈에 차지 않는 그녀였다. 하여 사람들이 더는 함부로 굴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도아린의 말에 관리사무소 팀장은 놀란 나머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긋지긋하다고요? 대표님이 아니었더라면 아린 씨는 평생 명품이라는 걸 사지도 못해요. 그런 마음가짐인 사람을 대표님이 3년이나 썼다니, 정말 운도 좋았네요.”

도아린이 돌아서서 가려는데 어깨가 잡혀버리고 말았다. 관리사무소 팀장이 더러운 장갑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눈치 없이 굴지 말고 얼른 물이나 옮겨요. 안 그러면 대표님께 이를 겁니다.”

도아린은 고개를 돌린 순간 관리사무소의 삼륜차 뒤에 있는 세단과 차 문 쪽에 서 있는 배건후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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