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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온유
“대표님!”

배건후의 차를 알고 있는 경비원이 허리 굽혀 인사했다.

“대표님, 아린 씨도 자주 농땡이 치는 건 아니에요. 근데 다른 도우미로 바꾸고 싶다면 소개해드릴게요...”

관리사무소 팀장은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배씨 가문의 도우미들은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썼다. 게다가 월급이 높을 뿐만 아니라 재벌 2세를 만날 기회가 많기에 도아린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사람이 많았다.

배건후는 차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카리스마는 모두를 압도해 버렸다.

환하게 웃던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연성의 7월은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지만 사람들은 마치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1분 후, 유리창이 서서히 내려오면서 배건후의 어두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 일 다 하고 여기서 수다질이야? 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꺼져.”

관리사무소 팀장은 놀란 나머지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고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배건후의 언행은 상업계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런 그가 관리사무소를 내쫓는다면 관리사무소는 연성에서 더는 발을 붙이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배건후의 날카로운 시선이 도아린에게 머물렀다.

“타.”

“난 할 일이 있어서요...”

그러자 배건후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배건후와 거리를 유지하려고 차 문 쪽에 최대한 붙어 앉았다.

마이바흐가 맨션을 나간 후 배건후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가 하얀 연기를 내뱉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평소에는 기고만장하다가 침대 위에서는 힘 한 번 쓰지 못하는 남자?”

“...”

도아린은 시선을 내리깔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담배를 다 피운 배건후가 서류를 툭툭 두드렸다.

“이거 무슨 뜻이야?”

도아린이 힐끔 쳐다보니 그녀가 작성한 이혼 합의서였다.

“이혼하고 싶어요.”

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숨 막힐 듯이 답답해졌다.

운전기사 조수현은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는 핸들을 꽉 잡고 최대한 앞만 보면서 귀를 닫으려 애를 썼다.

“이유가 뭔데?”

배건후의 말투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거기 정확하게 다 썼어요.”

도아린은 두 사람 사이의 거치대를 내렸다. 그가 당장이라고 이혼 합의서를 얼굴에 던질 것만 같았다.

배건후는 눈을 감고 천천히 말했다.

“결혼 3년 동안 남편은 금전 외에 정신 및 몸의 욕구를 만족해해 주지 못했다. 이런 순수한 사랑을 거절한다.”

그의 말투가 점점 차가워지더니 마지막 한마디는 거의 이를 갈면서 말했다.

“...”

다 사실이었다. 배건후와 결혼한 3년 동안 돈은 정말 부족하지 않게 줬고 명품 가방과 보석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3년 전 그날 밤 이후로 배건후는 도아린을 터치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에이트 맨션에서 지낸 날이 합쳐봤자 반년 정도였다. 몸의 위로는 둘째치고 일상적인 관심조차 없었다. 이런 관계라면 도아린이 직접 아내라고 밝혀도 믿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공부 머리가 남달랐던 배건후는 눈을 감고 다시 그대로 그 말을 반복했다. 잠시 후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3년 동안 넌 노력할 생각 따위 하지도 않고 맨날 놀았으면서 재산을 나눠 가지겠다고? 그럴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

그동안 도아린은 집에서 빈둥빈둥 논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몰래 비싼 드레스를 수선하는 일을 했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손이 굳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재산 분할은 그저 단순히 그의 화를 돋우기 위해서였다. 그가 먼저 내연녀와 역겨운 짓을 했으니까.

배건후의 독설에 진작 적응한 도아린이었지만 이런 평가를 들으니 기분이 좋진 않았다.

도아린이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내다보자 배건후는 그녀가 피하려는 건 줄 알고 손으로 머리를 확 돌려버렸다.

“그때 나랑 잔 것도 돈 때문이고 이혼도 돈 때문이야? 쌍스러운 건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비웃음이 날카로운 칼처럼 도아린의 마음을 쿡쿡 찔렀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시선을 늘어뜨렸다.

“건후 씨, 결혼 생활 3년 동안 건후 씨의 의식주는 다 내가 챙겼어요. 도우미를 구해도 월급은 줬을 거 아니에요.”

배건후는 그녀의 귀를 잡고 싸늘하게 말했다.

“도우미는 평생 일해도 이 귀걸이 못 사.”

도아린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귀가 꽉 잡혀있어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홧김에 귀걸이를 잡아당겼다가 귓불이 다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아프면서도 지지 않으려는 그녀의 표정을 보니 배건후는 더욱 짜증이 났다.

“혹시 널 만족해해 주는 남자를 만났어?”

“...”

도아린은 울먹일까 봐 아무 말도 못 했지만 배건후는 인정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힘을 거두고 귓불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결혼도 내 결정을 따랐으면 이혼도 내 결정을 따라야 해. 넌 자격이 없어.”

도아린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손보미가 이별을 고하고 해외로 떠났을 때 배건후는 홧김에 도아린과 결혼했었다. 이젠 손보미가 돌아왔는데 왜 이혼하지 않겠다는 걸까? 이혼하면 진짜 사랑하는 여자에게 가는 게 더 쉬울 텐데.

남자의 자존심 때문에? 아니면 이때 이혼하면 손보미에게 내연녀라는 소리를 듣게 하여 일에 지장 줄까 봐?

배건후가 사인하든 말든 도아린은 자신의 태도를 명확하게 밝혀야 했다.

“우리가 결혼한 거 아는 사람이 별로 없고 외부에서는 아직도 당신이 손보미 씨를 기다리고 있다고 해요. 이젠 손보미 씨가 돌아왔고 일도 잘 풀리고 있으니 다들 두 사람이 잘되길 바라고 있어요.”

배건후는 누군가에게 전화하려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너도 그러길 바라?”

도아린은 마음이 칼로 도려내듯 아팠고 눈가가 다시 촉촉해졌다.

“언젠가는 다시 만날 거잖아요.”

도아린이 얘기하지 않아도 손보미가 언젠가는 꺼낼 것이다. 배건후는 그녀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언제 이혼하는지는 내가 결정해.”

그러고는 이혼 합의서를 도아린에게 던졌다.

“네가 만든 쓰레기 알아서 처리해.”

“난...”

그녀가 뭐라 얘기하려는데 배건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임원 회의를 미루겠냐는 수석 비서의 전화였다.

“아니. 금방 도착해.”

배건후는 전화를 끊은 후 조수현에게 말했다.

“차 세워.”

택시 잡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대표의 말에 토를 달 수 없어 백미러로 도아린을 먼저 보았다. 그러자 도아린이 말했다.

“세워주세요. 거의 도착해서 걸어가도 돼요.”

차에서 내린 후 그녀는 차 안의 배건후에게 말했다.

“생각 바뀌면...”

탁!

배건후는 짜증 섞인 얼굴로 블랙 카드 한 장을 던져주었다.

“사고 싶은 거 알아서 사.”

도아린이 카드를 줍는 사이 마이바흐는 이미 멀리 떠나버렸다.

“오늘 저녁에 그 집에서 나올 거예요.”

그녀는 차를 향해 소리쳤다.

맨션 문 앞에서 얼굴을 인식할 때에야 도아린은 귀와 볼에 멍이 들었다는 걸 발견했다.

‘살살 좀 하지.’

에이트 맨션 문 앞에 도착한 그때 누군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아린 씨, 물이나 옮겨요.”

아무리 도우미라고 해도 관리사무소가 해야 하는 일은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배건후가 그녀를 업신여기고 일을 시키는 바람에 관리사무소 사람들마저 그녀를 막 부려먹었다.

관리사무소 팀장은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마음껏 비웃었다.

“대표님한테 한 소리 들었죠? 내가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발코니에서 일광욕하고 수영장에서 수영 좀 했다고 안주인이라도 된 줄 알아요? 사람은 자기 주제를 잘 알아야죠. 도우미는 그냥 도우미일 뿐이에요.”

도아린은 화가 난 나머지 실소를 터트렸다.

“배건후 씨 시중드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해요. 당신들은 사람 볼 줄도 모르면서 어디서 함부로 지적질이에요? 자기 주제가 뭔지 먼저 알고 말해요.”

이젠 배씨 가문 사모님 자리도 눈에 차지 않는 그녀였다. 하여 사람들이 더는 함부로 굴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도아린의 말에 관리사무소 팀장은 놀란 나머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긋지긋하다고요? 대표님이 아니었더라면 아린 씨는 평생 명품이라는 걸 사지도 못해요. 그런 마음가짐인 사람을 대표님이 3년이나 썼다니, 정말 운도 좋았네요.”

도아린이 돌아서서 가려는데 어깨가 잡혀버리고 말았다. 관리사무소 팀장이 더러운 장갑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눈치 없이 굴지 말고 얼른 물이나 옮겨요. 안 그러면 대표님께 이를 겁니다.”

도아린은 고개를 돌린 순간 관리사무소의 삼륜차 뒤에 있는 세단과 차 문 쪽에 서 있는 배건후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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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손 키스를 날리고 웃으며 말했다.“화내지 말아요. 튀르키예든 동경이든 파리든 건후 씨가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같이 갈게요.”배건후가 주먹을 꽉 쥐었다. 관절에서 뚜두둑 소리가 날 정도였고 가뜩이나 차갑던 이목구비가 더욱 차가워졌다.그가 도아린에게 이런 말을 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도아린이 그대로 하니까 전부 거슬렸다. 짜증이 나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점원은 옆에서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최대한 존재감을 없애려 노력했다.배건후가 뿜어내는 냉기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다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내 카드 긁으려고? 안 돼.”도아린이 얼마를 쓰든 배건후는 제한한 적이 없었다. 도아린도 좋은 식자재를 사는 것 말고는 대부분 남동생의 병 치료에 썼다. 그리고 배건후가 선물한 게 많아 도아린 자신에게 돈을 쓸 일도 거의 없었다.그녀가 비상금을 몰래 챙겼다고 해도 수십억을 챙길 리가 없었다. 그에게 마구 대들었으니 그를 떠나면 얼마나 힘들지 느껴보게 할 생각이었다.도아린은 손가락으로 배건후의 가슴팍을 튕겼다. 그러자 블랙 카드가 순식간에 그의 양복 주머니에 들어갔다.‘내가 진짜 기생충인 줄 아나.’그저 그 돈을 건드리기 싫었을 뿐이지, 한 푼도 없는 거지는 아니었다. 이번에 제대로 본때를 보여줘야 했다.도아린은 가방에서 평범한 은행 카드 한 장을 꺼내 점원에게 건넸다. 점원이 카드를 긁자 컴퓨터 화면에 지불 성공이라는 글씨가 빠르게 나타났다. 그녀는 점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후 휙 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배건후는 이까지 바득바득 갈았다.‘몰래 이렇게나 많은 돈을 숨겼다는 건 이혼하려고 진작 준비했다는 거네.’차 안으로 돌아온 후 도아린은 흥분됐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마치 공기 빠진 공처럼 축 처져 의자에 앉아있었다.카드 한 번 긁었다고 거의 전 재산을 탕진했다. 조금 전 홧김에 한 행동을 조금 후회하기도 했다.장뇌삼도 귀하긴 했지만

  • 또 한 번의 거절   제9화

    도아린은 밤새 푹 자고 이튿날 맑은 정신으로 나형욱을 만나러 갔다.소유정이 가는 녹음실이 그녀의 목적지와 한 건물이라 두 사람은 도착한 후 A 구역과 D 구역으로 흩어졌다.“안녕하세요. 실례지만 엘리베이터 눌러주실래요? 7층 가려고요.”“네...”프런트 직원은 절반 정도 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신작 오디션은 D 구역입니다.”요 며칠 손보미가 맡았던 역할의 오디션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이쪽으로 잘못 찾아오는 사람이 꽤 있었다.프런트 직원은 도아린을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오늘 이분은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괜찮은 것 같아. 분위기도 좋고 메이크업을 살짝만 해도 성형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겠어.’도아린이 덤덤하게 웃어 보였다.“전 LH 스튜디오로 가려고요.”프런트 직원은 그녀를 엘리베이터에 태운 후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보면서 어리둥절해 했다.‘LH 스튜디오는 옷을 수선하는 곳인데... 대부분 몸가짐에 신경을 쓰지 않는 중년이 많고. 근데 방금 그 여자는 젊고 또 예뻐. 그렇다면 무조건...’“천장에 뭐가 있어요?”한 잘생긴 남자가 그녀 뒤에서 웃으면서 농담을 건넸다.“샹들리에에 붙어있는 크리스털을 떼려고요?”빌딩의 대표 성대호가 밖에서 들어왔다. 성대호는 유머러스하고 시원시원한 사람이라 직원들이 많이 따랐다.“대표님이 샹들리에를 스와로브스키로 바꾸면 그때 뗄게요.”“잊지 않게 노트에 적어야겠어요...”성대호는 농담으로 어린 여자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뒤에서 구두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바로 대표의 카리스마를 뽐냈다.“나형욱 씨한테 전화해서 귀한 손님이 온다고 알려줘요.”“나형욱 씨 귀한 손님은 이미 올라갔어요.”“올라갔다고요?”성대호가 화들짝 놀랐다.“어떻게 생겼어요?”“엄청 예쁘고 분위기 있고 또 교양도 있는 여자였어요.”성대호의 두 눈에 교활함이 스쳤다. 돌아선 순간 배건후의 싸늘한 얼굴을 보고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으며 휴대전화를 꺼냈다.“내가 말할게요.”전화가 단번에 연

  • 또 한 번의 거절   제10화

    상대를 자극하는 말을 누가 할 줄 모르겠는가.“당신은 알 자격이 없어요.”도아린이 목을 빳빳이 쳐들고 말했다. 배건후는 서로 싸웠다간 상황이 더 안 좋아질 거란 생각에 두 주먹을 꽉 쥐었다.“어머니가 네 동생 상태가 어떠냐고 물었어. 돌아가서 말씀드리게 아무 이유나 준비해.”“그럴 필요 없어요.”도아린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모든 절차가 끝나면 자세하게 말씀드릴 거예요. 3년이나 꾹 참았으니 아무도 날 도덕적 잣대로 뭐라 할 수 없어요.”“참았다고?”배건후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대놓고 비웃었다.“좋은 것만 먹고 입었으면서 뭐가 억울하다고 그래? 쩍하면 삐지고 가출하고. 어머니는 지유보다 너한테 더 잘해줘. 그런데도 만족 못 해? 대체 어떻게 해야 만족할 건데? 빌딩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도울 디저트에 주면 그만할 거야?”“...”도아린의 심장이 칼로 쿡쿡 찌르듯 아팠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고통과 절망을 감추기 위해 시선을 늘어뜨렸다. 배건후의 눈빛도 어두워졌고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을 빤히 내려다보았다.잠시 후, 도아린은 귀에 한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천천히 뺐다.“건후 씨, 블랙 카드 돌려줬고 이 귀걸이도 돌려줄게요. 집에 있는 주얼리 하나도 안 가져갔으니까 처리하고 싶은 대로 처리해요. 그리고 바쁘겠지만 시간 내서 이혼 절차 진행해요, 우리. 그럼 난 앞으로 참을 일도 없고 당신도 나한테 쓰기 싫은 돈 쓸 필요 없어요.”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귀걸이를 건넨 후 재빨리 자리를 비웠다.D 구역에서 나온 소유정이 그녀에게 손짓하며 길가 쪽으로 오라고 했다. 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배건후를 돌아보았다.“건후 씨한테 아예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어.”배건후가 주먹을 쥐었다.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고 말았다.“도아린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야? 너랑 이혼하겠다고?”성대호가 또 옆으로 다가왔다.“너랑 상관없는 일이야.”배건후는 씩씩거리면서 차에 올라타더니 성대호의 처리 결과도 듣지 않고 휙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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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한 번의 거절   제876화

    강재민은 굳어진 채 손에 든 와인잔을 응시했다. 와인에 갈색 눈동자가 비춰 일렁이었다.“오늘 구치소에 아린 씨를 데리러 갔다가 두 사람을 봤거든?”강재민이 도착했을 때 주변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배건후와 고성민이 범인을 잡는 과정을 목격했고도아린이 소화기를 들고 사람을 구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배건후가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을 무릅쓰고 도아린을 위해 달려가는 장면도 목격했다.강재민은 순간 자신에게 더 이상 기회가 없음을 알아챘다.도아린의 마음속에 배건후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그래. 건후를 깊이 사랑한 게 아니라면 그 3년 동안 그렇게 참고 견디지 않았겠지.’배건후는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을 그의 희생과 ‘죽음’으로 도아린에게 사죄한 셈이었다.도아린이 당장에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다른 남자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게다가 강재민은 배건후의 가정을 망친 장본인이였고 도아린이 배건후를 용서하는 그날, 바로 그와 도아린은 적이 될 게 뻔했다.그는 도아린이 이별을 고할까 봐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그는 완전한 실패자가 될 테니까.그래서 그는 도아린의 잘못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들어 결말이 없는 연애를 끝내며 남아 있는 자존심이라도 지키려 했다.처음으로 좌절하는 동생의 모습을 마주하고 강재희는 몇 마디 잔소리를 덧붙인 후, 동생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세 병의 와인이 다 비워지자 강재민은 술에 취해 테이블에 엎드려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강재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어 동행한 경호원을 불러 그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일주일 후, LY 고위 회의에서 라윤주 자리를 놓고 논의가 시작됐다.서대은은 여전히 여성 복장을 한 채 현재의 라윤주를 지지한다고 밝혔고 청룡도 마찬가지로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백호는 다시 한번 경쟁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지만 현무는 자리에 없었기에 혼자 고립된 느낌이었다.“라윤주를 다시 뽑을 생각이 없다면 각자 왕이 되겠다는

  • 또 한 번의 거절   제875화

    도아린이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작은 상자 안을 내려다보았다.벨벳 상자 안에는 결혼반지가 아닌 다이아몬드 커프스단추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현무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현무의 직위를 포기하고 라윤주 자리에 대한 경쟁도 그만두겠다는 건가?’서빙 직원이 음식을 가져오자 강재민은 도아린이 좋아하는 음식을 그녀 앞에 놓았다.권력을 내려놓은 남자는 조금도 아쉬움이 없었고 오히려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식사가 끝나자 강재민은 시계를 한 번 확인한 뒤, 미안한 듯 말했다.“이따 데려다 줄 수 없을 것 같아요. 바로 공항으로 가야 되거든요.”그는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인연이 닿으면 그때 다시 만나요.”도아린이 일어나서 그의 손을 잡았다.“강재민 씨도 잘 지내요.”강재민은 손을 꽉 쥔 뒤 미소를 지으며 손을 뗐다.도아린을 따라나서던 일북은 한 번 뒤를 돌아봤다. 강재민은 와인잔을 한 모금에 비우고 창밖을 보며 도아린에게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았다.차로 돌아오자 일북이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아가씨. 배 위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헤어지자고 하는 그런 사람을 위해 슬퍼할 필요 없어요. 어떻게 아가씨를 믿지 않을 수 있죠?”도아린이 고개를 숙인 채, 그 다이아몬드 단추를 바라보았다.그 위로 눈물이 떨어지며 다이아몬드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빛났다.“재민 씨는 나를 믿지 않았던 게 아니야.”“그렇다면 왜... 결국 이별을 말한 건 그 일 때문 아닌가요?”일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강재민은 도아린과 육하경이 몇 날 며칠 같이 배에 있으면서 그들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걸 확신했다.일북의 눈에 강재민은 도아린이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한 거라는 걸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받아들이지 못해 헤어지는 사람으로 비치고 있었다.도아린이 눈물을 닦으며 단추를 가방에 넣었다.“만약 재민 씨가 정말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내가 건후 씨와 결혼한 뒤에도 건후 씨한테 시비를 걸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 우리가 이혼

  • 또 한 번의 거절   제874화

    도아린은 급히 시선을 돌린 채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도망치고 싶었다.‘만약 재민 씨가 정말로 청혼을 하는 거라면 어떻게 거절해야 할까?’‘결혼에 대한 희망을 잃었어요. 당분간은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아시다시피 재민 씨 가족과는 어색해 앞으로도 계속 갈등이 생길 것 같아요.’‘어떤 게 좋을까?’“저것 봐봐!”레스토랑에 들어온 한 커플이 공중의 드론을 보고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여자는 흥분해서 남자 친구의 소매를 당기며 말했다.“너무 예쁘다! 자기도 나한테 청혼할 때 이렇게 해주면 안 돼?”“나한테 시집오기만 하면 내가 하늘의 별이라도 따올 수 있어!”“그럼 가서 별이라도 따와!”두 사람은 웃으며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강재민이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하고 싶은 말 없어요?”도아린은 음료컵을 꽉 쥔 채 입을 열었다.“재민 씨. 우리는 아무래도...”그녀는 강재민과 진지하게 시작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두 사람에게 일어난 일들은 그들이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게 해주었다.강재민이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유리처럼 맑은 눈동자가 불빛에 비쳐 반짝였지만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쓸쓸함이 스쳤다.“더 이상 안 보면 끝날 텐데요.”“...”“도저히 볼 자신이 없어요?”도아린은 다시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거절을 하더라도 강재민이 준비한 이벤트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공중에 떠 있는 글자를 보고 눈물이 스쳤다.‘행복해야 해.’도아린은 코가 찡해져 눈을 크게 뜬 채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애썼다.드론들이 밤하늘에서 귀여운 파란색 애벌레 모양을 만들더니 천천히 나비로 변하며 쇼는 막을 내렸다.강재민이 도아린에게 와인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애벌레에서 이제는 멋진 나비로 변한 걸 축하해요.”도아린은 또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강재민이 자신에게 청혼하려는 줄 알았는데 결국 그것은 단지 축복이었다.그 축복은 그녀를 묘하게 울컥하게 했다.“재민 씨, 미안해요

  • 또 한 번의 거절   제873화

    앞에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자 강재민은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차를 멈췄다.그는 옆에 앉은 도아린을 곁눈질로 바라보았고 그의 눈빛에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도아린은 그 시선이 느껴졌지만 고개를 들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재민 씨에게 라윤주의 자리를 차지하라고 한 건 육청아 본인의 계획을 위해서였겠죠. 재민 씨가 보스가 되면 그 여자는 재민 씨 다음으로 권력이 있는 사람이니까, 조직을 육하경에게 넘겨줄 수 있고, 문제가 생기면 재민 씨를 희생양으로 쓸 수도 있을 테니까요.”강재민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육청아의 속셈은 그렇게 잘 꿰뚫어 봤으면서 내 마음은 못 읽어요?”도아린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쳤다.그 순간,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고 강재민은 시선을 돌려 다시 차를 운전했다.도아린은 미처 그의 눈동자에 스친 쓸쓸함을 보지 못했다.집에 도착한 도아린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아래층으로 향했다.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게임을 하고 있던 강재민은 그녀의 발소리가 들리자 고개도 돌리지 않고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그만할게, 여자 친구랑 나가야 돼.”“젠장! 팀 킬하고 도망가냐...”상대가 욕을 다 끝내기도 전에, 그는 게임을 끄고 웃으며 일어났다.“가요!”“어디를요?”“밥 먹으러.”그는 옷걸이에 걸려 있던 외투를 도아린에게 건네고 다정하게 그녀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 그 손길은 평소와 다르게 어딘가 진중했다.그들이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일북이 돌아왔다.그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강재민을 바라봤고 강재민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차 키를 그에게 던졌다.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일북은 그제야 차로 향했다.강재민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도심의 고급 호텔이었다.그는 미리 예약한 창가의 테이블에 다가가 신사적으로 도아린의 의자를 빼주고, 일북을 돌아보았다.“먹고 싶은 걸 골라요. 계산은 내가 할게요.”일북이는 바로 뒤쪽 테이블에 앉은 채 두 사람한테서 시선을 떼

  • 또 한 번의 거절   제872화

    강재민이 어느새 다가와 말을 걸었다.그는 배건후의 경계 어린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도아린의 옆으로 다가갔다.“마침 근처에 있다가 폭발 소리를 듣고 열혈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할 생각에 달려왔는데 아린 씨가 여기 있는 줄은 몰랐네요. 우리 참 인연이 깊은 거 아니에요?”도아린은 그를 흘깃 쳐다봤다. 그 말을 믿겠냐는 눈치였다.강재민은 개의치 않게 웃으며 도아린의 어깨를 감싸안았다.“형사님, 이제 제 여자 친구 데려가도 되죠?”“...”고민성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배건후를 향했다.‘제발 시끄럽게 주먹질하고 그러지 마.’그는 자신의 경찰서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는 걸 원치 않았다.특히 경찰서 앞에서 일어난 폭발 사건만으로도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충분했다.“물론이죠!”고민성이 정중하게 말했다.“도아린 씨, 나중에 차량 구매 영수증만 경찰서로 보내주세요.”도아린은 사실 남궁유민의 상황이 궁금했지만 지금은 적절한 시점이 아니었다.“알겠어요.”도아린은 배건후의 간절한 눈빛을 무시하고 여유롭게 강재민의 차에 올라탔다.강재민은 창문을 내리고 도발적인 휘파람을 불며 차를 몰고 떠났다.고민성이 배건후의 옆으로 다가가며 혀를 차며 말했다.“아린 씨가 너를 그렇게 걱정하는 걸 보고 난 또 네가 기회가 있을 줄 알았지. 지금 보니... 에잇!”“차 보상은 경찰서에서 직접 책임져.”배건후가 고민성을 지나쳐 구치소로 걸어갔다.“야, 아까랑 말이 다르잖아!”고민성이 서둘러 그를 따라가며 불평을 늘어놓았다.“우리 경찰서 예산 알잖아! 이 사건도 네가 지원해 줬으니 해결할 수 있었던 거 알면서! 경찰서에 너를 위해 현수막도 걸겠다고 약속했어!”배건후가 걸음을 멈추었다.“그런 건 당연히 나라에서 보상해야 하는 거 아니야?”그는 무표정하게 고민성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난 당신들 계획에 참여하느라 내 아내까지 잃었어. 그것도 보상해 줘야 해.”고민성이 단칼에 거절하려다 그가 경비를 다시 거둬들일까 두려워 결국 대답을 피했다.그리고

  • 또 한 번의 거절   제871화

    “빨리 도망가요!”고민성이 큰 소리로 외치자 도아린은 뒤돌아서서 하얀 카옌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갑자기 차 문에 검은색 코트가 끼어 있는 게 눈에 들어오자 도아린은 멈칫했다.“건후 씨!”도아린은 급히 뛰어 돌아가 차 문을 힘껏 당겼다. 그러나 차 문은 이미 충격에 의해 휘어져 있었고, 밴에서 새어 나오는 검은 연기가 차 안을 가득 채워 내부 상황을 알 수 없었다.펑!차창이 다시 폭발하며 유리가 공중으로 튕겨 나갔고 불길은 삽시간에 마치 차를 삼키려는 듯 거세졌다. 도아린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쪼그려 앉았다. 유리 조각이 튀었지만 다행히 상처는 입지 않았다.그녀가 다시 일어나 차 문을 잡으려 할 때,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뛰어!”도아린은 상대방의 손에 이끌려 몇 미터를 달리다가, 뒤에서 또 한 번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뜨거운 열기에 두 사람은 뒤로 튕겨 나갔다.도아린은 본능적으로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예상한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도아린을 꼭 껴안으며 그녀를 모든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폭발음과 함께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남자의 손이 그녀의 짧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손끝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배건후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무엇인가 말하고 있었지만 도아린은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뭐라고요?”도아린이 크게 외쳤다.배건후도 마치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도아린을 안전한 곳으로 끌고 간 뒤, 그녀의 팔과 다리를 움켜잡았다. 도아린은 그가 방금 자신이 다쳤는지 물어본 것임을 깨달았다.“난 괜찮아요!”도아린이 입을 크게 벌려 대답하며 배건후를 가리켰다.“당신은 괜찮아요?”배건후의 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먼 곳에서 비친 불꽃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상처가 없었지만 연한 색의 터틀넥 스웨터에는 약간의 피가 묻어 있었다. 그 피는 심장 근처에 있었다.도아린이 놀라 급히 그의 가슴을 만지며 갈비뼈

  • 또 한 번의 거절   제870화

    제복을 입었을 때는 늠름했는데 지금은 치마를 입고 가발까지 써서 그런지 고민성은 유독 우아하게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도아린으로 분장한 고민성은 손을 들어 배건후의 얼굴을 쓰다듬으려 했고 두 사람 사이의 눈빛은 아주 끈적했다.“나 엄청 기다렸다니까. 이제 빨리 가자.”배건후는 그의 손을 단숨에 쳐내고 도아린의 손에서 차 키를 가져갔다.도아린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골반을 흔들면서 걷는 고민성을 보고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경찰이 다가오더니 도아린에게 휴게실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휴게실에 막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고 경찰은 차를 따라주겠다며 자리를 비웠다.도아린은 창가 쪽으로 갔다. 그녀는 바깥 상황을 볼 수 있으면서도 공격당하지 않을 만한 위치를 찾아서 전화를 받았다.“말하세요.”“육씨 가문에서 육하경 씨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육하경 씨가 그들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걸 몰랐죠. 육하경 씨는 죽었지만 그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있어요.”강재민의 목소리는 경멸스러움과 조소로 가득했다.“그리고 또 하나 신기한 소식이 있어요. 육청아 씨는 애초에 육씨 가문의 먼 친척이 아니라는 거예요. 육청아 씨는 나영옥 어르신이 며느리로 삼으려고 데려온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계속 육청아 씨를 통제할 생각이었는데 육청아 씨가 되려 육하경이 육씨 가문을 반격하는 수단으로 되어버린 거죠.”도아린이 미간을 좁혔다.그녀가 있는 곳에서는 유치장 앞 도로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경찰이 남궁유민을 어떻게 체포했는지 알 수 없었다.창문을 열려고 하던 찰나, ‘쿵’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곧이어 유리창에 불길이 일렁이며 비쳤다.“어디예요?”강재민이 다급하게 물었다.도아린은 그의 질문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전화를 끊고 밖으로 뛰어나갔다.차를 가져다주려던 경찰도 소리를 들었는지 손에 든 종이컵을 꽉 쥐어 구겼고, 뜨거운 물이 손등에 쏟아졌다. 그는 곧장 밖으

  • 또 한 번의 거절   제869화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손보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성형 수술을 한 남궁유민 변호사님이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과연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까? 설령 얼굴을 또 바꿨다 해도 DNA까지 바꿀 순 없잖아. 경찰이 수색하고 있으니 곧 잡힐 거야!”“아니야, 아니라고!”손보미는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경찰이 감정을 가라앉히라고 호통쳤지만 손보미는 온몸을 떨며 안절부절못했다.“설마 남궁유민 변호사가 내 약점을 잡고 경찰들을 협박하면 경찰이 널 풀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네 딸 율이 말이야... 살 희망이 있었는데도 남궁유민 변호사가 장기 기증 동의서에 서명해서 죽었어!”“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손보미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그녀는 도아린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경찰이 재빠르게 그녀를 제압했다.“손보미 씨, 진정하세요!”“율이는 무사할 거야! 절대 무사할 거야... 잘 보살필 거라고 나한테 약속했었다니까? 우리 세 명이서 함께할 거라고 약속했단 말이야! 도아린, 거짓말이지? 맞지?”손보미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경찰에게 눌려 테이블에 얼굴을 박았다. 볼을 타고 눈물이 쏟아졌다.그녀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본 적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다.율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녀는 율이를 곁에 두기로 했다.처음엔 율이를 인질로 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함께 지내면서 율이의 착하고 속 깊은 모습에 점점 정이 들었다.남궁유민이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두를 때, 율이는 따뜻한 물을 받아 그녀더러 목욕을 하라고 했었다. 그럴 때마다 율이는 조심스럽게 연고를 발라 주면서 물었다.“언니를 안 좋아해서 때리는 거예요?”남궁유민이 율이를 떠나보내자고 했을 때, 손보미는 막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병약한 딸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부녀 사이라는 건 변함없었다.생활이 조금 힘들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율이는 보육원에서도 그렇

  • 또 한 번의 거절   제868화

    “사실은 말입니다. 손보미 씨가 이미 세 번이나 신청했거든요. 도아린 씨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면 앞으로 다시는 방해하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말이죠.”경찰이 말했다.도아린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온갖 수를 써서 날 찾은 건 분명 그에 따르는 목적이 있을 거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손보미를 만나러 갈 필요는 없었기에 그녀는 회사로 향했다.회사에 도착하자 윤가인이 이름 후보를 몇 개 가져왔다. 도아린은 ‘레브’라는 이름을 선택했다.도아린은 윤가인에게 최대한 빨리 변경 절차를 밟으라고 했다.“그리고 이 프로젝트 말인데요. 배... 배건후 씨가 맡아서 진행했다고 하더군요.”윤가인이 또 다른 서류를 건네면서 말했다.서류를 펼쳐 본 도아린은 비웃음을 흘렸다.신지훈이 정말이지 온 힘을 다해 배건후를 띄워주고 있었다.도아린이 전에 신지훈더러 조사하라고 했던 강재민이 중단시킨 프로젝트의 건축 자재에 대한 서류였다. 아마도 신지훈이 조사하고 나서 공을 세울 기회를 배건후에게 준 것이었다.“배건후 씨가 맡게 놔두세요.”도아린은 거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렇게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그에게 다른 어려움이 없다면 그녀라도 장애물을 놓아야 했다.도아린은 퇴근 직전까지 바쁘게 일했다. 그리고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급한 일이 생겨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전했다.하루 종일 기다린 손보미는 욕설을 퍼붓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다음 날도 그녀는 계속해서 기다렸지만 도아린은 오지 않았다.사흘이 지나자 손보미는 도아린이 자신을 가지고 노는 거라고 확신했다. 애초부터 만날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라고 말이다.그때, 경찰이 와서 그녀에게 면회 소식을 알렸다.면회실에 들어선 손보미는 도아린을 보자마자 살기를 뿜어냈다.예전의 화사하고 아름다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원래 단정하던 긴 머리는 싹둑 잘라버려서 그런지 오늘따라 건조하고 푸석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시술을 받을 수 없어서인지 얼굴은 점점 변형되었고 콧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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