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은 밤새 푹 자고 이튿날 맑은 정신으로 나형욱을 만나러 갔다.소유정이 가는 녹음실이 그녀의 목적지와 한 건물이라 두 사람은 도착한 후 A 구역과 D 구역으로 흩어졌다.“안녕하세요. 실례지만 엘리베이터 눌러주실래요? 7층 가려고요.”“네...”프런트 직원은 절반 정도 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신작 오디션은 D 구역입니다.”요 며칠 손보미가 맡았던 역할의 오디션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이쪽으로 잘못 찾아오는 사람이 꽤 있었다.프런트 직원은 도아린을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오늘 이분은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괜찮은 것 같아. 분위기도 좋고 메이크업을 살짝만 해도 성형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겠어.’도아린이 덤덤하게 웃어 보였다.“전 LH 스튜디오로 가려고요.”프런트 직원은 그녀를 엘리베이터에 태운 후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보면서 어리둥절해 했다.‘LH 스튜디오는 옷을 수선하는 곳인데... 대부분 몸가짐에 신경을 쓰지 않는 중년이 많고. 근데 방금 그 여자는 젊고 또 예뻐. 그렇다면 무조건...’“천장에 뭐가 있어요?”한 잘생긴 남자가 그녀 뒤에서 웃으면서 농담을 건넸다.“샹들리에에 붙어있는 크리스털을 떼려고요?”빌딩의 대표 성대호가 밖에서 들어왔다. 성대호는 유머러스하고 시원시원한 사람이라 직원들이 많이 따랐다.“대표님이 샹들리에를 스와로브스키로 바꾸면 그때 뗄게요.”“잊지 않게 노트에 적어야겠어요...”성대호는 농담으로 어린 여자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뒤에서 구두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바로 대표의 카리스마를 뽐냈다.“나형욱 씨한테 전화해서 귀한 손님이 온다고 알려줘요.”“나형욱 씨 귀한 손님은 이미 올라갔어요.”“올라갔다고요?”성대호가 화들짝 놀랐다.“어떻게 생겼어요?”“엄청 예쁘고 분위기 있고 또 교양도 있는 여자였어요.”성대호의 두 눈에 교활함이 스쳤다. 돌아선 순간 배건후의 싸늘한 얼굴을 보고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으며 휴대전화를 꺼냈다.“내가 말할게요.”전화가 단번에 연
상대를 자극하는 말을 누가 할 줄 모르겠는가.“당신은 알 자격이 없어요.”도아린이 목을 빳빳이 쳐들고 말했다. 배건후는 서로 싸웠다간 상황이 더 안 좋아질 거란 생각에 두 주먹을 꽉 쥐었다.“어머니가 네 동생 상태가 어떠냐고 물었어. 돌아가서 말씀드리게 아무 이유나 준비해.”“그럴 필요 없어요.”도아린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모든 절차가 끝나면 자세하게 말씀드릴 거예요. 3년이나 꾹 참았으니 아무도 날 도덕적 잣대로 뭐라 할 수 없어요.”“참았다고?”배건후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대놓고 비웃었다.“좋은 것만 먹고 입었으면서 뭐가 억울하다고 그래? 쩍하면 삐지고 가출하고. 어머니는 지유보다 너한테 더 잘해줘. 그런데도 만족 못 해? 대체 어떻게 해야 만족할 건데? 빌딩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도울 디저트에 주면 그만할 거야?”“...”도아린의 심장이 칼로 쿡쿡 찌르듯 아팠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고통과 절망을 감추기 위해 시선을 늘어뜨렸다. 배건후의 눈빛도 어두워졌고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을 빤히 내려다보았다.잠시 후, 도아린은 귀에 한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천천히 뺐다.“건후 씨, 블랙 카드 돌려줬고 이 귀걸이도 돌려줄게요. 집에 있는 주얼리 하나도 안 가져갔으니까 처리하고 싶은 대로 처리해요. 그리고 바쁘겠지만 시간 내서 이혼 절차 진행해요, 우리. 그럼 난 앞으로 참을 일도 없고 당신도 나한테 쓰기 싫은 돈 쓸 필요 없어요.”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귀걸이를 건넨 후 재빨리 자리를 비웠다.D 구역에서 나온 소유정이 그녀에게 손짓하며 길가 쪽으로 오라고 했다. 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배건후를 돌아보았다.“건후 씨한테 아예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어.”배건후가 주먹을 쥐었다.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고 말았다.“도아린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야? 너랑 이혼하겠다고?”성대호가 또 옆으로 다가왔다.“너랑 상관없는 일이야.”배건후는 씩씩거리면서 차에 올라타더니 성대호의 처리 결과도 듣지 않고 휙 가버렸다.
“언제 수속하러 갈 건데요?”도아린은 문 앞까지 쫓아오다가 하얀빛이 번쩍이자 얼굴을 슬쩍 피했다.그녀가 품에 있는 쇼핑백을 자세히 들여다볼 때 배건후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계단 아래에서 들려왔다.“기분 봐서.”한편 조수현 기사가 차 문을 열고 배건후를 안으로 모시며 나지막이 말했다.“요즘 카풀앱으로 봉변당하는 여성분들이 꽤 많다고 하더라고요.”배건후는 3층 룸을 힐긋 보더니 허리 숙여 차에 올라탔다.“쟤는 사고당해도 싸.”도아린이 쇼핑백을 들고 나왔을 때 마이바흐는 어느덧 떠나가고 없었다. 배건후도 참, 그녀가 분명 싫다고 했는데 기어코 목걸이를 건넬 줄이야.그녀는 비록 갖기 싫었으나 개자식이 준 물건을 길바닥에 내다 버릴 순 없었다.도아린이 길옆에서 차를 기다릴 때 검은색 폭스바겐이 불쑥 앞에 세워졌다.“안녕하세요 사모님, 마침 근처에 있었는데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우정윤이 차에서 내려오며 말했다.마침이라고? 이런 우연을 누가 믿을까?다만 찜통더위에 땀으로 흠뻑 젖었던지라 도아린은 일단 차에 올라탔다.집에 도착한 후 소유정이 그 루비 목걸이를 보더니 3초 동안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 폭소를 터트렸다.“하하하...”그녀는 소파에서 굴러떨어진 채 도아린의 다리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이게 바로 배건후 그 개자식 취향이야? 하하... 역시... 하하하...”“웃다 숨넘어갈라.”도아린이 상자를 닫으며 말했다.소유정은 어느새 웃다가 눈물이 흘러내릴 지경이었다.“그건 그렇고 수백억대 목걸이라 꽤 소장 가치가 있어 보여. 이건 진심!”그녀는 목걸이를 꺼내 도아린에게 대보았다.“그래도 한번 착용은 해주라. 사진 찍어서 나중에 너 실컷 놀리게.”“찍고 싶으면 혼자 알아서 찍던가. 대신 찍을 바엔 여러 각도로 찍어. 모델용으로 쓰게.”“왜? SNS에 올리게?”소유정이 하찮은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도아린은 매번 배건후에게 선물을 받을 때마다 SNS에 지정된 몇 명을 맨션 해서 피드를 올리곤 한다.절친으로서
손보미의 스캔들이 세간을 발칵 뒤집어놓았고 그녀가 딱히 부인하지 않는 건 인정과도 다름없었다.도유준이 성급하게 돈을 요구하는 건 아마도 도아린이 차이면 이용가치가 없어질까 봐 걱정한 듯싶다.엠파이어 빌딩에는 각 분야의 엘리트들이 모였고 물론 훌륭한 변호사도 있었다. 도아린은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에 알고 지내던 변호사 한 분을 찾아가 취지를 설명했다.“재산을 절반씩 나누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장수현 변호사는 배건후의 변호사와 법정에 설 생각을 하니 식은땀이 저절로 났다.“제가 한발 물러서면요?”도아린은 애초에 돈을 가질 생각이 없었고 단순히 그를 엿 먹이고 싶었을 뿐이다.장수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중요한 건 배건후 대표님도 이혼 의사가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입니다. 만약 대표님이 이혼에 동의하지 않으면 아주 긴 법정 싸움이 될 거예요. 아린 씨가 상대방이 잘못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하는 한 법정에서는 화해를 도모할 거예요.”도아린은 가방끈을 꽉 잡았다. 배건후가 손보미를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어찌 그녀에게 명분을 주고 싶지 않을까.도아린과 배건후는 비밀 결혼이라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르는데 법정 싸움으로 번진다면 손보미는 고스란히 치욕을 당해야 할 것이다.그러니까 배건후가 이혼을 거부하는 거겠지.“그럼 이렇게 해요.”도아린이 큰 결심을 내린 듯싶었다.“내일 저 대신 건후 씨 한번 만나 뵙고 오세요. 건후 씨가 먼저 이혼을 언급한 것처럼 이혼협의서를 작성하라고 하세요. 재산 분할은 어떻게 하든 상관없으니 이번 일을 소리 없이 진행하고 그 사람 명예에 절대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장수현은 행동파답게 다음날 바로 배건후에게 소식을 전했다.모건 그룹은 오전 내내 먹구름이 가득하고 임원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비서실은 심지어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할 지경이었다.우정윤이 커피를 들고 들어오다가 담배 연기로 꽉 찬 대표이사 사무실에 하마터면 화재 신고를 할 뻔했다. 입사해서부터 지금까지 그는 대표님
지금 그가 먼저 도아린에게 짐을 싸달라고 부탁하고 있고 말투도 최근 들어 가장 누그러진 편이다. 이에 도아린은 문득 마음이 씁쓸해졌다.그녀가 아무 말 없자 배건후도 말을 잇지 않았고 두 사람은 휴대폰을 든 채로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요즘 SNS에 돌고 있는 밈이 하나 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만약 당신 남편이 달마다 용돈을 2천만 원씩 주는 대신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수 있나요?]이에 ‘좋아요’가 가장 많이 달린 댓글은 [1초라도 망설이면 그건 돈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였다.이 논리대로라면 배건후보다 더 완벽한 후보는 없다. 달마다 도아린에게 한도 제한 없는 카드를 줄 뿐만 아니라 고급 저택에 좋은 차, 게다가 도우미들까지 고용해서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으니까.어디 그뿐인가,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뭣 하나 빼놓을 게 없는 완벽한 남편감이었다. 두 사람의 신분 차이가 현저하지만 배건후는 도씨 일가에서 원하는 자원은 최대한 만족시켜주고 있다.돈도 몇 푼 못 벌면서 시답잖은 일만 벌이고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과 비하면 배건후는 너무 괜찮은 편이다.도유준은 그가 일편단심이라고 했는데 손보미에게 줄곧 일편단심인 건 사실이다. 그의 베프 성대호는 만났던 여자친구가 산을 이룰 지경이니까.어쩌면 도아린이 좀 더 ‘너그러워’진다면 이 결혼생활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 듯싶다.그녀가 이제 막 한 걸음 물러나려고 하는데 전화기 너머로 대뜸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건후 씨, 나 다 씻었어.”순간 도아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미친!’‘방금 나 스스로한테 가스라이팅한 거야?!’왜 굳이 흠집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완벽한 사람을 찾으려고 고집한 걸까?연성에 널리고 널린 게 훌륭한 남자들인데 말이다.“약속 꼭 지켜요.”말을 마친 도아린이 전화를 끊었다.그 시각 빨간색 람보르기니가 맞은 편에서 질주해 오더니 모건 그룹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도아린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배건후는 슬슬 짜증이 몰려왔고 짙은 얼굴에 싸늘한
배건후를 위해 짐 정리를 하면 그가 한약을 어머님께 드릴 것이다. 이건 매우 공평하고 합리한 딜이다.도아린은 밤새 운전하여 에이트 맨션으로 돌아왔다. 이제 막 단지 입구에 들어서려는데 배씨 저택에서 전화가 걸려왔다.다만 그녀가 길옆에 차를 세우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이에 도아린은 잘못 건 줄 알고 계속 운전하여 맨션으로 돌아갔다.배건후가 출장 갈 때마다 그녀는 안팎으로 옷을 3세트씩 준비한다.짙은 색 외투에 연한 색 셔츠, 깔 맞춤한 넥타이와 브로치, 시계 그리고 커프스까지...도아린은 배건후의 더 매력적인 모습을 사람들 앞에 보여주려고 한다. 어떤 단추가 그의 신분에 더 잘 어울리는지 연구하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주객전도를 금지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많은 자료를 수집해 보곤 한다.오늘 그녀는 이전의 열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마치 AI처럼 딱딱하게 다 고른 3세트의 옷을 캐리어에 넣었다.하지만 루비 목걸이를 금고에 넣을 때 액세서리가 몇 개 없어진 걸 발견했다. 이제 막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는데 휴대폰이 또다시 울려댔다.이번에도 배씨 저택에서 걸려온 전화였다.“작은 사모님, 잠시 이리로 오실 수 있나요?”가정부 유민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이며 말했다.“큰 사모님께서 저녁 식사 후 산책하러 나가시려다가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워 가정의도 불러왔는데 병원에 가서 검사받아보시라고 하네요...”“알았으니까 일단 진정하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도아린은 황급히 저택으로 향했다.주현정은 꾸준히 한약을 먹고 있지만 자꾸 병이 난다. 이 집에서 제일 한가한 도아린이기에 가정부 유민정은 크고 작은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그녀에게 먼저 연락한다.유민정이 대문 앞에서 도아린을 마중하며 두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그날 도련님이랑 함께 새벽에 집을 나가신 이후로 사모님께서 밤새 잠을 설쳤어요. 그러더니 다음 날 바로 적신호가 와서 입원해야 하는데 사모님께서 기어코 고질병이라면서 집에 돌아가겠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결국
“건후 전화니?”주현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데이트하기로 했어? 나 혼자 할게. 얼른 나가봐...”“괜찮아요. 좀 기다리라고 하죠 뭐.”도아린은 주현정의 얼굴을 깨끗이 닦아드린 후에야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자마자 우렁찬 욕설이 그녀의 귀청을 째지게 했다.“도아린, 너 미쳤어?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왔네 이거 아주!”도아린은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대체 그가 뭣 때문에 이렇게 화내는 건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그녀는 주현정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문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왜 이래요? 건후 씨야말로 미쳤어요?”“짐 정리를 했다는 게 고작 이거야?”배건후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되물었다.“대충 흘려 넘기게?”오늘 아침 배건후가 캐리어를 챙기러 갔는데 안에 글쎄 목 어깨마사지기도 없고 온열 수면안대도 없는 것이다... 물론 그도 아예 이런 물건들을 쓰진 않지만 도아린이 챙겨 넣지 않은 건 엄연한 태도 문제였다.그를 더 화나게 만든 건 도아린이 맞춰준 3세트의 옷 모두 똑같은 스타일에 넥타이 색깔마저 똑같았다.“와서 다시 싸!”배건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지금 못 가요. 보살펴야 할...”“동생이 또 위급한 거야?”배건후가 야유 조로 물었다.“어제 나더러 약 사달라고 애원한 사람이 누구더라? 고작 하룻밤 만에 변한 거야? 왜? 이젠 내가 대신 도정국 씨 상대 안 해줘도 되는 거야? 아니면 뭐 아예 이혼할 생각을 접었어?”도아린은 이미 이혼 준비를 다 마쳤지만 그의 거만하고 야유 섞인 말을 듣고 있자니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그녀는 곧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았다.“미안한데 이번에 핑계로 쓰일 사람은 내 동생이 아니라 건후 씨 어머님이에요. 어젯밤에 갑자기 기절하셨는데 다행히 지금 위험에서 벗어나셨어요.”“...”배건후가 문득 침묵했다.“대표님은 공사다망하시다 보니 가족을 챙길 시간이 없으시네요.”도아린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다음번에 돌발상황이 발생할 땐
“엄마가 너한테 못 해준 게 뭔데? 어떻게 엄마가 이토록 위급할 때 이혼을 언급할 수 있어? 도아린, 제발 인간답게 살면 안 돼?”대체 누가 누구더러 인간답게 살라고 하는 것인지...이혼을 질질 끌면서 내연녀랑 뜨겁게 사랑을 나눌 땐 언제고...도아린은 이젠 그에게 철저하게 실망한지라 말투도 차갑고 강압적으로 변했다.“건후 씨 약점 잡고 있어야 하루빨리 목적에 달성하죠.”배건후는 그녀의 기세등등한 태도에 화가 나 이마에 실핏줄까지 튀어 올랐다. 그녀가 딴 사람에게 장뇌삼을 선물한 건 단지 배건후를 화나게 하고 그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전혀 아니었다.도아린은 하루빨리 그와 이혼하지 못해 안달이다.“도아린, 나 같은 말 반복하는 거 딱 질색인데 이번 한 번만 얘기할게. 이혼하든 말든 내가 알아서 정해. 그 인간들이 한 말 다 믿지는 마. 우리가 부부인 걸 알면 네가 들러붙어도 오히려 멀리 피해 다닐 거야.”도아린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그의 말에 화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나중에 어떻게 지낼지는 내가 알아서 해요. 건후 씨는 사인만 하면 돼요.”배건후의 눈빛이 점점 더 음침해졌다. 그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너랑 장난칠 시간 없어.”그가 확고하게 거절하지 않자 도아린이 말을 이었다.“그럼 출장 다녀와서 다시 얘기해요.”‘어차피 이혼은 정해진 일이니 요즘은 일단 어머님 보살펴드려야지.’그녀가 한창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배건후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꽉 잡고 아무도 없는 비상구로 걸어갔다.이어서 예고도 없이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순간 짙은 담배 향이 입안을 파고들었다. 배건후의 키스는 늘 이토록 터프하고 일방적인 법이다.도아린은 미처 대응할 겨를이 없었다.3년 내내 그는 도아린을 터치한 적도 없을뿐더러 키스한 적은 더더욱 드물다.가끔 몇 번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을 때가 있지만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본 후엔 바로 멈췄었다.하지만 이번엔...도
“아린아, 나 찾았어? 의사랑 지유 상태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거든... 무슨 일이야?”신지훈은 유리 너머로 도아린을 바라보고 있었고 바로 떠나지 않았다.도아린은 코를 긁는 손짓으로 입을 가리며 조용히 물었다.“어머님, 건후 씨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갔어요?”“난 안 갔어...”주현정은 후회와 죄책감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와서 최선을 다했다고 했을 때 주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 배건후의 장례식은 이미 끝나 있었다.우정윤은 배건후가 누명을 썼다는 것과 회사에 내통자가 있다는 사실을 주현정에게 모두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배건후의 사망 소식을 일단 숨기고 회사를 안정시킨 후에 발표하자고 조언했다.주현정은 아들의 마지막을 보내주고 싶었지만 그의 얼굴은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수술로 다소 복구되었지만 사망 후에는 변형이 심해져서 보기만 해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그래서 대부분 우정윤이 나서서 처리했다.“그 말은...”도아린은 깊은숨을 쉬며 점점 더 창백해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말인즉 주현정도 배건후의 시체가 온전한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우 실장님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거야.’도아린이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현정이 물었다.“아린아, 하고 싶은 말이 뭔데?”그녀는 조금이라도 진정하려고 다리를 움켜잡으며 말투를 조절했다.“제가 확인한 후에 말씀드릴게요.”“아린아,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스스로 잘 챙겨야 해...”“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자마자 눈물이 도아린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더 이상 전화를 끊지 않으면 더 이상 감정을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신지훈은 차기 차 쪽으로 돌아가며 계속해서 돌아보았다.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바라보며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쇼핑백을 안쪽으로 던졌다.차를 몰고 돌아가려 할 때, 갑자기 누가 그를 부른 것만 같이 발걸음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신지훈은 잠시 얼굴을 찡그리며 차 안을 둘러
하지만 서대은은 계획한 것대로 말하지 않았다. 청룡과 주작이 반대했기 때문에 현무와 백호의 의견이 일치하더라도 상황을 바꾸기는 어려웠다.그래서 강재민은 그냥 순순히 동의하는 척하면서 더 기다려보자는 선택을 했다.서대은 때문에 그들의 계획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서대은은 발밑에 있는 유리컵을 한번 훑어보며 차분하게 말했다.“육청아 씨, 저랑 정면으로 싸울 생각이세요?”육청아는 손에 위스키 한 잔을 들고 의자에서 내려왔다.잔을 흔들릴 때마다 얼음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아린 씨가 대은 씨를 믿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쪽 아버지 병이 갑자기 나았다는 걸 아린 씨가 알면 어떻게 될 거 같으세요?”서대은은 시선을 내리며 타오르는 분노를 감추었다.“제 아버지의 몸으로 협박할 생각 마세요!”육청아는 혀를 차며 서대은의 모습을 비웃었다.“대은 씨 아버지가 받은 장기가 누구 것인지 알아요? 그쪽은 모르겠지만 제가 살짝 입을 열기만 해도 아린 씨는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뭐라는 거죠?”서대은은 경계심을 드러내며 물었다.그는 넥타이를 잡아당기고는 펜던트를 티셔츠 안에 숨겼다.서대은은 도청 장치를 끈 것이었다. 도아린은 이어폰을 뺐다.‘대은이 아버지가 퇴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장기 이식을 받았기 때문이었어? 청아 씨말에 따르면 나랑 연관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고 손끝이 바들바들 떨려왔다.‘그럴 리 없어!’그녀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려 했지만 손끝이 너무 떨려서 그만 놓쳐버렸고 휴드폰은 미끄러져서 틈새로 떨어졌다.도아린이 몸을 숙여 휴대폰을 주울 때, 누군가가 전화를 받으면서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정말 세상이 넓어서 그런지 별 사람이 있더라고... 상황만 괜찮다면 내가 본때를 보여줄 텐데!”“신 대표님!”도아린의 목소리에 신지훈이 뒤를 돌아보았다.해남시 쇼핑몰 지하 주차장에서 도아린을 만날 줄 몰랐는지 그는 잠시 멈칫하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도아린 대표를 만났어. 다음
꽃 모양으로 된 테이블에 네 개 조직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는 ‘라윤주’의 자리였다.도아린은 서대은의 오른쪽에 앉았고 옆에는 현무 조직의 강재민과 육청아가 있었다.육청아는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가끔 그녀를 힐끗히 쳐다봤다. 마스크를 통해서도 그녀의 질투와 혐오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마주 앉은 청룡과 ‘라윤주’는 오랜 친구였다. 온라인에서의 대화를 나눌 때는 익숙한 패턴이었지만 만나게 되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아현’이라는 이름으로 비밀조직 LY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네 명의 최고 책임자들을 만났었다. 그때 청룡은 지금과 다른 느낌이었지만 말이다.청룡은 그녀에게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는 듯했다.“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상태인데 이제 새로운 책임자를 뽑아야 되지 않나요?”백호가 청룡을 보며 말했다.“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청룡은 도아린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제안하고 싶어요.”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유럽식 더블브레스트 코트를 입고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그는 여전한 옷차림에 여전한 목소리였지만 도아린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3년을 기다렸어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죠?”백호는 주작을 보며 말했다.“그쪽 의견은 어때요?”주작은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부드럽게 말했다.“다들 알거라 생각하지만 저는 당연히 ‘라윤주’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해요.”서대은의 대답은 이전에 육청아와 약속했던 것과 달랐다. 그녀가 살짝 움직이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강재민이 책상 아래서 그녀의 발을 차며 입을 다물게 했다.육청아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노려보았다.백호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손가락을 책상 위에서 튕기며 강재민을 바라봤다.“현무 쪽 의견은 어때요?”강재민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바꾸는 건 명분도 없고 순서도 맞지 않으니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
그녀는 갑자기 육하경이 차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면 집에도 분명히 설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도아린은 급히 일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빌라 안에 핀홀카메라랑 도청 장치가 있는지 확인하라고 말이다.그녀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강재민이 문을 두드렸다.“아린 씨, 쉬고 있어요?”“아직이요.”도아린은 문을 열며 잠옷을 들고 있는 손을 보여주었다. 마치 갈아입으려는 모습이었다.“무슨 일이죠?”“육하경 그 자식이 방에 핀홀카메라를 설치했어요.”강재민은 손에 뜯어낸 장비를 들고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제가 방을 확인해 볼게요!”도아린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뭐라고요?”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그를 방 안으로 들였다.강재민은 핸드폰에 설치되어 있는 앱으로 벽을 점검하고 콘센트도 살펴봤다. 마지막으로 화장실과 드레스룸도 꼼꼼히 점검했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문 앞에 서며 말했다.“아린 씨 방에는 없어요.”도아린은 살짝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처음 하경 씨를 만났을 때, 하경 씨는 도둑 잡는 걸 도와주고 있었는데 제가 하경 씨를 도둑으로 오해했었어요. 하경 씨는 좋은 일도 많이 했거든요. 그러니까 결론은 하경 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그럼 아린 씨는 제가 자작극을 하고 있다는 건가요?”강재민은 자신이 육하경에게 속았다고 느꼈다. 일부러 핀홀카메라를 발견하게 내버려두고 도아린에게 고자질하도록 유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도아린에게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그런 뜻은 아니에요. 그냥 재민 씨가 오해한 걸 수도 있다는 거죠.”“저는 오늘 하루 종일 아린 씨와 함께 있었어요. 이런 걸 할 시간이 없었다고요!”강재민의 손에 들린 장비가 증거였다.도아린은 그것을 한 번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그냥 하경 씨가 한 거라고 칩시다. 별일 없으면 저는 샤워하러 가야겠어요.”‘그냥이라니 무슨 뜻이지? 그래도 여전히 내가 의심스러운 건가? 분명히 육하경 그
“미안해요. 주 대표님과 약속을 했어서 말할 수 없어요.”강재민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알겠다고 했다. 그녀의 대답을 받아들인 듯했다.도아린이 휴대폰을 꺼내서 일북에게 연락했다.“일 끝나면 도씨 가문 옛날 본가로 와. 내가 도착하면 위치 보내줄게. 택시 타고 와.”“알겠습니다!”일북은 간단하고 명확하게 대답했다.전화를 끊은 도아린은 육하경에게 다시 연락했다.“옛날 집 말이에요. 열쇠 바꿨어요?”“도어락으로 바꿨고요. 비밀번호는 아린 씨 생일로 했어요.”육하경은 부드럽게 말했다.“간단하게 리모델링했는데 혹시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있으면 제가 다시 손볼게요!”“괜찮아요. 제가 필요한 건 재민 씨가 해결해 줄 거예요.”그녀는 일부러 육하경 앞에서 강재민을 언급하고 강재민 앞에서 육하경을 칭찬했다.“하경 씨 너무 친절하시네요. 이건 단순히 리모델링이 아니라 완전 새로 꾸민 거잖아요! 가구도 다 바뀌었고... 모두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이전에 도정국이 살던 침실은 도하린의 방으로 리모델링되었고 옆 객실은 벽을 허물어 한쪽은 옷장, 나머지 한쪽은 작업실로 만들었다.옷장 안에는 일상적인 옷, 액세서리, 신발, 가방이 준비되어 있었고 작업실에는 그녀가 필요한 테이블, 모델, 다리미, 다양한 실크들이 벽에 정리되어 있었다.“하경 씨가 세인트존스 호텔만 관리한다는 게 시간이 너무 아깝네요...”도아린은 둘러보며 감탄했다.“하경 씨를 모건 그룹으로 데려오는 건 어때요?”“육씨 가문 사람이에요.”강재민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 뒤를 따랐다.도아린은 뒤를 돌아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육민재 씨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같은데요?”강재민의 눈빛이 위험하게 좁아지며 불만스럽게 말했다.“육씨 가문 사람들은 너무 야망이 커요. 하경 씨를 모건 그룹에 보내면 회사가 육씨가문한테 먹혀버리지 않겠어요?”“야망이 큰 건 육청아죠.”도아린은 차갑게 웃으며 강재민의 표정이 변하는 걸 봤다. 원래 독하던 눈빛에서 살기 서린 눈빛으
도아린이 말을 마치자 강재민은 금세 기뻐하며 억누를 수 없이 즐거운 표정을 드러냈다.반면 맞은편에 있던 신지훈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주먹을 쥐고 손가락 마디를 소리 나게 꺾으며 한층 차가워진 목소리로 직원에게 말했다.“들으셨잖아요? 빨리 처리해 주세요.”그의 차가운 포스에 겁을 먹은 직원은 알겠다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집으로 가려던 길에 강재민은 한술 더 떠서 말했다.“아린 씨, 저 호텔에서 자기 싫어요. 집에 가서 지낼 생각이면 저도 같이 가고 싶은데... 겸사겸사 아린 씨가 어릴 때 어떻게 살았는지도 보고 싶고요.”“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요?”“경호원분도 집에서 자잖아요. 저도 절대 규칙 어기지 않을게요.”“도 대표님.”신지훈이 뒤에서 따라오며, 다소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비록 이혼했다고 해도 배 대표님은 본인 명의의 지분과 자산을 전부 도 대표님에게 넘긴 사람이에요. 감정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배 대표님이 병에 걸린 와중에 배 대표님이 준 돈으로 다른 남자를 먹여 살리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그 말에 도아린은 소리 내어 웃었다.그녀는 신지훈을 조롱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신 대표님, 그 말은 틀린 것 같네요. 건후 씨가 지분과 자산을 저한테 준 건 자발적인 결정이에요. 제게 준 이상 제가 어떻게 쓰든 제 권리고요. 게다가 사고 나기 전부터 건후 씨는 제가 재민 씨와 사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도 전부 제게 줬다는 건 제가 재민 씨와 잘 지내지 못할까 봐 걱정됐던 거겠죠. 이렇게까지 저를 아껴주는데 저도 건후 씨가 편히 요양할 수 있도록 재민 씨와 행복하게 살아야죠!”도아린에게 반박당하자 신지훈은 가슴이 답답해졌다.그는 턱을 꽉 깨물고 강재민을 조롱하는 시선으로 바라봤다.“보아하니 강재민 씨는 남의 돈으로 사는 게 익숙한 사람이군요. 실례했습니다!”강재민은 원래 반박하려 했지만 신지훈의 기색이 심상치 않아 보이자 오히려 능청스럽게 말했다.“제 외모가 아린 씨 이상형이라서
“집을 남겨둔 게 맞는 선택이었네요!”도아린이 반응하기도 전에 육하경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자기 집에서 사는 게 호텔보다 편하고 안전하잖아요.”순간, 도아린은 제자리에 굳어버렸다.‘애초에 이런 날이 올 걸 예상하고 있어서 집과 차를 남겨뒀다는 건가? 오늘 있었던 모든 일까지 다 계획한 것이었을까?’에스컬레이터에 손을 올려둔 도아린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고 심장도 조여드는 느낌이었다.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육하경에게 말했다.“그것도 맞네요. 그러니까 제 차도 돌려줘요. 괜히 새로 사면 해남으로 돌아갈 때 다시 팔아야 되잖아요..”고개를 돌려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걸 본 강재민의 눈빛에는 질투가 가득했다.마침 에스컬레이터를 다 내려왔고 그는 다시 도아린을 품 안에 가뒀다.“육하경 씨, 그럼 우린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육하경은 도아린을 향해 옅게 미소 지으며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주말에 차량 정비 예약해 놨어요. 그때 다시 연락해요.”“그래요.”도아린이 차 키를 받아들였다.강재민은 뭐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도아린이 자신의 손을 살짝 쥐는 걸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육하경의 모습이 쇼핑몰 안으로 사라지자 강재민은 불만스럽게 말했다.“제가 차 사줄게요. 해남으로 돌아갈 때면 사람을 시켜서 가져가게 하면 돼요.”“괜찮아요.”“괜찮긴 뭐가 괜찮아요.”강재민이 단호하게 말했다.“내 여자는 남이 베푸는 거 받을 필요 없거든요.”그 말을 들은 도아린은 그저 코를 문지를 뿐, 별다른 해명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강재민에게 이끌려 옷 몇 벌을 사고 나왔다.“이 차를 회사로 몰고 가세요. 전 아린 씨를 데리고 드라이브하다가 올게요.”강재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북에게 차를 가져가라는 신호를 줬다.일북은 도아린을 바라보며 그녀가 거절하기를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그녀는 차 키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차는 전에 육하경 씨가 타던 거야.
“저기 있는 공룡 캐릭터가 가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도아린이 농구대와 가장 가까운 인형뽑기 기계를 바라보았다.“한번 해보죠.”두 사람은 각각 게임 코인을 바꿨다.도아린은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면서 누가 자신을 시험하는 건지 판단하려 했다.강재민이 연성까지 찾아온 것, 그리고 육하경과의 예상치 못한 만남...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우연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만약 강재민이 그저 배건후를 없애려 했다면 이렇게까지 큰 판을 짤 필요가 없었다. 3년을 기다려 배건후의 집안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 필요도 없었다.육하경은 그녀의 USB를 몰래 본 적이 있었으니 분명 배건후의 적이었지만 배건후의 죽음이 그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알 수 없었다.‘반대로 생각해 보면 배건후가 살아 있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지?’‘재민 씨는 내가 건후 씨랑 다시 이어지는 걸 두려워했으니 당연히 원하지 않겠지. 그러면 하경 씨는? 목적을 알 수 없어서 더 무서워.’도아린은 육하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모든 신경이 인형 뽑기 기계에 쏠려 있는 것 같았다. 간신히 인형을 집었지만 떨어뜨리고 말았다.“하...”육하경이 한숨을 쉬며 다시 게임 코인을 넣었다.“나이스!”그 소리에 도아린은 정신을 차렸다. 강재민을 보자 그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이었다.그는 빨리 칭찬해달라는 듯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정말 대단해요!”도아린은 강재민 옆으로 가서 그가 들고 있던 농구공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골대에 들어가지 않았다.“이렇게 던져야 해요. 손목에 힘을 주고요.”강재민이 도아린의 뒤에 서서 그녀의 두 손을 꼭 감싸 쥐고 그녀를 품 안에 가뒀다.“그대로 던져요!”도아린은 그의 말대로 손끝의 힘을 모아 공을 던졌다. 공은 링을 맞고 한 바퀴 돌더니 결국 골대를 통과했다.“들어갔어요! 제가 넣었다고요!”도아린은 흥분해서 소리쳤다.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순간적으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육하경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했다.그의
“괜찮으세요?”그 남자의 목소리는 배건후와 똑같았지만 생김새는 전혀 닮지 않았다.도아린의 목소리에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것이었다.“괜찮아요! 미안해요. 슛 던지는데 제가 방해했네요.”도아린이 쑥스럽게 웃으며 사람들 속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아린 씨!”육하경이 그녀를 찾아왔다.그녀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챈 그는 주변을 둘러본 뒤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혼자 나왔어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어요?”“아뇨.”도아린은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너무 오래 걸리길래 그냥 나와봤어요.”육하경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미안해요. 괜히 다툴 게 아니라 그냥 재민 씨가 고른 보호대로 샀을 걸 그랬네요.”“아린 씨!”강재민도 그녀를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엉덩이 보호대를 들고 있었다.“괜찮아요?”“괜찮아요. 얼른 스케이트 타러 가요.”도아린은 보호대를 받아 허리에 찼다.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하자 두 남자는 또다시 경쟁을 벌였다.누가 도아린을 가르칠지 다투면서 각자의 실력을 뽐내기 위해 한 명은 앞으로 돌고, 다른 한 명은 뒤로 돌면서 묘기를 펼쳤다.하지만 도아린은 방금 있었던 일을 곱씹느라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그날 밤 양식장에서 만난 남자, 그리고 방금 만난 남자, 두 사람 모두 체형이 배건후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단순히 체형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목소리도 같았다. 게다가 농구를 하는 모습까지 똑같았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말이 안 될 정도였다.‘건후 씨가 정말 죽었다면 왜 계속해서 날 시험하는 걸까?’다른 사람들은 다들 그녀가 주현정과 함께 병문안을 가서 배건후를 확인한 줄로 알았다.그 병실에 있는 사람이 정말 배건후였다면 도아린이 그를 닮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그렇다면 그들은 그녀의 반응을 통해 배건후가 정말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도아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방금 그녀의 반응으로 인해 상대는 이미 배건후가 병원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