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은 밤새 푹 자고 이튿날 맑은 정신으로 나형욱을 만나러 갔다.소유정이 가는 녹음실이 그녀의 목적지와 한 건물이라 두 사람은 도착한 후 A 구역과 D 구역으로 흩어졌다.“안녕하세요. 실례지만 엘리베이터 눌러주실래요? 7층 가려고요.”“네...”프런트 직원은 절반 정도 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신작 오디션은 D 구역입니다.”요 며칠 손보미가 맡았던 역할의 오디션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이쪽으로 잘못 찾아오는 사람이 꽤 있었다.프런트 직원은 도아린을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오늘 이분은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괜찮은 것 같아. 분위기도 좋고 메이크업을 살짝만 해도 성형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겠어.’도아린이 덤덤하게 웃어 보였다.“전 LH 스튜디오로 가려고요.”프런트 직원은 그녀를 엘리베이터에 태운 후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보면서 어리둥절해 했다.‘LH 스튜디오는 옷을 수선하는 곳인데... 대부분 몸가짐에 신경을 쓰지 않는 중년이 많고. 근데 방금 그 여자는 젊고 또 예뻐. 그렇다면 무조건...’“천장에 뭐가 있어요?”한 잘생긴 남자가 그녀 뒤에서 웃으면서 농담을 건넸다.“샹들리에에 붙어있는 크리스털을 떼려고요?”빌딩의 대표 성대호가 밖에서 들어왔다. 성대호는 유머러스하고 시원시원한 사람이라 직원들이 많이 따랐다.“대표님이 샹들리에를 스와로브스키로 바꾸면 그때 뗄게요.”“잊지 않게 노트에 적어야겠어요...”성대호는 농담으로 어린 여자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뒤에서 구두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바로 대표의 카리스마를 뽐냈다.“나형욱 씨한테 전화해서 귀한 손님이 온다고 알려줘요.”“나형욱 씨 귀한 손님은 이미 올라갔어요.”“올라갔다고요?”성대호가 화들짝 놀랐다.“어떻게 생겼어요?”“엄청 예쁘고 분위기 있고 또 교양도 있는 여자였어요.”성대호의 두 눈에 교활함이 스쳤다. 돌아선 순간 배건후의 싸늘한 얼굴을 보고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으며 휴대전화를 꺼냈다.“내가 말할게요.”전화가 단번에 연
상대를 자극하는 말을 누가 할 줄 모르겠는가.“당신은 알 자격이 없어요.”도아린이 목을 빳빳이 쳐들고 말했다. 배건후는 서로 싸웠다간 상황이 더 안 좋아질 거란 생각에 두 주먹을 꽉 쥐었다.“어머니가 네 동생 상태가 어떠냐고 물었어. 돌아가서 말씀드리게 아무 이유나 준비해.”“그럴 필요 없어요.”도아린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모든 절차가 끝나면 자세하게 말씀드릴 거예요. 3년이나 꾹 참았으니 아무도 날 도덕적 잣대로 뭐라 할 수 없어요.”“참았다고?”배건후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대놓고 비웃었다.“좋은 것만 먹고 입었으면서 뭐가 억울하다고 그래? 쩍하면 삐지고 가출하고. 어머니는 지유보다 너한테 더 잘해줘. 그런데도 만족 못 해? 대체 어떻게 해야 만족할 건데? 빌딩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도울 디저트에 주면 그만할 거야?”“...”도아린의 심장이 칼로 쿡쿡 찌르듯 아팠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고통과 절망을 감추기 위해 시선을 늘어뜨렸다. 배건후의 눈빛도 어두워졌고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을 빤히 내려다보았다.잠시 후, 도아린은 귀에 한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천천히 뺐다.“건후 씨, 블랙 카드 돌려줬고 이 귀걸이도 돌려줄게요. 집에 있는 주얼리 하나도 안 가져갔으니까 처리하고 싶은 대로 처리해요. 그리고 바쁘겠지만 시간 내서 이혼 절차 진행해요, 우리. 그럼 난 앞으로 참을 일도 없고 당신도 나한테 쓰기 싫은 돈 쓸 필요 없어요.”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귀걸이를 건넨 후 재빨리 자리를 비웠다.D 구역에서 나온 소유정이 그녀에게 손짓하며 길가 쪽으로 오라고 했다. 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배건후를 돌아보았다.“건후 씨한테 아예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어.”배건후가 주먹을 쥐었다.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고 말았다.“도아린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야? 너랑 이혼하겠다고?”성대호가 또 옆으로 다가왔다.“너랑 상관없는 일이야.”배건후는 씩씩거리면서 차에 올라타더니 성대호의 처리 결과도 듣지 않고 휙 가버렸다.
“언제 수속하러 갈 건데요?”도아린은 문 앞까지 쫓아오다가 하얀빛이 번쩍이자 얼굴을 슬쩍 피했다.그녀가 품에 있는 쇼핑백을 자세히 들여다볼 때 배건후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계단 아래에서 들려왔다.“기분 봐서.”한편 조수현 기사가 차 문을 열고 배건후를 안으로 모시며 나지막이 말했다.“요즘 카풀앱으로 봉변당하는 여성분들이 꽤 많다고 하더라고요.”배건후는 3층 룸을 힐긋 보더니 허리 숙여 차에 올라탔다.“쟤는 사고당해도 싸.”도아린이 쇼핑백을 들고 나왔을 때 마이바흐는 어느덧 떠나가고 없었다. 배건후도 참, 그녀가 분명 싫다고 했는데 기어코 목걸이를 건넬 줄이야.그녀는 비록 갖기 싫었으나 개자식이 준 물건을 길바닥에 내다 버릴 순 없었다.도아린이 길옆에서 차를 기다릴 때 검은색 폭스바겐이 불쑥 앞에 세워졌다.“안녕하세요 사모님, 마침 근처에 있었는데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우정윤이 차에서 내려오며 말했다.마침이라고? 이런 우연을 누가 믿을까?다만 찜통더위에 땀으로 흠뻑 젖었던지라 도아린은 일단 차에 올라탔다.집에 도착한 후 소유정이 그 루비 목걸이를 보더니 3초 동안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 폭소를 터트렸다.“하하하...”그녀는 소파에서 굴러떨어진 채 도아린의 다리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이게 바로 배건후 그 개자식 취향이야? 하하... 역시... 하하하...”“웃다 숨넘어갈라.”도아린이 상자를 닫으며 말했다.소유정은 어느새 웃다가 눈물이 흘러내릴 지경이었다.“그건 그렇고 수백억대 목걸이라 꽤 소장 가치가 있어 보여. 이건 진심!”그녀는 목걸이를 꺼내 도아린에게 대보았다.“그래도 한번 착용은 해주라. 사진 찍어서 나중에 너 실컷 놀리게.”“찍고 싶으면 혼자 알아서 찍던가. 대신 찍을 바엔 여러 각도로 찍어. 모델용으로 쓰게.”“왜? SNS에 올리게?”소유정이 하찮은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도아린은 매번 배건후에게 선물을 받을 때마다 SNS에 지정된 몇 명을 맨션 해서 피드를 올리곤 한다.절친으로서
손보미의 스캔들이 세간을 발칵 뒤집어놓았고 그녀가 딱히 부인하지 않는 건 인정과도 다름없었다.도유준이 성급하게 돈을 요구하는 건 아마도 도아린이 차이면 이용가치가 없어질까 봐 걱정한 듯싶다.엠파이어 빌딩에는 각 분야의 엘리트들이 모였고 물론 훌륭한 변호사도 있었다. 도아린은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에 알고 지내던 변호사 한 분을 찾아가 취지를 설명했다.“재산을 절반씩 나누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장수현 변호사는 배건후의 변호사와 법정에 설 생각을 하니 식은땀이 저절로 났다.“제가 한발 물러서면요?”도아린은 애초에 돈을 가질 생각이 없었고 단순히 그를 엿 먹이고 싶었을 뿐이다.장수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중요한 건 배건후 대표님도 이혼 의사가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입니다. 만약 대표님이 이혼에 동의하지 않으면 아주 긴 법정 싸움이 될 거예요. 아린 씨가 상대방이 잘못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하는 한 법정에서는 화해를 도모할 거예요.”도아린은 가방끈을 꽉 잡았다. 배건후가 손보미를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어찌 그녀에게 명분을 주고 싶지 않을까.도아린과 배건후는 비밀 결혼이라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르는데 법정 싸움으로 번진다면 손보미는 고스란히 치욕을 당해야 할 것이다.그러니까 배건후가 이혼을 거부하는 거겠지.“그럼 이렇게 해요.”도아린이 큰 결심을 내린 듯싶었다.“내일 저 대신 건후 씨 한번 만나 뵙고 오세요. 건후 씨가 먼저 이혼을 언급한 것처럼 이혼협의서를 작성하라고 하세요. 재산 분할은 어떻게 하든 상관없으니 이번 일을 소리 없이 진행하고 그 사람 명예에 절대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장수현은 행동파답게 다음날 바로 배건후에게 소식을 전했다.모건 그룹은 오전 내내 먹구름이 가득하고 임원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비서실은 심지어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할 지경이었다.우정윤이 커피를 들고 들어오다가 담배 연기로 꽉 찬 대표이사 사무실에 하마터면 화재 신고를 할 뻔했다. 입사해서부터 지금까지 그는 대표님
지금 그가 먼저 도아린에게 짐을 싸달라고 부탁하고 있고 말투도 최근 들어 가장 누그러진 편이다. 이에 도아린은 문득 마음이 씁쓸해졌다.그녀가 아무 말 없자 배건후도 말을 잇지 않았고 두 사람은 휴대폰을 든 채로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요즘 SNS에 돌고 있는 밈이 하나 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만약 당신 남편이 달마다 용돈을 2천만 원씩 주는 대신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수 있나요?]이에 ‘좋아요’가 가장 많이 달린 댓글은 [1초라도 망설이면 그건 돈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였다.이 논리대로라면 배건후보다 더 완벽한 후보는 없다. 달마다 도아린에게 한도 제한 없는 카드를 줄 뿐만 아니라 고급 저택에 좋은 차, 게다가 도우미들까지 고용해서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으니까.어디 그뿐인가,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뭣 하나 빼놓을 게 없는 완벽한 남편감이었다. 두 사람의 신분 차이가 현저하지만 배건후는 도씨 일가에서 원하는 자원은 최대한 만족시켜주고 있다.돈도 몇 푼 못 벌면서 시답잖은 일만 벌이고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과 비하면 배건후는 너무 괜찮은 편이다.도유준은 그가 일편단심이라고 했는데 손보미에게 줄곧 일편단심인 건 사실이다. 그의 베프 성대호는 만났던 여자친구가 산을 이룰 지경이니까.어쩌면 도아린이 좀 더 ‘너그러워’진다면 이 결혼생활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 듯싶다.그녀가 이제 막 한 걸음 물러나려고 하는데 전화기 너머로 대뜸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건후 씨, 나 다 씻었어.”순간 도아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미친!’‘방금 나 스스로한테 가스라이팅한 거야?!’왜 굳이 흠집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완벽한 사람을 찾으려고 고집한 걸까?연성에 널리고 널린 게 훌륭한 남자들인데 말이다.“약속 꼭 지켜요.”말을 마친 도아린이 전화를 끊었다.그 시각 빨간색 람보르기니가 맞은 편에서 질주해 오더니 모건 그룹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도아린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배건후는 슬슬 짜증이 몰려왔고 짙은 얼굴에 싸늘한
배건후를 위해 짐 정리를 하면 그가 한약을 어머님께 드릴 것이다. 이건 매우 공평하고 합리한 딜이다.도아린은 밤새 운전하여 에이트 맨션으로 돌아왔다. 이제 막 단지 입구에 들어서려는데 배씨 저택에서 전화가 걸려왔다.다만 그녀가 길옆에 차를 세우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이에 도아린은 잘못 건 줄 알고 계속 운전하여 맨션으로 돌아갔다.배건후가 출장 갈 때마다 그녀는 안팎으로 옷을 3세트씩 준비한다.짙은 색 외투에 연한 색 셔츠, 깔 맞춤한 넥타이와 브로치, 시계 그리고 커프스까지...도아린은 배건후의 더 매력적인 모습을 사람들 앞에 보여주려고 한다. 어떤 단추가 그의 신분에 더 잘 어울리는지 연구하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주객전도를 금지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많은 자료를 수집해 보곤 한다.오늘 그녀는 이전의 열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마치 AI처럼 딱딱하게 다 고른 3세트의 옷을 캐리어에 넣었다.하지만 루비 목걸이를 금고에 넣을 때 액세서리가 몇 개 없어진 걸 발견했다. 이제 막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는데 휴대폰이 또다시 울려댔다.이번에도 배씨 저택에서 걸려온 전화였다.“작은 사모님, 잠시 이리로 오실 수 있나요?”가정부 유민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이며 말했다.“큰 사모님께서 저녁 식사 후 산책하러 나가시려다가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워 가정의도 불러왔는데 병원에 가서 검사받아보시라고 하네요...”“알았으니까 일단 진정하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도아린은 황급히 저택으로 향했다.주현정은 꾸준히 한약을 먹고 있지만 자꾸 병이 난다. 이 집에서 제일 한가한 도아린이기에 가정부 유민정은 크고 작은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그녀에게 먼저 연락한다.유민정이 대문 앞에서 도아린을 마중하며 두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그날 도련님이랑 함께 새벽에 집을 나가신 이후로 사모님께서 밤새 잠을 설쳤어요. 그러더니 다음 날 바로 적신호가 와서 입원해야 하는데 사모님께서 기어코 고질병이라면서 집에 돌아가겠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결국
“건후 전화니?”주현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데이트하기로 했어? 나 혼자 할게. 얼른 나가봐...”“괜찮아요. 좀 기다리라고 하죠 뭐.”도아린은 주현정의 얼굴을 깨끗이 닦아드린 후에야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자마자 우렁찬 욕설이 그녀의 귀청을 째지게 했다.“도아린, 너 미쳤어?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왔네 이거 아주!”도아린은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대체 그가 뭣 때문에 이렇게 화내는 건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그녀는 주현정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문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왜 이래요? 건후 씨야말로 미쳤어요?”“짐 정리를 했다는 게 고작 이거야?”배건후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되물었다.“대충 흘려 넘기게?”오늘 아침 배건후가 캐리어를 챙기러 갔는데 안에 글쎄 목 어깨마사지기도 없고 온열 수면안대도 없는 것이다... 물론 그도 아예 이런 물건들을 쓰진 않지만 도아린이 챙겨 넣지 않은 건 엄연한 태도 문제였다.그를 더 화나게 만든 건 도아린이 맞춰준 3세트의 옷 모두 똑같은 스타일에 넥타이 색깔마저 똑같았다.“와서 다시 싸!”배건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지금 못 가요. 보살펴야 할...”“동생이 또 위급한 거야?”배건후가 야유 조로 물었다.“어제 나더러 약 사달라고 애원한 사람이 누구더라? 고작 하룻밤 만에 변한 거야? 왜? 이젠 내가 대신 도정국 씨 상대 안 해줘도 되는 거야? 아니면 뭐 아예 이혼할 생각을 접었어?”도아린은 이미 이혼 준비를 다 마쳤지만 그의 거만하고 야유 섞인 말을 듣고 있자니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그녀는 곧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았다.“미안한데 이번에 핑계로 쓰일 사람은 내 동생이 아니라 건후 씨 어머님이에요. 어젯밤에 갑자기 기절하셨는데 다행히 지금 위험에서 벗어나셨어요.”“...”배건후가 문득 침묵했다.“대표님은 공사다망하시다 보니 가족을 챙길 시간이 없으시네요.”도아린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다음번에 돌발상황이 발생할 땐
“엄마가 너한테 못 해준 게 뭔데? 어떻게 엄마가 이토록 위급할 때 이혼을 언급할 수 있어? 도아린, 제발 인간답게 살면 안 돼?”대체 누가 누구더러 인간답게 살라고 하는 것인지...이혼을 질질 끌면서 내연녀랑 뜨겁게 사랑을 나눌 땐 언제고...도아린은 이젠 그에게 철저하게 실망한지라 말투도 차갑고 강압적으로 변했다.“건후 씨 약점 잡고 있어야 하루빨리 목적에 달성하죠.”배건후는 그녀의 기세등등한 태도에 화가 나 이마에 실핏줄까지 튀어 올랐다. 그녀가 딴 사람에게 장뇌삼을 선물한 건 단지 배건후를 화나게 하고 그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전혀 아니었다.도아린은 하루빨리 그와 이혼하지 못해 안달이다.“도아린, 나 같은 말 반복하는 거 딱 질색인데 이번 한 번만 얘기할게. 이혼하든 말든 내가 알아서 정해. 그 인간들이 한 말 다 믿지는 마. 우리가 부부인 걸 알면 네가 들러붙어도 오히려 멀리 피해 다닐 거야.”도아린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그의 말에 화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나중에 어떻게 지낼지는 내가 알아서 해요. 건후 씨는 사인만 하면 돼요.”배건후의 눈빛이 점점 더 음침해졌다. 그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너랑 장난칠 시간 없어.”그가 확고하게 거절하지 않자 도아린이 말을 이었다.“그럼 출장 다녀와서 다시 얘기해요.”‘어차피 이혼은 정해진 일이니 요즘은 일단 어머님 보살펴드려야지.’그녀가 한창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배건후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꽉 잡고 아무도 없는 비상구로 걸어갔다.이어서 예고도 없이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순간 짙은 담배 향이 입안을 파고들었다. 배건후의 키스는 늘 이토록 터프하고 일방적인 법이다.도아린은 미처 대응할 겨를이 없었다.3년 내내 그는 도아린을 터치한 적도 없을뿐더러 키스한 적은 더더욱 드물다.가끔 몇 번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을 때가 있지만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본 후엔 바로 멈췄었다.하지만 이번엔...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