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건후를 위해 짐 정리를 하면 그가 한약을 어머님께 드릴 것이다. 이건 매우 공평하고 합리한 딜이다.도아린은 밤새 운전하여 에이트 맨션으로 돌아왔다. 이제 막 단지 입구에 들어서려는데 배씨 저택에서 전화가 걸려왔다.다만 그녀가 길옆에 차를 세우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이에 도아린은 잘못 건 줄 알고 계속 운전하여 맨션으로 돌아갔다.배건후가 출장 갈 때마다 그녀는 안팎으로 옷을 3세트씩 준비한다.짙은 색 외투에 연한 색 셔츠, 깔 맞춤한 넥타이와 브로치, 시계 그리고 커프스까지...도아린은 배건후의 더 매력적인 모습을 사람들 앞에 보여주려고 한다. 어떤 단추가 그의 신분에 더 잘 어울리는지 연구하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주객전도를 금지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많은 자료를 수집해 보곤 한다.오늘 그녀는 이전의 열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마치 AI처럼 딱딱하게 다 고른 3세트의 옷을 캐리어에 넣었다.하지만 루비 목걸이를 금고에 넣을 때 액세서리가 몇 개 없어진 걸 발견했다. 이제 막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는데 휴대폰이 또다시 울려댔다.이번에도 배씨 저택에서 걸려온 전화였다.“작은 사모님, 잠시 이리로 오실 수 있나요?”가정부 유민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이며 말했다.“큰 사모님께서 저녁 식사 후 산책하러 나가시려다가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워 가정의도 불러왔는데 병원에 가서 검사받아보시라고 하네요...”“알았으니까 일단 진정하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도아린은 황급히 저택으로 향했다.주현정은 꾸준히 한약을 먹고 있지만 자꾸 병이 난다. 이 집에서 제일 한가한 도아린이기에 가정부 유민정은 크고 작은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그녀에게 먼저 연락한다.유민정이 대문 앞에서 도아린을 마중하며 두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그날 도련님이랑 함께 새벽에 집을 나가신 이후로 사모님께서 밤새 잠을 설쳤어요. 그러더니 다음 날 바로 적신호가 와서 입원해야 하는데 사모님께서 기어코 고질병이라면서 집에 돌아가겠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결국
“건후 전화니?”주현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데이트하기로 했어? 나 혼자 할게. 얼른 나가봐...”“괜찮아요. 좀 기다리라고 하죠 뭐.”도아린은 주현정의 얼굴을 깨끗이 닦아드린 후에야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자마자 우렁찬 욕설이 그녀의 귀청을 째지게 했다.“도아린, 너 미쳤어?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왔네 이거 아주!”도아린은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대체 그가 뭣 때문에 이렇게 화내는 건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그녀는 주현정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문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왜 이래요? 건후 씨야말로 미쳤어요?”“짐 정리를 했다는 게 고작 이거야?”배건후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되물었다.“대충 흘려 넘기게?”오늘 아침 배건후가 캐리어를 챙기러 갔는데 안에 글쎄 목 어깨마사지기도 없고 온열 수면안대도 없는 것이다... 물론 그도 아예 이런 물건들을 쓰진 않지만 도아린이 챙겨 넣지 않은 건 엄연한 태도 문제였다.그를 더 화나게 만든 건 도아린이 맞춰준 3세트의 옷 모두 똑같은 스타일에 넥타이 색깔마저 똑같았다.“와서 다시 싸!”배건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지금 못 가요. 보살펴야 할...”“동생이 또 위급한 거야?”배건후가 야유 조로 물었다.“어제 나더러 약 사달라고 애원한 사람이 누구더라? 고작 하룻밤 만에 변한 거야? 왜? 이젠 내가 대신 도정국 씨 상대 안 해줘도 되는 거야? 아니면 뭐 아예 이혼할 생각을 접었어?”도아린은 이미 이혼 준비를 다 마쳤지만 그의 거만하고 야유 섞인 말을 듣고 있자니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그녀는 곧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았다.“미안한데 이번에 핑계로 쓰일 사람은 내 동생이 아니라 건후 씨 어머님이에요. 어젯밤에 갑자기 기절하셨는데 다행히 지금 위험에서 벗어나셨어요.”“...”배건후가 문득 침묵했다.“대표님은 공사다망하시다 보니 가족을 챙길 시간이 없으시네요.”도아린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다음번에 돌발상황이 발생할 땐
“엄마가 너한테 못 해준 게 뭔데? 어떻게 엄마가 이토록 위급할 때 이혼을 언급할 수 있어? 도아린, 제발 인간답게 살면 안 돼?”대체 누가 누구더러 인간답게 살라고 하는 것인지...이혼을 질질 끌면서 내연녀랑 뜨겁게 사랑을 나눌 땐 언제고...도아린은 이젠 그에게 철저하게 실망한지라 말투도 차갑고 강압적으로 변했다.“건후 씨 약점 잡고 있어야 하루빨리 목적에 달성하죠.”배건후는 그녀의 기세등등한 태도에 화가 나 이마에 실핏줄까지 튀어 올랐다. 그녀가 딴 사람에게 장뇌삼을 선물한 건 단지 배건후를 화나게 하고 그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전혀 아니었다.도아린은 하루빨리 그와 이혼하지 못해 안달이다.“도아린, 나 같은 말 반복하는 거 딱 질색인데 이번 한 번만 얘기할게. 이혼하든 말든 내가 알아서 정해. 그 인간들이 한 말 다 믿지는 마. 우리가 부부인 걸 알면 네가 들러붙어도 오히려 멀리 피해 다닐 거야.”도아린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그의 말에 화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나중에 어떻게 지낼지는 내가 알아서 해요. 건후 씨는 사인만 하면 돼요.”배건후의 눈빛이 점점 더 음침해졌다. 그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너랑 장난칠 시간 없어.”그가 확고하게 거절하지 않자 도아린이 말을 이었다.“그럼 출장 다녀와서 다시 얘기해요.”‘어차피 이혼은 정해진 일이니 요즘은 일단 어머님 보살펴드려야지.’그녀가 한창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배건후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꽉 잡고 아무도 없는 비상구로 걸어갔다.이어서 예고도 없이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순간 짙은 담배 향이 입안을 파고들었다. 배건후의 키스는 늘 이토록 터프하고 일방적인 법이다.도아린은 미처 대응할 겨를이 없었다.3년 내내 그는 도아린을 터치한 적도 없을뿐더러 키스한 적은 더더욱 드물다.가끔 몇 번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을 때가 있지만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본 후엔 바로 멈췄었다.하지만 이번엔...도
도아린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 제자리로 돌아갔다.이제 막 업무를 시작하려던 참인데 문나연이 차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사장님이 너 찾으셔. 이 차 들고 들어가 봐.”“그래...”“마침 잘 왔어.”나형욱이 웃으며 도아린을 반겼다.“이분은 송 감독 새 드라마 여주인공 손보미 씨야. 지금 한창 대역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었어.”금방 퇴원한 손보미는 넉넉한 핏의 화이트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다이아로 S자가 박힌 화이트 캡모자를 쓰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찻잔을 받다가 도아린을 보더니 흠칫 동작을 멈췄다.“사장님, 아현 씨가 묵묵히 제 대역하길 원치 않는다고 해도 그렇죠. 최소한 업계에서 자수 실력이 되는 사람으로 뽑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디 한낱 차나 따르는 사람으로 대충 얼버무리려고 해요?”나형욱은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재빨리 도아린의 반응을 살폈다.한편 도아린은 너무나도 차분했다.“송 감독님 작품이 비록 대체역사물이긴 하나 극 중의 의상은 전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했어요. 아현 씨가 복원한 자수 예복을 보았는데 용이 마치 살아 숨 쉬는 것 같았고 고귀함이 흘러넘쳤어요. 자수 수법은 딱 봐도 대가 수준인데 애석하게도 아현 씨가 너무 겸손하게 지내시다 보니 인맥을 아무리 동원해도 여태껏 얼굴 한 번 뵙지 못했죠.”손보미가 거만을 떨며 말을 이었다.“그런 분을 제 대역으로 쓰는 건 확실히 좀 서운할 만한 일이죠. 그 대신 제가 더 많은 소스를 제공해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제 옆에 능력자 친구가 한 명 있거든요.”‘아주 배건후의 이름을 대놓고 말하시지 왜?!’옆에 있던 나형욱도 바로 알아들었다. 손보미는 한때 본인처럼 눈앞의 도아린이 바로 전설 속의 아현이란 걸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는 것을.“보미 씨.”나형욱이 찻잔을 손보미 앞으로 내밀었다.“실은...”“사장님.”이때 도아린이 그의 말을 잘랐다.“비록 대역이긴 하나 여주인공 대역이라 스킬도 있고 교양도 있으며 허영심도 매우 강한 분으로 픽해야 할 것 같군요.”나
우정윤은 자신의 심복을 시켜 옷 수선하라는 빌미로 LH 스튜디오에 찾아가게 했다.한편 스튜디오에 들어서자마자 도아린이 찻잔을 들고 훈계를 듣는 듯 안색이 어두웠다고 전했다.“차를 따른다고?”배건후가 사인펜을 놓아버리자 책상에서 빙그르르 굴렀다.그의 눈빛이 한없이 음침해졌다.“모두가 부러워하는 부잣집 사모님 팔자를 제쳐두고 기어코 스스로 깎아내리면서 딴 사람 시중이나 드는 거야? 내가 자유를 줘도 너무 줬어. 속세의 고달픔이라곤 전혀 모르잖아!”“...”우정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네요. 정작 하는 행동은 누구보다 야박하면서...’애초에 배건후가 출장 갔을 때 도아린은 꼭꼭 전화해서 그곳 날씨는 어떤지, 숙박 환경은 어떤지, 미팅 준비는 잘 되어가는지 꼬치꼬치 캐묻곤 했었다...그때마다 배건후는 짜증 내며 우정윤더러 전화를 받고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대며 업무가 바쁘니 적당히 전화하라고 시켰다. 그 뒤로 도아린은 카톡 하나 보내지 않았다.우정윤은 그런 그녀가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자들은 남편이 집에 안 돌아오고 용돈을 실컷 준다면 밖에서 어떻게 놀아날지 모르니까....도아린이 창고에서 명주실을 고를 때 문나연이 문을 비스듬히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왜?”“밖에 잘생긴 남자분 왔어.”문나연은 문틈 사이로 그녀를 내다보게 했다.“저기 정장 입은 저 남자.”도아린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시선을 옮겼더니 아니나 다를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남자를 발견했다.“처음엔 손보미 팬인 줄 알았는데 손보미가 나올 때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 있지.”문나연은 그녀에게 웃으며 말했다.“너 찾아온 거야. 호감 가면 내가 대신 두 사람 이어줄게. 별로면 내쫓아버리고.”“...”도아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정장 외투 포켓에 반쯤 드러난 명찰을 보았는데 모건이라고 적혀 있었다.배건후가 설마 도아린이 손보미를 해칠까 봐 사람을 보내 뒤에서 몰래 감시하게 한 걸까?“꽤 잘생겼는데 소심한 것 같아.”문나연이 두 눈을 굴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도아린이 재빨리 발뒤꿈치를 들고 그를 살펴보았다.“그게 아니라 간만에 팔 운동하니 조금 뻐근하고 그러네요.”남자는 팔목을 움직이며 그녀를 갸웃거렸다.“그나저나 그쪽 꽤 용감하시네요. 어릴 때부터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셨어요?”도아린은 낯선 사람과 대화하길 꺼리지만 이 남자가 워낙 겸손한 태도에 말투도 온화한지라 거부할 수가 없었다.“저도 한때 길에서 소매치기당한 적 있거든요. 그때 가방 안에 수험표가 들어있어서 남동생이 휠체어 탄 채로 쫓아가다가 하마터면 차에 치일 뻔했어요. 그 뒤로 이런 일이 있으면 그냥 못 넘어가겠더라고요.”“동생분도 참 용감하시네요.”육하경이 웃으며 말했다.“보통 이런 일을 겪으면 트라우마로 남겠는데 그쪽은 용케 극복하고 정의 구현하고 있잖아요. 너무 대단해요.”그는 말 한마디로 도아린과 도지현 모두 칭찬했다. 역시 칭찬을 마다할 사람은 없었고 도아린도 내심 흐뭇했다.그녀가 이제 막 말을 이어가려고 할 때 문나연한테 전화가 왔다. 그 자식 한바탕 혼내고 쫓아버렸으니 얼른 돌아오라고 전했다.“저는 그럼 이만 가볼게요.”도아린이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서 스튜디오로 들어갔다.육하경은 그녀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더니 입가에 번진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헬스장으로 돌아가니 성대호가 한창 트레이너의 감시하에 숨을 헐떡이며 앉았다 일어서기를 하고 있었다.“야 이 자식아, 물 사 오라고 했잖아. 진짜 날 목말라서 죽이고 내 자리 차지하려는 속셈이야?!”육하경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윗몸일으키기를 하면서 넌지시 대꾸했다.“네 죽음은 필연코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흔적을 남길 거야.”“...”성대호는 숨이 턱 막혀 시트에 앉으면서 쏘아붙였다.“뭘 그렇게 실실거려?”육하경은 겸손하고 온화한 성격에 가족 관계상 또래들보다 좀 더 진중한 편이다. 그런 그가 밖에 한 번 나갔다 오더니 사 오라는 물은 안 사 오고 줄곧 입꼬리가 올라가 있으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좀 전에 밖에서 선행
배건후가 결혼할 때 성대호만 옆에 있었는데 소문에 의하면 그의 와이프가 예쁘고 성격 좋은 데다가 배건후의 말이라면 절대복종한다고 했다.그랬던 두 사람이 이혼한다고 하니 오지랖 넓은 성대호가 들뜨지 않을 리가 있을까.“바로 이틀 전에도 형수님이 건후 보더니 피해 다니는 거야. 슬슬 헤어질 준비를 하시나 봐.”“닥쳐!”배건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성대호는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어차피 배건후는 지금 해외라 그를 어찌할 수가 없으니까.“누구는 끝까지 거만을 떨다가 차이고 나서도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다니까.”배건후가 속으로 생각했다.‘영상 통화를 걸지 말았어야 했어.’이때 육하경이 그의 등을 톡톡 두드리자 성대호도 곧장 형세 파악이 됐다.“아 참, 엠파이어 빌딩이 얘 거잖아. 얘보고 그 여자 누군지 조사해달라고 하면 되지.”“무슨 여자?”배건후가 담뱃불을 지피며 질문을 건넸다.이에 성대호가 방금 육하경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아주 생동하게 묘사하며 배건후에게 들려주었다. 배건후는 살짝 의외긴 했으나 선뜻 친구를 도와 나섰다.“뭐 좀 특별한 점은 없었어?”성대호가 한마디 덧붙였다.“특별히 예뻤대.”육하경이 웃으며 대꾸했다.“그렇게 식상한 예쁨 말고 용감하고 개성 있는 아름다움이었어.”“...”배건후가 담배를 두어 모금 빨았다.“좀 더 상세하게 말해봐. 키, 헤어스타일, 유니폼 이런 것들 말이야. 그래야 사람 시켜서 조사하지.”“아니다 됐어.”육하경이 문득 고개를 내저었다.“안 그래도 칼 같은 성격이던데 내가 뒷조사하는 거 알면 친구조차 못 할 거야. 운명에 맡기지 뭐.”옆에 있던 성대호가 코웃음을 쳤다.“몇 마디 대화로 성격이 칼 같은 것까지 알게 됐어?”“여자들 보통 소매치기범 마주치면 기껏해야 경찰에 신고할 텐데 그 사람은 선뜻 범인을 쫓아 나섰어. 이거면 충분한 거 아니야?”배건후도 그의 말이 일리가 있어 보였다.“맞아. 너무 적극적이면 소매치기범 잡았던 게 트릭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네
병실에 들어서자 안경을 쓴 채 침대에 기대어 신문을 읽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엄마, 오늘은 훨씬 좋아 보이시네요.”“개나 소나 찾아오지 않으면 더 빨리 나았을 텐데 말이야.”주현정이 신문을 넘기며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배지유는 뻘쭘한 얼굴로 침대 옆에 앉았다.“엄마, 사실 그때 ‘야밤의 대본 리딩’은 오해였어요.”당시 손보미는 배역을 따내기 위해 감독이 흑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밤늦게 방까지 찾아갔다. 모든 건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갔고, 본인을 희생한 대가로 목적을 이루기도 했다.다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복도에 걸어 나오는 순간 마침 집에 묵고 있던 주현정의 눈에 띄게 되었다.결국 주현정은 손보미라면 치를 떨었다.“그럼 이것도 오해겠네?”주현정이 대뜸 신문을 던져 버렸다.기사에는 배건후가 ‘야밤의 미팅’을 진행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을뿐더러 누군가 청호상 시상식 백스테이지에서 찍힌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두 남녀가 서로 껴안은 흑백 실루엣도 얼핏 보였는데 모든 상황이 당사자가 배건후와 손보미라는 사실을 증명했고, 게다가 곧 좋은 소식이 들릴지도 모른다고 했다.배지유는 코를 쓱 만지며 미소를 쥐어 짜냈다.“언론사들이 내용을 조작했겠죠.”“이 사진을 누가 제보했는지 알아?”주현정은 젊었을 때 JS 픽처스의 대표였다. 나중에 딸을 낳고 건강 악화 이슈로 일선에서 물러나 경영권을 인계한 지 얼마 안 되었다.배건후는 출신 자체가 달랐고, 비록 몰래 결혼한 것 때문에 가끔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본인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감히 폭로하지 못했다.언론이 손보미와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즉, 사진을 제공한 사람이 배건후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측근이라는 것이다.이처럼 든든한 존재가 방패막이 되어주니 매체들도 믿는 구석이 있고 대거 홍보했다.사실 주현정은 아들이 도아린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며느리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라 지켜주기로 마음먹었다.“네 큰아버지한테
“그건 안돼.”강홍련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안민아 씨, 전에도 하마터면 우리 아들의 명예를 망가뜨릴 뻔했었죠. 그런데 오늘 또 똑같은 수법을 쓰는 거예요? 손보미와 배지유는 소리를 듣고 문을 두드린 거예요. 원하지 않았다면 왜 처음부터 도움을 청하지 않은 건가요?”“숨어 있으면서 도아린이 찾는 데도 잠자코 있었죠. 그런데 뭐예요? 우리 아들한테 책임질 일까지 해놓고 모른 척하는 거예요? 사람들한테 들켰다고 지금 우리 아들한테 다 뒤집어씌우냐 말이에요?”강홍련의 말솜씨에 안민아는 할 말이 없어졌다. 한편, 안준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손에 든 찻잔을 꽉 움켜쥐었다. 양측이 심하게 다툴 때, 강재희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정국의 빚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거예요?”거실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 날뛰던 강홍련은 갑자기 얼굴이 굳어진 채 눈빛이 흔들리면서 안절부절못하였다.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던 안준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당신들 지금 내 딸한테 그 빚을 갚으라고 할 생각인 거야? 이러고도 우리 안씨 가문을 모해하지 않았다니...”강홍련이 뭐라 변명하려 할 때 강재희가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아섰다. “도유준이 성을 바꾼다면 도정국의 채무는 그와 무관해요. 그리고 언니가 이리 결혼도 안 한 신분으로 성이 다른 아들을 데리고 있는 건 보기에도 안 좋아요.”현재 강씨 가문은 강태식과 그의 자식들이 절대적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강재희가 딸이긴 해도 맏이로서 이미 회사 일을 많이 인계받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강재희의 뜻이 곧 강태식의 뜻이기도 했다. 강홍련은 내키지 않았지만 도유준은 내심 기뻤다.도정국의 빚을 갚을 필요가 없게 되었고 또한 강씨 가문의 도련님이 되었으니 남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강씨 가문에서 준비한 예단도 받을 수 있고 안민아를 괴롭히고 도아린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난 좋아요.”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로 향해
안민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뺨을 세게 내리쳤고 그녀는 바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천한 계집애.”“아빠?”당황한 그녀는 자신의 목과 다리에 난 자국들을 가리려고 했지만 도저히 가릴 수가 없었다. 안준휘가 앞으로 한 발짝 더 다가와 뺨을 치려는 그때, 도유준이 그를 막아섰다.“민아와 저 서로 좋아하는 사이입니다. 민아랑 결혼하고 싶습니다.”“아니요. 난 싫어요... 난 원하지 않았어요.”고개를 가로젓던 안민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도아린을 바라보았다.“차를 마시고 나서 몸이 안 좋았어요. 언니가 쉬러 가자고 했는데 일어나보니...”그 말에 안준휘는 독살스럽게 도아린을 노려보았다. 도아린의 손에는 손수건이 들려 있었는데 그건 강재민이 그녀를 위해 준비해 준 것이었다. 미리 양파즙을 발라놓은 손수건으로 눈을 닦자 이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마신 차는 민아가 나한테 준 거예요. 똑같은 차를 마셨지만 난 아무 일 없었고요.”그녀는 기억을 되짚어 보는 척하며 말을 이어갔다. “민아가 화장실에서 돌아온 뒤, 차에 감귤향이 난다고 하는 말에 민아도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어요.”안민아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도아린이 자신의 계획을 미리 알아차리고 화장실을 간 사이 찻잔을 바꿔치기 했을 거라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손보미 배지유와 얘기를 나눈 적이 없는데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한편, 강씨 가문에서 이런 일이 생긴만큼 좀처럼 나서지 않던 강태식도 그 자리에 나타났다.강재희가 강씨 가문을 대표하여 입을 열었다.“안민아 씨, 도유준이 당신을 강요한 건가요? 아니면 두 사람이 서로 원해서 생긴 일인가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솔직하게 대답해요.”“도유준이 강요한 거라면 경찰에 신고하죠. 우리 가문은 절대 감싸고 돌지 않을 거예요. 만약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면 도유준이 우리 가문의 먼 친척이긴 해도 우리 가문에서 예단을 준비하도록 할게요. 절대 안민아 씨를 섭섭지 않게 할 거예요.”안민아
“이 사람들이 다짜고짜 쳐들어온 거야.”몸을 감싸고 싶었지만 이불이 안민아의 몸을 감싸고 있어 어쩔 수가 없었다.잡아당겨도 꿈쩍도 하지 않자 그는 아예 안민아의 치마를 잡아당겨 앞을 막았다. 손보미는 비명을 지르며 급히 몸을 돌리고 서둘러 배지유를 데리고 발길을 돌렸다.“이제 그만 나가자.”그러나 도아린이 어찌 그들을 그냥 이대로 돌려보낼 수 있겠는가? 모해를 하려다가 실패하니까 도망갈 생각인 것 같은데 어림도 없지...“민아 봤어요? 발꿈치가 닳아서 하인에게 연고 좀 가져다 달라고 했는데.”이불 밖으로 드러난 발이 빠르게 움츠러들었다. 손보미는 고개를 저었다.“글쎄. 다른 데 가서 찾아봐.”도아린이 길을 비켜주길 바랐지만 도아린은 문 앞에서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방에 있는 여자가 나라고 생각한 거야? 또 날 모함할 생각이었네?”손보미는 휠체어 손잡이를 꽉 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휠체어로 도아린을 날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화가 치밀어오른 배지유는 다들 말이 없자 먼저 입을 열었다.“도아린 씨 핸드폰이 방안에서 울렸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멋대로 사람 오해하지 말아요.”“내 핸드폰은 사촌 동생이 가지고 있어요. 핸드폰이 방에 있다는 건 민아도 이 방에 있다는 뜻인데.”얼굴이 싸늘해진 그녀가 경계에 찬 눈빛으로 손보미를 쳐다보았다. “지난번에 날 음해하려다가 실패하니까 이젠 내 여동생한테까지 분풀이를 하는 거야?”“나 아니야.”말을 하던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휠체어 손잡이를 꽉 잡았다.“지난번에도 날 모욕했었잖아. 도대체 왜 또 이러는 거야? 내가 건후 씨랑 결혼하게 되니까 질투하는 거야?”차갑게 콧방귀를 뀌던 도아린은 들고 있던 꽃다발을 서랍장에 던져버렸다.“재민 씨, 내 핸드폰으로 다시 전화 걸어줘요. 핸드폰에 민아 연락처 있으니까 어디 한번 전화해 보죠. 민아를 찾지 못하면 오늘 누구도 이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해요.”배지유는 급한 마음에 손보미를 돌아보았고
“아린 씨는요?”“발이 아프다고 하인에게 게스트룸으로 안내해달라고 한 것 같아요.”말을 하던 손보미가 배지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너도 휠체어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어. 가서 좀 쉴래?”“그래요.”세 사람은 이내 게스트룸으로 향했고 하인이 문을 열 때, 건너편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손보미는 이내 배지유의 귀를 틀어막았다. 혹여라도 배지유가 나쁜 물이 들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한편, 안색이 굳어진 강재민이 앞으로 다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뜨겁게 달아오른 방안의 두 사람은 노크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였다.“아린 씨. 아린 씨, 어디 아픈 거야? 의사라도 불러줘?”그 누구도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도아린이라고 한 적이 없지만 손보미는 그녀에게 누명을 씌우기에 바빴다. 얼굴이 한껏 어두워진 강재민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전화를 걸었고 도아린의 전화가 방안에서 울리기 시작했다.손보미는 애써 득의양양한 표정을 감추고는 문을 더 세게 두드렸다. 강씨 가문의 모든 사람에게 이 일을 알리고 싶다는 듯이 그녀는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아린 씨, 문 좀 열어봐. 걱정돼 죽겠어. 건후 씨랑 이혼은 했지만 그렇다고 강씨 가문에서 이런 사고가 나면 안 되는 거잖아.”강재민의 눈빛에 살기가 가득했다. 문고리를 잡고 있는 힘껏 당겼지만 안에서 문을 잠가버린 상황이었다.“열쇠 가지고 와요. 얼른 열쇠 가져오라고요.”손보미가 하인을 향해 소리쳤다. 돌발상황에 놀란 듯 멍해 있던 하인은 손보미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자리를 떴다. 이때, 강재민이 두 발짝 물러서더니 문을 거세게 걷어찼다.쾅!방문이 바닥에 쓰러지고 침대 위 뒤엉켜 있던 두 사람은 순식간에 몸이 굳어졌다.“아악.”여자는 재빨리 이불을 집어 들고 자신을 감쌌다. 손보미는 앞으로 다가가 남자의 등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도유준 나쁜 자식.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아린 씨는 네 누나인데. 누나한테 어떻게 이런 짓을 해.”“우리 누나 아니야.”그가 손보미의
안민아는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말랐다. 한 잔 마시고는 또 한 잔 따라 마셨다. 이번에는 도아린의 말처럼 달콤한 맛이었다. 설마 내가 찻잔을 잘못 집어 든 걸까?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지정된 찻잔을 언니한테 건네줬었는데...생각하면 할수록 무서웠고 점점 식은땀이 나고 잔을 들고 있던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왜 그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간 거야?”도아린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의 이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급히 뒤로 물러나면서 안민아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괜찮아요, 그냥 좀 더워서요.”“그래? 몸이 불편하면 재민 씨한테 말하고 먼저 돌아가자.”도아린이 서재로 통하는 계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아니에요.”급히 도아린의 손을 움켜쥐던 그녀는 재빨리 손을 뺐다. 그녀는 눈 밑의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고 발을 들어 도아린에게 보여주었다.“아침에 정원을 구경하다가 뒤꿈치가 닳았어요. 반창고 좀 가져다줄래요?”도아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애원하는 그녀의 눈빛에 도아린은 결국 하인에게 부탁했다. ...“젠장, 사람을 어떻게 이리 깔볼 수가 있는 거야?”도유준은 문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들어와서 밥도 먹지 못하게 하더니 이제는 남은 음식까지 내놓지 않는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들도 어엿한 강씨 가문의 일원이고 구걸하는 거지가 아닌데 말이다. “그만해. 힘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쓰란 말이야.”강홍련은 화장대 거울을 보며 이마에 반창고를 붙였다.“나중에 또 뭐요? 화장실도 못 가는데 무슨 일을 더 해요?”문을 향해 발을 걷어차고는 그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상처를 처리한 뒤, 강홍련은 뒤돌아서서 도유준을 쳐다보았다. “도아린이 그 일을 알고 있는 한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도아린을 이대로 둘 수는 없어. 아주 처참히 짓밟아서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만들어야 해.”주먹을 불끈 쥔 채 이를 악물던 그가 음흉하고 흉악한 눈빛을 보였다.도아린을 짓밟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 같았지
강씨 가문의 남매는 긴 테이블의 양 끝에 앉았고 손보미는 배지유와 한쪽에, 도아린은 안민아와 한쪽에 앉았다. 그들은 식사를 하면서 가볍게 얘기를 주고받았고 분위기도 꽤 좋은 편이었다. 잠시 후, 하인이 들어와서 강재희의 귓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였다.강재희는 도아린을 힐끔 쳐다보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정신을 잃었으면 그냥 돌려보내요. 문 앞에서 얼쩡거리게 하지 말고.”“네.”한편, 하인에게서 그 일을 듣고도 손보미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올 때 보니까 강홍련 모자가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데 무슨 일인가요?”“새언니한테 미운털이라도 박힌 거예요? 연성에서도 그러더니 해남까지 와서도 날뛰는 건 마찬가지네요.”얼핏 들으면 강홍련 모자를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도아린을 비아냥거리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맞장구를 치는 와중에도 도아린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안민아를 향해 물었다.“새우 먹을래?”갑작스러운 물음에 안민아는 당황한 얼굴이었고 고개를 끄덕이다가는 다시 급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테이블 위에 있는 새우는 한 사람당 한 마리씩이었고 그녀는 이미 한 마리 먹었다.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는 걸 언니가 눈치챈 걸까?“내 거 먹어.”도아린은 자신 앞에 있던 새우를 안민아에게 건네주었고 안민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때, 손보미가 팔꿈치로 배지유를 건드리며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도아린을 쳐다보았다.“몸매가 좋은 건 다 이유가 있다니까. 아린 씨 식단 조절 하나 봐?”“하긴 건후 씨가 식단 조절하니까 그렇지. 건후 씨 식단 같이 먹으면 몸매가 더 좋아질 거야.”손보미는 사람 가슴에 비수를 꽂은 일을 참 잘한다. 그녀의 빈정거림에도 도아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배건후의 얘기만 나오면 손보미는 몸이 근질근질하였다. 문득 생각이 떠오른 도아린이 입을 열었다.“어제 보미 씨가 산 물건들을 건후 씨가 안 받겠다고 하던데. 결국 어떻게 처리했어?”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보미의 손에 힘이
“허튼소리 하지 마. 지금 나와 정국 씨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거야?”바닥에서 일어난 강홍련은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있던 탓에 다리가 저려 비틀거리다가 다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도씨 가문으로 들어온 후, 엄마는 몇 번이나 임신한 적 있었죠. 그러나 뱃속의 아이가 여자아이라는 이유만으로 도정국은 엄마한테 아이를 지우길 강요했었어요. 그러다가 엄마가 지현이를 임신하였고 도정국은 임산부한테 좋다는 이유로 대량의 보양식을 엄마한테 먹게 하였고 결국 뱃속의 아이가 보통 아이들보다 훨씬 많이 컸었죠.”“출산 당일, 제왕절개를 해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에도 도정국은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거부하였고 결국 최적의 치료 시간을 놓친 탓에 엄마는 양수색전증으로 사망하게 되었어요.”도아린은 싸늘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그녀의 말에 강홍련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모든 것들을 당신이 도정국한테 시킨 거죠?”강홍련이 아니라면 남자인 도정국이 어찌 아이를 낳는 위험에 대해 이리 잘 알 수가 있었겠는가? 두 사람은 정은채를 죽이고 정은채의 재산을 가로챈 것도 모자라 정은채의 하나뿐인 아들마저 잘 키우려 하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지던 강홍련은 계단 모서리에 이마를 부딪혔고 순식간에 피가 흘러나왔다. 힘겹게 일어서는데 핏방울이 얼굴을 타고 눈 속으로 흘러 들어가 참기 힘들 정도로 따끔거렸다.이때, 도유준이 달려와 그녀를 부축하면서 도아린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무슨 증거가 있어 이러는 거야?”도아린의 차가운 시선이 강홍련에게서 도유준의 얼굴로 향했다. 그녀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검은 눈동자를 치켜들고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난다고 하더니. 지현의 다리가 어떻게 부러졌는지 지현이가 왜 그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지 도유준 넌 잘 알고 있잖아.”손에 힘이 풀리는 탓에 강홍련은 또 바닥에 주저앉았고 계단에 머리를 부딪히게 되었다. 오른쪽과 왼쪽 이마에 상처가 생겼고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문으로 가정부들이 드나들면서 강씨 가문의 전체 사람들이 그들의 추태를 보게 되었고 앞으로 강씨 가문에는 그들의 지위가 사라지게 된 셈이다도아린이 아버지가 공개 사과를 하게 억지를 부리지 않을 수만 있다면 강홍련 같은 먼 친척 한 명쯤은 체면이 깎여도 상관없었다.강씨 가문의 뒤뜰에는 아카시아 꽃을 넓게 심었고 작은 꽃봉오리가 꽃을 피워 공기 속에는 꽃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안민아는 일부러 늦게 걸으면서 셀카를 몇 장 찍었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때 위치까지 설정했다.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도아린과 강재민은 멀리 가 있었다.도아린은 오늘 옅은 색의 몸에 딱 붙는 셔츠에 진한 색의 청바지를 입었고 가방을 가로 메고 있었다. 뒤에서 봤을 때 허리가 유독 가늘어 보였고 힙업이 돋보였다.안민아는 자신의 허리를 만져보았다. 그녀는 도아린보다 살집이 적었지만, 몸매가 좋지는 않았다.남자가 아닌 자신이 봐도 도아린의 몸매가 탐이 났다.강재민은 안민아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사촌 동생은 아직 마음을 접지 않았나 봐요.”도아린은 허리를 숙여 꽃을 하나 따고는 천천히 말했다.“일을 좀 깔끔하게 처리해요. 저를 방패막이로 삼지 말고 재희 씨를 오해하게 만들지도 말아요. 우리는 함께 할 수 없어요.”강재민은 그녀의 손에서 꽃을 건네받고는 중지로 그것을 으깼다.“이혼 숙려 기간이 곧 끝나가요. 아린 씨도 깔끔하게 처리했으면 좋겠어요.”“...”도아린은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강재민은 눈썹 뼈가 튀어나왔고 눈이 깊었는데 어머니의 유전이었다.입체적인 오관은 도도한 느낌을 주었고 도아린을 쳐다볼 때 더 단호한 눈빛이었다.“엠파이어 빌딩의 고객 자료는 배지유가 준 거죠.”도아린이 말했다.“재민 씨는 진작에 배건후를 노렸던 거예요. 일부러 저에게 관심이 많은 척하는 건 배건후의 화를 돋우는 수단일 뿐이죠. 건후 씨의 사업을 빼앗고 여자까지 빼앗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다 충격을 주려는 거죠.”강재민은 한참 침묵하더니 갑자
“도아린, 강씨 가문의 사람들이 말하는데 끼어들지 마!”강홍련은 화를 냈다. 당장 주머니에 들어올 돈이 날아 나서는 절대 안 된다.“네가 도정국을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가씨가 준 돈도 손을 대지 마!”강홍련은 당당하게 말했다.“나는 정국 씨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지만, 아들을 낳아줬고 십몇 년을 함께 살았기에 사실혼 사이야. 아가씨가 준 돈은 반드시 내가 관리해야 해!”도아린은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에 강홍련은 소름이 끼쳤다.그녀는 못마땅하게 도아린을 째려보고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강홍련을 쳐다보았다.“아가씨, 정국 씨는 도아린의 함정에 빠져 빚을 지게 된 거예요. 정국 씨에게 새로 시작할 기회를 준다면 반드시 아가씨의 은혜에 보답할 거예요!”강재희는 강홍련이 멍청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방금 자신이 도아린의 의견을 묻는 것을 못 봤다는 말인가? 강홍련은 강재희가 불쾌해하는 것이 도아린 때문인 줄 알고 더 의기양양해서 말했다.“도아린, 진씨 가문에서는 네가 허영에 눈이 먼 속물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그때가 돼서 진씨 가문에서 쫓겨난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찾아올 생각은 하지 마!”강재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도아린을 보며 물었다.“합의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도아린은 찻잔을 들었다. 강재희는 한참을 기다려도 도아린이 대답하지 않자 불쾌함이 더 증가했다.체면을 봐주니까 더 허세를 부리고 있는 모양이다.“강씨 가문 사람들이 얘기하고 있는데 도씨 성을 가진 사람한테 물어서 뭐해?”강재민이 느긋하게 말했다.강재희는 강재민을 흘겨보고는 강홍련을 쳐다보았다.“당신과 도정국 씨가 사실혼 관계라면 그 사람의 채무도 두 사람의 공동채무가 되는 거죠. 당신과 도정국 씨가 함께 갚아요.”강홍련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아가씨, 방금 한 얘기는...”“제가 도아린 씨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끼어들지 마세요.”강홍련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그들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이었지만 강재희가 왜 도아린을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