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3화

Author: 온유
지금 그가 먼저 도아린에게 짐을 싸달라고 부탁하고 있고 말투도 최근 들어 가장 누그러진 편이다. 이에 도아린은 문득 마음이 씁쓸해졌다.

그녀가 아무 말 없자 배건후도 말을 잇지 않았고 두 사람은 휴대폰을 든 채로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요즘 SNS에 돌고 있는 밈이 하나 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만약 당신 남편이 달마다 용돈을 2천만 원씩 주는 대신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수 있나요?]

이에 ‘좋아요’가 가장 많이 달린 댓글은 [1초라도 망설이면 그건 돈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였다.

이 논리대로라면 배건후보다 더 완벽한 후보는 없다. 달마다 도아린에게 한도 제한 없는 카드를 줄 뿐만 아니라 고급 저택에 좋은 차, 게다가 도우미들까지 고용해서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으니까.

어디 그뿐인가,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뭣 하나 빼놓을 게 없는 완벽한 남편감이었다. 두 사람의 신분 차이가 현저하지만 배건후는 도씨 일가에서 원하는 자원은 최대한 만족시켜주고 있다.

돈도 몇 푼 못 벌면서 시답잖은 일만 벌이고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과 비하면 배건후는 너무 괜찮은 편이다.

도유준은 그가 일편단심이라고 했는데 손보미에게 줄곧 일편단심인 건 사실이다. 그의 베프 성대호는 만났던 여자친구가 산을 이룰 지경이니까.

어쩌면 도아린이 좀 더 ‘너그러워’진다면 이 결혼생활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 듯싶다.

그녀가 이제 막 한 걸음 물러나려고 하는데 전화기 너머로 대뜸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후 씨, 나 다 씻었어.”

순간 도아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친!’

‘방금 나 스스로한테 가스라이팅한 거야?!’

왜 굳이 흠집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완벽한 사람을 찾으려고 고집한 걸까?

연성에 널리고 널린 게 훌륭한 남자들인데 말이다.

“약속 꼭 지켜요.”

말을 마친 도아린이 전화를 끊었다.

그 시각 빨간색 람보르기니가 맞은 편에서 질주해 오더니 모건 그룹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도아린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배건후는 슬슬 짜증이 몰려왔고 짙은 얼굴에 싸늘한
Patuloy na basahin ang aklat na ito nang libre
I-scan ang code upang i-download ang App
Locked Chapter

Kaugnay na kabanata

  • 또 한 번의 거절   제14화

    배건후를 위해 짐 정리를 하면 그가 한약을 어머님께 드릴 것이다. 이건 매우 공평하고 합리한 딜이다.도아린은 밤새 운전하여 에이트 맨션으로 돌아왔다. 이제 막 단지 입구에 들어서려는데 배씨 저택에서 전화가 걸려왔다.다만 그녀가 길옆에 차를 세우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이에 도아린은 잘못 건 줄 알고 계속 운전하여 맨션으로 돌아갔다.배건후가 출장 갈 때마다 그녀는 안팎으로 옷을 3세트씩 준비한다.짙은 색 외투에 연한 색 셔츠, 깔 맞춤한 넥타이와 브로치, 시계 그리고 커프스까지...도아린은 배건후의 더 매력적인 모습을 사람들 앞에 보여주려고 한다. 어떤 단추가 그의 신분에 더 잘 어울리는지 연구하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주객전도를 금지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많은 자료를 수집해 보곤 한다.오늘 그녀는 이전의 열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마치 AI처럼 딱딱하게 다 고른 3세트의 옷을 캐리어에 넣었다.하지만 루비 목걸이를 금고에 넣을 때 액세서리가 몇 개 없어진 걸 발견했다. 이제 막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는데 휴대폰이 또다시 울려댔다.이번에도 배씨 저택에서 걸려온 전화였다.“작은 사모님, 잠시 이리로 오실 수 있나요?”가정부 유민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이며 말했다.“큰 사모님께서 저녁 식사 후 산책하러 나가시려다가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워 가정의도 불러왔는데 병원에 가서 검사받아보시라고 하네요...”“알았으니까 일단 진정하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도아린은 황급히 저택으로 향했다.주현정은 꾸준히 한약을 먹고 있지만 자꾸 병이 난다. 이 집에서 제일 한가한 도아린이기에 가정부 유민정은 크고 작은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그녀에게 먼저 연락한다.유민정이 대문 앞에서 도아린을 마중하며 두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그날 도련님이랑 함께 새벽에 집을 나가신 이후로 사모님께서 밤새 잠을 설쳤어요. 그러더니 다음 날 바로 적신호가 와서 입원해야 하는데 사모님께서 기어코 고질병이라면서 집에 돌아가겠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결국

  • 또 한 번의 거절   제15화

    “건후 전화니?”주현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데이트하기로 했어? 나 혼자 할게. 얼른 나가봐...”“괜찮아요. 좀 기다리라고 하죠 뭐.”도아린은 주현정의 얼굴을 깨끗이 닦아드린 후에야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자마자 우렁찬 욕설이 그녀의 귀청을 째지게 했다.“도아린, 너 미쳤어?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왔네 이거 아주!”도아린은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대체 그가 뭣 때문에 이렇게 화내는 건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그녀는 주현정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문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왜 이래요? 건후 씨야말로 미쳤어요?”“짐 정리를 했다는 게 고작 이거야?”배건후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되물었다.“대충 흘려 넘기게?”오늘 아침 배건후가 캐리어를 챙기러 갔는데 안에 글쎄 목 어깨마사지기도 없고 온열 수면안대도 없는 것이다... 물론 그도 아예 이런 물건들을 쓰진 않지만 도아린이 챙겨 넣지 않은 건 엄연한 태도 문제였다.그를 더 화나게 만든 건 도아린이 맞춰준 3세트의 옷 모두 똑같은 스타일에 넥타이 색깔마저 똑같았다.“와서 다시 싸!”배건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지금 못 가요. 보살펴야 할...”“동생이 또 위급한 거야?”배건후가 야유 조로 물었다.“어제 나더러 약 사달라고 애원한 사람이 누구더라? 고작 하룻밤 만에 변한 거야? 왜? 이젠 내가 대신 도정국 씨 상대 안 해줘도 되는 거야? 아니면 뭐 아예 이혼할 생각을 접었어?”도아린은 이미 이혼 준비를 다 마쳤지만 그의 거만하고 야유 섞인 말을 듣고 있자니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그녀는 곧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았다.“미안한데 이번에 핑계로 쓰일 사람은 내 동생이 아니라 건후 씨 어머님이에요. 어젯밤에 갑자기 기절하셨는데 다행히 지금 위험에서 벗어나셨어요.”“...”배건후가 문득 침묵했다.“대표님은 공사다망하시다 보니 가족을 챙길 시간이 없으시네요.”도아린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다음번에 돌발상황이 발생할 땐

  • 또 한 번의 거절   제16화

    “엄마가 너한테 못 해준 게 뭔데? 어떻게 엄마가 이토록 위급할 때 이혼을 언급할 수 있어? 도아린, 제발 인간답게 살면 안 돼?”대체 누가 누구더러 인간답게 살라고 하는 것인지...이혼을 질질 끌면서 내연녀랑 뜨겁게 사랑을 나눌 땐 언제고...도아린은 이젠 그에게 철저하게 실망한지라 말투도 차갑고 강압적으로 변했다.“건후 씨 약점 잡고 있어야 하루빨리 목적에 달성하죠.”배건후는 그녀의 기세등등한 태도에 화가 나 이마에 실핏줄까지 튀어 올랐다. 그녀가 딴 사람에게 장뇌삼을 선물한 건 단지 배건후를 화나게 하고 그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전혀 아니었다.도아린은 하루빨리 그와 이혼하지 못해 안달이다.“도아린, 나 같은 말 반복하는 거 딱 질색인데 이번 한 번만 얘기할게. 이혼하든 말든 내가 알아서 정해. 그 인간들이 한 말 다 믿지는 마. 우리가 부부인 걸 알면 네가 들러붙어도 오히려 멀리 피해 다닐 거야.”도아린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그의 말에 화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나중에 어떻게 지낼지는 내가 알아서 해요. 건후 씨는 사인만 하면 돼요.”배건후의 눈빛이 점점 더 음침해졌다. 그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너랑 장난칠 시간 없어.”그가 확고하게 거절하지 않자 도아린이 말을 이었다.“그럼 출장 다녀와서 다시 얘기해요.”‘어차피 이혼은 정해진 일이니 요즘은 일단 어머님 보살펴드려야지.’그녀가 한창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배건후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꽉 잡고 아무도 없는 비상구로 걸어갔다.이어서 예고도 없이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순간 짙은 담배 향이 입안을 파고들었다. 배건후의 키스는 늘 이토록 터프하고 일방적인 법이다.도아린은 미처 대응할 겨를이 없었다.3년 내내 그는 도아린을 터치한 적도 없을뿐더러 키스한 적은 더더욱 드물다.가끔 몇 번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을 때가 있지만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본 후엔 바로 멈췄었다.하지만 이번엔...도

  • 또 한 번의 거절   제17화

    도아린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 제자리로 돌아갔다.이제 막 업무를 시작하려던 참인데 문나연이 차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사장님이 너 찾으셔. 이 차 들고 들어가 봐.”“그래...”“마침 잘 왔어.”나형욱이 웃으며 도아린을 반겼다.“이분은 송 감독 새 드라마 여주인공 손보미 씨야. 지금 한창 대역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었어.”금방 퇴원한 손보미는 넉넉한 핏의 화이트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다이아로 S자가 박힌 화이트 캡모자를 쓰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찻잔을 받다가 도아린을 보더니 흠칫 동작을 멈췄다.“사장님, 아현 씨가 묵묵히 제 대역하길 원치 않는다고 해도 그렇죠. 최소한 업계에서 자수 실력이 되는 사람으로 뽑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디 한낱 차나 따르는 사람으로 대충 얼버무리려고 해요?”나형욱은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재빨리 도아린의 반응을 살폈다.한편 도아린은 너무나도 차분했다.“송 감독님 작품이 비록 대체역사물이긴 하나 극 중의 의상은 전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했어요. 아현 씨가 복원한 자수 예복을 보았는데 용이 마치 살아 숨 쉬는 것 같았고 고귀함이 흘러넘쳤어요. 자수 수법은 딱 봐도 대가 수준인데 애석하게도 아현 씨가 너무 겸손하게 지내시다 보니 인맥을 아무리 동원해도 여태껏 얼굴 한 번 뵙지 못했죠.”손보미가 거만을 떨며 말을 이었다.“그런 분을 제 대역으로 쓰는 건 확실히 좀 서운할 만한 일이죠. 그 대신 제가 더 많은 소스를 제공해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제 옆에 능력자 친구가 한 명 있거든요.”‘아주 배건후의 이름을 대놓고 말하시지 왜?!’옆에 있던 나형욱도 바로 알아들었다. 손보미는 한때 본인처럼 눈앞의 도아린이 바로 전설 속의 아현이란 걸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는 것을.“보미 씨.”나형욱이 찻잔을 손보미 앞으로 내밀었다.“실은...”“사장님.”이때 도아린이 그의 말을 잘랐다.“비록 대역이긴 하나 여주인공 대역이라 스킬도 있고 교양도 있으며 허영심도 매우 강한 분으로 픽해야 할 것 같군요.”나

  • 또 한 번의 거절   제18화

    우정윤은 자신의 심복을 시켜 옷 수선하라는 빌미로 LH 스튜디오에 찾아가게 했다.한편 스튜디오에 들어서자마자 도아린이 찻잔을 들고 훈계를 듣는 듯 안색이 어두웠다고 전했다.“차를 따른다고?”배건후가 사인펜을 놓아버리자 책상에서 빙그르르 굴렀다.그의 눈빛이 한없이 음침해졌다.“모두가 부러워하는 부잣집 사모님 팔자를 제쳐두고 기어코 스스로 깎아내리면서 딴 사람 시중이나 드는 거야? 내가 자유를 줘도 너무 줬어. 속세의 고달픔이라곤 전혀 모르잖아!”“...”우정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네요. 정작 하는 행동은 누구보다 야박하면서...’애초에 배건후가 출장 갔을 때 도아린은 꼭꼭 전화해서 그곳 날씨는 어떤지, 숙박 환경은 어떤지, 미팅 준비는 잘 되어가는지 꼬치꼬치 캐묻곤 했었다...그때마다 배건후는 짜증 내며 우정윤더러 전화를 받고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대며 업무가 바쁘니 적당히 전화하라고 시켰다. 그 뒤로 도아린은 카톡 하나 보내지 않았다.우정윤은 그런 그녀가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자들은 남편이 집에 안 돌아오고 용돈을 실컷 준다면 밖에서 어떻게 놀아날지 모르니까....도아린이 창고에서 명주실을 고를 때 문나연이 문을 비스듬히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왜?”“밖에 잘생긴 남자분 왔어.”문나연은 문틈 사이로 그녀를 내다보게 했다.“저기 정장 입은 저 남자.”도아린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시선을 옮겼더니 아니나 다를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남자를 발견했다.“처음엔 손보미 팬인 줄 알았는데 손보미가 나올 때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 있지.”문나연은 그녀에게 웃으며 말했다.“너 찾아온 거야. 호감 가면 내가 대신 두 사람 이어줄게. 별로면 내쫓아버리고.”“...”도아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정장 외투 포켓에 반쯤 드러난 명찰을 보았는데 모건이라고 적혀 있었다.배건후가 설마 도아린이 손보미를 해칠까 봐 사람을 보내 뒤에서 몰래 감시하게 한 걸까?“꽤 잘생겼는데 소심한 것 같아.”문나연이 두 눈을 굴

  • 또 한 번의 거절   제19화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도아린이 재빨리 발뒤꿈치를 들고 그를 살펴보았다.“그게 아니라 간만에 팔 운동하니 조금 뻐근하고 그러네요.”남자는 팔목을 움직이며 그녀를 갸웃거렸다.“그나저나 그쪽 꽤 용감하시네요. 어릴 때부터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셨어요?”도아린은 낯선 사람과 대화하길 꺼리지만 이 남자가 워낙 겸손한 태도에 말투도 온화한지라 거부할 수가 없었다.“저도 한때 길에서 소매치기당한 적 있거든요. 그때 가방 안에 수험표가 들어있어서 남동생이 휠체어 탄 채로 쫓아가다가 하마터면 차에 치일 뻔했어요. 그 뒤로 이런 일이 있으면 그냥 못 넘어가겠더라고요.”“동생분도 참 용감하시네요.”육하경이 웃으며 말했다.“보통 이런 일을 겪으면 트라우마로 남겠는데 그쪽은 용케 극복하고 정의 구현하고 있잖아요. 너무 대단해요.”그는 말 한마디로 도아린과 도지현 모두 칭찬했다. 역시 칭찬을 마다할 사람은 없었고 도아린도 내심 흐뭇했다.그녀가 이제 막 말을 이어가려고 할 때 문나연한테 전화가 왔다. 그 자식 한바탕 혼내고 쫓아버렸으니 얼른 돌아오라고 전했다.“저는 그럼 이만 가볼게요.”도아린이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서 스튜디오로 들어갔다.육하경은 그녀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더니 입가에 번진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헬스장으로 돌아가니 성대호가 한창 트레이너의 감시하에 숨을 헐떡이며 앉았다 일어서기를 하고 있었다.“야 이 자식아, 물 사 오라고 했잖아. 진짜 날 목말라서 죽이고 내 자리 차지하려는 속셈이야?!”육하경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윗몸일으키기를 하면서 넌지시 대꾸했다.“네 죽음은 필연코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흔적을 남길 거야.”“...”성대호는 숨이 턱 막혀 시트에 앉으면서 쏘아붙였다.“뭘 그렇게 실실거려?”육하경은 겸손하고 온화한 성격에 가족 관계상 또래들보다 좀 더 진중한 편이다. 그런 그가 밖에 한 번 나갔다 오더니 사 오라는 물은 안 사 오고 줄곧 입꼬리가 올라가 있으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좀 전에 밖에서 선행

  • 또 한 번의 거절   제20화

    배건후가 결혼할 때 성대호만 옆에 있었는데 소문에 의하면 그의 와이프가 예쁘고 성격 좋은 데다가 배건후의 말이라면 절대복종한다고 했다.그랬던 두 사람이 이혼한다고 하니 오지랖 넓은 성대호가 들뜨지 않을 리가 있을까.“바로 이틀 전에도 형수님이 건후 보더니 피해 다니는 거야. 슬슬 헤어질 준비를 하시나 봐.”“닥쳐!”배건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성대호는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어차피 배건후는 지금 해외라 그를 어찌할 수가 없으니까.“누구는 끝까지 거만을 떨다가 차이고 나서도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다니까.”배건후가 속으로 생각했다.‘영상 통화를 걸지 말았어야 했어.’이때 육하경이 그의 등을 톡톡 두드리자 성대호도 곧장 형세 파악이 됐다.“아 참, 엠파이어 빌딩이 얘 거잖아. 얘보고 그 여자 누군지 조사해달라고 하면 되지.”“무슨 여자?”배건후가 담뱃불을 지피며 질문을 건넸다.이에 성대호가 방금 육하경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아주 생동하게 묘사하며 배건후에게 들려주었다. 배건후는 살짝 의외긴 했으나 선뜻 친구를 도와 나섰다.“뭐 좀 특별한 점은 없었어?”성대호가 한마디 덧붙였다.“특별히 예뻤대.”육하경이 웃으며 대꾸했다.“그렇게 식상한 예쁨 말고 용감하고 개성 있는 아름다움이었어.”“...”배건후가 담배를 두어 모금 빨았다.“좀 더 상세하게 말해봐. 키, 헤어스타일, 유니폼 이런 것들 말이야. 그래야 사람 시켜서 조사하지.”“아니다 됐어.”육하경이 문득 고개를 내저었다.“안 그래도 칼 같은 성격이던데 내가 뒷조사하는 거 알면 친구조차 못 할 거야. 운명에 맡기지 뭐.”옆에 있던 성대호가 코웃음을 쳤다.“몇 마디 대화로 성격이 칼 같은 것까지 알게 됐어?”“여자들 보통 소매치기범 마주치면 기껏해야 경찰에 신고할 텐데 그 사람은 선뜻 범인을 쫓아 나섰어. 이거면 충분한 거 아니야?”배건후도 그의 말이 일리가 있어 보였다.“맞아. 너무 적극적이면 소매치기범 잡았던 게 트릭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네

  • 또 한 번의 거절   제21화

    병실에 들어서자 안경을 쓴 채 침대에 기대어 신문을 읽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엄마, 오늘은 훨씬 좋아 보이시네요.”“개나 소나 찾아오지 않으면 더 빨리 나았을 텐데 말이야.”주현정이 신문을 넘기며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배지유는 뻘쭘한 얼굴로 침대 옆에 앉았다.“엄마, 사실 그때 ‘야밤의 대본 리딩’은 오해였어요.”당시 손보미는 배역을 따내기 위해 감독이 흑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밤늦게 방까지 찾아갔다. 모든 건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갔고, 본인을 희생한 대가로 목적을 이루기도 했다.다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복도에 걸어 나오는 순간 마침 집에 묵고 있던 주현정의 눈에 띄게 되었다.결국 주현정은 손보미라면 치를 떨었다.“그럼 이것도 오해겠네?”주현정이 대뜸 신문을 던져 버렸다.기사에는 배건후가 ‘야밤의 미팅’을 진행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을뿐더러 누군가 청호상 시상식 백스테이지에서 찍힌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두 남녀가 서로 껴안은 흑백 실루엣도 얼핏 보였는데 모든 상황이 당사자가 배건후와 손보미라는 사실을 증명했고, 게다가 곧 좋은 소식이 들릴지도 모른다고 했다.배지유는 코를 쓱 만지며 미소를 쥐어 짜냈다.“언론사들이 내용을 조작했겠죠.”“이 사진을 누가 제보했는지 알아?”주현정은 젊었을 때 JS 픽처스의 대표였다. 나중에 딸을 낳고 건강 악화 이슈로 일선에서 물러나 경영권을 인계한 지 얼마 안 되었다.배건후는 출신 자체가 달랐고, 비록 몰래 결혼한 것 때문에 가끔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본인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감히 폭로하지 못했다.언론이 손보미와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즉, 사진을 제공한 사람이 배건후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측근이라는 것이다.이처럼 든든한 존재가 방패막이 되어주니 매체들도 믿는 구석이 있고 대거 홍보했다.사실 주현정은 아들이 도아린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며느리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라 지켜주기로 마음먹었다.“네 큰아버지한테

Pinakabagong kabanata

  • 또 한 번의 거절   제908화

    배건후의 뜨거운 시선이 도아린의 얼굴선을 따라 미끄러지듯 흘렀고 그 뜻밖의 눈빛에 도아린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순간, 그녀의 손끝이 남자의 단단한 가슴에 닿았고 그곳에서 전해진 강한 심장 박동은 마치 전류처럼 그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배건후의 시선은 그녀의 입술에서 멈췄다.거친 숨결이 고요한 밤공기처럼 그녀를 감쌌다.“...키스해도 될까?”예전의 배건후였다면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는 늘 먼저 손을 잡고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가져다 댔던 사람이다.그런 그가, 지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예의 바른 말투가 낯설어 도아린은 순간 말을 잃었다.“...안 돼요.”거절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 배건후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그녀는 그의 익숙한 나무 향기와 담배 냄새에 휩싸였다.그 향기는 그의 존재 자체처럼 깊숙이 그녀 안으로 스며들었다.가슴속에서 거세게 일렁이는 감정의 파도가 터져 나왔다.급히 고개를 돌리는 그녀에게 배건후는 조용히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미안. 나도 모르게...”도아린의 심장은 격하게 뛰었다.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육씨 가문 사업 일부가 한경 그룹과 겹쳐. 기회를 잡아서 인수하는 게 좋겠어.”그 한 마디에 도아린의 가슴 속 소용돌이가 조금씩 가라앉았다.공적인 이야기는 언제나 감정을 뒤로 미루게 했다.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정말 그렇게 할 생각이에요?”“육민재가 회사를 지킬 수 없다면 우리가 뺏어야지. 실력으로.”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육원 그룹은 육하경의 고발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몇몇 프로젝트는 좌초됐고 고위층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며 실체가 하나둘 드러났다.홍보팀이 온 힘을 다해 수습했지만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상업 전쟁은 언제나 무혈이었다.하지만 누군가 무너지면 그 자리를 다른 이가 채웠다.다만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

  • 또 한 번의 거절   제907화

    게다가 도아린을 위해 회사의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그의 결심에 소유정은 더욱 놀랐다.만약 윤명희 부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배건후가 이혼 후 도아린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과 회사를 넘겨줬다고 말했으면, 소유정은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도아린이 책상을 정리한 후에야, 소유정은 자리에 앉았다.“옛말에 개과천선이 있잖아. 그런데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도 있지.”도아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모순되긴 하지만 말이야.”소유정이 턱을 만지며 대답했다.“마음 가는 대로 해.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난 항상 지지할 거야.”역시 가장 친한 친구들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법이다.“진혁 씨랑은 어떻게 됐어?”도아린의 말에 소유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CD 플레이어를 꺼내며 말했다.“내 데모 한번 들어봐.”유진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은 듯한 소유정의 태도에 도아린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그저 묵묵히 응원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소유정이 만든 데모는 도아린의 취향을 완벽하게 저격했다.도아린은 바로 감독에게 연락했고, 감독도 OST를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흔쾌히 약속을 받았다.소유정은 그날 바로 해남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한편, 윤명희는 연성에 도착하자마자 주현정을 찾아갔다.다만, 윤명희는 남편을 데려가지 않았다.최근 진범준이 아내에게 더 집착을 보였기에 그를 데려가면 위로의 의미보다는 애정을 과시하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윤명희와 주현정은 서재로 향했고 거실에는 도아린과 배건후만 남았다.“희망초등학교 일은 내가 오해한 거였어요.”도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나도 당신한테 숨기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그 틈을 파고들게 만든 거지.”배건후는 귤을 하나 집어 들고 껍질을 벗겨 도아린에게 건넸다.도아린이 힐긋 보고 말했다.“위에 흰 실.”배건후는 귀찮아하지 않고 오히려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그녀는 그의 부속품이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에게 말할

  • 또 한 번의 거절   제906화

    도아린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그날 아침,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마친 후, 배건후는 그녀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넸다.명함에는 에이트 맨션 출입을 위한 비밀번호가 적혀 있었다.배건후는 출장이 있어 3일 후에 돌아온다고 했고 도아린은 생각끝에 소유정의 집으로 향했다.혼인 신고 소식에 소유정은 망고 케이크를 주문해 축하해 주었고 두 사람은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다음 날, 소유정은 중요한 녹음 테스트를 놓쳐 그날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가씨.”일북이 거실로 들어서며 말했다.“일남이 돌아왔습니다.”도아린이 세수하러 가던 중, 소유정의 웃음소리가 들렸다.나가 보니, 일남도 단 며칠 만에 햇볕에 타서 까무잡잡한 피부가 되었다.다만 까무잡잡한 피부는 오히려 일남에게 더 강인한 남성미와 야성미를 더해주었다.“미안해요, 참을 수가 없었어요.”소유정은 키득키득 웃으며 안마의자에서 일어났다.그녀는 화장실로 향하다가 도아린을 발견하고 어깨동무하며 말했다.“미안, 저 갑자기 저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하하하!”도아린은 못 말린다는 듯 그녀를 한 번 쳐다보다 일남과 일북을 서재로 불렀다.일남은 몇 개의 봉투를 꺼내서 건넸다.“아린 희망학교의 자료예요. 이건 현재 계획 중인 자료입니다.”일남이 조사한 자료는 배건후가 가진 증거와 일치했다.배건후는 학교에 기부할 때 명예나 이익을 바라고 하지 않았고 학교 관계자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하지만 배건후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그가 기부한 학교는 모두 도아린을 위해 준비한 결혼기념일 선물이었다.학교에 그림 재능을 가진 아이들은 무료로 지도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성과가 나오면 학교는 전폭적으로 지원했다.마지막 학교는 구현성이 기부한 돈으로 세운 것이었으나 아직 위치도 정해지지 않았고 공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첫 번째 학교는 육하경이 도와서 세운 거라, 구현성은 그걸 따라 했을 거예요.”일남이 설명했다.“하지만 배 대표가 현장 조사를 갔다는 사실이나 전문 재단을

  • 또 한 번의 거절   제905화

    배건후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만든 건 마셔도 돼요.”소유정은 깜짝 놀라며 도아린의 팔을 잡고 속삭였다.“너, 건후 씨한테 무슨 짓 한 거야?”도아린은 웃으며 손에 든 밀크티를 반쯤 나눠 그녀에게 건넸다.소유정은 컵을 들고 배건후를 힐끔 보며 도발적인 눈빛을 날렸다.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한 모금 입에 댔다.‘청소 한번, 밥 한 끼 직접 해본 적 없는 재벌가 도련님이 무슨 대단한 밀크티를 만들 수 있겠어. 독만 안 들었으면 다행이지.’그런데 딱 한 모금만으로도 그녀의 눈이 커졌다.소유정은 다시 컵을 들어 꿀꺽꿀꺽 두세 모금 더 마셨다.입에 남는 잔향, 단맛은 과하지 않고 묘하게 쌉쌀한데 부드럽고 따뜻했다.“야, 너도 마셔봐!”소유정이 도아린에게 재촉하며 컵을 흔들었다.도아린은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갸웃했다.“여기... 자몽즙 넣었어요?”배건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눈빛엔 묘하게 따뜻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도아린은 평소 꿀자몽차를 즐겨 마셨던 걸 기억한 배건후가 수십 번의 실험 끝에 완성한 조합이었다.자몽의 향은 살리고 밀크티 특유의 부드러움은 해치지 않는 절묘한 밸런스였다.그 순간 윤명희가 흥미로운 듯 몸을 기울였다.“나도 한 모금만. 궁금해서 미치겠네.”남편 진범준이 말리려 했지만, 그녀는 손을 뿌리쳤다.윤명희는 요즘 아무 생각 없이 전국을 돌아다니는 듯했지만 도아린과 배건후의 관계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일북이 바로 그녀의 정보원이었다.하지만 그래도 직접 보는 게 가장 확실하다고 판단한 그녀는 그들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확인하고 싶어졌다.배건후는 조용히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고 잠시 후 큰 맥주잔에 밀크티가 가득 담겨 돌아왔다.그는 먼저 도아린의 잔을 가득 채워주고 그다음 윤명희에게 한 잔을 따라 건넸다.그 모습을 보며 소유정도 슬쩍 컵을 들었지만 배건후는 밀크티가 담긴 잔을 회전 테이블에 올려놓고 휙 돌렸다.잔은 진수혁의 앞에 멈췄고 그는 능숙하게 맥주잔을 들어 나머지 밀크티를 변슬기의 잔에 나

  • 또 한 번의 거절   제904화

    “소유정?”도아린의 눈이 놀라움과 의문으로 흔들렸다.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유정이 눈앞에 서 있었다.햇볕에 까맣게 탄 피부와 살이 빠져 까마득히 변한 얼굴.도아린은 거의 못 알아볼 뻔했다.소유정은 한때 ‘곡은 뜨지만 사람은 안 뜨는’ 무명 싱어송라이터였다.햇빛에 탄 듯 거칠어진 볼, 그러나 그 눈은 여전히 맑고 마치 고요한 샘물처럼 맑았다.“너 영화 곧 개봉하잖아. 거기에 어울릴 노래 하나 만들었어.”소유정은 도아린 앞에 다가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낙하산으로 들어가겠다는 건 아니야. 그냥 한 번만, 내 무대를 보여줄 기회만 줘.”그녀의 눈빛은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이제 더 이상 방황하는 예술가의 허영도 아닌, 세상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꺾이지 않는 고집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좋아.”도아린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소유정이 더 말하려던 찰나,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키 큰 남자를 보곤 무의식적으로 두 걸음 물러섰다.“제가 들게요.”배건후가 진범준의 손에서 카트를 넘겨받았다.진범준은 도아린을 살짝 살폈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손을 놓았다.“수고 좀 해줘.”“별말씀을요.”배건후는 미리 준비해 둔 7인승 밴에 사람들을 태워 호텔로 향했다.한편, 진수혁은 공항에 나오지 않았다.대신 집이 더 편하겠다며 송 비서와 변슬기를 데리고 집 안을 정리하고 있었다.일을 마친 후, 모두가 호텔 레스토랑에서 다시 만났다.도아린은 변슬기가 눈에 띄게 자신을 피하며 거리를 두는 걸 눈치채고 먼저 그녀를 불렀다.“슬기 씨, 우리랑 같이 식사해요.”“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송 비서님이랑 밖에서 간단히 먹을게요!”변슬기는 다급하게 눈짓을 보내며 송 비서를 향해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고 송 비서도 눈치껏 거들었지만 소용없었다.“송 비서도 같이 앉아요. 오늘은 우리 가족 모임이니까 너무 격식 차릴 필요 없어요.”도아린은 직원에게 수저를 부탁했다.변슬기가 당황한 눈으로 진수혁을 바라보자 그는 조

  • 또 한 번의 거절   제903화

    “말만 그럴싸하게 하지 말고!”주현정은 뜨거운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콧방귀를 뀌듯 말했다.“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아린이가 너한테 다시 기회를 줘야 뭐라도 되는 거지.”반쯤 물을 마시던 그녀는 뭔가 떠오른 듯 눈을 번쩍이며 배건후를 바라봤다.“설마, 아린이가 너 용서한 거야?”“아직 아니에요.”배건후의 대답에 그녀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내가 하는 걸 봐서... 용서할지 말지 정하겠대요.”“난 또… 나가!”주현정은 소파에 있던 쿠션을 집어 던졌고 쿠션은 정확히 그의 어깨에 명중했다.배건후는 묵묵히 쿠션을 주워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아버지 장례는 제가 처리할게요. 남은 소송 문제도 계속 맡아서 진행할 거고요. 엄마는 몸부터 잘 회복하세요. 제 결혼식에 참석하셔야 하니까요.”그때는 그저 혼인신고 하나만 조용히 올렸던 그들이었다.하지만 이번엔 다르다.도아린을 다시 품에 안게 된다면 세상에서 가장 성대한 결혼식을 해주겠노라 그는 다짐하고 있었다.샤워를 마친 배건후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들었다.알림창에 뜬 ‘새로운 친구 추가 수락’ 메시지에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고 곧장 도아린의 프로필 사진을 눌러 들어갔다.같은 시각.도아린은 이불 속에 몸을 말고, 배 위에 핫팩을 얹은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윤명희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아린아, 우리 곧 귀국해! 그리고 깜짝선물도 준비했어.]몸을 옆으로 돌리다가 뜨거운 찜질팩이 배에 닿자 도아린은 놀라며 핸드폰을 내려두었다.다시 폰을 들어 올렸을 땐 배건후와의 채팅창이 열려 있었고 화면엔 ‘상대방이 입력 중...’이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하지만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아무런 메시지도 도착하지 않았다.“...뭐지. 편지라도 쓰는 건가? 이 정도면 500자는 넘었겠네...”도아린은 성질이 나 채팅창을 닫고 다시 윤명희의 메시지창으로 돌아갔다.그녀는 조금 전, 배석준의 사망 소식을 전했고 주현정에게 위로의 말을 해달라며 부탁했다.잠시 후, 윤명희의 영상통화가

  • 또 한 번의 거절   제902화

    도아린이 배건후의 허리를 끌어안는 순간, 그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하지만 그다음 순간, 그의 두 팔이 강하게 그녀를 감쌌다.배건후는 천천히 몸을 숙여 도아린의 어깨와 허리를 깊숙이 감쌌다.조금이라도 더 그녀를 품으려는 듯, 그의 넓은 품으로 그녀를 감쌌지만 결코 억지로 끌어안지 않았다.마치 다시는 잃고 싶지 않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물처럼 그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도아린이 거부하지 않자 배건후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가슴 깊이 각인된 그 익숙한 향기를 허락받은 사람처럼 탐하듯 들이마셨다.수없이 꿈에서 그리던 사람, 밤새 뒤척이며 떠올리던 그 사람이 이제 그의 품 안에 있었다.도아린은 고개를 돌리며 숨을 고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내 재산은 쳐다보지도 마요. 한 푼도 못 주니까.”배건후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턱을 문지르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내가 번 돈도 다 너한테 줄 건데?”도아린은 피식 웃으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눈물을 닦았다.“일단 하는 것 봐서요. 오늘은 어머님 곁에서 좀 지켜드려요.”배건후는 아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돌아서는 순간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블랙리스트에서 나 좀 빼줘.”도아린은 그의 손을 툭 뿌리치고 빠르게 차에 올라탔다.배건후는 멀어져가는 차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차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천천히 몸을 돌렸다.복도로 돌아오는 길, 주현정의 방 앞을 지나던 배건후는 방 안에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세상 사람들은 주현정과 배석준 부부를 부러워했다.부부 금슬도 좋고 자식까지 둘이나 낳아 완벽한 가족처럼 보였지만 배건후가 기억하는 부모의 모습은 달랐다.어머니는 여동생 배지유를 낳고 나서 줄곧 한약을 달고 살았으며 아버지는 처음엔 다정하게 곁을 지켰지만 시간이 갈수록 냉담해졌다.해외 지사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아버지는 말로는 ‘가족과 떨어지기 싫다’고 했지만 정작 서류 작업엔 누구보다 열심이었다.그때부터였다. 그는 가족이 아닌

  • 또 한 번의 거절   제901화

    “네.”배건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배석준의 사망 소식보다도 도아린과 배건후가 함께 왔다는 사실이 주현정에게는 더 큰 위로였다.가정부는 도아린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식탁을 차렸고 세 사람은 조용하고 평화롭게 저녁 식사를 나눴다.식사를 마친 후, 배건후는 문 앞까지 도아린을 배웅했다.짙은 어둠이 내린 밤. 그 속에서 배건후가 입을 열었다.“와줘서... 고마워.”“어머님은 늘 절 따뜻하게 대해주셨잖아요. 당연히 와야죠.”도아린의 발걸음이 멈췄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가 자초한 일이라 해도 김지민의 수법은...”“이미 장 변호사한테 사건을 맡겼어.”배건후의 눈동자가 밤보다도 깊고 어두웠다.그 안에는 복잡한 감정과 지울 수 없는 우울이 고여 있었다.“만약 맹세라는 게 통한다면, 난 기꺼이...”“그런 말 하지 마요!”도아린은 생각할 틈도 없이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날렵한 입술, 차가운 감촉.하지만 이상하게도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온몸이 찌릿했다.도아린의 눈이 크게 흔들렸고 손을 거두기도 전에 배건후가 먼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남자의 손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고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감싸 쥐었다.그의 눈빛은 진지했고 단호했다.“난 진심이야.”도아린은 그 시선을 외면했다.심장이 세차게 뛰었고, 본능적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배건후는 오히려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얹었다.차가운 봄밤의 공기 속에서 그의 심장은 거칠게 뛰고 있었다.“내가 널 처음 본 건, 네가 구겨진 지폐로 육하경에게 빵을 사주던 날이었어.그때부터... 난 육하경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했지.”“건후 씨...”도아린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날 밤, 배건후는 육하경과 권투 연습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차 안에 담배가 떨어져 근처 슈퍼에 들렀고 우연히 유리창 너머로 쓰레기통을 뒤지는 육하경의 모습을 목격했다.육민재는 육하경을 ‘사촌 동생’이라 소개했지만 재벌가에서 초대 손님을 그

  • 또 한 번의 거절   제900화

    연남시 프로젝트의 인수인계 절차가 마무리되자 감독 기관 측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안했다.그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 도로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이미 사라져 있었고 도로 한가운데 남아 있던 핏자국도 청소 차량에 의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배석준을 감시하던 사람이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도아린에게 보고했다.배석준이 죽었고 아내인 김지민이 몇 번이나 실신할 정도로 오열했다고 말이다.그의 말에 의하면 김지민이 의심을 받기는커녕, 경찰이 그녀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고 사고 차량의 운전자는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었다.CCTV를 확인한 결과, 배석준이 스스로 도로로 걸어 들어갔기에 주된 책임은 배석준에게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김지민이 이 마지막 돈벌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녀는 하늘이 무너진 듯 통곡하며 난리를 쳤다.자전거를 탄 할아버지도 보상금을 내기가 두려워서 김지민보다 더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며 병원에 드러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도아린은 배석준와 김지민이 서로 물고 뜯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말이다.퇴근 후, 도아린은 배건후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그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다가왔다.“내가 직접 우린 거야. 한번 마셔봐.”차를 받아 든 도아린은 그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그녀의 표정이 심각한 것을 눈치챈 배건후는 순간 긴장하기 시작했다.배석준이 연성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감출 수 없었다. 그가 내뱉은 모욕적인 말들도 마찬가지였다.배건후도 도아린에게 이 사실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배석준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게 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아린아, 걱정 마. 한경 그룹은 네 거야. 아무도 빼앗을 수 없어.”“아니, 그게 아니라... 아버님이...”도아린은 어떻게 말하면 배건후에게 상처가 덜 될지 고민했다.배석준이 아무리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에게는

Galugarin at basahin ang magagandang nobela
Libreng basahin ang magagandang nobela sa GoodNovel app. I-download ang mga librong gusto mo at basahin kahit saan at anumang oras.
Libreng basahin ang mga aklat sa app
I-scan ang code para mabasa sa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