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가 먼저 도아린에게 짐을 싸달라고 부탁하고 있고 말투도 최근 들어 가장 누그러진 편이다. 이에 도아린은 문득 마음이 씁쓸해졌다.그녀가 아무 말 없자 배건후도 말을 잇지 않았고 두 사람은 휴대폰을 든 채로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요즘 SNS에 돌고 있는 밈이 하나 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만약 당신 남편이 달마다 용돈을 2천만 원씩 주는 대신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수 있나요?]이에 ‘좋아요’가 가장 많이 달린 댓글은 [1초라도 망설이면 그건 돈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였다.이 논리대로라면 배건후보다 더 완벽한 후보는 없다. 달마다 도아린에게 한도 제한 없는 카드를 줄 뿐만 아니라 고급 저택에 좋은 차, 게다가 도우미들까지 고용해서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으니까.어디 그뿐인가,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뭣 하나 빼놓을 게 없는 완벽한 남편감이었다. 두 사람의 신분 차이가 현저하지만 배건후는 도씨 일가에서 원하는 자원은 최대한 만족시켜주고 있다.돈도 몇 푼 못 벌면서 시답잖은 일만 벌이고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과 비하면 배건후는 너무 괜찮은 편이다.도유준은 그가 일편단심이라고 했는데 손보미에게 줄곧 일편단심인 건 사실이다. 그의 베프 성대호는 만났던 여자친구가 산을 이룰 지경이니까.어쩌면 도아린이 좀 더 ‘너그러워’진다면 이 결혼생활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 듯싶다.그녀가 이제 막 한 걸음 물러나려고 하는데 전화기 너머로 대뜸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건후 씨, 나 다 씻었어.”순간 도아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미친!’‘방금 나 스스로한테 가스라이팅한 거야?!’왜 굳이 흠집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완벽한 사람을 찾으려고 고집한 걸까?연성에 널리고 널린 게 훌륭한 남자들인데 말이다.“약속 꼭 지켜요.”말을 마친 도아린이 전화를 끊었다.그 시각 빨간색 람보르기니가 맞은 편에서 질주해 오더니 모건 그룹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도아린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배건후는 슬슬 짜증이 몰려왔고 짙은 얼굴에 싸늘한
배건후를 위해 짐 정리를 하면 그가 한약을 어머님께 드릴 것이다. 이건 매우 공평하고 합리한 딜이다.도아린은 밤새 운전하여 에이트 맨션으로 돌아왔다. 이제 막 단지 입구에 들어서려는데 배씨 저택에서 전화가 걸려왔다.다만 그녀가 길옆에 차를 세우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이에 도아린은 잘못 건 줄 알고 계속 운전하여 맨션으로 돌아갔다.배건후가 출장 갈 때마다 그녀는 안팎으로 옷을 3세트씩 준비한다.짙은 색 외투에 연한 색 셔츠, 깔 맞춤한 넥타이와 브로치, 시계 그리고 커프스까지...도아린은 배건후의 더 매력적인 모습을 사람들 앞에 보여주려고 한다. 어떤 단추가 그의 신분에 더 잘 어울리는지 연구하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주객전도를 금지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많은 자료를 수집해 보곤 한다.오늘 그녀는 이전의 열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마치 AI처럼 딱딱하게 다 고른 3세트의 옷을 캐리어에 넣었다.하지만 루비 목걸이를 금고에 넣을 때 액세서리가 몇 개 없어진 걸 발견했다. 이제 막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는데 휴대폰이 또다시 울려댔다.이번에도 배씨 저택에서 걸려온 전화였다.“작은 사모님, 잠시 이리로 오실 수 있나요?”가정부 유민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이며 말했다.“큰 사모님께서 저녁 식사 후 산책하러 나가시려다가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워 가정의도 불러왔는데 병원에 가서 검사받아보시라고 하네요...”“알았으니까 일단 진정하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도아린은 황급히 저택으로 향했다.주현정은 꾸준히 한약을 먹고 있지만 자꾸 병이 난다. 이 집에서 제일 한가한 도아린이기에 가정부 유민정은 크고 작은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그녀에게 먼저 연락한다.유민정이 대문 앞에서 도아린을 마중하며 두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그날 도련님이랑 함께 새벽에 집을 나가신 이후로 사모님께서 밤새 잠을 설쳤어요. 그러더니 다음 날 바로 적신호가 와서 입원해야 하는데 사모님께서 기어코 고질병이라면서 집에 돌아가겠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결국
“건후 전화니?”주현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데이트하기로 했어? 나 혼자 할게. 얼른 나가봐...”“괜찮아요. 좀 기다리라고 하죠 뭐.”도아린은 주현정의 얼굴을 깨끗이 닦아드린 후에야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자마자 우렁찬 욕설이 그녀의 귀청을 째지게 했다.“도아린, 너 미쳤어?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왔네 이거 아주!”도아린은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대체 그가 뭣 때문에 이렇게 화내는 건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그녀는 주현정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문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왜 이래요? 건후 씨야말로 미쳤어요?”“짐 정리를 했다는 게 고작 이거야?”배건후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되물었다.“대충 흘려 넘기게?”오늘 아침 배건후가 캐리어를 챙기러 갔는데 안에 글쎄 목 어깨마사지기도 없고 온열 수면안대도 없는 것이다... 물론 그도 아예 이런 물건들을 쓰진 않지만 도아린이 챙겨 넣지 않은 건 엄연한 태도 문제였다.그를 더 화나게 만든 건 도아린이 맞춰준 3세트의 옷 모두 똑같은 스타일에 넥타이 색깔마저 똑같았다.“와서 다시 싸!”배건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지금 못 가요. 보살펴야 할...”“동생이 또 위급한 거야?”배건후가 야유 조로 물었다.“어제 나더러 약 사달라고 애원한 사람이 누구더라? 고작 하룻밤 만에 변한 거야? 왜? 이젠 내가 대신 도정국 씨 상대 안 해줘도 되는 거야? 아니면 뭐 아예 이혼할 생각을 접었어?”도아린은 이미 이혼 준비를 다 마쳤지만 그의 거만하고 야유 섞인 말을 듣고 있자니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그녀는 곧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았다.“미안한데 이번에 핑계로 쓰일 사람은 내 동생이 아니라 건후 씨 어머님이에요. 어젯밤에 갑자기 기절하셨는데 다행히 지금 위험에서 벗어나셨어요.”“...”배건후가 문득 침묵했다.“대표님은 공사다망하시다 보니 가족을 챙길 시간이 없으시네요.”도아린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다음번에 돌발상황이 발생할 땐
“엄마가 너한테 못 해준 게 뭔데? 어떻게 엄마가 이토록 위급할 때 이혼을 언급할 수 있어? 도아린, 제발 인간답게 살면 안 돼?”대체 누가 누구더러 인간답게 살라고 하는 것인지...이혼을 질질 끌면서 내연녀랑 뜨겁게 사랑을 나눌 땐 언제고...도아린은 이젠 그에게 철저하게 실망한지라 말투도 차갑고 강압적으로 변했다.“건후 씨 약점 잡고 있어야 하루빨리 목적에 달성하죠.”배건후는 그녀의 기세등등한 태도에 화가 나 이마에 실핏줄까지 튀어 올랐다. 그녀가 딴 사람에게 장뇌삼을 선물한 건 단지 배건후를 화나게 하고 그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전혀 아니었다.도아린은 하루빨리 그와 이혼하지 못해 안달이다.“도아린, 나 같은 말 반복하는 거 딱 질색인데 이번 한 번만 얘기할게. 이혼하든 말든 내가 알아서 정해. 그 인간들이 한 말 다 믿지는 마. 우리가 부부인 걸 알면 네가 들러붙어도 오히려 멀리 피해 다닐 거야.”도아린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그의 말에 화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나중에 어떻게 지낼지는 내가 알아서 해요. 건후 씨는 사인만 하면 돼요.”배건후의 눈빛이 점점 더 음침해졌다. 그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너랑 장난칠 시간 없어.”그가 확고하게 거절하지 않자 도아린이 말을 이었다.“그럼 출장 다녀와서 다시 얘기해요.”‘어차피 이혼은 정해진 일이니 요즘은 일단 어머님 보살펴드려야지.’그녀가 한창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배건후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꽉 잡고 아무도 없는 비상구로 걸어갔다.이어서 예고도 없이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순간 짙은 담배 향이 입안을 파고들었다. 배건후의 키스는 늘 이토록 터프하고 일방적인 법이다.도아린은 미처 대응할 겨를이 없었다.3년 내내 그는 도아린을 터치한 적도 없을뿐더러 키스한 적은 더더욱 드물다.가끔 몇 번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을 때가 있지만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본 후엔 바로 멈췄었다.하지만 이번엔...도
도아린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 제자리로 돌아갔다.이제 막 업무를 시작하려던 참인데 문나연이 차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사장님이 너 찾으셔. 이 차 들고 들어가 봐.”“그래...”“마침 잘 왔어.”나형욱이 웃으며 도아린을 반겼다.“이분은 송 감독 새 드라마 여주인공 손보미 씨야. 지금 한창 대역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었어.”금방 퇴원한 손보미는 넉넉한 핏의 화이트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다이아로 S자가 박힌 화이트 캡모자를 쓰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찻잔을 받다가 도아린을 보더니 흠칫 동작을 멈췄다.“사장님, 아현 씨가 묵묵히 제 대역하길 원치 않는다고 해도 그렇죠. 최소한 업계에서 자수 실력이 되는 사람으로 뽑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디 한낱 차나 따르는 사람으로 대충 얼버무리려고 해요?”나형욱은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재빨리 도아린의 반응을 살폈다.한편 도아린은 너무나도 차분했다.“송 감독님 작품이 비록 대체역사물이긴 하나 극 중의 의상은 전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했어요. 아현 씨가 복원한 자수 예복을 보았는데 용이 마치 살아 숨 쉬는 것 같았고 고귀함이 흘러넘쳤어요. 자수 수법은 딱 봐도 대가 수준인데 애석하게도 아현 씨가 너무 겸손하게 지내시다 보니 인맥을 아무리 동원해도 여태껏 얼굴 한 번 뵙지 못했죠.”손보미가 거만을 떨며 말을 이었다.“그런 분을 제 대역으로 쓰는 건 확실히 좀 서운할 만한 일이죠. 그 대신 제가 더 많은 소스를 제공해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제 옆에 능력자 친구가 한 명 있거든요.”‘아주 배건후의 이름을 대놓고 말하시지 왜?!’옆에 있던 나형욱도 바로 알아들었다. 손보미는 한때 본인처럼 눈앞의 도아린이 바로 전설 속의 아현이란 걸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는 것을.“보미 씨.”나형욱이 찻잔을 손보미 앞으로 내밀었다.“실은...”“사장님.”이때 도아린이 그의 말을 잘랐다.“비록 대역이긴 하나 여주인공 대역이라 스킬도 있고 교양도 있으며 허영심도 매우 강한 분으로 픽해야 할 것 같군요.”나
우정윤은 자신의 심복을 시켜 옷 수선하라는 빌미로 LH 스튜디오에 찾아가게 했다.한편 스튜디오에 들어서자마자 도아린이 찻잔을 들고 훈계를 듣는 듯 안색이 어두웠다고 전했다.“차를 따른다고?”배건후가 사인펜을 놓아버리자 책상에서 빙그르르 굴렀다.그의 눈빛이 한없이 음침해졌다.“모두가 부러워하는 부잣집 사모님 팔자를 제쳐두고 기어코 스스로 깎아내리면서 딴 사람 시중이나 드는 거야? 내가 자유를 줘도 너무 줬어. 속세의 고달픔이라곤 전혀 모르잖아!”“...”우정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네요. 정작 하는 행동은 누구보다 야박하면서...’애초에 배건후가 출장 갔을 때 도아린은 꼭꼭 전화해서 그곳 날씨는 어떤지, 숙박 환경은 어떤지, 미팅 준비는 잘 되어가는지 꼬치꼬치 캐묻곤 했었다...그때마다 배건후는 짜증 내며 우정윤더러 전화를 받고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대며 업무가 바쁘니 적당히 전화하라고 시켰다. 그 뒤로 도아린은 카톡 하나 보내지 않았다.우정윤은 그런 그녀가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자들은 남편이 집에 안 돌아오고 용돈을 실컷 준다면 밖에서 어떻게 놀아날지 모르니까....도아린이 창고에서 명주실을 고를 때 문나연이 문을 비스듬히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왜?”“밖에 잘생긴 남자분 왔어.”문나연은 문틈 사이로 그녀를 내다보게 했다.“저기 정장 입은 저 남자.”도아린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시선을 옮겼더니 아니나 다를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남자를 발견했다.“처음엔 손보미 팬인 줄 알았는데 손보미가 나올 때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 있지.”문나연은 그녀에게 웃으며 말했다.“너 찾아온 거야. 호감 가면 내가 대신 두 사람 이어줄게. 별로면 내쫓아버리고.”“...”도아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정장 외투 포켓에 반쯤 드러난 명찰을 보았는데 모건이라고 적혀 있었다.배건후가 설마 도아린이 손보미를 해칠까 봐 사람을 보내 뒤에서 몰래 감시하게 한 걸까?“꽤 잘생겼는데 소심한 것 같아.”문나연이 두 눈을 굴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도아린이 재빨리 발뒤꿈치를 들고 그를 살펴보았다.“그게 아니라 간만에 팔 운동하니 조금 뻐근하고 그러네요.”남자는 팔목을 움직이며 그녀를 갸웃거렸다.“그나저나 그쪽 꽤 용감하시네요. 어릴 때부터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셨어요?”도아린은 낯선 사람과 대화하길 꺼리지만 이 남자가 워낙 겸손한 태도에 말투도 온화한지라 거부할 수가 없었다.“저도 한때 길에서 소매치기당한 적 있거든요. 그때 가방 안에 수험표가 들어있어서 남동생이 휠체어 탄 채로 쫓아가다가 하마터면 차에 치일 뻔했어요. 그 뒤로 이런 일이 있으면 그냥 못 넘어가겠더라고요.”“동생분도 참 용감하시네요.”육하경이 웃으며 말했다.“보통 이런 일을 겪으면 트라우마로 남겠는데 그쪽은 용케 극복하고 정의 구현하고 있잖아요. 너무 대단해요.”그는 말 한마디로 도아린과 도지현 모두 칭찬했다. 역시 칭찬을 마다할 사람은 없었고 도아린도 내심 흐뭇했다.그녀가 이제 막 말을 이어가려고 할 때 문나연한테 전화가 왔다. 그 자식 한바탕 혼내고 쫓아버렸으니 얼른 돌아오라고 전했다.“저는 그럼 이만 가볼게요.”도아린이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서 스튜디오로 들어갔다.육하경은 그녀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더니 입가에 번진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헬스장으로 돌아가니 성대호가 한창 트레이너의 감시하에 숨을 헐떡이며 앉았다 일어서기를 하고 있었다.“야 이 자식아, 물 사 오라고 했잖아. 진짜 날 목말라서 죽이고 내 자리 차지하려는 속셈이야?!”육하경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윗몸일으키기를 하면서 넌지시 대꾸했다.“네 죽음은 필연코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흔적을 남길 거야.”“...”성대호는 숨이 턱 막혀 시트에 앉으면서 쏘아붙였다.“뭘 그렇게 실실거려?”육하경은 겸손하고 온화한 성격에 가족 관계상 또래들보다 좀 더 진중한 편이다. 그런 그가 밖에 한 번 나갔다 오더니 사 오라는 물은 안 사 오고 줄곧 입꼬리가 올라가 있으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좀 전에 밖에서 선행
배건후가 결혼할 때 성대호만 옆에 있었는데 소문에 의하면 그의 와이프가 예쁘고 성격 좋은 데다가 배건후의 말이라면 절대복종한다고 했다.그랬던 두 사람이 이혼한다고 하니 오지랖 넓은 성대호가 들뜨지 않을 리가 있을까.“바로 이틀 전에도 형수님이 건후 보더니 피해 다니는 거야. 슬슬 헤어질 준비를 하시나 봐.”“닥쳐!”배건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성대호는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어차피 배건후는 지금 해외라 그를 어찌할 수가 없으니까.“누구는 끝까지 거만을 떨다가 차이고 나서도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다니까.”배건후가 속으로 생각했다.‘영상 통화를 걸지 말았어야 했어.’이때 육하경이 그의 등을 톡톡 두드리자 성대호도 곧장 형세 파악이 됐다.“아 참, 엠파이어 빌딩이 얘 거잖아. 얘보고 그 여자 누군지 조사해달라고 하면 되지.”“무슨 여자?”배건후가 담뱃불을 지피며 질문을 건넸다.이에 성대호가 방금 육하경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아주 생동하게 묘사하며 배건후에게 들려주었다. 배건후는 살짝 의외긴 했으나 선뜻 친구를 도와 나섰다.“뭐 좀 특별한 점은 없었어?”성대호가 한마디 덧붙였다.“특별히 예뻤대.”육하경이 웃으며 대꾸했다.“그렇게 식상한 예쁨 말고 용감하고 개성 있는 아름다움이었어.”“...”배건후가 담배를 두어 모금 빨았다.“좀 더 상세하게 말해봐. 키, 헤어스타일, 유니폼 이런 것들 말이야. 그래야 사람 시켜서 조사하지.”“아니다 됐어.”육하경이 문득 고개를 내저었다.“안 그래도 칼 같은 성격이던데 내가 뒷조사하는 거 알면 친구조차 못 할 거야. 운명에 맡기지 뭐.”옆에 있던 성대호가 코웃음을 쳤다.“몇 마디 대화로 성격이 칼 같은 것까지 알게 됐어?”“여자들 보통 소매치기범 마주치면 기껏해야 경찰에 신고할 텐데 그 사람은 선뜻 범인을 쫓아 나섰어. 이거면 충분한 거 아니야?”배건후도 그의 말이 일리가 있어 보였다.“맞아. 너무 적극적이면 소매치기범 잡았던 게 트릭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네
“일단 이 사건부터 해결하죠.”그를 보는 경찰관들의 눈빛이 돌변했다. 의심이 들었지만 아주 은밀하게 처리하였으니 절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나름 꽤 침착한 모습이었다. 인쇄된 종이를 들고 위의 내용을 확인하던 그의 얼굴에 점점 공포가 가득 드리웠다. “이건 말도 안 돼...”종이를 움켜쥔 손이 떨리기 시작했고 공포가 밀려와 온몸이 저렸고 간신히 침을 꿀꺽 삼켰다.“이건 위조야. 조작된 게 틀림없다고.”“핸드폰은 기술팀에 감정의뢰를 맡길 겁니다. 채팅 내용 및 통화 시간을 포함하여 모두 다 확인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요.”경찰관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가짜가 진짜로 될 수도 없지만 진짜가 가짜로 될 수도 없습니다.”안준휘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분명 채팅 기록을 다 지웠는데. 왜 손보미와의 채팅 내용이 아직도 핸드폰에 남아있단 말인가?“그럴 리가 없어요.”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빼앗으려 했지만 핸드폰은 이미 기술팀으로 보내졌다. 손보미와의 대화 내용이 궁금했던 윤명희는 책상 위에 있던 종이를 집어 들었다. 보면 볼수록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도아린이 아니었다면 당신 딸이 도유준에게 그런 모욕을 당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 모든 건 도아린의 계획이에요. 안민아가 자신보다 더 잘난 것이 못마땅하여 일부러 안민아를 망친 거라고요. 그런데 아직도 도아린이 좋은 사람으로 보여요?][도아린 그 계집애를 강씨 가문으로 데려오기만 한다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망신을 당하게 할 거예요. 강씨 가문에게 빌붙을 생각인 것 같은데 어림도 없지. 혈연관계가 없는 남동생과 관계를 가진다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손가락질하겠어요.][도아린만 제거하면 우리 안씨 가문에게 다리를 놓아줄 거라고 했지? 약속 꼭 지켜.]“안준휘, 이 망할 인간.”윤명희는 어금니를 깨물며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페이지마다 손보미가 도아린을 비방하고 모욕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힘이 담기조차 힘
도아린은 피식 웃었다.“만약 있다면요? 그동안 진씨 가문에서 가져간 돈을 모두 돌려주겠다고 약속해요. 이제부터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고도 약속해요.”병원비?아내의 병원비를 자신이 부담해야지 남한테 떠맡기는 게 무슨 경우인가?진옥경의 병원비뿐만 아니라 진씨 가문의 사람들을 해친 대가도 반드시 치르게 할 것이다.입술을 덜덜 떨던 그가 독기가 가득 찬 눈을 들고 입을 열었다.“약속하지.사적으로 합의가 된다면 경찰들도 굳이 나설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증인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내 안준휘는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게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털털하게 의자에 앉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도아린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 믿는 구석이 있는 듯 당당한 그의 모습에 윤명희는 내심 걱정되어 도아린의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 그 모습에 도아린은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잠들기 전, 그녀는 서대은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고 날이 밝으면 안준휘를 찾아가 결판을 낼 생각이었다.그러나 안준휘가 지금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으니 그녀 또한 봐줄 생각이 없다. 경찰은 통화 기록과 채팅 기록을 확인해 보았지만 손보미와 관련된 기록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동료에게 넘겼고 동료 경찰관이 다시 한번 조사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다가 도아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핸드폰에는 손보미 씨와 관련된 기록이 없습니다.”안준휘는 로또라도 당첨된 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 “교통사고는 합의를 한다고 약속했지만 네가 날 모욕한 일은 끝까지 추궁할 거야.”도아린은 침착하고 차분한 얼굴로 독기가 가득 찬 눈빛을 보였다. “삭제한 핸드폰 기록도 복구가 될 수 있다는 거 모르고 있나 봐요?”안준휘 뿐만 아니라 두 경찰관들도 모르고 있었다. 혐의를 피하기 위해 도아린은 핸드폰을 건드리지 않고 경찰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두 경찰은 깜짝 놀란 눈치였다. 이 프로그
도아린은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났다. 아무리 진옥경의 병세가 심각하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한밤중에 병원에 달려갈 일은 없을 것이다. 병원에는 진옥경의 남편인 안준휘가 있으니까...옷을 입고 거실로 내려오니 그들이 병실을 나선 뒤 안준휘도 병원을 떠났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병원 측에서는 환자의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자 병원비를 지불한 진경수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경찰서는 엄마랑 같이 가.”윤명희는 가방을 챙기고 도아린의 손을 잡았다.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윤명희가 말을 이어갔다.“안준휘가 경찰서에 가서 난리를 피운 모양이야. 사고 난 차가...”말끝을 흐리며 진경수를 쳐다보는데 늘 장난기 가득했던 그의 얼굴도 약간 심각해 보였다. “손보미 차예요?”담담하게 묻는 도아린을 향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준휘는 가해자가 도아린과 원한이 있는 사람이라면서 가해자의 원래 목적은 도아린이었고 진옥경은 그저 재수 없게 연루되었을 뿐이라고 이 사건은 반드시 끝까지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잠시 후, 경찰서로 달려온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안준휘가 소란을 피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왜 두 사람 사이의 원한 때문에 내 아내가 이런 화를 입어야 하는 겁니까?”“진정하시죠. 당신이 말한 게 사실인지는 저희도 확인해 봐야 합니다.”“인터넷에 지금 난리인데 아직도 모르고 있어요? 배건후가 이혼한 후에 손보미와 약혼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도아린과 다시 재결합을 원하고 있으니 손보미로서는 당연히 달갑지가 않은 거죠. 손보미가 복수하고 싶은 사람은 도아린이라고요. 당신들이 어떻게 조사를 하든 간에 내 아내의 병원비는 반드시 누군가가 책임져야 할 겁니다.”“손보미가 치려고 했던 사람이 저인 게 확실해요?”이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깔끔한 재킷에 검은색 긴 바지를 입고 있는 그녀는 훤칠하고 날씬해 보였다. 그녀의 눈빛에 압박감
“동생한테 왜 이렇게 거칠게 굴어?”“대호 오빠, 우리 오빠가 날 자수하러 끌고 갈 거래. 안 가. 내 잘못이 아니라고.”“쉿.”성대호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그녀를 토닥이고는 그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사람을 친 차는 빨간색 람보르기니야. 그 차는 손보미 씨 차 아니야? 네가 아무리 손보미 씨의 편을 든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지유한테 죄를 뒤집어씌울 생각을 해?”배지유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동아줄이라도 잡은 것처럼 성대호의 허리를 꼭 감싸안았다.“그러니까요. 손보미를 찾아가요.”배건후의 눈빛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배지유가 사람을 쳤다고 알린 것도 성대호였고 이제 와서 차 주인이 손보미라고 하는 것도 성대호였다. 만약 미리 조사를 하지 않았다면 정말 성대호에게 말려들었을 것이다.“너도 알다시피 차량을 빌린 사람이 연대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운전자는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아니. 아니지.”성대호는 고개를 저으며 하찮은 표정을 지었다.“현장 CCTV 확인해 봤어? 운전자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야? 배건후, 난 늘 네가 똑똑하고 대단한 놈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혼하고 나서부터는 왜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 같지? 그저 만만한 게 지유니까 지유만 괴롭히는 거야?”배건후는 무뚝뚝한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이간질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신과 여동생의 갈등을 증폭시켜 도아린과 화해할 수 없는 문제를 만들어 싶어 하는 것이었다. “누구의 잘못이든 일단 경찰서는 다녀와야 해.”배건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그런데 이때, 눈빛이 바뀌던 성대호가 갑자기 배지유에게 손을 떼고는 핸드폰을 낚아채려고 하였다. 그 바람에 배지유는 비틀거리다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한걸음 뒤로 물러난 배건후는 몸을 돌려 성대호의 손길을 피하고는 그녀의 팔을 잡아 들어 올려 차 문에 기대게 하였다. 그 순간, 성대호가 갑자기 그를 향해 손을 뻗었고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팔꿈치로 성대호를 공
무뢰한 인간.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던 진경수는 안준휘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단 교통사고부터 처리하시고 경찰서로 가서 사기 사건도 처리하시죠. 깜짝 놀랄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뭐?”벌컥 화를 내는 사위의 모습에 차화영은 엉겁결에 몸을 피하다가 문에 팔꿈치를 부딪쳤고 너무 아파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가까스로 떨지 않던 그녀의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어미야. 내 손이...”윤명희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부딪힌 곳을 주물러주고는 그녀를 부축하여 먼저 병실을 나섰다. 진경수도 도아린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같은 시각, 발걸음을 옮기던 진범준은 복잡한 눈빛으로 안준휘를 빤히 쳐다보았다. 집에 돌아온 뒤, 진범준은 아내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어깨에서 전해진 따뜻한 기운에 윤명희는 손을 뻗어 남편을 감싸안았다. 오랜 시간 부부로 살았으니 말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남편이 여동생에게 깊은 상처를 받은 모양이다. ...한편, 배지유는 차를 성대호에게 수리를 맡긴 채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배석준이 김지민에게 아파트를 마련해준 것을 알게 된 이후, 그녀는 퇴원하고 나서부터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빠가 사는 곳에서 함께 살 생각이었고 아무도 그녀를 쫓아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앉아 있는 배건후를 보고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피했다.그러나 생각해 보니 오빠는 교통사고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으니 겁부터 먹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심호흡하던 그녀는 떨리는 손을 애써 통제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오빠, 아빠 보러 왔어요? 왜 여기 있어요? 같이 올라가요.”배건후는 소파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깊은 눈동자를 들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속마음을 들킨 줄 안 그녀는 등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고 얼굴이 화끈거렸다.“조금 덥네요.”“다리를 다쳤는데도 운전을 하는 거야?”“왼쪽 다리를 다친 것뿐이에요. 그리고 자동 기어는 왼쪽 다
“뭐 하는 겁니까?”진경수가 안준휘의 손목을 잡고 힘껏 뿌리쳤다.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하는 안준휘는 몇 걸음 비틀거리다가 겨우 자리를 잡았다. 그는 두 눈이 새빨갛게 변한 채 진씨 가문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위선 떨지 마. 옥경이가 잘못되면 당신들 용서 안 해.”“안 서방. 옥경이는 내 딸이야. 딸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부모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울음은 그친 차화영이 눈을 붉히며 따져 물었다.“쓸모가 있을 때만 딸인 겁니까? 정말 딸로 생각한다면 죽는 걸 그냥 지켜보지만은 않았겠죠.”안준휘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소매를 걷어붙였다. “난... 그게...”억울한 마음이 들었던 차화영은 윤명희를 쳐다보았다. 윤명희가 자신을 모른 척하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아들을 쳐다보았고 아들도 그녀를 무시했다.“내가 왜 옥경이를 도와주지 않았나? 옥경이 때문에 난 범준이네와 사이가 틀어질 뻔했어.”“그래요. 장모님한테는 아들밖에 없잖아요.”“안 서방,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범준이가 사준 해남의 집도 자네들이 원하자 난 두말없이 넘겨주었네. 돈이 모자라다고 해서 난 아들한테 거짓말까지 하며 돈을 구해줬는데. 도대체 뭐가 그리 불만인 건가?”차화영은 그동안 비밀에 부쳤던 일들을 다 털어놓았다. 아들한테서 돈을 뜯어내어 딸한테 보태준 사실들을 다 말하자 안준휘는 어두운 얼굴을 한 채 부인도 인정도 하지 않았다. 그의 그런 태도를 보니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 차화영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분풀이를 하려면 옥경이를 치고 달아난 그 사람한테 가서 해. 우리한테 이러지 말고. 옥경이가 이 지경이 되어 병원에 누워있는데 자네는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연락은 왜 안 되는데? 자네가 이 나라 대통령보다 더 바쁜 사람인가?”사나운 그의 눈빛에 놀란 차화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무의식적으로 윤명희에게 기대었다. “사고를 낸 사람은 제가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들도 책
“할 말이 있어.”어디론가 전화를 건 성대호는 담배를 한 모금 피우고 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전화기 맞은편, 그의 목소리를 눈치챈 배건후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이젠 안 피해 다녀?”“응, 숨지 않으려고.”성대호는 고개를 들고 웃으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구경 좀 하려고 돌아온 거야. 모두가 부러워하는 연성의 배씨 가문. 너희 아버지는 병들고 네 동생은 불구가 되고 넌 이혼까지 하고... 어떤 기분이냐?”남의 속을 긁으러 온 모양이군.배건후는 기분이 역겨웠다.미간을 찌푸리던 그가 의자에 기대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배씨 가문에서 아린이한테 잘못한 거야. 난 최선을 다해 만회할 생각이고.”성대호는 웃음이 터진 듯 깔깔대고 웃었다.“그전에는 네가 그렇게 말하면 믿었겠지만 지금은...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 시간 전이라면 너한테 기회가 있을 수도 있었겠지.”“무슨 뜻이야?”배건후의 목소리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가로수길 사거리에서 지유가 차를 몰고 가다가 도아린의 고모를 치고 도망쳤어. 전에도 지유를 감옥에 보내지 않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써서 도아린한테 합의서에 사인하도록 강요했었잖아. 이번에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닐 거야.”그 순간, 도아린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성대호는 전화를 끊고 돌아서서 구경꾼들 사이로 빠져나갔다. 배건후, 넌 대단한 인간이잖아. 도아린을 되찾으려는 거 아니야? 어디 한번 두고 봐. 아내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고 어떻게 만회할 수 있는지...이 세상에서 깨진 거울이 다시 붙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깨졌으면 깨진 거지 원래대로 복구가 되겠어?난 배지유한테 농락당해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데 배건후 너만 잘되라는 법 없잖아. 한편, 진옥경의 상황은 매우 안 좋았고 수술 동의서에 가족의 사인이 필요했지만 안준휘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잠시 후, 윤명희가 차화영을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와 수술 동의서에 사인했다. 수술하는 동안 병원 측에 병세가 위급하다는 통보를 두 번이나 받게 되었다
차 앞까지 쫓아온 진옥경은 진범준 쪽의 문고리를 잡고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정말 안 도와줄 거야? 오빠가 모른 척하면 이 자리에서 당장 죽어버릴 거야.”그가 차창을 내리고는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진옥경, 우리 남매 사이는 네 손으로 망친 거야. 네가 날 상대로 이런 짓까지 벌이지 않았다면 여기까지는 오지 않았겠지.”“그래서 정말 안 도와줄 거야?”...진범준은 아무 말도 없이 주먹을 불끈 쥐었고 옆에서 보고 있던 진경수는 아버지가 또 마음이 약해질까 봐 걱정되어 단칼에 거절하려고 하였다.그런데 이때, 진범준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이번에는 나도 방법이 없어.”“그래? 정말 나보고 죽으란 소리네? 오빠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진옥경은 고개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전봇대에 부딪히면 큰 상처를 입기는커녕 머리만 아플 것이다. 진범준이 죄책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상처를 입어야 차화영이 아들한테 압력을 가하지 않겠는가?아무리 둘러봐도 근처에 경상을 입을 만한 것이 없었다. 이때, 엔진 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이내 결심을 내렸다. 진옥경이 뒤돌아서자 진경수는 차에 시동을 걸었고 막 도로에 들어서자마자 진옥경이 사거리로 돌진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빨간 람보르기니 한 대가 빠르게 달려오는데 그녀가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펑!람보르기니에 부딪힌 진옥경은 높이 날아올라 포물선을 그리며 차량 앞부분에 떨어지더니 차량 지붕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차를 운전하고 있던 자는 아마 누군가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들 줄 몰랐던 것 같았다.브레이크를 밟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고 사람을 치고도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도로를 질주했다. 진경수는 멀지 않은 곳에 급히 차를 세우고는 지나가는 차량이 진옥경에게 2차 피해를 줄까 봐 바로 119에 신고했다. 한편, 도아린은 빨간 람보르기니가 가는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번호판은 잘 보이지가 않았다.그러나 왠지 낯익은 숫자와 차량 모델, 우연의 일치일까?그 차는 바로 손보미의 차량
“오빠.”어두운 진범준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는 다리에 힘에 빠져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오빠, 그런 게 아니야. 내 말 좀 들어봐...”“진옥경, 정말 너한테 실망이야.”진옥경?오빠가 나한테 진옥경이라고 한 거야? 왜 이렇게 서먹하게 불러?설마 나랑 연을 끊으려는 걸까?안돼, 절대 그럴 수는 없어.진범준이 그녀한테 힘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안씨 가문에서 그녀가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오빠.”그를 향해 팔을 뻗는데 진범준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역겨운 표정을 지었다.“방금 그 여자, 아빠한테 꼬리치라고 고모가 시킨 거죠. 아빠가 다른 여자랑 바람이 나게 하려고요. 내가 직접 봤는데 그래도 변명할 거예요?”도아린은 차가운 눈빛으로 진옥경을 쳐다보았다. “어른이 말하는데 네가 왜 끼어들어?”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진옥경은 모든 것을 도아린의 탓으로 돌렸다. 도아린이 도유준을 불러내지 않았다면 경찰들이 딸과 사위를 한꺼번에 잡아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진범준의 약점을 잡아 도움을 강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 모든 건 도아린의 탓이었다. “오빠, 일단 들어와. 내가 다 설명할게.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민아한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어. 나도 마찬가지고...”진범준은 그녀의 손길을 뿌리쳤고 방에 들어가는 것도 거절했다.“내 눈으로 직접 봤고 내 귀로 직접 들었어. 민아와 도유준이 내 딸을 노리고 있다는걸. 그리고 어떻게 감히 날 상대로 그런 짓을 꾸며?”진범준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처음 본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일이 이미 이 지경까지 이른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오빠, 민아가 잡혀갔어. 오빠가 대신 돈 안 갚아주면 우리 민아 정말 감옥에 갈지도 몰라. 민아는 나한테 하나뿐인 딸이야. 제발 부탁이야 오빠, 이번 한 번만 나 좀 도와줘.”말을 하면서 그녀는 무릎을 꿇었고 진경수는 도아린을 끌고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진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