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도아린이 재빨리 발뒤꿈치를 들고 그를 살펴보았다.“그게 아니라 간만에 팔 운동하니 조금 뻐근하고 그러네요.”남자는 팔목을 움직이며 그녀를 갸웃거렸다.“그나저나 그쪽 꽤 용감하시네요. 어릴 때부터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셨어요?”도아린은 낯선 사람과 대화하길 꺼리지만 이 남자가 워낙 겸손한 태도에 말투도 온화한지라 거부할 수가 없었다.“저도 한때 길에서 소매치기당한 적 있거든요. 그때 가방 안에 수험표가 들어있어서 남동생이 휠체어 탄 채로 쫓아가다가 하마터면 차에 치일 뻔했어요. 그 뒤로 이런 일이 있으면 그냥 못 넘어가겠더라고요.”“동생분도 참 용감하시네요.”육하경이 웃으며 말했다.“보통 이런 일을 겪으면 트라우마로 남겠는데 그쪽은 용케 극복하고 정의 구현하고 있잖아요. 너무 대단해요.”그는 말 한마디로 도아린과 도지현 모두 칭찬했다. 역시 칭찬을 마다할 사람은 없었고 도아린도 내심 흐뭇했다.그녀가 이제 막 말을 이어가려고 할 때 문나연한테 전화가 왔다. 그 자식 한바탕 혼내고 쫓아버렸으니 얼른 돌아오라고 전했다.“저는 그럼 이만 가볼게요.”도아린이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서 스튜디오로 들어갔다.육하경은 그녀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더니 입가에 번진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헬스장으로 돌아가니 성대호가 한창 트레이너의 감시하에 숨을 헐떡이며 앉았다 일어서기를 하고 있었다.“야 이 자식아, 물 사 오라고 했잖아. 진짜 날 목말라서 죽이고 내 자리 차지하려는 속셈이야?!”육하경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윗몸일으키기를 하면서 넌지시 대꾸했다.“네 죽음은 필연코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흔적을 남길 거야.”“...”성대호는 숨이 턱 막혀 시트에 앉으면서 쏘아붙였다.“뭘 그렇게 실실거려?”육하경은 겸손하고 온화한 성격에 가족 관계상 또래들보다 좀 더 진중한 편이다. 그런 그가 밖에 한 번 나갔다 오더니 사 오라는 물은 안 사 오고 줄곧 입꼬리가 올라가 있으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좀 전에 밖에서 선행
배건후가 결혼할 때 성대호만 옆에 있었는데 소문에 의하면 그의 와이프가 예쁘고 성격 좋은 데다가 배건후의 말이라면 절대복종한다고 했다.그랬던 두 사람이 이혼한다고 하니 오지랖 넓은 성대호가 들뜨지 않을 리가 있을까.“바로 이틀 전에도 형수님이 건후 보더니 피해 다니는 거야. 슬슬 헤어질 준비를 하시나 봐.”“닥쳐!”배건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성대호는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어차피 배건후는 지금 해외라 그를 어찌할 수가 없으니까.“누구는 끝까지 거만을 떨다가 차이고 나서도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다니까.”배건후가 속으로 생각했다.‘영상 통화를 걸지 말았어야 했어.’이때 육하경이 그의 등을 톡톡 두드리자 성대호도 곧장 형세 파악이 됐다.“아 참, 엠파이어 빌딩이 얘 거잖아. 얘보고 그 여자 누군지 조사해달라고 하면 되지.”“무슨 여자?”배건후가 담뱃불을 지피며 질문을 건넸다.이에 성대호가 방금 육하경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아주 생동하게 묘사하며 배건후에게 들려주었다. 배건후는 살짝 의외긴 했으나 선뜻 친구를 도와 나섰다.“뭐 좀 특별한 점은 없었어?”성대호가 한마디 덧붙였다.“특별히 예뻤대.”육하경이 웃으며 대꾸했다.“그렇게 식상한 예쁨 말고 용감하고 개성 있는 아름다움이었어.”“...”배건후가 담배를 두어 모금 빨았다.“좀 더 상세하게 말해봐. 키, 헤어스타일, 유니폼 이런 것들 말이야. 그래야 사람 시켜서 조사하지.”“아니다 됐어.”육하경이 문득 고개를 내저었다.“안 그래도 칼 같은 성격이던데 내가 뒷조사하는 거 알면 친구조차 못 할 거야. 운명에 맡기지 뭐.”옆에 있던 성대호가 코웃음을 쳤다.“몇 마디 대화로 성격이 칼 같은 것까지 알게 됐어?”“여자들 보통 소매치기범 마주치면 기껏해야 경찰에 신고할 텐데 그 사람은 선뜻 범인을 쫓아 나섰어. 이거면 충분한 거 아니야?”배건후도 그의 말이 일리가 있어 보였다.“맞아. 너무 적극적이면 소매치기범 잡았던 게 트릭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네
병실에 들어서자 안경을 쓴 채 침대에 기대어 신문을 읽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엄마, 오늘은 훨씬 좋아 보이시네요.”“개나 소나 찾아오지 않으면 더 빨리 나았을 텐데 말이야.”주현정이 신문을 넘기며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배지유는 뻘쭘한 얼굴로 침대 옆에 앉았다.“엄마, 사실 그때 ‘야밤의 대본 리딩’은 오해였어요.”당시 손보미는 배역을 따내기 위해 감독이 흑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밤늦게 방까지 찾아갔다. 모든 건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갔고, 본인을 희생한 대가로 목적을 이루기도 했다.다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복도에 걸어 나오는 순간 마침 집에 묵고 있던 주현정의 눈에 띄게 되었다.결국 주현정은 손보미라면 치를 떨었다.“그럼 이것도 오해겠네?”주현정이 대뜸 신문을 던져 버렸다.기사에는 배건후가 ‘야밤의 미팅’을 진행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을뿐더러 누군가 청호상 시상식 백스테이지에서 찍힌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두 남녀가 서로 껴안은 흑백 실루엣도 얼핏 보였는데 모든 상황이 당사자가 배건후와 손보미라는 사실을 증명했고, 게다가 곧 좋은 소식이 들릴지도 모른다고 했다.배지유는 코를 쓱 만지며 미소를 쥐어 짜냈다.“언론사들이 내용을 조작했겠죠.”“이 사진을 누가 제보했는지 알아?”주현정은 젊었을 때 JS 픽처스의 대표였다. 나중에 딸을 낳고 건강 악화 이슈로 일선에서 물러나 경영권을 인계한 지 얼마 안 되었다.배건후는 출신 자체가 달랐고, 비록 몰래 결혼한 것 때문에 가끔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본인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감히 폭로하지 못했다.언론이 손보미와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즉, 사진을 제공한 사람이 배건후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측근이라는 것이다.이처럼 든든한 존재가 방패막이 되어주니 매체들도 믿는 구석이 있고 대거 홍보했다.사실 주현정은 아들이 도아린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며느리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라 지켜주기로 마음먹었다.“네 큰아버지한테
사실 도아린이 대역을 하든 말든 LH 스튜디오가 송민혁의 담당 컨설턴트임은 변함이 없었다.도아린은 더 좋은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박물관을 예약해서 관람하기로 했다.그녀가 박물관에 도착했을 때 이미 줄이 길게 이어졌다.이때, 문나연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수선이 필요한 고객 옷 때문에 그녀의 의견을 물었는데 곧바로 답장을 보내며 사람들을 따라 앞으로 조금씩 이동했다.마침내 그늘진 곳에 도착하자 누군가의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았다.“이런 우연이 있나? 너도 구경하러 온 거야? 일이 있어서 좀 늦었는데 맨 뒷줄은 해가 너무 쨍쨍해서 같이 들어가면 안 될까?”도아린이 고개를 들어보니 검은색 점프슈트를 입은 손보미가 손으로 이마를 가린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공들인 메이크업과 커다란 선글라스, 그리고 목에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까지 더해 부티가 줄줄 흘렀다.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기 마련인지 몰라도 매번 두 사람이 마주칠 때면 옷이 항상 같은 색 계열이었다.비록 도아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액세서리가 하나도 없었지만 분위기든 몸매든 상대방을 압도했다.그녀는 딱 잘라 거절했다.“뒤에서 줄 서는 사람도 생각해야지.”마침 줄이 이동하자 손보미는 자연스럽게 나란히 섰다.“어쨌거나 얼굴이 알려진 사람인데 괜히 악성 루머나 생성하지 마.”도아린이 쌀쌀맞게 말하더니 팔꿈치로 손보미를 밖으로 밀어냈다.그러나 장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에는 뒤로 비집고 들어갔다.“그날 밤 너랑 건후 씨를 방해해서 미안해. 두 사람의 사이를 훼방 놓을 생각은 없었어. 단지 어찌할 바를 몰라서... 건후 씨가 그렇게 늦은 밤에도 찾아올 줄 몰랐지.”도아린은 그녀의 변명 따위 가뿐히 무시하고 계속해서 사람들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일을 저질러 놓고 욕은 듣기 싫다는 건가? 우습군.”만약 손보미가 계속해서 이 화제를 이어간다면 스스로 먹칠하는 것과 다름없었다.이내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아냥거리는 얼굴로 말했다.“하지만
“도아린!”이때, 싸늘한 호통 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배건후는 손보미의 곁으로 저벅저벅 걸어가 휴지를 건네주었다. 이내 날카로우면서도 서늘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미쳤어?”손보미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이제 자기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승률이 대폭 상승한 셈이다.도아린이 천천히 숨을 고르며 태연하게 말했다.“입이 더러운 것 같아서 이참에 청소해주려고.”“건후 씨...”손보미는 울먹이며 다가가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새치기할 생각은 없었어. 단지 낯익은 사람을 발견해서 인사하고픈 마음에... 육민재를 언급했더니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지, 아니면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을 텐데.”배건후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고,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3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육민재를 의식하고 있다니.“사과해.”배건후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강압적인 모습으로 말했다.그녀의 설명 따위 생략하고 섣불리 결론을 내린 게 벌써 몇 번째인가? 하지만 가시 돋친 말에 상처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비록 심장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지만 도아린의 얼굴은 태연자약했고 심지어 건방지기까지 했다.“내가 왜요?”그녀를 골탕 먹이지 못해 안달이 난 내연녀에게 사과하라니?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는 한 절대로 불가능했다.배건후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입술을 한일자로 꾹 닫았다. 게다가 싸늘한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두 번 말하게 하지 마.”이내 살벌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두 눈은 마치 대학살을 앞둔 적진에 뛰어든 용사를 연상케 했다.도아린이 배건후의 등 뒤로 다가갔다. 지금처럼 길길이 날뛰는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단지 내연녀 때문에 화가 난 줄 알았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백만 번 물어도 내 대답은 똑같아요.”기분이 잡친 나머지 도아린은 박물관을 관람할 마음이 싹 사라져 뒤돌아서 대
정비사는 짜증이 담긴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누구신데요?”“다시 한번 물을게요. 방금 한 말에 책임질 수 있어요?”육하경이 몸을 틀어 도아린을 지켜줄 기세로 앞을 가로막았다.“당연히 전문가가 더 잘 알지 않을까요?”정비사는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말하며 손에 든 스패너를 만지작거렸다.꽤 낯익은 옆모습에 도아린도 상대방을 알아보았다. 지난번에 도둑으로 오해했다가 알고 보니 착한 사람이었던 그 남자 아닌가?“날 믿습니까?”육하경이 뒤돌아보며 묻자 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뭐 하는 거죠? 당신 어느 공업사인데? 감히 우리 가게에서 손님을 빼앗으려고 하다니!”정비사가 말을 이어가면서 다른 직원을 부르려고 했다.육하경이 휴대폰을 꺼내더니 무덤덤하게 받아쳤다.“지금 당장 소비자고발원에 연락해서 그쪽이 제시한 견적서를 증거로 제출할 거예요. 만약 차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고소해서 폐업시킬 테니까 각오해요.”정비사의 안색이 돌변했다.“만약 본분에 벗어나지 않게 영업한다면 아까는 없었던 일로 해줄게요.”정비사는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도아린을 힐긋 쳐다보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문제가 조금 있긴 한데...”육하경은 도아린의 손에서 견적서를 건네받더니 말투는 물론 눈빛마저 한층 누그러졌다.“내 차가 저기 있거든요? 밖에 더우니까 차 안에서 기다려요. 여긴 나한테 맡기고.”“고마워요.”도아린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뒤돌아서 자리를 떴다.우선 도장 여부를 정하고 나서 육하경은 정비사가 언급했던 문제점을 하나씩 체크했다. 사실 도아린의 차에 큰 문제는 없었고, 주행거리가 짧아 정비할 시기가 아직 안 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방치한 탓에 타이어 공기압이 약간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곧이어 차는 정비소를 유유히 벗어났다.“여기.”육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 얼음물이 나타났다.“고마워요.”“제가 더 고맙죠.”도아린은 차에서 땀을 식히는 대신 밖에서 기다렸다. 어쨌거나 그녀의 차를 봐주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
배지유는 번호를 힐긋 쳐다보고 입을 삐죽거렸다. 이는 육하경이 예전에 사용하던 연락처로서 오래전에 이미 정지되었다.육하경이 귀국하고 나서 여러 인맥을 통해 친구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얼굴을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오빠가 연락해주면 안 돼요? 하나뿐인 여동생 좀 도와 달란 말이에요.”배지유가 곁으로 다가와 팔을 잡고 흔들자 자칫 담배를 떨어뜨릴 뻔한 탓에 배건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너보다 5살이나 많아. 안 돼.”“오빠도 도아린보다 5살 연상이잖아요!”배지유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바람에 배건후는 분노가 폭발했고, 관자놀이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이내 그녀를 뿌리치고 살벌한 목소리로 다른 번호를 읊었다.육하경이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을까 봐 걱정된 마음에 배지유는 서재에 있는 유선전화로 전화를 걸었고, 통화는 금세 연결되었다.“여보세요?”육하경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경 오빠, 귀국했다면서 왜 연락도 없었어요?”배지유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휴대폰 너머로 침묵이 이어지더니 톤은 여전하지만 눈에 띄게 소원해진 말투가 울려 퍼졌다.“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일이 좀 많았어. 건후가 대신 연락해달래?”“아니요, 제가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아, 참! 오빠를 위해 환영회를 열어주고 싶은데 괜찮아요?”“안 그래도 나중에 시간 나면 건후랑 밥 한 끼 하려고 했거든. 너도 같이 와.”“그건 엄연히 다르죠. 오빠들끼리 잡은 약속에 전 꼽사리로 끼는 셈이잖아요. 이제 귀국했으니까 친구들이나 동창들 만나러 다닐 텐데 제가 같이 가줄게요. 혹시라도 술을 마시게 된다면 대신 운전해서 집에 데려다줄 수도 있고.”사실 진짜 목적은 육하경의 여자 친구라는 신분으로 지인들 앞에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낼 심산이었다.육하경이 재차 완곡하게 거절했으나 그녀는 일부러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결국 육하경은 두 손 두 발 들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미안하지만 최근에 공들이는 사람이 있어서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
“네, 금방 갈게요.”도아린이 말하며 운전대를 틀었다.육하경은 뒤로 물러섰고,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U턴하고 나서도 그녀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육하경을 발견하자 도아린은 차창을 내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알겠어요, 육하경 씨!”육하경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한편, 배지유는 육하경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뛰었다.“하경 오빠한테 대체 누구를 소개해 준 거예요?”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된 배건후는 머리가 지끈거려 퉁명스럽게 말했다.“내가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왜 나한테 히스테리야!”“오빠 말고 다른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동안 건후 오빠는 어머님이 소개한 여자는 단 한 번도 만나 적이 없었잖아요. 아니면 성대호가 주선했는지 물어봐 줘요. 상대방이 누군지! 나보다 더 예쁜지도!”배건후는 이마에 얹은 팔을 내리며 버럭 화를 냈다.“계속해서 떠들 거면 내 집에서 나가!”배지유는 입을 꾹 닫고 자리에 앉았다. 비록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차마 표출할 수는 없었다.이때, 손보미의 문자가 도착했다. 박물관 입구에서 도아린을 만나 작은 소동이 있었는데 배건후가 기분이 안 좋은 것도 도아린 때문에 열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오빠, 혹시 도아린 때문에 화가 난 거예요?”배건후가 그녀를 흘겨보았다.“뭐라고?”“새언니 말이에요! 새언니가 오빠 심기 건드렸죠?”배지유는 히스테리를 부리며 되물었다.“어른 일에 참견하지 마.”이내 배건후의 시선이 그녀의 손목으로 향했다.보라색 비취 팔찌는 첫 결혼기념일에 도아린이 사달라고 했던 선물인데 당시 어머니 생신 연에 딱 한 번 착용했었다.단지 팔찌를 아끼는 마음에 일부러 안 하는 줄 알았더니 다른 사람에게 줬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급속도로 어두워지는 오빠의 표정을 보자 배지유는 서둘러 손목을 가렸다.“나 먼저 가볼게요. 친구랑 밥 먹기로 해서.”배건후가 의자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이려는 찰나 손보미의 문자가 도착했다.[건후 씨, 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