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후 전화니?”주현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데이트하기로 했어? 나 혼자 할게. 얼른 나가봐...”“괜찮아요. 좀 기다리라고 하죠 뭐.”도아린은 주현정의 얼굴을 깨끗이 닦아드린 후에야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자마자 우렁찬 욕설이 그녀의 귀청을 째지게 했다.“도아린, 너 미쳤어?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왔네 이거 아주!”도아린은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대체 그가 뭣 때문에 이렇게 화내는 건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그녀는 주현정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문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왜 이래요? 건후 씨야말로 미쳤어요?”“짐 정리를 했다는 게 고작 이거야?”배건후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되물었다.“대충 흘려 넘기게?”오늘 아침 배건후가 캐리어를 챙기러 갔는데 안에 글쎄 목 어깨마사지기도 없고 온열 수면안대도 없는 것이다... 물론 그도 아예 이런 물건들을 쓰진 않지만 도아린이 챙겨 넣지 않은 건 엄연한 태도 문제였다.그를 더 화나게 만든 건 도아린이 맞춰준 3세트의 옷 모두 똑같은 스타일에 넥타이 색깔마저 똑같았다.“와서 다시 싸!”배건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지금 못 가요. 보살펴야 할...”“동생이 또 위급한 거야?”배건후가 야유 조로 물었다.“어제 나더러 약 사달라고 애원한 사람이 누구더라? 고작 하룻밤 만에 변한 거야? 왜? 이젠 내가 대신 도정국 씨 상대 안 해줘도 되는 거야? 아니면 뭐 아예 이혼할 생각을 접었어?”도아린은 이미 이혼 준비를 다 마쳤지만 그의 거만하고 야유 섞인 말을 듣고 있자니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그녀는 곧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았다.“미안한데 이번에 핑계로 쓰일 사람은 내 동생이 아니라 건후 씨 어머님이에요. 어젯밤에 갑자기 기절하셨는데 다행히 지금 위험에서 벗어나셨어요.”“...”배건후가 문득 침묵했다.“대표님은 공사다망하시다 보니 가족을 챙길 시간이 없으시네요.”도아린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다음번에 돌발상황이 발생할 땐
“엄마가 너한테 못 해준 게 뭔데? 어떻게 엄마가 이토록 위급할 때 이혼을 언급할 수 있어? 도아린, 제발 인간답게 살면 안 돼?”대체 누가 누구더러 인간답게 살라고 하는 것인지...이혼을 질질 끌면서 내연녀랑 뜨겁게 사랑을 나눌 땐 언제고...도아린은 이젠 그에게 철저하게 실망한지라 말투도 차갑고 강압적으로 변했다.“건후 씨 약점 잡고 있어야 하루빨리 목적에 달성하죠.”배건후는 그녀의 기세등등한 태도에 화가 나 이마에 실핏줄까지 튀어 올랐다. 그녀가 딴 사람에게 장뇌삼을 선물한 건 단지 배건후를 화나게 하고 그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전혀 아니었다.도아린은 하루빨리 그와 이혼하지 못해 안달이다.“도아린, 나 같은 말 반복하는 거 딱 질색인데 이번 한 번만 얘기할게. 이혼하든 말든 내가 알아서 정해. 그 인간들이 한 말 다 믿지는 마. 우리가 부부인 걸 알면 네가 들러붙어도 오히려 멀리 피해 다닐 거야.”도아린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그의 말에 화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나중에 어떻게 지낼지는 내가 알아서 해요. 건후 씨는 사인만 하면 돼요.”배건후의 눈빛이 점점 더 음침해졌다. 그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너랑 장난칠 시간 없어.”그가 확고하게 거절하지 않자 도아린이 말을 이었다.“그럼 출장 다녀와서 다시 얘기해요.”‘어차피 이혼은 정해진 일이니 요즘은 일단 어머님 보살펴드려야지.’그녀가 한창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배건후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꽉 잡고 아무도 없는 비상구로 걸어갔다.이어서 예고도 없이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순간 짙은 담배 향이 입안을 파고들었다. 배건후의 키스는 늘 이토록 터프하고 일방적인 법이다.도아린은 미처 대응할 겨를이 없었다.3년 내내 그는 도아린을 터치한 적도 없을뿐더러 키스한 적은 더더욱 드물다.가끔 몇 번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을 때가 있지만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본 후엔 바로 멈췄었다.하지만 이번엔...도
도아린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 제자리로 돌아갔다.이제 막 업무를 시작하려던 참인데 문나연이 차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사장님이 너 찾으셔. 이 차 들고 들어가 봐.”“그래...”“마침 잘 왔어.”나형욱이 웃으며 도아린을 반겼다.“이분은 송 감독 새 드라마 여주인공 손보미 씨야. 지금 한창 대역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었어.”금방 퇴원한 손보미는 넉넉한 핏의 화이트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다이아로 S자가 박힌 화이트 캡모자를 쓰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찻잔을 받다가 도아린을 보더니 흠칫 동작을 멈췄다.“사장님, 아현 씨가 묵묵히 제 대역하길 원치 않는다고 해도 그렇죠. 최소한 업계에서 자수 실력이 되는 사람으로 뽑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디 한낱 차나 따르는 사람으로 대충 얼버무리려고 해요?”나형욱은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재빨리 도아린의 반응을 살폈다.한편 도아린은 너무나도 차분했다.“송 감독님 작품이 비록 대체역사물이긴 하나 극 중의 의상은 전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했어요. 아현 씨가 복원한 자수 예복을 보았는데 용이 마치 살아 숨 쉬는 것 같았고 고귀함이 흘러넘쳤어요. 자수 수법은 딱 봐도 대가 수준인데 애석하게도 아현 씨가 너무 겸손하게 지내시다 보니 인맥을 아무리 동원해도 여태껏 얼굴 한 번 뵙지 못했죠.”손보미가 거만을 떨며 말을 이었다.“그런 분을 제 대역으로 쓰는 건 확실히 좀 서운할 만한 일이죠. 그 대신 제가 더 많은 소스를 제공해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제 옆에 능력자 친구가 한 명 있거든요.”‘아주 배건후의 이름을 대놓고 말하시지 왜?!’옆에 있던 나형욱도 바로 알아들었다. 손보미는 한때 본인처럼 눈앞의 도아린이 바로 전설 속의 아현이란 걸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는 것을.“보미 씨.”나형욱이 찻잔을 손보미 앞으로 내밀었다.“실은...”“사장님.”이때 도아린이 그의 말을 잘랐다.“비록 대역이긴 하나 여주인공 대역이라 스킬도 있고 교양도 있으며 허영심도 매우 강한 분으로 픽해야 할 것 같군요.”나
우정윤은 자신의 심복을 시켜 옷 수선하라는 빌미로 LH 스튜디오에 찾아가게 했다.한편 스튜디오에 들어서자마자 도아린이 찻잔을 들고 훈계를 듣는 듯 안색이 어두웠다고 전했다.“차를 따른다고?”배건후가 사인펜을 놓아버리자 책상에서 빙그르르 굴렀다.그의 눈빛이 한없이 음침해졌다.“모두가 부러워하는 부잣집 사모님 팔자를 제쳐두고 기어코 스스로 깎아내리면서 딴 사람 시중이나 드는 거야? 내가 자유를 줘도 너무 줬어. 속세의 고달픔이라곤 전혀 모르잖아!”“...”우정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네요. 정작 하는 행동은 누구보다 야박하면서...’애초에 배건후가 출장 갔을 때 도아린은 꼭꼭 전화해서 그곳 날씨는 어떤지, 숙박 환경은 어떤지, 미팅 준비는 잘 되어가는지 꼬치꼬치 캐묻곤 했었다...그때마다 배건후는 짜증 내며 우정윤더러 전화를 받고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대며 업무가 바쁘니 적당히 전화하라고 시켰다. 그 뒤로 도아린은 카톡 하나 보내지 않았다.우정윤은 그런 그녀가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자들은 남편이 집에 안 돌아오고 용돈을 실컷 준다면 밖에서 어떻게 놀아날지 모르니까....도아린이 창고에서 명주실을 고를 때 문나연이 문을 비스듬히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왜?”“밖에 잘생긴 남자분 왔어.”문나연은 문틈 사이로 그녀를 내다보게 했다.“저기 정장 입은 저 남자.”도아린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시선을 옮겼더니 아니나 다를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남자를 발견했다.“처음엔 손보미 팬인 줄 알았는데 손보미가 나올 때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 있지.”문나연은 그녀에게 웃으며 말했다.“너 찾아온 거야. 호감 가면 내가 대신 두 사람 이어줄게. 별로면 내쫓아버리고.”“...”도아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정장 외투 포켓에 반쯤 드러난 명찰을 보았는데 모건이라고 적혀 있었다.배건후가 설마 도아린이 손보미를 해칠까 봐 사람을 보내 뒤에서 몰래 감시하게 한 걸까?“꽤 잘생겼는데 소심한 것 같아.”문나연이 두 눈을 굴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도아린이 재빨리 발뒤꿈치를 들고 그를 살펴보았다.“그게 아니라 간만에 팔 운동하니 조금 뻐근하고 그러네요.”남자는 팔목을 움직이며 그녀를 갸웃거렸다.“그나저나 그쪽 꽤 용감하시네요. 어릴 때부터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셨어요?”도아린은 낯선 사람과 대화하길 꺼리지만 이 남자가 워낙 겸손한 태도에 말투도 온화한지라 거부할 수가 없었다.“저도 한때 길에서 소매치기당한 적 있거든요. 그때 가방 안에 수험표가 들어있어서 남동생이 휠체어 탄 채로 쫓아가다가 하마터면 차에 치일 뻔했어요. 그 뒤로 이런 일이 있으면 그냥 못 넘어가겠더라고요.”“동생분도 참 용감하시네요.”육하경이 웃으며 말했다.“보통 이런 일을 겪으면 트라우마로 남겠는데 그쪽은 용케 극복하고 정의 구현하고 있잖아요. 너무 대단해요.”그는 말 한마디로 도아린과 도지현 모두 칭찬했다. 역시 칭찬을 마다할 사람은 없었고 도아린도 내심 흐뭇했다.그녀가 이제 막 말을 이어가려고 할 때 문나연한테 전화가 왔다. 그 자식 한바탕 혼내고 쫓아버렸으니 얼른 돌아오라고 전했다.“저는 그럼 이만 가볼게요.”도아린이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서 스튜디오로 들어갔다.육하경은 그녀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더니 입가에 번진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헬스장으로 돌아가니 성대호가 한창 트레이너의 감시하에 숨을 헐떡이며 앉았다 일어서기를 하고 있었다.“야 이 자식아, 물 사 오라고 했잖아. 진짜 날 목말라서 죽이고 내 자리 차지하려는 속셈이야?!”육하경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윗몸일으키기를 하면서 넌지시 대꾸했다.“네 죽음은 필연코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흔적을 남길 거야.”“...”성대호는 숨이 턱 막혀 시트에 앉으면서 쏘아붙였다.“뭘 그렇게 실실거려?”육하경은 겸손하고 온화한 성격에 가족 관계상 또래들보다 좀 더 진중한 편이다. 그런 그가 밖에 한 번 나갔다 오더니 사 오라는 물은 안 사 오고 줄곧 입꼬리가 올라가 있으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좀 전에 밖에서 선행
배건후가 결혼할 때 성대호만 옆에 있었는데 소문에 의하면 그의 와이프가 예쁘고 성격 좋은 데다가 배건후의 말이라면 절대복종한다고 했다.그랬던 두 사람이 이혼한다고 하니 오지랖 넓은 성대호가 들뜨지 않을 리가 있을까.“바로 이틀 전에도 형수님이 건후 보더니 피해 다니는 거야. 슬슬 헤어질 준비를 하시나 봐.”“닥쳐!”배건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성대호는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어차피 배건후는 지금 해외라 그를 어찌할 수가 없으니까.“누구는 끝까지 거만을 떨다가 차이고 나서도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다니까.”배건후가 속으로 생각했다.‘영상 통화를 걸지 말았어야 했어.’이때 육하경이 그의 등을 톡톡 두드리자 성대호도 곧장 형세 파악이 됐다.“아 참, 엠파이어 빌딩이 얘 거잖아. 얘보고 그 여자 누군지 조사해달라고 하면 되지.”“무슨 여자?”배건후가 담뱃불을 지피며 질문을 건넸다.이에 성대호가 방금 육하경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아주 생동하게 묘사하며 배건후에게 들려주었다. 배건후는 살짝 의외긴 했으나 선뜻 친구를 도와 나섰다.“뭐 좀 특별한 점은 없었어?”성대호가 한마디 덧붙였다.“특별히 예뻤대.”육하경이 웃으며 대꾸했다.“그렇게 식상한 예쁨 말고 용감하고 개성 있는 아름다움이었어.”“...”배건후가 담배를 두어 모금 빨았다.“좀 더 상세하게 말해봐. 키, 헤어스타일, 유니폼 이런 것들 말이야. 그래야 사람 시켜서 조사하지.”“아니다 됐어.”육하경이 문득 고개를 내저었다.“안 그래도 칼 같은 성격이던데 내가 뒷조사하는 거 알면 친구조차 못 할 거야. 운명에 맡기지 뭐.”옆에 있던 성대호가 코웃음을 쳤다.“몇 마디 대화로 성격이 칼 같은 것까지 알게 됐어?”“여자들 보통 소매치기범 마주치면 기껏해야 경찰에 신고할 텐데 그 사람은 선뜻 범인을 쫓아 나섰어. 이거면 충분한 거 아니야?”배건후도 그의 말이 일리가 있어 보였다.“맞아. 너무 적극적이면 소매치기범 잡았던 게 트릭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네
병실에 들어서자 안경을 쓴 채 침대에 기대어 신문을 읽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엄마, 오늘은 훨씬 좋아 보이시네요.”“개나 소나 찾아오지 않으면 더 빨리 나았을 텐데 말이야.”주현정이 신문을 넘기며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배지유는 뻘쭘한 얼굴로 침대 옆에 앉았다.“엄마, 사실 그때 ‘야밤의 대본 리딩’은 오해였어요.”당시 손보미는 배역을 따내기 위해 감독이 흑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밤늦게 방까지 찾아갔다. 모든 건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갔고, 본인을 희생한 대가로 목적을 이루기도 했다.다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복도에 걸어 나오는 순간 마침 집에 묵고 있던 주현정의 눈에 띄게 되었다.결국 주현정은 손보미라면 치를 떨었다.“그럼 이것도 오해겠네?”주현정이 대뜸 신문을 던져 버렸다.기사에는 배건후가 ‘야밤의 미팅’을 진행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을뿐더러 누군가 청호상 시상식 백스테이지에서 찍힌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두 남녀가 서로 껴안은 흑백 실루엣도 얼핏 보였는데 모든 상황이 당사자가 배건후와 손보미라는 사실을 증명했고, 게다가 곧 좋은 소식이 들릴지도 모른다고 했다.배지유는 코를 쓱 만지며 미소를 쥐어 짜냈다.“언론사들이 내용을 조작했겠죠.”“이 사진을 누가 제보했는지 알아?”주현정은 젊었을 때 JS 픽처스의 대표였다. 나중에 딸을 낳고 건강 악화 이슈로 일선에서 물러나 경영권을 인계한 지 얼마 안 되었다.배건후는 출신 자체가 달랐고, 비록 몰래 결혼한 것 때문에 가끔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본인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감히 폭로하지 못했다.언론이 손보미와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즉, 사진을 제공한 사람이 배건후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측근이라는 것이다.이처럼 든든한 존재가 방패막이 되어주니 매체들도 믿는 구석이 있고 대거 홍보했다.사실 주현정은 아들이 도아린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며느리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라 지켜주기로 마음먹었다.“네 큰아버지한테
사실 도아린이 대역을 하든 말든 LH 스튜디오가 송민혁의 담당 컨설턴트임은 변함이 없었다.도아린은 더 좋은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박물관을 예약해서 관람하기로 했다.그녀가 박물관에 도착했을 때 이미 줄이 길게 이어졌다.이때, 문나연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수선이 필요한 고객 옷 때문에 그녀의 의견을 물었는데 곧바로 답장을 보내며 사람들을 따라 앞으로 조금씩 이동했다.마침내 그늘진 곳에 도착하자 누군가의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았다.“이런 우연이 있나? 너도 구경하러 온 거야? 일이 있어서 좀 늦었는데 맨 뒷줄은 해가 너무 쨍쨍해서 같이 들어가면 안 될까?”도아린이 고개를 들어보니 검은색 점프슈트를 입은 손보미가 손으로 이마를 가린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공들인 메이크업과 커다란 선글라스, 그리고 목에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까지 더해 부티가 줄줄 흘렀다.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기 마련인지 몰라도 매번 두 사람이 마주칠 때면 옷이 항상 같은 색 계열이었다.비록 도아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액세서리가 하나도 없었지만 분위기든 몸매든 상대방을 압도했다.그녀는 딱 잘라 거절했다.“뒤에서 줄 서는 사람도 생각해야지.”마침 줄이 이동하자 손보미는 자연스럽게 나란히 섰다.“어쨌거나 얼굴이 알려진 사람인데 괜히 악성 루머나 생성하지 마.”도아린이 쌀쌀맞게 말하더니 팔꿈치로 손보미를 밖으로 밀어냈다.그러나 장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에는 뒤로 비집고 들어갔다.“그날 밤 너랑 건후 씨를 방해해서 미안해. 두 사람의 사이를 훼방 놓을 생각은 없었어. 단지 어찌할 바를 몰라서... 건후 씨가 그렇게 늦은 밤에도 찾아올 줄 몰랐지.”도아린은 그녀의 변명 따위 가뿐히 무시하고 계속해서 사람들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일을 저질러 놓고 욕은 듣기 싫다는 건가? 우습군.”만약 손보미가 계속해서 이 화제를 이어간다면 스스로 먹칠하는 것과 다름없었다.이내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아냥거리는 얼굴로 말했다.“하지만
의사가 급히 다가와 도아린을 확인하더니 주사를 한 대 더 놓았다. 그리고는 운전기사에게 속도를 빨리라고 재촉했다.“환자의 상태가 매우 위급합니다. 빨리 가주세요!”“도아린, 너 절대 죽으면 안 돼! 나랑 이혼할 때는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이렇게 죽으면 안 되지. 그렇게 자존심이 강하다며? 그럼 지금이 네 대단한 자존심을 보여 줄 때야!”배건후는 점점 더 초조해져서 말을 가리지 않고 마구 내뱉었다. 눈물은 통제할 수 없이 흘러내려 도아린의 이마 위로 떨어졌다.눈물이 상처에 닿자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중상 환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 쪽에서는 미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구급차가 도착하자마자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도아린을 들것에 올리고는 병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환자분도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한 의사가 배건후를 붙잡았다.“저는 괜찮습니다.”배건후는 의사의 팔을 뿌리치고는 다리를 절뚝이며 따라붙었다.“아내가 괜찮은지 먼저 확인해야 해요!”하지만 그 의사는 끝까지 배건후를 따라가면서 그의 상태를 관찰했다. 그는 팔과 다리에 골절 가능성이 있었고 귀에서 출혈이 있는 걸 봐서 뇌 손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의사가 뭐라 하든 배건후는 듣지 않았고 오직 도아린 곁을 지키려 했다.진경수를 비롯한 진씨 가문 사람들도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왔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도아린의 사고 소식을 접한 윤명희도 서둘러 병원으로 왔다.“배건후, 이 개자식아!”진경수는 배건후를 향해 주먹을 날리려 했으나 경찰이 막아서며 상황을 설명했다.“건후 씨의 빠른 판단이 없었으면 아린 씨는 더 큰 부상을 입었을 겁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사망했을 수도 있고요. 건후 씨가 트럭의 충격을 막아줘서 그나마 다행입니다.”“아린아, 조금만 버텨. 가족들도 다 너 보러 왔어. 아무 일도 없을 거고 무사할 거야.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윤명희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도아린에게 손을 뻗으려 했지만 혹여 그녀를 아프게 할까 봐 조심스러웠다.“건후야, 너도 치료
어떤 사람은 차 문을 열자는 생각에 찬성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힘을 써도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배건후의 간절함에 영향을 받았는지 다들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썼다. 모두가 차 안에 있던 도구를 꺼내 들고 힘을 합쳐 문을 열려고 했다.“하나, 둘, 셋! 하나, 둘, 셋!”“조금만 더 힘내요. 움직이기 시작했어요!”누군가가 이렇게 외치자 다들 이를 악물었고 어떤 이는 손에 들고 있던 도구를 부러뜨릴 정도로 힘을 썼다. 마침내 ‘쾅’하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렸다.“도아린!”문이 열리자마자 배건후는 앞으로 달려가서 안전벨트를 풀어주고 그녀의 몸을 일으켜주었다. 배건후는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고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어디 다쳤어? 어디가 아픈지 말해줘.”힘겹게 눈을 뜬 도아린은 배건후의 부어오른 눈, 갈라진 입술과 멍든 뺨을 바라보았다. 우아하고 단정했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배건후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다리가 끼이지는 않았는지 확인했다. 그때, 도아린은 그의 귀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며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배건후는 즉시 고개를 번쩍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있으니까 걱정 마! 곧 구급차가 올 거고 아무 일도 없을 거야.”배건후는 이렇게 말하며 직접 도아린을 안아 올렸다. 그러나 좌석에서 벗어나자마자 두 사람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그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이 다가와서 그들을 도왔다.어떤 이는 차량 뒤쪽에 경고 표지를 설치했고 어떤 이는 경찰에 신고를 했으며 또 어떤 이는 휴지를 찾아서 출혈을 막아주었다.구급차는 경찰차보다 먼저 도착했다.의사는 부상자가 두 명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구급차를 한 대 더 부르려 했다.“전 괜찮습니다! 제 아내부터 봐주세요. 부탁드립니다!”의사는 배건후가 걸을 수 있고 말도 조리 있게 할 수 있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을 함께 태웠다.도아린은 산소마스크를 쓴 채로 몽롱하게 잠에 빠지려 했다.그녀를 살펴본 의사는 표정이 심각
급커브를 빠져나가면 피할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급하게 액셀을 밟았다.차량 속도가 너무 빨랐기에 커브를 돌 때 브레이크를 여러 번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칫하면 차가 옆으로 넘어갈 뻔했다.도아린이 막 안도의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 맞은편에서 트럭 한 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뒤쪽 트럭도 경적을 울렸고 맞은편의 트럭도 그에 응답하듯 경적을 울렸다.맞은편에서 오는 트럭이 도아린의 차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해 왔다. 그녀는 순식간에 온몸의 혈액이 머리로 쏠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계획된 살인이었다.그녀는 필사적으로 침착하려고 했지만 몸은 이미 마비된 상태였다.옆에서는 또 다른 트럭이 밀어붙여서 도망칠 공간이 없었다. 브레이크를 밟거나 정면충돌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그렇다고 속도를 줄이면 뒤에 있는 검은색 밴에 부딪힐까 봐 걱정이었다.‘돌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여자는 정말 남자보다 판단력이 약한 것일까?’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인 듯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그 아슬아슬한 순간에 검은색 밴이 도아린의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검은색 밴은 급브레이크를 밟더니 도아린의 차와 트럭 사이를 가로막았다.맞은편 트럭 운전사는 이런 변수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반사적으로 핸들을 꺾어 버렸고 도아린 옆에서 나란히 달리던 트럭과 충돌해 버렸다.두 대의 트럭은 세게 부딪히고 나서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 트럭에 있는 트레일러가 검은색 밴을 세게 들이받았고 ‘쾅’하는 소리와 함께 도아린도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밴에 부딪혀 버렸다. 그 충격에 검은색 밴은 완전히 납작하게 눌려 버렸다.에어백이 터지면서 그녀는 온몸이 쑤셨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시야도 흐릿해졌다.그때, 부서진 검은색 밴의 문이 힘겹게 밀려 열리더니 한 남자가 굴러떨어졌다.배건후였다. 그의 팔은 피투성이였고 새하얀 셔츠도 온통 핏자국으로 물들어 있었다.그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힘겹게 도아린의 차 앞으로 걸어왔다.“도아린,
배건후는 도아린을 따라 아래층 정원까지 내려왔다.“도아린...”그제서야 입을 열었지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말을 끊어버렸다.“지금 소송 문제로 바쁘시잖아요. 더 이상 건후 씨 시간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도아린, 우리 제대로 이야기 좀 해.”“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배건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 앞을 막았다.“넌 그놈들의 이익을 건드렸어. 다들 널 가만두려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경찰에게 내가 제공한 정보라고 말해. 그러면 나를 찾아올 거니까.”도아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싸늘했다.어젯밤 그녀가 변슬기를 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경찰뿐이었다. 경찰 측에서는 피해자의 신변 보호를 위해 도아린과 진수혁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았다.주현정 역시 변슬기가 납치되었다는 사실만 듣고 그녀와 함께 병문안을 온 것이었다.하지만 배건후는 너무나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유민 씨가 말해줬어요?”배건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부정하지도 않았고 결코 인정하지도 않았다.그는 왠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배건후는 손을 뻗어 도아린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시선을 보고는 허공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손을 거두었다.“도아린, 넌 지금 보호가 필요해.”“보호가 필요하다고 해도 배 대표님의 보호는 필요 없어요.”도아린은 그가 건드리지도 않은 어깨를 툭 털어내고는 싸늘하게 말했다.“저희는 감정적으로 얽힌 사이도 아니고 경제적으로도 더더욱 아무 관계 없는 사이에요. 그러니까 앞으로 제 앞에 나타나지 말아 주세요.”“그럼 법정에는 왜 간 거야?”그녀가 법정에 온 걸 보고 배건후는 몇 날 며칠 동안 설레발을 쳤다. 하지만 그의 설레는 감정은 결국 바닥에 내팽개쳐져 처참히 짓밟히고 말았다.“법정에 간 건 저희 할머니 소송 때문이에요.”도아린은 그를 지나치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배건후가 뒤를
강재민은 등을 돌린 채 손을 휘저으며 강재희를 돌려보냈고 그녀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왔다.계단을 내려가던 그녀는 갑자기 위층에서 ‘쾅’ 하는 소리를 들었다.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였다....변슬기는 다치지 않았지만 극도의 공포를 겪은 탓에 밤사새 열이 올라 결국 병원에 입원했다.채원미가 밤새 그녀 곁을 지켰고 다음 날, 변우빈이 교대하러 왔다.그날, 도아린은 주현정과 함께 병문안을 왔다.“도 선생님!”변슬기는 도아린을 보자마자 눈물이 터질 듯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아버지, 저 도 선생님이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요.”“그래. 몸이 안 좋으면 바로 불러.”변우빈은 주현정과 함께 병실 밖으로 나갔다.도아린은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와 변슬기의 곁에 앉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어제 잡힌 건 기절한 두 놈뿐이에요. 나머지는 전부 도망쳤어요.”변슬기는 입술을 꾹 다물며 울음을 참았다.“대표님은 괜찮아요?”“몇 바늘 꿰매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대요.”도아린은 변슬기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슬기 씨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어제 다들 걱정했어요.”변슬기는 살짝 시선을 피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진 대표님도 제 걱정을 했을까요?”“당연하죠. 비서잖아요. 퇴근 후에 사고가 났으니 산재 처리해야 할지도 모르죠.”변슬기의 가슴 한구석에서 두근거리던 감정이 도아린의 한마디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아... 그렇군요.”도아린은 입꼬리를 살짝 내리며 변슬기의 반응을 살폈다.“오빠는 좀 눈치가 없는 편이라 어떤 감정이든 스스로 깨닫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러니까 슬기 씨, 오빠한테 마음이 있는 거라면 직진하는 게 좋을 거예요.”변슬기는 살짝 움찔하더니 도아린을 쳐다보았다. 놀람, 기쁨, 그리고 믿기지 않는 듯한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섞인 눈빛이었다.“도 선생님, 저... 저 같은 사람이 대표님이랑 어울릴까요?”“왜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죠?”도아린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슬기 씨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에요
변슬기는 겉옷을 벗은 후, 한쪽 어깨끈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재빨리 진수혁의 팔을 감싸서 지혈했다.무표정이던 그의 표정에 드디어 약간의 변화가 일었다. 진수혁은 굳어 있던 몸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뭐라고? 창고가 털렸다고?”전화를 받자마자 남궁 유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분노에 차서 주먹을 휘두르자 모니터가 박살이 났다.‘또 도아린, 그 여자야.’도아린은 그가 부자로 되어가는 길목에서 끊임없이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한, 그녀가 또 어떤 방해를 할지 알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가 났다. 해남에서 목장으로 위장한 불법 장기 매매 조직의 은신처가 발견되었으며 현장에서 두 명의 용의자가 검거되었다고 말이다.경찰은 구체적인 내용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이 지하 조직이 연성의 인신매매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 사람들은 어디에서든 이 사건을 화제로 삼아 얘기를 나눴다.강재희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강재민을 찾아갔다.“뉴스 봤어?”강재민은 1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손에는 얼음을 넣은 위스키 한 잔이 들려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뉴스 봤냐고 묻잖아!”강재희는 그 앞까지 걸어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따져 물었다.“너 계속 인신매매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잖아. 정말 몰랐어?”강재민은 천천히 눈을 떴다. 짙은 갈색인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강재민은 아무 말 없이 술을 한 모금 삼켰다.“대답해!”강재희가 날카롭게 말했다.“정말 몰랐던 거야? 아니면 그들과 같은 편에 선 거야?”강재희에게 인신매매 사건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였다. 그녀는 사람을 물건처럼 이용해 먹는 자들을 제일 증오했다. 그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은 사람의 장기를 강제로 빼앗아서 거래까지 하는 끔찍한 범죄였다.비록 강재민은 항상 아버지의 반대편에 서서 살아왔지만 사실 그는 그동안 암암리에 계속 이 사건을 추적하고 있었다.강재희를 구해
도아린은 지름길로 달려갔다가 하마터면 발을 헛디딜 뻔했다. 그녀가 물웅덩이 근처에 도착했을 때, 변슬기가 힘겹게 기어오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손 이리 줘요!”도아린은 바닥에 엎드려 팔을 길게 뻗고는 그녀의 손을 붙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변슬기의 손은 진흙투성이였기에 잡자마자 미끄러져 버렸다.그녀는 손을 옷에 문질러서 대충 닦은 후 다시 손을 뻗었다. 도아린은 위에서 힘껏 끌어당겼고 변슬기는 아래에서 발을 굴렀다. 마침내 그녀는 물웅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진수혁이 한 남자와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 남자는 쇠 파이프를 들고 있었기에 확실히 상대 쪽이 우세인 상황이었다.“일단 차로 가요!”도아린은 변슬기의 손을 잡고 황급히 뛰어갔다.차 안에서는 계속해서 남녀의 격렬한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변슬기는 금방 공포 속에서 탈출했다는 사실에 그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도아린 역시 음악을 끌 겨를도 없이 차에 시동을 걸고 진수혁 쪽으로 몰았다.갑자기 켜진 헤드라이트 불빛이 상대의 얼굴을 환히 비추었다. 순간, 그는 너무 눈부셔서 제자리에 멈춰섰고 그 틈을 타 진수혁이 상대를 발로 걷어찼다.차는 두 사람 앞으로 돌진하더니 급히 방향을 틀었다.“빨리 타요!”도아린이 소리쳤다.진수혁은 변슬기가 조수석에 앉았을 거라 생각해 본능적으로 뒷좌석 문을 열고 몸을 던졌다. 상대방은 그들이 도망치는 걸 보고 필사적으로 뒤쫓아왔다.그러자 도아린은 재빨리 후진했다. 문이 아직 완전히 닫히지도 않은 상태에서 차는 그들을 튕겨내듯 밀어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거칠게 액셀을 밟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목장에서 마을로 향하는 유일한 도로에서, 경찰차 한 대가 그들과 스쳐 지나갔다. 세 사람은 그제야 가까스로 살아남았다는 실감이 들었다.도아린은 속도를 늦추고 진수혁에게 문을 제대로 닫으라고 했다.주변이 조용해지자 차 안에서 남녀의 격렬한 신음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까까지 벌벌 떨고 있던 변슬기는 이 소리를 듣고 순간적으로 몸이
갑자기 나타난 차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고 차의 불빛도 순식간에 꺼져 버렸다.“가자. 가서 확인해 보자!”두 사람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고 나머지 한 명은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뭐가 그렇게 급해? 아프단 말이야. 좀 천천히 해.”“넌 나 안 보고 싶었어? 난 너 보고 싶어서 죽을 뻔했는데...”차 안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상태를 확인하러 나간 두 남자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었다.‘굳이 이런 곳까지 찾아오다니...’‘제 발로 굴러왔는데 놓쳐서야 되겠어? 본때를 보여줘야지.’두 사람은 손짓으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차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차와 점점 가까워질수록 소리는 더 선명해졌고 차까지 흔들리는 듯했다.하지만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너무 몰두하는 바람에 누가 다가오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중 한 명이 차 문을 열려고 손을 뻗었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그중 한 남자가 창문을 두드렸다.“여기서 뭐 하는 거죠?”다른 쪽에 있던 남자도 말했다.“여긴 개인 목장이에요.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요. 신분증 좀 봅시다.”“윽...”낮은 신음과 함께 창문을 두드리던 남자는 갑자기 힘없이 쓰러졌다. 그러자 반대쪽 남자도 뭔가 이상한 걸 느끼고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퍽’하는 소리와 함께 쇠 파이프가 남자의 등 뒤를 강하게 가격했다.도아린은 진수혁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목덜미를 때리면 잠깐 기절시킬 수 있다고 말이다. 그녀는 목덜미를 때리려 했으나 손이 너무 떨려서 목덜미 대신 등을 세게 때렸다.남자는 곧바로 몸을 돌려 도아린을 잡으려 했으나 그때, 진수혁이 나타나서 남자의 목덜미를 가격했다.그러자 그 남자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무슨 일이야!”문을 지키던 남자는 무언가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지만 밤이라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다들, 빨리 와! 그 여자가 도망쳤어!”안에서 남자의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자 문을 지키던 남
변슬기가 고개를 돌리자 흐릿한 시야 속에는 작은 수레가 하나 보였고 그 위에는 각종 의료 기기와 약품이 놓여 있었다. 수술용 칼과 크고 작은 핀셋들도 줄지어 있었다.코를 찌르는 강한 피비린내가 그녀로 하여금 단숨에 정신 차리게 했다.이곳은 환경이 극도로 열악한 수술실이었다.변슬기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막 수술대에서 내려오려는 순간,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오늘은 왜 이렇게 갑자기 소집했대?”“누가 알겠어? 어쨌든 일만 하면 돈을 받는 거잖아. 요즘 장기가 꽤 부족한가 봐. 이따가 피 뽑아서 상세 정보 올리면 바로 구매자한테서 연락이 올 거야.”“넌 네가 할 거 해. 난 얼음이나 가져올게. 저 여자 말이야. 아무래도 누굴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지? 살아 있는 상태로 수술하라니...”어떤 남자와 여자가 대화를 나누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변슬기는 다시 수술대에 누웠다. 너무 두려워서 그녀는 온몸이 저절로 떨렸다.비록 그들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는지는 몰라도 절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안민아는 그녀의 목숨을 원하고 있었다.‘뭐 얼마나 큰 원한이 있었다고...’예전에 변슬기는 혹시나 그녀가 괴롭힘을 당할까 봐 걱정되어 도유준을 때려준 적도 있었다.‘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렇게 비열한 방법으로 해코지하려 하다니...’그 여자는 얼음이 든 양동이를 들고 안쪽 욕실로 가서 욕조에 모두 부어 버렸다. 그리고는 욕조에 물을 틀었다.다른 남자는 변슬기 쪽으로 다가와 그녀의 팔에 붕대를 단단히 감은 뒤, 여러 개의 혈액 샘플을 채취했다. 너무 많이 해 온 작업이라 무감각해졌는지 그는 변슬기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피를 뽑은 후, 그가 자리를 뜨자 변슬기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거야.’욕실에 있는 여자는 여전히 욕조에 물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따금 혼잣말을 했다.“얼음을 한 통 더 가져와야겠네. 아직 온도가 부족해.”변슬기는 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