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후 전화니?”주현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데이트하기로 했어? 나 혼자 할게. 얼른 나가봐...”“괜찮아요. 좀 기다리라고 하죠 뭐.”도아린은 주현정의 얼굴을 깨끗이 닦아드린 후에야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자마자 우렁찬 욕설이 그녀의 귀청을 째지게 했다.“도아린, 너 미쳤어?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왔네 이거 아주!”도아린은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대체 그가 뭣 때문에 이렇게 화내는 건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그녀는 주현정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문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왜 이래요? 건후 씨야말로 미쳤어요?”“짐 정리를 했다는 게 고작 이거야?”배건후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되물었다.“대충 흘려 넘기게?”오늘 아침 배건후가 캐리어를 챙기러 갔는데 안에 글쎄 목 어깨마사지기도 없고 온열 수면안대도 없는 것이다... 물론 그도 아예 이런 물건들을 쓰진 않지만 도아린이 챙겨 넣지 않은 건 엄연한 태도 문제였다.그를 더 화나게 만든 건 도아린이 맞춰준 3세트의 옷 모두 똑같은 스타일에 넥타이 색깔마저 똑같았다.“와서 다시 싸!”배건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지금 못 가요. 보살펴야 할...”“동생이 또 위급한 거야?”배건후가 야유 조로 물었다.“어제 나더러 약 사달라고 애원한 사람이 누구더라? 고작 하룻밤 만에 변한 거야? 왜? 이젠 내가 대신 도정국 씨 상대 안 해줘도 되는 거야? 아니면 뭐 아예 이혼할 생각을 접었어?”도아린은 이미 이혼 준비를 다 마쳤지만 그의 거만하고 야유 섞인 말을 듣고 있자니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그녀는 곧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았다.“미안한데 이번에 핑계로 쓰일 사람은 내 동생이 아니라 건후 씨 어머님이에요. 어젯밤에 갑자기 기절하셨는데 다행히 지금 위험에서 벗어나셨어요.”“...”배건후가 문득 침묵했다.“대표님은 공사다망하시다 보니 가족을 챙길 시간이 없으시네요.”도아린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다음번에 돌발상황이 발생할 땐
“엄마가 너한테 못 해준 게 뭔데? 어떻게 엄마가 이토록 위급할 때 이혼을 언급할 수 있어? 도아린, 제발 인간답게 살면 안 돼?”대체 누가 누구더러 인간답게 살라고 하는 것인지...이혼을 질질 끌면서 내연녀랑 뜨겁게 사랑을 나눌 땐 언제고...도아린은 이젠 그에게 철저하게 실망한지라 말투도 차갑고 강압적으로 변했다.“건후 씨 약점 잡고 있어야 하루빨리 목적에 달성하죠.”배건후는 그녀의 기세등등한 태도에 화가 나 이마에 실핏줄까지 튀어 올랐다. 그녀가 딴 사람에게 장뇌삼을 선물한 건 단지 배건후를 화나게 하고 그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전혀 아니었다.도아린은 하루빨리 그와 이혼하지 못해 안달이다.“도아린, 나 같은 말 반복하는 거 딱 질색인데 이번 한 번만 얘기할게. 이혼하든 말든 내가 알아서 정해. 그 인간들이 한 말 다 믿지는 마. 우리가 부부인 걸 알면 네가 들러붙어도 오히려 멀리 피해 다닐 거야.”도아린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그의 말에 화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나중에 어떻게 지낼지는 내가 알아서 해요. 건후 씨는 사인만 하면 돼요.”배건후의 눈빛이 점점 더 음침해졌다. 그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너랑 장난칠 시간 없어.”그가 확고하게 거절하지 않자 도아린이 말을 이었다.“그럼 출장 다녀와서 다시 얘기해요.”‘어차피 이혼은 정해진 일이니 요즘은 일단 어머님 보살펴드려야지.’그녀가 한창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배건후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꽉 잡고 아무도 없는 비상구로 걸어갔다.이어서 예고도 없이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순간 짙은 담배 향이 입안을 파고들었다. 배건후의 키스는 늘 이토록 터프하고 일방적인 법이다.도아린은 미처 대응할 겨를이 없었다.3년 내내 그는 도아린을 터치한 적도 없을뿐더러 키스한 적은 더더욱 드물다.가끔 몇 번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을 때가 있지만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본 후엔 바로 멈췄었다.하지만 이번엔...도
도아린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 제자리로 돌아갔다.이제 막 업무를 시작하려던 참인데 문나연이 차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사장님이 너 찾으셔. 이 차 들고 들어가 봐.”“그래...”“마침 잘 왔어.”나형욱이 웃으며 도아린을 반겼다.“이분은 송 감독 새 드라마 여주인공 손보미 씨야. 지금 한창 대역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었어.”금방 퇴원한 손보미는 넉넉한 핏의 화이트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다이아로 S자가 박힌 화이트 캡모자를 쓰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찻잔을 받다가 도아린을 보더니 흠칫 동작을 멈췄다.“사장님, 아현 씨가 묵묵히 제 대역하길 원치 않는다고 해도 그렇죠. 최소한 업계에서 자수 실력이 되는 사람으로 뽑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디 한낱 차나 따르는 사람으로 대충 얼버무리려고 해요?”나형욱은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재빨리 도아린의 반응을 살폈다.한편 도아린은 너무나도 차분했다.“송 감독님 작품이 비록 대체역사물이긴 하나 극 중의 의상은 전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했어요. 아현 씨가 복원한 자수 예복을 보았는데 용이 마치 살아 숨 쉬는 것 같았고 고귀함이 흘러넘쳤어요. 자수 수법은 딱 봐도 대가 수준인데 애석하게도 아현 씨가 너무 겸손하게 지내시다 보니 인맥을 아무리 동원해도 여태껏 얼굴 한 번 뵙지 못했죠.”손보미가 거만을 떨며 말을 이었다.“그런 분을 제 대역으로 쓰는 건 확실히 좀 서운할 만한 일이죠. 그 대신 제가 더 많은 소스를 제공해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제 옆에 능력자 친구가 한 명 있거든요.”‘아주 배건후의 이름을 대놓고 말하시지 왜?!’옆에 있던 나형욱도 바로 알아들었다. 손보미는 한때 본인처럼 눈앞의 도아린이 바로 전설 속의 아현이란 걸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는 것을.“보미 씨.”나형욱이 찻잔을 손보미 앞으로 내밀었다.“실은...”“사장님.”이때 도아린이 그의 말을 잘랐다.“비록 대역이긴 하나 여주인공 대역이라 스킬도 있고 교양도 있으며 허영심도 매우 강한 분으로 픽해야 할 것 같군요.”나
우정윤은 자신의 심복을 시켜 옷 수선하라는 빌미로 LH 스튜디오에 찾아가게 했다.한편 스튜디오에 들어서자마자 도아린이 찻잔을 들고 훈계를 듣는 듯 안색이 어두웠다고 전했다.“차를 따른다고?”배건후가 사인펜을 놓아버리자 책상에서 빙그르르 굴렀다.그의 눈빛이 한없이 음침해졌다.“모두가 부러워하는 부잣집 사모님 팔자를 제쳐두고 기어코 스스로 깎아내리면서 딴 사람 시중이나 드는 거야? 내가 자유를 줘도 너무 줬어. 속세의 고달픔이라곤 전혀 모르잖아!”“...”우정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네요. 정작 하는 행동은 누구보다 야박하면서...’애초에 배건후가 출장 갔을 때 도아린은 꼭꼭 전화해서 그곳 날씨는 어떤지, 숙박 환경은 어떤지, 미팅 준비는 잘 되어가는지 꼬치꼬치 캐묻곤 했었다...그때마다 배건후는 짜증 내며 우정윤더러 전화를 받고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대며 업무가 바쁘니 적당히 전화하라고 시켰다. 그 뒤로 도아린은 카톡 하나 보내지 않았다.우정윤은 그런 그녀가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자들은 남편이 집에 안 돌아오고 용돈을 실컷 준다면 밖에서 어떻게 놀아날지 모르니까....도아린이 창고에서 명주실을 고를 때 문나연이 문을 비스듬히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왜?”“밖에 잘생긴 남자분 왔어.”문나연은 문틈 사이로 그녀를 내다보게 했다.“저기 정장 입은 저 남자.”도아린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시선을 옮겼더니 아니나 다를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남자를 발견했다.“처음엔 손보미 팬인 줄 알았는데 손보미가 나올 때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 있지.”문나연은 그녀에게 웃으며 말했다.“너 찾아온 거야. 호감 가면 내가 대신 두 사람 이어줄게. 별로면 내쫓아버리고.”“...”도아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정장 외투 포켓에 반쯤 드러난 명찰을 보았는데 모건이라고 적혀 있었다.배건후가 설마 도아린이 손보미를 해칠까 봐 사람을 보내 뒤에서 몰래 감시하게 한 걸까?“꽤 잘생겼는데 소심한 것 같아.”문나연이 두 눈을 굴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도아린이 재빨리 발뒤꿈치를 들고 그를 살펴보았다.“그게 아니라 간만에 팔 운동하니 조금 뻐근하고 그러네요.”남자는 팔목을 움직이며 그녀를 갸웃거렸다.“그나저나 그쪽 꽤 용감하시네요. 어릴 때부터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셨어요?”도아린은 낯선 사람과 대화하길 꺼리지만 이 남자가 워낙 겸손한 태도에 말투도 온화한지라 거부할 수가 없었다.“저도 한때 길에서 소매치기당한 적 있거든요. 그때 가방 안에 수험표가 들어있어서 남동생이 휠체어 탄 채로 쫓아가다가 하마터면 차에 치일 뻔했어요. 그 뒤로 이런 일이 있으면 그냥 못 넘어가겠더라고요.”“동생분도 참 용감하시네요.”육하경이 웃으며 말했다.“보통 이런 일을 겪으면 트라우마로 남겠는데 그쪽은 용케 극복하고 정의 구현하고 있잖아요. 너무 대단해요.”그는 말 한마디로 도아린과 도지현 모두 칭찬했다. 역시 칭찬을 마다할 사람은 없었고 도아린도 내심 흐뭇했다.그녀가 이제 막 말을 이어가려고 할 때 문나연한테 전화가 왔다. 그 자식 한바탕 혼내고 쫓아버렸으니 얼른 돌아오라고 전했다.“저는 그럼 이만 가볼게요.”도아린이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서 스튜디오로 들어갔다.육하경은 그녀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더니 입가에 번진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헬스장으로 돌아가니 성대호가 한창 트레이너의 감시하에 숨을 헐떡이며 앉았다 일어서기를 하고 있었다.“야 이 자식아, 물 사 오라고 했잖아. 진짜 날 목말라서 죽이고 내 자리 차지하려는 속셈이야?!”육하경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윗몸일으키기를 하면서 넌지시 대꾸했다.“네 죽음은 필연코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흔적을 남길 거야.”“...”성대호는 숨이 턱 막혀 시트에 앉으면서 쏘아붙였다.“뭘 그렇게 실실거려?”육하경은 겸손하고 온화한 성격에 가족 관계상 또래들보다 좀 더 진중한 편이다. 그런 그가 밖에 한 번 나갔다 오더니 사 오라는 물은 안 사 오고 줄곧 입꼬리가 올라가 있으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좀 전에 밖에서 선행
배건후가 결혼할 때 성대호만 옆에 있었는데 소문에 의하면 그의 와이프가 예쁘고 성격 좋은 데다가 배건후의 말이라면 절대복종한다고 했다.그랬던 두 사람이 이혼한다고 하니 오지랖 넓은 성대호가 들뜨지 않을 리가 있을까.“바로 이틀 전에도 형수님이 건후 보더니 피해 다니는 거야. 슬슬 헤어질 준비를 하시나 봐.”“닥쳐!”배건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성대호는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어차피 배건후는 지금 해외라 그를 어찌할 수가 없으니까.“누구는 끝까지 거만을 떨다가 차이고 나서도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다니까.”배건후가 속으로 생각했다.‘영상 통화를 걸지 말았어야 했어.’이때 육하경이 그의 등을 톡톡 두드리자 성대호도 곧장 형세 파악이 됐다.“아 참, 엠파이어 빌딩이 얘 거잖아. 얘보고 그 여자 누군지 조사해달라고 하면 되지.”“무슨 여자?”배건후가 담뱃불을 지피며 질문을 건넸다.이에 성대호가 방금 육하경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아주 생동하게 묘사하며 배건후에게 들려주었다. 배건후는 살짝 의외긴 했으나 선뜻 친구를 도와 나섰다.“뭐 좀 특별한 점은 없었어?”성대호가 한마디 덧붙였다.“특별히 예뻤대.”육하경이 웃으며 대꾸했다.“그렇게 식상한 예쁨 말고 용감하고 개성 있는 아름다움이었어.”“...”배건후가 담배를 두어 모금 빨았다.“좀 더 상세하게 말해봐. 키, 헤어스타일, 유니폼 이런 것들 말이야. 그래야 사람 시켜서 조사하지.”“아니다 됐어.”육하경이 문득 고개를 내저었다.“안 그래도 칼 같은 성격이던데 내가 뒷조사하는 거 알면 친구조차 못 할 거야. 운명에 맡기지 뭐.”옆에 있던 성대호가 코웃음을 쳤다.“몇 마디 대화로 성격이 칼 같은 것까지 알게 됐어?”“여자들 보통 소매치기범 마주치면 기껏해야 경찰에 신고할 텐데 그 사람은 선뜻 범인을 쫓아 나섰어. 이거면 충분한 거 아니야?”배건후도 그의 말이 일리가 있어 보였다.“맞아. 너무 적극적이면 소매치기범 잡았던 게 트릭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네
병실에 들어서자 안경을 쓴 채 침대에 기대어 신문을 읽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엄마, 오늘은 훨씬 좋아 보이시네요.”“개나 소나 찾아오지 않으면 더 빨리 나았을 텐데 말이야.”주현정이 신문을 넘기며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배지유는 뻘쭘한 얼굴로 침대 옆에 앉았다.“엄마, 사실 그때 ‘야밤의 대본 리딩’은 오해였어요.”당시 손보미는 배역을 따내기 위해 감독이 흑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밤늦게 방까지 찾아갔다. 모든 건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갔고, 본인을 희생한 대가로 목적을 이루기도 했다.다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복도에 걸어 나오는 순간 마침 집에 묵고 있던 주현정의 눈에 띄게 되었다.결국 주현정은 손보미라면 치를 떨었다.“그럼 이것도 오해겠네?”주현정이 대뜸 신문을 던져 버렸다.기사에는 배건후가 ‘야밤의 미팅’을 진행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을뿐더러 누군가 청호상 시상식 백스테이지에서 찍힌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두 남녀가 서로 껴안은 흑백 실루엣도 얼핏 보였는데 모든 상황이 당사자가 배건후와 손보미라는 사실을 증명했고, 게다가 곧 좋은 소식이 들릴지도 모른다고 했다.배지유는 코를 쓱 만지며 미소를 쥐어 짜냈다.“언론사들이 내용을 조작했겠죠.”“이 사진을 누가 제보했는지 알아?”주현정은 젊었을 때 JS 픽처스의 대표였다. 나중에 딸을 낳고 건강 악화 이슈로 일선에서 물러나 경영권을 인계한 지 얼마 안 되었다.배건후는 출신 자체가 달랐고, 비록 몰래 결혼한 것 때문에 가끔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본인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감히 폭로하지 못했다.언론이 손보미와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즉, 사진을 제공한 사람이 배건후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측근이라는 것이다.이처럼 든든한 존재가 방패막이 되어주니 매체들도 믿는 구석이 있고 대거 홍보했다.사실 주현정은 아들이 도아린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며느리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라 지켜주기로 마음먹었다.“네 큰아버지한테
사실 도아린이 대역을 하든 말든 LH 스튜디오가 송민혁의 담당 컨설턴트임은 변함이 없었다.도아린은 더 좋은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박물관을 예약해서 관람하기로 했다.그녀가 박물관에 도착했을 때 이미 줄이 길게 이어졌다.이때, 문나연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수선이 필요한 고객 옷 때문에 그녀의 의견을 물었는데 곧바로 답장을 보내며 사람들을 따라 앞으로 조금씩 이동했다.마침내 그늘진 곳에 도착하자 누군가의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았다.“이런 우연이 있나? 너도 구경하러 온 거야? 일이 있어서 좀 늦었는데 맨 뒷줄은 해가 너무 쨍쨍해서 같이 들어가면 안 될까?”도아린이 고개를 들어보니 검은색 점프슈트를 입은 손보미가 손으로 이마를 가린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공들인 메이크업과 커다란 선글라스, 그리고 목에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까지 더해 부티가 줄줄 흘렀다.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기 마련인지 몰라도 매번 두 사람이 마주칠 때면 옷이 항상 같은 색 계열이었다.비록 도아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액세서리가 하나도 없었지만 분위기든 몸매든 상대방을 압도했다.그녀는 딱 잘라 거절했다.“뒤에서 줄 서는 사람도 생각해야지.”마침 줄이 이동하자 손보미는 자연스럽게 나란히 섰다.“어쨌거나 얼굴이 알려진 사람인데 괜히 악성 루머나 생성하지 마.”도아린이 쌀쌀맞게 말하더니 팔꿈치로 손보미를 밖으로 밀어냈다.그러나 장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에는 뒤로 비집고 들어갔다.“그날 밤 너랑 건후 씨를 방해해서 미안해. 두 사람의 사이를 훼방 놓을 생각은 없었어. 단지 어찌할 바를 몰라서... 건후 씨가 그렇게 늦은 밤에도 찾아올 줄 몰랐지.”도아린은 그녀의 변명 따위 가뿐히 무시하고 계속해서 사람들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일을 저질러 놓고 욕은 듣기 싫다는 건가? 우습군.”만약 손보미가 계속해서 이 화제를 이어간다면 스스로 먹칠하는 것과 다름없었다.이내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아냥거리는 얼굴로 말했다.“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