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짐을 싸고 있던 권하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몸이 기우뚱해지면서 그대로 캐리어 안으로 넘어졌다.이에 고개를 홱 돌린 채 토라진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웠다.“왜요?”하지만 말을 내뱉자마자 부드러운 모습으로 상대를 감동하게 하겠다던 계획을 떠올리자 이내 말투를 누그러뜨렸다.“도운도 안 주면서 왜 방해하고 그래요.”민도준은 몇 초 사이 바로 태도를 바꾸는 하윤의 모습이 재밌어 피식 웃고는 하윤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됐어. 거기 가서 모자란 게 있으면 사람을 시켜 사 오게 하면 그만이야.”“그런데 남이 준 게 마음에 안 들면 어떡해요?”하윤은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를 인식한 듯 눈을 번쩍 들었다.“잠깐만. 도준 씨 강원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설마 거기 옛 애인이 있다거나 그런 거예요?”누그러든 척하다가 곧바로 다시 본성을 드러내는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왜? 그 여자들과 교류라도 해보려고?”‘여자들? 교류?’순간 하윤은 가슴이 욱신거렸다.‘역시 남자는 믿을 게 못 돼. 아까까지만 해도 나한테만 관심이 있다더니 강원 쪽에 애인이 있었던 거네.’화가 났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자 하윤은 고개를 돌린 채 다시 짐을 싸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자기 옷은 고이 개어 넣고 도준의 옷은 대충대충 뭉텅이 채로 넣어버렸다. 마치 사람한테 풀지 못한 화를 옷에 푸는 것처럼.전용 비행기에 올라탈 때 하윤은 겨우 부글거리던 마음을 조절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좌석에서 립스틱을 발견했다.아까 도준이 강원에 여자를 숨겨놨을 수 있다는 생각하면서 하윤은 질투가 나긴 했지만 어느 정도 믿지 않기도 했는데 이제 립스틱까지 버젓이 나타나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이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 모습을 보고 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이제 곧 이륙할 텐데 그렇게 뛰어다니다가 넘어져.”“저 뒤에 가서 앉을래요.”두 사람이 탄 전용 비행기는 큰 기종이 아니기에 안에 4개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때문에
권하윤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자 민도준은 느긋하게 의자에 기댔다.“정찰 다 마쳤어? 어디에서 사과하는 게 좋은 거 같아?”도준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지만 그가 보내는 눈빛에서 하윤은 이번 사과를 몸으로 때워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다.지레 겁을 먹은 하윤은 슬금슬금 도준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마치 천적을 피하는 동물처럼.하지만 그 동작은 얼마 지속되지 못 하고 곧바로 제지당했다.남자의 손이 하윤의 허리를 감쌌고 뜨거운 손의 온도가 옷감을 뚫고 살에 전해져 손이 닿은 곳은 살갗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이에 하윤은 얼른 손을 내밀어 도준의 손을 잡았다.“잠깐만요…….”“뭘?”하윤은 널찍한 탓에 더 훤히 보이는 기내를 둘러보더니 창밖을 가리키며 고래를 저었다.“여기는 하나님과 너무 가까워서 이건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에요.”도준은 하윤의 말에 약 2초간 멈칫하다가 끝내 웃음을 터뜨리며 하윤의 허리를 주물렀다.“이런 핑계도 생각해 낸다고?”하윤은 간지러운 탓에 몸을 옆으로 피하며 이대로 넘어갔다는 안도감에 고집 있게 밀어붙였다.“틀린 말도 아니잖아…… 아!”갑작스러운 남자의 동작에 놀라 하윤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대다가 아까 자기와 도준을 서비스해 주던 승무원이 커튼 뒤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내 입을 막았다.그러면서 도준에게 눈빛을 쏘아대며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다고 꾸짖었다.그때 귀 뒤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며 목소리가 들려왔다.“그거 잘됐네. 나 원래 하나님한테도 시비 걸기 좋아하거든.”하윤은 몸부림치는 데 실패하자 소리가 새지 않게 입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준을 째려보는 눈에 눈물이 촉촉하게 맺혀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사람을 유혹했다.더욱이 도준은 악랄하게 하윤을 달래기 시작했다.“내 비위 맞춰서 마음 돌리려 하는 거 아니었어? 이렇게 좋은 기회를 이용해야지.”하윤은 순간 자기가 상대의 계략에 빠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자기가 도준을 두고 소심한 계략을 세우고 있었는데 오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하윤은 옷을 갈아입었다.그도 그럴 게, 입고 있던 옷이 뼈마디가 선명한 손에 잡혀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기 때문이다.아마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그 모습을 보고 두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지 바로 눈치챘을 거다.두 사람이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에이프런에는 이미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하윤이 마치 서치라이트저럼 눈을 번뜩이며 주시하는 가운데 차 문이 열렸고 안에서 사람 한 명이 걸어내렸다.하지만 그 사람은 하윤이 생각했던 예쁜 여자가 아니라 팔자걸음으로 껄렁하게 걸어오는 문신남이었다.“이게 누구십니까? 존경하는 우리 민 사장님 아닙니까?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 늘 그리웠습니다. 이번에 재가 제대로 대접해 드리죠.”문신남은 입꼬리를 올리며 도준에게 말을 걸면서 눈은 하윤을 살폈다.그 시선에 불편해진 하윤은 옷매무새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아 망신이라도 당하는 건 아닌지 당황해하기 시작했다.그때문에 단아하고 우아하던 얼굴에 오히려 색다른 분위기가 가미되었고 여전히 발그스름한 눈꼬리까지 더해지자 사람의 넋을 빼앗았다.그때 손 하나가 한참 넋을 잃고 있던 장욱의 뒤통수를 가격했다.“뭘 빤히 보고 있어?”고개를 돌리자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있는 도준의 모습이 장욱의 눈에 들어왔다. 그 미소에서 위기감을 느낀 장욱은 얼른 허허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신기해서요.”하지만 하윤이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걸 바로 깨달은 장욱은 하윤에게 감히 무례하게 대할 수 없어 얼른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 장욱입니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하윤은 이내 예의 있는 미소를 지었다.“그냥…….”“내 제수씨야.”도준은 하윤의 말을 끊어버리고는 눈을 둥그렇게 뜬 장욱을 보며 느긋하게 말을 보탰다.“지금은 나랑 교제 중이고.”“?”너무나도 큰 충격에 장욱은 차에 오른 뒤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뒷좌석에 앉은 민도준이 나른한 목소리로 고요함을 깨트렸다.“네 보스는 어디 갔어?”“보스…
별장은 경치를 감상하기 무척 편리했다. 창문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주위의 우거진 숲과 파란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별장의 3층 창문 앞에 서서 멀리 내다보자 아까까지 꾹꾹 눌러두었던 불만도 완전히 사라졌다.“경치 진짜 아름답네요.”권하윤은 넋을 잃은 듯 창밖을 바라봤다.완전히 창문에 바싹 붙어 얼굴을 유리에 대고 경치를 감상하는 하윤의 모습에 민도준의 눈에는 또 장난기가 더해졌다.“그러네.”한창 경치를 감상하고 있을 때 남자의 손이 하윤을 유리창과 팔 사이에 가두었다. 이윽고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하윤을 감싸 안았다.“여기에서 특별한 추억 만들어 줄까?”“싫어요.”하윤은 고개를 뒤로 젖혀 도준의 가슴에 한참 동안 조용히 기대 있더니 나지막하게 감탄했다.“앞으로 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좋겠네요.”“안 될 것도 없지. 경성으로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지내면 되겠네.”하윤은 도준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 투덜거렸다.“거짓말.”“진짜야.”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남자의 목소리는 사람을 홀릴 정도로 고혹적이었다.“그렇게 여기가 좋으면 안 돌아가면 되잖아.”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는 말에 도준 특유의 농담 섞인 말투가 섞이자 하윤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정신을 차렸다. 여긴 별장보다 조금 아름다운 철창일 뿐이지 별장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꿈틀거리던 마음이 다시 평온을 찾자 하윤은 입을 열었다.“경성에 할 일도 많으면서 어떻게 저와 함께 다른 곳에 짱박혀 있을 수 있어요?”더욱이…….오빠를 포함한 식구들이 해원에서 기다리고 있는데.하윤은 말을 채 끝맺지 않았지만 도준은 그 속에 숨은 뜻을 이내 알아챘다.그래서인지 다시 입을 여는 순간 도준의 말에는 웃음기가 조금 지워지고 의미심장한 톤만 남았다.“착하네.”헤아릴 수 없는 분위기 때문에 방금 전까지 따뜻하게 느껴지던 포옹도 족쇄처럼 느껴졌고 자꾸만 느껴지는 불안감에 하윤은 도준의 품 안에서 빙글 돌더니 손으로 목을 끌어안았다.“주위 경치가 예쁜
빙빙 에둘러 말하려 했지만 하윤의 속내는 도준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이에 도준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윤을 쳐다봤다.“또 뭘 영탐하려고?”하윤은 속마음이 들키자 아예 억지를 부리며 어깨로 도준의 탄탄한 몸을 부딪혔다.“에이, 영탐이라니요?”도준은 아직 한참 남은 산길을 힐끗 거리며 무심한 듯 대답했다.“응? 그럼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전 도준 씨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이러는 거잖아요. 예전에 고생했을까 봐.”도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기를 위해 변명하는 하윤을 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어디 만져봐야겠네.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하지 마요.”하윤은 도준의 손을 피하며 다급히 돌계단을 두 층 뛰어올라갔다.도준의 큰 키 때문에 평소에도 까치발을 자주 해야 하는 하윤이었기에 이렇게 두 계단 위에 올라서 상대를 내려다보자 왠지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거리가 멀어지고 높이가 높아져서인지 도준한테서 자주 느끼던 압박감도 산속에서 부는 바람을 따라 날아가 버렸다.때문에 다시 입을 열었을 때 하윤의 목소리에는 우쭐거림이 묻어있었다.“얼른 말해요. 더 위험한 곳이 어디였는데요?”하윤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도준이 그녀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하윤은 두 계단 더 올라가려고 했지만 채 올라가지 못한 채 상대의 팔에 잡혀 뿌리칠 수도 없게 되었다.그 순간 방금전까지 득의양양해하던 기세는 사라지고 이내 애교를 담아 도준의 팔을 흔들었다.“말해 봐요.”그때 도준이 흔들거리는 하윤의 팔을 잡았다.“더 농땡이 부리다가 날이 어두워져.”잡아당겼지만 상대가 움직이지 않자 하윤의 작은 얼굴에는 원망이 가득 더해졌다.도준은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모처럼 하윤의 말에 순종했다.“가면서 얘기해줄게.”“역시 도준 씨밖에 없어요.”비스듬히 비친 햇살 아래 나무 그늘 아래에서 활짝 피어난 하윤의 미소는 마치 이 계절에 없는 꽃 같았다.그리고 그 순간 도준은 깊은 눈동자에 그 예쁜 미소를 담았다.“우리 가요.”하윤
사실 권하윤은 산길을 오르는 사이 민도준의 신비로운 과거를 캐낸 다음 나무에 소원을 빈다는 핑계로 도준에게서 약속을 얻어낼 생각이었는데 그런 생각도 험난한 산길 때문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사실 오기 전부터 장욱은 산길이 험난해 오르기 어렵다고는 했지만 이건 보통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너무 어려웠다.발바닥 크기만 한 계단도 모자라 바람에 흔들대는 흔들다리를 보자 하윤의 가슴은 콩닥콩닥 쉴 새 없이 뛰었다.이에 발걸음도 머뭇거리기 시작했다.“저기, 날도 어두워 월하노인이 있대도 진작에 퇴근했을 것 같은데 우리도 돌아가요.”도준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커다란 손으로 하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가슴이 이렇게 콩알만 해서 어쩌려고 그래?”하윤을 등진 넓은 어깨가 살짝 앞으로 쏠리더니 허리를 활처럼 휜 도준이 입을 열었다.“업혀.”그 순간 잠시 멍해 있던 하윤은 잔뜩 흥분한 듯 당장이라도 도준에게 업히고 싶었지만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저 업고 가려고요?”하윤이 대시 확인하기도 전에 도준은 다리를 굽혀 앉아 하윤을 자기 등에 업었다.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하윤은 남자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그때 도준이 고개를 살짝 돌리며 입을 열었다.“안 그러면? 하윤 씨더러 혼자 올라가라고 하면 월하노인이 아니라 저승사자를 먼저 만날 것 같은데 그럼 어떡해?”하윤은 더 이상 발아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자 잔뜩 긴장했던 몸도 나른해졌다.“좀 예쁘게 말하면 안 돼요?”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선이 높아지니 볼 수 있는 풍경이 더 많아졌다.이윽고 도준의 옆모습을 보니 언제나 오만하고 거칠던 사람이 한껏 자세를 낮춘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하윤은 자기 팔에 꽉 눌린 도준의 어깨를 힐끗 보더니 그의 팔에 들려 있는 자기 다리를 살짝 움직이며 편안한 자세로 기댔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붕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때 하윤이 꿈틀대는 걸 느낀 도준이 입을 열었다.“나를 올라타고 있으니 아주 좋아 죽겠지?”분명 평범한 한마디였지만 도준의 말투 때문인지
발이 땅에 닿을 때 하늘은 마침 노을로 붉게 물들어 나무에 걸린 수많은 붉은 실과 한데 어우러졌다.권하윤은 잔뜩 신이 나서 부업으로 나무 팻말을 판매하는 농민들한테서 팻말을 구입해 자기 이름을 쓰고는 도준에게 건넸다.그 눈빛은 너무 간절하여 입을 열지 않아도 뭔 말을 하려는 건지 설명해 주었다.살짝 교활함을 띠고 있는 눈빛은 어둑해지는 하늘보다 빨리 별빛을 반짝였다.하윤의 얼굴을 따라 내려가 보니 작은 나무 팻말 위에 적힌 이름 세 글자가 눈에 보였다.[이시윤.]하윤은 표정을 감추고 있었지만 속은 조마조마했다.이 작은 팻말은 아무 의미도 없지만 또 하윤에게는 어느 정도 의미가 있었다.왜냐하면 이건 그녀가 내디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남자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자 하윤은 또다시 불쌍한 눈빛을 내보내며 손바닥만 한 나무 팻말을 도준 앞으로 쑥 내밀었다.“여기까지 왔는데 적어요.”하윤도 소리 없는 가랑비가 만물을 적신다는 도리는 알고 있다. 때문에 일부러 이름은 말하지도 않고 그저 속으로만 천지신명께 부탁했다.끝내 도준이 하윤이 건넨 작은 나무 팻말을 받아들었다. 원래도 작은 팻말이 남자의 손안에 있자 귀여울 정도로 작아 보였다.도준은 작은 팻말을 받아쥐고는 입안에서 혀를 굴리며 재밌다는 눈빛으로 하윤을 바라봤다.그러더니 끝내 하윤의 기대에 찬 시선 속에서 붓을 들어 이름을 썼다.도준의 글자체는 주인을 닮아 자유분방했다.하윤이 작은 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소원 팻말을 받아쥐려고 했지만 손이 닿기 전에 도준이 팻말을 뒤로 뺐다.“갖고 싶어?”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묻는 도준의 말에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 팻말을 나무에 걸기만 하면 소원이 없을 테니까.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가 이름을 쓴 나무판자를 훑더니 손은 하윤의 턱을 들어 올렸다.“자기한테 득 되는 것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잊어버린다 이거야? 또 무슨 꿍꿍이지?”붉은 칠을 한 나무 팻말로 들어 올려 확인한 하윤의 얼굴은 잔뜩 찔려하는 모습이었다.하지만 눈 깜짝할
권하윤이 허튼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뜨거운 손바닥이 하윤의 차가운 볼을 어루만졌다.그 뜨거운 온도에 하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잘 생각해야 할 거야. 지금 그 얘기 할 거야?”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민도준이 눈빛과 말투에 섞인 싸늘함을 느끼는 순간 하윤은 상대가 하려는 말이 자기가 원하는 대답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아직 닷새나 있는데 첫날부터 틀어지면 안 돼.’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하윤을 당황하게 했다. 이에 손을 뻗어 도준을 와락 껴안은 뒤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이렇게 중요한 걸 대충 대답하면 안 되죠. 적어도 며칠 정도 생각할 시간을 줘야죠…….”하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심지어 먹이의 유혹을 참지 못 하고 포획 틀 주위를 조심스럽게 어슬렁거리면서 유혹과 안전이라는 어려운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는 새끼 짐승 같았다.도준은 손가락으로 하윤의 머리카락을 쓸며 짙고 어두운 눈으로 하윤을 빤히 바라봤다.그때 함참동안 마음을 추스른 하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쳐들고 손에 나무 팻말을 들고 있는 도준을 바라봤다.“그럼 그건…….”방금 전 상황 때문에 하윤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 하고 도준을 빤히 바라보며 작은 팻말을 처분할 권리를 도준에게 넘겼다.어제까지만 해도 날아갈 것처럼 좋아하던 여자가 잔뜩 겁을 먹은 걸 보자 도준은 끝내 자비를 베풀었다.그는 팻말에 빨간 실을 달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어디에 걸고 싶어?”하윤은 작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한 곳을 가리키고는 이내 손을 거두었다.하지만 두 사람의 이름이 적인 팻말이 자기가 가리킨 나뭇가지에 걸린 걸 보자 마음이 따뜻해졌다.문제는 다음 순간 나뭇가지에 매단 팻말이 탁하고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입꼬리를 말아 올릴 새도 없이 바닥에 떨어진 팻말을 보자 하윤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확인해 보니 빨간 끈이 끊어진 거였다.너무 오랫동안 이곳으로 여행 오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조금 낡은 끈이라 견고하지 않은 모양이었다.하윤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