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이 싫은 척 거절하다가 다시 앞으로 다가갔을 때 민도준은 손가락으로 권하윤의 턱을 쓱 문질렀다.“몇 살인데 얼굴에 뭘 묻히고 다녀?” 그 순간 권하윤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뭔가 있을 줄 알았더니 얼굴에 크림이 묻은 거였어?’“아.”권하윤은 화가 난 듯 자기 얼굴을 마구 문질러 댔다. 솔직히 민도준에게 화가 났다기보다는 이상한 생각을 한 자기한테 화가 났다.하지만 그런 생각은 당연히 민도준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빨개졌는데 뭘 계속 닦아내?”‘뭘 안다고 그래요? 제가 닦아내는 건 크림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라고요!’하지만 당연히 이 말은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그저 고개를 홱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볼 뿐.그때 민도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이리 와봐. 깨끗하게 닦아졌는지 보게.”권하윤은 고개를 돌린 채 끝까지 보여주지 않으려고 발악했다. 하지만 오히려 강제적으로 고개가 돌려 결국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도준 씨를 보기 싫거든…….”미처 뱉어내지 못한 한 글자는 순간 민도준의 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달콤한 냄새가 입술 사이로 흩어지는 사이 권하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민도준에게 끌려 그의 다리 위에 낮아 버렸다.이윽고 밭은 숨소리와 함께 민도준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원하는 게 이런 거였어?”물론 더 친밀한 관계도 가져봤지만 권하윤은 오래도록 뒤엉켜 이어진 입맞춤에 저도 모르게 귀밑까지 붉어졌다. 심지어 이대로 민도준에게 안겨 녹아내리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때문에 민도준이 권하윤을 풀어 줬을 때도 권하윤은 여전히 애타는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낮은 신음을 내뱉으며 민도준에게 엉겨 붙었다. 그런 붙을듯 말듯한 거리는 오히려 더 사람을 미치게 했으니까.마치 갓 이빨이 난 새끼 동물처럼 자기 턱을 자꾸만 짓씹어 대는 권하윤의 모습에 민도준은 못 말린다는 듯 권하윤을 떼어내며 턱을 들어 올렸다.“뭐야? 발정 났어?”“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권하윤은 얼굴을 붉히며 불만스럽게 중얼
민도준이 떠난 뒤 권하윤은 계속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서 일어나 씻고 자기가 고이 숨겨 두었던 핸드폰을 꺼냈다.그러고는 전원을 켜고 공태준의 번호를 누를지 말지 망설이기 시작했다.권하윤은 떠나고 싶었다. 게다가 그 기회는 이번 주 일요일 기자회견 날이고.더욱이 권하윤을 데리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은 공태준뿐이었다.분명 전에 공태준과 해원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을 해둔 상태라지만 다시 떠나려고 하니 권하윤은 왠지 자꾸만 망설여졌다.그도 그럴 게, 이 전화를 걸면 앞으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아니까.권하윤이 계속 그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 조용하던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하기 시작했다.권하윤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핸드폰을 던져버릴 뻔했다.하지만 이 핸드폰 번호를 알고 있는 건 민성철과 공태준뿐이라는 생각에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수신 버튼을 눌렀다.“윤이 씨? 혹시 방해한 건 아니죠?”조심스럽게 질문하는 나지막한 목소리.권하윤은 공태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공태준이 전화를 건 시간이 하필이면 너무 기막힌 타이밍이라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의문을 품었다.“내가 지금 전화 받을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윤이 씨가 핸드폰을 켰으니까요.”‘켰으니까? 설마 이 핸드폰…….’“걱정하지 말아요. 전 그저 여러번 전화했었던 것뿐이에요.”권하윤이 핸드폰을 켠 지 이제 10분도 채 안 되는데 여러 번이 아니라 이 정도면 계속 전화한 게 더 합당하다.권하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공태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다리는 어떻게 됐어요? 다 나았어요?”“괜찮아.”“다행이네요.”공태준은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요즘 윤이 씨랑 연락이 안 돼서 윤이 씨 어머니께서 많이 걱정하고 계세요.”“무슨 뜻이지?”권하윤은 순간 멈칫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저는 그저 윤이 씨가 가족과 오랫동안 연락이 안될 것 같아 대신 안부를 전해준 것뿐이에요.”“우리가 다시 돌아가면 제가 바로 윤이 씨 가족 국내로
“미안해요. 미리 말하지 못해서. 제가 실수했어요. 혹시 화났어요?”권하윤은 공태준과 말다툼할 기분도 아니었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딱 잘라 말했다.“난 왜 그랬는지 듣고 싶은데. 내가 도준 씨 제수씨가 돼야 당신한테도 유리한 거 아닌가?”그 말에 공태준은 약 2초간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 일은 앞으로 천천히 알게 될 거예요.”어물쩍 넘기는 듯한 말에 권하윤은 갑자기 민상철이 얼마 전 했던 말이 떠올랐다.권하윤한테 이제는 민도준과 당당하게 함께 있을 수 있는 신분이 생겼는데 민도준이 왜 계속 가둬줄까 하던 그 한마디.‘설마 공은채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나?’‘무슨 일이길래 공은채의 죽음보다 더 중요하지?’하지만 공태준은 권하윤에게 알려주려 하지 않는 눈치인지라 계속 물어본대도 답을 알아낼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권하윤은 대충 이유를 둘러대며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러고는 발각되지 않게 핸드폰을 꺼버리고 다시 숨겨두었다.그러다가 핸드폰과 같은 자리에 숨겨둔 USB를 본 권하윤은 순간 멈칫했다.‘혹시 이 안에 답이 있을까?’점심시간 권하윤에게 배달을 하러 온 사람은 경호원이 아니라 진소혜였다.“하이, 하윤 언니!”진소혜는 두 손에 물건을 가득 들고 유일하게 자유로운 머리를 양옆으로 흔들며 권하윤에게 인사했다.그 모습이 귀여워 권하윤은 피식 웃더니 이내 앞으로 다가가 진소혜에게로 다가가 양손 가득 든 점심을 받아 들려고 손을 뻗었다.하지만 진소혜는 오히려 손을 뒤로 뺐다.“에이, 언니는 손대지 마요. 대신 제 노트북을 테이블 위에 올려주겠어요?”노트북이라는 단어에 권하윤의 시선은 순간 진소혜가 오른손에 든 가방에 집중되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하지만 이내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노트북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노트북은 왜 가져 왔어요? 혹시 또 일할 게 남아 있어요?”“네!”진소혜는 악에 받힌 듯 테이블 위에 놓인 치즈볼 하나를 입에 집어넣으며 투덜대기 시작했다.“어쩐지 제가 먹을 것까지 챙겨준
권하윤이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 봤더니 두들겨 맞다시피 사용된 노트북은 어느새 뜨거워져 있었다.진소혜가 비번이라도 설정했을까 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우스를 살짝 움직여 봤더니 의외로 노트북 화면은 이내 밝아졌다.이에 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진소혜가 있는 쪽을 살폈다.다행히 요즘 착즙 되다시피 일한 데다 아까 연속 4시간 동안 코드를 해제하느라 에너지가 모두 고갈된 진소혜는 아예 양팔과 다리를 대자로 뻗은 채로 자고 있었다.그제야 권하윤은 안심되는 듯 다시 노트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어, 비번이 없어.’권하윤은 기쁘고도 긴장된 마음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이 시각, USB를 들고 있는 권하윤의 손바닥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 끈적거렸다.이에 두 번 적도 USB를 꽂으려 했지만 모두 손이 미끄러져 세 번째 만에 성공했다.그와 동시에 USB를 연결했다는 알람음이 함께 울렸다.USB 아이콘이 노트북 화면에 나타나고 나서야 권하윤은 마우스를 슬쩍 움직여 클릭했다.예전에 봤던 것과 마찬가지로 안에는 [사진], [영상], [생일] 이 세 개 폴더가 있었다.생일은 전에 본 거라서 이번에 권하윤은 영상을 클릭했다.안에 영상이 많이 저잗되어 있을 것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고작 3개밖에 보이지 않았다.첫 번째 영상은 병원에서 시작되었다.잇따라 병상에 누워 자고 있는 공은채의 모습이 보였고 민도준이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민도준은 긴 팔과 다리를 소유한지라 그저 앉아 있기만 했을 뿐인데도 카리스마 있는 분위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의사가 잔뜩 겁에 질려 병세를 설명하고 있었다.그사이 계속 미간을 찌푸린 채 공은채를 바라보는 민도준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 묻어있었다. 그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소혜가 잠에서 깰까 봐 권하윤은 소리를 켜지 않아 그저 입을 뻐금거리는 모습만 봐야 했다.하지만 아무리 소리를 듣지 않는다 해도 권하윤은 민도준이 걱정되어 초조해하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두 번째 영상은 피아노실에서 시작되었다.배치를
일촉즉발의 상황이 진소혜가 끼어든 덕분에 조금 누그러들었다.하지만 권하윤은 진소혜한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괜찮은 척 말했다.“우리 그냥 얘기하는 거예요. 괜찮아요.”“네?”진소혜는 사람을 죽일 것처럼 포악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민도준을 봤다가 가녀린 권하윤을 보고는 이내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저기, 오빠! 하윤 언니도 오빠 때문에 집에만 갇혀 있느라 불쌍한데 이러지…….”“우리 할 얘기 있으니까 넌 꺼져.”“오케이. 바로 꺼질게.”의외로 일찍 퇴근하게 된 진소혜는 재빨리 물건을 챙겨 나가면서 권하윤에게 소리 없이 응원하는 손짓까지 했다.하지만 지금의 권하윤은 그 응원에 대답해 줄 수도 없었다. 민도준의 눈이 마치 못처럼 권하윤을 바닥에 박아버려 꼼짝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외부인이 모두 사라지자 권하윤은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민도준에게 다가갔다.“그 USB는 오래전에 받은 거예요. 진짜 오래된 거예요.”권하윤은 민도준이 자기가 별장에 갇혀 있는 동안 외부와 연락하고 지내는 거로 오해할까 봐 조심스럽게 설명을 덧붙였다.하지만 민도준은 권하윤의 불쌍한 척하는 표정에 속아 넘어가지 않고 손을 뿌리치며 입을 열었다.“누구한테서 받은 거야? 공태준? 아니면 성은우?”“공태준이요, 공태준.”민도준이 성은우의 이름을 말할 때의 목소리가 너무 위험해 보여 권하윤은 다급하게 사실을 말해버렸다.“공태준이 이 안에 도준 씨와…… 공은채 씨의 과거 모습이 담겨 있다고 해서 궁금해서 봤어요.”방금 전까지만해도 두렵던 권하윤은 공은채의 이름을 내뱉는 순간 억울하고 서러워 났다.만약 민도준이 공은채와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말해주면 권하윤도 공태준의 계략에 빠지지 않았을 테니까.‘아니지, 이미 말했었네. 죽을 만큼 사랑했다고, 살아있으면 결혼했을 거라고.’하지만 권하윤은 스스로 그 모든 걸 무시하고 한번 또 한 번 스스로 또검증을 하려고 했던 거다.그 생각을 다시 되돌리자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
입이 꾹 눌려 말할 수 업자 권하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왠지 모르게 권하윤이 고개를 끄덕인 뒤 민도준의 표정이 아까처럼 무섭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권하윤을 잡고 있던 손에도 힘이 조금 풀렸다.이에 권하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버둥대 빠져나와서는 민도준의 앞으로 바싹 다가갔다.“화내지 마요. 네? 저 정말 잘못했어요.”민도준은 눈을 내리깐 채 또다시 슬금슬금 기어오르는 권하윤을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사과는 참 빨라.”권하윤은 그 말에서 민도준이 화를 풀었다는 걸 알고는 배짱이 커져 아예 민도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제가 꼭 고칠게요.”그 말이 떨어지자 몇 초간 침묵이 이어지더니 익숙한 손길이 등에서 느껴졌다.민도준의 손이 목덜미로부터 허리까지 미끄러져 내리자 권하윤의 떨리던 몸도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하지만 평정심을 되찾은 뒤에야 권하윤은 민도준이 방금 다른 내용을 봤는지 물어보고는 화를 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왜지?’‘내가 공태준이 준 USB를 봤다고 화낸 건가? 아니면 내가 그 USB 안의 내용을 봐서…….’한참을 생각하고 있을 때 민도준이 갑자기 권하윤을 들어 안았다.“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속마음을 숨기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제가 어떻게 해야 도준 씨의 화가 풀릴지 생각 중이었어요.”이 시각 권하윤은 또다시 실수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듯한 얌전한 얼굴로 돌아와 민도준이 마음 약해지기를 바라며 불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그 모습에 민도준은 끝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왜 어떻게 하면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지 생각하지 않아?”이것도 조금 훈수를 두는 말투였지만 아까랑 비교하면 비 온 뒤의 맑음에 가까웠다.이에 권하윤은 이내 민도준을 끌어안고 흔들어 댔다.“사람이 어떻게 실수를 안 해요? 역시 도준 씨밖에 없어요!”그때 민도준은 권하윤의 등을 꾹 눌러대며 말했다.“그만해.”‘칫, 그럼 내 잘못을 따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건가?’권하윤은 이런 생
갑자기 차가워진 민도준의 눈빛에 권하윤은 흠칫 놀라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이제 졸리네요.”권하윤은 강력하게 부정하면서 몸을 한껏 움츠린 채 민도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얌전함을 과시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민도준이 권하윤을 밀어냈다.민도준이 일어서는 모습을 보자 권하윤은 겁에 질려 고개를 들었고 어렵사리 화가 풀린 민도준이 또다시 자기한테 화낼까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봤다.하지만 민도준은 잔뜩 긴장해서 웅크리고 있는 권하윤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졸린다며? 내려와.”권하윤은 민도준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지만 느릿느릿 소파에서 내려왔다.이윽고 민도준은 권하윤을 침실로 끌고 가더니 마치 인형을 만지작거리듯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주고 심지어 등을 토닥여 주기까지 했다.기괴해진 분위기에 권하윤은 잠이 오지 않아 눈을 깜빡이며 침대 끝에 걸터앉은 민도준을 바라봤다.“왜 안 자?”권하윤은 민도준이 자기를 두드려 주는 손을 덥석 잡았다.“저 무서워서 잠이 안 와요.”이에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권하윤의 손을 이불 안으로 넣어주고는 주위를 둘러봤다.이 방에는 두 사람이 함께 오래 산 흔적이 많이 묻어 있었다. 예전보다 많은 물건이 생겨나 아늑한 느낌마저 들었다.권하윤도 민도준의 시선을 따라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도준 씨, 뭘 보고 있어요?”“사실 이 방도 살기에는 충분하지 않아?”권하윤은 순간 안 좋은 예감이 들어 조심스럽게 물었다.“무슨 뜻이에요?”“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불편할 거 아니야. 앞으로는 이 방에서만 살아.”뜨거운 손바닥이 권하윤의 얼굴을 쓱 문질렀다.그 순간 권하윤은 너무 놀라 믿기지 않는 듯 민도준을 바라봤다.‘지금 나더러 이 방에서만 갇혀 지내라고?’별장에서 지낸다면 그나마 숨겨두는 거라고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방에만 있으라고 하는 건 감금이나 다름없다.이에 권하윤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싫어요.”“왜 싫은데?”민도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권하윤은 당연히 여행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저 어색하게 입꼬리를 애써 말아 올리며 입을 열었다.“도준 씨 바쁘지 않아요?”“바빠도 하윤 씨를 소홀히하면 안 되지.”민도준은 애초부터 인내심이 강했던 사람처럼 권하윤을 애인 대하듯 눈빛으로 현혹했다.“자기야,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국내로 가고 싶어 아니면 해외로 가고 싶어?”해외라는 두 글자에 권하윤의 호흡은 몇 초 늦어졌다.민도준이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어디든 괜찮아요.”“착하네.”민도준은 권하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내일 애들 시켜서 관광 안내 책자를 가져다줄 테니까 열심히 고르고 있어. 심심하지 않게.”권하윤은 입을 뻐금거렸지만 끝내 거절의 말을 목구멍으로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네.”민도준은 바쁜 일이 있다면서 권하윤 곁에 잠시 있어 주는가 싶더니 이내 떠나가 버렸다.그러고는 방에 얼마 있지 않았는데 밖에서 뭔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들어보니 문을 나무로 봉쇄하는 소리였다.그 소리는 한참 뒤 사라졌고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권하윤이 문을 열어 보려고 힘을 밀어봤지만 역시나 열리지 않았다.별장에 갇히면서 느꼈던 답답함은 오늘 이순간 최고조에 달했다.심지어 요즘 민도준과 함께 그려낸 “집”이라는 아름다운 이미지마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떠나야 해.’안 그러면 언젠가는 이곳에 갇혀 답답하게 죽어갈 테니까.‘하지만 도준 씨가 발표회에 데려가지 않으면 어떻게 떠나지?’물론 민도준이 나중에 권하윤을 데리고 놀러 가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건 결국 기약 없는 약속일 뿐이다.만약 발표회가 끝난 뒤 민도준이 또다시 번복하면 권하윤으로서도 아무 방법이 없을 거다.그렇게 한참을 생각하고 나니 권하윤은 이번 발표회에 무조건 가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도준 씨가 오늘 USB 건으로 화를 내고 원래 했던 결정을 번복했으니 화가 가라앉고 난 뒤 다시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그래,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