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이 싫은 척 거절하다가 다시 앞으로 다가갔을 때 민도준은 손가락으로 권하윤의 턱을 쓱 문질렀다.“몇 살인데 얼굴에 뭘 묻히고 다녀?” 그 순간 권하윤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뭔가 있을 줄 알았더니 얼굴에 크림이 묻은 거였어?’“아.”권하윤은 화가 난 듯 자기 얼굴을 마구 문질러 댔다. 솔직히 민도준에게 화가 났다기보다는 이상한 생각을 한 자기한테 화가 났다.하지만 그런 생각은 당연히 민도준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빨개졌는데 뭘 계속 닦아내?”‘뭘 안다고 그래요? 제가 닦아내는 건 크림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라고요!’하지만 당연히 이 말은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그저 고개를 홱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볼 뿐.그때 민도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이리 와봐. 깨끗하게 닦아졌는지 보게.”권하윤은 고개를 돌린 채 끝까지 보여주지 않으려고 발악했다. 하지만 오히려 강제적으로 고개가 돌려 결국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도준 씨를 보기 싫거든…….”미처 뱉어내지 못한 한 글자는 순간 민도준의 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달콤한 냄새가 입술 사이로 흩어지는 사이 권하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민도준에게 끌려 그의 다리 위에 낮아 버렸다.이윽고 밭은 숨소리와 함께 민도준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원하는 게 이런 거였어?”물론 더 친밀한 관계도 가져봤지만 권하윤은 오래도록 뒤엉켜 이어진 입맞춤에 저도 모르게 귀밑까지 붉어졌다. 심지어 이대로 민도준에게 안겨 녹아내리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때문에 민도준이 권하윤을 풀어 줬을 때도 권하윤은 여전히 애타는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낮은 신음을 내뱉으며 민도준에게 엉겨 붙었다. 그런 붙을듯 말듯한 거리는 오히려 더 사람을 미치게 했으니까.마치 갓 이빨이 난 새끼 동물처럼 자기 턱을 자꾸만 짓씹어 대는 권하윤의 모습에 민도준은 못 말린다는 듯 권하윤을 떼어내며 턱을 들어 올렸다.“뭐야? 발정 났어?”“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권하윤은 얼굴을 붉히며 불만스럽게 중얼
민도준이 떠난 뒤 권하윤은 계속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서 일어나 씻고 자기가 고이 숨겨 두었던 핸드폰을 꺼냈다.그러고는 전원을 켜고 공태준의 번호를 누를지 말지 망설이기 시작했다.권하윤은 떠나고 싶었다. 게다가 그 기회는 이번 주 일요일 기자회견 날이고.더욱이 권하윤을 데리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은 공태준뿐이었다.분명 전에 공태준과 해원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을 해둔 상태라지만 다시 떠나려고 하니 권하윤은 왠지 자꾸만 망설여졌다.그도 그럴 게, 이 전화를 걸면 앞으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아니까.권하윤이 계속 그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 조용하던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하기 시작했다.권하윤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핸드폰을 던져버릴 뻔했다.하지만 이 핸드폰 번호를 알고 있는 건 민성철과 공태준뿐이라는 생각에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수신 버튼을 눌렀다.“윤이 씨? 혹시 방해한 건 아니죠?”조심스럽게 질문하는 나지막한 목소리.권하윤은 공태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공태준이 전화를 건 시간이 하필이면 너무 기막힌 타이밍이라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의문을 품었다.“내가 지금 전화 받을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윤이 씨가 핸드폰을 켰으니까요.”‘켰으니까? 설마 이 핸드폰…….’“걱정하지 말아요. 전 그저 여러번 전화했었던 것뿐이에요.”권하윤이 핸드폰을 켠 지 이제 10분도 채 안 되는데 여러 번이 아니라 이 정도면 계속 전화한 게 더 합당하다.권하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공태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다리는 어떻게 됐어요? 다 나았어요?”“괜찮아.”“다행이네요.”공태준은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요즘 윤이 씨랑 연락이 안 돼서 윤이 씨 어머니께서 많이 걱정하고 계세요.”“무슨 뜻이지?”권하윤은 순간 멈칫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저는 그저 윤이 씨가 가족과 오랫동안 연락이 안될 것 같아 대신 안부를 전해준 것뿐이에요.”“우리가 다시 돌아가면 제가 바로 윤이 씨 가족 국내로
“미안해요. 미리 말하지 못해서. 제가 실수했어요. 혹시 화났어요?”권하윤은 공태준과 말다툼할 기분도 아니었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딱 잘라 말했다.“난 왜 그랬는지 듣고 싶은데. 내가 도준 씨 제수씨가 돼야 당신한테도 유리한 거 아닌가?”그 말에 공태준은 약 2초간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 일은 앞으로 천천히 알게 될 거예요.”어물쩍 넘기는 듯한 말에 권하윤은 갑자기 민상철이 얼마 전 했던 말이 떠올랐다.권하윤한테 이제는 민도준과 당당하게 함께 있을 수 있는 신분이 생겼는데 민도준이 왜 계속 가둬줄까 하던 그 한마디.‘설마 공은채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나?’‘무슨 일이길래 공은채의 죽음보다 더 중요하지?’하지만 공태준은 권하윤에게 알려주려 하지 않는 눈치인지라 계속 물어본대도 답을 알아낼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권하윤은 대충 이유를 둘러대며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러고는 발각되지 않게 핸드폰을 꺼버리고 다시 숨겨두었다.그러다가 핸드폰과 같은 자리에 숨겨둔 USB를 본 권하윤은 순간 멈칫했다.‘혹시 이 안에 답이 있을까?’점심시간 권하윤에게 배달을 하러 온 사람은 경호원이 아니라 진소혜였다.“하이, 하윤 언니!”진소혜는 두 손에 물건을 가득 들고 유일하게 자유로운 머리를 양옆으로 흔들며 권하윤에게 인사했다.그 모습이 귀여워 권하윤은 피식 웃더니 이내 앞으로 다가가 진소혜에게로 다가가 양손 가득 든 점심을 받아 들려고 손을 뻗었다.하지만 진소혜는 오히려 손을 뒤로 뺐다.“에이, 언니는 손대지 마요. 대신 제 노트북을 테이블 위에 올려주겠어요?”노트북이라는 단어에 권하윤의 시선은 순간 진소혜가 오른손에 든 가방에 집중되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하지만 이내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노트북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노트북은 왜 가져 왔어요? 혹시 또 일할 게 남아 있어요?”“네!”진소혜는 악에 받힌 듯 테이블 위에 놓인 치즈볼 하나를 입에 집어넣으며 투덜대기 시작했다.“어쩐지 제가 먹을 것까지 챙겨준
권하윤이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 봤더니 두들겨 맞다시피 사용된 노트북은 어느새 뜨거워져 있었다.진소혜가 비번이라도 설정했을까 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우스를 살짝 움직여 봤더니 의외로 노트북 화면은 이내 밝아졌다.이에 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진소혜가 있는 쪽을 살폈다.다행히 요즘 착즙 되다시피 일한 데다 아까 연속 4시간 동안 코드를 해제하느라 에너지가 모두 고갈된 진소혜는 아예 양팔과 다리를 대자로 뻗은 채로 자고 있었다.그제야 권하윤은 안심되는 듯 다시 노트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어, 비번이 없어.’권하윤은 기쁘고도 긴장된 마음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이 시각, USB를 들고 있는 권하윤의 손바닥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 끈적거렸다.이에 두 번 적도 USB를 꽂으려 했지만 모두 손이 미끄러져 세 번째 만에 성공했다.그와 동시에 USB를 연결했다는 알람음이 함께 울렸다.USB 아이콘이 노트북 화면에 나타나고 나서야 권하윤은 마우스를 슬쩍 움직여 클릭했다.예전에 봤던 것과 마찬가지로 안에는 [사진], [영상], [생일] 이 세 개 폴더가 있었다.생일은 전에 본 거라서 이번에 권하윤은 영상을 클릭했다.안에 영상이 많이 저잗되어 있을 것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고작 3개밖에 보이지 않았다.첫 번째 영상은 병원에서 시작되었다.잇따라 병상에 누워 자고 있는 공은채의 모습이 보였고 민도준이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민도준은 긴 팔과 다리를 소유한지라 그저 앉아 있기만 했을 뿐인데도 카리스마 있는 분위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의사가 잔뜩 겁에 질려 병세를 설명하고 있었다.그사이 계속 미간을 찌푸린 채 공은채를 바라보는 민도준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 묻어있었다. 그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소혜가 잠에서 깰까 봐 권하윤은 소리를 켜지 않아 그저 입을 뻐금거리는 모습만 봐야 했다.하지만 아무리 소리를 듣지 않는다 해도 권하윤은 민도준이 걱정되어 초조해하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두 번째 영상은 피아노실에서 시작되었다.배치를
일촉즉발의 상황이 진소혜가 끼어든 덕분에 조금 누그러들었다.하지만 권하윤은 진소혜한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괜찮은 척 말했다.“우리 그냥 얘기하는 거예요. 괜찮아요.”“네?”진소혜는 사람을 죽일 것처럼 포악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민도준을 봤다가 가녀린 권하윤을 보고는 이내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저기, 오빠! 하윤 언니도 오빠 때문에 집에만 갇혀 있느라 불쌍한데 이러지…….”“우리 할 얘기 있으니까 넌 꺼져.”“오케이. 바로 꺼질게.”의외로 일찍 퇴근하게 된 진소혜는 재빨리 물건을 챙겨 나가면서 권하윤에게 소리 없이 응원하는 손짓까지 했다.하지만 지금의 권하윤은 그 응원에 대답해 줄 수도 없었다. 민도준의 눈이 마치 못처럼 권하윤을 바닥에 박아버려 꼼짝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외부인이 모두 사라지자 권하윤은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민도준에게 다가갔다.“그 USB는 오래전에 받은 거예요. 진짜 오래된 거예요.”권하윤은 민도준이 자기가 별장에 갇혀 있는 동안 외부와 연락하고 지내는 거로 오해할까 봐 조심스럽게 설명을 덧붙였다.하지만 민도준은 권하윤의 불쌍한 척하는 표정에 속아 넘어가지 않고 손을 뿌리치며 입을 열었다.“누구한테서 받은 거야? 공태준? 아니면 성은우?”“공태준이요, 공태준.”민도준이 성은우의 이름을 말할 때의 목소리가 너무 위험해 보여 권하윤은 다급하게 사실을 말해버렸다.“공태준이 이 안에 도준 씨와…… 공은채 씨의 과거 모습이 담겨 있다고 해서 궁금해서 봤어요.”방금 전까지만해도 두렵던 권하윤은 공은채의 이름을 내뱉는 순간 억울하고 서러워 났다.만약 민도준이 공은채와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말해주면 권하윤도 공태준의 계략에 빠지지 않았을 테니까.‘아니지, 이미 말했었네. 죽을 만큼 사랑했다고, 살아있으면 결혼했을 거라고.’하지만 권하윤은 스스로 그 모든 걸 무시하고 한번 또 한 번 스스로 또검증을 하려고 했던 거다.그 생각을 다시 되돌리자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
입이 꾹 눌려 말할 수 업자 권하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왠지 모르게 권하윤이 고개를 끄덕인 뒤 민도준의 표정이 아까처럼 무섭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권하윤을 잡고 있던 손에도 힘이 조금 풀렸다.이에 권하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버둥대 빠져나와서는 민도준의 앞으로 바싹 다가갔다.“화내지 마요. 네? 저 정말 잘못했어요.”민도준은 눈을 내리깐 채 또다시 슬금슬금 기어오르는 권하윤을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사과는 참 빨라.”권하윤은 그 말에서 민도준이 화를 풀었다는 걸 알고는 배짱이 커져 아예 민도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제가 꼭 고칠게요.”그 말이 떨어지자 몇 초간 침묵이 이어지더니 익숙한 손길이 등에서 느껴졌다.민도준의 손이 목덜미로부터 허리까지 미끄러져 내리자 권하윤의 떨리던 몸도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하지만 평정심을 되찾은 뒤에야 권하윤은 민도준이 방금 다른 내용을 봤는지 물어보고는 화를 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왜지?’‘내가 공태준이 준 USB를 봤다고 화낸 건가? 아니면 내가 그 USB 안의 내용을 봐서…….’한참을 생각하고 있을 때 민도준이 갑자기 권하윤을 들어 안았다.“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속마음을 숨기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제가 어떻게 해야 도준 씨의 화가 풀릴지 생각 중이었어요.”이 시각 권하윤은 또다시 실수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듯한 얌전한 얼굴로 돌아와 민도준이 마음 약해지기를 바라며 불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그 모습에 민도준은 끝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왜 어떻게 하면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지 생각하지 않아?”이것도 조금 훈수를 두는 말투였지만 아까랑 비교하면 비 온 뒤의 맑음에 가까웠다.이에 권하윤은 이내 민도준을 끌어안고 흔들어 댔다.“사람이 어떻게 실수를 안 해요? 역시 도준 씨밖에 없어요!”그때 민도준은 권하윤의 등을 꾹 눌러대며 말했다.“그만해.”‘칫, 그럼 내 잘못을 따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건가?’권하윤은 이런 생
갑자기 차가워진 민도준의 눈빛에 권하윤은 흠칫 놀라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이제 졸리네요.”권하윤은 강력하게 부정하면서 몸을 한껏 움츠린 채 민도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얌전함을 과시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민도준이 권하윤을 밀어냈다.민도준이 일어서는 모습을 보자 권하윤은 겁에 질려 고개를 들었고 어렵사리 화가 풀린 민도준이 또다시 자기한테 화낼까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봤다.하지만 민도준은 잔뜩 긴장해서 웅크리고 있는 권하윤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졸린다며? 내려와.”권하윤은 민도준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지만 느릿느릿 소파에서 내려왔다.이윽고 민도준은 권하윤을 침실로 끌고 가더니 마치 인형을 만지작거리듯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주고 심지어 등을 토닥여 주기까지 했다.기괴해진 분위기에 권하윤은 잠이 오지 않아 눈을 깜빡이며 침대 끝에 걸터앉은 민도준을 바라봤다.“왜 안 자?”권하윤은 민도준이 자기를 두드려 주는 손을 덥석 잡았다.“저 무서워서 잠이 안 와요.”이에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권하윤의 손을 이불 안으로 넣어주고는 주위를 둘러봤다.이 방에는 두 사람이 함께 오래 산 흔적이 많이 묻어 있었다. 예전보다 많은 물건이 생겨나 아늑한 느낌마저 들었다.권하윤도 민도준의 시선을 따라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도준 씨, 뭘 보고 있어요?”“사실 이 방도 살기에는 충분하지 않아?”권하윤은 순간 안 좋은 예감이 들어 조심스럽게 물었다.“무슨 뜻이에요?”“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불편할 거 아니야. 앞으로는 이 방에서만 살아.”뜨거운 손바닥이 권하윤의 얼굴을 쓱 문질렀다.그 순간 권하윤은 너무 놀라 믿기지 않는 듯 민도준을 바라봤다.‘지금 나더러 이 방에서만 갇혀 지내라고?’별장에서 지낸다면 그나마 숨겨두는 거라고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방에만 있으라고 하는 건 감금이나 다름없다.이에 권하윤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싫어요.”“왜 싫은데?”민도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권하윤은 당연히 여행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저 어색하게 입꼬리를 애써 말아 올리며 입을 열었다.“도준 씨 바쁘지 않아요?”“바빠도 하윤 씨를 소홀히하면 안 되지.”민도준은 애초부터 인내심이 강했던 사람처럼 권하윤을 애인 대하듯 눈빛으로 현혹했다.“자기야,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국내로 가고 싶어 아니면 해외로 가고 싶어?”해외라는 두 글자에 권하윤의 호흡은 몇 초 늦어졌다.민도준이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어디든 괜찮아요.”“착하네.”민도준은 권하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내일 애들 시켜서 관광 안내 책자를 가져다줄 테니까 열심히 고르고 있어. 심심하지 않게.”권하윤은 입을 뻐금거렸지만 끝내 거절의 말을 목구멍으로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네.”민도준은 바쁜 일이 있다면서 권하윤 곁에 잠시 있어 주는가 싶더니 이내 떠나가 버렸다.그러고는 방에 얼마 있지 않았는데 밖에서 뭔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들어보니 문을 나무로 봉쇄하는 소리였다.그 소리는 한참 뒤 사라졌고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권하윤이 문을 열어 보려고 힘을 밀어봤지만 역시나 열리지 않았다.별장에 갇히면서 느꼈던 답답함은 오늘 이순간 최고조에 달했다.심지어 요즘 민도준과 함께 그려낸 “집”이라는 아름다운 이미지마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떠나야 해.’안 그러면 언젠가는 이곳에 갇혀 답답하게 죽어갈 테니까.‘하지만 도준 씨가 발표회에 데려가지 않으면 어떻게 떠나지?’물론 민도준이 나중에 권하윤을 데리고 놀러 가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건 결국 기약 없는 약속일 뿐이다.만약 발표회가 끝난 뒤 민도준이 또다시 번복하면 권하윤으로서도 아무 방법이 없을 거다.그렇게 한참을 생각하고 나니 권하윤은 이번 발표회에 무조건 가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도준 씨가 오늘 USB 건으로 화를 내고 원래 했던 결정을 번복했으니 화가 가라앉고 난 뒤 다시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그래, 희망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