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막한 한마디에 권하윤의 마음에 큰 파도가 일었다.‘공태준이 아니라면…… 도준 씨?’이제 막 이렇게 생각했는데 시선 속에 무서운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남자가 들어왔다.남자는 헬기 앞에서 담배를 문 채 세 사람이 있는 쪽을 빤히 쳐다봤다.분명 이 거리에서 민도준의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권하윤은 폭풍우가 휘몰아칠 것 같은 으스스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심지어 옆에 있는 큰 산도 조금 전처럼 무게감을 주지 않았고 엔진 소리도 갑자기 작아진 것 같았다.하지만 칸막이도 없는 차인지라, 짐칸에 앉아 있는 권하윤의 모습은 고스란히 민도준의 눈에 들어갔다.똑같이 위기를 느낀 이남기는 자기도 모르게 차를 후퇴했다. 하지만 그러기 무섭게 뒤에 차 두 대가 멈춰 서며 퇴로를 막았다.그와 동시에 민도준은 인내심이 바닥 난 것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만하지 그래?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귀에 익은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실려 오자 권하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민도준의 얼굴이 시선 속에서 점점 또렷해지다가 턱밑에 난 검푸른 수염을 보는 순간 권하윤은 겁이 덜컥 났다.민도준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면 권하윤은 경성에서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다.그렇다면 그저 죄명만 하나 더 늘어난 셈이 된다.권하윤은 목을 움츠린 채 당장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은 민도준의 눈을 피했지만 그가 앞으로 내미는 손까지는 무시할 수 없었다.“내려와.”짤막한 한마디에 카리스마가 담겨 있었다.권하윤은 본능적으로 움직였지만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공태준이 먼저 막아 나섰다.“민 사장님, 우선 윤이 씨한테 같이 가겠는지 물어봐야 하는 게 순서 아닙니까?”민도준은 그제야 공태준을 발견한 것처럼 시선을 돌리더니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아, 공 가주님이 내 결혼식에서 내 사람을 데려갔다는 걸 깜빡할 뻔했군.”다음 순간 민도준은 공태준의 멱살을 꽉 잡아당겼다.“다른 사람 걱정하기 전에 오늘 내 손에서 어떻게 빠져나갈지 생각하는 게 어때요? 공 가주님.”공태준은 목
최수인은 권하윤을 별장으로 데려다주고는 입구에서 한참을 아쉬워했다.“또 이렇게 이별해야 하다니. 윤이 씨도 이번 고비를 잘 넘기길 바랄게요. 정 안 되면 저한테 와요. 제가 민도준보다 더 예뻐해줄 테니까.”권하윤은 최수인이 일부러 농담한다는 걸 알았기에 억지 미소를 지었다.“생각해 볼게요.”별장으로 돌아와 보니 이곳은 여전히 권하윤이 떠나던 날과 똑같았다.하지만 권하윤은 이미 뭔가 변해 있다는 걸 느꼈다.다리가 불편해 그런지 정원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짧은 거리도 걷기 힘들었다.그렇게 계단 앞까지 다가와 어떻게 할지 걱정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권하윤이 눈물범벅이 된 모습으로 달려 나왔다.“하윤아, 왜 이제야 왔어? 몸은 어때? 어디 다친 데 없어?”“괜찮아.”권하윤은 권희연을 잡고 물었다.“언니랑 로건 씨는 괜찮아?”그 물음에 권희연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우리는 아무 일 없어.”권하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그날 쓰러진 뒤 권희연이 민도준한테 괴롭힘이라도 당하면 어쩔까 걱정했었다.“참, 그런데 언니가 여긴 웬일이야?”“그게…… 민 사장님이 나더러 와보라고 했어. 네 다리가 불편하다고 돌봐주라고.”그 말을 듣는 순간 권하윤은 멍해지더니 코끝이 시큰거렸다.분명 이렇게 많은 잘못을 했지만 민도준은 매번 이렇게 권하윤을 모른 체 하지 않으니…….샤워를 마친 권하윤은 권희연이 가져온 음식을 먹었다.식사를 마치자마자 권하윤은 권희연을 돌려보냈다. 권희연은 더 남고 싶다고 했지만 권하윤은 민도준이 돌아와 권희연을 곤란하게 할까 봐 돌아가라고 고집을 부렸다.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날은 어두워졌다.몇 날 며칠을 고생하고 난 뒤 이렇게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으니 권하윤은 마치 날아갈 것만 같았다.하지만 기분은 몸처럼 가볍지 않았다.그 자리에서 바로 따져 묻기보다 이렇게 사라져 버리니 권하윤은 오히려 더 조마조마했다.민도준이 올까 봐 두렵기도 하고 또 돌아오지 않을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게다
민도준은 무서운 눈빛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권하윤을 바라보더니 권하윤이 겁에 질려 고개를 숙이자 그제야 옆에 앉았다.“도망치는 게 재밌었어?”권하윤은 아래로 푹 숙였던 고개를 마구 저었다.그렇게 흔들다가 뭔가를 인식한 듯 고개를 쳐들고는 불쌍한 눈빛으로 민도준을 바라봤다.“저 도망치지 않았어요. 그날 약 때문에 쓰러졌어요.”이윽고 권하윤은 그날 있은 일을 곧이곧대로 설명하고는 자아 성찰을 하기 시작했다.“저도 알아요. 이번 일은 제가 잘못했다는 거. 제가 얌전히 있기만 했어도 공태준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텐데. 미안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잘못했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는지 권하윤은 창백한 얼굴로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심지어 고개를 푹 숙인 채 반성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하.”갑자기 비아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다음 순간 권하윤은 턱에 전해지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권하윤의 당황한 눈빛에 민도준은 기분을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그래, 결혼식 날 도망가는 건 예전에도 했었으니까.”권하윤은 민도준의 관대함에 긴장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겁에 질린 채 다음 질문을 기다릴 뿐.그때 턱에 느껴지던 통증이 사라지더니 민도준은 손가락으로 권하윤의 빨개진 피부를 문질렀다. “무서웠지?”부드러워진 목소리에 호박색 눈동자가 흔들렸다.“네?”민도준은 인내심 있게 다시 물었다.“강에 빠졌을 때, 무서웠지?”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물에 빠졌을 때 느꼈던 질식감이 다시 휘몰아쳤다.그때 물결치는 강물 속에서 아무것도 잡히지 않아 허우적대며 점점 가라앉았었는데 무섭지 않을 리가?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무서웠어요. 정말 무서웠어요.”뒤늦게 밀려오는 서러움에 권하윤은 민도준의 품에 안겨 얼굴을 파묻고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물도 차갑고 난 수영할 줄도 모르겠고, 아무것도 안 잡히고. 저 요즘 매일 매일 악몽 꿔요. 물에 빠져 아무리 소리쳐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악
“왜 말이 없어?”커다란 손이 권하윤의 목덜미를 꽉 잡는 바람에 권하윤은 민도준의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민도준의 목소리는 표정과 달리 매우 부드러웠다.“헬기 소리 들었을 때 무슨 생각 했어? 응? 왜 나한테 잡혔나 생각했어? 아니면 나한테 잡히면 공태준과 어떻게 해원으로 돌아갈지 걱정했어?”한마디 한마디 말은 권하윤을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 넣어 도망칠 수 없게 했다.모든 설명은 사실 앞에서 변명만 될 뿐이었다.말문이 막힌 권하윤의 모습은 마침 민도준의 눈에 들어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효과를 더해줬다.목덜미를 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 권하윤의 목을 더 꽉 조였다.“말해 봐. 왜 말 안 하지? 나는 미친 듯이 찾아다녔는데 공태준과 어떻게 도망칠지를 생각했어? 어디 말해 봐.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몇 날 동안 쇠약해진 몸은 남자의 화를 이기지 못하고 그 힘에 종잇장처럼 펄럭이다가 확 내팽개쳐졌다.가슴속에 쌓여 있던 여러 가지 감정들이 모두 흘러나왔는지 권하윤을 밀쳐내는 힘을 빼지 않은 터라 권하윤은 철퍼덕 넘어지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민도준은 여전히 침대 옆에 서서 권하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그늘에 가려져 알 수 없는 빛을 비춰냈다.그렇게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민도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몸을 돌려 떠나갔다.권하윤은 다급히 손을 뻗어 민도준을 잡으려 했다.“잠깐만요.”하지만 제대로 잡지 못한 탓에 다급히 침대에서 내리느라 자기의 발이 다쳤다는 것도 잊어버렸다.“아-”권하윤이 눈을 감고 침대 아래에서 고통을 참고 있을 때 힘 있는 손이 권하윤을 들어 올려 다시 침대 위에 던져버렸다.이윽고 귀찮은 듯 꾸짖었다.“다리도 다쳤으면서 왜 이래?”하지만 권하윤은 다른 걸 관계할 겨를도 없이 미처 거두어들이지 못한 민도준의 손을 덥석 잡았다.“제 말 좀 들어 봐요.”권하윤은 잠깐 멈칫하다가 이를 악물었다.“제가 공태준과 같이 간 건 제가…… 제가 권하윤이 아니라
권하윤은 어리둥절해졌다.솔직히 권하윤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이 서지 않았다.이제야 오빠가 민도준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평소에 무섭지 않냐고 하던 물음이 생각났다.민도준은 기쁠 때는 당연히 지내기 좋은 상대다. 하지만 일단 모순만 생기면 권하윤은 맞서기는커녕 스스로를 보호할 수도 없다.김빠진 권하윤의 얼굴에 민도준은 뜬금없이 웃음을 내뱉었다.“뭐야? 방법도 생각하지 않았으면서 나한테 개겼던 거야?”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권하윤은 이제 더 이상 민도준의 변덕스러움을 상대할 마음도 없어졌다. 더욱이 이대로 상황이 악화하다가 일이 더 나빠질까 봐 아예 이불 속으로 몸을 숨긴 채 홱 돌아 누웠다.눈 가리고 아웅 하는 이런 도피 방식은 얼마 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민도준이 곧바로 옆에 누웠기 때문이다.그 순간 권하윤은 등골이 오싹해 났다.‘오늘 여기서 자려고 그러나?’권하윤은 분위기가 이토록 안 좋아져 민도준이 남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곳도 민도준의 집이기에 권하윤은 아무 말도 못하고 방안의 불이 꺼지는 걸 묵묵히 지켜봤다.어둠이 내려앉았지만 권하윤은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이번에 다시 별장으로 왔지만 이제는 여기를 떠날 기회도 없다.‘오늘 하루 종일 민혁 씨가 안 보였는데 설마 아직도 내 신분을 조사 중인가?’‘아니면 이미 조사를 마쳤나?’‘그래서 본인의 명성에 누가 되더라도 계속 제수씨인 권하윤으로 살아가라고 하는 건가? 이씨 가문 딸보다는 이게 나아서?’‘아마 그렇겠지. 내가 이시윤이 되면 옛 연인과 새로운 애인 중에 선택하기 어려울 테니까.’‘오히려 이대로 나를 가둬 두는 게 나을지도.’순간 공태준이 리조트에서 기다리겠다던 말이 생각나 권하윤은 더 복잡하고 답답해 났다.이미 민도준에게 끌려 별장으로 돌아왔는데 자유가 어디 있다고? 리조트는커녕 이 별장에서 나가는 것조차 어려운데.순간 권하윤은 땅에 파묻었던 USB가 떠올랐다.‘잇따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못 볼 것도 없지. 여기서 더 나빠질 게 뭐가 있
방 안의 어둠은 마치 모양이 생겨난 듯 권하윤의 코를 파고들어 숨이 막혔다. 이런 감각은 그날 강물에 빠졌을 때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권하윤은 계속 이 방에 있다간 결국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다.끝내 이불을 걷고 침대 아래로 내려가려 했지만 발이 바닥에 닿기도 전데 언제 일어나 앉았는지 모를 남자에게 어깨가 붙잡히고 말았다.“다리도 절뚝거리며 어딜 가려고 그래?”뒤늦은 반응에 권하윤은 더 답답해 버둥대며 내려가려고 애썼다. “제가 어딜 가든 도준 씨랑은 안 가요.”그 말에 민도준은 마치 인내심을 잃은 듯 권하윤을 다시 원래 자리고 끌어오더니 얌전하지 못한 권하윤을 자기 아래에 가둬버렸다.“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권하윤은 버둥대다가 헛수고라는 걸 인식하는 순간 아예 얼굴을 홱 돌려 포기하듯 투덜거렸다.“하고 싶으면 빨리하기나 해요. 어차피 도준 씨한테 저는 그런 용도밖에 없을 테니까.”민도준은 재밌는 듯 피식 웃으며 권하윤의 얼굴을 들어 윗몸을 일으켰다.“나 요즘 잠도 못 잤는데 일을 시키려고? 날 아예 뽑아 먹을 생각인가?”권하윤은 입을 입을 벌리며 억울한 듯 뭐라 말하려 했지만 또다시 자신감을 잃은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갓 화내고 바로 걱정하는 말을 하는 것도 웃기니까. 말을 하려다가 마는 듯한 권하윤의 모습은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이에 민도준은 권하윤의 얼굴을 꽉 잡았다.“난 그저 잠만 자려고 했는데 옆에서 찡찡거리더니. 참 끝도 없지 아주? 한바탕 해야 얌전해 질 거야?”그 시각 민도준은 아까의 포악함을 거두더니 여상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 말투에 권하윤은 조금 전 일이 환상인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마치 권하윤이 민도준을 거역하지만 않으면 얼마나 성깔을 부리든 모두 인내심 있게 받아줄 것처럼.예전 같았으면 권하윤은 비 온 뒤의 무지개 같은 이 변화에 기뻐 헤어 나올 수 없었겠지만 정신을 차리고 난 뒤라 그런지 이런 걸 믿는 건 그저 스스로를 속이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거짓된 아름다움 속에 언제나
권하윤은 순간 등이 오싹해 무의식적으로 버둥댔다.“저 다리가 저려서 그래요. 저 좀 놔줘요.”하지만 순순히 응해줄 민도준이 아니었다.오히려 놔주기는커녕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스르륵 아래로 쓸어내렸다.“다리가 저려? 내가 주물러 줄게.”“필요 없어요…… 어딜 주무르는 거예요…….”퉁명스러운 목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변해버렸다. 심지어 부끄러운 나머지 민도준의 손을 마구 긁어대는 바람에 손톱자국을 남기기까지 했다.하지만 새끼 고양이가 손톱으로 긁어대는 듯한 느낌일 뿐이라서 어떠한 위협도 되지 못했다.슬립 원피스의 끈이 흘러내리고 치맛자락이 위로 살짝 걷혀 올라간 순간 권하윤은 민도준이 끝까지 할 거라고 생각햤지만 웬일로 손을 뗐다.이윽고 어리둥절해하는 권하윤을 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왜? 아직도 모자라?”권하윤은 그 말에 욱했는지 버럭 소리 질렀다.“누가 모자라다고 했어요?”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권하윤의 얼굴을 슬쩍 문질렀다.“난 아직 모자라는데.”“아, 만지지 마요.”말하면서 자기 얼굴을 벅벅 문지르는 권하윤의 동작에 민도준은 재밌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나도 더럽다고 하지 않는데 왜 본인이 그래?”민도준의 노골적인 말에 권하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벌떡 일어섰다.“저 샤워하러 갈 거예요!”그러고는 이 한마디를 남겨놓고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그 시각 민도준은 침대 머리에 비스듬히 기댄 채 절뚝거리며 욕실로 가는 권하윤을 빤히 지켜볼 뿐 도와주려는 의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처음에는 은근히 민도준이 도와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던 권하윤은 민도준이 끝까지 움직이지 않자 심술이 났는지 혼자서 절뚝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다리가 원래도 다쳤는데 민도준 때문에 힘까지 빠져 혼자 걷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하지만 권하윤이 욕실에 들어서려는 찰나 발이 붕 뜨더니 가로로 솟구쳐 올랐다.권하윤은 아직도 민도준이 모른체 지켜만 보고 있던 모습에 화가 났는지 고집을 부렸다.“도준 씨 도움 필요 없어요. 저 혼자도 돼요.”민도준은
집으로 가자는 말을 듣자 권하윤은 순간 멍해졌다.그토록 자연스러운 말투는 마치 결혼한 신혼부부끼리 집에 가서 식사하자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심지어 잠깐의 착각을 불러일으켜 차가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권하윤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운전석에 앉아 있는 민도준을 빤히 바라봤다.모든 감정 중에서 가장 억제하기 어렵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아마 사랑일 거다.마치 지금의 권하윤처럼. 분명 빠지지 말자고 현혹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달래봐도 민도준이 적색 신호등을 기다리며 권하윤의 손을 잡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어쩔 수 없었다.그때 민도준이 권하윤의 손을 주무르며 피식 웃었다.“마른 것 봐. 손도 닭발 같네.”순간 정신을 차린 권하윤은 화가 난 듯 손을 빼며 투덜거렸다.“그래요. 그런데 당장 놓지 않고 뭐 해요? 긁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하지만 권하윤이 손을 빼기도 전에 민도준이 권하윤의 손등을 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장난이야.”그제야 권하윤은 콧방귀를 뀌었다.민도준은 권하윤의 손을 얼마나 오래 바라봤는지 모른다. 가는 손 위에 마침 차창으로 비쳐 든 햇빛이 드리워 희고 깨끗했다.“예뻐.”이윽고 손가락으로 권하윤의 손바닥을 살살 긁어댔다.“게다가 여기가 부드럽잖아.”분명 별말 아닌 것 같았지만 권하윤은 순간 민도준이 만졌던 곳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겁다는 게 느껴졌다.그 때문에 민도준이 손을 놓은 뒤에도 자기 손바닥을 한참 동안 긁어댔다.하지만 차 안의 온화하고 아름답던 분위기는 별장 주위에 서 있는 경호원들을 보는 순간 사라졌다.아무리 아름다운 거라도 권하윤이 지금 새장 속에 갇힌 새라는 건 변함이 없었으니까.민도준은 권하윤의 지친 듯한 표정을 보더니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손을 뻗어 권하윤을 자기 품 안에 끌어안았다.그렇게 품에 안긴 채로 별장 안으로 들어간 권하윤은 문을 열자마자 음식 냄새를 맡게 되었다.이윽고 탁자 위에 놓인 음식이 눈에 들어와 권하윤은 멍한 표정으로 민도준을 돌아봤다.“배고프다며? 나를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