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요.”권하윤은 입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다시 베개에 파묻었지만 미처 얼굴을 숨기지도 못한 그때 민도준에 의해 얼굴이 드러났다.“어제 숨 끊어질 것처럼 굴더니 안 가겠다고?”그 말을 듣는 순간 권하윤은 화가 나서 졸음마저 달아나 버렸다. 이윽고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치켜뜨며 퉁명스럽게 말했다.“그게 어디 병 때문이에요? 다 도준 씨가…….”“내가 뭘?”민도준은 손가락으로 권하윤의 목덜미를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혈이 막힌 곳이 많으면 아프다는 거 못 들어봤어? 좋은 마음으로 치료하게 해주려고 했더니 이렇게 배은망덕하면 어떡해? 응?”권하윤은 민도준만큼 얼굴이 두껍지 않은지라 얼른 이불을 끌어 얼굴을 묻었다.하지만 민도준은 오늘 웬일로 인내심이 생겼는지 아무 말 없이 권하윤을 끄집어내 욕실로 데려가고는 권하윤이 씻고 나오자 병원까지 데려다주었다.민도준이 이렇게 다정하게 할수록 권하윤은 오히려 더 쑥스러웠다.“가서 일 봐요. 저 혼자 들어갈 수 있어요.”권하윤이 병원에 안 가려 한 건 그저 이 시간에 밖에 나오기 싫은 것뿐이었다.하지만 퍼런 대낮에 사람이 많은 병원을 다니는 것도 위험한 일은 아닐 듯싶다는 생각에 마음을 고쳤다.“가 봐. 돌아오면 사탕 줄게.”민도준이 얼굴을 쓱 문지르며 내뱉은 말에 권하윤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중얼거렸다.“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사탕으로 달래지는 줄 아나?’물론 말은 이렇게 했지만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이윽고 뭐라 말하려 했지만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한민혁과 로건의 모습에 두 사람을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민도준을 밖으로 밀었다.“얼른 가봐요.”그러다 문이 열렸을 때 한민혁과 로건이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상할 정도로 벌겋게 된 로건의 얼굴이 보였다.권하윤은 그 상황이 의아해 민도준더러 두 사람을 방해하지 말라며 끌어당기고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민도준도 권하윤이 도둑고양이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모습을 보자 권하윤이 하자는 대로 옆에서 지켜봤다
부끄러워진 권하윤은 민도준이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은찬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서 검사한 결과 심부전 초기 진단을 받았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는 답변을 받았다. 기침하는 것도 그 원인이고.다행히 아직 젊기에 병이 심하지 않아 몸을 잘 돌보고 휴식을 잘하면 괜찮아질 거라는 의사의 말에 권하윤은 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요즘 매일 불안함 속에서 살았는데 심장병이 안 걸린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했으니.하지만 은찬은 너무 놀란 나머지 주의 사항을 꼼꼼히 정리하고 약 처방을 받는 것도 자기가 하겠다며 권하윤을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권하윤은 그저 심심한 듯 주위를 둘러봤다.그러던 그때 마침 적의 가득한 얼굴과 마주치고 말았다.박민주를 본 순간 권하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박민주처럼 공주 대접을 받는 재벌가 여식은 보통 개인 병원에 가지 이런 곳에 올 리는 없을 테니까.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자기를 찾아왔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역시나 권하윤이 그렇게 생각하기 바쁘게 박민주는 앞에 막아서는 바람에 무시하기도 쉽지 않았다.할 수 없이 몸을 일으켜 세워 빙긋 웃었다.“박민주 씨, 오랜만이네요.”하지만 박민주는 지난번 권하윤 앞에서 창피를 당한 데다 민도준한테 대놓고 거절당한지라 권하윤을 보는 눈에는 불이 뿜어져 나왔다.“내가 창피당하는 거 보니까 좋았어? 나 민도준 씨 4년이나 기다렸어. 그런데 감히 홀랑 가로채? 이 도둑년!”영문도 모른 채 도둑년이라는 이름이 붙자 권하윤은 어이가 없었다.“박민주 씨, 제가 박민주 씨의 물건을 도둑질했어야 도둑이라고 하죠. 도준 씨가 물건이에요?”너무 오냐오냐하며 키워진 탓인지 박민주는 권하윤의 말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당신처럼 더럽고 이기적인 여자는 민도준 씨한테 들러붙을 생각만 했지 도준 씨를 위해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순간 미간이 팍 구겨졌다. 권하윤도 박민주가 무얼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더욱이 자기가 민도준과 결혼하면 약혼자 형까지 꼬시는
“맞으면 어쩔 건데?”“할아버님이 도준 씨를 얼마나 아끼는데 손주가 이런 오해를 받는 걸 당연히 보고 있을 수 없으셨겠지. 당신같이 이기적인 여자만 도준 씨를 위해 생각하지 않아!”박민주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할 때 마침 은우가 돌아와 의아한 듯 쓱 훑어보더니 권하윤 앞으로 다가갔다.“권하윤 씨, 약 가져왔어요. 민 사장님이 권하윤 씨 건강 염려하셔서 밖에 오래 있지 말라고 했어요. 우리 얼른 돌아가요.”역시나 그 말에 박민주의 눈가는 붉어졌다.“당신 같은 여자는 도준 씨 짝으로 안 어울려!”잔뜩 화가 나서 떠나가는 박민주를 보더니 권하윤은 의아한 듯 은찬을 살폈다.“도준 씨가 그랬어? 그런 말 못 들었던 것 같은데?”“이건 민 사장님이 마음속으로 한 얘기인데 제가 들었어요.”헤실 웃으며 말하는 은찬을 보자 권하윤은 피식 웃음이 났다.“말은 참 잘해.”권하윤은 이미 결심을 내렸지만 박민주의 말을 듣자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돌아가는 길에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검사 끝났어?”“네.”목소리를 듣는 순간 민도준은 권하윤의 기분이 울적하다는 걸 바로 눈치챘다.“또 어디 가서 괴롭힘당했어?”권하윤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기왕 함께하기로 결정했으니 속이고 싶지 않아 박민주를 만난 일을 모두 사실대로 말했다.“응? 그래서 그 말이 다 맞는 것 같아서 또 물러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그 말을 들은 민도준의 목소리는 조금 차가워졌다.그 목소리에서 위험함을 감지한 권하윤은 다급히 설명했다.“그런 뜻 아니에요. 그냥 그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아서요. 만약 도준 씨가 백제그룹을 물려받으면 이 사실들은 언젠가 수면 위로 드러날 테고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살을 붙여 안 좋은 안 좋은 여론을 만들 수 있잖아요…….”“그건 하윤 씨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미 지훈이랑 얘기가 끝났으니까. 그룹을 물려받는다 해도 지훈이가 대표직에 올라갈 거고 공관도 책임질 거야.”순간 권하윤은 숨이 턱 막혔다.결국은 박민주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권하윤의 귓불을 톡 튕겼다.“그러게 누가 귀가 그렇게 얇으랬어? 겁도 많고 놀라는 일만 있으면 달팽이처럼 숨어버리고.”“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요?”권하윤은 민도준의 말에 귀가 간지러웠는지 목을 움츠리더니 턱을 민도준의 가슴에 대고 올려다봤다.“왜 안 물어봐요? 검사 결과가 어땠는지?”“의사가 이미 하윤 씨의 심장이 1분에 몇 번 뛰는지까지 알려줬는데 두 번씩이나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그 의사가 민도준이 소개해 준 거라는 걸 안 순간 권하윤은 마음이 따뜻해나 발꿈치를 들고 민도준의 목에 팔을 둘렀다.“고개 좀 숙여 봐요.”민도준은 고분고분 협조하더니 권하윤의 허리를 잡은 채 입을 맞췄다.그 때문에 신호 차단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멍하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진소혜는 오히려 하던 일을 한참이나 멈추고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차단실 밖의 상황을 구경했고 민도준의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은 일부러 바쁜 척하며 고개를 숙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권하윤은 민도준과 함께 차단실로 들어가 안에 있는 사람들과 인사했다.“할아버님, 그간 잘 지내셨어요?”하지만 어르신은 대충 얼버무리기만 할 뿐 고개도 들지 않았다.이에 의아해진 권하윤은 이번에는 두 외삼촌과 인사했지만 두분의 얼굴에도 선명한 어색함이 묻어 있었다.대체 무슨 이유인지 알 길 없어 의아해하던 권하윤은 진소혜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웃음을 참으며 창문 쪽을 보라고 사인을 보내는 진소예의 눈빛을 따라 뒤로 돌아보는 순간, 권하윤은 창문이 밖에서 볼 때처럼 컴컴하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두 사람이 아까 밖에서 했던 짓이 그대로 생중계됐을 걸 생각하자 권하윤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민도준을 봤지만 민도준은 오히려 눈썹을 치켜올리며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 덕에 권하윤은 그곳에 남아있기 너무 난처한 나머지 몇 분 버티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달려 나갔다. 물론 민도준에게 바로 잡혔지만.“왜 도
“핑크 다이아몬드?”최수인은 약 2초간 아무 반응도 못하더니 따져 묻기라도 하는 듯 오히려 민도준에게 물음을 돌렸다.“핑크 다이아몬드라…… 민도준, 네 제수씨가 묻잖아.”권하윤은 그제야 시선을 다시 돌려 민도준을 빤히 쳐다봤다.하지만 민도준은 대답 대신 이마를 쿡쿡 찔러왔다.“괜히 트집 잡지 마.”그 한마디가 들리는 순간 권하윤은 이마도 아팠지만 마음이 더 아파 고개를 숙인 채 손톱을 뜯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마침 한민혁이 들어와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민도준을 불렀다.민도준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권하윤은 최수인을 힐끗 봤고 그 눈빛을 받은 최수인은 알겠다는 눈빛을 돌려줬다.권하윤은 벌써 민도준이 나가면 모든 걸 물어봐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하지만 웬걸?“최수인.”민도준이 갑자기 최수인을 불렀다.그 목소리에 권하윤과 눈빛을 주고받던 최수인은 몸을 움찔했다.“어? 왜?”“어디 좀 놀러 가자.”민도준은 분명 선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최수인은 머리가 쭈뼛쭈뼛 곤두섰다.“나 갑자기 생각났는데 우리 이웃집 고양이가 새끼를 낳는데 도와주러 가야 해. 먼저 갈게!”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꺼내고 누구보다 빠른 걸음으로 쏙 빠져나가려 했지만 두 걸음 정도 내딛자마자 옷깃이 조여왔다.민도준은 최수인은 민도준의 옷깃을 뒤에서 잡아당기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네 자식을 낳은 것도 아닌데 네가 급할 거 뭐 있어?”최수인은 오늘 재앙을 피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울상이 되어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제야 민도준은 목을 잔뜩 움츠린 채 없는 척 연기하는 권하윤을 바라봤다.“나 밤까지 일해야 하니까 별장에서 기다려.”“네.”권하윤은 나지막하게 대답하고 모두가 밖으로 나가버리자 입을 삐죽거렸다.‘그래, 말하지 마!’솔직히 진실을 알고 싶으면 USB에 들어 있는 모든 내용을 확인하면 그만이다.하지만 지난번 생일을 함께 보내는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죽을 것처럼 힘들었기에 더 봤다가는 마음이 더 혼란해질까 봐
최수인은 민도준을 10몇 년 동안 알고 지내온 사람이기에 민도준이 이렇게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심지어 예전에도 절대 마음씨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게다가 민도준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아마 자기를 죽이려 했던 여자는 아무리 사랑했어도 곁에 두지 않으려 할 거다.이건 사랑하느냐의 문제로 간단히 결론지을 문제가 아니다. 이미 죽이려고까지 했다는 건 더 이상 돌이킬 수 있는 여지조차 없는 거니까.최수인의 말에 민도준은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상관없냐고? 하, 내가 부처님인 줄 알아?”“그러면 왜 결혼하려고 하는 건데?”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에서 나는 연기는 민도준의 조각 같은 얼굴에 조금 그윽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해주었다.“안 그러면? 공태준이 공씨 가문 사람들을 처리하고 와서 권하윤을 쏙 빼내 가기를 기다리라고?”최수인은 잠깐 멈칫하더니 활짝 웃었다.“아하, 그냥 먼저 선수 치겠다는 거였어?”그 말에 민도준은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먼저 선수 칠 거 있나? 이미 따먹었는데.”“얼씨구, 아직 하윤 씨 애인의 목숨을 가질 때가 아니다 이건가?”민도준의 잘난체하는 모습에 최수인도 잘난체하며 분석했지만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뜨거운 담뱃불에 데이고 말았다.“헉, 젠장!”최수인의 옷은 이미 구멍이 뚫렸지만 화를 내고 싶어도 낼 수 없었다.“지금 나 죽이려는 거야?”“좋은 기운을 먼저 나눠주는 거야.”민도준이 나른하게 한 대꾸에 최수인은 잿빛이 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이런 기운은 혼자 즐기셔!”이윽고 붉게 달아오른 피부를 마구 비비며 뭔가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참, 나 오늘 청첩장 받았는데 민승현이 이번 주말에 약혼식 올린다던데, 그 약혼식은 네 할아버지가 밀어준 거고. 하하, 너 제수씨 제대로 숨겨야겠다? 안 그랬다간 사람들이 뱉은 침에 익사할 수도 있어.”민도준은 의자에서 일어나 앉으며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왜 숨겨야 하지?”최수인은 미친놈 보듯 민도준을 힐끗 봤지만 또 생각해
별장.권하윤은 소파에 앉아 여러 가지 디자인을 앞에 놓고 멍때렸다.지금 권하윤이 보고 있는 주얼리는 모두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들인데 한민혁이 놓고 간 것들이다. 권하윤이 마음에 드는 스타일을 고르면 디자이네에게 제작을 맡겨야 한다면서.솔직히 모든 디자인이 예뻤지만 마음이 이곳에 있지 않았기에 하나를 골라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현재 권하윤의 머릿속에는 온통 ‘안 괜찮아. 그런데 권하윤을 포기하는 것도 안 괜찮아’라던 민도준의 말이 떠올랐다.민도준은 들어왔을 때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권하윤을 보고 은찬을 밖으로 내보냈다.그러더니 손가락을 탁 소리 나게 튕겨댔다.“정신 차려.”역시나 효과가 있었는지 권하윤은 깜짝 놀라며 민도준을 바라봤다.“언제 왔어요?”권하윤은 얼른 난장판이 된 테이블을 치운 뒤 민도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힘들었죠? 제가 어깨를 주물러줄게요.”대답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작은 손은 벌써 민도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민도준은 주인한테 꼬리를 흔드는 듯한 권하윤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이윽고 별로 감각도 없게 내리치는 권하윤의 작은 손을 끌어왔다.“또 무슨 꿍꿍이야? 왜 이렇게 아부해?”권하윤은 편안한 자세를 찾아 민도준에게 기댔다.마음속에 꽉 찬 감동이 마구 흘러넘쳤지만 내리깐 눈에는 극도의 불안함과 불확실함이 담겨 있었다.“도준 씨, 혹시 언젠가 저를 죽이고 싶어지면 어떡해요?”민도준은 어이없다 못해 헛웃음이 나와 권하윤의 고개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왜? 심장을 보고 나니 이젠 머리에 문제 생겼어?”권하윤은 민도준에게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손발을 함께 사용해 애써 가리면서 민도준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러고는 민도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무서워서 그래요. 만약…….”말을 하려고 보니 목이 메어 권하윤은 침을 여러 번 삼켰다.“만약 제가 실수로 잘못을 저지르면 혹시 저 버릴 거예요?”그 말을 듣는 순간 민도준의 눈매는 살짝 가라앉았다.“그러면 어떤 잘못인지에 달
민도준은 실소하여 권하윤의 코를 살짝 쥐었다.“무슨 생각 하는 거야? 나 주얼리 디자인도 배운 적 없어. 못생긴 작품이 탄생하면 어떡해? 그래도 하고 다닐 거야?”권하윤은 못생기든 예쁘든 그런 건 상관없었기에 민도준의 목을 두른 채 애교를 부렸다.“전 못생긴 게 좋아요.”권하윤이 소파에서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민도준은 권하윤의 허리를 꼭 잡았다.“그만해. 이러지 마.”민도준의 목소리에서 귀찮음이 담겨 있다는 걸 느낀 권하윤은 실망한 듯 손을 풀었다.“네.”풀이 죽어 옆에 놓인 설계도를 봤지만 순간 기운이 없어졌다.그런 모습에 민도준은 재밌었는지 권하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왜 그래? 동의하지 않았다고 성깔 부리는 거야?”권하윤은 입을 삐죽거렸다.“도준 씨한테 누가 감히 성깔 부리겠어요. 간이 배 밖에 나오지 않은 이상.”“내가 너무 오냐오냐했나 보네.”권하윤은 자기가 사실 무리한 부탁을 했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반지라는 두 글자에 왠지 자꾸만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이거로 민도준의 마음속에 자기가 얼마만큼 차지하고 있는지 알고 싶기도 했고.민도준의 마음속에 오직 자기만 있다는 걸 확인하면 용기가 더 생길 것만 같았다.민도준한테 자기의 모든 걸 털어놓을 용기.늦은 밤.샤워를 하고 나온 권하윤은 바로 이불 속에 들어가 슬금슬금 민도준에게 가까이했다. 하지만 살이 닿으려 할 때, 인간 난로는 바로 권하윤에게서 멀어지더니 방 안의 불이 바로 꺼져버렸다.“이제 자.”‘응? 이렇게 잔다고?’“아니면 어쩔 건데?”민도준의 말에 권하윤은 그제야 자기가 속으로 생각했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는 걸 알아차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하지만 말은 이렇게 했으면서 속으로는 남자는 역시 손에 넣은 것에는 흥미를 잃는 동물이라고 구시렁댔다.한참을 누워 있었지만 권하윤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약 두 번 정도 뒤척였을 때, 민도준의 긴 팔이 권하윤을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자지 않고 뭐해?”허리에 닿는 뜨거운 손이 잠옷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