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인은 민도준을 10몇 년 동안 알고 지내온 사람이기에 민도준이 이렇게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심지어 예전에도 절대 마음씨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게다가 민도준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아마 자기를 죽이려 했던 여자는 아무리 사랑했어도 곁에 두지 않으려 할 거다.이건 사랑하느냐의 문제로 간단히 결론지을 문제가 아니다. 이미 죽이려고까지 했다는 건 더 이상 돌이킬 수 있는 여지조차 없는 거니까.최수인의 말에 민도준은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상관없냐고? 하, 내가 부처님인 줄 알아?”“그러면 왜 결혼하려고 하는 건데?”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에서 나는 연기는 민도준의 조각 같은 얼굴에 조금 그윽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해주었다.“안 그러면? 공태준이 공씨 가문 사람들을 처리하고 와서 권하윤을 쏙 빼내 가기를 기다리라고?”최수인은 잠깐 멈칫하더니 활짝 웃었다.“아하, 그냥 먼저 선수 치겠다는 거였어?”그 말에 민도준은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먼저 선수 칠 거 있나? 이미 따먹었는데.”“얼씨구, 아직 하윤 씨 애인의 목숨을 가질 때가 아니다 이건가?”민도준의 잘난체하는 모습에 최수인도 잘난체하며 분석했지만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뜨거운 담뱃불에 데이고 말았다.“헉, 젠장!”최수인의 옷은 이미 구멍이 뚫렸지만 화를 내고 싶어도 낼 수 없었다.“지금 나 죽이려는 거야?”“좋은 기운을 먼저 나눠주는 거야.”민도준이 나른하게 한 대꾸에 최수인은 잿빛이 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이런 기운은 혼자 즐기셔!”이윽고 붉게 달아오른 피부를 마구 비비며 뭔가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참, 나 오늘 청첩장 받았는데 민승현이 이번 주말에 약혼식 올린다던데, 그 약혼식은 네 할아버지가 밀어준 거고. 하하, 너 제수씨 제대로 숨겨야겠다? 안 그랬다간 사람들이 뱉은 침에 익사할 수도 있어.”민도준은 의자에서 일어나 앉으며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왜 숨겨야 하지?”최수인은 미친놈 보듯 민도준을 힐끗 봤지만 또 생각해
별장.권하윤은 소파에 앉아 여러 가지 디자인을 앞에 놓고 멍때렸다.지금 권하윤이 보고 있는 주얼리는 모두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들인데 한민혁이 놓고 간 것들이다. 권하윤이 마음에 드는 스타일을 고르면 디자이네에게 제작을 맡겨야 한다면서.솔직히 모든 디자인이 예뻤지만 마음이 이곳에 있지 않았기에 하나를 골라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현재 권하윤의 머릿속에는 온통 ‘안 괜찮아. 그런데 권하윤을 포기하는 것도 안 괜찮아’라던 민도준의 말이 떠올랐다.민도준은 들어왔을 때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권하윤을 보고 은찬을 밖으로 내보냈다.그러더니 손가락을 탁 소리 나게 튕겨댔다.“정신 차려.”역시나 효과가 있었는지 권하윤은 깜짝 놀라며 민도준을 바라봤다.“언제 왔어요?”권하윤은 얼른 난장판이 된 테이블을 치운 뒤 민도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힘들었죠? 제가 어깨를 주물러줄게요.”대답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작은 손은 벌써 민도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민도준은 주인한테 꼬리를 흔드는 듯한 권하윤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이윽고 별로 감각도 없게 내리치는 권하윤의 작은 손을 끌어왔다.“또 무슨 꿍꿍이야? 왜 이렇게 아부해?”권하윤은 편안한 자세를 찾아 민도준에게 기댔다.마음속에 꽉 찬 감동이 마구 흘러넘쳤지만 내리깐 눈에는 극도의 불안함과 불확실함이 담겨 있었다.“도준 씨, 혹시 언젠가 저를 죽이고 싶어지면 어떡해요?”민도준은 어이없다 못해 헛웃음이 나와 권하윤의 고개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왜? 심장을 보고 나니 이젠 머리에 문제 생겼어?”권하윤은 민도준에게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손발을 함께 사용해 애써 가리면서 민도준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러고는 민도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무서워서 그래요. 만약…….”말을 하려고 보니 목이 메어 권하윤은 침을 여러 번 삼켰다.“만약 제가 실수로 잘못을 저지르면 혹시 저 버릴 거예요?”그 말을 듣는 순간 민도준의 눈매는 살짝 가라앉았다.“그러면 어떤 잘못인지에 달
민도준은 실소하여 권하윤의 코를 살짝 쥐었다.“무슨 생각 하는 거야? 나 주얼리 디자인도 배운 적 없어. 못생긴 작품이 탄생하면 어떡해? 그래도 하고 다닐 거야?”권하윤은 못생기든 예쁘든 그런 건 상관없었기에 민도준의 목을 두른 채 애교를 부렸다.“전 못생긴 게 좋아요.”권하윤이 소파에서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민도준은 권하윤의 허리를 꼭 잡았다.“그만해. 이러지 마.”민도준의 목소리에서 귀찮음이 담겨 있다는 걸 느낀 권하윤은 실망한 듯 손을 풀었다.“네.”풀이 죽어 옆에 놓인 설계도를 봤지만 순간 기운이 없어졌다.그런 모습에 민도준은 재밌었는지 권하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왜 그래? 동의하지 않았다고 성깔 부리는 거야?”권하윤은 입을 삐죽거렸다.“도준 씨한테 누가 감히 성깔 부리겠어요. 간이 배 밖에 나오지 않은 이상.”“내가 너무 오냐오냐했나 보네.”권하윤은 자기가 사실 무리한 부탁을 했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반지라는 두 글자에 왠지 자꾸만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이거로 민도준의 마음속에 자기가 얼마만큼 차지하고 있는지 알고 싶기도 했고.민도준의 마음속에 오직 자기만 있다는 걸 확인하면 용기가 더 생길 것만 같았다.민도준한테 자기의 모든 걸 털어놓을 용기.늦은 밤.샤워를 하고 나온 권하윤은 바로 이불 속에 들어가 슬금슬금 민도준에게 가까이했다. 하지만 살이 닿으려 할 때, 인간 난로는 바로 권하윤에게서 멀어지더니 방 안의 불이 바로 꺼져버렸다.“이제 자.”‘응? 이렇게 잔다고?’“아니면 어쩔 건데?”민도준의 말에 권하윤은 그제야 자기가 속으로 생각했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는 걸 알아차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하지만 말은 이렇게 했으면서 속으로는 남자는 역시 손에 넣은 것에는 흥미를 잃는 동물이라고 구시렁댔다.한참을 누워 있었지만 권하윤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약 두 번 정도 뒤척였을 때, 민도준의 긴 팔이 권하윤을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자지 않고 뭐해?”허리에 닿는 뜨거운 손이 잠옷
민도준의 수단을 권하윤은 한두 번 본 게 아니지만 단순한 수단을 보게 된 건 처음이었다.분명 권하윤을 생각하는 척 배려하는 척했지만 오히려 더 자극적으로 권하윤을 손으로만 툭툭 건드렸다.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니 권하윤은 속도가 늦어지는 게 오히려 더 괴롭다는 걸 알아차렸다.한바탕 제대로 교육을 마친 민도준은 나른해진 권하윤을 품에 안았다.“도준 씨.”“응.”“혹시 괴로워요?”권하윤은 작은 얼굴로 민도준의 어깨를 비비며 애교 부리듯 물었다.그 동작에 민도준은 권하윤의 허리를 살짝 주물렀다.“그걸 말이라고 해?”“아니면 저도 해줄까요?”얼굴은 부끄러움에 이미 빨개졌지만 손은 벌써부터 대기하고 있었다.하지만 오히려 민도준의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그 정도 실력으로 오늘 밤을 새우려고 그래?”“저도 실력이 늘었다고요. 게다가 의사 선생님도 괜찮다고 했는데. 어디가…… 안된다는 건지…….”목소리가 점점 작아졌지만 민도준은 똑똑히 들어버렸다.이윽고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민도준은 일부러 뜻을 왜곡하며 되물었다.“뭐야? 내가 괴로울까 봐 걱정된 게 아니라 아직 성에 안 차서 그러는 거였어?”권하윤은 민도준의 말에 부끄러워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민도준은 오히려 더 놀려댔다.“욕구 불만인 건 알겠는데 사흘 동안 약 잘 챙겨 먹어. 다음번에 재검사했을 때 아무 문제도 없다면 제대로 한 번 놀아줄 테니까.”점점 더 어이없어지고 수위도 높아지는 농담에 권하윤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저 잘 거예요!”솔직히 이번에는 정말로 피곤했다.침대에 누어 있다보니 눈꺼풀이 자꾸만 맞붙으며 끝내 꿈나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설렘은 꿈속에서도 이어졌다.꿈속에서 권하윤은 또 그 복도에 서 있었다.제대로 보이지 않던 낮의 장면이 꿈속에서 오히려 더 또렷하게 보였다.고개를 돌린 민도준의 얼굴 반쪽에 그늘이 드리웠고 입꼬리는 매력적인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민도준이 보고 있는 건 권하윤이 있는 방향이었다.꿈속에서 떨
“안 그려준다면서요?”한참 숨을 돌리다가 자그마한 머리통을 들고 물은 권하윤의 물음에 민도준이 코웃음을 쳤다.“안 그리면 결혼식 때까지 삐질 거잖아.”그제야 권하윤은 부끄러웠는지 눈길을 돌려 민도준이 그린 반지를 바라봤다.여우 모양의 디자인에 삼각형 모양의 루비가 심장처럼 가운데 박혀 있어 눈길을 끌었다.“내 수준은 딱 이 정도니까 마음에 안 들면 디자이너 찾아.”“아니요. 전 도준 씨가 그려준 게 좋아요.”사실 민도준이 디잔인 한거라면 어떤 모양이 됐든 괜찮았다.민도준이 디자인한 걸 손에 낄 수 있다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녹을 것만 같았으니까.더욱이 디자인은 아주 훌륭하고 예뻤다.이걸 보고 나니 권하윤은 더 울고 싶었다.민도준은 그런 권하윤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마음에 안 들면 안 드는 거지 왜 울고 그래?”“마음에 들어요. 역시 도준 씨밖에 없어요.”흐느끼며 말하는 권하윤을 보자 민도준은 재밌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양심은 있네.”권하윤은 민도준의 손을 따라 반지 디자인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이거 제작하면 얼마나 걸려요?”“사흘 정도.”“그걸 도준 씨가 어떻게 알아요?”“쓸데없는 질문은. 당연히 물어봤지. 이런 걸 그려본 적도 없는데 당연히 스승님이라도 모셔야 하지 않겠어?”가뜩이나 이미 완전히 녹아버린 권하윤의 심장은 더욱 어찌할 바를 몰라 민도준에게 꼭 기댔다.“도준 씨.”“응.”“반지가 다 제작될 때쯤 저 도준 씨한테 할 말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권하윤의 뒷덜미가 잡혀 고개가 쳐들렸다.“응? 뭔데 이렇게 입맛을 돋우실까?”살짝 장난기 섞이고 부드러운 말에 권하윤은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씩 웃었다.“왜요? 안 돼요?”그 모습은 마치 자기한테 주권이 있다고 우쭐해하는 것 같았다.이에 민도준은 미소가 핀 권하윤의 작은 얼굴을 세게 들어 올렸다.“돼.”다시 침대로 돌아오자 권하윤은 마치 껌딱찌처럼 민도준의 옆에 꼭 붙었다.하지만 민도준도 권하윤을 밀어내지는 않고 손으로 권하윤의 등
“여보세요? 엄마.”“응, 딸.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전화했어?”자기가 할 말을 생각하자 권하윤은 순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저기, 오빠는 오늘 좀 어때요?”“네 오빠 마침 깨어났어. 바꿔줄게.”오빠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권하윤은 기쁘면서도 전화를 바꿔준다는 소리에 한편으로 당황했다.“저기, 잠깐만요. 저…….”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 건너편에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아.”“오빠.”권하윤은 입술을 꾹 깨물며 얼버무렸다.사실 어머니보다 오빠한테 이 사실을 말하는 게 더 무서웠다.오빠는 항상 부드럽고 따뜻했으나 한계가 명확한 사람이니까.사실 어릴 적, 권하윤도 누구나 그렇듯 반항기가 있었다. 어느 하루는 핸드폰을 꺼버리고 친구들과 온종일 밖에서 놀다가 술까지 먹고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가고 나서야 오빠가 하루 종일 자기를 찾아다녔다는 걸 알았다.그날 오빠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얼굴이 땀범벅이 되었으면서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담담한 말투로 질문했었다.“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이제 알겠어?”“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가면 안 되지. 내가 네 안전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 어떻게 그래? 너한테 일이라도 나면 나도 못 살아.”그날 그 일이 있은 뒤로 권하윤은 절대 핸드폰을 꺼둔 상태에서 저녁 늦게까지 집에 안 들어온 적 없었다. 그렇게 반항기는 시작과 동시에 바로 막을 내렸다.그런데 지금 다시 오빠의 목소리를 듣자 권하윤은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사라졌다.그도 그럴 게, 전에 오빠가 이미 민도준이 위험하다고 다시는 엮이지 말라고 경고했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지금 권하윤은 그 말을 듣지 않은 것도 모자라 민도준과 결혼하려고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때, 전화 건너편에서 이승우가 뭔가를 대충 눈치챘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 나한테 무슨 할 얘기가 있어?’“아…… 아니야.”그 말에 건너편에서 순간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너 어릴 때 사탕 훔쳐 먹고 안 먹
다시 입을 여는 순간 권하윤의 목소리에는 막연함이 묻어있었다.“오빠, 나 진짜 최악이지?”권하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눈치챈 이승우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아니, 넌 그저 힘든 거야.”집안에서 온갖 사랑을 다 받던 여동생이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빠진 데다 오빠라는 사람이 오히려 짐이 되었으니 마음이 안 아플 리가 없었다.“아휴, 됐다. 그렇게 많은 걸 겪었으니 난 그저 네가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야. 게다가 민도준은…….”“도준 씨가 왜?”“아니야. 오빠는 그저 네가 고생할까 봐 그게 걱정이야.”이승우는 잠깐 숨을 돌리더니 말을 이었다.“내가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네가 지금 민도준한테 단단히 잡혀 빠져나오기 힘들잖아. 그러니까 공은채의 일은 잘 생각해야 해. 너희 두 사람 사이에 이미 파열이 생겨났는데 민도준이 만약 네가 자기를 속였다는 걸 알게 되면 앞으로 네 생활은 더 힘들어질 거야. 나는 그저 네가 무사하길 바라.”“…….”전화를 끊은 지 한참이 지났지만 권하윤은 여전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오빠의 말이 맞았으니까. 그 사실을 고백하고 난 뒤 어떤 결과가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민도준이 사실을 알고도 결혼하려고 하고 앞으로 다시는 서로 속이지 않는다면 좋은 결과일 테지만, 만약 민도준이 화를 내 가족까지 피해를 보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만약 가족이 국내에 있다면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하겠지만 지금으로써는 해외에 있어 민도준이 화를 낸다 해도 가족한테까지 손이 닿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한 느낌은 은찬이 식사를 하자고 권하윤을 부를 때까지 지속됐다.점심 식사가 그럭저럭 끝난 뒤 권하윤은 민도준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일이 있어 늦게 갈 테니 권하윤더러 먼저 웨딩숍에 가서 드레스를 고르라는 연락.솔직히 민도준이 바쁘다는 건 권하윤도 알고 있었다.“시간 없으면 저 은찬이랑 같이 가도 돼요.”“털도 아직 안 난 애가 뭘 알겠어?”순간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사람을 어
권하윤의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강민정은 먼저 입을 열었다.“아, 미안해요. 전에 새언니라고 하도 불러대서 습관 됐나 봐요. 언니가 저보다 나이도 많으니 그냥 하윤 언니라고 해도 괜찮죠?”강민정이 옆에서 한참을 떠드는 동안 권하윤은 드레스와 너울을 정리하면서 강민정의 말은 깡그리 무시했다.“내가 말하잖아요…….”강민정은 순간 자기의 신분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걸 자각했는지 이내 화를 가라앉히고 괴상야릇한 말투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하윤 언니, 언니가 우리 오빠한테 파혼당해서 욱하는 마음에 저 무시하는 건 이해하지만 분명 언니가 바람피운 거잖아요. 오빠가 그렇게 많이 참아줬는데 계속 버릇 고치지 않아 오빠도 실망한 것 뿐이에요. 저를 탓한다고 뭐가 달라져요?”노골적인 말에 옆에 있던 직원들은 눈을 굴리며 서로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강민정은 오히려 직원들을 빙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아, 이분이 바로 제가 아까 말한 그 여자예요. 민씨 가문에 파혼당한 권씨 집안 넷째 아가씨. 다들 전에 들어본 적 있죠?”이 웨딩숍은 고급 드레스만 취급하는 데다 임대하지 않고 모두 판매만 하는 곳이라 당연히 경성의 재벌을 많이 접한다. 때문에 최근 크게 화제가 됐던 그 소문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그런데 그 주인공이 눈앞에 있다고 하니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놀라운 듯 자기를 훑어보는 직원들의 눈빛에 권하윤은 몸을 돌려 강민정을 향해 싱긋 웃었다.“내가 바람을 피웠든 말든 그건 둘째 치고 민정 씨가 우리 오빠 거리는 사람이 사촌 오빠면서 다 큰 어른이 사촌 오빠 침대에 기어올라 결혼하는 건 당당한가 봐요?”정보량이 너무 많은지라 직원들은 모두 강민정에게 눈길을 돌렸다.순간 치부가 드러나자 강민정은 한껏 소리를 높였다.“헛소리 그만 해요! 분명 언니가 바람을 피웠으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꾸며내 우리 오…… 승현 오빠를 모욕하지 마요!”“제가 헛소리를 했다고요?”권하윤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강민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