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려준다면서요?”한참 숨을 돌리다가 자그마한 머리통을 들고 물은 권하윤의 물음에 민도준이 코웃음을 쳤다.“안 그리면 결혼식 때까지 삐질 거잖아.”그제야 권하윤은 부끄러웠는지 눈길을 돌려 민도준이 그린 반지를 바라봤다.여우 모양의 디자인에 삼각형 모양의 루비가 심장처럼 가운데 박혀 있어 눈길을 끌었다.“내 수준은 딱 이 정도니까 마음에 안 들면 디자이너 찾아.”“아니요. 전 도준 씨가 그려준 게 좋아요.”사실 민도준이 디잔인 한거라면 어떤 모양이 됐든 괜찮았다.민도준이 디자인한 걸 손에 낄 수 있다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녹을 것만 같았으니까.더욱이 디자인은 아주 훌륭하고 예뻤다.이걸 보고 나니 권하윤은 더 울고 싶었다.민도준은 그런 권하윤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마음에 안 들면 안 드는 거지 왜 울고 그래?”“마음에 들어요. 역시 도준 씨밖에 없어요.”흐느끼며 말하는 권하윤을 보자 민도준은 재밌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양심은 있네.”권하윤은 민도준의 손을 따라 반지 디자인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이거 제작하면 얼마나 걸려요?”“사흘 정도.”“그걸 도준 씨가 어떻게 알아요?”“쓸데없는 질문은. 당연히 물어봤지. 이런 걸 그려본 적도 없는데 당연히 스승님이라도 모셔야 하지 않겠어?”가뜩이나 이미 완전히 녹아버린 권하윤의 심장은 더욱 어찌할 바를 몰라 민도준에게 꼭 기댔다.“도준 씨.”“응.”“반지가 다 제작될 때쯤 저 도준 씨한테 할 말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권하윤의 뒷덜미가 잡혀 고개가 쳐들렸다.“응? 뭔데 이렇게 입맛을 돋우실까?”살짝 장난기 섞이고 부드러운 말에 권하윤은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씩 웃었다.“왜요? 안 돼요?”그 모습은 마치 자기한테 주권이 있다고 우쭐해하는 것 같았다.이에 민도준은 미소가 핀 권하윤의 작은 얼굴을 세게 들어 올렸다.“돼.”다시 침대로 돌아오자 권하윤은 마치 껌딱찌처럼 민도준의 옆에 꼭 붙었다.하지만 민도준도 권하윤을 밀어내지는 않고 손으로 권하윤의 등
“여보세요? 엄마.”“응, 딸.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전화했어?”자기가 할 말을 생각하자 권하윤은 순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저기, 오빠는 오늘 좀 어때요?”“네 오빠 마침 깨어났어. 바꿔줄게.”오빠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권하윤은 기쁘면서도 전화를 바꿔준다는 소리에 한편으로 당황했다.“저기, 잠깐만요. 저…….”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 건너편에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아.”“오빠.”권하윤은 입술을 꾹 깨물며 얼버무렸다.사실 어머니보다 오빠한테 이 사실을 말하는 게 더 무서웠다.오빠는 항상 부드럽고 따뜻했으나 한계가 명확한 사람이니까.사실 어릴 적, 권하윤도 누구나 그렇듯 반항기가 있었다. 어느 하루는 핸드폰을 꺼버리고 친구들과 온종일 밖에서 놀다가 술까지 먹고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가고 나서야 오빠가 하루 종일 자기를 찾아다녔다는 걸 알았다.그날 오빠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얼굴이 땀범벅이 되었으면서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담담한 말투로 질문했었다.“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이제 알겠어?”“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가면 안 되지. 내가 네 안전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 어떻게 그래? 너한테 일이라도 나면 나도 못 살아.”그날 그 일이 있은 뒤로 권하윤은 절대 핸드폰을 꺼둔 상태에서 저녁 늦게까지 집에 안 들어온 적 없었다. 그렇게 반항기는 시작과 동시에 바로 막을 내렸다.그런데 지금 다시 오빠의 목소리를 듣자 권하윤은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사라졌다.그도 그럴 게, 전에 오빠가 이미 민도준이 위험하다고 다시는 엮이지 말라고 경고했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지금 권하윤은 그 말을 듣지 않은 것도 모자라 민도준과 결혼하려고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때, 전화 건너편에서 이승우가 뭔가를 대충 눈치챘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 나한테 무슨 할 얘기가 있어?’“아…… 아니야.”그 말에 건너편에서 순간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너 어릴 때 사탕 훔쳐 먹고 안 먹
다시 입을 여는 순간 권하윤의 목소리에는 막연함이 묻어있었다.“오빠, 나 진짜 최악이지?”권하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눈치챈 이승우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아니, 넌 그저 힘든 거야.”집안에서 온갖 사랑을 다 받던 여동생이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빠진 데다 오빠라는 사람이 오히려 짐이 되었으니 마음이 안 아플 리가 없었다.“아휴, 됐다. 그렇게 많은 걸 겪었으니 난 그저 네가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야. 게다가 민도준은…….”“도준 씨가 왜?”“아니야. 오빠는 그저 네가 고생할까 봐 그게 걱정이야.”이승우는 잠깐 숨을 돌리더니 말을 이었다.“내가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네가 지금 민도준한테 단단히 잡혀 빠져나오기 힘들잖아. 그러니까 공은채의 일은 잘 생각해야 해. 너희 두 사람 사이에 이미 파열이 생겨났는데 민도준이 만약 네가 자기를 속였다는 걸 알게 되면 앞으로 네 생활은 더 힘들어질 거야. 나는 그저 네가 무사하길 바라.”“…….”전화를 끊은 지 한참이 지났지만 권하윤은 여전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오빠의 말이 맞았으니까. 그 사실을 고백하고 난 뒤 어떤 결과가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민도준이 사실을 알고도 결혼하려고 하고 앞으로 다시는 서로 속이지 않는다면 좋은 결과일 테지만, 만약 민도준이 화를 내 가족까지 피해를 보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만약 가족이 국내에 있다면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하겠지만 지금으로써는 해외에 있어 민도준이 화를 낸다 해도 가족한테까지 손이 닿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한 느낌은 은찬이 식사를 하자고 권하윤을 부를 때까지 지속됐다.점심 식사가 그럭저럭 끝난 뒤 권하윤은 민도준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일이 있어 늦게 갈 테니 권하윤더러 먼저 웨딩숍에 가서 드레스를 고르라는 연락.솔직히 민도준이 바쁘다는 건 권하윤도 알고 있었다.“시간 없으면 저 은찬이랑 같이 가도 돼요.”“털도 아직 안 난 애가 뭘 알겠어?”순간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사람을 어
권하윤의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강민정은 먼저 입을 열었다.“아, 미안해요. 전에 새언니라고 하도 불러대서 습관 됐나 봐요. 언니가 저보다 나이도 많으니 그냥 하윤 언니라고 해도 괜찮죠?”강민정이 옆에서 한참을 떠드는 동안 권하윤은 드레스와 너울을 정리하면서 강민정의 말은 깡그리 무시했다.“내가 말하잖아요…….”강민정은 순간 자기의 신분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걸 자각했는지 이내 화를 가라앉히고 괴상야릇한 말투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하윤 언니, 언니가 우리 오빠한테 파혼당해서 욱하는 마음에 저 무시하는 건 이해하지만 분명 언니가 바람피운 거잖아요. 오빠가 그렇게 많이 참아줬는데 계속 버릇 고치지 않아 오빠도 실망한 것 뿐이에요. 저를 탓한다고 뭐가 달라져요?”노골적인 말에 옆에 있던 직원들은 눈을 굴리며 서로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강민정은 오히려 직원들을 빙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아, 이분이 바로 제가 아까 말한 그 여자예요. 민씨 가문에 파혼당한 권씨 집안 넷째 아가씨. 다들 전에 들어본 적 있죠?”이 웨딩숍은 고급 드레스만 취급하는 데다 임대하지 않고 모두 판매만 하는 곳이라 당연히 경성의 재벌을 많이 접한다. 때문에 최근 크게 화제가 됐던 그 소문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그런데 그 주인공이 눈앞에 있다고 하니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놀라운 듯 자기를 훑어보는 직원들의 눈빛에 권하윤은 몸을 돌려 강민정을 향해 싱긋 웃었다.“내가 바람을 피웠든 말든 그건 둘째 치고 민정 씨가 우리 오빠 거리는 사람이 사촌 오빠면서 다 큰 어른이 사촌 오빠 침대에 기어올라 결혼하는 건 당당한가 봐요?”정보량이 너무 많은지라 직원들은 모두 강민정에게 눈길을 돌렸다.순간 치부가 드러나자 강민정은 한껏 소리를 높였다.“헛소리 그만 해요! 분명 언니가 바람을 피웠으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꾸며내 우리 오…… 승현 오빠를 모욕하지 마요!”“제가 헛소리를 했다고요?”권하윤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강민정의
민승현은 권하윤이 죽도록 밉다.권하윤만 아니었다면 자기가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을 테니까.하지만 너무 미워해서인지 자기를 버린 이 여자가 자꾸만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남자가 만약 남자를 미워한다면 그 사람을 죽이고 싶겠지만, 여자를 미워한다면 그 여자를 복종시키고 싶을 거다.민승현이 권하윤에 대한 감정도 이러하다.민승현은 솔직히 언젠가 권하윤이 자기 앞에 무릎 꿇고 우는 걸 지켜보고 싶었다.때문에 권하윤이 바람을 피웠다는 소식을 퍼뜨렸고.민승현은 권하윤이 자기한테 파혼당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길 바랐고, 자기를 버린 결과가 이러하다는 걸 똑똑히 알려주고 싶었다.하지만 눈앞의 권하윤은 민승현이 생각했던 것처럼 초라해지나 의기소침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반짝였다. 촉촉한 눈은 여전히 여성미가 흘러넘치고 윤기 있고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입술, 매혹적인 분위기까지 모두 활짝 핀 장미를 연상케 했다.이 모든 변화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하자 민승현은 이가 갈렸다.증오의 눈초리가 권하윤이 입은 웨딩드레스에 옮겨지는 순간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설마 민도준이 권하윤과 결혼하려고 하나?’‘설마. 지금 민도준이 박민주랑 결혼한다고 소문까지 났는데 그게 아닌가?’물론 이런 생각이 어이없었지만 그렇다면 다른 쪽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권하윤이 민도준과 결혼하면 민승현은 당연히 비웃음을 받을 게 뻔하다. 그 생각만 하면 민승현은 눈앞의 여자를 죽이고 싶었다.그때 권하윤이 드레스를 살짝 들어 올리며 거울 앞에서 빙글 돌더니 귀찮은 듯 입을 열었다.“이 드레스에 액운이 묻은 것 같네요. 다른 거로 입어 볼게요.”하지만 권하윤이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 손목이 잡히더니 민승현이 어두운 얼굴로 따져 물었다.“지금 누구를 위해 드레스를 입는 거야?”결혼식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권하윤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그러다가 언젠가는 사실을 알게 될 거라는 생각에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누가 됐든 너는 아니야.”권하윤은 말하면서 손을 뒤
권하윤은 주위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작은 소리로 원망했다.“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그 소리에 민도준은 얼른 권하윤을 잡아당겨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손가락으로 이마를 쿡 찔렀다.“어쩜 눈만 팔면 사고가 나?”권하윤은 억울한 듯 끙끙거렸다.“저는 얌전히 있었다고요. 도준 씨가 늦게 왔으면서 왜 저한테 뭐라 그래요?”두 사람의 대화에 직원들은 아연실색했다.모두 민도준이 책임이라도 물을까 봐 잔뜩 긴장해서는 머리를 다친 민승현은 까맣게 잊어버렸다.심지어 강민정이 여러 번 소리치고 나서야 민승현을 일으켜 세웠다.민도준이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민승현은 한참이 지나서야 컴컴해진 눈앞이 다시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민도준 팔짱을 끼고 애교 부리는 권하윤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그걸 눈치챈 민도준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비아냥거렸다.“오, 이렇게 빨리 회복됐어? 그럼 어디 말해 보지 그래? 방금 하윤 씨 끌고 가서 뭐 하려고 했어?”민승현은 자기 이마를 닦아 주는 강민정을 뿌리치더니 비틀비틀 일어나서는 민도준과 눈을 마주했다.“약혼식도 올린 사이에 내가 권하윤 끌고 가는 게 뭐 어때서? 그러는 둘째 형이야말로 제수씨가 될 뻔한 사람과 드레스나 맞추러 오는 게 대체 뭐 하자는 건데?”민승현이 민도준에게 한 말을 듣고 있던 강민정은 순간 겁이 덜컥 나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민도준과 권하윤을 번갈아 봤다.그리고 그때, 민도준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권하윤을 끌어안았다.“아. 제수씨가 혼자 외로운 것 같아 결혼해서 네 형수님 시켜주려고 했는데 마침 잘됐네. 둘이 아는 사이니까 앞으로 친해지기도 편하고. 자, 둘째 형수님이라고 불러 봐.”제수씨? 둘째 형수님?이 강렬하고도 충격적인 내용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져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순간 놀라거나 동정하는 눈빛을 받게 되자 민승현은 피가 흐르는 입을 틀어막고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하지만 민도준은 오히려 위로라도 하는
민도준은 그제야 시선을 드레스를 입은 권하윤에게로 돌렸다. 하지만 민승현과 실랑이를 벌인 탓인지 넥라인이 살짝 비뚤어져 있었다.민도준은 손가락으로 슬쩍 정리해 주더니 권하윤의 쇄골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이게 마음에 들어?”“아까는 괜찮았는데 도준 씨가 맨 처음 본 사람이 아니라서 싫어요.”그 말이 민도준의 기분을 좋게 해준 모양인지 이내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좋아, 그럼 다른 거 보자.”그러더니 옆을 쓱 보며 질문했다.“또 어떤 스타일이 있어요?”아까까지만 해도 피비린내가 서린 폭군 같던 사람이 갑자기 이토록 부드럽게 드레스에 관해 물어보는 게 갭이 너무 커서 직원은 약 2초간 반응을 하지 못하다가 겁에 질린 듯 앞으로 걸어갔다.“어. 이 옷처럼 비단으로 된 드레스가 또 여러 벌 있는데 보여드리죠…….”잠시 후, 민도준은 다리를 꼰 채 앉아 직원이 소개하는 드레스를 하나둘 살펴보기 시작했다.반면 권하윤은 민도준처럼 집중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대부분 시간은 드레스를 보는 게 아니라 민도준을 훔쳐봤다.아마도 이 모든 게 너무 현실감 없는 화면이라 믿기지 않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슬쩍 훔쳐보고 시선을 돌리려 하는 순간 마침 민도준에게 들키고 말았다.“같이 드레스 맞추러 온 거지 나를 구경시켜 주려고 온 거 아닌데.”권하윤은 그런 말을 들었지만 여전히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민도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신나서 그러죠.”이윽고 자기의 작은 손을 민도준의 손안에 넣으며 꽉 잡았다.그렇게 한참을 구경하던 끝에 권하윤은 궁중 요소가 섞인 비단 드레스를 선택했다.피팅룸에서 직원은 권하윤이 옷을 입는 걸 도와주고는 이내 감탄을 자아냈다.“신부님, 정말 아름다우시네요.”피팅 미러에 비친 여인은 한 손에 잡힐듯한 가는 허리를 자랑하고 있었고 바닥까지 축 드리운 드레스가 로맨틱한 라인을 그렸으며 가슴 부근에 살짝 더해져 있는 레이스가 마침 화룡점정의 효과를 냈다.분명 아직은 피팅룸 안에 있었지만 권하윤은 자기가 민도준 앞으로 걸어
공태준을 보는 순간 권하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와 동시에 좋던 기분도 한순간 흩어져 버렸다.이내 일어서 뒷걸음친 권하윤의 얼굴에는 경계가 가득했다.“경성에는 언제 왔어? 왜 여기 있는 거지?”“오늘 아침 도착했어요. 윤이 씨가 보고 싶어서 여기 왔고요.”권하윤의 날 선 말투와 달리 공태준의 어조는 여전히 느릿느릿하고 여유로웠다.하지만 예전에 너무나 많은 걸 겪은 터라 공태준을 보는 순간 권하윤은 왠지 모를 공포감이 들었다.물론 겪은 일 때문인 것도 있지만 지금껏 지내오면서 느낀 공태준이란 사람 자체가 두려웠다.언제나 남의 약점을 찾아내 한 걸음 한 걸음 그 사람을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빠트리는 위험한 사람이었으니.“지금 봤으니 돌아가.”말을 마친 권하윤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섰다.그런데 그때.“오빠 보고 싶지 않아요?”공태준의 말에 권하윤은 순간 멈칫하더니 충격에 눈을 둥그렇게 뜬 채 고개를 홱 돌렸다.“지금 뭐라고 했어? 우리 오빠를…….”“오해했어요. 그냥 영상으로 보겠냐는 뜻이었어요. 저 윤이 씨 오빠한테 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 겁먹을 거 없어요.”권하윤은 공태준을 빤히 바라봤지만 가슴 속에는 여전히 공태준의 입에서 자기 오빠가 나왔다는 공포감이 남아 있었다.결국 눈을 꾹 감으며 한참을 진정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지금 당신 손에 우리 오빠가 있다고 나 경고하는 거야?”“아니에요. 윤이 씨 가족은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약속했잖아요. 전 한 입으로 두말 안 해요.”공태준의 말 속에 섞인 위선적인 선의에 권하윤은 토가 쏠렸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가족 때문에 공태준과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무슨 영상?”공태준의 체온이 담긴 핸드폰 하나가 권하윤의 손에 건네졌다.각도를 보니 몰래 찍은 것인 듯했다.영상 속 이승우는 바이올린을 안고 있었다. 동생 이시영이 옆에서 자꾸만 재촉했지만 이승우는 끝내 바이올린을 켜지는 않았다.오빠가 음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권하윤은 잘 알고 있다.8살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