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기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습을 보자 권하윤은 이내 의심을 접었다. 킬러인 이남기보다 감각이 뛰어날 리는 없을 테니까.하지만 누군가 따라오는 듯한 느낌만은 확실했다.‘설마 한민혁 씨 말대로 헛것이라도 보나?’그러한 생각은 권하윤을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에 하는 수 없이 그저 괜찮다는 대답만 얼버무린 채 안으로 들어갔다.침실에서 몇 시간 동안 멍하니 앉아 있은 권하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하지만 갓 두 걸음 정도 떼었을 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메이드가 갑자기 권하윤 앞에 나타났다.“권하윤 씨, 무슨 시키실 일이라도 있습니까?”“공태준은 어디 있죠?”“가주님은 무슨 일로 찾으십니까? 이 시간에 가주님은 이미 주무셨을 겁니다.”“할 말 있으니 불러와 줘요.”메이드는 바로 거절하려다가 가주의 지시가 생각났는지 얼른 허리를 굽혔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얼마 지나지 않아 공태준이 방으로 들어왔다.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켰지만 공태준은 여전히 반듯한 옷차림이었다.유독 머리 스타일만 평소와 다르게 조금 흐트러진 모습이었고 앞머리가 이마를 덮었다. 보아하니 메이드의 말대로 이미 씻고 잠자리에 들었던 모양이었다.남자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했지만 말투는 여전히 온화했다.“나는 무슨 일로 보자고 했어요?”“민씨 집안 식구들이 오늘 블랙썬으로 변호사를 보냈던데, 그 사람들이 도준 씨 재산에 손대는 거 막을 방법 있어?”공태준은 미간을 주물렀다.“민 사장은 상속인을 정하지 않았으니 재산은 가족들이 처리하는 게 맞아요. 물론 예외는 있지만…….”“그 예외란 게 뭔데?”“민 사장이 안 죽었다면 얘기는 달라지죠.”‘이건 뭐 하나마나 한 얘기 아닌가?’공태준도 권하윤의 표정에서 짜증을 읽어냈는지 말을 보탰다.“그 폭발 사고로 남은 증거가 모두 사라지고 심지어 사망자 신원까지 확인이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때문에 그 시체가 민도준이 아니라고 잡아떼면 사망통지서를 발부받기 어려울 거고 당연히 재산분할도 할 수 없겠죠.”권하윤은 그럴싸한
“민 사장이 안 죽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누르려면 민상철 어르신부터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해요.”공태준의 말에 권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할아버님이 동의할까요?”“현재 민씨 가문이 동요하고 있는 데다 회사 내부에서도 싸움이 일어나고 있고 민 사장의 산업까지 더해지면 정말 내란이 일어날 게 뻔하거든요.”만약 잘나갈 때의 민상철이라면 이 정도쯤은 아마 신경도 쓰지 않았을 거다.하지만 현재는 건강 상태도 안 좋아 겨우 버티고 있기에 다른 사람을 누를 힘이 없다.그런데 그중 한 가지 문제라도 해결이 된다면?민성철은 그 틈에 회사에 신경 쓸 여력이 있을 거다.생각을 마친 권하윤은 고개를 홱 돌려 공태준을 바라봤다.“나랑 같이 밖에 나오자고 한 게 여기 오려고 그런 거였다고?”“그럼요. 하윤 씨가 민 사장과 민 사장 쪽 사람들 걱정하는 거 알아요. 이렇게 데리고 나와 직접 보면 안심이 될 거잖아요.”하긴, 공태준이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어도 권하윤은 완전히 안심하지 못했었다.그런데 공태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눈앞에서 보면 확실히 안심할 수 있었다.권하윤이 차에 오를 때처럼 혐오감 가득한 눈빛으로 자기를 보지 않는다는 걸 발견하자 공태준의 목소리는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직접 나서는 게 어려우면 여기에서 소식 기다려요.”권하윤에게 일부러 공간을 내주려는 건지 아니면 떠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는지 공태준이 차에서 내릴 때 이남기도 함께 뒤따랐다.그제야 권하윤의 팽팽하던 긴장감도 어느새 느슨해졌다.그렇게 한참 동안 차에 앉아 있던 권하윤은 갑갑했는지 끝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차 문과 저택 대문 사이에 거리가 꽤 있다 보니 권하윤은 멀리에서 멍하니 한곳을 응시했다. 하지만 문을 보면 볼수록 민도준과 있었던 일들이 자꾸만 눈앞에 떠올랐다.심지어 누군가 자기를 몰래 지켜보고 있다는 걸 발견하지도 못했다.그 시각, 민씨 저택으로 들어가려던 민승현은 공태준과 권하윤이 잇따라 같은 차에서 내리는 걸 보자 눈에 불이 활활 타올랐다.솔직히
민승현은 여전히 화가 뻗쳤는지 고개를 돌리며 욕설을 퍼부어 댔다.“누구야? 당신 내가 누군지 알고…… 아!”뒤통수에 가한 일격에 외마디 비명이 들려오더니 민승현은 머리를 감싸며 그대로 기절했다.하지만 권하윤은 부축받으며 일어나는 순간까지 여전히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모습이었다.‘내가 꿈을 꾸고 있나? 아니면 이제는 미쳐버려서 환각이 보이나?’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하지만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권하윤의 이름을 불렀다.“윤아, 괜찮아?”권하윤은 눈앞의 남자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하지만 진실한 촉감과 귓가에 맴도는 익숙한 목소리는 모두 눈앞의 사람이 진짜라는 걸 말해줬다.입술을 파르르 떨며 겨우겨우 뱉어낸 목소리마저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은우? 너야? 너 살아 있었어?”성은우는 복잡한 눈빛으로 권하윤을 바라봤다.“응.”현기증이 엄습하더니 날카로운 통증이 관자놀이를 뚫어버릴 것처럼 밀려와 권하윤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성은우의 팔을 필사적으로 잡았다.“네가 살아있으면 나는, 도준 씨는…….”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텅 빈 눈을 한 권하윤을 보자 성은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윽고 권하윤을 부축해 창고 안의 나무 상자 위에 앉혔다.“윤아, 심호흡하고 진정해.”권하윤은 이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급기야 무한한 공포가 휘물아쳤다.‘은우가 안 죽었어. 안 죽었어. 그렇다면 난 뭘 한 거지?’앉아 있는 것조차 힘이 빠져 몸이 아래로 흘러내렸고 코가 막힌 것처럼 숨쉬기가 어려웠다.성은우가 등을 토닥인 지 한참이 지나서야 권하윤은 겨우 기침 소리를 냈다.그렇게 어렵사리 자기 목소리를 되찾고 나서야 권하윤은 성은우의 팔을 잡으며 갈라 터진 목소리를 냈다.“어떻게 된 거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성은우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은 모든 사실을 알려주었다.“사실 그날 민 사장과 내기를 했어. 네가 내 복수를 하기 위해 민 사장을 죽일지.”“…….”그날 민도준은 확실히 성은우를 죽일 마음이 있었다.하
권하윤은 몸을 한껏 웅크린 채 한참을 흐느꼈다.“은우야, 도준 씨가, 도준 씨가…….”“나는 네가 죽은 줄 알고, 시체까지 훼손된 줄 알고 약을 탄 거였어.”“나 이제 어떡해? 은우야…… 나 이제 어떡해…….”혼이 나간 사람처럼 같은 말을 자꾸만 반복하는 권하윤의 모습에 성은우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위로했다.“윤아, 너도 몰랐잖아. 민 사장이 일부러 너 속인 거였는데 너라고 어떻게 알았겠어? 그 모자도 만약 민도준이 모른 체 하지 않았더라면 남기 손에 들어갈 리 없어.”하지만 권하윤은 이제 더 이상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처럼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다.“다 내 잘못이야. 은우야, 도준 씨가 죽는 순간까지 나 미워한 건 아니겠지?”만약 민도준이 아직 살아있다면 권하윤은 그나마 그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를 생각했을 거다.하지만 민도준이 없는 지금, 권하윤에게 남은 건 오직 미안함과 오랫동안 억누르고 외면했던 감정뿐이었다.가슴이 미어질 듯 울고 자기를 탓하는 권하윤을 보자 성은우의 냉철하기만 하던 눈매에 슬픔과 걱정이 드러났다.이것 또한 성은우가 지금껏 나타나지 않고 묵묵히 뒤에서 권하윤을 지켜보기만 했던 이유다.그가 안 죽은 걸 권하윤이 알게 되면 분명 자기를 탓할 테니까.오늘도 상황이 긴급하지만 않으면 성은우는 나타나지 않았을 거다.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성은우는 그저 말없이 권하윤의 등을 토닥이며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러던 그때, 권하윤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면서 다급히 성은우를 불렀다.“은우야. 네가 안 죽었다면 도준 씨도 안 죽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성은우를 보는 권하윤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물거품 같은 희망이 살짝 드러났다.그러한 상황에서 부정하면 권하윤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아 성은우는 입을 뻐금거리다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럴지도 모르지.”역시나, 그 말에 희망이 다시 살아났는지 권하윤은 기뻐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맞아. 도준 씨도 살아 있을 수
권하윤은 손에는 공태준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임시로 잡아든 몽둥이가 아직도 쥐여 있었다.바닥에 개처럼 쓰러져 있는 민승현을 보고 있자니 그가 어떻게 조 사장과 짜고 모략을 꾸몄을지 눈앞에 선했다.갑자기 들끓는 분노에 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몽둥이를 꽉 쥔 권하윤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한 채 분노를 분출하듯 세게 아래로 내리쳤다.그 모습을 공태준은 묵묵히 지켜봤다.그러던 그때, 갑자기 전해진 고통에 민승현은 깼는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권하윤을 보자마자 불같이 화를 냈다.“젠장…… 아!”머리에 일격을 가하자 가뜩이나 깨질 듯 아프던 머리에 고통이 더해졌는지 민승현은 귀신이라도 부르는 것처럼 꽥꽥 소리 질렀다.심지어 시선 끝에 희미하게 걸리는 공태준을 발견하고는 분노가 더해졌는지 욕설을 퍼붓기까지 했다.“젠장! 네가 감히 나를 때려? 아!”“공태준! 권하윤은 민도준이 놀다 버린 년이야! 다른 사람이 비웃을까…… 아…… 겁나지도 않아?”“남이 놀다 버린 걸 주어가다니…… 아! 그만 때려…… 아!”비명과 섞인 욕지거리가 이따금 들려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사라졌다.심지어 상대가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데 권하윤이 여전히 힘을 줄이지 않고 내리치자 공태준은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계속 때리면 죽어요.”권하윤은 그 소리도 전혀 듣지 못한 듯 기계적으로 울분을 토해냈다.이에 공태준은 힘껏 내리치는 권하윤의 손목을 잡으며 낮게 타일렀다.“민승현이 죽는 건 저도 상관 안 해요. 하지만 이 자식이 오늘 하윤 씨를 데리고 갔는데 이때 죽게 되면 처리하기 곤란해요. 하윤 씨가 원한다면 내가 나중에 처리해 줄게요.”손바닥의 차가운 온도가 옷소매를 뚫고 손목에 전해지자 권하윤은 본능적으로 손을 뿌리쳤다.그와 동시에 피가 묻은 몽둥이도 바닥에 그대로 떨어지고 말았다.그제야 권하윤은 비틀거리며 창고를 나섰다.때마침 중앙에 걸려있는 태양은 뜨겁다 못해 독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쨍쨍 내리쬐는 햇볕에 갑자기 눈앞이 번쩍 빛나
민도준의 이름을 듣자 한민혁의 표정은 잠시 침울해졌지만 이내 억지 미소를 지었다.“에이, 도준 형 소식이랄 게 있나요? 뭐, 도준 형이 제 꿈에 나와 말이라도 전하면 제가 맨 먼저 하윤 씨한테 알려줄게요.”권하윤은 그 말에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솔직히 본인도 자기의 행동들이 우습게 느껴졌다.하지만 이렇게 헛된 희망이라도 붙잡고 있지 않으면 정말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한민혁의 얼굴에 드리운 걱정이 눈에 보였는지 권하윤은 심호흡을 하더니 정상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오늘 저 불러낸 거 보면 무슨 일 있어요?”“네.”한민혁은 잠깐 고민하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사실 경찰서에서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어 먼저 입건해 범인부터 조사하고 나중에 도준 형인 게 밝혀지면 사망 통지서를 발부하기로 했어요. 그 덕에 민씨 가문 식구들도 당분간은 얌전해질 거예요.”‘이 일이었구나.’“네.”기대로 부풀었던 가슴은 실망감에 김빠지듯 낮은 소리를 내뱉었다.그때, 한민혁이 권하윤의 안색을 한참 동안 살피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이번 일은 궁 가주가 나섰다던데, 혹시 하윤 씨와 관련 있어요?”“제가 도움 요청했어요.”권하윤의 덤덤한 대답에 한민혁의 표정은 살짝 어두워지더니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뻐금거리다 다시 다물기를 반복했다.그러다 끝내 참지 못했는지 입을 열었다.“저기, 권하윤 씨가 도준 형을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공 가주랑은 어…….”“저도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어요.”권하윤은 흐릿한 시선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전 그저 이곳을 지켜주고 싶었을 뿐이에요.”권하윤이 고집을 부리자 한민혁도 더 이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심지어 권하윤이 떠난 지 한참이 지나서까지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그렇다고 “여기를 지키기보다는 도준 형을 위해 정조를 지켜주세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골치 아픈 나머지 뒤통수를 긁적이고 있던 그때, 갑자기 울린 전화에 문자를 확인한 한민혁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로건!
어제, 성은우는 민도준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권하윤과 한 약속 때문에 블랙썬에 가서 상황을 염탐했다.그렇게 관찰한 지 이틀째, 여전히 아무 행동이 없는 한민혁과 로건을 보고 결국 포기해야 할까 생각하려던 찰나, 두 사람은 갑자기 어디론가 떠났다. 그것도 불과 몇 분 전에.줄곧 블랙썬을 지키고 있던 두 사람이 갑자기 본거지를 버려두고 어디로 간다는 건 아주 이상한 징조였다.때문에 성은우는 오랫동안 킬러로 살아오던 감을 이용해 두 사람의 뒤를 밟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대외적으로 개방되지 않은 웬 개인 소유의 병원이었다.수많은 세력이 호시탐탐 블랙썬을 노리고 있는 시점에 한민혁더러 블랙썬을 버리고 어디론가 달려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 뿐이다.바로 민도준.“병원?”병원이라는 두 글자에 겨우 안심했던 권하윤은 다시 불안해졌다.“도준 씨가 다쳤어? 그날 폭발이 그렇게나 심했는데 당연히 다쳤겠지. 설마 생명이 위험한 건 아니야? 어디 다쳤대?”권하윤은 마치 자기가 원하지 않는 답이 들려오기라도 할까 봐 연속적으로 질문을 해댔다.“윤아, 우선 진정해. 이 병원은 비밀리에 운영되는 곳 같아. 사방에 사람들이 경계하고 있어서 아직 들어갈 수가 없어. 게다가 안쪽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섣불리 들어가는 것도 위험해.”성은우의 말이 맞았다.민도준이 살아있는데도 계속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게다가 도준 씨가 나 만나려 하지 않을지도 몰라.’권하윤의 기분이 갑자기 가라앉은 게 느껴졌는지 성은우는 얼른 입을 열었다.“만약 민 사장이 정말 살아 있다면 한민혁을 한번 찾아가 봐. 한민혁더러 민 사장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해.”“한민혁 씨는…….”권하윤은 생각할수록 맥이 빠졌다.한민혁이 만약 민도준이 어디 있는지 알면서 지금껏 말하지 않았다는 건 권하윤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는 뜻일 테니까. ‘그런데 나한테 쉽게 알려줄까?’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이라도 얻은 듯 권하윤은 스스로 자책했다.“알려주
한민혁이 핸드폰을 들고 병실로 돌아왔을 때 눈동자는 불안한 듯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그 시각, 병상에 있는 남자는 환자복을 입었는데도 날 때부터 타고난 듯한 강압적인 분위기를 숨길 수 없었다.남자는 중상을 입었다 이제 막 회복한 느낌보다는 오히려 임시 잠들었다가 꿈자리가 사나워 불쾌해하는 듯한 모양새였다.삐딱하게 병상에 기대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던 남자는 눈을 들어 한민혁을 힐끗 바라봤다.“할 말 있으면 해.”“어, 권하윤 씨가 블랙썬에 물건을 놓고 갔대.”한민혁은 민도준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요즘 두 번 정도 만났었는데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던데, 형도 이미 깨어났으니 알려주는 게 좋지 않을까?”“그래.”민도준은 느릿하게 대답하면서 턱을 들어 창문을 가리켰다.“저기로 먼저 뛰어내려서 꿈으로 말이라도 전해 줘.”“하하. 그 점쟁이가 그러는데 난 고 층건물에서 뛰어내리면 안 된대. 못 들은 거로 해.”물론 민도준이 듣기 귀찮아한다는 걸 알았지만 권하윤이 공태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은 알릴 필요가 있었기에 한민혁은 눈을 딱 감고 입을 열었다.어찌 됐든 형님이 병상에서 일어났을 때 권하윤을 홀라당 남한테 뺏기 가라도 하면 안 되니까.“그리고 형이 사고 나기 바쁘게 형네 집안 식구들이 한동안 난리도 아니었어. 권하윤 씨가 도움을 많이 줘서 그나마 잠잠해졌지만.”“하.”민도준은 나지막하게 웃었다.“공태준 찾아갔지?”“응…….”한민혁은 기가 죽은 목소리로 낮게 대답하고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그래도 이건 다 형을 생각해서 그런 걸 거야.”민도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에 담배를 물었다.하지만 라이터를 켜려는 순간, 병실 문이 밖에서 열리더니 웬 여인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그 여인은 훤칠한 키와 글래머러스한 몸매, 그리고 화려한 용모를 지녔지만 차가운 눈동자 때문에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도시락을 들고 들어온 화영의 모습에 한민혁은 얼른 앞으로 다가가 도시락을 받아 들었다.“이리 줘요.”자연스럽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