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성은우는 민도준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권하윤과 한 약속 때문에 블랙썬에 가서 상황을 염탐했다.그렇게 관찰한 지 이틀째, 여전히 아무 행동이 없는 한민혁과 로건을 보고 결국 포기해야 할까 생각하려던 찰나, 두 사람은 갑자기 어디론가 떠났다. 그것도 불과 몇 분 전에.줄곧 블랙썬을 지키고 있던 두 사람이 갑자기 본거지를 버려두고 어디로 간다는 건 아주 이상한 징조였다.때문에 성은우는 오랫동안 킬러로 살아오던 감을 이용해 두 사람의 뒤를 밟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대외적으로 개방되지 않은 웬 개인 소유의 병원이었다.수많은 세력이 호시탐탐 블랙썬을 노리고 있는 시점에 한민혁더러 블랙썬을 버리고 어디론가 달려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 뿐이다.바로 민도준.“병원?”병원이라는 두 글자에 겨우 안심했던 권하윤은 다시 불안해졌다.“도준 씨가 다쳤어? 그날 폭발이 그렇게나 심했는데 당연히 다쳤겠지. 설마 생명이 위험한 건 아니야? 어디 다쳤대?”권하윤은 마치 자기가 원하지 않는 답이 들려오기라도 할까 봐 연속적으로 질문을 해댔다.“윤아, 우선 진정해. 이 병원은 비밀리에 운영되는 곳 같아. 사방에 사람들이 경계하고 있어서 아직 들어갈 수가 없어. 게다가 안쪽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섣불리 들어가는 것도 위험해.”성은우의 말이 맞았다.민도준이 살아있는데도 계속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게다가 도준 씨가 나 만나려 하지 않을지도 몰라.’권하윤의 기분이 갑자기 가라앉은 게 느껴졌는지 성은우는 얼른 입을 열었다.“만약 민 사장이 정말 살아 있다면 한민혁을 한번 찾아가 봐. 한민혁더러 민 사장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해.”“한민혁 씨는…….”권하윤은 생각할수록 맥이 빠졌다.한민혁이 만약 민도준이 어디 있는지 알면서 지금껏 말하지 않았다는 건 권하윤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는 뜻일 테니까. ‘그런데 나한테 쉽게 알려줄까?’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이라도 얻은 듯 권하윤은 스스로 자책했다.“알려주
한민혁이 핸드폰을 들고 병실로 돌아왔을 때 눈동자는 불안한 듯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그 시각, 병상에 있는 남자는 환자복을 입었는데도 날 때부터 타고난 듯한 강압적인 분위기를 숨길 수 없었다.남자는 중상을 입었다 이제 막 회복한 느낌보다는 오히려 임시 잠들었다가 꿈자리가 사나워 불쾌해하는 듯한 모양새였다.삐딱하게 병상에 기대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던 남자는 눈을 들어 한민혁을 힐끗 바라봤다.“할 말 있으면 해.”“어, 권하윤 씨가 블랙썬에 물건을 놓고 갔대.”한민혁은 민도준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요즘 두 번 정도 만났었는데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던데, 형도 이미 깨어났으니 알려주는 게 좋지 않을까?”“그래.”민도준은 느릿하게 대답하면서 턱을 들어 창문을 가리켰다.“저기로 먼저 뛰어내려서 꿈으로 말이라도 전해 줘.”“하하. 그 점쟁이가 그러는데 난 고 층건물에서 뛰어내리면 안 된대. 못 들은 거로 해.”물론 민도준이 듣기 귀찮아한다는 걸 알았지만 권하윤이 공태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은 알릴 필요가 있었기에 한민혁은 눈을 딱 감고 입을 열었다.어찌 됐든 형님이 병상에서 일어났을 때 권하윤을 홀라당 남한테 뺏기 가라도 하면 안 되니까.“그리고 형이 사고 나기 바쁘게 형네 집안 식구들이 한동안 난리도 아니었어. 권하윤 씨가 도움을 많이 줘서 그나마 잠잠해졌지만.”“하.”민도준은 나지막하게 웃었다.“공태준 찾아갔지?”“응…….”한민혁은 기가 죽은 목소리로 낮게 대답하고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그래도 이건 다 형을 생각해서 그런 걸 거야.”민도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에 담배를 물었다.하지만 라이터를 켜려는 순간, 병실 문이 밖에서 열리더니 웬 여인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그 여인은 훤칠한 키와 글래머러스한 몸매, 그리고 화려한 용모를 지녔지만 차가운 눈동자 때문에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도시락을 들고 들어온 화영의 모습에 한민혁은 얼른 앞으로 다가가 도시락을 받아 들었다.“이리 줘요.”자연스럽
리조트.젓가락으로 밥알을 한참 동안 헤집던 권하윤은 밥알 한 톨도 입에 넣지 않았다.“입에 안 맞아요?”그러던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생각을 끊어 마지못해 고개를 들자 마침 맞은 쪽에 앉은 공태준과 눈이 마주쳤다.공태준의 요구에 반박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게 벌써 며칠째다.오늘 함께 한 저녁 식사도 사실 그 약속 때문에 이루어 진 거나 다름없다.권하윤은 얼른 생각을 뒤로한 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내 입 맛이 없는 것뿐이야.”공태준은 얼른 소매를 걷어붙이고 손수 권하윤에게 국 한 그릇을 떠주었다.“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국이라도 마셔요.”국을 그릇에 담은 공태준은 그걸 바로 권하윤에게 건네는 대신 위에 뜬 기름을 세심하게 건져냈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요즘 먹었던 국이 언제나 맑고 뽀얗던 게 생각났다.일련의 동작을 끝마친 공태준은 메이드를 시켜 국을 권하윤에게 가져가게 하고는 냅킨으로 손을 닦았다.“민씨 집안 일은 제가 이미 처리했으니 이제 안심해요.”숟가락으로 국을 휘저으며 권하윤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고마워.”“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하윤 씨가 내 곁에 있겠다고 했으니 오히려 내가 고맙지.”권하윤은 마음이 답답해서 공태준의 시선을 피하려고 얼른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공태준은 권하윤이 국을 마시는 걸 보자 눈매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내일 저녁 따로 계획한 일 있어요?”국을 마시던 권하윤의 손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동작을 이어갔다.“내일 블랙썬에 다녀오려고.”공태준은 아무런 감정 변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러면 남기더러 바라대 주라고 할게요. 내일 저녁 파티가 있는데 저랑 같이 참석할 수 있어요?”“정말 내가 같이 가길 원한다고?”권하윤은 눈을 들어 한참 동안 피하던 공태준의 눈을 바라봤다.물론 그날 결혼식이 절반밖에 진행되지 않았지만 권하윤과 민승현이 약혼을 한 사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공태준이 권하윤을 데리고 공식 석상에 참석한다면
“네?”한민혁은 순간 온몸이 찌릿 저렸다. 불안함에 눈은 데굴데굴 굴렀고 속으로는 민도준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당장이라도 말해야 하나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하지만 한참을 자기의 의지와 싸우고 있던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가 한민혁의 생각을 끊었다.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린 권하윤은 문 앞에 나타난 화영을 보자 몇 초간 멍해졌다.그러다 이내 예전에 조 사장이 운영하는 홍옥정에서 눈앞의 여자를 본 적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아, 그때 우리가 홍옥정에서 탈출하는 걸 도와줬던 여자네.’심지어 민도준이 전에 화영이 바로 조 사장의 정부라고 알려준 적이 있었다.화영은 권하윤이 자기를 알아보자 이내 한민혁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나 권하윤 씨랑 할 얘기가 있는데 잠깐 자리 비켜줄래요?”‘도준 형이 뭘 부탁했나 보네.’화영을 보자 한민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요. 나가 있을 테니 얘기 나눠요.”한민혁이 나가고 나자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한참 동안 이어지는 침묵 끝에, 화영은 권하윤의 경계를 눈치챘는지 먼저 입을 열었다.“민 사장님이 보내서 온 거예요.”민도준의 이름을 듣자 권하윤은 다른 건 생각할 겨를이 없이 바로 캐물었다.“도준 씨는 어때요? 지금 위험한가요? 무사…… 한가요?”마지막 몇 글자를 내뱉는 순간 권하윤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그때 화영의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걱정할 거 없어요. 고비는 넘겨 이미 깨어났으니.”화영은 그날의 상황을 대충 설명했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라지만 권하윤은 위험한 당시 상황을 직접 귀로 듣고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민도준이 몇 초만 늦게 눈치챘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한참 동안 마음을 가라앉힌 권하윤은 눈물을 쓱쓱 닦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알려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오늘 저 찾아온 건 이 얘기 하러 온 거 아니죠?”“네.”화영은 권하윤을 빤히 바라봤다.“하윤 씨, 혹시 경성 떠나고 싶어요?”“경성을 떠나고 싶냐
엘리베이터에 오른 권하윤은 이따금 자신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가 머리를 매만지기를 반복했다.솔직히 이런 동작으로나마 긴장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민도준이 있는 층에 도착한 순간, 권하윤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었다.심지어 화영이 두 번 정도 부르고 나서야 권하윤은 정신을 차렸다.“제가 먼저 들어가 민 사장님께 말씀드릴 건데, 혹시 전해줬으면 하는 말이 있나요?”이 말로 민도준이 만나줄지 만나주지 않을지 결론 날 수 있기에 권하윤은 뭐라도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은 입 속에서 맴돌 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이윽고 잔뜩 흥분한 얼굴이 점점 진정을 되찾으며 고개를 저었다.그 때문에 화영이 대신 전하게 될 말은 그저 침묵뿐이었다.복도에 선 권하윤은 화영이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난 방문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문짝은 매우 얇아 보였지만 하필이면 권하윤의 시선을 완벽하게 차단했다.그렇게 복도에서 기다리는 동안 권하윤은 문이 열릴까 봐 긴장되는 한편 이대로 열리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몇 세기가 흐른 것 같은 몇 분의 기다림 속에서 권하윤의 심장은 점점 타들어 갔다.그러다가 결국 복도에서 맴도는 무거운 공기에 짓눌려 이대로 죽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던 그때, 화영이 끝내 밖으로 걸어 나왔다.하지만 권하윤의 긴장 가득한 눈을 보자 화영은 끝내 고개를 저었다.마지막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 애써 곧게 펴고 있던 등줄기에 힘이 쭉 빠지면서 권하윤은 벽을 짚었다.“하윤 씨, 괜찮아요?”권하윤은 애써 미소를 지어냈다.“괜찮아요. 애써 줘서 고마워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화영의 눈에서 약간의 안타까움이 흘러나왔다.“민 사장님은 원체 변덕스러우니 며칠 후면…….”“아니에요.”권하윤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고개를 들었다.“아까…… 제가 떠나는 걸 도와줄 수 있다고 했죠?”화영은 권하윤의 태도 변화에 놀란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러면 오늘 밤은 괜찮나요?”-“갔
한편, 권하윤은 화영이 준비해 준 차를 타고 다시 블랙썬으로 돌아갔다.다행히 블랙썬을 떠난 시간이 길지 않았기에 이남기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하지만 방금 전 그런 일을 겪고 난 뒤라 그런지 권하윤은 더 이상 블랙썬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심지어 리조트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 민도준의 별장으로 향했다.이번에 권하윤은 예전에 정원을 가꾸던 도구를 꺼내 들고 삐죽삐죽 자라난 나뭇가지를 치기 시작했다.그렇게 이것저것 일을 찾아 하면서 한편으로 성은우가 오기를 기다렸다.이왕 떠나기로 했으니, 이번에는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고 싶지 않았다.해가 천천히 질 때쯤 권하윤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하지만 그제야 자기가 오전에 보낸 문자를 성은우가 아직 읽지도 않았다는 걸 발견했다.눈살이 저도 몰래 구겨지며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하지만 핸드폰을 쥔 채로 멍을 때리고 있던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이남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권하윤 씨,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알겠어요.”문을 닫기 전 권하윤은 문 앞에 서서 아무도 없는 정원을 빤히 바라봤다.지난날의 기억이 한 장면씩 눈앞을 스쳐지났지만 점점 퍼지는 저녁노을과 함께 사라졌다.‘됐어. 이 모든 건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어.’솔직히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것도 어찌보면 나쁘지는 않았다.끝내 눈을 천천히 감으며 권하윤은 모든 기억을 고이 접어 묻어버렸다.중도에 이남기는 공태준을 데리러 갔다.하지만 차 문이 옆에서 여닫히는데도 권하윤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공태준도 습관이 되었는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파티에 준비된 음식이 하윤 씨 입맛에 안 맞을 수도 있어 셰프한테 야식을 준비해 두라고 미리 일러뒀으니 나중에 가져다줄게요.”이따가 권하윤은 공태준을 따라가지 않을 거기에 당연히 그 야식은 먹을 수 없었다.하지만 의심을 피하고자 권하윤은 건성으로 대답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홍
조 사장이 일부러 자기를 난처하게 하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오늘의 목적은 떠나는 것이기에 권하윤은 결국 참기로 결심했다.하지만 손을 뻗어 술잔을 잡으려 하는 순간, 공태준의 퉁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윤 씨는 오늘 불편해서 술 마실 수가 없어요.”“쾅.”조 사장이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대리석 테이블 위에 탕 내리쳤다.“축하해 주러 왔다면서 술도 안 마시려 한다니 너무 제 체면을 안 세워주는 거 아닙니까?”트집을 잡고 있는 조 사장의 말투에도 공태준의 표정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당연히 아니죠. 하지만 저희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말을 마친 뒤 공태준은 고개를 돌려 등 뒤에 서 있는 이남기를 바라봤다.그러자 이남기가 이내 서류 봉투를 가져왔다.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서류를 받아 열어보던 조사장의 눈은 순간 휘둥레졌다.‘뭔데 저러지?’안에 든 물건이 뭔지 알 수 없기에 권하윤은 온갖 생각이 들었다.그러던 그때, 조 사장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얼굴 근육이 경련하면서 옆에 있던 화영을 홱 노려봤다.“화영! 잠깐 나와 봐!”두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자 권하윤은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저 안에 든 게 뭐예요?”아직 꺼지지 않은 노래방 기계에서 요란한게 울리는 노랫소리에 공태준은 고개를 돌리더니 권하윤 곁으로 한껏 다가왔다.“화영이 배신한 증거요.”권하윤은 놀란 나머지 고개를 홱 돌렸다. 두 사람의 거리가 이토록 가까워진 건 처음이다.너무 가깝다 못해 공태준의 부드러운 얼굴에 가려져 일렁이고 있는 무언가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순간, 화영이 자기를 도와 여기를 떠나려 한다는 걸 알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권하윤은 그 생각을 곧바로 부인했다.화영이 권하윤을 도와 떠나려 한 건 오늘 일인데, 이 증거들을 모은 건 하루 사이에 할 수 있는 게 아닐 테니까.‘그렇다면 화영 씨가 도준 씨 사람이라는 걸 안다는 뜻인데.’그러면 지금 공태준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단 하나일 거다. 그건 바로…….
화영은 손을 들어 반쪽 얼굴을 가리고 있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더니 지금껏 숨겨왔던 원망의 눈빛을 드러냈다.“이유를 알고 싶어? 혹시 그 사람 기억해?”화영이 뱉어낸 낯선 이름에 조 사장은 어안이 벙벙했다. 더욱이 자기가 그 남자를 얼마나 잔인하게 죽였었던지도 기억해 내지 못했다.조 사장의 그런 반응에 화영은 울화가 치밀었다.한 글자 한 글자 뱉어내는 말은 마치 목구멍을 찢고 나온 것처럼 피빛이 서려 있었다.“경찰이었어. 당신이 그 사람 앞에서 그 사람의 가족을 죽이고 나이 어린 여동생까지 놓아주지 않았잖아. 칼로 그 사람을 찌르고 개 우리에 던져 뜬눈으로 자기 살점이 뜯겨나가는 걸 지켜보게 했잖아.”조 사장은 애써 옛 기억을 더듬다가 막연한 장면을 점차 떠올렸다.그건 이미 몇 년도 더 된 일이다. 그때의 조 사장은 경성 전체를 휘어잡고 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웬 놈이 조직에 숨어들어 증거를 수집하다가 마침 기분이 언짢았던 조 사장에게 발각됐고, 조 사장은 그 사람으로 화풀이했었다.조 사장이 점차 기억을 떠올린 듯하자 화영은 한 글자 한 글자 어렵사리 토해냈다.“그 사람이 내 약혼남이었어.”그날, 화영은 뜬 눈으로 그 잔인한 장면을 모두 지켜봤다.자기를 위해 각종 쿠키를 만들어 주시던 어머님의 손가락이 하나둘 부러지는 모습.자기를 보면 항상 자애로운 미소로 반겨주던 아버지의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가는 모습.심지어 앳된 목소리로 언제면 자기 오빠한테 시집오냐며 쫑알거리던 여동생마저 점차 화영 앞에서 생기를 잃어갔다.그리고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 화영에게 남겨준 건 오직 피범벅이 된 옷감 몇 조각뿐이었다.분명 전날까지만 해도 자기가 일등공을 세우면 알사탕만 한 다이아 반지를 사주겠다고 하던 사람이었는데.훈장은 남겼지만 사람은 사라졌다.몇 번의 자살 시도를 해봤지만 동료들이 번번이 구해줘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그리고 그날, 화영은 다시 태어났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 가족을 죽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