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은 싸늘하게 웃었다.“차라리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설마 나한테 잠자리 요구하는 거야?”“절대 하윤 씨 모욕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공태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해명했다.“단지 나 배척하는 게 싫었을 뿐이지. 하윤 씨가 원하지 않는 신체 접촉은 하지 않을 거예요.”이토록 신사적인 모습에 권하윤은 오히려 솜을 주먹으로 때린 것처럼 힘이 쭉 빠졌다.분출하지 못한 분노를 마음속에 쌓아둔 채 권하윤은 입꼬리를 올렸다.“공 가주님의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네요. 하지만 그쪽이랑 있다간 내가 토할 것 같아서.”권하윤은 공태준이 당연히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공태준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 생각 바뀌면 말해줘요. 이 제안은 계속 유효하니까.”그런 침착한 태도에 권하윤은 짜증이 극에 달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섰다.그 길로 곧장 클럽을 나서자 이남기가 어느새 앞에 나타났다.“권하윤 씨, 어디로 모실까요?”높고 푸른 하늘과 넓은 땅을 보고 있음에도 권하윤은 왠지 모르게 숨이 막혔다.이에 몇 번 숨을 몰아쉬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블랙썬으로 가줘요.”권하윤이 블랙썬 문 앞에서 내렸을 때 주위의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그 이유는 한민혁이 문 앞에서 몇몇 사람들과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당신들이 뭔데 이래? 여기 도준 형 구역이야. 들어가려거든 지옥에 가서 도준 형 의견 물어보고 와!”“한민혁 씨,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면 안 되죠. 민 사장은 민씨 가문 사람인데 이제 본인이 없으니 그분 재산은 당연히 가족에게 맡겨야죠. 이건 한민혁 씨가 동의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가족은 개뿔! 주인이 없으니 그 틈에 도둑질하려는 쥐새끼들이면서! 난 있는 거라곤 이 목숨밖에 없으니까 들어가겠으면 좋아, 오늘 아주 끝장을 내자고!”고용되어 온 변호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그 누구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변호사들도 모두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인지라 당연히
민도준이 사고가 난 뒤로 문을 닫은 블랙썬의 복도는 조용하다 못해 한산하기까지 했다.하지만 한참을 걸었더니 시선 끝에 웬 사람의 인영이 걸리는 듯했다.“거기 누구죠?”고개를 홱 돌려 뒤를 돌아봤지만 등 뒤는 텅 비어있었다.‘설마, 내가 잘못 봤나?’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선 순간, 분명 방안의 모든 배치는 예전과 달리진 게 없었지만 권하윤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한기가 발밑에서부터 퍼지면서 몸이 오싹해졌다.안방의 텅 빈 침대를 보자 권하윤은 귀신에 홀린 듯 다가가 누워 몸을 이불 속에 파묻은 채 방 주인의 숨결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은은하게 느껴지는 담배 냄새는 마치 생명줄처럼 잠시나마 권하윤에게 자그마한 위안이 되어주었다.너무 오래 잠들지 못한 탓인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져 권하윤은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그러다가 눈을 떴을 때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머리가 어지럽고 무거웠지만 정신은 그나마 조금 맑아졌다.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을 때, 권하윤은 머리 아래에 놓인 베개를 보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내가 자기 전 분명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베개를 안고 있었는데? 아무리 숨 막혀 이불 밖을 나왔다고 해도 베개까지 반듯하게 놓을 수 있나?’갑자기 복도에서 봤던 인영이 뇌리를 스쳐 지나자 권하윤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설마 도준 씨인가?’“도준 씨?”권하윤은 허공에 대고 조심스럽게 불러봤다.“도준 씨 안 죽었죠?”하지만 되돌아오는 건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뿐이었다.그럼에도 권하윤은 포기하지 않은 채 안방에서 거실까지 마구 달려 나왔다.“도준 씨? 거기 있어요?”“도준 씨처럼 대단한 사람이 그렇게 갈 리 없잖아요.”“지금 나 놀리는 거죠?”“…….”문밖.한민혁과 로건은 안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뱉었다.방해하는 것도 마음 아팠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미치게 둘 수도 없어 할 수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권하윤 씨…….”“한민혁 씨.”권하윤은 다급한 목소리
이남기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습을 보자 권하윤은 이내 의심을 접었다. 킬러인 이남기보다 감각이 뛰어날 리는 없을 테니까.하지만 누군가 따라오는 듯한 느낌만은 확실했다.‘설마 한민혁 씨 말대로 헛것이라도 보나?’그러한 생각은 권하윤을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에 하는 수 없이 그저 괜찮다는 대답만 얼버무린 채 안으로 들어갔다.침실에서 몇 시간 동안 멍하니 앉아 있은 권하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하지만 갓 두 걸음 정도 떼었을 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메이드가 갑자기 권하윤 앞에 나타났다.“권하윤 씨, 무슨 시키실 일이라도 있습니까?”“공태준은 어디 있죠?”“가주님은 무슨 일로 찾으십니까? 이 시간에 가주님은 이미 주무셨을 겁니다.”“할 말 있으니 불러와 줘요.”메이드는 바로 거절하려다가 가주의 지시가 생각났는지 얼른 허리를 굽혔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얼마 지나지 않아 공태준이 방으로 들어왔다.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켰지만 공태준은 여전히 반듯한 옷차림이었다.유독 머리 스타일만 평소와 다르게 조금 흐트러진 모습이었고 앞머리가 이마를 덮었다. 보아하니 메이드의 말대로 이미 씻고 잠자리에 들었던 모양이었다.남자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했지만 말투는 여전히 온화했다.“나는 무슨 일로 보자고 했어요?”“민씨 집안 식구들이 오늘 블랙썬으로 변호사를 보냈던데, 그 사람들이 도준 씨 재산에 손대는 거 막을 방법 있어?”공태준은 미간을 주물렀다.“민 사장은 상속인을 정하지 않았으니 재산은 가족들이 처리하는 게 맞아요. 물론 예외는 있지만…….”“그 예외란 게 뭔데?”“민 사장이 안 죽었다면 얘기는 달라지죠.”‘이건 뭐 하나마나 한 얘기 아닌가?’공태준도 권하윤의 표정에서 짜증을 읽어냈는지 말을 보탰다.“그 폭발 사고로 남은 증거가 모두 사라지고 심지어 사망자 신원까지 확인이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때문에 그 시체가 민도준이 아니라고 잡아떼면 사망통지서를 발부받기 어려울 거고 당연히 재산분할도 할 수 없겠죠.”권하윤은 그럴싸한
“민 사장이 안 죽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누르려면 민상철 어르신부터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해요.”공태준의 말에 권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할아버님이 동의할까요?”“현재 민씨 가문이 동요하고 있는 데다 회사 내부에서도 싸움이 일어나고 있고 민 사장의 산업까지 더해지면 정말 내란이 일어날 게 뻔하거든요.”만약 잘나갈 때의 민상철이라면 이 정도쯤은 아마 신경도 쓰지 않았을 거다.하지만 현재는 건강 상태도 안 좋아 겨우 버티고 있기에 다른 사람을 누를 힘이 없다.그런데 그중 한 가지 문제라도 해결이 된다면?민성철은 그 틈에 회사에 신경 쓸 여력이 있을 거다.생각을 마친 권하윤은 고개를 홱 돌려 공태준을 바라봤다.“나랑 같이 밖에 나오자고 한 게 여기 오려고 그런 거였다고?”“그럼요. 하윤 씨가 민 사장과 민 사장 쪽 사람들 걱정하는 거 알아요. 이렇게 데리고 나와 직접 보면 안심이 될 거잖아요.”하긴, 공태준이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어도 권하윤은 완전히 안심하지 못했었다.그런데 공태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눈앞에서 보면 확실히 안심할 수 있었다.권하윤이 차에 오를 때처럼 혐오감 가득한 눈빛으로 자기를 보지 않는다는 걸 발견하자 공태준의 목소리는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직접 나서는 게 어려우면 여기에서 소식 기다려요.”권하윤에게 일부러 공간을 내주려는 건지 아니면 떠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는지 공태준이 차에서 내릴 때 이남기도 함께 뒤따랐다.그제야 권하윤의 팽팽하던 긴장감도 어느새 느슨해졌다.그렇게 한참 동안 차에 앉아 있던 권하윤은 갑갑했는지 끝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차 문과 저택 대문 사이에 거리가 꽤 있다 보니 권하윤은 멀리에서 멍하니 한곳을 응시했다. 하지만 문을 보면 볼수록 민도준과 있었던 일들이 자꾸만 눈앞에 떠올랐다.심지어 누군가 자기를 몰래 지켜보고 있다는 걸 발견하지도 못했다.그 시각, 민씨 저택으로 들어가려던 민승현은 공태준과 권하윤이 잇따라 같은 차에서 내리는 걸 보자 눈에 불이 활활 타올랐다.솔직히
민승현은 여전히 화가 뻗쳤는지 고개를 돌리며 욕설을 퍼부어 댔다.“누구야? 당신 내가 누군지 알고…… 아!”뒤통수에 가한 일격에 외마디 비명이 들려오더니 민승현은 머리를 감싸며 그대로 기절했다.하지만 권하윤은 부축받으며 일어나는 순간까지 여전히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모습이었다.‘내가 꿈을 꾸고 있나? 아니면 이제는 미쳐버려서 환각이 보이나?’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하지만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권하윤의 이름을 불렀다.“윤아, 괜찮아?”권하윤은 눈앞의 남자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하지만 진실한 촉감과 귓가에 맴도는 익숙한 목소리는 모두 눈앞의 사람이 진짜라는 걸 말해줬다.입술을 파르르 떨며 겨우겨우 뱉어낸 목소리마저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은우? 너야? 너 살아 있었어?”성은우는 복잡한 눈빛으로 권하윤을 바라봤다.“응.”현기증이 엄습하더니 날카로운 통증이 관자놀이를 뚫어버릴 것처럼 밀려와 권하윤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성은우의 팔을 필사적으로 잡았다.“네가 살아있으면 나는, 도준 씨는…….”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텅 빈 눈을 한 권하윤을 보자 성은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윽고 권하윤을 부축해 창고 안의 나무 상자 위에 앉혔다.“윤아, 심호흡하고 진정해.”권하윤은 이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급기야 무한한 공포가 휘물아쳤다.‘은우가 안 죽었어. 안 죽었어. 그렇다면 난 뭘 한 거지?’앉아 있는 것조차 힘이 빠져 몸이 아래로 흘러내렸고 코가 막힌 것처럼 숨쉬기가 어려웠다.성은우가 등을 토닥인 지 한참이 지나서야 권하윤은 겨우 기침 소리를 냈다.그렇게 어렵사리 자기 목소리를 되찾고 나서야 권하윤은 성은우의 팔을 잡으며 갈라 터진 목소리를 냈다.“어떻게 된 거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성은우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은 모든 사실을 알려주었다.“사실 그날 민 사장과 내기를 했어. 네가 내 복수를 하기 위해 민 사장을 죽일지.”“…….”그날 민도준은 확실히 성은우를 죽일 마음이 있었다.하
권하윤은 몸을 한껏 웅크린 채 한참을 흐느꼈다.“은우야, 도준 씨가, 도준 씨가…….”“나는 네가 죽은 줄 알고, 시체까지 훼손된 줄 알고 약을 탄 거였어.”“나 이제 어떡해? 은우야…… 나 이제 어떡해…….”혼이 나간 사람처럼 같은 말을 자꾸만 반복하는 권하윤의 모습에 성은우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위로했다.“윤아, 너도 몰랐잖아. 민 사장이 일부러 너 속인 거였는데 너라고 어떻게 알았겠어? 그 모자도 만약 민도준이 모른 체 하지 않았더라면 남기 손에 들어갈 리 없어.”하지만 권하윤은 이제 더 이상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처럼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다.“다 내 잘못이야. 은우야, 도준 씨가 죽는 순간까지 나 미워한 건 아니겠지?”만약 민도준이 아직 살아있다면 권하윤은 그나마 그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를 생각했을 거다.하지만 민도준이 없는 지금, 권하윤에게 남은 건 오직 미안함과 오랫동안 억누르고 외면했던 감정뿐이었다.가슴이 미어질 듯 울고 자기를 탓하는 권하윤을 보자 성은우의 냉철하기만 하던 눈매에 슬픔과 걱정이 드러났다.이것 또한 성은우가 지금껏 나타나지 않고 묵묵히 뒤에서 권하윤을 지켜보기만 했던 이유다.그가 안 죽은 걸 권하윤이 알게 되면 분명 자기를 탓할 테니까.오늘도 상황이 긴급하지만 않으면 성은우는 나타나지 않았을 거다.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성은우는 그저 말없이 권하윤의 등을 토닥이며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러던 그때, 권하윤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면서 다급히 성은우를 불렀다.“은우야. 네가 안 죽었다면 도준 씨도 안 죽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성은우를 보는 권하윤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물거품 같은 희망이 살짝 드러났다.그러한 상황에서 부정하면 권하윤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아 성은우는 입을 뻐금거리다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럴지도 모르지.”역시나, 그 말에 희망이 다시 살아났는지 권하윤은 기뻐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맞아. 도준 씨도 살아 있을 수
권하윤은 손에는 공태준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임시로 잡아든 몽둥이가 아직도 쥐여 있었다.바닥에 개처럼 쓰러져 있는 민승현을 보고 있자니 그가 어떻게 조 사장과 짜고 모략을 꾸몄을지 눈앞에 선했다.갑자기 들끓는 분노에 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몽둥이를 꽉 쥔 권하윤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한 채 분노를 분출하듯 세게 아래로 내리쳤다.그 모습을 공태준은 묵묵히 지켜봤다.그러던 그때, 갑자기 전해진 고통에 민승현은 깼는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권하윤을 보자마자 불같이 화를 냈다.“젠장…… 아!”머리에 일격을 가하자 가뜩이나 깨질 듯 아프던 머리에 고통이 더해졌는지 민승현은 귀신이라도 부르는 것처럼 꽥꽥 소리 질렀다.심지어 시선 끝에 희미하게 걸리는 공태준을 발견하고는 분노가 더해졌는지 욕설을 퍼붓기까지 했다.“젠장! 네가 감히 나를 때려? 아!”“공태준! 권하윤은 민도준이 놀다 버린 년이야! 다른 사람이 비웃을까…… 아…… 겁나지도 않아?”“남이 놀다 버린 걸 주어가다니…… 아! 그만 때려…… 아!”비명과 섞인 욕지거리가 이따금 들려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사라졌다.심지어 상대가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데 권하윤이 여전히 힘을 줄이지 않고 내리치자 공태준은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계속 때리면 죽어요.”권하윤은 그 소리도 전혀 듣지 못한 듯 기계적으로 울분을 토해냈다.이에 공태준은 힘껏 내리치는 권하윤의 손목을 잡으며 낮게 타일렀다.“민승현이 죽는 건 저도 상관 안 해요. 하지만 이 자식이 오늘 하윤 씨를 데리고 갔는데 이때 죽게 되면 처리하기 곤란해요. 하윤 씨가 원한다면 내가 나중에 처리해 줄게요.”손바닥의 차가운 온도가 옷소매를 뚫고 손목에 전해지자 권하윤은 본능적으로 손을 뿌리쳤다.그와 동시에 피가 묻은 몽둥이도 바닥에 그대로 떨어지고 말았다.그제야 권하윤은 비틀거리며 창고를 나섰다.때마침 중앙에 걸려있는 태양은 뜨겁다 못해 독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쨍쨍 내리쬐는 햇볕에 갑자기 눈앞이 번쩍 빛나
민도준의 이름을 듣자 한민혁의 표정은 잠시 침울해졌지만 이내 억지 미소를 지었다.“에이, 도준 형 소식이랄 게 있나요? 뭐, 도준 형이 제 꿈에 나와 말이라도 전하면 제가 맨 먼저 하윤 씨한테 알려줄게요.”권하윤은 그 말에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솔직히 본인도 자기의 행동들이 우습게 느껴졌다.하지만 이렇게 헛된 희망이라도 붙잡고 있지 않으면 정말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한민혁의 얼굴에 드리운 걱정이 눈에 보였는지 권하윤은 심호흡을 하더니 정상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오늘 저 불러낸 거 보면 무슨 일 있어요?”“네.”한민혁은 잠깐 고민하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사실 경찰서에서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어 먼저 입건해 범인부터 조사하고 나중에 도준 형인 게 밝혀지면 사망 통지서를 발부하기로 했어요. 그 덕에 민씨 가문 식구들도 당분간은 얌전해질 거예요.”‘이 일이었구나.’“네.”기대로 부풀었던 가슴은 실망감에 김빠지듯 낮은 소리를 내뱉었다.그때, 한민혁이 권하윤의 안색을 한참 동안 살피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이번 일은 궁 가주가 나섰다던데, 혹시 하윤 씨와 관련 있어요?”“제가 도움 요청했어요.”권하윤의 덤덤한 대답에 한민혁의 표정은 살짝 어두워지더니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뻐금거리다 다시 다물기를 반복했다.그러다 끝내 참지 못했는지 입을 열었다.“저기, 권하윤 씨가 도준 형을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공 가주랑은 어…….”“저도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어요.”권하윤은 흐릿한 시선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전 그저 이곳을 지켜주고 싶었을 뿐이에요.”권하윤이 고집을 부리자 한민혁도 더 이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심지어 권하윤이 떠난 지 한참이 지나서까지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그렇다고 “여기를 지키기보다는 도준 형을 위해 정조를 지켜주세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골치 아픈 나머지 뒤통수를 긁적이고 있던 그때, 갑자기 울린 전화에 문자를 확인한 한민혁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로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