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자 권하윤은 할 수 없이 한껏 누그러든 태도로 애원했다.“권효은도 이젠 저 믿고 있어요. 이제 곧 증거도 수집할 수 있으니까 저한테 시간 조금만 더 주시면 안 돼요? 네?”“좋아. 경성에서 해원까지 이틀 정도 걸리는데 그 시간을 잘 이용해 봐.”점점 기어오르는 권하윤은 한 방 먹이고 난 민도준은 그제야 흥미로운 듯 실험실에 있는 직원들에게 눈길을 주었다.“내 통화 다들 잘 엿들었나? 이제 내가 당신들 의견 들어볼 차례지?”그는 분명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장난기 섞인 말을 내뱉었지만 직원들은 저마다 눈치를 살폈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이에 민도준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전에 제품 품목 책임진 사람이 누구지?”“저요.”물은 지 한참이 지나서야 제품 매니저가 쭈뼛쭈뼛 손을 들었다.“전에 여기에서 가장 돈 되는 제품이 뭐였지?”“제품의 좋고 나쁨은 다방면으로 판단해야지 하고 수입도 단기 수익인지 장기 수익인지 브랜드 수익인지 고려해야 합니다. 시장에 유입된 뒤의 데이터도 비교해야 최종 결론을 얻을 수 있기에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이미 따로 명령을 받은 제품 매니저는 민도준이 아직 과학기술 단지에 대해 익숙하지 않다는 것만 믿고 말을 빙빙 에둘렀다.하지만 민도준이 볼 때 그 말들은 그저 하등 쓸모없는 헛소리뿐이었다. 이에 그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렇게 복잡하면 계산하지 마.”대화가 너무 잘 통하자 제품 매니저는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그가 고맙다는 인사를 내뱉기도 전에 민도준이 턱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집에 가서 당신 아들 수학 숙제나 봐줘.”“민 사장님, 그게 무슨…….”“무슨 뜻이냐고? 짐 싸서 꺼지라고.”제품 매니저는 민도준이 낙하산으로 회사에 출근한 첫날부터 자기와 같은 고참 직원을 해고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터라 다른 매니저들에게 눈빛을 보냈다.아니나 다를까 이미 사적으로 얘기가 오간 다른 매니저들은 그 말을
한편, 전화를 끊은 권하윤은 마음이 조급해 났다.남은 이틀 동안 어떻게 해서든 증거를 잡아내야 하니 급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 기회는 생각한 것보다 빨리 찾아왔다.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다시 교장실로 돌아와 문 앞에서 노크를 했지만 안쪽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문손잡이를 돌려봤더니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도 보이지 않자 궘하윤은 얼른 사무실로 들어갔다. 테이블 위에 반쯤 먹다 남은 물이 있는 걸 보니 권효은은 급한 일정으로 나간 게 틀림없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먼저 서랍을 당겨 봤지만 모두 잠겨 있다는 걸 발견하자 그녀는 이내 목표를 책장으로 옮겼다.그중 한 책장에는 학생들의 생활 기록부가 떡하니 놓여있었다. 물론 그렇게 중요한 단서는 되지 않겠지만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권하윤은 기록부를 꺼내 확인했다.역시나 그녀의 생각대로 기본 정보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하지만 그 위에 적힌 내용은 일반 기록부보다는 훨씬 디테일 했으며 신체에 관한 일부 데이트도 포함되어 있었다.그러던 그때, 권하윤이 사진 몇 장 찍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순간, 책꽂이 모퉁이에 삐죽 튀어나온 도표가 눈에 띄었다.성적표인 줄 알았던 종이는 다름 아닌 계약서였다.위에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어떤 보조금을 수령했는지 명확히 표기되어 있으며 만약 중도 퇴학하면 수령했던 보조금의 열 배를 반환해야 한다는 조건이 명시되어 있었다.그 내용을 본 권하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어쩐지 학생들이 퇴학을 안 한다 했더니 이런 족쇄를 채워놓고 있었던 거였어?’사진 몇 장을 찍어 증거로 남겨놓은 뒤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그녀는 다른 계약서들도 사진으로 남겨놓았다.그렇게 한참 동안 증거 수집에 열중해 있을 때, 갑자기 멀리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교장실로 오고 있었다.텅 빈 복도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오는 하이힐 소리에 권하윤은 등골이 오싹했다.얼른 모든 서류를 원래의 위치에 돌려놓은 뒤 책장 문을 닫았지만 밖으로 나가기에
그 뒤로 권하윤은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찜질방처럼 후덥지근한 옷장에서 언제 들킬지 오를 위기감에 마음을 졸이고 있자니 미칠 것만 같았다.심지어 숨 쉴 때마다 안에 습기가 차올랐다.그사이, 권하윤은 권효은이 자기를 찾을까 봐 민도준이 찾아 먼저 간다는 문자를 보냈다.그 메시지에 권효은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알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어느덧 반 시간이 흘렀지만 권효은은 여전히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노트북을 닫아버리고 자꾸만 시계를 쳐다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권하윤은 아무 소리 없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솔직히 도망치고 싶지만 권효은이 누구를 만나는지는 확인해 보고 싶었다.그렇게 약 십여분이 흐르자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어지러운 발소리에서 들어온 사람이 한 명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권하윤의 각도에서 볼 때 그들은 모두 다른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유일한 공통점은 옷의 원단이 모두 고급스러워 절대 보통 사람이 아닐 거라는 거였다.사람이 많아짐에 따라 공기가 점차 희박해지며 권하윤의 생존 공간도 위협을 받는 느낌이었다.하지만 그녀가 숨을 죽이고 그들에게 발각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찰칵”하는 문소리가 들렸다.좁은 문틈으로 확인해 보니 사람들이 열린 문을 통해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곧이어 또다시 문소리가 들리더니 방안은 이내 조용해졌다.권하윤은 섣불리 나가지 않고 문을 조금 더 열어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옷장에서 걸어나왔다.너무나도 오래 웅크리고 앉아있은 탓에 두 발은 수많은 벌레가 기어오르는 듯 따끔거리고 저릿해 났다. 하지만 그런 걸 상관할 겨를이 없이 권하윤은 사람들이 사라진 방향을 확인했다.그 위치는 다름 아닌 벽이었는데 위에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다.짙은 물감이 자유자재로 섞여 어찌 보면 예술성이 농후한 작품 같아 보이지만 권하윤은 보면 볼수록 눈앞이 아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 그림 뒤에 아까 봤던 통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도 지금 그곳을 함부로
“사실 오늘 교장 선생님이 제 동생을 데려갔거든요. 그래서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싶어서 그랬어요.”어렵사리 운을 뗀 임주빈은 마치 봇물 터지듯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하나둘 말하기 시작했다.3년 전, 그녀는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여고에 들어왔다.물론 학교생활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가족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그녀는 매번 엄청 잘 지낸다는 말로 가족을 속였다.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건, 가족이 그녀 몰래 동생까지 이 학교로 보내온 거였다.신입생 모임에서 동생을 보는 순간 임주빈은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는 게 무엇인지 톡톡히 경험했다.그녀는 동생을 설득하려고 노력했지만 단순하기만 한 동생은 이곳이 천당이라고 여기며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동생을 돌려보내기 위해 그녀는 남몰래 교장실 열쇠를 하나 맞춘 거다.솔직히 경솔하게 행동할 생각은 없었지만 모임에서 돌아와 동생이 사라졌다는 걸 확인하자 그녀는 단서를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교장실로 몰래 들어간 거였다.이 모든 걸 들은 권하윤은 순간 의문이 생겼다.“저희 언니가 이 시간에 교장실에 없는 건 어떻게 알았죠?”그 말에 임주빈은 싸늘한 미소를 짓더니 화를 참으며 말을 뱉어냈다.“이 시간만 되면 교장 선생님은 그 사람들을 데리고 쥐구멍에 숨어들어 더러운 유희를 즐기거든요.”쥐구멍은 바로 아까 봤던 그 통로를 의미했다.임주빈의 말을 들어보니 권하윤이 방금 봤던 사람들은 모두 학교의 “이사진”들인데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만 되면 이곳에 “회의”하러 온다고 한다.그리고 아까의 그 그림 뒤에 바로 그들의 개인 클럽이고.그렇다면 오늘이 수요일이니 이틀 뒤인 금요일에 그들은 또 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한참 생각에 빠져있는 그때, 임주빈이 갑자기 테이블 위에 놓인 권하윤의 손을 덥석 잡았다.“저를 고발해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제 동생이 어디로 갔는지만 알려세요. 네?”자기와 겹쳐 보이는 임주빈의 모습에 권하윤은 그녀의 손을 톡톡 두드리며 위로했다.“걱정
지금까지 권씨 가문은 사람들 몰래 해서는 안 될 짓을 수도없이 해온 게 틀림없다. 더욱이 그런 일을 많이 했으니 겁이 났을테고 조 사장과 모종의 거래를 해 뒤처리를 부탁했을 거다.그리고 보름 전이라면 마침 권희연이 권미란에게 떠밀려 조 사장을 접대한 그때와 일치하다.‘어쩐지 조 사장과 급하게 관계 회복을 했다 했더니 그런 일이 있었던 거였네.’자료를 많이 모을수록 권하윤은 어깨가 점점 무거워졌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문제도 따랐다.권씨 가문의 일이 터진다면 그녀가 했던 일은 언젠가 권미란의 귀에 들어갈 테고, 그러면 그녀 손에 잡혀 있는 가족들이 위험할 수 있다.그 생각이 드는 순간 권하윤은 갑자기 대담한 계획을 떠올렸다. 경성이 복잡한 틈을 타 해외에 오빠를 찾으러 가려는 계획.권씨 가문 사람들이 사건을 수습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면 그녀를 주시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니 먼저 해외로 가서 다음 계획을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더욱이 이틀 뒤 민도준의 약혼식 전까지 떠나지 않으면 공태준과 마주칠 수 있으니 말이다.‘공태준이 내 정체를 까발리기라도 하면 나 절대 도망치지 못해.’이런 생각이 들기 바쁘게 그녀는 최수인에게 전화했다.“이게 누구에요? 우리 예쁜 윤이 씨가 웬일로 전화를 다 주고? 민도준 걔가 약혼한다니까 이제 겨우 제 차례가 온 거예요?”“저 편하게 지내고 싶거든요.”“도준이 곁을 떠나 나한테 오는 게 얼마나 좋아요.”권하윤은 그와 쓸데없는 얘기를 할 겨를이 없는지라 얼른 진지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저기, 최수인 씨가 인맥 하나는 넓잖아요. 혹시 흔적을 남기지 않고 해외로 나가는 방법 알아요?”“당연히 알죠.”최수인은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재밌다는 듯 되물었다.“혹시 도망치려는 거예요?”“뭐…… 비슷해요.”그 대답에 최수인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그렇다면 당연히 도와야죠. 도준이 걔가 윤이 씨가 도망친 걸 알게 된다면, 하하하…… 그 표정 너무 보고 싶네요.”“제가 만
권하윤이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권희연이 갑자기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하윤아, 아무리 그래도 너는 민씨 집안 며느리이니 앞에 나서는 건 내가 할게.”권하윤은 그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그게 무슨 뜻이야? 언니가 나서겠다니?”“이런 일들은 집안 식구 중 누군가가 직접 나서서 말해야 더 설득력이 있어.”그제야 권희연이 뭘 하려는 지 눈치챈 권하윤은 몇 초간 멍해 있더니 믿기지 않는 듯 입을 열었다.“언니 설마 직접 나서서 권씨 가문을 고발하겠다는 뜻이야?”“응.”권희연의 표정은 여전히 물처럼 부드러웠지만 눈빛만큼은 이미 수많은 고난을 겪고 난 것처럼 태연했다.“이로써 작별 인사 하는 셈 치려고. 권씨 가문과 어…… 권 사모님한테…….”어머니라는 세 글자를 삼키는 순간 권희연의 눈시울은 붉게 물들었다.지난 20년 동안 어머니의 인정을 얻으려고 해왔던 희생들이 너무 우스워졌고 허무했다.끝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자 권하윤은 이내 휴지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휴지를 꺼내려는 순간 커다란 손이 티슈를 케이스째로 가져가더니 두 장을 뽑아내 권희연의 손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희연 씨, 눈물 떨어져요.”방금 전까지만 해도 감동에 젖어 있던 권하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권희연은 오히려 그의 행동에 일부러 삐진 듯 투덜댔다.“왜요? 제 눈물 때문에 이불이 더러워질까 봐 그래요?”로건은 그의 말에 놀랐는지 몸을 곧게 세우며 강력하게 부인했다.“아니요. 저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저는…….”하지만 말로 설명을 할 수 없자 이내 그녀의 울음을 부추겼다.“희연 씨 마음껏 우세요! 속 시원할 때까지 울어도 돼요!”권희연은 그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휴지를 받아 눈가를 닦았다.“저 안 울 거예요. 제가 왜 울어요?”살짝 애교 섞인 그녀의 목소리에 권하윤은 의외라는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병실을 떠나면서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봤다.머리를 긁적이며 바보처럼 헤실 웃는 로건의 옆에 거울을 들고
권하윤은 그의 말에 갑자기 경계했다.‘안 온다고?’솔직히 민도준은 지금껏 오거나 안 온다는 걸 그녀에게 미리 말했던 적이 없다.하지만 마음속으로 다른 일을 꾸미고 있어서 그런지 민도준의 한마디에 그녀는 한참 동안 끙끙댔다.그런데 또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자면 모레 약혼이 있으니 내일 바쁜 건 당연했다.더욱이 그녀가 도망칠 때 민도준이 없다면 오히려 더 편리할 뿐이다.‘하지만…….’권하윤은 고개를 돌려 어둠에 가려진 민도준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봤다.‘만약 내일 안 오면 오늘이 마지막 밤이겠네.’아마 앞으로 두 사람은 다시는 이처럼 같은 침대에 누워있지 못할 거다.그렇게 한참 멍하니 있을 때, 남자의 팔이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꽉 조였다.“잠이 안 와?”곧 헤어질 때가 와서인지 권하윤은 모처럼 순종적으로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긴 머리카락은 그의 어깨를 따라 축 흘러내려 침대 위에 흐트러졌다.“네.”짤막한 대답을 한 뒤 권하윤은 민도준이 또 다른 생각을 할까 봐 얼른 말을 보탰다.“내일 성공하지 못할까 봐 겁나서요.”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윤 씨도 겁날 때가 있어?”“당연한 거 아니에요? 제가 도준 씨처럼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 줄 아세요?”민도준은 그녀의 심술 섞인 한 마디에 피식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꼬집었다.이윽고 그녀가 간지럼을 타며 피하려 할 때 다시 품속으로 끌어들였다.“난 하윤 씨가 겁 없는 줄 알았는데.”“아니거든요.”“아니라고?”“겁 없이 행동하는 건……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예요…….”권하윤은 잠이 밀려왔는지 뒷말을 흐렸다. 오늘 하루 너무 지쳤는지 그녀는 이 말을 끝으로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비몽사몽한 상황에서 그녀의 귓가에는 남자의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운 나머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다음날, 권하윤이 눈을 떠보니 시계는 벌써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놀란 나머지 허둥지둥 준비를 마치고 옷을 입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간 그녀는 곧바로 문을
권씨 저택에서 나온 권하윤은 곧바로 여고를 찾아갔다.그렇지 않아도 요즘 매일 찾아오는지라 그녀를 본 권효은은 놀란 기색이 전혀 없었다.“오늘 신입생 심사를 해야 하는데 내가 좀 바빠서 그러니 오늘은 네가 따라가 봐.”“네, 언니.”그녀가 왜 따라갈 수 없는지 알고 있었기에 권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대화가 끝났는데도 권하윤이 여전히 떠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권효은은 이내 인내심이 바닥난 듯 입을 열었다.“또 무슨 일 있어?”“전에 저와 가족이 재회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한 지 벌써 며칠이 지나서요…….”권효은은 잠시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네 가족을 요양원에서 빼내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이모가 눈치챌까 봐 아무래도 기회를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아.”그녀의 대답에 권하윤은 놀랍지도 않았다. 솔직히 따지고 보면 권효은이나 권미란이나 모두 같은 부류 사람이니까.다른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약점을 쉽게 놓칠 리가 없었다.다행히 권하윤은 그녀에게 의존하려는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기에 그저 일부러 잔뜩 서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낮게 중얼거렸다.“언니 말대로 할게요.”“착하네. 하지만 걱정하지 마, 이미 도와주기로 약속했으니 꼭 도와줄게. 먼저 다른 생각 하지 말고 해야 할 일만 생각해.”“네. 믿을게요. 그런데…… 저 내일 가족 보러 가고 싶은데 언니가 대신 말 좀 잘해줄 수 있어요? 저 정말 가족들 걱정돼요.”이미 한번 거절한 권효은은 작은 요구마저 거절할 수 없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게 뭐 큰일이라고. 내가 요양원 쪽이 미리 말해둘 테니 네 출입을 막지 않을 거야.”심지어 그녀를 회유하기 위해서인지 그녀가 보는 앞에서 전화했다.이에 권하윤은 연신 감사 인사를 하고 나서야 사무실을 떠났다.-어느덧 오후가 되어 몇몇 선생님들과 함께 신입생 심사를 하러 간 권하윤은 그 자리에서 최설아를 만났다. 하지만 어디에도 임주빈은 없었다.이에 남몰래 그녀에게 어디에 있는지 문자를 보냈더니 [쥐구멍]이라는 답변을 받게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