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민도준은 다정한 손길로 권하윤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줬다.“그러면 뭘 하고 싶은데? 둘째 작은 사모님?”“가당치도 않네요. 다섯째 작은 사모님도 할 자격이 없는데 둘째 작은 사모님이라니요.”권하윤은 눈을 내리깔며 허망한 듯 입꼬리를 끄집어 올렸다.그녀의 말에 민도준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그것도 모자라 이제 곧 권씨 가문과 함께 명예가 실추될 텐데. 안 그래? 하, 우리 제수씨 아주 자비가 없어.”웃을 듯 말 듯 한 그의 목소리에 권하윤은 등골이 오싹해 났다.하지만 권씨 가문 얘기는 자세하게 하고 싶지 않아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중요한 건 도준 씨가 고은지 씨랑 약혼한다는 걸 이미 모든 사람이 다 안다는 거죠.”“그렇네. 하마터면 그걸 잊을 뻔했군.”민도준은 권하윤의 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더 이상 고개를 숙이지 못하게 했다.“나 곧 약혼하는데 선물 같은 거 없어?”“…… 뭘 원하는데요?”두 상의 눈이 갑자기 마주쳤다.분명 가까운 거리였지만 권하윤은 상대의 눈에서 그 어떤 정서도 읽어낼 수 없었다.아마도 그 속에 말려들어 빠져나오지 못할까 봐 자세하게 볼 엄두를 내지 못한 걸 수도 있었다.밀려오는 압박감에 권하윤이 점차 무너지려고 할 때, 민도준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물건은 됐고 내 말 잘 들으면 선물 받은 거로 칠게.”갑자기 다정해진 목소리에 권하윤은 일순 말을 잃어 한참을 침묵하다가 겨우 대답했다.“알았어요.”“착하네.”민도준은 마치 고양이의 털을 매만지듯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손가락으로 빗질했다.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머리에 살짝씩 가해지는 힘에 노곤노곤해졌는지 권하윤의 눈꺼풀이 닫히려고 할 때, 민도준이 갑자기 그녀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살거렸다.“내 말 잘 듣겠다고 한 약속 잊지 마?”낮게 깔려 농담인 듯 경고 같은 그의 목소리에 권하윤의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이 쿵쾅거리며 북을 쳤다.이윽고 민도준이 뒤에서 끌어안을 때
목적에 도달한 권하윤은 숨을 죽인 채 권효은이 비밀을 얘기하길 기다렸다.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권효은은 그저 오후에 신입생들의 교외 확장 활동이 있으니 제국 호텔에 오라는 말만 내뱉고 전화를 끊어버렸다.스틱스는 경성 권세가들의 비밀의 섬이라면 제국 호텔은 경성 재벌가들의 화원이나 다름없다.재벌들의 대부분 파티가 그곳에서 열리며 수많은 재벌녀와 연예인을 볼 수 있는 곳.호텔에 도착한 권하윤이 문앞에 차를 대고 한참을 기다리자 승합차 한대가 나타났다.차에서 내린 여자애들은 모두 외모가 출중한 데다 호텔 로비를 걸어 들어갈 때 예의를 갖췄지만 눈에 드리운 흥분은 쉽게 감추지 못했다.하지만 그중 두 여자애는 눈에 띄게 침착해 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권하윤은 이내 그 둘이 학교에 입학한 지 벌써 3년이 되는 애들이라는 걸 알아챘다.이름은 각각 임주빈과 최설아였다.이번 행사도 두 사람이 앞장서서 다른 학생들을 이끌고 있었다.메이크업룸에서 열댓 명이나 되는 여자애들이 능숙하게 화장하고 드레스를 고르는 모습을 본 권하윤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답답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치장을 마친 그녀들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치맛자락을 든 채 숙녀의 걸음걸이로 연회장으로 들어갔다.사실 일전에 권효은은 권하윤에게 전화해 연회장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해두었다.아니나 다를까 권하윤과 여학생들이 연회장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주최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때, 권하윤과 함께 온 여자애들은 파티의 규모에 놀랐는지 낮은 소리로 의논하기 시작했다.“저 여자 그 유명한 배우 리나 아니야?”“와, 진짜네. 실물이 훨씬 낫네.”“야, 저기 봐. 저 사람 어느 유명 플랫폼 창시자 아니야?”“맞아. 대박, 여기에서 실물을 영접하다니.”재잘거리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두 선배의 표정은 그야말로 흥미로웠다.특히 임주빈은 줄곧 냉소를 짓고 있다가 옆에 있는 최설아가 눈빛을 보내자 그제야 표정을 숨겼다.그때, 최설아는 고개를 돌리며 다른 여학생들에게 명령했다.“그만
연회가 후반부에 이르자 여자애는 당연하다는 듯 외톨이가 되어버렸다.누구도 그녀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없는 사람 취급을 하기까지 했다.떠들썩한 연회장에서 그녀는 이방인이라도 되는 듯 따돌림을 당해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물 만난 고개처럼 누비고 다니는 동기들과 달리 그녀는 관대처럼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사람들의 무시를 당했다.더욱이 그녀가 오늘 보여준 행동들은 앞으로 그녀의 입학 자격까지 박탈하고 인생까지 망칠지도 몰랐다.이윽고 그녀는 아까 자기가 너무 심했나 하면서 스스로를 의심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주최자의 태도로 정 대표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녀에게 노골적인 신체접촉을 해왔었다.분명 상대가 잘못한 상황인데 모든 죄가 자기한테 씌워지자 여자애는 끝내 참지 못하고 얼굴을 손에 파묻은 채 눈물을 터뜨렸다.그 시각, 연회장 한구석에 앉아 있던 권효은은 그녀의 변화를 만족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이젠 고분고분해질 것 같네.”“언니도 참 대단하네요.”그 옆에서 여자애의 방어선이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을 본 권하윤은 등골이 오싹해 났지만 최대한 언짢은 기색을 숨기며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늘어놓았다.그러던 그때, 여자애가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목을 한껏 움츠리며 쭈뼛쭈뼛 권효은 앞에 다가왔다.“죄송합니다. 제가 일부러 파티를 망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아까는 제가…….”“됐어. 내가 이미 너를 대신해 정 대표한테 사과 전화를 드렸으니 이따가 직접 찾아가 사과하고 다시 모셔 와. 이번이 처음이니까 성적에는 넣지 않으마.”권효은의 말은 사형선고를 받은 여자애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윽고 여자애는 감격의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 무조건 제대로 사과드릴게요.”여자애는 치맛자락을 들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위층 휴게실로 올라갔다.분명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고 있었지만 영혼은 점점 나락으로
민도준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자 권하윤은 할 수 없이 한껏 누그러든 태도로 애원했다.“권효은도 이젠 저 믿고 있어요. 이제 곧 증거도 수집할 수 있으니까 저한테 시간 조금만 더 주시면 안 돼요? 네?”“좋아. 경성에서 해원까지 이틀 정도 걸리는데 그 시간을 잘 이용해 봐.”점점 기어오르는 권하윤은 한 방 먹이고 난 민도준은 그제야 흥미로운 듯 실험실에 있는 직원들에게 눈길을 주었다.“내 통화 다들 잘 엿들었나? 이제 내가 당신들 의견 들어볼 차례지?”그는 분명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장난기 섞인 말을 내뱉었지만 직원들은 저마다 눈치를 살폈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이에 민도준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전에 제품 품목 책임진 사람이 누구지?”“저요.”물은 지 한참이 지나서야 제품 매니저가 쭈뼛쭈뼛 손을 들었다.“전에 여기에서 가장 돈 되는 제품이 뭐였지?”“제품의 좋고 나쁨은 다방면으로 판단해야지 하고 수입도 단기 수익인지 장기 수익인지 브랜드 수익인지 고려해야 합니다. 시장에 유입된 뒤의 데이터도 비교해야 최종 결론을 얻을 수 있기에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이미 따로 명령을 받은 제품 매니저는 민도준이 아직 과학기술 단지에 대해 익숙하지 않다는 것만 믿고 말을 빙빙 에둘렀다.하지만 민도준이 볼 때 그 말들은 그저 하등 쓸모없는 헛소리뿐이었다. 이에 그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렇게 복잡하면 계산하지 마.”대화가 너무 잘 통하자 제품 매니저는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그가 고맙다는 인사를 내뱉기도 전에 민도준이 턱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집에 가서 당신 아들 수학 숙제나 봐줘.”“민 사장님, 그게 무슨…….”“무슨 뜻이냐고? 짐 싸서 꺼지라고.”제품 매니저는 민도준이 낙하산으로 회사에 출근한 첫날부터 자기와 같은 고참 직원을 해고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터라 다른 매니저들에게 눈빛을 보냈다.아니나 다를까 이미 사적으로 얘기가 오간 다른 매니저들은 그 말을
한편, 전화를 끊은 권하윤은 마음이 조급해 났다.남은 이틀 동안 어떻게 해서든 증거를 잡아내야 하니 급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 기회는 생각한 것보다 빨리 찾아왔다.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다시 교장실로 돌아와 문 앞에서 노크를 했지만 안쪽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문손잡이를 돌려봤더니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도 보이지 않자 궘하윤은 얼른 사무실로 들어갔다. 테이블 위에 반쯤 먹다 남은 물이 있는 걸 보니 권효은은 급한 일정으로 나간 게 틀림없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먼저 서랍을 당겨 봤지만 모두 잠겨 있다는 걸 발견하자 그녀는 이내 목표를 책장으로 옮겼다.그중 한 책장에는 학생들의 생활 기록부가 떡하니 놓여있었다. 물론 그렇게 중요한 단서는 되지 않겠지만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권하윤은 기록부를 꺼내 확인했다.역시나 그녀의 생각대로 기본 정보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하지만 그 위에 적힌 내용은 일반 기록부보다는 훨씬 디테일 했으며 신체에 관한 일부 데이트도 포함되어 있었다.그러던 그때, 권하윤이 사진 몇 장 찍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순간, 책꽂이 모퉁이에 삐죽 튀어나온 도표가 눈에 띄었다.성적표인 줄 알았던 종이는 다름 아닌 계약서였다.위에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어떤 보조금을 수령했는지 명확히 표기되어 있으며 만약 중도 퇴학하면 수령했던 보조금의 열 배를 반환해야 한다는 조건이 명시되어 있었다.그 내용을 본 권하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어쩐지 학생들이 퇴학을 안 한다 했더니 이런 족쇄를 채워놓고 있었던 거였어?’사진 몇 장을 찍어 증거로 남겨놓은 뒤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그녀는 다른 계약서들도 사진으로 남겨놓았다.그렇게 한참 동안 증거 수집에 열중해 있을 때, 갑자기 멀리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교장실로 오고 있었다.텅 빈 복도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오는 하이힐 소리에 권하윤은 등골이 오싹했다.얼른 모든 서류를 원래의 위치에 돌려놓은 뒤 책장 문을 닫았지만 밖으로 나가기에
그 뒤로 권하윤은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찜질방처럼 후덥지근한 옷장에서 언제 들킬지 오를 위기감에 마음을 졸이고 있자니 미칠 것만 같았다.심지어 숨 쉴 때마다 안에 습기가 차올랐다.그사이, 권하윤은 권효은이 자기를 찾을까 봐 민도준이 찾아 먼저 간다는 문자를 보냈다.그 메시지에 권효은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알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어느덧 반 시간이 흘렀지만 권효은은 여전히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노트북을 닫아버리고 자꾸만 시계를 쳐다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권하윤은 아무 소리 없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솔직히 도망치고 싶지만 권효은이 누구를 만나는지는 확인해 보고 싶었다.그렇게 약 십여분이 흐르자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어지러운 발소리에서 들어온 사람이 한 명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권하윤의 각도에서 볼 때 그들은 모두 다른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유일한 공통점은 옷의 원단이 모두 고급스러워 절대 보통 사람이 아닐 거라는 거였다.사람이 많아짐에 따라 공기가 점차 희박해지며 권하윤의 생존 공간도 위협을 받는 느낌이었다.하지만 그녀가 숨을 죽이고 그들에게 발각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찰칵”하는 문소리가 들렸다.좁은 문틈으로 확인해 보니 사람들이 열린 문을 통해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곧이어 또다시 문소리가 들리더니 방안은 이내 조용해졌다.권하윤은 섣불리 나가지 않고 문을 조금 더 열어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옷장에서 걸어나왔다.너무나도 오래 웅크리고 앉아있은 탓에 두 발은 수많은 벌레가 기어오르는 듯 따끔거리고 저릿해 났다. 하지만 그런 걸 상관할 겨를이 없이 권하윤은 사람들이 사라진 방향을 확인했다.그 위치는 다름 아닌 벽이었는데 위에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다.짙은 물감이 자유자재로 섞여 어찌 보면 예술성이 농후한 작품 같아 보이지만 권하윤은 보면 볼수록 눈앞이 아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 그림 뒤에 아까 봤던 통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도 지금 그곳을 함부로
“사실 오늘 교장 선생님이 제 동생을 데려갔거든요. 그래서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싶어서 그랬어요.”어렵사리 운을 뗀 임주빈은 마치 봇물 터지듯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하나둘 말하기 시작했다.3년 전, 그녀는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여고에 들어왔다.물론 학교생활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가족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그녀는 매번 엄청 잘 지낸다는 말로 가족을 속였다.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건, 가족이 그녀 몰래 동생까지 이 학교로 보내온 거였다.신입생 모임에서 동생을 보는 순간 임주빈은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는 게 무엇인지 톡톡히 경험했다.그녀는 동생을 설득하려고 노력했지만 단순하기만 한 동생은 이곳이 천당이라고 여기며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동생을 돌려보내기 위해 그녀는 남몰래 교장실 열쇠를 하나 맞춘 거다.솔직히 경솔하게 행동할 생각은 없었지만 모임에서 돌아와 동생이 사라졌다는 걸 확인하자 그녀는 단서를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교장실로 몰래 들어간 거였다.이 모든 걸 들은 권하윤은 순간 의문이 생겼다.“저희 언니가 이 시간에 교장실에 없는 건 어떻게 알았죠?”그 말에 임주빈은 싸늘한 미소를 짓더니 화를 참으며 말을 뱉어냈다.“이 시간만 되면 교장 선생님은 그 사람들을 데리고 쥐구멍에 숨어들어 더러운 유희를 즐기거든요.”쥐구멍은 바로 아까 봤던 그 통로를 의미했다.임주빈의 말을 들어보니 권하윤이 방금 봤던 사람들은 모두 학교의 “이사진”들인데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만 되면 이곳에 “회의”하러 온다고 한다.그리고 아까의 그 그림 뒤에 바로 그들의 개인 클럽이고.그렇다면 오늘이 수요일이니 이틀 뒤인 금요일에 그들은 또 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한참 생각에 빠져있는 그때, 임주빈이 갑자기 테이블 위에 놓인 권하윤의 손을 덥석 잡았다.“저를 고발해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제 동생이 어디로 갔는지만 알려세요. 네?”자기와 겹쳐 보이는 임주빈의 모습에 권하윤은 그녀의 손을 톡톡 두드리며 위로했다.“걱정
지금까지 권씨 가문은 사람들 몰래 해서는 안 될 짓을 수도없이 해온 게 틀림없다. 더욱이 그런 일을 많이 했으니 겁이 났을테고 조 사장과 모종의 거래를 해 뒤처리를 부탁했을 거다.그리고 보름 전이라면 마침 권희연이 권미란에게 떠밀려 조 사장을 접대한 그때와 일치하다.‘어쩐지 조 사장과 급하게 관계 회복을 했다 했더니 그런 일이 있었던 거였네.’자료를 많이 모을수록 권하윤은 어깨가 점점 무거워졌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문제도 따랐다.권씨 가문의 일이 터진다면 그녀가 했던 일은 언젠가 권미란의 귀에 들어갈 테고, 그러면 그녀 손에 잡혀 있는 가족들이 위험할 수 있다.그 생각이 드는 순간 권하윤은 갑자기 대담한 계획을 떠올렸다. 경성이 복잡한 틈을 타 해외에 오빠를 찾으러 가려는 계획.권씨 가문 사람들이 사건을 수습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면 그녀를 주시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니 먼저 해외로 가서 다음 계획을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더욱이 이틀 뒤 민도준의 약혼식 전까지 떠나지 않으면 공태준과 마주칠 수 있으니 말이다.‘공태준이 내 정체를 까발리기라도 하면 나 절대 도망치지 못해.’이런 생각이 들기 바쁘게 그녀는 최수인에게 전화했다.“이게 누구에요? 우리 예쁜 윤이 씨가 웬일로 전화를 다 주고? 민도준 걔가 약혼한다니까 이제 겨우 제 차례가 온 거예요?”“저 편하게 지내고 싶거든요.”“도준이 곁을 떠나 나한테 오는 게 얼마나 좋아요.”권하윤은 그와 쓸데없는 얘기를 할 겨를이 없는지라 얼른 진지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저기, 최수인 씨가 인맥 하나는 넓잖아요. 혹시 흔적을 남기지 않고 해외로 나가는 방법 알아요?”“당연히 알죠.”최수인은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재밌다는 듯 되물었다.“혹시 도망치려는 거예요?”“뭐…… 비슷해요.”그 대답에 최수인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그렇다면 당연히 도와야죠. 도준이 걔가 윤이 씨가 도망친 걸 알게 된다면, 하하하…… 그 표정 너무 보고 싶네요.”“제가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