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은 자기의 말에 의견을 굽힌 권하윤을 힐끗 바라보며 그녀의 다리를 손으로 슥 매만졌다.“응. 기다려.”짤막한 한마디를 남기고 민도준이 떠나가자 권하윤은 마음이 불안해 났다.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밖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바라보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그리고 그 시각, 권씨 집안 사람들도 그녀못지 않았다.민도준과 같은 큰 인물이 집에 왔다는 말에 권미란은 머리도 미처 빗지 못한 채 다급히 달려 나왔다.“민 사장님이 이런 누추한 곳에 다 오시다니. 앉으…….”앉으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도준은 주인인 것처럼 먼저 소파에 털썩 기대앉았으며 서 있는 권미란을 향해 오히려 자리를 권했다.“앉으시죠? 서서 저 대접할 겁니까? 그렇게 내외할 거 없습니다. 얼른 앉으세요.”그의 말에 권씨 저택 분위기는 순간 무거워졌다.고지식한 가풍을 가지고 있는 데다 예의범절에 엄격한 권씨 집안에서 그것도 권미란 앞에서 이런 태도는 절대 허용될 수 없는 거였다.심지어 권하윤은 평소 말하는 속도가 조금 빨라도 혼나곤 하는데 그런 걸 깡그리 무시하는 민도준의 건방진 행동에 권미란의 표정은 좋을 리가 없었다.“민 사장님, 이게 지금…….”“농담 좀 한 겁니다. 설마 진지하게 받아들인 건 아니죠?”민도준의 건들건들한 태도에 권미란은 진지하기도 그렇다고 무시하기도 애매했다.따라서 파리라도 삼키듯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표정만 구겼다.하지만 그녀는 끝내 화를 삭이며 호흡을 가다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오늘 온 건 우리 넷째 때문입니까?”“네.”민도준은 숨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말했잖습니까? 권하윤 씨와 잘 수만 있다면 권씨 가문과 손을 잡겠다고. 잠은 이미 잤으니 약속을 지킬 때가 됐죠.”충격적인 한마디에 거실에 있던 사용인들은 하나둘 고개를 떨구며 몸을 한껏 움츠렸다. 심지어 입에서 소리라도 날까 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갑자기 예고도 없이 가문의 민낯을 다른 사람 앞에서 드러내는 민도준의 모습에 권미란은 놀라기도 잠시 애써 체통을
“말씀하시죠.”“우리 제수씨 말인데요, 예전에 해원에 갔던 적 있나요?”살짝 웃으며 꺼낸 민도준의 말에 권미란의 표정은 알게 모르게 굳어버렸다.‘갑자기 이건 왜 묻지? 설마 뭔가 알게 됐나? 아니면, 권하윤이 알려줬나?’‘아니야, 그럴 리 없어. 민 사장이 공씨 가문 가주와 아는 사이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인데 권하윤이 자기의 허점을 쉽게 드러낼 리 없어. 더욱이 오빠도 내 손에 있는데.’몇 초도 안 되는 사이, 권미란은 뭔가 결심을 내린 듯 고개를 저었다.“우리 집 애들은 어릴 적부터 경성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게다가 지금 세상이 무서운지라 그 애들을 밖에 내보낸 적 없고요.”“아하, 그러시구나-”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말투에 불안감이 일순 권미란을 덮쳤다.“권 여사님, 제가 누군지 아시죠?”“당연하죠. 민 사장님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이 경성에 누가 있겠습니까?”“하, 난 또 모르시는 줄 알았지 뭡니까.”분명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마치 상대의 껍질을 벗겨낼 것처럼 잔인하고 악랄했다.“그래서 저를 속이는 줄 알았는데.”분위기는 갑자기 변하더니 편안하던 공기 속에 찬 바람이 불어 들어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었다.다행히 권씨 가문을 관리하면서 쌓은 내공이 있는지라 권미란은 이러한 압박에도 이내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마음을 다잡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넷째는 몸이 안 좋아 제가 어릴 때부터 옆에 끼고 살다시피 했습니다. 더욱이 제 말은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는 아이이고요. 경성에 있으면서 민 사장님도 소문을 들었을 텐데요.”그녀가 이토록 대담하게 권하윤에게 가짜 신분을 만들어 줄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진짜 딸 덕분이었다.만약 없는 사람을 만들어 내면 바로 들통이 날 테지만 권하윤은 원래 있던 사람을 대신한 거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녀의 이름을 조사한다 해도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이 모든 걸 계산한 권미란은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렸다.“혹시 넷째가 민 사장님의 심기라도 거슬렀나요? 그렇다면 걱
‘전신 검사…….’그 네 글자를 듣는 순간 권하윤은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머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가해지면서 그녀의 주의를 끌어왔다.“선천적으로 심장이 나쁘다고 하던데, 몸조리 잘해야 하지 않겠어?”“그건 어릴 때 앓았던 병일 뿐이에요. 지금은 말끔히 나아서 번거롭게 검사할 필요 없어요.”“어떻게 그래.”권하윤이 조심스럽게 건넨 의견을 완전히 무시한 채, 민도준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뒷덜미를 받쳐 들었다.“내가 특별히 하윤 씨 진료 기록도 열람 신청했는데. 본인이 안 가면 내가 헛수고한 게 되잖아.”“…….”‘그래서 들어간 지 한참이 되어서야 나온 거였어? 권미란과 대화하는 틈에 이런 일까지 준비하려고?’점차 창백해지는 권하윤의 낯빛을 보자 민도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녀의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운전해.”이런 상황까지 왔으니 도망치는 건 말도 안 됐다.때문에 권하윤은 어색하게 손을 들어 핸들을 잡더니 기계적으로 운전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잔뜩 긴장한 그녀에 반해 민도준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심지어 창문을 절반 내리고 여유롭게 담배를 피우기까지 했다.그렇게 도착한 병원.차에서 내리는 순간 권하윤의 손바닥은 이미 흥건하게 젖어있었다.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티슈를 뽑아 닦아주는 섬세함까지 보여줬다.그리고 정교한 무늬가 있는 티슈로 권하윤 손바닥을 느긋하게 문지르며 재밌는 듯 입을 열었다.“몸이 약하다는 게 정말인가 보네? 운전하는 데도 이렇게 피곤해하다니. 앞으로 운전을 맡기지도 못하겠네?”다정한 말투에 두려움이 권하윤을 덮쳐왔다.그 다정함은 마치 그녀에게 차려진 마지막 만찬인 것만 같았다. 풍성하지만 씹을수록 괴롭기만 한 느낌 말이다.그때, 그녀의 손을 다 닦은 민도준이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빛을 교환하며 싱긋 웃었다.“내려.”뻣뻣하게 차에서 내려 끌려가다시피 병원에 들어선 권하윤은 복도를 지나면서 수만 가지 생각을 했다.‘아무리 완쾌했다고 해도 수치는 거
권하윤은 기뻐할 겨를도 없이 어떻게 하면 민도준을 붙잡아 둘 수 있나 하는 생각에 잠겨있었다.하지만 그녀가 생각할 새도 없이 어느새 권희연의 병실 문 앞에 도착했다.“이따가 데리러 올 테니까 들어가 봐.”“같이 안 들어가요?”민도준이 가려고 하자 권하윤은 무의식중에 그를 붙잡았다.그런 그녀의 반응에 민도준은 피식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낮게 속삭였다.“나도 들어가라고? 언니 앞에서 약혼자 형과 어떻게 바람피우는지 보여주려고?”“아니…….”하지만 한마디가 채 끝나기도 전에 병실 문이 열리더니 도시락을 든 로건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민도준을 보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민 사장님? 사장님도 희연 씨 보러 오신 겁니까?”“아니, 너 보러.”로건의 어리버리한 모습에 민도준은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하하, 고마워요…….”그의 말에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로건은 머리를 긁적이며 헤실 웃었다.하지만 그때.“블랙썬에서 하도 얼굴을 보기 어려워서 말이지.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러 왔어.”“…….”덧붙여진 민도준의 말에 이 모든 게 그의 착각이었다는 걸 알아챈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민 사장님, 죄송합니다. 바로 돌아가겠습니다.”“됐어.”민도준은 권하윤을 힐끗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먼저 우리 제수씨를 안으로 데려가. 심장이 안 좋다니 어디 도망가지 못하게 잘 감시하고.”“네, 알겠습니다. 하윤 씨, 들어오세요.”로건은 민도준의 말에 대답하기 바쁘게 권하윤을 안으로 모셨다.권하윤은 예상을 벗어난 상황에 입을 뻐금거리며 민도준을 만류하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권하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로건을 따라 병실로 들어가는 것뿐이었다.고작 몇 시간이 흘렀지만 권희연은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그녀는 베개를 등에 받치고 침대에 기댄 채 무릎 위에 핫핑크색 목도리를 덮고 있었으며 산처럼 쌓인 과일을 손 옆에 두고 있었다.이윽고 권하윤이 들어오자 손에
민도준의 말에 의사는 잠깐 멈칫하더니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환자분한테 쌍둥이 자매가 있나요?”“그걸 몰라서 묻잖습니까.”민도준은 웃고 있었지만 의사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아, 아까는 그런 상황을 고려하지 못했네요. 쌍둥이가 맞는지 확인해 보려면 더 정밀한 검사를 진행해 봐야 하는데 내일쯤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그래요.”민도준은 옷에 떨어진 담뱃재를 툭툭 털며 일어나 의사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러면 부탁드리겠습니다.”“부탁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조심히 가세요.”-아래층 병실.권희연은 권씨 가문을 무너트리자는 권하윤의 요구에 응하고 나서 자기가 지금껏 겪었던 일들을 하나둘 설명하기 시작했다.그 때문에 검사 결과에만 신경 쓰던 권하윤도 점차 그녀의 말에 집중력이 끌려왔다. 그렇게 알게 된 사실도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만했다.권씨 가문에서 설립한 서원 여고는 대외적으로 우아하고 지적인 여성 교육에 힘쓰는 여성들의 천당이라고 알려졌다.더욱이 서원 여고를 졸업한 학생들 중 부자와 결혼하거나 외국 황실에 시집간 학생들도 허다하고 말이다.이건 아직 세계관을 설립하지 않은 소녀들에게 현대판 신데렐라가 될 수 있는 허황한 꿈을 심어주기엔 충분했다.하지만 서원 여고도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그 문턱이 매우 높은 건 물론, 입학 원서를 통과한 뒤 1년 정도의 고찰을 통과해야지만 정식으로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하지만 모든 심사를 통과하고 나면 학비를 면제받을 뿐만 아니라 고액의 보조금도 받을 수 있고 또 모두에게 진정한 재벌녀가 될 수 있게끔 보장해 준다.그 사이 등급 테스트를 통해 부동한 레벨의 파티에 참석해 일반인들은 평생 가도 만나지 못할 유명 인사들도 만날 수 있다.이게 바로 서원 여고가 밖에 알려진 이미지이다.심지어 권희연조차도 20년 동안 학교에서 교육받으면서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권효은을 찾으러 교장 사무실에 갔다가 그녀와 다른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문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던 권희연은 갑자기 나타난 민도준에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하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입을 열려는 순간, 민도준이 갑자기 손을 뻗어 권하윤의 허리를 야릇하게 끌어안았다.“뭔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정신이 팔려 있어?”“민 사장님.”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권하윤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놀라 가슴을 미처 가라앉히지도 못한 채 짤막하게 소리쳤다.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권희연도 마치 적이라도 만난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민 사장님, 하윤은 민 사장님의 제수씨잖아요, 그러면 안 돼요.”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면서도 동생이 자기와 같은 노리개로 전락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모습이었다.이에 권하윤은 자기 허리를 감싸고 있던 민도준을 얼른 밀어버린 채 권희연에게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언니, 걱정할 거 없어. 나랑 민 사장님, 사적으로 친분 있는 가까운 관계야.”권하윤의 단어 선택에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협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아주 가까운 관계긴 하지.”“…….”두 사람의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권희연은 넋을 잃은 채 그간 있었던 일들을 회상했다. 그리고 그제야 두 사람이 진작에 얽힌 관계라는 걸 알아차렸다.하지만 그게 좋은 징조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권하윤을 바라봤지만 민도준이 옆에 있는 바람에 하려던 말을 다시 목구멍으로 삼켜버렸다.그런 그녀를 보면서도 권하윤은 다른 걱정이 떠올라 푹 쉬라는 당부만 하고 병실을 나섰다.그리고 복도로 나온 뒤, 민도준의 눈치를 힐끗힐끗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왜 내려왔어요? 혹시 결과가 나왔나요?”“나왔어.”민도준의 의미심장한 표정에 약 2초간 숨죽이고 있던 권하윤은 그가 더 이상 말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애써 침착하며 되물었다.“결과는 어때요? 저 심장병 다 나았대요?”하지만 조심스러운 물음에 민도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지금껏 그녀를 이토록 꼼꼼하게 보지
‘데이트?’그녀와 민도준은 보통 데이트 같은 쓸데없는 행위는 건너뛴 채 몸 정만 나누는 관계일 뿐이다.그렇다고 데이트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순간 그 단어에 권하윤은 강력한 위화감이 들었다.낯설고 어색했다.심지어 민도준이 한가하게 그녀와 데이트할 여유가 있다고도 생각되지 않았다.이에 은연중 거절 의사를 밝혔다.“오늘 하루 종일 바삐 보냈으니 얼른 돌아가서 휴식하는 게 어때요?”“어떻게 그래.”능청스럽게 대답한 민도준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하윤 씨의 건강이 이렇게 좋아졌다는데 제대로 축하해야 하지 않겠어?”‘또 건강 얘기.’그 화제에 권하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도준 씨가 원한다면 그래야죠.”‘그래봤자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거나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것밖에 더 있겠어?’권하윤은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차는 그녀가 생각한 것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시야에 보이던 고층 건물이 모두 울창한 나무로 변할 때쯤, 권하윤은 이게 데이트가 아니라 생매장이 될 수도 있겠다는 무서운 생각이 덜컥 들었다.그리고 낮은 단층집마저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그녀의 쿵쾅거리는 심장도 점차 정점을 치솟았다.그러던 그때, 차가 갑자기 급코너링하며 빙 도는 바람에 권하윤의 몸도 따라서 휘청거렸다. 얼른 손잡이를 잡은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운전석을 바라봤다.“천천히 운전하면 안 되나요?”“또 천천히 하라고?”민도준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리더니 상대의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그 때문에 권하윤의 몸은 앞으로 쏠리며 하마터면 안전벨트에 조여 숨이 멎을뻔했다.“도착했어.”남자의 말에 창밖을 내다본 권하윤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마을 하나 보이지 않는 허황한 황무지가 눈에 들어온 순간 그대로 버티고 차에서 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민도준이 그녀보다 한발 빠르게 차 문을 열고 내리며 심지어 조수석 문까지 열어주는 바람에 운
유독 거센 산바람이 두 사람의 옷자락을 스쳐대는 바람에 자꾸만 펄럭거렸고, 반쯤 떠 있는 발이 바닥을 찾으려고 허우적댔지만 그녀를 미는 힘은 전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허공에 둥둥 뜬 채 느껴지는 중력감과 허리를 끌어당기는 힘이 서로 대조를 이루어 공포감에 휩싸인 권하윤은 필사적으로 민도준의 팔을 두드렸다.“빨, 빨리 놓으세요.”하지만 민도준은 그녀의 긴장감을 무시한 채 장난기 어린 말투로 되물었다.“놓으라고? 정말 놓을까?”몸이 뒤로 젖혀 민도준의 팔에 의지해 있던 그녀는 그제야 민도준이 놓는 순간 절벽 아래로 떨어질 거라는 걸 직감했다.하지만 그걸 자각하는 순간 허리를 두르고 있던 손이 일순 풀렸다.저도 모르게 “아”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기 무섭게 풀어졌던 팔이 다시 그녀의 허리를 조여오며 다시 안쪽으로 끌어들였다.이윽고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재밌어?”하마터면 저승의 문턱을 넘을뻔한 권하윤은 숨을 헐떡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때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바람에 흩어졌다.“내가 손 놓으면 제수씨 죽어.”권하윤은 대답할 기력도 없었다. 번지점프 체험보다 더 두려운 현실에 모공 하나하나에 전율이 흘렀고 솜털마저 쭈뼛쭈뼛 고개를 들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녀는 동아줄이라도 잡는 것처럼 민도준의 팔을 꽉 붙잡았다.그러던 그때. “저기 봐. 동림 부지 이미 재개발 들어갔어.”민도준은 짖궂게 그 자세 그대로 권하윤에게 말을 걸었다.하지만 권하윤은 그곳을 감히 바라볼 수 없었다. 다음 순간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온 정신이 절벽에 걸터 선 자기 발에 쏠려 있었다.그런데 민도준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강제로 돌렸다.그리고 그 순간, 노란 바리게이트에 둘러싸인 시공 현장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그 규모에 권하윤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일전에 동림 부지에 대해 어느 정도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심지어 이 부지를 빼앗으려고 사람들이 암투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얼마나 벌였는지도 대충 건너 들었다.그런데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