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그녀와 민도준은 보통 데이트 같은 쓸데없는 행위는 건너뛴 채 몸 정만 나누는 관계일 뿐이다.그렇다고 데이트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순간 그 단어에 권하윤은 강력한 위화감이 들었다.낯설고 어색했다.심지어 민도준이 한가하게 그녀와 데이트할 여유가 있다고도 생각되지 않았다.이에 은연중 거절 의사를 밝혔다.“오늘 하루 종일 바삐 보냈으니 얼른 돌아가서 휴식하는 게 어때요?”“어떻게 그래.”능청스럽게 대답한 민도준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하윤 씨의 건강이 이렇게 좋아졌다는데 제대로 축하해야 하지 않겠어?”‘또 건강 얘기.’그 화제에 권하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도준 씨가 원한다면 그래야죠.”‘그래봤자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거나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것밖에 더 있겠어?’권하윤은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차는 그녀가 생각한 것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시야에 보이던 고층 건물이 모두 울창한 나무로 변할 때쯤, 권하윤은 이게 데이트가 아니라 생매장이 될 수도 있겠다는 무서운 생각이 덜컥 들었다.그리고 낮은 단층집마저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그녀의 쿵쾅거리는 심장도 점차 정점을 치솟았다.그러던 그때, 차가 갑자기 급코너링하며 빙 도는 바람에 권하윤의 몸도 따라서 휘청거렸다. 얼른 손잡이를 잡은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운전석을 바라봤다.“천천히 운전하면 안 되나요?”“또 천천히 하라고?”민도준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리더니 상대의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그 때문에 권하윤의 몸은 앞으로 쏠리며 하마터면 안전벨트에 조여 숨이 멎을뻔했다.“도착했어.”남자의 말에 창밖을 내다본 권하윤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마을 하나 보이지 않는 허황한 황무지가 눈에 들어온 순간 그대로 버티고 차에서 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민도준이 그녀보다 한발 빠르게 차 문을 열고 내리며 심지어 조수석 문까지 열어주는 바람에 운
유독 거센 산바람이 두 사람의 옷자락을 스쳐대는 바람에 자꾸만 펄럭거렸고, 반쯤 떠 있는 발이 바닥을 찾으려고 허우적댔지만 그녀를 미는 힘은 전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허공에 둥둥 뜬 채 느껴지는 중력감과 허리를 끌어당기는 힘이 서로 대조를 이루어 공포감에 휩싸인 권하윤은 필사적으로 민도준의 팔을 두드렸다.“빨, 빨리 놓으세요.”하지만 민도준은 그녀의 긴장감을 무시한 채 장난기 어린 말투로 되물었다.“놓으라고? 정말 놓을까?”몸이 뒤로 젖혀 민도준의 팔에 의지해 있던 그녀는 그제야 민도준이 놓는 순간 절벽 아래로 떨어질 거라는 걸 직감했다.하지만 그걸 자각하는 순간 허리를 두르고 있던 손이 일순 풀렸다.저도 모르게 “아”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기 무섭게 풀어졌던 팔이 다시 그녀의 허리를 조여오며 다시 안쪽으로 끌어들였다.이윽고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재밌어?”하마터면 저승의 문턱을 넘을뻔한 권하윤은 숨을 헐떡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때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바람에 흩어졌다.“내가 손 놓으면 제수씨 죽어.”권하윤은 대답할 기력도 없었다. 번지점프 체험보다 더 두려운 현실에 모공 하나하나에 전율이 흘렀고 솜털마저 쭈뼛쭈뼛 고개를 들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녀는 동아줄이라도 잡는 것처럼 민도준의 팔을 꽉 붙잡았다.그러던 그때. “저기 봐. 동림 부지 이미 재개발 들어갔어.”민도준은 짖궂게 그 자세 그대로 권하윤에게 말을 걸었다.하지만 권하윤은 그곳을 감히 바라볼 수 없었다. 다음 순간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온 정신이 절벽에 걸터 선 자기 발에 쏠려 있었다.그런데 민도준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강제로 돌렸다.그리고 그 순간, 노란 바리게이트에 둘러싸인 시공 현장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그 규모에 권하윤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일전에 동림 부지에 대해 어느 정도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심지어 이 부지를 빼앗으려고 사람들이 암투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얼마나 벌였는지도 대충 건너 들었다.그런데
성은우의 일이 없었다면 권하윤은 그나마 용기라도 조금 가질 수 있었을 거다.하지만 그런 경험을 이미 한 그녀로서는 민도준에게 피도 눈물도 심지어 연민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시간을 미루는 것뿐이었다.본인이 죽는 건 두렵지 않았지만 가족은 살아야 하니까.이 생각에 권하윤은 민도준을 꼭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저를 믿지 못하겠다면 손 놓으세요.”공기가 삽시간 고요해지더니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왜? 이대로 죽으려고? 아니면 넘어가 달라고 협박하는 건가?”한참 동안 긴장한 권하윤은 마치 오랜 시간 당겨져 탄력을 잃은 고무줄처럼 축 늘어진 채로 눈을 감았다.“도준 씨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거겠죠.”정적이 다시 밀려왔다.어둠이 시간을 삼켜 몇분이 흘렀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그러던 그때, 민도준이 갑자기 손을 놓아버렸다.갑작스러운 상황에 권하윤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절벽 밖으로 기울었다.하지만 그 찰나, 민도준은 그녀를 잡아 안쪽으로 끌어들였다.이번에 그녀가 선 위치는 안쪽이었다.그렇게 두 발을 바닥에 붙이고 섰을 때, 권하윤은 그제야 식은땀에 등이 흥건하게 젖었다는 걸 자각했다.가쁜 숨을 몰아쉴 때, 그녀는 자기 몸에 떨어진 뜨거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다행히 어두워진 하늘 때문에 상대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권하윤은 오히려 민도준을 직면할 필요 없다는 사실에 적절한 때 내려진 이 어둠이 감사했다.그렇게 한참 동안 숨을 돌린 권하윤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들이 걸어온 길을 돌아봤다.“우리 어떻게 내려가요?”“내려갈 필요 뭐 있어? 여기 좋잖아.”수려한 풍경에 아름답기만 하던 산은 어둠이 깃들자 음산하게 변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오늘 여기서 묵어요?”민도준은 매끄럽고 평평한 돌 위에 털썩 앉으며 권하윤을 바라봤다.“이리 와.”그의 모습이 권하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앞으로 다가갔다.하지만 그의 옆에
이른 아침.새 울음소리에 잠에서 깬 권하윤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보자 순간 멍해졌다.시선을 돌려 확인하는 그녀는 여전히 어제의 그 평평한 돌 위에 누워 있었고 밑에는 민도준의 외투가 깔려있었다.갓 일어나 여전히 비몽사몽한 상태인데 그때 마침 차가운 물방울이 얼굴에 떨어지는 바람에 그녀는 벌떡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하지만 민도준은 사람을 놀렸음에도 조금의 미안한 기색도 없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그녀를 깨웠다.“게으름 피우지 말고 얼른 가서 세수해. 바로 내려갈 테니까.”그가 가리킨 곳에는 작은 개울가가 있었다.차가운 물로 세수하는 순간 권하윤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물은 맑고 깨끗해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더욱이 세수하며 목을 축였을 때 이상한 맛이 나기는커녕 상쾌하기까지 했다.하산하는 과정은 등산 못지않게 시간이 들었다.그렇게 몇 시간을 걸어 내려 다시 차에 올라탄 순간 권하윤은 하룻밤뿐인데 한 세기가 흘러 지나간 듯 느낌이 새로웠다.차에 올라탄 민도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받게 되었는데 다른 대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나왔어요? 바로 갈게요.”라는 한마디는 그녀의 귓가에 콕 박혔다.그제야 그녀의 정신도 현실로 끌려 나왔다. 하지만 수많은 의문이 하나둘 뇌리에 들어와 조심스럽게 운전하는 민도준의 눈치를 살폈다.“도준 씨, 혹시 이따가 일 있어요?”“응.”무심코 내뱉은 민도준의 대답에 권하윤은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방금 나왔다고 하던데 뭐가 나왔다는 거죠?”“맞춰 봐.”퀴즈나 하고 앉아있을 마음이 없는 터라 권하윤은 대충 몇 가지 대답을 했지만 모두 틀렸다.“대체 뭐예요?”그제야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하윤 씨 검사 보고.”그 말을 듣는 순간 권하윤은 숨이 턱 막혀 무릎 위에 올려 놓았던 손을 그러쥐었다.“어제 나왔었잖아요?”“그렇지. 그런데 어제는 시간이 촉박해서 세밀한 검사를 맡기지 못했거든. 상세한 검사 결과를 받아보지
“음?”민도준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흥미 있는 듯 되물었다.“그러니까, 예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네요?”“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어제는 제가 실수했습니다. 쌍둥이일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틀린 결론을 낼뻔했습니다. 민 사장님의 신뢰를 저버려서 정말 죄송합니다.”송 닥터는 민도준의 의미심장한 말투에 식은땀을 닦아내며 사과를 거듭했다.하지만 민도준은 오히려 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송 닥터, 그렇게 자책할 거 없어요. 누가 이럴 줄 알았겠습니까?”그의 말은 송 닥터에게 가리키는 듯했지만 또 어찌 보면 다른 의미가 있는 듯했다.이윽고 손가락으로 보고서를 툭툭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권희연과의 혈연관계를 확인해 보라고 한 결과는 나왔나요?”“네, 나왔습니다.”송 닥터는 허둥지둥 보고서 한 장을 민도준 앞으로 내밀었다.“여기 있습니다.”공손하게 두 손으로 보고서를 받쳐 든 것도 모자라 그는 허리를 완전히 숙였다.“민 사장님 말씀이 맞더라고요. 권하윤 씨와 권희연 씨는 혈연관계가 없었습니다.”민도준은 그 결과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어디 보자. 두 사람 모두 권 여사 친자식이 아니죠?”“네…… 두 분 모두 권 여사님과는 혈연관계가 없었습니다.”솔직히 권미란의 DNA 샘플은 그가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손에 넣은 거다. 애초에 민도준이 인력과 물력을 낭비하면서 그런 의뢰를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그도 그럴 것이, 남의 자식을 그것도 둘씩이나 더 입양해 키우는 사람은 드물었으니까.그런데 결과가 나오고 나서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두 딸 모두 권미란의 자식이 아닌 것으로 나왔으니.부자들의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이 알 수 없다는 걸 그는 이 계기로 다시 한번 느꼈다.송 닥터가 한참 동안 생각하고 있던 그때 민도준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겨우 가려는 기미가 보이자 송 닥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얼른 그를 배웅했다.그런데 그때, 문 앞에 다다른 민도준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한민혁은 또다시 닭 모이 쫓듯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권씨 가문이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해도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완전히 똑같이 생긴 사람을 대타로 찾긴 어려웠을 거야. 그런데 그럴 거면 왜 둘을 한꺼번에 입양하지 않았을까?”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호두 하나가 그의 이마를 때렸다.“아야.”이윽고 민도준이 의자에서 일어나 앉으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쿡쿡 찔렀다.“머리에 좋은 것도 좀 먹어.”“하하, 그래. 고마워.”한민혁은 빨갛게 부어오른 이마를 감싸 쥔 채 이를 악물며 입꼬리를 올렸다.하지만 희한하게도 호두를 입에 넣고 씹는 순간 그는 정말로 답을 찾았다.‘아이를 친딸처럼 집에 녹아들게 하려면 권미란은 먼저 가짜 임신을 해야할 텐데 자기도 쌍둥이를 “낳을” 거란 걸 미처 몰랐을 테니까 당연히 하나라고 속였을 거고. 그런데 하나만 임신했다가 갑자기 둘을 낳아 의심을 살 수는 없었을 테니 당연히 하나만 데려갔겠지.’눈을 빙글빙글 돌리던 한민혁은 담배에 불을 붙이는 민도준을 힐끗 바라봤다.“저기, 만약 그렇다면 지금의 권하윤 씨는 가짜…….”한창 말하던 그는 갑자기 쏠려오는 눈빛에 하마터면 혀를 깨물뻔한 고비를 넘기고는 이내 말을 바꿨다.“아니, 그 2.0 버전 아니야? 형 어쩔 셈이야?”“뭐가 다른데?”아무렇지 않은 듯 반문하는 민도준의 반응에 한민혁은 입을 뻐금거렸다.‘하긴, 다를 건 없지. 권씨 가문은 민씨 가문에 며느리로 보내질 도구가 필요한 거고, 민씨 가문은 권하윤이라는 이름의 며느리가 필요하니까. 그 껍데기 속에 어떤 알맹이가 들어있는지는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지.’“그렇다면 왜 자꾸만 하윤 씨 신분에 그렇게 목맸던 거야?”민도준은 그의 말에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고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공태준은 언제 도착해?”“이번주 말, 형 약혼식에 아마 참석할 거야.”“하, 날짜 하난 기막히게 택하네.”담배 연기를 내뱉은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잘 준비해. 공태준도 그동안 고생 좀 했겠는데.”
자기가 전혀 내뱉은 적 없는 일이 노부인의 귀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안 공태준은 표정이 어두워졌다.공씨 가문의 메이드들은 고용인일 뿐만 아니라 사람을 감시하는 눈이기도 하다.그들이 있는 곳에 비밀이란 있을 수 없다.심지어 공태준이 본가에 살지 않는다 해도 여전히 그 수많은 사람의 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가주라는 두 글자는 그를 높은 자리까지 올려주었지만 그 대신 투명한 철창 속에 가둬두었다.한참을 침묵하던 공태준이 끝내 입을 여는 바람에 오래 지속된 침묵이 깨졌다.“민 사장 약혼식에 참석하는 김에 비즈니스도 상의할 겸 한동안 경성에 다녀오려고요.”“응.”자기가 들은 소식과 별반 다르지 않자 노부인은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었다.“민씨 가문도 큰 변화가 찾아올 날이 머지않았다. 게다가 민도준이 가문을 삼키게 될 가능성도 있고. 허니 미리 왕래해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구나. 다녀오거라. 나 대신 선물도 전해주고.”한참 동안 말하건 그녀는 눈꺼풀을 들며 공태준을 바라봤다.“참, 성은우가 곁에 없으니 불편할 텐데 내가 다른 애 하나 물색해 뒀다. 자기 구역이 아닌 곳에 가는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니.”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두운 곳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이 애가 앞으로 네 곁을 지킬 거다. 이름은 이남기이니 믿어도 된다.”“가주님, 처음 뵙겠습니다.”공태준은 자기한테 인사를 해오는 이남기를 무시한 채 상석에 앉은 노부인을 바라봤다.“네, 그러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태준아.”하지만 그가 안채를 나서려고 할 때 등 뒤에서 부름 소리가 들려왔다.곧이어 무게감 있는 엄숙한 목소리가 산처럼 그를 눌렀다.“공씨 가문의 모든 사람의 운명이 네 손에 달렸다. 우리를 실망시키지 말거라.”그 말이 떨어지고 얼마나 지났을까? 공태준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면서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었다.“네.”-오전까지 화창하던 하늘은 오후가 되자마자 가랑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가느다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가 흘러내리는 바람에 시야마저
권하윤이 잠에서 깰 기미를 보이자 민도준은 이내 손을 거두며 아이 달래듯 이불로 꽁꽁 싸맨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그녀가 순을 고르게 내뱉으며 다시 꿈나라에 들자 그제야 욕실로 걸어갔다.빗방울의 연주 소리에 너무 깊이 잠근 권하윤은 다음 날 아침 깨어났을 때도 현실이라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어젯밤 잠든 사이에 어렴풋이 민도준이 왔었던 것 같은데 현재 옆은 텅텅 비어있었다.‘설마 꿈인가?’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학교에 가서 권효은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간단히 준비를 마치고 별장을 나섰다.그녀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 마침 휴식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하지만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일반 학교와 달리 그곳은 휴식 시간인데도 시끌벅적하지 않았다.예쁘장한 여자애들은 마치 잘 포장된 도자기 인형처럼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교정을 누비고 있었다.머리 위에서는 햇빛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지만 발밑에는 간밤의 비로 고인 물이 질퍽하게 있었다.그 길을 걸어가는 여자애들의 다리와 신발에는 쉽게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흙탕물이 자잘하게 튀어 있었다.느릿느릿 걸으며 관찰한 결과 권하윤은 여자애들이 아직 학생이지만 옷차림에 매우 신경 썼다는 걸 보아냈다.그리고 그 순간 여고에 들어온 소녀들은 재벌녀로 될 수 있다던 권희연의 말이 생각났다.‘확실히 그렇긴 하네. 하루 이틀은 별일 아닐지 몰라도 오랜 시간 부유한 삶을 경험하면 다시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할법하지.’아마도 이것이 바로 수많은 학생들이 권씨 가문의 민낯을 폭로하지 않는 데다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일 거다.허영심, 재벌가 며느리가 되면 잘살 수 있다는 허황한 꿈에 소녀들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썩어 문드러졌을지도 모른다.‘가는 길목마다 이렇게 미끼를 뿌려놨으니 그 많은 애들이 앞에 벼랑이 있는 줄도 모르고 하나둘 모여들었지.’생각하면 할수록 권하윤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이윽고 권씨 가문을 무조건 무너트려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그건 그녀를 위한 것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