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전혀 내뱉은 적 없는 일이 노부인의 귀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안 공태준은 표정이 어두워졌다.공씨 가문의 메이드들은 고용인일 뿐만 아니라 사람을 감시하는 눈이기도 하다.그들이 있는 곳에 비밀이란 있을 수 없다.심지어 공태준이 본가에 살지 않는다 해도 여전히 그 수많은 사람의 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가주라는 두 글자는 그를 높은 자리까지 올려주었지만 그 대신 투명한 철창 속에 가둬두었다.한참을 침묵하던 공태준이 끝내 입을 여는 바람에 오래 지속된 침묵이 깨졌다.“민 사장 약혼식에 참석하는 김에 비즈니스도 상의할 겸 한동안 경성에 다녀오려고요.”“응.”자기가 들은 소식과 별반 다르지 않자 노부인은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었다.“민씨 가문도 큰 변화가 찾아올 날이 머지않았다. 게다가 민도준이 가문을 삼키게 될 가능성도 있고. 허니 미리 왕래해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구나. 다녀오거라. 나 대신 선물도 전해주고.”한참 동안 말하건 그녀는 눈꺼풀을 들며 공태준을 바라봤다.“참, 성은우가 곁에 없으니 불편할 텐데 내가 다른 애 하나 물색해 뒀다. 자기 구역이 아닌 곳에 가는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니.”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두운 곳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이 애가 앞으로 네 곁을 지킬 거다. 이름은 이남기이니 믿어도 된다.”“가주님, 처음 뵙겠습니다.”공태준은 자기한테 인사를 해오는 이남기를 무시한 채 상석에 앉은 노부인을 바라봤다.“네, 그러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태준아.”하지만 그가 안채를 나서려고 할 때 등 뒤에서 부름 소리가 들려왔다.곧이어 무게감 있는 엄숙한 목소리가 산처럼 그를 눌렀다.“공씨 가문의 모든 사람의 운명이 네 손에 달렸다. 우리를 실망시키지 말거라.”그 말이 떨어지고 얼마나 지났을까? 공태준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면서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었다.“네.”-오전까지 화창하던 하늘은 오후가 되자마자 가랑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가느다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가 흘러내리는 바람에 시야마저
권하윤이 잠에서 깰 기미를 보이자 민도준은 이내 손을 거두며 아이 달래듯 이불로 꽁꽁 싸맨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그녀가 순을 고르게 내뱉으며 다시 꿈나라에 들자 그제야 욕실로 걸어갔다.빗방울의 연주 소리에 너무 깊이 잠근 권하윤은 다음 날 아침 깨어났을 때도 현실이라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어젯밤 잠든 사이에 어렴풋이 민도준이 왔었던 것 같은데 현재 옆은 텅텅 비어있었다.‘설마 꿈인가?’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학교에 가서 권효은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간단히 준비를 마치고 별장을 나섰다.그녀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 마침 휴식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하지만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일반 학교와 달리 그곳은 휴식 시간인데도 시끌벅적하지 않았다.예쁘장한 여자애들은 마치 잘 포장된 도자기 인형처럼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교정을 누비고 있었다.머리 위에서는 햇빛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지만 발밑에는 간밤의 비로 고인 물이 질퍽하게 있었다.그 길을 걸어가는 여자애들의 다리와 신발에는 쉽게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흙탕물이 자잘하게 튀어 있었다.느릿느릿 걸으며 관찰한 결과 권하윤은 여자애들이 아직 학생이지만 옷차림에 매우 신경 썼다는 걸 보아냈다.그리고 그 순간 여고에 들어온 소녀들은 재벌녀로 될 수 있다던 권희연의 말이 생각났다.‘확실히 그렇긴 하네. 하루 이틀은 별일 아닐지 몰라도 오랜 시간 부유한 삶을 경험하면 다시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할법하지.’아마도 이것이 바로 수많은 학생들이 권씨 가문의 민낯을 폭로하지 않는 데다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일 거다.허영심, 재벌가 며느리가 되면 잘살 수 있다는 허황한 꿈에 소녀들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썩어 문드러졌을지도 모른다.‘가는 길목마다 이렇게 미끼를 뿌려놨으니 그 많은 애들이 앞에 벼랑이 있는 줄도 모르고 하나둘 모여들었지.’생각하면 할수록 권하윤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이윽고 권씨 가문을 무조건 무너트려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그건 그녀를 위한 것뿐만
권효은은 권하윤에게 줄을 제대로 서라고 강요하고 있었다.이건 그녀가 잘나가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뒤에 민도준이라는 거물이 있기 때문이다.권미란과 권효은은 모두 민도준과의 합작을 원하기에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권효은의 핍박에 권하윤은 난처한 듯 고개를 숙였다.“저도 능력이 뛰어난 언니의 말을 듣고 싶지만 어머니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어요.”권효은의 편에 서기 싫은 게 아니라 설 수 없다는 식의 말, 참으로 의미심장했다.권효은도 그녀의 암시를 알아들었는지 전의 물음을 다시 반복했다.“그러니까 넌 아니라는 거지?”그녀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권하윤은 그 말에 숨은 뜻을 바로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더니 “네”라는 짤막한 대답 끝에 지금껏 권미란에게 협박당했던 일들을 모두 하소연했다.말하다 보니 감정이 올라왔는지 심지어 눈물까지 보이면서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해원에서 겪었던 일을 말하지는 않고 그저 병에 걸린 오빠를 위해 병원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사실만 털어놓았다.권하윤은 그녀의 울음소리에 귀찮았는지 눈살을 찌푸렸다.“알았어. 그 일은 내가 도와줄게.”“정말요? 정말 제 오빠가 어디 있는지 조사해 줄 수 있어요?”글썽글썽한 눈으로 바라보는 권하윤의 애절하고 나약한 모습은 상대의 경계심마저 허물어버렸다.“만약 언니가 제 가족에게 자유를 찾아 줄 수 있다면 언니 말은 뭐든 들을게요.”“응. 네가 우리 집안과 민 사장님과의 관계에 도움을 주면 네 가족이 함께 살 수 있게 도와줄게.”“언니, 고마워요.”-권효은은 손발이 어찌나 빠른지 오전에 권하윤과 약속하기 무섭게 오후에 바로 그녀 오빠가 있는 해외 개인 병원 주소와 사진을 보내왔다.창백한 얼굴로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는 이승우를 보자 권하윤은 참지 못하고 몇 번이고 사진을 들여다봤다.하지만 아쉽게도 사진은 한 장 뿐인 데다 감히 저장해 놓을 수 없어 머리에 깊이 새기고는 사진을 삭제할 수밖에 없었다.차에 앉아 있던 권하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권하윤이 스튜디오에 발을 들이기 바쁘게 옷을 갈아입은 고은지가 피팅룸에서 걸어 나왔다.순백의 오프숄더 드레스는 차갑고 도도한 그녀의 분위기를 더 극대화해 주었다.해당 스튜디오는 유명 브랜드의 한정판 취급하는 고급 스튜디오인지라 매 디자인당 한벌씩밖에 없다. 더욱이 점원이 고객별로 사이즈 수선까지 도맡아 하는 곳인지라 고은지 곁에는 사이즈 체크를 확인하는 점원이 따라붙었다.때마침 몸을 돌린 고은지는 눈앞에 나타난 권하윤을 보고 잠깐 놀란듯 하더니 이내 아무 일 없는 듯 점원에게 협조해 주었다.그리고 그때, 어색한 분위기를 파악한 민시영이 권하윤을 끌고 다른 구석으로 걸어갔다.“하윤 씨, 이 옷 하윤 씨가 입으면 진짜 예쁠 것 같은데 한번 입어보는 게 어때요?”등 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권하윤은 당장이라도 상대에게 삼켜질 것 같다는 두려움에 몸을 움츠렸다.이윽고 피팅룸에서 있었던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올라 이내 거절했다.“아니에요.”“하긴, 이 색 너무 화려한 것 같네요.”두 사람이 드레스를 고르고 있는 사이, 또 다른 점원이 양복 하나를 들고 수줍은 걸음으로 민도준 앞에 다가갔다.“고객님께서 선택한 양복 수선을 마쳤는데 한번 입어보시겠습니까?”“그러지.”민도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큰 키와 자유로운 분위기가 어우러져 매혹적인 분위기를 뿜어냈다. 그 때문에 어린 점원은 호흡이 흐트러져 멍하니 서 있었다.민도준은 아예 넋을 놓고 있는 그녀를 힐끗거리며 낮게 경고했다.“옷이 저절로 나한테로 날아 오기를 기다리나?”점원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눈치챈 듯 말을 더듬으며 거듭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됐어.”민도준은 고개를 돌려 열심히 드레스를 고르고 있는 권하윤을 힐끗 바라봤다.“제수씨? 나 좀 도와주지?”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스튜디오에 있던 사람들은 멍하니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그도 그럴 것이, 남녀의 정을 따지면 몇 발짝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 있는 약
수선을 거친 외투는 민도준의 몸에 딱 맞았다.평소 이렇게 격식을 차린 옷차림은 거의 입지 않는 민도준인지라 본래 지니고 있던 야생미가 쉽게 숨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귀족 같은 분위기와 억압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어우러져 신비하고도 아름다웠다.하지만 권하윤은 칭찬할 입장이 아니었고 고은지는 말수가 적은지라 결국은 옆에서 지켜보던 민시영이 입을 열었다.“오빠 진짜 멋있네.”거울에 비친 민도준은 뒤쪽을 흘깃 살피더니 피식 웃었다.“입바른 소리만 할 줄 안다니까.”“진심이거든. 그렇게 기분 좋으면 나랑 하윤 씨가 이따가 고른 옷도 오빠가 계산하던가.”“그래.”농담 섞인 민시영의 요구에 통쾌하게 대답한 민도준은 거울로 권하윤을 힐끗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제수씨가 나를 도와 넥타이까지 매줬는데, 감사 인사는 해야지 않겠어?”갑자기 호명 당한 권하윤은 흠칫 놀라 굳어버리더니 어색한 미소를 쥐어 짜냈다.“별말씀을요.”말속에 담긴 내용은 어렵사리 좋아진 분위기를 다시 가라앉혔다.그때 점원이 수선을 마친 드레스를 들고나오면서 고은지에게 다가갔다.“고객님, 입어 보세요. 또 불편한 곳 있으면 바로 수선해 드리겠습니다.”“아니에요. 바로 포장해 주세요.”고민도 걸치지 않고 내뱉은 그녀의 말에 점원은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방금 전 그들의 대화에서 이 드레스가 곧 있을 약혼식에 입을 드레스라고 들었는데 이토록 경솔하게 결정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고은지가 결정한 일에 점원이 뭐라 할 수는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점원은 드레스를 넣은 가방을 고은지에게 건넸다.“도준 씨, 저 또 준비해야 할 게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래.”고은지는 상징적으로 권하윤과 민시영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고는 드레스를 받아 들고 떠나버렸다.그리고 얼마 뒤, 민시영도 권하윤을 힐끗 살피더니 눈치껏 말을 꺼냈다.“저도 오후에 친구와 약속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나중에 드레스 고르면 도준 오빠더러 계산하게 해요.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저녁에 봐요.
권하윤은 순간 멍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지만 민도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두려우면서 애써 침착하려고 애쓰는 그녀를 바라봤다.“왜? 공씨 가문 가주가 온다는 데 싫어?”마치 시험하는 듯 물어 오는 민도준의 물음에 권하윤은 밀려오는 감정을 애써 삼켰다.“싫고 말고 할 게 뭐 있나요? 저랑 아는 사이도 아닌데 그분이 오든 말든 제가 싫어할 게 뭐 있다고요.”“그래?”그녀의 대답에 의미심장한 말만 남긴 민도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피팅룸을 향해 고개를 까닥거렸다.“그러면 갈아입어.”상대가 더 이상 시비를 걸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자 권하윤은 옷을 들고 피팅룸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문을 잠갔다.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그녀는 마치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주말에 공태준이 온다고?’그렇다는 건 그녀에게 4일이란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그 사이 그녀는 권미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했고 도망치지 못하더라도 가족을 먼저 피신시켜야 했다.이윽고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의 머리를 정리하더니 마음의 준비를 마친 뒤 피팅룸을 나섰다. 하지만 그녀가 나왔을 때 민도준은 밖에 없었다.“민 사장님께서 이미 계산을 마치고 떠나셨습니다. 이 옷은 어디 불편한 점이 있던가요?”대신 다가와 설명하는 점원의 말에 권하윤은 살짝 안도하며 시선을 거뒀다.“네, 허리가 조금 너른 것 같아요.”“네, 그러면 바로 수선해 드리겠습니다.”드레스 두 벌을 손에 든 채 쇼핑몰을 나온 권하윤은 차에 오르기 바쁘게 강수연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게 됐다.그녀는 오늘 저녁 고씨 가문을 초대했으니 집에 들르라는 당부를 함과 동시에 또 이것저것 생트집을 잡으며 그녀를 나무라기 시작했다.“내가 너더러 우리 승현이 좀 돌보라고 했잖니. 그런데 교통사고가 난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어쩜 애가 그리 무심한 거니? 만약 승현이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너한테 책임을 물을 테니까 그런 줄 알아!”그녀의 잔소리를 한참 동안 듣고 있다 보니 왠지 민도준이 손을
식탁 분위기는 한순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심지어 민도준 외에 그 누구도 웃지 못했다.민씨 가문 사람들 앞이면 모를까, 고씨 가문 사람들도 있는 앞에서 그 가문의 어르신인 고창호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행동은 그들에게 한없는 치욕을 안겨주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그 때문에 고씨 집안사람들 주위에는 칼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러던 그때, 아직 사회의 풍파를 겪어보지 못한 고선재는 할아버지가 모욕당하는 것에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우리 고씨 가문이 지금껏 민씨 가문과 수년간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과학기술 단지에 제공해 준 기술이 얼마나 많은지는 누구나 다 아는데,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시뻘겋게 상기된 얼굴만 봐도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에 반해 민도준은 매우 즐거운 모습이었다.“기술을 제공했다고? 이봐요, 고선재 씨. 본인 가문의 역사에 대해 너무 모르네.”“그게 무슨 뜻이죠?”민도준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고창호를 힐끗 바라봤다.“무슨 뜻이냐고? 고씨 가문의 칩 생산 기술과 발명들이 모두 우리 그 단명한 부모님한테서 훔친 거라고.”“어디서 그런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그건 분명 내 아버지가…….”“선제야.”고창호는 얼른 고선재를 막아서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그 당시 우리 진태가 자네 부모님과 대학 동기인 데다 친우였던 건 맞네. 더욱이 파트너 관계이기도 했었으니 고씨 가문 칩 생산 기술에 두 사람의 공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 어찌 됐든 앞으로 같은 식구가 될 사이인데 네것 내것이 어디 있나? 우리 두 집안 것이지. 자, 상철 형님과 민 사장 자네한테 한잔 올리지.”술잔을 부딪치는 소리에 얼어붙었던 분위기는 되살아났다.하지만 민도준이 끝까지 잔을 들지 않는 바람에 허공에 떠 있는 고창호의 손이 조금 뻘쭘하게 됐다.그 상황을 보고 있던 민상철은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민도준, 어르신이 술을 권하는데 잔도 안 들고 뭐 하는 거야?”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민도준은 끝
이미 수없이 받은 질문임에도 고은지는 여전히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잘 대해줘요. 오늘도 함께 드레스 고르러 갔었고요.”드레스라는 소리에 고창호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지난 2년 간 고생한 보람은 있네. 이제 제대로 된 짝을 만났구나. 넌 내 손녀다. 내 곁에서 자라지 않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잖니. 네가 잘 해내고 있다니 내가 다 기쁘구나.”“네.”“할아버지가 걱정해 주시는데 그 태도는 뭐니?”그녀의 무뚝뚝한 태도에 언짢았는지 옆에 있던 고진태가 갑자기 끼어들었다.하지만 고창호는 오히려 괜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이런 태도가 오히려 더 좋은 거지. 됐다. 나도 피곤하구나. 얼른 가서 주말에 있을 약혼 준비나 제대로 해 둬.”그 말에 고은지는 상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고는 뒤로 물러났다.이윽고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는 달빛을 밟으며 그림자처럼 사라졌다.-오늘 밤의 달빛은 유독 아름다웠지만 아쉽게도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개를 푹 숙인 채로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한 권하윤은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욕실로 들어가 하루 종일 누적된 피곤함을 물로 씻어냈다.하지만 식사할 때 고창호와 민도준이 대치하던 장면을 떠올리자 이내 깊은 생각에 잠겼다.솔직히 그녀는 일전에 고씨 가문이 칩 생산 기술로 유명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민도준의 부모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보아하니 고씨 가문도 좋은 사람들이 모인 곳은 아니네.’낮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닦던 권하윤은 거울 속 자기의 쇄골에 나 있는 빨간 자국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가운을 당겨 자국을 가렸다.그녀와 민도준은 스튜디오에서 헤어지고 난 뒤 계속 연락하지 않았다. 더욱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물론 공씨 가문 가주가 오니 제대로 준비하라던 그의 말이 자꾸만 떠올라 걱정스러웠지만 연락하지 않은 덕에 그 대화를 피할 수 있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자기 위로를 하며 밖으로 나온 그때, 갑자기 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