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권하윤이 스튜디오에 발을 들이기 바쁘게 옷을 갈아입은 고은지가 피팅룸에서 걸어 나왔다.순백의 오프숄더 드레스는 차갑고 도도한 그녀의 분위기를 더 극대화해 주었다.해당 스튜디오는 유명 브랜드의 한정판 취급하는 고급 스튜디오인지라 매 디자인당 한벌씩밖에 없다. 더욱이 점원이 고객별로 사이즈 수선까지 도맡아 하는 곳인지라 고은지 곁에는 사이즈 체크를 확인하는 점원이 따라붙었다.때마침 몸을 돌린 고은지는 눈앞에 나타난 권하윤을 보고 잠깐 놀란듯 하더니 이내 아무 일 없는 듯 점원에게 협조해 주었다.그리고 그때, 어색한 분위기를 파악한 민시영이 권하윤을 끌고 다른 구석으로 걸어갔다.“하윤 씨, 이 옷 하윤 씨가 입으면 진짜 예쁠 것 같은데 한번 입어보는 게 어때요?”등 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권하윤은 당장이라도 상대에게 삼켜질 것 같다는 두려움에 몸을 움츠렸다.이윽고 피팅룸에서 있었던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올라 이내 거절했다.“아니에요.”“하긴, 이 색 너무 화려한 것 같네요.”두 사람이 드레스를 고르고 있는 사이, 또 다른 점원이 양복 하나를 들고 수줍은 걸음으로 민도준 앞에 다가갔다.“고객님께서 선택한 양복 수선을 마쳤는데 한번 입어보시겠습니까?”“그러지.”민도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큰 키와 자유로운 분위기가 어우러져 매혹적인 분위기를 뿜어냈다. 그 때문에 어린 점원은 호흡이 흐트러져 멍하니 서 있었다.민도준은 아예 넋을 놓고 있는 그녀를 힐끗거리며 낮게 경고했다.“옷이 저절로 나한테로 날아 오기를 기다리나?”점원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눈치챈 듯 말을 더듬으며 거듭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됐어.”민도준은 고개를 돌려 열심히 드레스를 고르고 있는 권하윤을 힐끗 바라봤다.“제수씨? 나 좀 도와주지?”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스튜디오에 있던 사람들은 멍하니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그도 그럴 것이, 남녀의 정을 따지면 몇 발짝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 있는 약
수선을 거친 외투는 민도준의 몸에 딱 맞았다.평소 이렇게 격식을 차린 옷차림은 거의 입지 않는 민도준인지라 본래 지니고 있던 야생미가 쉽게 숨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귀족 같은 분위기와 억압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어우러져 신비하고도 아름다웠다.하지만 권하윤은 칭찬할 입장이 아니었고 고은지는 말수가 적은지라 결국은 옆에서 지켜보던 민시영이 입을 열었다.“오빠 진짜 멋있네.”거울에 비친 민도준은 뒤쪽을 흘깃 살피더니 피식 웃었다.“입바른 소리만 할 줄 안다니까.”“진심이거든. 그렇게 기분 좋으면 나랑 하윤 씨가 이따가 고른 옷도 오빠가 계산하던가.”“그래.”농담 섞인 민시영의 요구에 통쾌하게 대답한 민도준은 거울로 권하윤을 힐끗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제수씨가 나를 도와 넥타이까지 매줬는데, 감사 인사는 해야지 않겠어?”갑자기 호명 당한 권하윤은 흠칫 놀라 굳어버리더니 어색한 미소를 쥐어 짜냈다.“별말씀을요.”말속에 담긴 내용은 어렵사리 좋아진 분위기를 다시 가라앉혔다.그때 점원이 수선을 마친 드레스를 들고나오면서 고은지에게 다가갔다.“고객님, 입어 보세요. 또 불편한 곳 있으면 바로 수선해 드리겠습니다.”“아니에요. 바로 포장해 주세요.”고민도 걸치지 않고 내뱉은 그녀의 말에 점원은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방금 전 그들의 대화에서 이 드레스가 곧 있을 약혼식에 입을 드레스라고 들었는데 이토록 경솔하게 결정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고은지가 결정한 일에 점원이 뭐라 할 수는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점원은 드레스를 넣은 가방을 고은지에게 건넸다.“도준 씨, 저 또 준비해야 할 게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래.”고은지는 상징적으로 권하윤과 민시영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고는 드레스를 받아 들고 떠나버렸다.그리고 얼마 뒤, 민시영도 권하윤을 힐끗 살피더니 눈치껏 말을 꺼냈다.“저도 오후에 친구와 약속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나중에 드레스 고르면 도준 오빠더러 계산하게 해요.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저녁에 봐요.
권하윤은 순간 멍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지만 민도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두려우면서 애써 침착하려고 애쓰는 그녀를 바라봤다.“왜? 공씨 가문 가주가 온다는 데 싫어?”마치 시험하는 듯 물어 오는 민도준의 물음에 권하윤은 밀려오는 감정을 애써 삼켰다.“싫고 말고 할 게 뭐 있나요? 저랑 아는 사이도 아닌데 그분이 오든 말든 제가 싫어할 게 뭐 있다고요.”“그래?”그녀의 대답에 의미심장한 말만 남긴 민도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피팅룸을 향해 고개를 까닥거렸다.“그러면 갈아입어.”상대가 더 이상 시비를 걸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자 권하윤은 옷을 들고 피팅룸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문을 잠갔다.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그녀는 마치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주말에 공태준이 온다고?’그렇다는 건 그녀에게 4일이란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그 사이 그녀는 권미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했고 도망치지 못하더라도 가족을 먼저 피신시켜야 했다.이윽고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의 머리를 정리하더니 마음의 준비를 마친 뒤 피팅룸을 나섰다. 하지만 그녀가 나왔을 때 민도준은 밖에 없었다.“민 사장님께서 이미 계산을 마치고 떠나셨습니다. 이 옷은 어디 불편한 점이 있던가요?”대신 다가와 설명하는 점원의 말에 권하윤은 살짝 안도하며 시선을 거뒀다.“네, 허리가 조금 너른 것 같아요.”“네, 그러면 바로 수선해 드리겠습니다.”드레스 두 벌을 손에 든 채 쇼핑몰을 나온 권하윤은 차에 오르기 바쁘게 강수연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게 됐다.그녀는 오늘 저녁 고씨 가문을 초대했으니 집에 들르라는 당부를 함과 동시에 또 이것저것 생트집을 잡으며 그녀를 나무라기 시작했다.“내가 너더러 우리 승현이 좀 돌보라고 했잖니. 그런데 교통사고가 난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어쩜 애가 그리 무심한 거니? 만약 승현이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너한테 책임을 물을 테니까 그런 줄 알아!”그녀의 잔소리를 한참 동안 듣고 있다 보니 왠지 민도준이 손을
식탁 분위기는 한순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심지어 민도준 외에 그 누구도 웃지 못했다.민씨 가문 사람들 앞이면 모를까, 고씨 가문 사람들도 있는 앞에서 그 가문의 어르신인 고창호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행동은 그들에게 한없는 치욕을 안겨주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그 때문에 고씨 집안사람들 주위에는 칼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러던 그때, 아직 사회의 풍파를 겪어보지 못한 고선재는 할아버지가 모욕당하는 것에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우리 고씨 가문이 지금껏 민씨 가문과 수년간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과학기술 단지에 제공해 준 기술이 얼마나 많은지는 누구나 다 아는데,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시뻘겋게 상기된 얼굴만 봐도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에 반해 민도준은 매우 즐거운 모습이었다.“기술을 제공했다고? 이봐요, 고선재 씨. 본인 가문의 역사에 대해 너무 모르네.”“그게 무슨 뜻이죠?”민도준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고창호를 힐끗 바라봤다.“무슨 뜻이냐고? 고씨 가문의 칩 생산 기술과 발명들이 모두 우리 그 단명한 부모님한테서 훔친 거라고.”“어디서 그런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그건 분명 내 아버지가…….”“선제야.”고창호는 얼른 고선재를 막아서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그 당시 우리 진태가 자네 부모님과 대학 동기인 데다 친우였던 건 맞네. 더욱이 파트너 관계이기도 했었으니 고씨 가문 칩 생산 기술에 두 사람의 공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 어찌 됐든 앞으로 같은 식구가 될 사이인데 네것 내것이 어디 있나? 우리 두 집안 것이지. 자, 상철 형님과 민 사장 자네한테 한잔 올리지.”술잔을 부딪치는 소리에 얼어붙었던 분위기는 되살아났다.하지만 민도준이 끝까지 잔을 들지 않는 바람에 허공에 떠 있는 고창호의 손이 조금 뻘쭘하게 됐다.그 상황을 보고 있던 민상철은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민도준, 어르신이 술을 권하는데 잔도 안 들고 뭐 하는 거야?”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민도준은 끝
이미 수없이 받은 질문임에도 고은지는 여전히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잘 대해줘요. 오늘도 함께 드레스 고르러 갔었고요.”드레스라는 소리에 고창호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지난 2년 간 고생한 보람은 있네. 이제 제대로 된 짝을 만났구나. 넌 내 손녀다. 내 곁에서 자라지 않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잖니. 네가 잘 해내고 있다니 내가 다 기쁘구나.”“네.”“할아버지가 걱정해 주시는데 그 태도는 뭐니?”그녀의 무뚝뚝한 태도에 언짢았는지 옆에 있던 고진태가 갑자기 끼어들었다.하지만 고창호는 오히려 괜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이런 태도가 오히려 더 좋은 거지. 됐다. 나도 피곤하구나. 얼른 가서 주말에 있을 약혼 준비나 제대로 해 둬.”그 말에 고은지는 상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고는 뒤로 물러났다.이윽고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는 달빛을 밟으며 그림자처럼 사라졌다.-오늘 밤의 달빛은 유독 아름다웠지만 아쉽게도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개를 푹 숙인 채로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한 권하윤은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욕실로 들어가 하루 종일 누적된 피곤함을 물로 씻어냈다.하지만 식사할 때 고창호와 민도준이 대치하던 장면을 떠올리자 이내 깊은 생각에 잠겼다.솔직히 그녀는 일전에 고씨 가문이 칩 생산 기술로 유명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민도준의 부모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보아하니 고씨 가문도 좋은 사람들이 모인 곳은 아니네.’낮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닦던 권하윤은 거울 속 자기의 쇄골에 나 있는 빨간 자국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가운을 당겨 자국을 가렸다.그녀와 민도준은 스튜디오에서 헤어지고 난 뒤 계속 연락하지 않았다. 더욱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물론 공씨 가문 가주가 오니 제대로 준비하라던 그의 말이 자꾸만 떠올라 걱정스러웠지만 연락하지 않은 덕에 그 대화를 피할 수 있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자기 위로를 하며 밖으로 나온 그때, 갑자기 누
지난번 산에서 했을 때는 장소도 한정되어 있었고 또 중간에 다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기껏해야 잠깐 맛본 축에 속했다.하지만 지금은 넓은 공간과 충족한 시간이 있었기에 흥이 났는지 민도준은 권하윤에게 낮에 입어봤던 야릇한 드레스를 입도록 달랬다.그렇게 분위기에 휩쓸려 고생을 겪고 난 권하윤은 고급 드레스는 한 번만 입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민도준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눈에 들어온 건 권하윤이 자지 않고 스탠드 등을 보며 멍을 때리는 모습이었다.“피곤하지 않아?”“피곤해요. 그것도 엄청.”지칠 대로 지친 권하윤은 그의 손을 피하며 낮게 중얼거렸다.“그런데 왜 안 자?”“저…….”커다란 손이 머리를 덮으며 상념으로 터질 듯 부푼 머리를 살살 문질러 주자 권하윤은 눈을 내리깔았다.“저 서원 여고를 폭로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그 학교 재학생과 졸업한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지 모르겠어요.”민도준이 이미 그녀가 진짜 권하윤이 아니라는 걸 안 마당에 더 이상 권씨 가문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역시나 그녀의 말을 들은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흥미로운 듯 그녀의 머리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하윤 씨가 무슨 보살이라도 되는 줄 알아? 중생을 제도하게?”그의 비꼬는 어조에 마음이 상했는지 권하윤은 고개를 홱 돌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 삐졌소 하는 듯 축 처진 작은 얼굴을 보자 민도준은 재밌는 듯 그녀를 품속으로 끌어당기며 코를 잡고 흔들었다.“왜? 말도 못 해?”그의 말에 권하윤은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안타까워서 그러죠. 온갖 고생 끝에 겨우 평온한 생활을 누릴 수 있나 했을 텐데 학교 사건이 터지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2차 피해를 봐야 하잖아요.”“평온한 삶?”민도준은 피식 웃었다.“하윤 씨 정말 왜 이렇게 귀엽지?”분명 칭찬 같은 한마디였지만 권하윤은 그의 입속에서 나온 귀엽다는 단어가 좋은 의미가 아닐 거라고 느껴졌다. 언제나 그녀가 바보 같은 짓을 했을 때만
“그래?”민도준은 다정한 손길로 권하윤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줬다.“그러면 뭘 하고 싶은데? 둘째 작은 사모님?”“가당치도 않네요. 다섯째 작은 사모님도 할 자격이 없는데 둘째 작은 사모님이라니요.”권하윤은 눈을 내리깔며 허망한 듯 입꼬리를 끄집어 올렸다.그녀의 말에 민도준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그것도 모자라 이제 곧 권씨 가문과 함께 명예가 실추될 텐데. 안 그래? 하, 우리 제수씨 아주 자비가 없어.”웃을 듯 말 듯 한 그의 목소리에 권하윤은 등골이 오싹해 났다.하지만 권씨 가문 얘기는 자세하게 하고 싶지 않아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중요한 건 도준 씨가 고은지 씨랑 약혼한다는 걸 이미 모든 사람이 다 안다는 거죠.”“그렇네. 하마터면 그걸 잊을 뻔했군.”민도준은 권하윤의 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더 이상 고개를 숙이지 못하게 했다.“나 곧 약혼하는데 선물 같은 거 없어?”“…… 뭘 원하는데요?”두 상의 눈이 갑자기 마주쳤다.분명 가까운 거리였지만 권하윤은 상대의 눈에서 그 어떤 정서도 읽어낼 수 없었다.아마도 그 속에 말려들어 빠져나오지 못할까 봐 자세하게 볼 엄두를 내지 못한 걸 수도 있었다.밀려오는 압박감에 권하윤이 점차 무너지려고 할 때, 민도준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물건은 됐고 내 말 잘 들으면 선물 받은 거로 칠게.”갑자기 다정해진 목소리에 권하윤은 일순 말을 잃어 한참을 침묵하다가 겨우 대답했다.“알았어요.”“착하네.”민도준은 마치 고양이의 털을 매만지듯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손가락으로 빗질했다.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머리에 살짝씩 가해지는 힘에 노곤노곤해졌는지 권하윤의 눈꺼풀이 닫히려고 할 때, 민도준이 갑자기 그녀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살거렸다.“내 말 잘 듣겠다고 한 약속 잊지 마?”낮게 깔려 농담인 듯 경고 같은 그의 목소리에 권하윤의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이 쿵쾅거리며 북을 쳤다.이윽고 민도준이 뒤에서 끌어안을 때
목적에 도달한 권하윤은 숨을 죽인 채 권효은이 비밀을 얘기하길 기다렸다.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권효은은 그저 오후에 신입생들의 교외 확장 활동이 있으니 제국 호텔에 오라는 말만 내뱉고 전화를 끊어버렸다.스틱스는 경성 권세가들의 비밀의 섬이라면 제국 호텔은 경성 재벌가들의 화원이나 다름없다.재벌들의 대부분 파티가 그곳에서 열리며 수많은 재벌녀와 연예인을 볼 수 있는 곳.호텔에 도착한 권하윤이 문앞에 차를 대고 한참을 기다리자 승합차 한대가 나타났다.차에서 내린 여자애들은 모두 외모가 출중한 데다 호텔 로비를 걸어 들어갈 때 예의를 갖췄지만 눈에 드리운 흥분은 쉽게 감추지 못했다.하지만 그중 두 여자애는 눈에 띄게 침착해 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권하윤은 이내 그 둘이 학교에 입학한 지 벌써 3년이 되는 애들이라는 걸 알아챘다.이름은 각각 임주빈과 최설아였다.이번 행사도 두 사람이 앞장서서 다른 학생들을 이끌고 있었다.메이크업룸에서 열댓 명이나 되는 여자애들이 능숙하게 화장하고 드레스를 고르는 모습을 본 권하윤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답답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치장을 마친 그녀들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치맛자락을 든 채 숙녀의 걸음걸이로 연회장으로 들어갔다.사실 일전에 권효은은 권하윤에게 전화해 연회장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해두었다.아니나 다를까 권하윤과 여학생들이 연회장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주최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때, 권하윤과 함께 온 여자애들은 파티의 규모에 놀랐는지 낮은 소리로 의논하기 시작했다.“저 여자 그 유명한 배우 리나 아니야?”“와, 진짜네. 실물이 훨씬 낫네.”“야, 저기 봐. 저 사람 어느 유명 플랫폼 창시자 아니야?”“맞아. 대박, 여기에서 실물을 영접하다니.”재잘거리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두 선배의 표정은 그야말로 흥미로웠다.특히 임주빈은 줄곧 냉소를 짓고 있다가 옆에 있는 최설아가 눈빛을 보내자 그제야 표정을 숨겼다.그때, 최설아는 고개를 돌리며 다른 여학생들에게 명령했다.“그만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