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새 울음소리에 잠에서 깬 권하윤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보자 순간 멍해졌다.시선을 돌려 확인하는 그녀는 여전히 어제의 그 평평한 돌 위에 누워 있었고 밑에는 민도준의 외투가 깔려있었다.갓 일어나 여전히 비몽사몽한 상태인데 그때 마침 차가운 물방울이 얼굴에 떨어지는 바람에 그녀는 벌떡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하지만 민도준은 사람을 놀렸음에도 조금의 미안한 기색도 없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그녀를 깨웠다.“게으름 피우지 말고 얼른 가서 세수해. 바로 내려갈 테니까.”그가 가리킨 곳에는 작은 개울가가 있었다.차가운 물로 세수하는 순간 권하윤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물은 맑고 깨끗해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더욱이 세수하며 목을 축였을 때 이상한 맛이 나기는커녕 상쾌하기까지 했다.하산하는 과정은 등산 못지않게 시간이 들었다.그렇게 몇 시간을 걸어 내려 다시 차에 올라탄 순간 권하윤은 하룻밤뿐인데 한 세기가 흘러 지나간 듯 느낌이 새로웠다.차에 올라탄 민도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받게 되었는데 다른 대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나왔어요? 바로 갈게요.”라는 한마디는 그녀의 귓가에 콕 박혔다.그제야 그녀의 정신도 현실로 끌려 나왔다. 하지만 수많은 의문이 하나둘 뇌리에 들어와 조심스럽게 운전하는 민도준의 눈치를 살폈다.“도준 씨, 혹시 이따가 일 있어요?”“응.”무심코 내뱉은 민도준의 대답에 권하윤은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방금 나왔다고 하던데 뭐가 나왔다는 거죠?”“맞춰 봐.”퀴즈나 하고 앉아있을 마음이 없는 터라 권하윤은 대충 몇 가지 대답을 했지만 모두 틀렸다.“대체 뭐예요?”그제야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하윤 씨 검사 보고.”그 말을 듣는 순간 권하윤은 숨이 턱 막혀 무릎 위에 올려 놓았던 손을 그러쥐었다.“어제 나왔었잖아요?”“그렇지. 그런데 어제는 시간이 촉박해서 세밀한 검사를 맡기지 못했거든. 상세한 검사 결과를 받아보지
“음?”민도준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흥미 있는 듯 되물었다.“그러니까, 예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네요?”“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어제는 제가 실수했습니다. 쌍둥이일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틀린 결론을 낼뻔했습니다. 민 사장님의 신뢰를 저버려서 정말 죄송합니다.”송 닥터는 민도준의 의미심장한 말투에 식은땀을 닦아내며 사과를 거듭했다.하지만 민도준은 오히려 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송 닥터, 그렇게 자책할 거 없어요. 누가 이럴 줄 알았겠습니까?”그의 말은 송 닥터에게 가리키는 듯했지만 또 어찌 보면 다른 의미가 있는 듯했다.이윽고 손가락으로 보고서를 툭툭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권희연과의 혈연관계를 확인해 보라고 한 결과는 나왔나요?”“네, 나왔습니다.”송 닥터는 허둥지둥 보고서 한 장을 민도준 앞으로 내밀었다.“여기 있습니다.”공손하게 두 손으로 보고서를 받쳐 든 것도 모자라 그는 허리를 완전히 숙였다.“민 사장님 말씀이 맞더라고요. 권하윤 씨와 권희연 씨는 혈연관계가 없었습니다.”민도준은 그 결과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어디 보자. 두 사람 모두 권 여사 친자식이 아니죠?”“네…… 두 분 모두 권 여사님과는 혈연관계가 없었습니다.”솔직히 권미란의 DNA 샘플은 그가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손에 넣은 거다. 애초에 민도준이 인력과 물력을 낭비하면서 그런 의뢰를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그도 그럴 것이, 남의 자식을 그것도 둘씩이나 더 입양해 키우는 사람은 드물었으니까.그런데 결과가 나오고 나서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두 딸 모두 권미란의 자식이 아닌 것으로 나왔으니.부자들의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이 알 수 없다는 걸 그는 이 계기로 다시 한번 느꼈다.송 닥터가 한참 동안 생각하고 있던 그때 민도준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겨우 가려는 기미가 보이자 송 닥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얼른 그를 배웅했다.그런데 그때, 문 앞에 다다른 민도준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한민혁은 또다시 닭 모이 쫓듯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권씨 가문이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해도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완전히 똑같이 생긴 사람을 대타로 찾긴 어려웠을 거야. 그런데 그럴 거면 왜 둘을 한꺼번에 입양하지 않았을까?”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호두 하나가 그의 이마를 때렸다.“아야.”이윽고 민도준이 의자에서 일어나 앉으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쿡쿡 찔렀다.“머리에 좋은 것도 좀 먹어.”“하하, 그래. 고마워.”한민혁은 빨갛게 부어오른 이마를 감싸 쥔 채 이를 악물며 입꼬리를 올렸다.하지만 희한하게도 호두를 입에 넣고 씹는 순간 그는 정말로 답을 찾았다.‘아이를 친딸처럼 집에 녹아들게 하려면 권미란은 먼저 가짜 임신을 해야할 텐데 자기도 쌍둥이를 “낳을” 거란 걸 미처 몰랐을 테니까 당연히 하나라고 속였을 거고. 그런데 하나만 임신했다가 갑자기 둘을 낳아 의심을 살 수는 없었을 테니 당연히 하나만 데려갔겠지.’눈을 빙글빙글 돌리던 한민혁은 담배에 불을 붙이는 민도준을 힐끗 바라봤다.“저기, 만약 그렇다면 지금의 권하윤 씨는 가짜…….”한창 말하던 그는 갑자기 쏠려오는 눈빛에 하마터면 혀를 깨물뻔한 고비를 넘기고는 이내 말을 바꿨다.“아니, 그 2.0 버전 아니야? 형 어쩔 셈이야?”“뭐가 다른데?”아무렇지 않은 듯 반문하는 민도준의 반응에 한민혁은 입을 뻐금거렸다.‘하긴, 다를 건 없지. 권씨 가문은 민씨 가문에 며느리로 보내질 도구가 필요한 거고, 민씨 가문은 권하윤이라는 이름의 며느리가 필요하니까. 그 껍데기 속에 어떤 알맹이가 들어있는지는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지.’“그렇다면 왜 자꾸만 하윤 씨 신분에 그렇게 목맸던 거야?”민도준은 그의 말에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고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공태준은 언제 도착해?”“이번주 말, 형 약혼식에 아마 참석할 거야.”“하, 날짜 하난 기막히게 택하네.”담배 연기를 내뱉은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잘 준비해. 공태준도 그동안 고생 좀 했겠는데.”
자기가 전혀 내뱉은 적 없는 일이 노부인의 귀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안 공태준은 표정이 어두워졌다.공씨 가문의 메이드들은 고용인일 뿐만 아니라 사람을 감시하는 눈이기도 하다.그들이 있는 곳에 비밀이란 있을 수 없다.심지어 공태준이 본가에 살지 않는다 해도 여전히 그 수많은 사람의 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가주라는 두 글자는 그를 높은 자리까지 올려주었지만 그 대신 투명한 철창 속에 가둬두었다.한참을 침묵하던 공태준이 끝내 입을 여는 바람에 오래 지속된 침묵이 깨졌다.“민 사장 약혼식에 참석하는 김에 비즈니스도 상의할 겸 한동안 경성에 다녀오려고요.”“응.”자기가 들은 소식과 별반 다르지 않자 노부인은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었다.“민씨 가문도 큰 변화가 찾아올 날이 머지않았다. 게다가 민도준이 가문을 삼키게 될 가능성도 있고. 허니 미리 왕래해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구나. 다녀오거라. 나 대신 선물도 전해주고.”한참 동안 말하건 그녀는 눈꺼풀을 들며 공태준을 바라봤다.“참, 성은우가 곁에 없으니 불편할 텐데 내가 다른 애 하나 물색해 뒀다. 자기 구역이 아닌 곳에 가는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니.”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두운 곳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이 애가 앞으로 네 곁을 지킬 거다. 이름은 이남기이니 믿어도 된다.”“가주님, 처음 뵙겠습니다.”공태준은 자기한테 인사를 해오는 이남기를 무시한 채 상석에 앉은 노부인을 바라봤다.“네, 그러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태준아.”하지만 그가 안채를 나서려고 할 때 등 뒤에서 부름 소리가 들려왔다.곧이어 무게감 있는 엄숙한 목소리가 산처럼 그를 눌렀다.“공씨 가문의 모든 사람의 운명이 네 손에 달렸다. 우리를 실망시키지 말거라.”그 말이 떨어지고 얼마나 지났을까? 공태준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면서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었다.“네.”-오전까지 화창하던 하늘은 오후가 되자마자 가랑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가느다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가 흘러내리는 바람에 시야마저
권하윤이 잠에서 깰 기미를 보이자 민도준은 이내 손을 거두며 아이 달래듯 이불로 꽁꽁 싸맨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그녀가 순을 고르게 내뱉으며 다시 꿈나라에 들자 그제야 욕실로 걸어갔다.빗방울의 연주 소리에 너무 깊이 잠근 권하윤은 다음 날 아침 깨어났을 때도 현실이라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어젯밤 잠든 사이에 어렴풋이 민도준이 왔었던 것 같은데 현재 옆은 텅텅 비어있었다.‘설마 꿈인가?’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학교에 가서 권효은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간단히 준비를 마치고 별장을 나섰다.그녀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 마침 휴식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하지만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일반 학교와 달리 그곳은 휴식 시간인데도 시끌벅적하지 않았다.예쁘장한 여자애들은 마치 잘 포장된 도자기 인형처럼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교정을 누비고 있었다.머리 위에서는 햇빛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지만 발밑에는 간밤의 비로 고인 물이 질퍽하게 있었다.그 길을 걸어가는 여자애들의 다리와 신발에는 쉽게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흙탕물이 자잘하게 튀어 있었다.느릿느릿 걸으며 관찰한 결과 권하윤은 여자애들이 아직 학생이지만 옷차림에 매우 신경 썼다는 걸 보아냈다.그리고 그 순간 여고에 들어온 소녀들은 재벌녀로 될 수 있다던 권희연의 말이 생각났다.‘확실히 그렇긴 하네. 하루 이틀은 별일 아닐지 몰라도 오랜 시간 부유한 삶을 경험하면 다시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할법하지.’아마도 이것이 바로 수많은 학생들이 권씨 가문의 민낯을 폭로하지 않는 데다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일 거다.허영심, 재벌가 며느리가 되면 잘살 수 있다는 허황한 꿈에 소녀들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썩어 문드러졌을지도 모른다.‘가는 길목마다 이렇게 미끼를 뿌려놨으니 그 많은 애들이 앞에 벼랑이 있는 줄도 모르고 하나둘 모여들었지.’생각하면 할수록 권하윤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이윽고 권씨 가문을 무조건 무너트려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그건 그녀를 위한 것뿐만
권효은은 권하윤에게 줄을 제대로 서라고 강요하고 있었다.이건 그녀가 잘나가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뒤에 민도준이라는 거물이 있기 때문이다.권미란과 권효은은 모두 민도준과의 합작을 원하기에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권효은의 핍박에 권하윤은 난처한 듯 고개를 숙였다.“저도 능력이 뛰어난 언니의 말을 듣고 싶지만 어머니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어요.”권효은의 편에 서기 싫은 게 아니라 설 수 없다는 식의 말, 참으로 의미심장했다.권효은도 그녀의 암시를 알아들었는지 전의 물음을 다시 반복했다.“그러니까 넌 아니라는 거지?”그녀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권하윤은 그 말에 숨은 뜻을 바로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더니 “네”라는 짤막한 대답 끝에 지금껏 권미란에게 협박당했던 일들을 모두 하소연했다.말하다 보니 감정이 올라왔는지 심지어 눈물까지 보이면서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해원에서 겪었던 일을 말하지는 않고 그저 병에 걸린 오빠를 위해 병원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사실만 털어놓았다.권하윤은 그녀의 울음소리에 귀찮았는지 눈살을 찌푸렸다.“알았어. 그 일은 내가 도와줄게.”“정말요? 정말 제 오빠가 어디 있는지 조사해 줄 수 있어요?”글썽글썽한 눈으로 바라보는 권하윤의 애절하고 나약한 모습은 상대의 경계심마저 허물어버렸다.“만약 언니가 제 가족에게 자유를 찾아 줄 수 있다면 언니 말은 뭐든 들을게요.”“응. 네가 우리 집안과 민 사장님과의 관계에 도움을 주면 네 가족이 함께 살 수 있게 도와줄게.”“언니, 고마워요.”-권효은은 손발이 어찌나 빠른지 오전에 권하윤과 약속하기 무섭게 오후에 바로 그녀 오빠가 있는 해외 개인 병원 주소와 사진을 보내왔다.창백한 얼굴로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는 이승우를 보자 권하윤은 참지 못하고 몇 번이고 사진을 들여다봤다.하지만 아쉽게도 사진은 한 장 뿐인 데다 감히 저장해 놓을 수 없어 머리에 깊이 새기고는 사진을 삭제할 수밖에 없었다.차에 앉아 있던 권하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권하윤이 스튜디오에 발을 들이기 바쁘게 옷을 갈아입은 고은지가 피팅룸에서 걸어 나왔다.순백의 오프숄더 드레스는 차갑고 도도한 그녀의 분위기를 더 극대화해 주었다.해당 스튜디오는 유명 브랜드의 한정판 취급하는 고급 스튜디오인지라 매 디자인당 한벌씩밖에 없다. 더욱이 점원이 고객별로 사이즈 수선까지 도맡아 하는 곳인지라 고은지 곁에는 사이즈 체크를 확인하는 점원이 따라붙었다.때마침 몸을 돌린 고은지는 눈앞에 나타난 권하윤을 보고 잠깐 놀란듯 하더니 이내 아무 일 없는 듯 점원에게 협조해 주었다.그리고 그때, 어색한 분위기를 파악한 민시영이 권하윤을 끌고 다른 구석으로 걸어갔다.“하윤 씨, 이 옷 하윤 씨가 입으면 진짜 예쁠 것 같은데 한번 입어보는 게 어때요?”등 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권하윤은 당장이라도 상대에게 삼켜질 것 같다는 두려움에 몸을 움츠렸다.이윽고 피팅룸에서 있었던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올라 이내 거절했다.“아니에요.”“하긴, 이 색 너무 화려한 것 같네요.”두 사람이 드레스를 고르고 있는 사이, 또 다른 점원이 양복 하나를 들고 수줍은 걸음으로 민도준 앞에 다가갔다.“고객님께서 선택한 양복 수선을 마쳤는데 한번 입어보시겠습니까?”“그러지.”민도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큰 키와 자유로운 분위기가 어우러져 매혹적인 분위기를 뿜어냈다. 그 때문에 어린 점원은 호흡이 흐트러져 멍하니 서 있었다.민도준은 아예 넋을 놓고 있는 그녀를 힐끗거리며 낮게 경고했다.“옷이 저절로 나한테로 날아 오기를 기다리나?”점원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눈치챈 듯 말을 더듬으며 거듭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됐어.”민도준은 고개를 돌려 열심히 드레스를 고르고 있는 권하윤을 힐끗 바라봤다.“제수씨? 나 좀 도와주지?”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스튜디오에 있던 사람들은 멍하니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그도 그럴 것이, 남녀의 정을 따지면 몇 발짝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 있는 약
수선을 거친 외투는 민도준의 몸에 딱 맞았다.평소 이렇게 격식을 차린 옷차림은 거의 입지 않는 민도준인지라 본래 지니고 있던 야생미가 쉽게 숨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귀족 같은 분위기와 억압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어우러져 신비하고도 아름다웠다.하지만 권하윤은 칭찬할 입장이 아니었고 고은지는 말수가 적은지라 결국은 옆에서 지켜보던 민시영이 입을 열었다.“오빠 진짜 멋있네.”거울에 비친 민도준은 뒤쪽을 흘깃 살피더니 피식 웃었다.“입바른 소리만 할 줄 안다니까.”“진심이거든. 그렇게 기분 좋으면 나랑 하윤 씨가 이따가 고른 옷도 오빠가 계산하던가.”“그래.”농담 섞인 민시영의 요구에 통쾌하게 대답한 민도준은 거울로 권하윤을 힐끗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제수씨가 나를 도와 넥타이까지 매줬는데, 감사 인사는 해야지 않겠어?”갑자기 호명 당한 권하윤은 흠칫 놀라 굳어버리더니 어색한 미소를 쥐어 짜냈다.“별말씀을요.”말속에 담긴 내용은 어렵사리 좋아진 분위기를 다시 가라앉혔다.그때 점원이 수선을 마친 드레스를 들고나오면서 고은지에게 다가갔다.“고객님, 입어 보세요. 또 불편한 곳 있으면 바로 수선해 드리겠습니다.”“아니에요. 바로 포장해 주세요.”고민도 걸치지 않고 내뱉은 그녀의 말에 점원은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방금 전 그들의 대화에서 이 드레스가 곧 있을 약혼식에 입을 드레스라고 들었는데 이토록 경솔하게 결정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고은지가 결정한 일에 점원이 뭐라 할 수는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점원은 드레스를 넣은 가방을 고은지에게 건넸다.“도준 씨, 저 또 준비해야 할 게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래.”고은지는 상징적으로 권하윤과 민시영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고는 드레스를 받아 들고 떠나버렸다.그리고 얼마 뒤, 민시영도 권하윤을 힐끗 살피더니 눈치껏 말을 꺼냈다.“저도 오후에 친구와 약속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나중에 드레스 고르면 도준 오빠더러 계산하게 해요.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저녁에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