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시죠.”“우리 제수씨 말인데요, 예전에 해원에 갔던 적 있나요?”살짝 웃으며 꺼낸 민도준의 말에 권미란의 표정은 알게 모르게 굳어버렸다.‘갑자기 이건 왜 묻지? 설마 뭔가 알게 됐나? 아니면, 권하윤이 알려줬나?’‘아니야, 그럴 리 없어. 민 사장이 공씨 가문 가주와 아는 사이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인데 권하윤이 자기의 허점을 쉽게 드러낼 리 없어. 더욱이 오빠도 내 손에 있는데.’몇 초도 안 되는 사이, 권미란은 뭔가 결심을 내린 듯 고개를 저었다.“우리 집 애들은 어릴 적부터 경성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게다가 지금 세상이 무서운지라 그 애들을 밖에 내보낸 적 없고요.”“아하, 그러시구나-”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말투에 불안감이 일순 권미란을 덮쳤다.“권 여사님, 제가 누군지 아시죠?”“당연하죠. 민 사장님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이 경성에 누가 있겠습니까?”“하, 난 또 모르시는 줄 알았지 뭡니까.”분명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마치 상대의 껍질을 벗겨낼 것처럼 잔인하고 악랄했다.“그래서 저를 속이는 줄 알았는데.”분위기는 갑자기 변하더니 편안하던 공기 속에 찬 바람이 불어 들어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었다.다행히 권씨 가문을 관리하면서 쌓은 내공이 있는지라 권미란은 이러한 압박에도 이내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마음을 다잡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넷째는 몸이 안 좋아 제가 어릴 때부터 옆에 끼고 살다시피 했습니다. 더욱이 제 말은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는 아이이고요. 경성에 있으면서 민 사장님도 소문을 들었을 텐데요.”그녀가 이토록 대담하게 권하윤에게 가짜 신분을 만들어 줄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진짜 딸 덕분이었다.만약 없는 사람을 만들어 내면 바로 들통이 날 테지만 권하윤은 원래 있던 사람을 대신한 거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녀의 이름을 조사한다 해도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이 모든 걸 계산한 권미란은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렸다.“혹시 넷째가 민 사장님의 심기라도 거슬렀나요? 그렇다면 걱
‘전신 검사…….’그 네 글자를 듣는 순간 권하윤은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머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가해지면서 그녀의 주의를 끌어왔다.“선천적으로 심장이 나쁘다고 하던데, 몸조리 잘해야 하지 않겠어?”“그건 어릴 때 앓았던 병일 뿐이에요. 지금은 말끔히 나아서 번거롭게 검사할 필요 없어요.”“어떻게 그래.”권하윤이 조심스럽게 건넨 의견을 완전히 무시한 채, 민도준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뒷덜미를 받쳐 들었다.“내가 특별히 하윤 씨 진료 기록도 열람 신청했는데. 본인이 안 가면 내가 헛수고한 게 되잖아.”“…….”‘그래서 들어간 지 한참이 되어서야 나온 거였어? 권미란과 대화하는 틈에 이런 일까지 준비하려고?’점차 창백해지는 권하윤의 낯빛을 보자 민도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녀의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운전해.”이런 상황까지 왔으니 도망치는 건 말도 안 됐다.때문에 권하윤은 어색하게 손을 들어 핸들을 잡더니 기계적으로 운전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잔뜩 긴장한 그녀에 반해 민도준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심지어 창문을 절반 내리고 여유롭게 담배를 피우기까지 했다.그렇게 도착한 병원.차에서 내리는 순간 권하윤의 손바닥은 이미 흥건하게 젖어있었다.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티슈를 뽑아 닦아주는 섬세함까지 보여줬다.그리고 정교한 무늬가 있는 티슈로 권하윤 손바닥을 느긋하게 문지르며 재밌는 듯 입을 열었다.“몸이 약하다는 게 정말인가 보네? 운전하는 데도 이렇게 피곤해하다니. 앞으로 운전을 맡기지도 못하겠네?”다정한 말투에 두려움이 권하윤을 덮쳐왔다.그 다정함은 마치 그녀에게 차려진 마지막 만찬인 것만 같았다. 풍성하지만 씹을수록 괴롭기만 한 느낌 말이다.그때, 그녀의 손을 다 닦은 민도준이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빛을 교환하며 싱긋 웃었다.“내려.”뻣뻣하게 차에서 내려 끌려가다시피 병원에 들어선 권하윤은 복도를 지나면서 수만 가지 생각을 했다.‘아무리 완쾌했다고 해도 수치는 거
권하윤은 기뻐할 겨를도 없이 어떻게 하면 민도준을 붙잡아 둘 수 있나 하는 생각에 잠겨있었다.하지만 그녀가 생각할 새도 없이 어느새 권희연의 병실 문 앞에 도착했다.“이따가 데리러 올 테니까 들어가 봐.”“같이 안 들어가요?”민도준이 가려고 하자 권하윤은 무의식중에 그를 붙잡았다.그런 그녀의 반응에 민도준은 피식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낮게 속삭였다.“나도 들어가라고? 언니 앞에서 약혼자 형과 어떻게 바람피우는지 보여주려고?”“아니…….”하지만 한마디가 채 끝나기도 전에 병실 문이 열리더니 도시락을 든 로건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민도준을 보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민 사장님? 사장님도 희연 씨 보러 오신 겁니까?”“아니, 너 보러.”로건의 어리버리한 모습에 민도준은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하하, 고마워요…….”그의 말에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로건은 머리를 긁적이며 헤실 웃었다.하지만 그때.“블랙썬에서 하도 얼굴을 보기 어려워서 말이지.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러 왔어.”“…….”덧붙여진 민도준의 말에 이 모든 게 그의 착각이었다는 걸 알아챈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민 사장님, 죄송합니다. 바로 돌아가겠습니다.”“됐어.”민도준은 권하윤을 힐끗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먼저 우리 제수씨를 안으로 데려가. 심장이 안 좋다니 어디 도망가지 못하게 잘 감시하고.”“네, 알겠습니다. 하윤 씨, 들어오세요.”로건은 민도준의 말에 대답하기 바쁘게 권하윤을 안으로 모셨다.권하윤은 예상을 벗어난 상황에 입을 뻐금거리며 민도준을 만류하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권하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로건을 따라 병실로 들어가는 것뿐이었다.고작 몇 시간이 흘렀지만 권희연은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그녀는 베개를 등에 받치고 침대에 기댄 채 무릎 위에 핫핑크색 목도리를 덮고 있었으며 산처럼 쌓인 과일을 손 옆에 두고 있었다.이윽고 권하윤이 들어오자 손에
민도준의 말에 의사는 잠깐 멈칫하더니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환자분한테 쌍둥이 자매가 있나요?”“그걸 몰라서 묻잖습니까.”민도준은 웃고 있었지만 의사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아, 아까는 그런 상황을 고려하지 못했네요. 쌍둥이가 맞는지 확인해 보려면 더 정밀한 검사를 진행해 봐야 하는데 내일쯤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그래요.”민도준은 옷에 떨어진 담뱃재를 툭툭 털며 일어나 의사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러면 부탁드리겠습니다.”“부탁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조심히 가세요.”-아래층 병실.권희연은 권씨 가문을 무너트리자는 권하윤의 요구에 응하고 나서 자기가 지금껏 겪었던 일들을 하나둘 설명하기 시작했다.그 때문에 검사 결과에만 신경 쓰던 권하윤도 점차 그녀의 말에 집중력이 끌려왔다. 그렇게 알게 된 사실도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만했다.권씨 가문에서 설립한 서원 여고는 대외적으로 우아하고 지적인 여성 교육에 힘쓰는 여성들의 천당이라고 알려졌다.더욱이 서원 여고를 졸업한 학생들 중 부자와 결혼하거나 외국 황실에 시집간 학생들도 허다하고 말이다.이건 아직 세계관을 설립하지 않은 소녀들에게 현대판 신데렐라가 될 수 있는 허황한 꿈을 심어주기엔 충분했다.하지만 서원 여고도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그 문턱이 매우 높은 건 물론, 입학 원서를 통과한 뒤 1년 정도의 고찰을 통과해야지만 정식으로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하지만 모든 심사를 통과하고 나면 학비를 면제받을 뿐만 아니라 고액의 보조금도 받을 수 있고 또 모두에게 진정한 재벌녀가 될 수 있게끔 보장해 준다.그 사이 등급 테스트를 통해 부동한 레벨의 파티에 참석해 일반인들은 평생 가도 만나지 못할 유명 인사들도 만날 수 있다.이게 바로 서원 여고가 밖에 알려진 이미지이다.심지어 권희연조차도 20년 동안 학교에서 교육받으면서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권효은을 찾으러 교장 사무실에 갔다가 그녀와 다른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문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던 권희연은 갑자기 나타난 민도준에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하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입을 열려는 순간, 민도준이 갑자기 손을 뻗어 권하윤의 허리를 야릇하게 끌어안았다.“뭔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정신이 팔려 있어?”“민 사장님.”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권하윤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놀라 가슴을 미처 가라앉히지도 못한 채 짤막하게 소리쳤다.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권희연도 마치 적이라도 만난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민 사장님, 하윤은 민 사장님의 제수씨잖아요, 그러면 안 돼요.”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면서도 동생이 자기와 같은 노리개로 전락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모습이었다.이에 권하윤은 자기 허리를 감싸고 있던 민도준을 얼른 밀어버린 채 권희연에게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언니, 걱정할 거 없어. 나랑 민 사장님, 사적으로 친분 있는 가까운 관계야.”권하윤의 단어 선택에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협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아주 가까운 관계긴 하지.”“…….”두 사람의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권희연은 넋을 잃은 채 그간 있었던 일들을 회상했다. 그리고 그제야 두 사람이 진작에 얽힌 관계라는 걸 알아차렸다.하지만 그게 좋은 징조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권하윤을 바라봤지만 민도준이 옆에 있는 바람에 하려던 말을 다시 목구멍으로 삼켜버렸다.그런 그녀를 보면서도 권하윤은 다른 걱정이 떠올라 푹 쉬라는 당부만 하고 병실을 나섰다.그리고 복도로 나온 뒤, 민도준의 눈치를 힐끗힐끗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왜 내려왔어요? 혹시 결과가 나왔나요?”“나왔어.”민도준의 의미심장한 표정에 약 2초간 숨죽이고 있던 권하윤은 그가 더 이상 말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애써 침착하며 되물었다.“결과는 어때요? 저 심장병 다 나았대요?”하지만 조심스러운 물음에 민도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지금껏 그녀를 이토록 꼼꼼하게 보지
‘데이트?’그녀와 민도준은 보통 데이트 같은 쓸데없는 행위는 건너뛴 채 몸 정만 나누는 관계일 뿐이다.그렇다고 데이트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순간 그 단어에 권하윤은 강력한 위화감이 들었다.낯설고 어색했다.심지어 민도준이 한가하게 그녀와 데이트할 여유가 있다고도 생각되지 않았다.이에 은연중 거절 의사를 밝혔다.“오늘 하루 종일 바삐 보냈으니 얼른 돌아가서 휴식하는 게 어때요?”“어떻게 그래.”능청스럽게 대답한 민도준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하윤 씨의 건강이 이렇게 좋아졌다는데 제대로 축하해야 하지 않겠어?”‘또 건강 얘기.’그 화제에 권하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도준 씨가 원한다면 그래야죠.”‘그래봤자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거나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것밖에 더 있겠어?’권하윤은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차는 그녀가 생각한 것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시야에 보이던 고층 건물이 모두 울창한 나무로 변할 때쯤, 권하윤은 이게 데이트가 아니라 생매장이 될 수도 있겠다는 무서운 생각이 덜컥 들었다.그리고 낮은 단층집마저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그녀의 쿵쾅거리는 심장도 점차 정점을 치솟았다.그러던 그때, 차가 갑자기 급코너링하며 빙 도는 바람에 권하윤의 몸도 따라서 휘청거렸다. 얼른 손잡이를 잡은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운전석을 바라봤다.“천천히 운전하면 안 되나요?”“또 천천히 하라고?”민도준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리더니 상대의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그 때문에 권하윤의 몸은 앞으로 쏠리며 하마터면 안전벨트에 조여 숨이 멎을뻔했다.“도착했어.”남자의 말에 창밖을 내다본 권하윤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마을 하나 보이지 않는 허황한 황무지가 눈에 들어온 순간 그대로 버티고 차에서 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민도준이 그녀보다 한발 빠르게 차 문을 열고 내리며 심지어 조수석 문까지 열어주는 바람에 운
유독 거센 산바람이 두 사람의 옷자락을 스쳐대는 바람에 자꾸만 펄럭거렸고, 반쯤 떠 있는 발이 바닥을 찾으려고 허우적댔지만 그녀를 미는 힘은 전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허공에 둥둥 뜬 채 느껴지는 중력감과 허리를 끌어당기는 힘이 서로 대조를 이루어 공포감에 휩싸인 권하윤은 필사적으로 민도준의 팔을 두드렸다.“빨, 빨리 놓으세요.”하지만 민도준은 그녀의 긴장감을 무시한 채 장난기 어린 말투로 되물었다.“놓으라고? 정말 놓을까?”몸이 뒤로 젖혀 민도준의 팔에 의지해 있던 그녀는 그제야 민도준이 놓는 순간 절벽 아래로 떨어질 거라는 걸 직감했다.하지만 그걸 자각하는 순간 허리를 두르고 있던 손이 일순 풀렸다.저도 모르게 “아”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기 무섭게 풀어졌던 팔이 다시 그녀의 허리를 조여오며 다시 안쪽으로 끌어들였다.이윽고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재밌어?”하마터면 저승의 문턱을 넘을뻔한 권하윤은 숨을 헐떡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때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바람에 흩어졌다.“내가 손 놓으면 제수씨 죽어.”권하윤은 대답할 기력도 없었다. 번지점프 체험보다 더 두려운 현실에 모공 하나하나에 전율이 흘렀고 솜털마저 쭈뼛쭈뼛 고개를 들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녀는 동아줄이라도 잡는 것처럼 민도준의 팔을 꽉 붙잡았다.그러던 그때. “저기 봐. 동림 부지 이미 재개발 들어갔어.”민도준은 짖궂게 그 자세 그대로 권하윤에게 말을 걸었다.하지만 권하윤은 그곳을 감히 바라볼 수 없었다. 다음 순간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온 정신이 절벽에 걸터 선 자기 발에 쏠려 있었다.그런데 민도준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강제로 돌렸다.그리고 그 순간, 노란 바리게이트에 둘러싸인 시공 현장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그 규모에 권하윤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일전에 동림 부지에 대해 어느 정도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심지어 이 부지를 빼앗으려고 사람들이 암투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얼마나 벌였는지도 대충 건너 들었다.그런데
성은우의 일이 없었다면 권하윤은 그나마 용기라도 조금 가질 수 있었을 거다.하지만 그런 경험을 이미 한 그녀로서는 민도준에게 피도 눈물도 심지어 연민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시간을 미루는 것뿐이었다.본인이 죽는 건 두렵지 않았지만 가족은 살아야 하니까.이 생각에 권하윤은 민도준을 꼭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저를 믿지 못하겠다면 손 놓으세요.”공기가 삽시간 고요해지더니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왜? 이대로 죽으려고? 아니면 넘어가 달라고 협박하는 건가?”한참 동안 긴장한 권하윤은 마치 오랜 시간 당겨져 탄력을 잃은 고무줄처럼 축 늘어진 채로 눈을 감았다.“도준 씨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거겠죠.”정적이 다시 밀려왔다.어둠이 시간을 삼켜 몇분이 흘렀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그러던 그때, 민도준이 갑자기 손을 놓아버렸다.갑작스러운 상황에 권하윤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절벽 밖으로 기울었다.하지만 그 찰나, 민도준은 그녀를 잡아 안쪽으로 끌어들였다.이번에 그녀가 선 위치는 안쪽이었다.그렇게 두 발을 바닥에 붙이고 섰을 때, 권하윤은 그제야 식은땀에 등이 흥건하게 젖었다는 걸 자각했다.가쁜 숨을 몰아쉴 때, 그녀는 자기 몸에 떨어진 뜨거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다행히 어두워진 하늘 때문에 상대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권하윤은 오히려 민도준을 직면할 필요 없다는 사실에 적절한 때 내려진 이 어둠이 감사했다.그렇게 한참 동안 숨을 돌린 권하윤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들이 걸어온 길을 돌아봤다.“우리 어떻게 내려가요?”“내려갈 필요 뭐 있어? 여기 좋잖아.”수려한 풍경에 아름답기만 하던 산은 어둠이 깃들자 음산하게 변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오늘 여기서 묵어요?”민도준은 매끄럽고 평평한 돌 위에 털썩 앉으며 권하윤을 바라봤다.“이리 와.”그의 모습이 권하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앞으로 다가갔다.하지만 그의 옆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