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는 공태준의 말에 깜짝 놀랐다.어찌 됐든 문태훈은 그래도 가주 곁을 오랫동안 지키고 있던 사람이었기에 버린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아 조심스럽게 되물었다.“가주님 뜻은…….”“그래.”비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혹시 문태훈 씨를 의심하는 겁니까? 제가 다시 물어볼까요?”“필요 없어.”공태준의 말투는 무덤덤했다.“눈 한쪽이 멀었으니 이젠 쓸모없어졌어.”“네, 가주님.”비서가 나가자 공태준은 자료를 다시 펼치며 사진 속 익숙한 얼굴을 손으로 살살 매만졌다.그러던 그때 갑자기 손끝이 아려오더니 작은 상처 사이로 피가 송골송골 맺혔다.얇고 부드럽기만 하던 종이가 살을 베어 가장 연약한 속살을 드러낸 거다.그 순간 그의 귓가에는 잔뜩 겁을 먹은 듯한 당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기억을 고스란히 접어둔 그는 엄지로 검지를 쓱 문질렀다. 일순 약한 통증이 점점 퍼져 가슴을 파고들었다.-블랙썬.연약한 여인은 몸을 한껏 움츠린 채 휴게실 침대에 누워있었고 꼭 감은 두 눈 사이로 눈물이 계속 흘러 나와 붉은 뺨을 적셨다.“제…… 제발요…… 은우 죽이지 마세요…….”“…….”“민혁 형님, 하윤 씨 왠지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까?”로건은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와 마찬가지로 쪼그려 앉아 있는 한민혁을 바라봤다.그리고 그의 잇새로 흘러나오는 물음에 한민혁은 어이없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고맙네. 네가 말 안 했더라면 이상한 줄 몰랐겠어.”“하하, 그렇죠?”“…….”한민혁은 로건의 말에 대꾸하기도 귀찮은 듯 고개를 돌려 권하윤을 바라봤다.보아하니 열이 펄펄 끓는 것 같아 민도준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권하윤이 하필이면 잠꼬대마저 성은우의 이름을 불러대는 바람에 한민혁은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만약 민도준이 이걸 들으면 또 발칵 뒤집힐 게 뻔했으니까.하지만 계속 시간을 끄는 것도 방법이 아니기에 한도준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끝내 민도준에게 말하기로 결심했다.이윽고 그는 심심한 듯 손장난을 치는 로건에게로 눈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권하윤의 열이 내려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입안은 씁쓸하고 눈가는 시큰거리고 머리는 터질 듯 아파 오더니 결국은 쓰러지기 전의 기억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은우…….’그녀는 이불을 들추며 일어났지만 눈과 머리가 어지러운 탓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로 주저앉아 버렸다.하지만 곧 닥쳐올 고통을 예측하기라도 한 듯 눈을 질끈 감은 그때 팔 하나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더니 곧이어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죽기라도 하려고 그래? 여긴 침대지 옥상이 아니야. 뛰어내려도 죽지 못해.”권하윤은 그의 접촉이 역겹도록 싫어 몸을 버둥대며 빠져나오려고 애썼다.“은우는요? 저 은우 보러 갈래요!”민도준은 그의 저항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듯 그녀를 가볍게 침대 위로 던져버리고는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았다.“죽었어.”이윽고 손목에 걸린 시계를 힐끗 보며 말을 이어갔다.“지금쯤이면 아마 저승 문턱을 넘었을 거야.”다시 침대에서 내리려던 권하윤은 일순 정지한 듯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들며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은 채로 민도준을 바라봤다.“지금 저 놀리는 거죠? 은우 아직 살아있죠?”민도준은 피식 웃더니 손아귀로 그녀의 턱을 잡으며 위로 들었다.창백한 그녀의 얼굴은 아직 남아있는 미열로 붉게 물들었고 눈물에 젖은 눈동자에는 당황함이 담겨 있었다.그때 살짝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내 곁에 그렇게 오래 있었으면서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굴까? 내가 남의 사정 봐주는 사람으로 보여? 더욱이 상대는 내 구역을 침범한 개새끼인데?”“…….”권하윤은 민도준의 눈빛에서 장난기를 찾고 싶었지만 깊고 어두운 그의 눈동자에는 오직 서늘함만 담겨 있었다.결국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한 그녀의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구멍을 타고 나오는 목소리는 갈라질 대로 갈라져 있었다.“시신은 어디 있어요?”“시신? 개밥으로 줬어.”민도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가벼웠다
격렬한 반항으로부터 점점 무감각해진 권하윤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절망에 빠진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격렬한 움직임 때문에 땀에 젖은 머리는 계속 움찔거리며 쉬지를 못했다.허리를 조여오는 감각은 당장이라도 그녀의 허리를 끊어버릴 것만 같았고 몸에 전해지는 고통도 가슴의 고통을 덮지 못했다.그렇게 흐리멍덩해진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죽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쏴-”샤워기의 뜨거운 물이 그녀의 몸에 흩뿌려질 때 침대 시트에 쓰려 빨갛게 된 등줄기가 움츠러들었다.하지만 그걸 끝으로 그녀는 감각이 마비되기라도 한 듯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씻겨져 다시 침대로 옮겨졌다.광란 뒤에 찾아온 평화는 마치 활활 타오르던 불길 속에서 남겨진 잿더미 같았다.잠시 지속된 고요함은 바람과 풀의 움직임에 쉽게 깨졌고 날숨 한 번으로 잿더미가 된 심장이 흩날리듯 움직이며 어둠만 남은 이 순간을 상기시켰다.한참의 침묵 끝에 나직한 목소리가 침대에서 울려 퍼졌다.“저 집에 갈래요.”담배를 쥔 민도준의 손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입가에 갖다 댔다.“내일 가.”“저 집에 갈래요.”권하윤은 그를 등진 채 한 번 또 한 번 중얼거렸다.“저 집에 갈래요. 지금 당장 돌아가고 싶어요.”새벽 3시.어둡고 고요한 밤, 검은색 부가티가 바람을 가르며 길 위를 질주했다.조수석에 앉은 권하윤은 자기 것이 아닌 외투로 몸을 두른 채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뒷모습만 남겼다.모퉁이를 돌 때 민도준은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얇은 몸뚱아리를 한껏 움츠린 채 조용하게 앉아 있는 그녀를 본 순간 그의 입가에는 비웃음 섞인 미소가 번졌다.‘진짜 죽어버리면 신경 쓸 필요도 없겠는데.’길게 이어진 침묵 속에서 차는 끝내 목적지에 도착했다.죽어도 집에 오겠다며 길길이 날뛰던 그녀의 모습을 돌이켜 보니 도착하기 무섭게 도망치듯 달려 나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차가 멈춰 선지 한참이 지났지만 권하윤은 여전히 그에게 등을 보인 채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민도준은 순간
창가에서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민도준은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려 침대 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한민혁은 계속 애원할 뿐이었다.“여기가 하윤 씨 집이 아니면 누구 집이에요? 그렇다고 우리 집에 데려갈 수는 없잖아요. 더 이상 주사 안 맞으면 그때는 진짜 시체를 집으로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고요.”여전히 협조하지 않는 권하윤의 모습에 한민혁은 답답했지만 그렇다고 강요할 수는 없어 민도준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는 순간 창가에 있어야 할 사람이 말도 없이 침대 옆에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라 하마터면 바늘로 자기 입을 찌를 뻔했다.“도준 형?”민도준은 아무 말 없이 헛소리하는 여인을 빤히 내려봤다.그녀는 몸을 조그맣게 웅크리고 가냘픈 목소리로 끊임없이 한마디를 반복했다.“여기 우리 집 아니야, 우리 집 갈래…….”너무 오래 울어 그런지 그녀의 눈꼬리는 피가 난 것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너무 짓씹어 대 퉁퉁 부은 입술 사이로 계속 애절한 한마디를 뱉어냈다.한참을 듣고 있던 민도준은 허리를 숙여 큰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덮었다.이마를 따라 뒤로 쓸어내리는 힘은 그나마 부드럽다고 할 수 있었다.그러다가 권하윤의 울음소리가 조금 약해졌을 때쯤 사람을 현혹하는 듯 달콤하고 낮은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어디 가고 싶어?”이 물음을 들은 한민혁은 어안이 벙벙해졌다.‘도준 형 귀가 잘 안 들리나? 아까부터 집에 가고 싶다고 온종일 중얼거린 사람한테 어디 가고 싶냐니?’역시나 권하윤은 아까의 말을 반복했다.“집에 갈래, 집에 갈래…….”“어느 집?”퉁퉁 부은 눈꺼풀이 가는 틈을 만들며 조금씩 떠졌다. 머리는 여전히 무겁고 어지럽기만 했다.하지만 이마 위에 덮인 손은 그녀에게 가족의 사랑을 받던 그때로 돌아갔다는 착각을 심어주었다.힘없는 손을 들어 상대의 따뜻한 손끝에 닿는 순간 권하윤은 무너지듯 펑펑 울기 시작했다.“오빠, 집에 데려가 줘…… 오빠 제발…….”오빠라는 두 글자를 듣자 한민혁은 멍해
한민혁이 아래층에서 졸고 있을 때 갑자기 계단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다름 아닌 민도준의 소리였다.그가 내려오는 걸 보자 한민혁은 벌떡 일어났다.“약 바꿀 때 됐어?”“빨리 바꿔.”“알았어.”그가 약을 바꾸고 다시 내려왔을 때 민도준은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이 집의 주인 같았다.속으로 혀를 끌끌 찬 한민혁은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이번에 바꾼 게 마지막이야. 더 시킬 일 없으면 나 먼저 블랙썬으로 돌아갈게.”그때, 연기가 민도준의 입가에서 새어 나와 주위에 천천히 흩어지더니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블랙썬은 잠시 다른 애들한테 맡기고 넌 며칠 동안 해원에 좀 다녀 와.”“뭐?”한민혁은 어안이 벙벙했다.“해원? 거긴 공씨 가문 구역이잖아. 혹시 해원에 사업 확장하려고?”민도준은 귀찮은 듯 그를 힐끗 바라봤다.“사업 확장 건을 너 혼자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거야? 길가에서 구걸이라도 하게?”“…….”“그러면 왜 그러는데?”민도준은 눈을 가늘게 접었다.“공시 가문 움직임 잘 관찰해. 특히 공태준.”한민혁은 그제야 뭔가를 알아차린 듯 위층을 힐끗 바라보더니 다시 민도준을 바라봤다.“혹시 하윤 씨와 공시 가문을 의심하는 거야?”민도준이 부인하지 않자 한민혁은 머리를 긁적거렸다.“그런데 하윤 씨에 대해 조사할 때 계속 경성에 있었던 거로 나왔었잖아. 이상한 점 없었는데?”“보아낼 수 있는 문제가 진자 문제겠어?”한민혁은 순간 막막했다.하지만 담배를 눌러 끈 민도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내가 지금 꾸물대는 널 죽이고 싶다는 거 너도 눈치채지 못했잖아. 이런 게 진짜 문제 아니겠어?”한민혁은 몸을 흠칫 떨더니 벌떡 일어났다.“알았어! 무조건 임무 완수할게!”-다음 날 아침.권하윤이 깨어났을 때 눈꺼풀이 무겁다 못해 제대로 떠지지 않았고 앞도 흐릿해 몇 번이고 문지르고 나서야 겨우 떴다.흐릿하던 초점이 점점 맞춰지고 나서야 그녀는 자기가
지금 이 순간 권하윤은 아까와는 달리 고분고분해졌고 목소리도 한껏 부드러워졌다.“저 할 말이 있어요.”민도준은 그녀의 재밌는 변화에 손의 힘을 빼며 그녀의 턱을 문질렀다.“왜? 벌써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야? 철 들었네.”권하윤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도준 씨 말대로 도준 씨와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이런 것도 알지 못하면 바보죠.”몇 초간 그녀를 바라보던 민도준은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며 침대에 걸터앉아 자기 다리를 가리켰다.권하윤은 역시나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 위에 앉더니 예전처럼 고개를 그의 어깨에 기댔다.그의 눈높이에서 내려다보니 눈을 내리깐 권하윤의 얼굴이 보였고 그 아래로 내려가자 헐렁한 옷깃에 살짝 가려진 가는 목덜미와 등줄기를 타고 내려간 빨간 키스 마크가 눈에 들어왔다.민도준은 키스 마크를 손으로 살살 긁으며 입을 열었다.“말해 봐, 무슨 말이 하고 싶어?”“저 권씨 가문을 갖고 싶어요.”그녀의 말에 흥미를 느낀 민도준은 그녀의 목덜미를 손으로 받쳐 들며 빤히 바라봤다.“하, 의외로 야심가였네.”권씨 가문은 물론 민씨 가문보다는 한참 뒤떨어진 데다 명문가 중에서도 끝자락에 속한다지만 작은 가문은 아니다. 게다가 경서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친 유서 깊은 가문이기에 하루 아침에 흔들 수 있는 게 아니다.만약 다른 사람이 권하윤의 말을 들었다면 반드시 그녀가 미쳤다고 비웃을 게 뻔하다.하지만 그녀 앞에 있는 사람은 민도준이다. 이 세상의 일은 그가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에 달렸지 할수 있는지 할 수 없는지를 따지는 건 오히려 그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다.그가 아무리 권하윤을 비웃는다 해도 그건 할 수 없는 허황한 꿈을 꾸는 그녀를 비웃는 게 아니라 그저 그렇게 수고스럽게 그녀를 위해 권씨 가문을 빼앗는 게 가치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일 거다.이 일은 작은 일이 아니기에 권하윤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리라 기대하지 않았다.이윽고 한 발 뒤로 물러나며 부탁했다.“어렵다면 됐어요. 그저 도준 씨가 도와줄
권하윤은 몸을 가누기 바쁘게 들리는 말에 고개를 들고 담담하게 웃었다.“그런 게 제 마음대로 되나요? 도준 씨 같은 사람은 그냥 있기만 해도 수많은 사람이 비위를 맞추며 들러 붙겠지만 저 같은 사람은 오히려 염치 불문하고 다른 사람한테 들러 붙어야 하거든요. 그런 제가 염치를 차릴 필요가 뭐가 있을까요?”그녀의 말에 민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한껏 구겨진 눈매로 포악함을 내뿜고 있었고 위험하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참지 못하고 권하윤에게 손을 대려던 찰나 피식 웃으며 권하윤의 손을 뿌리쳤다.“제수씨, 지금 나 일부러 자극하는 거야?”당장에 꼼수를 발각된 자각도 없이 권하윤은 대뜸 인정했다.“네. 제가 권씨 가문 여자인 이상 언젠간 희연 언니처럼 팔리듯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가져야 할 텐데, 그 시기가 빨리 오든 늦게 오든 뭔 차이가 있겠어요. 차라리 제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제 손으로 미리 선택하는 게 낫죠.”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안은 무거운 적막이 흐르기 시작했다.민도준은 고개를 숙인 채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지금의 권하윤은 예전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모든 걸 내건 듯 결연한 모습이었는데 그건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해탈함과 절망이 담겨 있었다.예전의 권하윤이 이런 말을 했다면 민도준은 당연하듯 그녀가 일부러 또 가식적인 연기를 하며 도움을 청한다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평온한 겉과는 달리 강박적이면서도 공포를 띤 모습이었다.마치 아무나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 사람을 위해 뭐든 다 할 것처럼 말이다.게다가 이러한 변화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바로 그의 안중에도 없던 그 개자식.두 쌍의 눈이 마주치는 동안 암류가 용솟음쳤다.그러다가 한참 뒤, 민도준이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입을 열었다.“옷 입어.”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권하윤은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 입은 뒤 그의 결정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권씨 가문을
‘어젯밤…….’기억이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오면서 몇몇 화면들이 눈앞에 떠오른 순간 권하윤 마음속의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눈 밑에 걸린 정서를 숨겼다.“그건 제가 열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돼서 헛소리 지껄인 겁니다. 잊어주세요.”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더니 권하윤의 고개는 강제로 들렸다.민도준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살아 숨 쉬는 듯 그녀를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으며 손가락은 그녀의 입술을 계속 매만졌다.그리고 이윽고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그의 잇새로 흘러나왔다.“어쩜 헛소리도 그렇게 사랑스럽게 할 수 있지? 어디 다시 불러 봐.”퉁퉁 부은 입술이 꺼칠꺼칠한 손에 문질러져 아프기만 했지만 민도준은 일부러 그녀를 괴롭히기라도 하는 듯 손가락을 그녀의 입술 사이로 밀어 넣으며 억지로 벌렸다.만약 다른 호칭이었으면 바로 불러줬겠는데 오빠는 그녀의 가족이자 도피처였기에 이렇게 야릇하고 불순한 의도로 불러야 한다는 게 거부감이 들어 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결국 한참 고민 끝에 그녀는 다른 호칭으로 대체했다.“자기야.”“식상해.”눈썹을 치켜올리며 웃음기 섞인 눈매로 자기를 바라보는 민도준을 보는 순간 권하윤의 마음속에는 원망과 한이 피어올랐다. ‘왜 이토록 내가 원하지 않는 일만 강요하는지…….’하지만 그녀는 끝내 분노를 삼키고 민도준을 올려다보며 뭔가를 암시하는 듯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이따가 밤에 다른 호칭으로 불러드릴게요.”몸을 바치더라도 오빠라고는 죽어도 부르려 하지 않는 고집에 민도준은 재밌는 듯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밤까지 기다릴 거 뭐 있어? 나 지금 시간 많아.”그의 말에 권하윤의 손은 뻣뻣하게 굳었다.열이 방금 내려 기운도 없는 데다 어제 미친 듯한 밤을 보내 또 관계를 했다간 정말 병원에 실려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그녀가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 민도준은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에 드리웠던 그녀의 손을 잡으며 주물럭거렸다.뼈마디가 선명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