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혁이 아래층에서 졸고 있을 때 갑자기 계단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다름 아닌 민도준의 소리였다.그가 내려오는 걸 보자 한민혁은 벌떡 일어났다.“약 바꿀 때 됐어?”“빨리 바꿔.”“알았어.”그가 약을 바꾸고 다시 내려왔을 때 민도준은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이 집의 주인 같았다.속으로 혀를 끌끌 찬 한민혁은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이번에 바꾼 게 마지막이야. 더 시킬 일 없으면 나 먼저 블랙썬으로 돌아갈게.”그때, 연기가 민도준의 입가에서 새어 나와 주위에 천천히 흩어지더니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블랙썬은 잠시 다른 애들한테 맡기고 넌 며칠 동안 해원에 좀 다녀 와.”“뭐?”한민혁은 어안이 벙벙했다.“해원? 거긴 공씨 가문 구역이잖아. 혹시 해원에 사업 확장하려고?”민도준은 귀찮은 듯 그를 힐끗 바라봤다.“사업 확장 건을 너 혼자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거야? 길가에서 구걸이라도 하게?”“…….”“그러면 왜 그러는데?”민도준은 눈을 가늘게 접었다.“공시 가문 움직임 잘 관찰해. 특히 공태준.”한민혁은 그제야 뭔가를 알아차린 듯 위층을 힐끗 바라보더니 다시 민도준을 바라봤다.“혹시 하윤 씨와 공시 가문을 의심하는 거야?”민도준이 부인하지 않자 한민혁은 머리를 긁적거렸다.“그런데 하윤 씨에 대해 조사할 때 계속 경성에 있었던 거로 나왔었잖아. 이상한 점 없었는데?”“보아낼 수 있는 문제가 진자 문제겠어?”한민혁은 순간 막막했다.하지만 담배를 눌러 끈 민도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내가 지금 꾸물대는 널 죽이고 싶다는 거 너도 눈치채지 못했잖아. 이런 게 진짜 문제 아니겠어?”한민혁은 몸을 흠칫 떨더니 벌떡 일어났다.“알았어! 무조건 임무 완수할게!”-다음 날 아침.권하윤이 깨어났을 때 눈꺼풀이 무겁다 못해 제대로 떠지지 않았고 앞도 흐릿해 몇 번이고 문지르고 나서야 겨우 떴다.흐릿하던 초점이 점점 맞춰지고 나서야 그녀는 자기가
지금 이 순간 권하윤은 아까와는 달리 고분고분해졌고 목소리도 한껏 부드러워졌다.“저 할 말이 있어요.”민도준은 그녀의 재밌는 변화에 손의 힘을 빼며 그녀의 턱을 문질렀다.“왜? 벌써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야? 철 들었네.”권하윤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도준 씨 말대로 도준 씨와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이런 것도 알지 못하면 바보죠.”몇 초간 그녀를 바라보던 민도준은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며 침대에 걸터앉아 자기 다리를 가리켰다.권하윤은 역시나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 위에 앉더니 예전처럼 고개를 그의 어깨에 기댔다.그의 눈높이에서 내려다보니 눈을 내리깐 권하윤의 얼굴이 보였고 그 아래로 내려가자 헐렁한 옷깃에 살짝 가려진 가는 목덜미와 등줄기를 타고 내려간 빨간 키스 마크가 눈에 들어왔다.민도준은 키스 마크를 손으로 살살 긁으며 입을 열었다.“말해 봐, 무슨 말이 하고 싶어?”“저 권씨 가문을 갖고 싶어요.”그녀의 말에 흥미를 느낀 민도준은 그녀의 목덜미를 손으로 받쳐 들며 빤히 바라봤다.“하, 의외로 야심가였네.”권씨 가문은 물론 민씨 가문보다는 한참 뒤떨어진 데다 명문가 중에서도 끝자락에 속한다지만 작은 가문은 아니다. 게다가 경서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친 유서 깊은 가문이기에 하루 아침에 흔들 수 있는 게 아니다.만약 다른 사람이 권하윤의 말을 들었다면 반드시 그녀가 미쳤다고 비웃을 게 뻔하다.하지만 그녀 앞에 있는 사람은 민도준이다. 이 세상의 일은 그가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에 달렸지 할수 있는지 할 수 없는지를 따지는 건 오히려 그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다.그가 아무리 권하윤을 비웃는다 해도 그건 할 수 없는 허황한 꿈을 꾸는 그녀를 비웃는 게 아니라 그저 그렇게 수고스럽게 그녀를 위해 권씨 가문을 빼앗는 게 가치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일 거다.이 일은 작은 일이 아니기에 권하윤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리라 기대하지 않았다.이윽고 한 발 뒤로 물러나며 부탁했다.“어렵다면 됐어요. 그저 도준 씨가 도와줄
권하윤은 몸을 가누기 바쁘게 들리는 말에 고개를 들고 담담하게 웃었다.“그런 게 제 마음대로 되나요? 도준 씨 같은 사람은 그냥 있기만 해도 수많은 사람이 비위를 맞추며 들러 붙겠지만 저 같은 사람은 오히려 염치 불문하고 다른 사람한테 들러 붙어야 하거든요. 그런 제가 염치를 차릴 필요가 뭐가 있을까요?”그녀의 말에 민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한껏 구겨진 눈매로 포악함을 내뿜고 있었고 위험하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참지 못하고 권하윤에게 손을 대려던 찰나 피식 웃으며 권하윤의 손을 뿌리쳤다.“제수씨, 지금 나 일부러 자극하는 거야?”당장에 꼼수를 발각된 자각도 없이 권하윤은 대뜸 인정했다.“네. 제가 권씨 가문 여자인 이상 언젠간 희연 언니처럼 팔리듯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가져야 할 텐데, 그 시기가 빨리 오든 늦게 오든 뭔 차이가 있겠어요. 차라리 제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제 손으로 미리 선택하는 게 낫죠.”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안은 무거운 적막이 흐르기 시작했다.민도준은 고개를 숙인 채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지금의 권하윤은 예전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모든 걸 내건 듯 결연한 모습이었는데 그건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해탈함과 절망이 담겨 있었다.예전의 권하윤이 이런 말을 했다면 민도준은 당연하듯 그녀가 일부러 또 가식적인 연기를 하며 도움을 청한다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평온한 겉과는 달리 강박적이면서도 공포를 띤 모습이었다.마치 아무나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 사람을 위해 뭐든 다 할 것처럼 말이다.게다가 이러한 변화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바로 그의 안중에도 없던 그 개자식.두 쌍의 눈이 마주치는 동안 암류가 용솟음쳤다.그러다가 한참 뒤, 민도준이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입을 열었다.“옷 입어.”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권하윤은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 입은 뒤 그의 결정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권씨 가문을
‘어젯밤…….’기억이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오면서 몇몇 화면들이 눈앞에 떠오른 순간 권하윤 마음속의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눈 밑에 걸린 정서를 숨겼다.“그건 제가 열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돼서 헛소리 지껄인 겁니다. 잊어주세요.”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더니 권하윤의 고개는 강제로 들렸다.민도준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살아 숨 쉬는 듯 그녀를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으며 손가락은 그녀의 입술을 계속 매만졌다.그리고 이윽고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그의 잇새로 흘러나왔다.“어쩜 헛소리도 그렇게 사랑스럽게 할 수 있지? 어디 다시 불러 봐.”퉁퉁 부은 입술이 꺼칠꺼칠한 손에 문질러져 아프기만 했지만 민도준은 일부러 그녀를 괴롭히기라도 하는 듯 손가락을 그녀의 입술 사이로 밀어 넣으며 억지로 벌렸다.만약 다른 호칭이었으면 바로 불러줬겠는데 오빠는 그녀의 가족이자 도피처였기에 이렇게 야릇하고 불순한 의도로 불러야 한다는 게 거부감이 들어 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결국 한참 고민 끝에 그녀는 다른 호칭으로 대체했다.“자기야.”“식상해.”눈썹을 치켜올리며 웃음기 섞인 눈매로 자기를 바라보는 민도준을 보는 순간 권하윤의 마음속에는 원망과 한이 피어올랐다. ‘왜 이토록 내가 원하지 않는 일만 강요하는지…….’하지만 그녀는 끝내 분노를 삼키고 민도준을 올려다보며 뭔가를 암시하는 듯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이따가 밤에 다른 호칭으로 불러드릴게요.”몸을 바치더라도 오빠라고는 죽어도 부르려 하지 않는 고집에 민도준은 재밌는 듯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밤까지 기다릴 거 뭐 있어? 나 지금 시간 많아.”그의 말에 권하윤의 손은 뻣뻣하게 굳었다.열이 방금 내려 기운도 없는 데다 어제 미친 듯한 밤을 보내 또 관계를 했다간 정말 병원에 실려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그녀가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 민도준은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에 드리웠던 그녀의 손을 잡으며 주물럭거렸다.뼈마디가 선명한
권하윤은 그제야 알아차렸다.“여고가 권씨 가문 핵심이었던 거였어요?”“답 찾았네. 혼자 잘 생각해 봐. 난 이만 갈게.”민도준이 떠난 뒤 권하윤은 한참 동안 생각에 빠졌다.그녀는 권씨 집안 사람이 아니라서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가문에서 운영하는 여고에서 교육을 잠깐 받아봤지만 매번 1대1 수업을 진행했었다. 때문에 체계적인 학습을 받지 못했고 그로 인해 학교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었다.‘그러고 보니 희연 언니는 체계적인 학습을 거쳤었지…….”그런 생각이 들자 권하윤은 준비를 끝마치고 권희연과 약속을 잡으려고 결심했다.하지만 전화를 한참 해도 받는 사람이 없어 끊으려던 찰나 전화가 연결되었다.“여보세요? 희연 언니, 오늘 시간 있어? 좀 볼 수 있을까?”“읍…… 살려줘…… 읍…….”전화 건너편에서 들리는 권희연의 구조 요청에 권하윤은 화들짝 놀랐다.“희연 언니? 언니 지금 어디야? 왜 그래?”“…….”“여보세요?”권하윤이 다시 물어보기도 전에 전화는 바로 끊겼다.위험을 감지한 그녀는 곧바로 권미란에게 전화해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권희연이 위험하다는 말을 꺼내기 바쁘게 권미란의 엄숙하고도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네가 참견할 일 아니야.”“그런데 희연 언니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분명…….”“그만. 민씨 가문 어르신이 앓아누운 뒤로 그 집안 형제들이 호시탐탐 회사를 노리고 있는데 네 자리를 공고히할 생각은 안 하고 다른 사람 일에 참견해? 내가 그렇게 고생스럽게 너를 해원에서 구해왔는데 가문에 이런 식으로 보답하면 안 되지.”권미란은 마치 권희연이 어디로 갔고 그녀가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 아는 눈치였다.이에 권하윤은 한참을 침묵하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죄송합니다.”“내일 건강검진 받으러 집으로 와. 네 시어머니랑 얘기했는데 네가 임신하면 결혼식 바로 치르기로 했다. 약혼을 한지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 아무런 소식도 없으니 몸에 문제는 없는지 검사해 봐야 할 것 아니니.”이어지는 권미란의 말에 권하윤
스틱스로 향하는 길에 권하윤은 진소희한테 전화로 스틱스의 상세한 상황을 물었다.그리고 알게 된 건 스틱스 건물의 30층 이하는 모두 VIP 카드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 층수가 높을수록 누릴 수 있는 서비스가 다르다는 거였다.게다가 30층 이상은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그럼, 도준 씨는 30층 이상에 접근할 수 있나요?”“당연하죠! 듣기로 그중의 한 층은 도준 오빠를 위해 특별히 남겨둔 공간이래요. 전에 제가 그렇게 부탁했는데도 데려가지 않더라니까요. 언니도 조심해요. 오빠가 그곳에 여자들을 숨겨놓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저를 데려가지 않았겠죠!”확신에 찬 진소희의 말투에 권하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도준 씨가 요즘 소희 씨 괴롭혔어요?”권하윤의 말에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진소희의 목소리에는 슬픔과 분노가 차 있었다.“간단히 비유하자면 언니가 지난번에 저를 봤을 때만 해도 제가 싱싱한 포도였다면 요 며칠 사이에 건포도가 됐어요!”권하윤은 이 모든 게 자기가 민도준 대타를 찾은 일 때문에 벌어진 거라는 걸 모르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하지만 스틱스가 만약 진소희의 말대로 관리가 삼엄하다면 그녀의 카드로 권희연이 있는 층까지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민도준의 이름을 빌리면 모를까…….’이 생각이 든 찰나 권하윤은 곧바로 차를 돌려 길가에 있는 옷 가게로 들어갔다.그리고 한참 뒤 다시 나왔을 때 여성스럽고 얌전한 투피스 스커드는 등이 푹 파인 긴 원피스로 바뀌어 있었고 마네킹 머리에서 벗겨낸 붉은색 가발이 머리에 쓰여 있었다.차로 돌아온 그녀는 화려하고 짙은 메이크업을 한 뒤 선글라스를 찾아 썼다.이 모든 걸 끝마칠 때까지 조수석에 앉은 로건은 아무것도 모른 채 목도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완성했는지 자기가 만든 목도리를 쫙 펴보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던 그때.“로건 씨.”부름 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는 아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권하윤을 보고 잠깐 멍해 있다가 더듬더듬 말을
블랙썬.“민 사장님,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사장님을 찾으러 오신 분을 이미 방까지 안내했습니다.”민도준은 상대의 말에 눈썹을 치켜뜨며 액정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스틱스에서 걸려 온 전화인데.’“나를 찾으러 왔다고?”민도준이 이 일을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에 웨이터는 조심스럽게 설명했다.“민 사장님의 경호원인 로건 씨가 웬 여성 한 분을 데리고 왔었는데 혹시 모르셨습니까?”“하.”상대의 말에 민도준은 피식 웃었다.‘이제는 내 이름을 내세워 사기를 치고 다니네? 정말 잠시도 쉬지 않는군.’긴 침묵에 전화 건너편 사람은 점차 불안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민도준이 이 일을 모른다면 그는 당장 그 여자를 쫓아내야 했으니까.한참 생각하던 그는 끝내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소리 냈다.“민 사장님?”“그냥 내버려 둬.”“아…… 네. 그럼 전화 끊겠습니다.”전화가 끊기자 방 안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고은지는 민도준을 바라봤다.“계속 칠까요?”“응.”민도준은 핸드폰을 바라보며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하지만 고은지는 바로 피아노를 치지 않고 한참을 침묵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방금 전화는 누구예요?”여자의 물음에 핸드폰을 끈 그는 고개를 들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뭐라고?”“죄송합니다.”잠시 침묵하던 고은지는 몇 초의 망설임 끝에 짤막한 사과를 하고 손을 다시 피아노 건반 위에 올렸다. 그때 리클라이너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민도준이 일어나 앉으며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됐어, 그만 해.”고은지는 자기가 말실수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손을 흔들며 묵인한 민도준을 힐끗 본 고은지는 조용히 자기 물건을 챙겨 방을 나섰다.-그 시각, 권하윤은 자기가 들킨 줄도 모르고 스틱스 60층에 발을 디뎠다.진소희의 말대로 60층은 한 사람을 위해 준비한 듯 뻥 뚫려 있었다.하지만 호화로운 인테리어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권하윤
어두운 조명 때문에 방 안에 있는 사람을 제대로 확인할 수도 없었고 바닥에 있는 안내 등이 없었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안내 등이 가리키는 어둠의 끝에는 두 개의 대문이 있었는데 그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은 마치 한 쌍의 눈처럼 소리 없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고객님.”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권하윤은 한참을 확인하고 나서야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스틱스의 직원이라는 걸 알아차렸다.“혹시 누구를 찾으시죠?”상대는 권하윤을 위아래로 훑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의 물음에 정신을 가다듬은 권하윤은 일부러 패악스러운 말투로 따져 물었다.“내가 누구를 찾는지 당신이 뭔데 상관해? 비켜.”그녀의 당당한 태도와 알 수 없는 신분 때문에 상대는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객님, 안에서 하는 공연은 곧 끝날 예정이니 기다리셨다가 다음 공연을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공연?’권하윤의 마음속에는 일순 불안이 솟구쳐 올라 로건을 떼어놓아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그러던 그때 그녀의 심부름을 했던 웨이터가 다가오더니 눈앞의 남자에게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매니저님, 이분은 60층 손님입니다.”그의 말에 매니저의 태도는 곧바로 공손하게 변했다.“죄송합니다. 공연을 보러 오신 거라면 저를 따라오세요.”매니저는 대문 대신 옆에 있는 작은 문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러면서 공연이 끝나가니 바로 자리로 안내해 주겠다고 설명을 덧붙였다.모르는 사람과 함께 앉아야 하는 중앙 홀과는 달리 그들이 들어간 곳은 고급스러운 방이었다. 매니저는 눈에 보이는 네 개의 방 중에서 비어있는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는데 유리로 된 방은 안에서 밖을 내다볼 수는 있었지만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구조였다.방안에는 편안한 소파와 예쁘게 썰려 있는 과일들이 있었는데 보기에는 이상한 점이 없었다.권하윤은 사방이 검은 유리방 안에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의아한 듯 매니저를 바라봤다.“공연을 볼 수 있다면서요? 공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