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조명 때문에 방 안에 있는 사람을 제대로 확인할 수도 없었고 바닥에 있는 안내 등이 없었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안내 등이 가리키는 어둠의 끝에는 두 개의 대문이 있었는데 그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은 마치 한 쌍의 눈처럼 소리 없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고객님.”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권하윤은 한참을 확인하고 나서야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스틱스의 직원이라는 걸 알아차렸다.“혹시 누구를 찾으시죠?”상대는 권하윤을 위아래로 훑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의 물음에 정신을 가다듬은 권하윤은 일부러 패악스러운 말투로 따져 물었다.“내가 누구를 찾는지 당신이 뭔데 상관해? 비켜.”그녀의 당당한 태도와 알 수 없는 신분 때문에 상대는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객님, 안에서 하는 공연은 곧 끝날 예정이니 기다리셨다가 다음 공연을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공연?’권하윤의 마음속에는 일순 불안이 솟구쳐 올라 로건을 떼어놓아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그러던 그때 그녀의 심부름을 했던 웨이터가 다가오더니 눈앞의 남자에게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매니저님, 이분은 60층 손님입니다.”그의 말에 매니저의 태도는 곧바로 공손하게 변했다.“죄송합니다. 공연을 보러 오신 거라면 저를 따라오세요.”매니저는 대문 대신 옆에 있는 작은 문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러면서 공연이 끝나가니 바로 자리로 안내해 주겠다고 설명을 덧붙였다.모르는 사람과 함께 앉아야 하는 중앙 홀과는 달리 그들이 들어간 곳은 고급스러운 방이었다. 매니저는 눈에 보이는 네 개의 방 중에서 비어있는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는데 유리로 된 방은 안에서 밖을 내다볼 수는 있었지만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구조였다.방안에는 편안한 소파와 예쁘게 썰려 있는 과일들이 있었는데 보기에는 이상한 점이 없었다.권하윤은 사방이 검은 유리방 안에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의아한 듯 매니저를 바라봤다.“공연을 볼 수 있다면서요? 공연은
방 안에서 조 사장은 권희연의 머리채를 홱 낚아챈 채 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삼각형 눈에는 변태적 쾌감이 흘러나왔다.“하하하, 정조를 따지는 열녀 아니었나? 민도준의 침대에 기어 올라가지 못하고 끝내 내 손에 오고 말았네! 깨끗한 척 고귀한 척 하더니 꼴 좋네!”힘껏 당겨진 머리 때문에 권희연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조 사장은 남자구실을 못 하게 된 뒤로부터 여자를 괴롭히는 낙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게다가 큰일을 계획하느라 권희연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마침 권미란이 다시 협력하자고 손을 내민 거다. 가문에서 하는 더러운 거래를 숨기기 위해선 뒷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권씨 가문에서 민도준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자기와 민도준 사이에서 간을 보던 게 계속 마음에 걸렸던 조 사장은 권희연을 자기한테 주고 그가 어떻게 하든 그녀의 생사를 관계하지 않겠다는 권미란의 약속을 받아내고 나서야 손을 잡았다.그 때문에 오늘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고.지금껏 차지하고 싶었던 여자가 자기 앞에 엎드려 있는데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에 화가 난 조 사장은 더욱 폭력적으로 변했다.그리고 그 치욕스러움으로 생겨난 조급함과 분노를 당연하다는 듯 권희연에게 쏟아냈다.그는 가뜩이나 찢어진 권희연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놓고는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더러운 년! 굴려질 대로 굴려지고 나서야 내 앞에 나타나다니! 내가 거지인 줄 아나!”“…….”권희연은 입술을 깨문 채 자꾸만 고이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조금만 참으면 어머니가 고생하지 않을 거고 동생이 시가에 무시당하지 않을 테니 괜찮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면서 말이다.하지만 그녀의 그렁그렁한 눈말울은 조 사장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신 오히려 그의 변태적인 욕구를 자극했다.그리고 뭔가 하려는 듯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병을 들고 권희연에게 다가랄 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야?”“조 사장님, 드릴 말씀이
권하윤은 권희연을 둘러맨 로건과 함께 앞에서 걸어갔고 총을 든 조 사장은 그들을 말없이 뒤따랐다.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그녀 앞에 일여덟 정도 되는 사람들이 막아섰다.조 사장의 사람인 걸로 봐서 아까의 총성을 듣고 몰려든 듯했다.그들이 있는 한 기회를 봐서 도망치려던 권하윤의 계획도 실행할 수 없었다.일반 사람이라면 스틱스에 올 때 이렇게 많은 경호원을 데려오지 않을 텐데 민도준한테 당한 적 있는 조 사장은 또 불상사라도 있을까 봐 만반의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그렇게 그들은 무리를 지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엘리베이터와 가까워질수록 권하윤의 심장은 평온한 표정과 달리 미친 듯 뛰었다.‘왜 조 사장이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지? 설마 오늘 진짜로 도준 씨랑 맞서기라도 하려는 건가?’만약 그렇다면 그녀가 아까 허장성세를 부렸다는 게 들통나고 말 거다.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몇 발짝은 마치 낭떠러지로 걸어가는 듯 무겁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만 방심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권하윤은 겁을 먹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땀에 흠뻑 젖은 손을 들어 아무렇지 않은 듯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그녀의 태연한 행동에 조사장의 미간이 오히려 구겨졌다.‘설마 민도준이 정말 따라왔나?’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권하윤은 먼저 안으로 들어가 닫히는 문을 손으로 막으며 조 사장을 향해 미소 지었다.“들어오시죠.”하지만 조 사장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어두운 눈동자로 권하윤을 빤히 바라보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갑자기 일이 생겨 홍옥정에 가봐야 해서 민 사장은 다음에 만나 뵙도록 하지.”“대신 전해드리죠.”권하윤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야 그녀는 긴장이 풀린 듯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하지만 아직은 마음을 놓을 때가 아닌지라 심호흡을 한 뒤 로건을 바라봤다.“로건 씨.”이름이 불린 당사자는 마치 머리가 백지장이 된 듯 멍하니 서 있다가 화들짝 놀랐다.“네
“민…… 민 사장님?!”그제야 반응한 조 사장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뗐고 겨우 공기를 들이켜게 된 권하윤은 숨을 헐떡이며 기침을 해댔다.민도준이 온 걸 본 그녀는 조 사장 못지않게 놀랐다.때문에 표정도 덩달아 멍해졌다.민도준은 그녀의 빨간 가발과 아직 가시지 않는 얼굴의 붉은 기를 힐끗 보다가 야릇한 치마로 눈길을 돌리더니 눈썹을 치켜올렸다.그의 그런 의미심장한 표정에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고 큰 재앙이 닥쳤다는 생각이 뇌리를 세게 때렸다.그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건 그녀가 자기 이름을 팔고 다니며 왕행세를 하고 다닌 일이 발각됐다는 뜻이었기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이에 민도준은 가볍게 피식 웃더니 다시 눈길을 조 사장에게로 돌렸다.이윽고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그에게 다가간 민도준은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조 사장이 날 이렇게 보고 싶어 하는 줄 몰랐네. 이제 내가 왔으니 하고 싶은 말 해보시죠?”“…….”조 사장의 낯빛은 여러 차례 변하더니 끝내 핏기 없이 창백해졌다.세상을 발아래 두고 무시하는 듯한 민도준의 건방진 얼굴을 보자 그는 오늘 죽지 않더라도 죽기 직전까지 괴롭힘당하겠다는 직감이 들었다.하지만 민도준에 대한 원한이 치밀어 오르더니 순간 혼자 온 민도준에 비해 사람도 있고 총도 있는 자기가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그가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커다란 손이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형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나도 좀 들어봅시다.”“그게…….”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려 하던 찰나 어깨에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은 비명으로 변해버렸다.“아아!”부러진 팔이 아래로 축 늘어짐과 동시에 그의 입에서 처참한 비명이 흘러나왔다.하지만 민도준은 눈치채지 못한 듯 그의 빠진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농담을 던졌다.“왜 그래요? 오랜만에 만났다고 노래라도 한 곡조 뽑는 겁니까?”이윽고 그는 여전히 총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조 사장의 똘마니들을 보며
민도준이 자기들의 말을 안중에도 두지 않자 현장에 있던 조 사장의 똘마니들은 순간 울컥했다.일촉즉발인 상황 속에서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았다.하지만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점점 그들에게 가까워지더니 경찰들이 나타나 사람들은 일순 얼어붙고 말았다.“움직이지 마! 무기 버리고 손들어!”그들이 아무리 법을 무시하며 산다고는 하지만 현행범으로 잡히는 건 골치 아픈 일이었기에 할 수 없이 총을 내려놓고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그때 놈들의 총을 회수한 경찰이 주위를 매의 눈으로 훑어봤다.“신고하신 분이 누구십니까?”“저요.”권하윤은 사람들 사이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올리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민도준이 올 줄 모르고 그저 퇴로를 만들어 두려고 신고한 거다. 조 사장이 단념하지 않고 60층에 올라갔다가 뒤따라올까 봐. 그렇게 되면 진짜 위험한 상황이 닥친다 해도 눈앞의 곤란은 해결할 수 있었다. 조 사장이 아무리 난다긴다해도 경찰 앞에서 그들을 죽이지는 못할 테니까.그녀가 그렇게 승인하자 분노 섞인 눈빛들이 그녀를 당장 죽이기라도 할 듯 노려봤다.하지만 권하윤은 그들 시선을 무시한 채 핸드폰을 꺼내며 미리 준비해 둔 말을 뱉어냈다.“저 사람들이 저를 저를 협박해서 강제로 잠자리를 가지려고 했어요. 이것 보세요. 이게 증거예요.”재생된 영상은 마침 조 사장네 똘마니들이 총을 들고 그들 앞을 막아서던 장면과 조 사장이 그녀의 목을 조르는 장면을 담고 있었다.증인과 증거가 버젓이 드러나자 팀장으로 보이는 형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연행해!”그리고 조 사장과 그 똘마니들에게 수갑을 채운 뒤 골치 아픈 듯 민도준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민 사장님.”그 시각 민도준은 이미 조 사장을 놓은 채로 손을 벌리며 좋은 시민의 모습을 연기했다.“전 피해자입니다.”자기를 피해자라고 말하는 민도준의 모습에 장 형사의 표정은 마치 똥이라도 씹은 표정이었다.경성에서 민도준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하면 간첩이나 다름없다.
권하윤은 민도준이 말한 똑똑하다는 말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때문에 잠깐 머리를 굴리던 끝에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도준 씨가 오지 않았다면 제가 위험한 일을 당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고마워요.”평소의 화장기 없던 얼굴이 짙은 화장에 가려져 마치 화려한 가면을 쓴 듯 그녀의 모든 정서를 가려주었다.민도준은 재밌는 듯 피식 웃으며 그녀의 가발을 손가락에 돌돌 감으며 빨간색 머리 때문에 더욱 하얗게 보이는 권하윤의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봤다.“그런데 하윤 씨 빨간색이 잘 어울리네.”갑자기 전환된 화제에 권하윤은 방심하지 않고 낮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민도준의 욕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보고 있자니 하고 싶어졌어.”“콜록콜록-”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쪽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시각 장 형사는 자기의 예민한 청각을 탓하며 서둘러 라디오를 켰다.이러한 일이 있고 난 뒤라 그런지 참고자 신분으로 민도준과 권하윤을 조사할 때 장 형사는 극도로 불편했다.다행히 증인과 증거가 확실하고 더욱이 동영상까지 있는 터라 조 사장 일행은 곧바로 구속되었다.그렇게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경찰서에서 나왔을 때 날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하지만 계단을 두 개쯤 내려갔을 때 민도준이 뒤따라오지 않는 걸 발견한 권하윤은 잠깐 멈춰서서 그를 돌아봤다.“왜 그래요?”민도준은 담배를 손에 든 채 그녀를 내려다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풍경이 아름다워서 구경 좀 하느라고.”‘풍경?’권하윤은 의아한 듯 주위를 둘러봤지만 주위에는 그저 평범한 주택가뿐이었다.이윽고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민도준이 마침 내려오며 한 손으로는 불에 타들어 가는 담배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만지며 농담조로 말했다.“하윤 씨 말이야.”말이 끝나기 무섭게 덮쳐오는 입술에 권하윤은 잠시 멍해 있더니 반사적으로 민도준을 밀어냈다.하지만 민도준은 힘을 쓰지 않은 터라 그녀의 손에 쉽게
민도준의 이름을 팔아 어느 정도 원하는 목적을 이루었기에 할 말이 없어진 권하윤은 눈치껏 동작을 멈췄다.이에 만족한 민도준은 그녀의 등을 가리고 있던 긴 머리카락을 앞으로 넘기며 그녀의 훤히 드러난 등에 입을 맞췄다.등줄기를 따라 점점 더해지는 상대의 뜨거운 숨결에 권하윤은 몸을 흠칫 떨다가 끝내 자기의 배를 문지르는 민도준의 손을 꽉 잡았다.“도준 씨.”“응?”민도준의 낮고도 욕망이 가득한 목소리에 위기감을 느낀 권하윤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이야깃거리를 찾았다.“조 사장 징역 살 수 있나요?”권하윤의 말에 민도준은 재밌다는 듯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진동이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전해져 더욱 안절부절못했다.그러던 그때 민도준이 그녀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이렇게 귀여워?”권하윤은 그제야 자기가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는 걸 알아차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행히 작은 오프닝이 있은 뒤 민도준은 더 이상 그녀를 아까처럼 괴롭히지는 않고 그저 가끔씩 그녀의 등을 어루만졌다.조용한 차 안 때문에 밖에서 들리는 경적이 더욱 요란하게 들렸다.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길거리에는 차가 막혀 움직임이 매우 더뎠고 가다가 자꾸만 멈추며 조금씩 흘들리는 데다가 민도준이 자꾸만 등을 문지르는 바람에 권하윤은 잠이 솔솔 몰려왔다.민도준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권하윤의 머리가 의자에 부딪히기 전 때마침 손을 뻗어 그녀의 의마를 받들었다.손바닥에 닿은 권하윤의 얼굴은 조금 차가웠지만 잠든 그녀는 눈을 떴을 때처럼 경계하지 않아 새끼 고양이처럼 귀엽기만 했다.그런 그녀를 흐뭇하고 바라보며 어떻게 놀려먹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핸드폰 화면을 확인해 보니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한민혁: 도준 형, 지금 통화 가능해?]-멀리에서 들리는 자동차 경적 권하윤은 그제야 조금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어둑어둑한 차 안에서 손을 더듬거리며 일어나려고 할 때 귓가에 나지막
손바닥 아래에 느껴지는 피부는 차갑고 매끄러웠으며 눈앞의 여인은 다른 때보나 순종적이었다.하지만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억울함도 서러움도 참고 자기 몸을 도구로 사용하면서까지 그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려고 애쓰는 권하윤을 보자 민도준은 씁쓸한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이윽고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권하윤의 어깨에 올려놓았던 손을 움직여 그녀의 목을 조르며 자기 쪽으로 당겨왔다. 그러더니 상대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녀의 나시끈을 끊어버렸다.“좋아, 그렇게 원한다면 어디 확인해 보자고.”-병원.“제 동생과 함께 저 구해주러 와줘서 고마워요.”“아닙니다. 마침 가던 길이었습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하윤 씨를 따라간 건 우연이었지만 희연 씨 구한 건 우연 아닙니다. 네. 바로 이겁니다.”권희연의 감사 인사에 로건은 연신 손을 젓던 로건은 점점 이상해지는 말에 당황하는가 싶더니 겨우 제대로 해명한 뒤에야 확신에 찬 듯 고개를 끄덕였다.순수한 그의 행동에 권희연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붕대를 감은 고개를 푹 숙이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그러고 보니 죄송해요. 못 볼 꼴 보여드렸네요…….”“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로건은 연신 손을 저으며 또렷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민 사장님이 말씀하셨는데 본인 의지로 한 게 아니면 본인이 한 게 아니래요.”말도 안 되는 억지를 너무나 순수한 표정으로 부리는 로건의 모습에 권하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난감하기만 했다.하지만 남의 의견을 반대하는 성격이 아닌지라 그녀는 오히려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냐고 되물었고 로건은 그녀의 물음에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민 사장님이 말씀하셨는데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한 일은 자기가 한 일이 맞지만 할 수 없이 한 일은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했어요. 희연 씨도 할 수 없이 그런 일에 휘말렸으니 자기 자신을 괴롭힐 필요 없어요.”그의 말에 권희연은 순간 멍해졌다.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