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5-01-06
By:   적매화  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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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간 진산군댁의 금지옥엽으로 살아가던 김단은 우연히 자신이 진산군의 친딸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한때 자신을 사랑해 주던 부모님과 오라버니, 그리고 호국 장군이었던 정혼자까지 어느새 진산군의 친딸, 임원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친딸 때문에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김단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도 모자라, 세답방의 무수리로 전락하게 한다. 무수리로 고생하는 3년간 아무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진산군과 정부인이 눈물을 훔치며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딸아, 못난 아비와 어미를 용서해다오. 우리랑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그녀를 무시하며 하대하던 오라버니는 밤새 무릎까지 꿇으며 애원했다. “단아, 이 오라비를 용서해 주면 안 되겠니?” 전쟁에서 공을 세우며 승승장구하던 소 장군은 피로 얼룩진 몸을 이끌고 찾아왔다. “낭자, 내게 한 번만 더 마음을 주면 안 되겠소?” 허나,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던 지난날들 속에서 그녀의 마음은 이미 차갑게 식었다. 훗날, 그녀만 바라보고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사는 김단의 모습에, 괜히 그녀의 눈 밖에 나 한때 가족이었던 인연조차 저버리게 될까 봐 두려웠던 진산군댁 사람들은 다시는 그녀를 찾아오지 못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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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조선의 어느 음력 12월 28일.차가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오전에 시작했던 빨래를 간신히 마친 김단은, 얼어붙어 감각을 잃은 파랗게 질린 손을 닦을 틈도 없이 세답방의 나인에게 불려갔다.“어서 가보게. 진산군댁에서 자네를 데리러 왔네.”나인의 말에 김단은 자리에 얼어붙었다.진산군댁, 그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단어였다.한때 그녀도 그 댁의 귀한 여식으로 15년을 자랐었다. 3년 전, 자기가 진짜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정2품 진산군댁의 안주인인 정부인 임씨와 같은 해에 출산했던 유모는 임종 직전, 죄책감이라도 들었는지 자기가 두 아이를 바꿨다는 진실을 털어놓았다. 김단은 그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부부가 자신의 친딸, 임원을 상봉한 것에 감격스러워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모녀와 부녀의 모습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5년간, 그녀는 자신의 부모님을 한 번도 친부모가 아니라고 의심한 적 없었다.진산군은 안색이 어두워진 김단에게 앞으로도 이 집안의 여식으로 남아 임원의 언니로서 살아가도 좋다고 했다. 임씨도 그녀를 친딸처럼 대하겠다고 약조했다.하나, 궁궐에 들어 공주자가의 유리그릇을 깨트린 임원을 발견한 부부는, 임원의 몸종이 김단을 모함할 때조차 임씨 부부는 망설임 없이 수양딸이었던 김단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웠다. 공주는 분에 겨워 그녀를 세답방의 무수리로 쫓아냈으나, 한때 부모님이었던 그들은 임원의 옆에 서서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그날, 김단은 그들이 자신의 부모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멍하니 서서 뭐 하시오? 그 댁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나인의 독촉 소리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세답방의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한 사내가 서 있었다.희미한 햇살이 비친 문 쪽에서 홀로 고고히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을 마주한 김단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랫동안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던 가슴이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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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조선의 어느 음력 12월 28일.차가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오전에 시작했던 빨래를 간신히 마친 김단은, 얼어붙어 감각을 잃은 파랗게 질린 손을 닦을 틈도 없이 세답방의 나인에게 불려갔다.“어서 가보게. 진산군댁에서 자네를 데리러 왔네.”나인의 말에 김단은 자리에 얼어붙었다.진산군댁, 그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단어였다.한때 그녀도 그 댁의 귀한 여식으로 15년을 자랐었다. 3년 전, 자기가 진짜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정2품 진산군댁의 안주인인 정부인 임씨와 같은 해에 출산했던 유모는 임종 직전, 죄책감이라도 들었는지 자기가 두 아이를 바꿨다는 진실을 털어놓았다. 김단은 그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부부가 자신의 친딸, 임원을 상봉한 것에 감격스러워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모녀와 부녀의 모습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5년간, 그녀는 자신의 부모님을 한 번도 친부모가 아니라고 의심한 적 없었다.진산군은 안색이 어두워진 김단에게 앞으로도 이 집안의 여식으로 남아 임원의 언니로서 살아가도 좋다고 했다. 임씨도 그녀를 친딸처럼 대하겠다고 약조했다.하나, 궁궐에 들어 공주자가의 유리그릇을 깨트린 임원을 발견한 부부는, 임원의 몸종이 김단을 모함할 때조차 임씨 부부는 망설임 없이 수양딸이었던 김단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웠다. 공주는 분에 겨워 그녀를 세답방의 무수리로 쫓아냈으나, 한때 부모님이었던 그들은 임원의 옆에 서서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그날, 김단은 그들이 자신의 부모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멍하니 서서 뭐 하시오? 그 댁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나인의 독촉 소리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세답방의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한 사내가 서 있었다.희미한 햇살이 비친 문 쪽에서 홀로 고고히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을 마주한 김단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랫동안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던 가슴이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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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그 목소리에 김단은 걸음을 멈추었다. 오래전 무감각해진 줄 알았던 그녀의 심장은 익숙한 목소리에 활력을 얻은 듯 천천히 뛰었다.그녀는 천천히 마차 안의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린 나이에 호국 장군이 된 그녀의 옛 정혼자, 소한이다. 그녀는 얼른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장군님이시군요.”미간을 살짝 찌푸린 소한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발목을 향했다. “낭자, 진산군댁에 가는 길이었소?”고개를 숙인 그녀는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한동안 침묵이 흘렀다.소한은 그녀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알고 있던 그녀는 항상 곁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여인이었다.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집안에서 정해준 혼사이기에 어쩔 수 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견뎠었다. 가끔은 지치지 않고 떠드는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떡을 집어넣기도 했지만, 그 순간조차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던 그녀였다. 떡으로 입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이 반 시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활달했던 여인이었다. 못 본 사이, 김단의 입은 굳게 닫혀있었고 전처럼 떠들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린 소한은 그녀를 부축하는 대신 냉랭하게 말했다. “마침, 궐에 들던 길이었소. 이 마차를 타고 돌아가시오.”그녀가 거절하기도 전에 그가 한마디 더 했다. “다쳤으면 무리하지 마시오. 본인은 몰라도, 그 댁 큰 마님께서 속상해할 것이오.”그의 목소리에는 반박할 수 없는 위엄이 담겨 있었다. 조모님은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무수리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조모님께서 중전마마께 간청했기 때문이다. 만약 다리를 절뚝거리며 힘겹게 돌아온 그녀를 보게 되면, 조모님의 마음도 편치 않을 것이라 여긴 김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쇤네, 장군님께 감읍할 따름입니다.”말을 마친 김단은 천천히 마차로 다가갔다.가까이선 본 소한은 3년 전과 달리 키가 훌쩍 커져 있었고 체격도 다부져졌다.최근 전쟁에서 승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직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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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김단이 전에 묵었던 별당은 매화당이었다.정원에 무수한 매화나무가 심겨 있었는데 꽃샘추위가 찾아올 즈음 핀 매화꽃들은 초봄까지 지지 않았다. 그녀가 어릴 적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매화라는 소리에 진산군은 조선 팔도로 사람을 보내 매화나무를 구해왔고 그 종류는 다양했다. 그 후로 매년 수백 냥의 은자를 들여가며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매화나무를 극진히 돌봤다. 하지만 매화당에 핀 매화꽃이 아름답다는 임원의 말 한마디에 매화당은 곧 임원의 별당이 되었다.그 순간에는 자기 별당을 빼앗긴 것 같아 분하기도 했으나, 지금 돌이켜보니 이 집안의 친딸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었다. 이 집안의 물건과 사람들은 전부 임원의 것이었다.김단, 그녀야말로 남의 자리를 꿰찬 외부인이었다. 길을 안내하던 몸종이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씨를 모셨던 몸종이 혼인하여 출가하는 바람에 마님께서 쇤네를 아씨께 보내셨습니다. 쇤네는 숙희라 하옵고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시거든 쇤네를 불러 말씀하시면 됩니다.”숙희는 통통한 볼에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단은 그녀가 눈에 익었다.“혹 전에 오라버니를 모시지 않았더냐?”숙희가 놀란 듯 답했다.“쇤네를 알아보시겠습니까?”김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예전에 임학의 외별당에 드나들면서 몇 번 마주쳤던 기억이 있었다. 그녀는 임학의 몸종을 자기에게 붙인 이유를 알 수 없었다.분명 3년 전만 해도 임학은 그녀가 임원을 해치려 한다고 오해하며 그녀에게 적대심을 품었다.그런 사람의 몸종을 붙인 거로 보아, 감시하려는 게 틀림없었다.새로 안내받은 별당은 그리 넓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연못이 눈에 들어왔다. 여름이면 연꽃이 활짝 피어 꽤 아름다웠을 테지만, 지금은 연꽃이 다 지고 시든 가지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다행히 실내에 불을 지핀 덕에 따뜻했다.미리 따뜻한 물을 준비해 둔 숙희는 김단의 목욕을 돕기 위해 나섰으나, 김단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혼자 하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5-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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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임원이 선의로 건넨 말을 날카롭게 받아치는 김단을 본 임학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말에 씨가 있구나. 몸에 상처가 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뭣 하러 숨긴 것이냐?”그녀가 미리 말만 했어도 임학은 내의원에 들러 약을 받아왔을 것이다.“도련님께서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셨습니다.”집으로 돌아온 지금도 여전히 오라버니라 칭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분개한 임혁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이 집에서 어릴 때부터 네게 무술을 가르치지 않았더냐? 세답방에 과연 얼마나 강한 고수가 있었기에 이리도 다친 것이냐?”그의 말에 김단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걷어 올렸던 옷소매를 천천히 끌어내린 그녀도 서늘하게 대꾸했다.“처음에는 반항도 하였지요. 도련님 말씀처럼 세답방 나인들은 소인의 상대가 아닙니다. 하나 그들의 수법도 점점 다양해지더군요. 깊이 잠든 사이 차가운 물을 부어버린다거나, 밥을 먹을 때 남들은 국을 퍼가지만 소인에겐 하수구 물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깨끗하게 빨래한 옷들을 뒷간에 던져버리기도 하고 자신들의 일을 소인에게 떠넘기기도 했더이다.”임학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상궁마마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소인에게 돌아온 것은 매질밖에 없었습니다. 점점 저항도 하지 않게 되었고 침구가 젖으면 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하수구 물이라도 먹었습니다. 한 번은 상궁마마께서 하도 심하게 구타하여 하마터면 죽을 뻔했으나, 다행히 진산군댁 수양딸이라는 신분 덕에 죽음은 면할 수 있었지요. 그 뒤론 전처럼 심한 구타는 하지 않았습니다.”깜짝 놀란 임학의 표정에 김단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혹 소인이 못 된 마음을 먹고 일부러 그런 고초를 당했다고 여기신 겁니까?”“괴로워하거나 후회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천한 신분을 가진 소인이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괴로워할지언정, 소인 때문에 후회하지 않을 분들이라는 거 잘 알고 있나이다. 어쩌면 세답방에서 고초를 겪은 게 이 댁 아씨가 아니라 소인이라 안도하셨을 수도 있겠지요.”임학은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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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소한이 손에 든 약재 함을 내려다보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임학은 불안한 듯 재촉했다. “금일 전하께서 궐에 들라는 전교를 내린 적 없는 줄로 아네만, 혹 김단을 마중간 것이오?”임학은 소한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였고 눈빛만 봐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임학이 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제정신이오? 전에 김단이 좋다고 매달릴 땐 미동도 하지 않던 인간이, 원이의 정혼자가 된 지금 다시 김단에게 흔들리는 게 정상이오? 내 누이들을 불장난에 끌어들일 생각 마시게! 그땐 우리의 우정도 끝날 테니.”소한은 조롱 어린 시선으로 임학을 쳐다보았다.“자네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내가 보기엔 자네야말로 첫째 누이를 신경을 쓰는 것 같군.” 사실 소한의 말처럼 누구보다 김단을 신경 쓰는 것은 임학이었다. 자기 마음을 정확히 꿰뚫는 소한의 말에 임학은 목구멍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고고한 척하지 마시오. 3년 전 그날, 그 자리에 자네도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저 아이는 날 원망하기도 하지만, 자네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알고 있소.”소한이 서늘한 눈빛으로 대답했다.“마차 안에 있던 수정과는 건드리지도 않더군.”수정과는 고사하고 난로조차 건드리지 않았다.만약 큰 마님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소한의 마차에도 올라타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소한을 보자마자 예를 갖춰 인사하며 거리를 뒀다.전처럼 만나서 좋다며 인사하지도 않았고 그를 연모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리던 소한은 마음이 어지러웠다.누구보다 소한에게 다정했던 누이가, 소한을 연모하던 누이가 더는 그에게 미련 없이 돌아섰다는 말에 임학도 큰 충격을 받았다. 누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딴사람이 되자, 임학도 상당히 놀랐다. 그녀의 발에 가득 자리 잡은 흉터들이 떠오른 그는 자기도 모르게 세답방 궁인에게 화가 났다. 공주자가의 명이라 할지언정, 김단은 진산군의 여식이었다. 임학은 불편한 기색을 띠며 소한을 흘겨보았다.“전쟁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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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그날 밤, 김단은 새벽녘까지 잠에 들 수 없었다.방 안의 난로가 뜨겁게 타올라서일 수도 있고, 3년 동안 추위에 떨며 비가 새는 음침한 오두막과는 달리 너무 포근한 잠자리 때문일 수도 있었으며, 마른 이불이 너무 따뜻해서일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이 황홀하게 느껴질 만큼,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낯선 기분이 들었다.남은 생은 세답방에서 보내게 될 줄 알았으나 다행히 그곳을 벗어났다.이튿날 아침, 눈 부신 햇살이 방 안을 비췄다.그녀는 비로소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이 현실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임씨 부인이 새로 준비해 준 옷은 그녀의 몸에 알맞지 않았지만 상처는 가려줄 순 있었다.그녀는 아침 일찍 안채로 향했다. 아침 기도를 하시는 조모님을 기다리기 위해 안채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인기척을 느낀 큰 마님은 문밖으로 나와 그녀를 마주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돌아왔느냐?”짧디짧은 말이었으나 무한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김단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그녀는 안채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으며 문안 인사를 올렸다.“조모님, 그간 기체일향하시나이까?”“어서 할미에게 오거라.”큰 마님은 그녀를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팔을 들었다.김단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갔다.큰 마님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붉혔다.“많이 여위었구나.”짤막한 한마디의 말에 묵혀뒀던 설움이 밀려 온 김단은 그녀의 품에 안겼다. 몸종들도 눈시울을 붉히며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3년 전 진산댁의 모두가 친딸에게 관심을 쏟던 순간에, 한켠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던 김단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이 큰 마님이었다. 김단은 언제고 당신의 손녀이라며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그녀가 세답방에서 고초를 겪을 때, 중전마마께 간청을 올리려한 것도 큰 마님뿐이었다. 하지만 중전을 뵙기도 전에 이 사실을 알아차린 공주가 그녀를 궐 밖으로 내쫓는 바람에 세답방에서 바로 빼내지 못했다.진산군댁 큰 마님의 무모한 성정을 나무라 하는 나인에게 달려든 김단은 결국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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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임학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김단을 쳐다보았다. 김단이 철없다고 여겼던 그는, 자기 모친께서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습에 그는 진실을 알 수 있었다.김단의 입에서 나온 말이 믿기지 않았다.어릴 적부터 하나뿐인 여식을 누구보다 아끼셨던 부친께서 그런 선택을 한 게 실로 믿기지 않았다.그는 뒤늦게 깨달은 진실에 가슴이 찢기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방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혼자 남은 소한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그는 어색하게 큰 마님에게 인사 올렸다.어린 나이에 늠름한 호국 장군이 된 사내를, 용맹과 지혜를 겸비한 자를, 예의 바른 사내를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소 장군, 어서 앉으시게! 어제 보내준 귀한 약재들은 잘 받았네. 내가 직접 감사 인사를 해야 했거늘.”소한은 임원의 곁에 앉았다. “소인의 부모님들은 정년이라 귀한 약재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주상전하께서 하사하신 인삼과 녹용이니 좋은 품질일 것입니다. 큰 마님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정말 효심이 깊구려. 마침 소 장군의 혼사에 대해 논의 중이었소. 소 장군이 직접 부모님께 여쭤보게. 적절한 날을 골라 상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소.”소한의 시선이 임원에게 향했다.임원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임씨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변론했다.“아이고, 아직도 이런 것에 얼굴을 붉히면 어쩌자는 게냐?”임씨 부인은 얼른 소한에게 말을 돌렸다.“나이도 어느 정도 찼으니, 이젠 혼사를 진행할 때가 된 것 같네.”그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소한의 시선이 김단에게 닿았다.“낭자 생각은 어떻소?”갑작스러운 질문에 김단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그녀는 물론, 옆에 있던 임씨 부인과 임원도 상당히 놀란 눈치챘다.소한과 김단을 번갈아 쳐다보던 임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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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한편, 김단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들어온 큰 마님의 병세가 악화하였다.임씨 부인의 말대로 큰 마님의 건강은 예전 같지 않았다.금일 무리를 해서인지 눕자마자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다행히 큰 마님을 모시고 있던 몸종이 미리 의원을 불러왔고 침소에 누운 그녀에게 침을 놓기 시작했다. 한 시진이 훌쩍 지나서야 그녀는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김단은 처음 보는 모습에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큰 마님은 당황한 김단에게 손짓을 했다.김단은 혹여 자신 때문에 그녀의 병세가 악화할까 봐 눈물을 참으며 곁으로 다가갔다.“많이 놀랐느냐?”부드러운 목소리에 김단은 코를 훌쩍이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무병장수하시겠다고 약조하셨잖아요.”하지만 큰 마님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아 보였다.“이 할미도 오래오래 네 곁에 남아 널 지켜주고 싶구나.”큰 마님은 불현듯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 할미가 너에게 좋은 혼 자리를 알아봐도 되겠느냐?”건강이 그리 악화되지 않았을 때, 이 집안에서 자리를 잡고 있을 때, 손녀를 위한 좋은 혼사를 찾아주는 게 그녀가 김단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그 뜻을 모를 리 없었던 김단이었지만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소녀는 조모님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3년간 그녀는 많은 것들을 깨달았다.15년간 함께한 가족도 하루아침에 버리는 마당에 피도 섞이지 않은 부군에게 자신의 일생을 맡길 수 없었다.이번 생은 조모님의 곁을 지키기로 결심했다.조모님이 세상을 뜨면 이 집을 나가 홀로 살기로 했다.절에 들어가 수행을 하는 게 이 집안 사람들과 얽히는 것보단 나았다.큰 마님도 그녀의 성정을 모를 리 없었다.한번 결심한 일은 누가 뭐라 해도 할 성정이기에 큰 마님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아꼈다.김단은 큰 마님이 잠들 때까지 곁을 지키다가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그녀가 별당으로 들어가자마자 숙희가 다가왔다.“아씨, 둘째 아씨께서 찾아오셨습니다.”‘임원이?’미간을 살짝 찌푸린 김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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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그녀의 질문에 임원은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임원은 연신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아니오. 그런 적 없소. 그때 공주자가의 유리잔을 깨트린 게 나인 것은 맞지만, 낭자를 모함한 것은 내 몸종이오…”그녀는 억울한 듯 말했다.문에 비스듬히 기댄 임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한데 3년 전에는 왜 진실을 고하지 않은 것이오?”말문이 막힌 임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김단이 조롱어린 어투로 말했다.“낭자가 유리잔을 깨트렸다고 중전마마와 공주자가께 고하면 됐을 터인데, 왜 하지 않았소?”당황한 임원은 자리에서 휘청거렸다.“무, 무서웠소. 처음 궐에 들어 중전마마와 공주자가를 뵙는 자리에서 내 죄를 고하는 것이 두려웠소. 하여…”“이제 와서 왜 이런 말을 하오?”김단은 임원의 말을 중도에서 가로챘다.어떤 말로든 3년 전의 일을 무마시킬 순 없었다.임원은 흐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낭자가 날 용서만 해준다면 원하는 건 전부 돌려줄 수 있소. 아버님과 오라버니에게도 말씀해 낭자의 오해를 풀겠소. 매화당도 돌려주겠소. 그리고, 그리고 장군님도 돌려주겠소.”김단은 그제야 임원이 여기까지 찾아온 까닭을 눈치챌 수 있었다.김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내 분명히 말했소. 낭자의 부모님이고 낭자의 오라버니요.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분이오. 매화당은 내 비록 좋아하긴 하나, 대감의 심혈이 깃든 곳이니 낭자의 것이어야 하오. 만일 이곳이 탐난다면 알려주게. 낭자 말 한마디면 언제든지 가질 수 있소.”임원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오. 낭자와 거처를 다투려고 온 것이 아니오.”“알고 있소.”김단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장군님 때문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소.”잘못을 빌러 왔다고는 했지만 결국은 남자 때문이었다.임원의 속내를 알아차린 김단의 말에, 임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3년 전, 세답방에 가기 전부터 낭자의 혼처였네. 내 비록 지금 여기에 묶고 있긴 하나 그것 또한 조모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 때문이오. 하물며 난 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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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김단은 방금 벗어 놓았던 옷을 걸칠 새도 없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무슨 일이냐? 누가 이리 소리치는 것이냐?”숙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뒤를 바짝 따랐다.“쇤네도 모르겠습니다. 아씨 옷을 걸치십시오. 밖이 많이 찹니다!”하지만 김단은 자신의 옷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임원이 물에 빠졌다면 아마도 자기 별당에 있는 연못일 것이기에.그 옛날 유리잔 깨뜨린 죄로 세답방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었다. 만일 임원이 이번 사고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임학이 당장 그녀를 죽여버릴지도 모른다.김단이 도착했을 땐,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임원이 보였다.얼어붙은 물속에서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돌다리 위에 몰려든 하인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성큼성큼 다가간 김단이 그들에게 외쳤다.“뭣들 하는 것이냐? 당장 구하지 않고 뭐 하는 것이냐?”몇 명의 몸종들이 난처한 표정으로 답했다.“쇤네 때문에 아씨께서 정절을 잃으시면 어찌합니까?”“정절을 지키는 것이 생명보다 중하더냐?”김단은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몸종을 노려보더니 망설임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연못은 깊지 않았으나 찬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얼음장 같았다.연못 바닥은 진흙투성이라 발을 딛기가 어려웠다. 조금만 방심하면 가라앉을 수 있다.힘겹게 임원을 구해낸 김단이 밖으로 나오자, 숙희는 얼른 두터운 옷으로 두 사람을 단단히 감쌌다.“뭣들 하는 거야? 어서 의관을 불러와! 내가 두 분을 모시고 방으로 갈 테니 뜨거운 불을 지피고 따뜻한 생강차를 내오거라!”숙희의 화난 목소리에 구경하고 있던 다른 몸종들이 제각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임원의 몸종이 이곳으로 달려왔다. 몸종의 뒤에는 임학도 있었다.얼음물에 빠져 얼굴이 창백해진 자기 주인을 발견한 명희는 황급히 임원을 감싸안았다.“아씨 괜찮으시옵니까? 어찌 물에 빠지신 겁니까?”명희는 곧장 김단을 노려보며 따졌다.“아씨께서 우리 아가씨를 밀치신 거지요?”억울한 사람을 몰아가는 것은 3년 전 그대로였다.그녀가 뭐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5-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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