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우연은 죽는 순간이 되어서야 자신이 그저 소설 속 어느 인물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하찮은 조연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은 소우연의 쌍둥이 여동생 소우희였다. 어릴 때부터 소우희는 만인의 사랑을 한 몸에 독차지했으며 소우연이 아무리 노력하고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해도 그들은 소우연에게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결국, 소우연은 쌍둥이 여동생 대신 악명이 자자하고 성격이 난폭한 회남왕 이육진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고 결혼식 당일 도망치다가 잡혀서 손발이 잘린 채 소씨 가문 앞에 버려졌다. 그리고 소우연이 그토록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했던 가족들은 대문을 굳게 닫은 채 혹여라도 소우연과 엮이게 될까 봐 그녀를 모른 척했다. 그렇게 소우연은 살을 에이는 추운 겨울날, 소씨 저택 앞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소우연은 이육진과 결혼하여 회남왕 관저로 보내지던 순간으로 되돌아갔다. 생의 기회를 다시 얻은 소우연은 이제 더 이상 누구에게도 잘 보이기 위해 힘들게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지난 생에 빼앗겼던 모든 걸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되찾겠다고 다짐하였다. 소우연은 이번 생에서 자신의 능력과 재능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고, 뛰어난 의술로 수많은 귀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결국, 십몇 년 동안 소우연을 무시하고 하찮게 여겼던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용서를 빌었지만 마음을 굳게 먹은 소우연은 그자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부터 서로의 이익을 위해 합작을 약속했던 남자는 점점 소우연을 옥죄어 갔다. “이육진 씨, 당신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화가 잔뜩 난 소우연의 물음에 이육진은 그녀의 허리를 확 감싸며 대답했다.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갚아야지.”
Lihat lebih banyak“우희 걔는…”“그 애 얘긴 내 앞에서 꺼내지도 마라! 걔가 거짓말로 우리를 속이지만 않았어도 진원 장군부가 이 꼴이 됐겠느냐?“그 애가 중간에라도 정신 차리고 한준이에게 그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면, 어찌 한준이가 걔를 도와 우연이를 납치했겠느냐!”“그 애가 그런 짓만 벌이지 않았더라면, 한준이의 두 다리가 망가지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진숙은 입술을 깨물며 억울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아이를 저 혼자 낳은 것도 아닌데, 왜 죄다 나 혼자 책임지란 거예요…” 임진숙이 투덜거렸다.소홍범은 이를 갈며 말했다. “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어느 집안 안주인이 자식을 안 돌보는 사람이 있더냐?”그제야 임진숙은 입을 다물고 나인을 보며 말했다. “계속 말해봐라. 한준이 다리를 고칠 방법이 있지 않더냐.”나인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장안거리에서 만난 다리가 다친 사람을 태자빈 소우연이 치료했다는 일을 하나하나 자세히 전했다.“우연이가 치료할 수 있다고?”소홍범의 얼굴에 희망이 서렸다. 이틀 동안이나 사람을 시켜 유명 의원들을 수소문했지만, 힘줄이 끊어진 다리라는 소리를 듣고는 누구 하나 치료하겠다는 의원이 없었다.더욱이 요즘 조정 내에서 태자의 명성이 크게 높아졌는데도, 태자의 장인인 자신은 아무도 반기지 않았고, 큰아들과 둘째 아들 역시 조정에서 발붙이기조차 어려워졌다.몇 차례 이육진을 찾아가 관계를 좀 풀어보려 했으나, 이육진은 냉정하게 한 마디로 거절했다.“태자빈이 내게 분명히 말했소. 자신에겐 친정이 없다고 말이오.”“그러니 이 일은 진원 장군부가 태자빈에게 잘못한 것이고,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는 오직 태자빈의 뜻에 달려있소.”소홍범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우연이가 정말 독하게 마음을 먹었더구나. 내가 직접 태자부에 찾아가도 보지도 않으려 하였다.”임진숙이 말했다.“저도 하루종일 문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어요.”소홍범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는데, 자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체면 없이 버티고
나인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뭐라고 했느냐?”“어느 의원이 낫게 해줬다고?”마차 안에 있던 임진숙은 더는 참지 못하고 마차 문을 열었다. 마부가 부축하자 서둘러 마차에서 내려왔다.소년이 당황하며 물었다. “지금… 뭘 하려는 겁니까?”임진숙이 온화한 척 웃으며 말했다. “꼬마야, 겁먹지 말거라.”그녀는 바닥에 던져진 동전들을 힐끗 보고 나인을 노려본 뒤, 얼른 미소를 지으며 나인을 시켜 은자 두 냥을 가져와 소년을 달랬다.“방금 네가 말하길 네 아버지 다리가 의원 덕에 이제 겨우 붙어 다시 걷게 되었다고 했느냐?”소년은 미간을 찌푸리며 끄덕였다. “예.”“그 의원이 누군지 말해줄 수 있겠느냐?”소년은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만안당의 의원이셨습니다. 아, 이제는 태자빈 마마가 되셨지요.”“태… 태자빈 마마?”임진숙은 입이 벌어진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소우연이 정말 다리를 고칠 줄 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그렇다면 태자 전하의 다리도 소우연이 고친 것이란 말인가?그러나 아직 그녀가 의심하고 있는 사이, 소년은 곁에 있는 중년 남자에게 물었다.“아버지, 걸을 수 있으시겠어요?”중년 남자가 조심스럽게 표정을 찡그리며, 소년의 부축을 받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입을 모았다.“태자빈 마마는 정말 살아있는 보살님이셔! 무료로 진찰도 해주시고, 약 값도 싸게 받으시고… 의술은 또 얼마나 뛰어나신지, 끊어진 다리 힘줄도 이으셨다잖아. 진짜 신의 시라니까!”“그것뿐인가? 태자 전하께서 회남왕이셨을 때 다리가 여러 해 불편하셨는데, 그걸 고친 것도 태자빈 마마 아니냐!”“우리 상운국에 또 신의가 나타나신 거지!”“태자 전하께서 정말 하늘이 내린 태자빈을을 얻으셨구나. 태자빈 마마가 아니었으면 전하께서는 아직도 자유롭게 걷지도 못하셨을 거야…”이런 온갖 소리가 임진숙과 나인의 귀에까지 그대로 들어왔다.그 사이 소년은 아버지를 부축하며 서서히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그랬던 거군요.”이지윤은 소우희를 부드럽게 다독이며 위로했지만, 방 안에 널린 지저분한 파편들을 보고는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소우희의 성정이 이토록 괴팍할 줄은 미처 몰랐다.“그리고 그 개만도 못한 자식 말이에요,”“소우연이 왔을 때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려 했어요! 세자 저하, 이제 저 인간을 살려두면 안 됩니다!”소우희는 눈물을 닦으며 침상 위에서 증오의 눈초리로 그들을 쏘아보는 평춘왕 이종대를 가리켰다.“오늘 소우연이 이런 꼴을 보고 틀림없이 의심했을 겁니다. 만약 태자와 상의하여 사람을 보내 조사하기라도 하면, 우린 끝장이에요!”이지윤 역시 마음이 몹시 다급해졌으나, 얼굴에는 조금도 티를 내지 않고 침착하게 소우희를 바라봤다.‘이 여자… 교양이라곤 없고, 양심마저 결여되어 있구나. 정녕 하늘이 내린 ‘봉황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맞을까?’‘이런 사람이 과연 태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오늘 평춘왕부에서 벌어진 일은 너무도 심각했다. 소우희의 말대로, 소우연이 태자부로 돌아가면… 소우연은 오늘 일을 태자에게 이야기할 것이 분명했다.그렇게 된다면 평춘왕이 죽기 전이든 후든 간에, 그들은 반드시 이 사건을 빌미로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다.그는 지금껏 숨어 살며 어렵사리 목숨을 유지해왔다.그런데 이 귀한 인생을 고작 소우희 같은 여인 하나 때문에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이런 생각을 하며, 이지윤은 소우희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혔다.“개 같은 것들… 천벌을… 받을 것이다…!” 이종대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겨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바로 그 개 같은 놈이 아니 덥니까? 그때 왕비마마를, 또 첩실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이지윤이 차갑게 비웃었다.그는 다시 소우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그분들에게 인간 이하의 고통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아버지께서 당하는 모든 건 당연한 대가입니다.”소우희가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세자. 저 사람은
그러자 그가 물었다. “평춘왕은?”소우희의 얼굴빛이 창백하게 질렸다.그때 임진숙이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볍게 누르며 소우희 대신 대답했다.“네가 아직 몰랐구나. 평춘왕의 병세가 심각해 네 동생 혼자서 왕부를 떠받들고 있단다.”“병세가 심각하다고요?”“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이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것 같더구나.” 임진숙은 짐작하는 말투였으나 소우희의 말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다.소한준은 비웃듯 웃으며, 소우희를 향해 독화살 같은 눈빛을 쏘았다.“소우희, 내가 처음 왔을 때 너는 뭐라 했지? 왕부에서 네가 힘도 없고 입지도 없으니 폐가에서 지내라며 나를 구석으로 몰아넣었지. 실상은 내가 귀찮고 성가셔서겠지. 내가 다쳤으니 곁에 두면 네가 의술 못 쓰는 게 들통날까 두렵고, 밤마다 아픈 내가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 네 잠을 방해할까 두려워서였겠지!”소우희가 억울한 듯 말했다. “아니에요, 오라버니, 그런 게 아니에요.”“다시는 날 오라버니라 부르지 마라! 정말 후회가 된다. 너만 아니었으면 내 우연이에게 그리 모질게 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후회도 소용없구나.”“저는…”소우희는 화가 치밀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과거 어머니도, 오라버니도, 아버지와 다른 오라버니들도 전부 다 자신만 좋아하지 않았던가.어째서 소우연이 태자빈이 된 이후로 사람들이 모두 달라졌단 말인가?‘두고 보십시오. 제가 훗날 태후가 되는 날, 여러분들이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지 참으로 기대가 되는군요!’“그만해라. 이제 네 오라버니는 누가 돌봐준단 말이냐?” 임진숙이 물었다.소우희가 손짓으로 아무 하인이나 불렀다.“앞으로 네가 오라버니를 잘 보살펴라. 만일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네 목숨은 없을 줄 알 거라.”하인은 부들부들 떨며 급히 고개를 숙였다. “예, 소인이 정성껏 모시겠습니다.”모든 것을 처리한 뒤, 임진숙은 그제야 안심하고 떠났다.소우희는 이미 소한준의 증오와 혐오 어린 눈빛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고, 더 이상 말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오므리고 있던 소우희는 잔뜩 화가 난 소한준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때, 임진숙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는 소한준 곁으로 다가왔다.“한준아, 걱정하지 말거라. 이 어미가 널 위해 이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의원을 모셔올게. 꼭 네 다리를 고쳐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전장을 누비는 장군에게 다리가 부러진다는 건 그의 목숨을 앗아간 거나 마찬가지다. 이육진은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이런 사람이 나중에 황위를 물려받으면 그야말로 폭군이 될 것이다.상황이 복잡해졌지만 일단 현재 가장 급선무는 소한준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다.“이 일이 우희 탓만은 아니야. 그렇다고 너희 남매가 원수 사이로 지낼 수는 없지 않으냐?"“어머니! 어떻게 아직도 소우희의 편을 드시는 겁니까?”소한준은 극심한 통증을 가까스로 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소우희가 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제가 어찌 소우희를 도와 소우연을 납치했겠습니까? 그럼 제 다리도 부러질 리가 없었겠지요.”임진숙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마음이 너무 아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한편, 소한준의 말에 소우희가 엉엉 울면서 대꾸했다.“전 소우연과 이육진이 그렇게 잔인할 줄 몰랐습니다. 오라버니의 다리를 부러트릴 줄 정말 몰랐습니다. 소우연이야말로 우리들 중에서 가장 악하고 잔인한 사람입니다.”남매가 싸우는 소리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 임진숙은 탁자를 확 내리치며 큰소리로 외쳤다.“둘 다 조용히 하거라! 네가 이 저택에서 실권을 쥐고 있었으면 네 오라버니에게 편히 지낼 곳 하나는 마련해 줬어야지! 그리고 네가 많이 바쁘다면 믿을 만한 사람을 시켜 네 오라버니를 잘 보살폈어야지! 이 어미가 지금 당장 돌아가서 방법을 생각해 보마. 소우연에게 가서 무릎 꿇고 빌어야 한다고 해도 태자 저하께 한준이를 장군 관저로 데리고 가게 해달라고 허락을 받을 것이다!”이곳 환경은 행군이나 전쟁 때와 조건이 거의 똑같았다. 소한준은 속으로 화도 나고 원망도 차올랐지만 아무것도 할
“그렇다고 한들 우리가 어찌할 수 있겠느냐?”소우희가 훌쩍거리며 대꾸했다.“그러게 말입니다. 소우연은 이제 기세가 더욱 등등해졌습니다! 어머니, 저를 너무 나무라지 말아주십시오. 전 사실 이 저택에서 외롭고 힘들게 지내고 있습니다. 왕야께서 앓아 눕고 세자 저하는 계모인 저에게 태도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임진숙은 그런 소우희를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팠다. 어렸을 때부터 귀하게 키운 딸을 조금 전 알게 된 진실들로 무작정 미워하고 원망할 수는 없었다.유일하게 안타까운 건 소우희가 소우연보다 훌륭하게 크지 못했다는 점이다.임진숙은 이내 손으로 소우희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면서 소한준에게 말했다.“아무래도 내가 다시 가서 빌어보아야겠다.”“소우연에게 빈다고요? 뭘 빌겠다는 말씀이십니까?”“네 오라버니가 지내는 이곳은…”임진숙은 가구 하나 없는 방 안을 쓱 훑어보고는 다시 소한준에게 시선이 꽂혔다.“네 오라버니를 계속 평춘왕 관저에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느냐?”“전…”임진숙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네 의술은 전부 가짜이지 않느냐?”소한준을 이곳에 둘 바에는 차라리 장군 관저로 데리고 가서 좋은 의원을 찾아 다리를 치료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한편, 소우희는 임진숙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임진숙은 고개를 돌려 소한준을 쳐다보았다. 그의 몸에서 분노와 살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억지로 참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소우희에게 꽂혀 있었다.‘아직도 연기를 하고 있어!’이 순간까지도 소한준은 소우희가 도대체 왜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를 이렇게 괴롭게 만드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만약 소한준이 형들의 말을 듣고 소우희의 본모습을 일찍 알아봤더라면 두 다리도 부러지지 않았을 것이다.생각할수록 후회가 막심한 소한준은 자신의 뺨을 미친듯이 때렸다.“한준아, 한준아… 이러지 말거라.”임진숙이 다급하게 말리자 소한준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말했다.“어머니, 제가 소우연에게 미안한 짓을
“어머니…”소우희는 화가 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소우연에게 말했다.“이게 바로 마마께서 원하는 겁니까? 지금 저한테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한편, 소우연은 손톱을 만지작거릴 뿐, 확실하게 대답하지는 않았다.“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오늘 단지 소씨 부인과 함께 소 장군님을 보러 왔을 뿐입니다.”“소 장군님? 마마, 대체 어떻게 그런 호칭을 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이의 혈연관계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합니까? 어찌 이리 잔안하고 매정하십니까? 마마가 아니었다면 전 평춘왕 관저에 시집을 오지 않았을 것이고 셋째 오라버니의 다리도 부러지지 않았을 겁니다!”소우희가 이를 악물며 구구절절 얘기했지만 소우연은 그저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뭐 잘못된 게 있습니까? 당신들이 먼저 저를 괴롭히지 않았습니까? 전 그저 살짝 반격을 가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억울하고 분합니까? 그건 대체 어느 나라 법이란 말입니까?”“낳아주고 키워준 부모님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게 법이지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혼인 상대를 정해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딴 헛소리가 나옵니까?”소우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우연이 소우희를 힐끗 흘겨보았다.“목소리 큰 자가 이기는 세상이 아닙니다.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님의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요? 애초에 저와 혼사를 맺은 상대가 누구인지 다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회남왕과의 혼사는 황제께서 왕비에게 하사하신 겁니다. 이 나라의 모든 백성은 황제 폐하의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하지요. 당신들은 황제의 뜻을 어겼습니다. 그런데 황제께서 그 책임을 묻지 않으신 걸 감사하게 여기고 죽은 듯이 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감히 지금 겁도 없이 개처럼 소리까지 질러요? 왕비는 정녕 무서운 게 없습니까?”“뭐라고요? 개처럼 소리를 질러요?”“길거리를 떠도는 개도 왕비보다 깨끗하고 착합니다.”소우연의 말에 얼굴이 벌겋게
“어머니…”“어머니라고 부르지도 말거라!”임진숙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평소에 한준이가 너를 얼마나 예뻐하고 아껴줬는데 넌 어떻게 네 오라버니를 이 지경으로 대할 수 있어!”임진숙은 소우희가 너무 실망스러웠다.한편, 임진숙의 호통에 소우희는 어느새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어머니, 오라버니를 다치게 한 사람은 분명 소우연입니다. 태자 저하께서 오라버니의 다리를 부러트렸는데 어찌 소우연을 탓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되레 아무 잘못 없는 저를 나무라시는 겁니까? 그래요. 전 이제 소씨 가문에 아무 소용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들 저를 만만하게 여기고 버리려는 겁니까?”“너…”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임진숙은 너무 기가 막혀서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이때, 소한준이 아픈 다리를 꾹 참고 쓰러지려는 임진숙을 부축하더니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소우희를 쳐다보았다.“내가 이 저택에 들어오고 나서 넌 나를 딱 한 번 보러 왔다. 그 뒤로 나한테 신경조차 쓰지 않은 게 사실이지 않느냐? 나의 두 다리를 치료해주기 싫은 것이냐?”“전… 오라버니, 제가 오라버니를 위해 의원을 모셔오지 않았습니까?”“그자는 의원이라고 할 수도 없어! 민간요법밖에 할 줄 모르고 심지어 지금도 어디서 낮잠을 자고 있을 것이야!”조금 전,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마당 앞에 나타나자 화들짝 놀란 의원은 큰일났다 싶어서 몰래 도망을 쳤다.이때, 누군가가 보고를 올렸다.“왕비님, 의원이 보이지 않습니다. 잡아올까요?”“잡아와! 당장 잡아와서 그자의 목을 베어라!”“네!”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이 상황이 너무 창피한 소우희는 임진숙과 소한준 앞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오라버니, 전 오라버니를 일부러 모른 척한 게 아닙니다. 다만 요즘 너무 바빴을 뿐입니다.”말을 하던 소우희는 또다시 목을 박박 긁었다. 요 며칠동안 그녀는 짜증이 나지 않는 순간이 없었으며 그뿐만 아니라 온몸이 가려워서 미칠 지경이었다.몸을 긁던 소우희는 이내 고개를 돌려 소우
소우희가 우물쭈물 망설이고 있을 때 소우연은 다시 한번 평춘왕을 향해 두어 걸음 다가갔다.화들짝 놀란 소우희는 소우연이 진맥이라도 할까 봐 서둘러 제지했다.“마마, 평춘왕은 지금 몸과 마음이 많이 편찮으셔서 힘든 사람입니다. 푹 쉴 수 있게 가만히 내버려두십시오.”소우연은 소우희의 말에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 사실 소우희와 이지윤이 저지른 짓을 이육진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태자 저하도 신경 쓰기 싫어서 가만히 있는데 태자빈인 소우연도 당연히 이 일에 괜히 신경 쓸 필요가 없다.어차피 소우희는 결국 벌을 받게 되어 있으니까!“우희야, 너 지금 뭐라고 한 것이냐? 그 사람은 네 오라버니야. 그런데 볼 필요가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안색이 확 굳어진 임진숙은 소우희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이 점점 낯설게 느껴졌다.전에 평춘왕 관저에 몇 번이나 찾아왔는데 소우희는 단 한번도 만나주지 않았다. 그때는 딸이 이 저택에서 괴롭힘을 당하면서 힘들게 살고 있는 건가 싶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오늘 이렇게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이 저택 안의 호위병들도 소우희의 눈치를 보고 그녀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고 있다.소우희가 왜 그녀에게 거짓말을 한 걸까?이때, 소우희가 임진숙 곁에 다가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어머니, 제가 셋째 오라버니를 보살피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십니까?”“그 아이는 다리가 부러졌다. 그런데 어미로써 어찌 걱정되지 않겠느냐? 너희들이 찾은 의원이 한준이의 다리를 고칠 수 있는 것이냐?”소우희가 대충 얼버무렸다.“그, 그럼요. 고칠 수 있습니다.”“그래, 그럼 앞장 서거라. 난 오늘 꼭 한준이를 봐야겠다.”말을 하던 임진숙은 곁눈질로 소우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소한준의 다리가 부러진 건 분명 소우연 탓이지만 소우연은 이제 감히 우러러볼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기에 그 책임을 제대로 따질 수도 없다.이내 시선을 거둔 임진숙은 소우희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왜 가만히 서있기만 하고 앞장서지 않는 거
“안 돼!”극심한 통증에 소우연은 큰소리로 외치며 눈을 번쩍 떴다.소우연 앞에 펼쳐진 건 화려하게 꾸며진 방이었으며 향초가 불에 타고 있는 소리가 들렸고 은은한 향도 퍼지고 있었다.조금 전까지 온몸을 괴롭히던 통증도 전부 사라진 것만 같았다.소우연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방을 쓱 훑어보았고 단번에 이 방이 신혼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고개를 숙여보니 자신은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이 혼례복은 소우연이 쌍둥이 여동생 소우희를 위해 3년에 거쳐 직접 만든 혼례복이었는데 결국 소우연이 이 혼례복을 입고 시집가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리고 소우연의 결혼 상대는 악명이 자자한 회남왕 이육진이다.상운국에서 명망 높은 전쟁의 신이었던 이육진은 3년 전 전쟁에서 부하에게 배신을 당해 위험한 상황에 처했었다. 결국 목숨 걸고 싸워서 위험한 상황을 벗어났지만 그 과정에서 온몸의 신경들이 전부 잘려 폐인이 되고 말았다.그 뒤로 이육진은 성격이 난폭해지기 시작했으며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노비와 시녀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해하기도 했다.황제가 이육진에게 혼인을 몇 차례나 하사했지만 신부들은 혼사를 치른 이튿날 바로 싸늘한 주검이 되어 회남왕 관저 밖에 버려졌다.그러다가 한 달 전, 이육진의 모친 덕빈은 황제 앞에서 난동을 부리며 다시 한번 혼인을 하사해달라고 했고 그 상대가 바로 진원 장군 가문의 둘째 딸 소우희였다.어렸을 때부터 소우희를 애지중지 키운 소씨 가문에서는 당연히 사랑하는 딸을 이육진에게 보낼 수 없었기에 결국 소우연이 쌍둥이 여동생 대신 이육진과 혼인을 하게 된 것이다.사실 소우연은 오래 전부터 연모하는 사내가 있었으며 어렸을 때부터 함께 큰 두 사람은 혼인을 약속한 사이이기도 했다.때문에 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시집을 가기 싫었고 더군다나 회남왕에 관한 소문이 너무 흉흉한 탓에 겁이 나기도 했다.그러다가 혼사가 이뤄진 당일 날, 소우연은 소우희의 꼬드김에 넘어가 결국 도망을 결심하게 되었는데 멀리 도망치기도 전에 다시 잡혀오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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