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우연은 죽는 순간이 되어서야 자신이 그저 소설 속 어느 인물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하찮은 조연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은 소우연의 쌍둥이 여동생 소우희였다. 어릴 때부터 소우희는 만인의 사랑을 한 몸에 독차지했으며 소우연이 아무리 노력하고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해도 그들은 소우연에게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결국, 소우연은 쌍둥이 여동생 대신 악명이 자자하고 성격이 난폭한 회남왕 이육진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고 결혼식 당일 도망치다가 잡혀서 손발이 잘린 채 소씨 가문 앞에 버려졌다. 그리고 소우연이 그토록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했던 가족들은 대문을 굳게 닫은 채 혹여라도 소우연과 엮이게 될까 봐 그녀를 모른 척했다. 그렇게 소우연은 살을 에이는 추운 겨울날, 소씨 저택 앞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소우연은 이육진과 결혼하여 회남왕 관저로 보내지던 순간으로 되돌아갔다. 생의 기회를 다시 얻은 소우연은 이제 더 이상 누구에게도 잘 보이기 위해 힘들게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지난 생에 빼앗겼던 모든 걸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되찾겠다고 다짐하였다. 소우연은 이번 생에서 자신의 능력과 재능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고, 뛰어난 의술로 수많은 귀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결국, 십몇 년 동안 소우연을 무시하고 하찮게 여겼던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용서를 빌었지만 마음을 굳게 먹은 소우연은 그자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부터 서로의 이익을 위해 합작을 약속했던 남자는 점점 소우연을 옥죄어 갔다. “이육진 씨, 당신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화가 잔뜩 난 소우연의 물음에 이육진은 그녀의 허리를 확 감싸며 대답했다.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갚아야지.”
View More오늘, 소현준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그 순간, 소우연이 가볍게 웃었다.“소 대인께서는 대리사경이시니, 직접 조사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소우희가 대체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지 말입니다.”소우연은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그리고는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정말이지… 이젠 웃기지도 않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로 저를 부르지 마세요.”그녀는 정연과 함께 가볍게 옷깃을 정리하며 장군부의 정원을 나섰다.소 노부인은 입술을 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임진숙은 딸을 품에 안고 있었지만, 소우연의 뒷모습을 보며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리고, 소현준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그녀를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원래 소우연에게 좋은 감정을 가진 적이 없었다.그녀가 회남왕비가 된 후, 그녀와의 만남은 불과 두 번뿐이었다.그런데 그녀는 더 이상 ‘오라버니’라 부르지도 않았다.“소 대인.”마치 남을 대하듯, 차갑고 거리감 있는 호칭을 사용했다.‘이 아이는 정말 장군부와의 인연을 끊으려 하는걸까…?’그때, 소 노부인이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약은? 약은 어디 있느냐?”그녀는 한동안 소우희를 바라보았고, 이내 고개를 돌려 소우연에게 물었다.소우연은 가볍게 돌아보며 말했다.“혹시 소우희가 할머니께서 도와주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고 일부러 내놓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소우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할머니, 절대 아닙니다! 아니에요!"그러나, 소 노부인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결국,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으며 말했다.“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그녀의 시선이 소우희를 향했다.소우희는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소우연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할머니께서는 이미 답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소 노부인은 고개를 저었다.“우희야, 설마 정말로 할미를 원망하느냐?”황제의 어명을 그녀가 어찌 거역할 수 있었겠는가.소우희의 혼사를 두고 가족 모두가 얼마나 노력을 했단 말인가.온 가족이
소 노부인은 며칠째 두통에 시달려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더군다나 소우희의 울음소리가 계속되자, 머리가 더욱 욱신거리는 듯했다.그녀는 짜증 난 듯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울고 또 울고! 진정향 하나 준비하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그녀는 한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신음을 흘렸다.“정말 아파 죽겠구나.”하지만 소우희는 여전히 울기만 할 뿐이었다.임진숙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딸의 온몸이 멍투성이인 걸 보니, 혼인 후 얼마나 고통받았을지 짐작이 가서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러나, 그녀의 원망은 곧 소우연에게로 향했다.“어차피 가족 아니냐? 이미 네가 맡기로 했으면, 제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어찌 할머니께 효도할 줄도 모르느냐?”소우연은 냉정하게 응수했다.“방금 전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단 한 번도 그런 일을 맡은 적이 없습니다.”사실, 과거에는 소 노부인의 진정향을 늘 그녀가 만들어 왔다.하지만 공은 늘 소우희가 가로챘을 뿐이었다.소우연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더 이상 볼일도 없으니, 저는 왕부로 돌아가겠습니다. 왕야께서 기다리시니 말입니다.”정연이 그녀에게 다가와 부축했다.그때, 소우희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소우연, 너… 그날! 너랑 회남왕이 평춘왕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소우연은 일부러 모른 척 되물었다.“언제 말하는 거야?”“내가 혼인한 날!”소우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혼례 첫날밤, 평춘왕이 나에게 이상한 질문을 했어. 도대체 평춘왕에게 무슨 말을 한 거지?”소우연은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었다.“이상한 질문이라니?”“어떤 질문이었는데 내게 그리 화를 내는 것이야?”소우희는 그녀를 노려보았다.“너희가 평서왕세자와 나의 사이가 각별했다고… 그렇게 말했다더라!”소우연은 피식 웃었다.“틀린 말은 아니지 않아? 넌 지금도 세자 저하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며 따르고 있지 않느냐.”그녀는 일부러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사실, 그날 밤.소우연은 그냥 지나가는 말로, 소우희에게 ‘
방금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는데, 자세히 보니 소우희의 얼굴이 온통 멍투성이로 가득했다.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소우연은 시선을 거두지 않고 담담히 물었다.“이제 대답해야 하지 않겠느냐? 대체 언제쯤 약재를 가져올 것이냐? 할머니의 약은 언제 만들 수 있는지 말해보란 말이다.”소우희는 얼굴을 감싸 쥔 채 몸을 떨었다.입을 열지 못한 채, 그저 흐느끼며 소 노부인의 발치에 몸을 웅크렸다.소 노부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손녀를 내려다보았다.“말을 해야지. 도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해 보거라.”“할머니…”소우희의 목소리는 쉰 듯 갈라져 있었다.마치 며칠 밤을 내내 울기라도 한 것처럼.소우연은 문득 떠올랐다.평춘왕과의 혼례 후, 첫날밤에 들려온 끔찍한 비명 소리.그때 진우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던 기억이 난다.그녀는 직접 보지 못했지만, 이제야 모든 것이 선명하게 그려졌다.소우희의 비참한 몰골을 보며, 소우연은 속으로 냉소했다.‘하지만… 이건 내가 전생에 겪었던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소 노부인의 거실에는 소우희의 흐느끼는 소리가 가득 찼다.소우연은 짜증이 밀려왔다.“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난 결코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소우희는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고, 눈물에 젖은 얼굴로 소우연을 노려보았다.“어차피 너도 이 약을 만들 수 있잖아!”그녀가 화를 내며 소리친 순간, 거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모두의 시선이 소우연에게로 향했다.소우희는 기세를 몰아 말을 이었다.“나는 예전에 너에게 가르쳐 주었어. 할머니께 효도를 다하고 싶다며, 앞으로 진정향은 네가 만들겠다고 했잖아!”그녀는 태연히 거짓말을 늘어놓았다.소우연은 두 눈을 크게 떴다.소우희가 이제 와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사람이 벼랑 끝에 몰리면, 제정신을 잃고 아무 말이나 하는 법이지.’소우연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그렇다면…”그녀는 천천히 말했다.“아버님과 오라버니들이 군에서 쓰는 약들도 내가 배워서 만들어야겠
소우연이 정당에 들어서자, 소우희가 소 노부인 앞에 무릎을 꿇고 흐느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한 떨기 비에 젖은 꽃처럼 보이지만, 그녀에게는 익숙한 장면이었다.그 순간, 정연이 또렷한 목소리로 선언했다.“왕비마마께서 도착하셨습니다!”그 한마디에, 소 노부인과 임진숙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소 노부인은 코웃음을 치며 냉랭하게 말했다.“이제 내가 손녀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냐?”임진숙 역시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소 노부인의 말을 듣고는 다시 앉아버렸다.“오늘은 네 동생이 귀녕하는 날이다. 가족끼리의 모임일 뿐인데, 굳이 격식을 따질 필요가 있겠느냐.”그녀의 시선이 곁에 서 있는 정연에게 향했다.이 회남왕부의 시녀는 어쩜 이렇게 오만하단 말인가?장군부에서까지 왕부의 위세를 과시하려 드는 것인가?그러나 소우연은 개의치 않았다.그녀는 주변을 둘러본 뒤, 소 노부인 옆의 주좌로 걸어가더니 망설임 없이 앉았다.정적이 감돌았다.소우연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소씨 가문의 예법이야 익히 알고 있습니다. 괜한 형식적인 예법은 생략해도 괜찮겠지요?”“너…!”소 노부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왼편의 주좌는 오직 소홍범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소 노부인조차 함부로 앉지 않는 자리인데, 소우연이 거리낌 없이 그곳에 앉아버린 것이다.소우연은 차분하게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그리고 태연하게 되물었다.“제가 이 자리에 앉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소 노부인과 임진숙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네가 어쩌다가 이렇게 변한 것이냐?”소 노부인은 이를 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전혀 예의도 없고, 가문을 존중하는 태도도 없구나.”소우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는 할머니의 손녀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회남왕비입니다.”그녀의 시선이 차갑게 번뜩였다.“비록 저는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을 존중하고자 하나, 이곳의 예법이 왕야께, 나아가 폐하의 귀에 들어간다면, 소씨 가문은 군신의 예를 무시했다고 비난받게 될 것입니다
신방에서 보낸 첫날밤.그는 이미 그녀의 눈부신 살결을 한차례 본 적이 있었다.그 기억은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점점 또렷해지며, 그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속이 문란해진 거지?”“한심하게도, 내 몸 하나도 다스리지 못할 줄이야.”소우연은 목욕을 마친 후, 새로운 속옷으로 갈아입고 조용히 침상으로 다가왔다.이육진은 눈을 꼭 감고, 마치 이미 잠이 든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그녀는 촛불을 불어 끄고, 조심스럽게 침상 위로 올라갔다.혹여나 그를 깨울까 싶어, 숨소리마저 가볍게 죽인 채로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지금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만약 그녀가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았다면, 그의 귀끝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숨 막히는 밤이었다.그는 간신히 자신을 억눌렀다.그녀의 숨결이 고르게 변하고, 완전히 잠든 것이 확인된 후에야 이육진은 조용히 눈을 떴다.어둠 속에서 그녀의 옆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그러다 문득, 낮에 용강한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대의 운명은 부인을 만나면서부터 바뀌었소.”그녀가… 정말 그의 운명을 바꾼 걸까?왕부에서의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그러나 열이틀째 되는 날, 진원 장군부에서 소우연을 부르러 사람이 왔다.이육진은 이미 조정으로 떠난 후였다.그가 하직하려면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은 시각이었다.정연이 조용히 물었다.“왕비마마, 장군부로 가실 겁니까?”“마마, 제발 한 번만 가 주십시오!”소씨 가문의 심부름꾼은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연거푸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이렇게까지 간절하게 사정하는 걸 보면, 장군부에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이 틀림없었다.날짜를 계산해 보면, 오늘은 소우희가 친정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혹시… 소우희가 무슨 문제라도 일으킨 걸까?그래서 소씨 가문에서 그녀를 억지로 부르려는 것일까?“왕비마마, 아니… 우연 아씨… 제발 한 번만 가 주세요.”
이육진은 가볍게 헛기침하며 용강한을 바라보았다.“용공, 무슨 가르침이라도 받은 것이오?”용강한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아니, 전혀 없소.”“혹시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이오?”“아니오. 아주 맛있소.”‘그렇게 맛있다면서 네 눈은 왜 자꾸 연이에게 가는 것이냐?’“그럼 다행이군. 마음껏 먹으시오.”이육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단단히 결심했다.다음번엔 이 자를 절대 왕부에서 밥 먹게 하지 않겠다고.용강한은 가볍게 웃으며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그는 방금 전까지 소우연의 관상을 보고 있었다.운명별만으로는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막상 직접 얼굴을 보니 시각적 충격이 상당했다.언뜻 보기엔 요염한 미인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화장기 하나 없는 맨얼굴이었음에도 얼굴선이 단정하고 기품이 넘쳤다.의상 또한 소박하면서도 세련되어 그녀의 기품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손짓 하나, 발걸음 하나에도 봉황이 내려앉은 듯한 우아한 기세가 서려 있었다이제는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앞으로 그녀는 이육진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다져야 했다.이 두 사람은 언젠가 평생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 분명했다.용강한은 떠나기 전, 단정하게 자세를 가다듬고 소우연에게 예를 올렸다.“오늘 환대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마.”그러고는 흠천감 용공답게 흰 소매를 살짝 날리며 자리를 떠났다.소우연은 어리둥절했다.‘…저 사람, 왜 나한테 저리도 공손하게 구는 걸까?’책에서는 용강한이 냉정하고 남과 쉽게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라고 적혀 있었다.단, 이육진과 심소균만은 예외였지만 말이다.“왕야, 용공이 오늘 와서 왕야께 무슨 말을 했습니까?”책 속에서 용강한은 이육진과 친밀한 관계였고, 몇 번이나 그를 구해 준 존재였다.그야말로 믿을 만한 벗이었다.이육진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밥 얻어먹으러 왔다더군.”“……”이 대화를 계속해야 할까?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용강한에 대해 묻지 않았다.날이 저
용강한은 바둑판을 내려다보다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방금까지 팽팽했던 승부는, 이육진이 방금 둔 한 수로 단번에 갈렸다.역시나, 시운이 도는 자의 기세란 두려운 법이다.이육진이 조용히 물었다.“자네도 소우희가 타고난 ‘봉황의 운명’이라 믿으시오?”용강한은 태연하게 대답했다.“그렇소. 자네가 모를 수도 있지만, 그 노도사는 바로 어릴 적 자네의 운명을 점쳤던 사람이었소. 그 분은 내 스승이셨지…”“그게 정말이오?”“그렇소. 내가 내 스승을 어찌 헐뜯을 수 있겠소?”이육진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어쩐지, 그래서 그동안 내가 점을 쳐달라 하면 늘 피한 거였군.”용강한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사실은 여러 번 봐 주었소. 다만, 그 당시 자네에게 좋지 않은 점괘만 나왔을 뿐이지.”“그러다가 자네가 우연 아씨와 혼인한 후, 명운이 변하기 시작했소.”이육진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부인이 내 명운을 바꿨다는 뜻이오?”“십중팔구 그렇다고 봐야지…”그는 손에 들고 있던 바둑돌을 바둑통에 툭 던졌다.“지금 부인의 운명별은 점점 밝아지고 있소. 자네 운도 마찬가지고.”“이런 기회는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지.”“기회라…”이육진은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 뒤쪽 창문을 열었다.맑고 푸른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가슴 한구석에서 낯선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과거에는 흠천감의 점괘 따위 믿지 않았다.하지만 용강한과 가까워지고, 그리고 네 해 전 황태자 자리를 잃은 후부터는 점점 신뢰하게 되었다.용강한은 오늘 전할 말을 모두 전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육진은 예의상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권했지만, 예상외로 용강한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왕야가 처음으로 나를 식사에 초대하는데, 당연히 응해야 하지 않겠소?”“……”방금 그 말은 그냥 하는 소리였는데. 하지만 용강한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그는 직접 보고 싶었다.소우연이라는 여인이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하늘의 운명을 거스르는지 말이다.간석이 주방에서 저녁 종
남의 입을 통해 듣는 것보다,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이 훨씬 짜릿한 법이다.하지만 이육진의 기대 가득한 시선을 보고, 소우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남자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소우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육진의 휠체어를 밀었다.그 순간,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민수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그 눈빛은 어딘가 어두웠다.부드러우면서도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할 말이 있다고?소우연은 헛웃음을 지었다.이 남자가 나한테 할 말이 남아 있긴 할까?섣달그믐날, 그가 했던 말이란 결국 고작해야 이육진이 후사를 보게 되면 평서왕부에 불리할 거란 경고뿐이었다.“연아…”이육진은 소우연이 자신을 밀던 손을 멈춘 것을 느꼈다.뒤돌아보니 그녀는 이민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이육진의 눈빛이 서늘해졌다.가슴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불쾌한 감정이 피어올랐다.소우연은 허리를 숙여 그를 바라보았다.“왕야?”왜 멈춘 걸까?“가자.”그렇다. 이 평춘왕부에 오래 머물 이유가 없었다.소우연은 다시 이육진을 밀며 연회장을 가로질렀다.그녀를 향한 수많은 시선이 따라왔지만, 무슨 의미인지 굳이 짐작할 필요도 없었다.그저 잘나가던 황태자가 하루아침에 폐인이 된 걸 안타까워하는 동정의 눈빛이라고 생각하였다이민수를 지나칠 때, 그는 소우연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마치 무언가 말을 남기려는 듯. 이육진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가슴 한구석이 찝찝했다.왕부에 돌아온 후.소우연은 이락원으로 향했다.직접 이육진을 위한 약재를 조제하고, 연고를 만들기 위해서였다.이육진은 본채의 서재로 돌아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흠천감의 용강한이 그를 찾아왔다.이육진은 침상에 앉아 조용히 바둑판을 가리켰다.“한 판 두겠소?”용강한은 피식 웃었다.“운이 트일 땐, 당연히 축하판을 둬야지.”그가 가볍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흰색 도포가 부드럽게 휘날렸다.마치 속세를 떠난 신선 같았다.“그 말은 무슨 뜻이오?”이육진은 눈썹을
신부는 가마를 타고 가는 내내 울어댔다.소우연은 그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둥글넙적한 얼굴의 평춘왕이 울고불고하는 소우희를 번쩍 들어 말 위에 태우는 모습이라니…그야말로 눈앞에 선한 장면이었다.이육진이 조용히 말했다.“우리도 슬슬 가볼까?”소우연은 소우희가 신랑과 함께 예를 올리는 모습을 직접 못 보는 게 아쉽다고 속으로 생각했다.정월 구일.집을 나서자 거리에는 온통 붉은색이 가득했다.집집마다 붉은 대련을 붙이고, 붉은 초롱을 매달아 한껏 경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평춘왕부 밖에는 터진 폭죽 껍질이 온통 붉게 나뒹굴었고, 꽹과리와 피리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소우연은 이육진을 살짝 밀었다.계단을 올라설 때, 진규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그녀를 도왔다.그 순간, 이육진의 동생 이지약이 그가 가면을 쓴 채 나타난 것을 보고는 놀란 기색을 보였다.하지만 이내 서둘러 다가와 정중히 인사했다.대청에서는 중매쟁이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예식이 끝났고, 신부는 신방으로 들여보내졌다.그 순간, 소우희의 울음소리가 문밖까지 새어 나왔다.정연이 나직이 중얼거렸다.“아니, 신부가 왜 이렇게 우는 거야?”이지약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강제로 치러진 혼례.아버지가 억지로 그녀를 끌어와 강제로 치른 혼인이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소우연도 나지막히 말을 덧붙였다.“경사스러운 날인데, 분위기를 깨는구나.”소우희와 평춘왕이 혼례를 올리고, 신방에 들었다.그렇다면 이제 끝난 거겠지?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되돌릴 수도 없었다.생각해 보면, 자신 역시 한때 원치 않는 혼인을 강요당했다.하지만 그때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물론, 지난 생에서는 도망쳤지만, 이번 생에서는 남기로 했다.그리고 생각보다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연회가 시작되고, 평춘왕 이종대는 잔을 들고 연석을 돌며 어른들에게 인사를 올렸다.그 후, 이육진이 있는 자리로 다가왔다.그러나 이육진은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오늘은 숙부님의 경사스러운 날
“안 돼!”극심한 통증에 소우연은 큰소리로 외치며 눈을 번쩍 떴다.소우연 앞에 펼쳐진 건 화려하게 꾸며진 방이었으며 향초가 불에 타고 있는 소리가 들렸고 은은한 향도 퍼지고 있었다.조금 전까지 온몸을 괴롭히던 통증도 전부 사라진 것만 같았다.소우연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방을 쓱 훑어보았고 단번에 이 방이 신혼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고개를 숙여보니 자신은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이 혼례복은 소우연이 쌍둥이 여동생 소우희를 위해 3년에 거쳐 직접 만든 혼례복이었는데 결국 소우연이 이 혼례복을 입고 시집가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리고 소우연의 결혼 상대는 악명이 자자한 회남왕 이육진이다.상운국에서 명망 높은 전쟁의 신이었던 이육진은 3년 전 전쟁에서 부하에게 배신을 당해 위험한 상황에 처했었다. 결국 목숨 걸고 싸워서 위험한 상황을 벗어났지만 그 과정에서 온몸의 신경들이 전부 잘려 폐인이 되고 말았다.그 뒤로 이육진은 성격이 난폭해지기 시작했으며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노비와 시녀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해하기도 했다.황제가 이육진에게 혼인을 몇 차례나 하사했지만 신부들은 혼사를 치른 이튿날 바로 싸늘한 주검이 되어 회남왕 관저 밖에 버려졌다.그러다가 한 달 전, 이육진의 모친 덕빈은 황제 앞에서 난동을 부리며 다시 한번 혼인을 하사해달라고 했고 그 상대가 바로 진원 장군 가문의 둘째 딸 소우희였다.어렸을 때부터 소우희를 애지중지 키운 소씨 가문에서는 당연히 사랑하는 딸을 이육진에게 보낼 수 없었기에 결국 소우연이 쌍둥이 여동생 대신 이육진과 혼인을 하게 된 것이다.사실 소우연은 오래 전부터 연모하는 사내가 있었으며 어렸을 때부터 함께 큰 두 사람은 혼인을 약속한 사이이기도 했다.때문에 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시집을 가기 싫었고 더군다나 회남왕에 관한 소문이 너무 흉흉한 탓에 겁이 나기도 했다.그러다가 혼사가 이뤄진 당일 날, 소우연은 소우희의 꼬드김에 넘어가 결국 도망을 결심하게 되었는데 멀리 도망치기도 전에 다시 잡혀오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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