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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Author: 주 한잔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소우연은 의서를 읽고 있었고 정연은 곁에서 찻잔을 정리하면서 은근슬쩍 말을 꺼냈다.

“오늘 아침 덕빈 마마께서 저택을 떠나시면서 왕야께 왕비님을 모시고 궁으로 들어가 주상께 인사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주상?

소우연은 오늘 아침 정연이 이육진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 말을 소우연 앞에서 한번 더 꺼내는 걸까?

소우연이 정연을 힐끔 쳐다보자 정연은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다시 찻잔 정리에 집중했다.

조금 전까지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던 소우연은 살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소설 속에 적힌 내용에 의하면 덕빈은 아들 이육진을 끔찍이 아낀다고 했는데 이렇게 소우연을 데리고 궁에 들어오라고 한 걸 보면 단순히 인사만 받으려고 하는 건 아닐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만약 이육진이 소우연을 데리고 궁에 들어가기 싫어한다면 그것은 곧 이육진이 소우연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이육진이 소우연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덕빈은 절대 소우연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소설 원작에 덕빈이 소우연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지 확실하게 언급되지 않았지만 언젠가 알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고 그때가 되면 신부를 함부로 바꾼 소씨 가문뿐만 아니라 소우연도 저번 생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이육진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이런 생각에 소우연은 고개를 들고 정연을 쳐다보았다. 보통 시녀와 달리 얼굴도 예쁘장한 정연은 남다른 기품이 느껴졌고 말과 일 처리도 깔끔하고 확실했다.

“정연, 혹시 내가 지금 서재에 왕야를 만나러 가도 되겠느냐?”

소우연의 물음에 정연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대답했다.

“왕야께서 왕비님은 뭐든 하셔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씨 가문의 장녀가 시녀한테까지 말을 이렇게 조심스럽게 한다고?

정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고 소우연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정연에게 물었다.

“혹시 부엌에 다과 같은 건 있느냐?”

“있습니다. 왕야께 드리실 겁니까?”

“그래.”

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연이 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한편, 혼자 남은 소우연은 마음이 계속 불안했다. 어찌어찌 지금까지 살아남기는 했지만 이 소설의 남자주인공은 이민수이다.

이 소설 속 최대 악역인 이육진은 결국 이민수 손에 살해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회남왕비인 소우연도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이런 생각에 소우연은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소우연은 이번 생에 회남왕 저택에서 도망치지도 않았고 덕빈 마마에 의해 손발이 잘려 소씨 저택 대문 앞에 버려지지도 않았는데 그렇다면 혹시 이육진과 소우연 그녀의 결말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소우연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왕비님, 이건 왕야께서 평소에 즐겨 드시는 한과입니다.”

이때, 정연이 한과를 담은 그릇을 들고 방에 들어왔고 소우연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밖으로 향했다.

“그럼 이제 서재로 가야지.”

정연은 한과를 손에 든 채 소우연의 뒤를 따랐고 가는 내내 길을 안내했다.

한편, 서재 밖을 지키고 있던 진규는 소우연과 정연을 보자 살짝 의아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왕비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진규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올리자 소우연이 차분하게 말했다.

“왕야를 만나 뵈러 왔다.”

고개를 끄덕인 진규는 돌아서서 문을 두드렸다.

“왕야, 왕비님께서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소우연은 왠지 모르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육진이 거절이라도 하면 어떡하지?

“들라 하거라.”

차가운 이육진의 목소리가 서재 안에서 울려 퍼졌고 진규는 이내 문을 열었다.

소우연은 돌아서서 정연 손에서 한과 그릇을 받은 뒤,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은은한 불빛이 반짝이고 있는 서재 안에서 뭔가 굉장히 익숙한 향이 느껴졌고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리던 소우연은 이게 바로 자신이 만든 진정향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지만 소우연은 단 한번도 이 진정향을 시중에 판매한 적이 없는데 이육진은 어디에서 이 진정향을 구한 것일까?

소우연이 주위를 훑으며 생각하고 있을 때, 이육진의 날카로운 시선이 소우연에게 꽂혀 있었다.

‘지금 뭘 저렇게 자세하게 훑어보고 있는 거지? 난 분명 성격이 난폭하고 잔인한 사람이라고 널리 알려졌는데 왜 저 여자는 날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지?’

“부인, 뭘 그렇게 찾으시는 건가?”

서늘한 이육진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소우연은 재빨리 다가가 손에 한과를 든 채 인사를 올렸다.

“왕야께 인사를 올립니다. 조금 전에는 잠시 딴 생각하느라 실례를 범했습니다.”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의자에 앉은 이육진은 취조하듯 소우연에게 물었고 덜컥 겁이 난 소우연은 최대한 차분하게 대답했다.

“왕야께 감사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소우연은 뭐든 상관없었다. 만약 이육진이 정말 소문처럼 그리 난폭하고 잔인하고 악한 사람이었다면 저번 생에 소우연의 시신을 거둬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

눈썹을 살짝 들썩이며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묻던 이육진은 소우연이 들고 있던 한과를 힐끗 쳐다보고는 물었다.

“그 한과는 부인이 직접 만든 것이오?”

“아, 아닙니다. 부엌에서 만든 것입니다.”

“우리 부인은 이런 식으로 감사 인사를 하는 건가?”

이육진의 말에 소우연은 난감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음에는 제가 직접 만들어서 드리겠습니다.”

소우연의 맑은 눈망울에 멈칫하던 이육진은 바로 고개를 돌리며 대충 대답했다.

“그래.”

소우연은 그제야 그릇을 탁자에 내려놓았고 이육진은 다시 고개를 숙여 병서에 집중한 채 더 이상 소우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 남자가 병서를 읽고 있네?’

소설 속 내용에 의하면 회남왕 이육진은 현재 왕위에 계신 황제의 유일한 아들로서 당연히 황위계승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육진은 얼굴이 망가지고 두 다리도 영원히 걸을 수 없게 되었기에 황제는 평서왕 이남진을 황태제로 임명해야 할지 아니면 이남진의 아들 이민수를 황태자로 임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황제는 아직 마흔 살 초반밖에 되지 않은 나이라 아들을 더 낳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하지만 황위계승 자격이 가장 충분한 이육진은 몸이 망가진 탓에 황위를 물려받지 못한 것에 원망과 불만이 생겨 남자주인공인 이민수와 싸우다가 결국 이민수의 손에 살해된 것이다.

소우연은 눈앞에 앉아있는 이육진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만약 이육진이 본래의 얼굴을 되찾고 다리도 나아진다면 이민수를 이기고 소설 결말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혼인 첫날밤 회남왕 관저에서 도망치다가 결국 소씨 가문 대문 앞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소우연도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말이다!

“더 할 말이 남은 것이오?”

이육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앞에 조용하게 서있던 소우연을 쳐다보았고 소우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왕야께서 다치신 다리나 얼굴 흉터를 제대로 치료받아본 적 있으십니까?”

팍!

이육진이 병서를 탁자 위에 던지더니 언성을 높였다.

“부인은 이제야 내가 몸을 제대로 못 쓰는 불구자인 게 생각난 것인가?”

이육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우연을 쳐다보자 소우연은 잔뜩 겁을 먹은 채 연신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전 그저 왕야가 걱정돼서 물어본 말입니다.”

이육진은 온몸을 덜덜 떨고 있는 소우연을 보며 그녀를 점점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저렇게 겁을 먹고 이육진 그를 이토록 무서워하면서 왜 자꾸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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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이 이민수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집안에 도움이 되지 못해서 회남왕에게 시집왔는데 왜 나한테 분풀이를 하는 거야!’소우희가 씩씩거리자 곁에 서있던 혜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아씨… 저희 계속 여기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겁니까? 큰 아씨는 분명 일부러 저희를 만나주지 않는 겁니다.”소우희가 고개를 돌려 혜주를 날카롭게 째려봤다.‘내가 지금 그걸 몰라서 이러는 건가? 하지만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잖아!’소우희는 이민수와 혼인을 약속했고 이제 날짜를 잡아 혼사를 치르면 되는데 이 상황에서 괜히 문제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겉옷을 더욱 꽁꽁 싸맨 소우희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본채 앞에 우두커니 서있었다.만약 오늘 소우연이 끝까지 소우희를 만나주지 않으면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절대 소우연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그렇게 소우희는 결심한 듯 본채 앞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고 소우연은 오후 3시가 훌쩍 넘어서야 느긋하게 일어났다.본채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곁방에 있던 정연과 명심은 바로 시중을 들러 본채로 향했고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소우희도 따라 들어가려고 했다.이를 발견한 정연이 단호하게 제지했다.“왕비님께서는 아직 아씨를 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의를 지켜주십시오.”“난 지금 문 앞에서 4시간도 넘게 기다렸어! 왕비마마도 이제 깰 때가 됐잖아!”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손발이 얼어붙은 소우희가 일부러 목청을 높였다. 오늘 어떻게든 반드시 소우연을 만나야 했다.“왕비님께서 만나 주시든 말든 아씨가 결정하시는 게 아닙니다!”정연이 언성을 높이던 그때, 소우연이 겉옷을 차려입고 나왔다.“정연아, 미안하지만 네가 부엌에 가서 식사 준비를 좀 해야겠다. 이따가 왕야께서 식사하러 오시기로 하셨거든.”눈치 빠른 정연은 이내 하인들을 데리고 물러났고 가면서 혜주도 끌고 갔다.그렇게 방 문이 닫혔고 소우희는 조심스럽게 소우연의 눈치를 살폈다.소우연이 대체 왜 이러는 거지?이때, 소우연이 탁자 앞에 앉아 소우희를 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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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우연! 너, 너 지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당황한 소우희가 소리를 지르자 소우연은 바로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소씨 가문 노부인은 예전부터 소우연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에 소우연이 만든 진정향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결국 소우희가 그 진정향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나서야 노부인은 그 진정향을 받아들였고 오랜 세월동안 괴롭히던 불면증도 싹 해결되었다.그렇게 소우희는 소씨 가문 최대 공신이 되었고 그 뒤로부터 소우연은 새로운 약을 만들어낼 때마다 소우희에게 주었고 그 약들을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에게 드리라고 했다.소우희는 분명 가족들에게 진실을 얘기할 기회가 많았지만 그러지 않았고 소우희가 무슨 꿍꿍이로 그러는지 소우연은 뻔히 알고 있었다.“더 말할 것도 없어. 난 더 이상 너에게 약을 주는 일은 없을 거야.”소우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우희를 내쫓으려고 하자 덜컥 겁이 난 소우희가 다급하게 외쳤다.“언니, 제발 부탁할게. 내가 어떻게 하면 언니가 진정향을 줄 수 있어?”진정향을 얻어가지 못하면 할머니는 소우희를 불효 자식이라고 나무랄 것이고 부모님과 오라버니들은 소우희가 일부러 약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이제 기껏해야 두 달만 더 버티면 소우희는 이민수과 결혼하여 세자빈이 될 수 있는데 절대 그 사이에 돌발 상황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좋아! 너에게 기회를 주지. 네가 사람들에게 진정향을 만든 사람이 나라는 걸 밝히고 군영에 보낸 약들도 전부 내가 조제한 약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진정향을 너에게 줄게!”소우연이 소우희를 힐끗 쳐다보며 말하자 소우희가 연신 고개를 저었다.“그, 그건 안 돼!”“왜 안 된다는 거지?”소우희가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난… 난… 언니처럼 멍청한 사람이 그런 대단한 약들을 만들어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내가 밝힌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을 것 같아?”소우연이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소우희는 그저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두려운 것뿐이다.잠시 침묵하던 소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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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70화

    “왕비가 말해보시오.”이육진은 손에 낀 청옥 반지를 굴리며 무심한 듯 말했다. 그는 방금 전 소씨 가문의 사람들이 소우연을 바라보던 그 경고의 눈빛, 그 모든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진규에게서 들었던 바에 의하면, 소우연이 친정에 갔던 날 이들의 태도가 심히 불손했다 하였으나, 그때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의 가슴속 분노는 억누를 수 없이 타올랐다. 화로 속 은탄이 파직 파직 소리를 내며 타올랐고 조용한 실내에서는 숨소리마저 크게 울려 퍼졌다.소우연은 담담히 미소 지었다.“왕야, 저는...”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육진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듯한 태도이기도 했다.“왕야께서는 제가 누구인지가 그리도 중요하십니까?”이육진의 차가운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왕비는 이미 내 마음을 사로잡았소. 그대가 누구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소.”그 말이 떨어지자, 소씨 가문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문밖에서 폭죽 소리가 울려 퍼지고 예식 진행자가 소리 높이 외쳤다.소홍범은 이육진에게 예를 갖춘 후, 온 가족은 서둘러 평서왕부를 맞으러 나갔다. 이민수는 붉은빛 예복에 담비 털망토를 걸치고, 뒤에는 중매인과 예물을 운반하는 하인들이 있었다.수십 대에 걸친 화려한 예물 행렬은 매우 화려했다. 그러나 이는 단지 혼약식 예물일 뿐. 진정한 혼례가 치러지는 날, 그가 준비할 채단과 예물은 경성 여인들의 부러움을 살 것이다.게다가 소씨 가문이 소우희를 위해 준비한 혼수 역시 십 리를 채울 정도로 화려했으니. 하지만 소우연은? 소우연은 한때 소씨 가문의 적녀였음에도 정작 혼인할 때 받은 것은 변방에 있는 두 채의 가게뿐이었다.그마저도 아직까지 임진숙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비교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었다.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만약 이민수와 소우희가 결국 혼인한다면, 내 운명을 바꾸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겠지.' “왕야……”소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69화

    이육진은 혹여나 소우연이 진원장군 댁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염려하여, 진우 한 명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진규도 보내는 것인가? 소우연은 마차에 오르고 나서야 이 마차가 이육진의 전용 교자였음을 깨달았다. 보통 마차보다 크기가 두 배는 넉넉했다. 마차 문이 열리는 순간,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은색 가면을 쓰고 검은색 예복을 걸친 이육진이었다.마차 내부는 충분히 넓어서 그의 휠체어도 있었다.“왕야?”소우연은 그가 마차에 타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지난번 친정에 갈 때도, 그는 동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소우희의 혼약식에 가려는 것인가?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이육진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하는 수없이 자신의 손을 올렸다.“왕야께서도 소씨 가문을 방문하시려는 겁니까?”그러면서 그녀는 그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시선은 은색 가면을 쓴 남자에게 향했다.흉터들은 가려져 있었고 오직 깊고 서늘한 눈동자와 뚜렷한 턱선만이 드러나 있었다. 순간,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가 본래의 얼굴을 되찾으면, 분명 절세의 미남일 터였다. 이육진은 가볍게 “그래.” 하고 답했다. 정연이 마차에 올라 이육진에게 예를 갖춘 후, 진우가 마차를 몰아 진원장군부로 향했다. 진원장군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소우연은 직접 이육진의 휠체어를 밀며 열여섯 해를 살아온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곳곳에서 마주치는 하인들과 오라버니들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녀가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거짓일 것이다.소홍범은 임진숙과 아들들을 대동하여 이육진을 맞이했다. 비록 그가 지금은 흉측한 얼굴에 불구가 되었어도 황제의 유일한 친자인 만큼 결코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이육진이 상석에 앉고 소우연은 그의 우측에 자리했다. 모두가 혼약을 축하하는 가운데 이육진이 입을 열었다. “소 장군, 나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소.”소홍범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68화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한참 후, 이육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깊고 짙은 눈동자가 소우연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소우연, 너는… 알고 있느냐?”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소우연의 고운 눈썹이 찌푸러졌다.“무엇을 말이옵니까?”그녀는 그와 시선을 맞추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그녀의 온기는 실로 매혹적이었다.“소녀 궁금하오니 말해 보시옵소서.”그녀의 목소리는 잔잔한 물결처럼 그를 조용히 감싸안았다. 그녀의 단호한 눈빛은 마치 그에게 용기를 주는 듯했다.이육진은 몇 번이고 말을 삼켰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모두가 내 얼굴을 두려워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냐? 그토록 울며불며 나와의 혼인을 거부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어찌하여 변한 것이냐? 모든 것이 거짓이냐?”소우연은 입을 떼려다 멈칫했다.눈앞의 이 사내는 한때 황태자였고 전장을 누비던 무패의 전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리도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거듭 확인하고 있었다.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들은 그저 소설 속 배경에 불과한 인물들, 누군가의 발판이 되어줄 뿐인데 말이다.“위엄이 넘치시는 왕야를 제가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사옵니까?”이육진의 심장이 단단히 죄어왔다.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오래 잠들어 있던 감정이 며칠 사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단순히 경성을 뒤흔들고 배후를 처단하는 것만을 원하지 않았다.그는 그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이민수는 어쩔 셈인가? 너희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고, 한때는 네 약혼자이기도 하였는데, 이리 쉽게 잊을 수 있단 말이냐?”“이미 잊었사옵니다. 여인은 남편을 하늘로 섬기는 법. 다른 이의 남편은 저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왕야께서는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다 생각하시는 겁니까?”다시 태어난 그녀는 그저 소설 속 희생될 조연에 불과했다. 설령 이 모든 사실을 이육진에게 털어놓는다 해도 그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전생에,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67화

    “만약 내 상처가 낫지 않고 내 다리 또한 영영 회복되지 않는다 해도 왕비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인가?”그는 스스로가 지나치게 탐욕스러워졌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 감정을 도무지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잠깐이라도 스치는 아주 미세한 후회나 거짓마저 놓칠까 두려우면서도 그는 조용히, 또 간절히 그녀를 응시했다. 몇 번의 숨결이 흐르고, 소우연은 여느 때처럼 잔잔한 미소를 띠며 그의 손을 조용히 감쌌다.“왕야께서는 제가 도망갈까 두려우신 것이옵니까?”그녀는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과거, 자신이 믿던 가족들에게 버려졌던 그날의 공포는 여전히 가슴 한편에 서려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육진이 버려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비록 그녀는 무사히 살아남았지만, 언젠가 이육진마저 그녀를 버린다면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적이 있었다.하지만 소우연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번 생을 이육진에게 걸어보기로 했다.하늘이 그녀를 다시 살게 한 이유가 다시금 비극을 되풀이하라는 것은 아닐 테니까.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들은 서로의 짙은 외로움을 보았다.이육진의 손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소우연은 손수건을 꺼내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왕야께서 저를 내치지 않는 한 저는 평생 왕야 곁에 있을 것이옵니다.” “절대 내치지 않을 것이다.”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을 혐오하고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만약, 그의 몸이 끝내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녀는 그와 온전히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일 터. 그럼에도… 그녀가 그의 곁에 남아준다면... “저 또한 그러하옵니다.”소우연은 그의 손을 끌어올려 자신의 볼에 살며시 가져갔다. 이육진은 입술을 달싹였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그대로 믿을 것이다. 설령 거짓이라 해도, 그는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 깊이 빠져 들것이다.오랜 시간이 흐른 뒤, 소우연은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66화

    소우연은 태연한 듯 보였지만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서재가 있는 뜰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 청색과 백색 차림의 두 실루엣이 스쳐 지나갔다.심소균과 용강한? 그들이 방금 일부러 멈춰 서서 자신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하지만 이미 사라진 그들에, 소우연은 다시 발길을 돌려 서재에 들어섰다.“매화가 너무 아름다워 꽃병에 꽂아 왕야의 책상 위에 두려 하옵니다. 그러면 왕야께서 감상하시기에 좋을 듯하옵니다.” 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방금 용강한이 했던 ‘왕비는 그대의 복성이오.’란 말을 떠올리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그의 시선이 그녀의 품에 있는 노란 매화로 향했다. “참으로 어여쁘게 피었구나.”“왕야께서는 늘 본채에 계셨으면서도 매화가 피어난 것을 보지 못하셨사옵니까?” 이육진은 잠시 멈칫하더니, 멎쩍은 미소를 지었다.“한 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었다.”“왕야께서는 꽃을 즐기지 않으십니까?”그녀는 꽃병을 이육진에게 건넸다. “나는 매화는 좋더구나.”“저도 역시 매화가 가장 좋습니다.” 그녀는 휠체어에 밀어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그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이육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방금 전 지나간 두 사람 중 흰옷은 흠천감 용강한이고 푸른 옷은 진국 공부 심소균이다.”소우연은 깜짝 놀랐다. 무빈과 정연은 그녀에게 일부러 말해주지 않았는데 말이다.“왜 그러는 것이냐?”그녀가 아무 대답이 없자, 이육진이 살짝 몸을 돌렸다.“저들을 알고 있었느냐?” 소우연은 고개를 저었다.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사옵니다.”그녀의 도움으로 이육진은 어느새 책상 앞까지 다가갔다.방 한켠, 온돌 위는 아직도 바둑판과 찻잔이 놓여 있어, 방금 전까지 셋이서 차를 마치며 바둑을 두면서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책상 위에는 며칠 전에 꺾어 온 매화가 이미 시들어있었다. 소우연은 새 꽃병으로 바꿨다. 그러다 문득 그곳에 놓인, 오래된 거울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65화

    정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이육진이 화상을 입은 이후, 왕부의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졌다.적어도 더 이상 웃음소리는 감히 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왕부에서 이유 없이 목숨을 빼앗는 일은 없었다.소우연은 조용히 매화를 꺾었고 정연은 그 꽃들을 모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정연의 손은 더 이상 꽃을 들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왕비 마마, 본채로 가서 꽃들을 정리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어차피 본채는 매일 사람들이 청소하고 있으니 이참에 시든 매화도 새것으로 갈아 두는 것이 좋을 듯했다.소우연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본채로 향해 발을 옮겼다. 소우연은 문득 서재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마침 무빈과 눈이 마주쳤다. 무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를 표했다. “왕야께서는 진국공부의 심소균 장군과 매우 가까운 사이겠지?”방에 들어서자, 그녀는 손에 든 가위로 매화 가지를 정리했다. 꽃병을 가져와 꽃꽂이를 하려던 정연이 그녀의 말에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왕비 마마께서… 이를 알고 계신단 말인가?소우연은 태연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왕야께서 출정하셨을 때, 진국 공부의 공작 어르신과 함께하셨고, 심소균 역시 그때 참전하였으니, 그들이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라는 사실을 경성에서 모른 이가 없단다.”사실 이야기 속에 이육진에 충성을 다하는 신하들이 언급된 바 있었다. 하여 진국공부와 심소균, 심장군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정연은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대답했다.“진국 공부의 심 장군과 소 장군, 모두 예전에 왕야와 함께 전장에 나섰기에 각별한 사이입니다.”소우연은 이들이 그녀와 이육진에게 있어 중요한 사람이라 생각했다.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의 운명은 이미 이육진과 하나로 묶여 있었다.그렇다면, 차라리 미리 준비하여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정연은 소우연의 속마음을 알 리 없었다.“여러 해 동안 왕야께서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64화

    무빈은 그 웃음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소우연에게 곧바로 밝힐 수 없어 그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인 알아챌 길이 없사옵니다.”‘심장군께서는 평소에 활달한 성격이시나 왕야께서 사고를 당한 후로는 결코 왕부에서 이처럼 거리낌 없이 행동한 적이 없었는데...’소우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이따가 다시 오는 것이 좋겠다”그녀는 이미 본채의 정자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찬바람이 옷깃을 스미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무빈은 그녀를 따라가며 정중히 권했다. “왕비마마, 차라리 본채로 돌아가 좀 더 따뜻한 곳에서 쉬시는 것이 어떠하옵니까?”정연 역시 이에 동의하며 거들었다. 그러나, 소우연은 정원의 매화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매화가 아름답게 피었구나. 몇 가지를 꺾어 왕야의 서재로 가져가야겠다.”정연: “……”무빈: “……”항상 왕야를 생각하고 계시는 왕비의 모습에 두 사람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럼, 제가 다시 모시러 오겠사옵니다.”정연이 소우연의 뒤를 따랐다. 정연은 왕비께서 혹여 사고를 당하기 전의 왕야를 은밀히 사모하신 적은 없으셨는지 묻고 싶었다.그렇지 않고서야, 지금의 왕야를 진심으로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그러나 왕비께는 본래 정인이 있었으나 강제로 대신 시집와야 했다는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왕비는 아주 현명한 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왕야에게 시집온 이상, 왕야만을 바라보며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길이기도 하였으니까.아이라도 낳게 된다면 왕비의 미래는 더욱 창창할 터, 어쩌면 머지않아 황태후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는 것이다.정연은 말없이 가위를 가지러 갔다.그녀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서재 쪽 한 모퉁이가 희미하게 보였다.그녀는 무빈이 서재로 들자, 곧 어린 내시가 조용히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그때, 매화 향이 은은하게 코끝을 스쳤다.소우연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63화

    ‘그런데 왕비마마께서 과연 치료할 수 있겠는가?’ “내 얼굴에 난 상처… 자세히 보거라.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 같으냐?”그는 겉으로는 태연한 듯 보였으나, 내심 회복에 대한 희망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무엇도 아닌 소우연의 진심 어린 마음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무빈은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얼굴은 전처럼 창백하지 않사옵니다. 며칠 동안 햇볕을 쬐셨기에 좀 더 건강해 보이는 것 같사옵니다.”“본왕이 묻는 것은 상처를 말하는 것이다. 흉터가… 옅어졌느냐?”“저는… 그것이…”“거짓말은 하지 말거라!”그러자 무빈은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답했다. “소인 감히 거짓말은 할 수 없사옵니다! 다만… 전에 왕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사오니, 잘 알지 못하겠사옵니다.”잘 알지 못하겠다… ‘그건 아직 변화가 없다는 뜻이겠지.’이육진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손을 가볍게 흔들어 무빈에게 퇴거를 명했다.“물러가거라.”“오래된 상처이오니 아무리 신묘한 의술을 지니셨다 하더라도 그리 빨리 나을 수는 없사옵니다. 부디 너무 조급해하지 마옵소서..”무빈은 조심스레 이육진을 위로했다.차라리 왕야의 고통을 대신 받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그는 그저 내시일 뿐이니 얼굴이 흉해지든, 몸이 불편하든 큰 상관이 없었으니까.이육진이 아무런 말도 없자 무빈은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그는 몸을 숙여 예를 갖춘 뒤, 살며시 문을 닫았다.책상 위에는 무빈이 남겨둔 거울이 놓여 있었다.거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갑자기 공포가 밀려왔다.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그는 거울을 집어 오랜 세월 동안 외면해 왔던 자신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그러나 손끝이 심하게 떨렸다.머릿속에는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본 순간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에 난 붉은 칼자국은 마치 거대한 지네처럼 꿈틀거리고 있었고 화상 자국은 울퉁불퉁하게 일그러져 있어 마치 팔순 노인의 주름진 피부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62화

    “저는 그저 버리는 것이 아까워서 그럽니다.”소우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 마치 한 송이 탐스러운 꽃처럼 곱게 피어났다.“필요 없느니라.”이육진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예.”소우연은 살짝 시선을 내리깔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어차피, 얼굴과 다리가 회복된다면, 그때는 자연스레 답이 나오겠지.’그녀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이육진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는 것이었다.“왕비는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그녀의 붉어진 얼굴에 이육진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우연의 손을 이불 속으로 끌어당겼다.“.....!”손끝이 닿는 순간, 소우연은 불에 덴 듯이 화들짝 손을 홱 빼내고는 이불 속으로 얼른 몸을 숨겼다.이육진은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누운 채, 그녀를 여유롭게 내려다보았다.온몸을 이불 속에 꼭꼭 감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더없이 귀여웠다.“그러다 숨 막혀 쓰러질 것 같구나.” 그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휠체어에 앉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빈을 불러 시중을 들게 했다.아침 식사 후. 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약을 바르며 물었다. “요 며칠 피부가 가려우시거나 찢어지는 듯한 감각이 있으셨사옵니까?”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그렇더구나.”“그렇다면 제대로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옵니다. 왕야의 피부가 서서히 회복되고 있는 증거이니 걱정하지 마옵소서.”“참말로… 회복되고 있단 말이냐?”“그러하옵니다.” 이육진은 이 가려움이 햇빛에 오래 노출된 탓이라 여겼었다. 약을 바른 후, 이육진은 바로 서재로 향했다. “무빈아.”무빈은 급히 차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여기에 있사옵니다.”“거울을 가져오거라.”“거울 말이옵니까?”왕부에서 거울을 찾다니… 얼굴에 화상을 입은 뒤, 그는 왕부에 있던 모든 거울을 부수어버렸고 한 점도 남겨두지 않았다. “왕야, 지금은 거울이 없사옵니다. 즉시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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