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아니, 분명 조금 전까지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지 않았느냐?”소우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하며 소우연이 도대체 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회남왕에게 시집간 뒤로부터 말과 행실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우희에게 티가 날 정도로 적대감을 보이고 있다.아무래도 소우연은 몸이 망가진 회남왕과 결혼한 것에 대해 불만이 생겨서 일부러 소우희를 이렇게 냉대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한편, 정연은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왕비님께서 조금 전에 잠이 드셔서 소인은 함부로 왕비님을 깨울 수가 없었습니다.”“깨울 수가 없었다고? 네년이 일부러 동생과 날 못 만나게 중간에서 막고 있는 건 아니고?”미간을 확 찌푸린 소우희가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언성을 높였다.외부인들은 다들 소우희가 회남왕과 결혼했다고 생각하기에 소우희는 밖에서 소우연을 동생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표정이 살짝 굳어진 정연은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말했다.“아씨, 이곳은 회남왕 관저입니다. 아무나 난동을 부릴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러니 아씨께서도 예의를 갖춰서 기다리고 계시기 바랍니다.”말을 마친 정연은 바로 문을 쾅 닫았고 곁방에서 나와 구경하고 있던 시녀들도 이내 몸을 녹이러 방으로 돌아갔다.“너!”화가 잔뜩 난 소우희가 소리를 지르려던 그때, 곁에 서있던 혜주가 재빨리 소우희를 말렸다.“아씨, 큰 아씨는 분명 저희를 만나주지 않으려고 저러는 겁니다.”혜주는 조금 전 창문 너머 그들을 쳐다보던 소우연의 경멸스러운 눈빛이 떠올랐고 소우희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오늘 진정향을 집에 가져가지 못하면 할머니 앞에서 할 말이 없게 된다.‘소우연 저 나쁜 계집애! 떠나려면 곱게 떠날 것이지, 약들은 왜 다 챙겨가고 난리야!’오늘 진정향을 얻지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소우희는 차오르는 분노를 꾹 참은 채 본채 앞에 가만히 서있었다.본채 지붕 덕분에 눈을 맞지는 않았지만
‘본인이 이민수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집안에 도움이 되지 못해서 회남왕에게 시집왔는데 왜 나한테 분풀이를 하는 거야!’소우희가 씩씩거리자 곁에 서있던 혜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아씨… 저희 계속 여기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겁니까? 큰 아씨는 분명 일부러 저희를 만나주지 않는 겁니다.”소우희가 고개를 돌려 혜주를 날카롭게 째려봤다.‘내가 지금 그걸 몰라서 이러는 건가? 하지만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잖아!’소우희는 이민수와 혼인을 약속했고 이제 날짜를 잡아 혼사를 치르면 되는데 이 상황에서 괜히 문제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겉옷을 더욱 꽁꽁 싸맨 소우희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본채 앞에 우두커니 서있었다.만약 오늘 소우연이 끝까지 소우희를 만나주지 않으면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절대 소우연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그렇게 소우희는 결심한 듯 본채 앞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고 소우연은 오후 3시가 훌쩍 넘어서야 느긋하게 일어났다.본채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곁방에 있던 정연과 명심은 바로 시중을 들러 본채로 향했고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소우희도 따라 들어가려고 했다.이를 발견한 정연이 단호하게 제지했다.“왕비님께서는 아직 아씨를 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의를 지켜주십시오.”“난 지금 문 앞에서 4시간도 넘게 기다렸어! 왕비마마도 이제 깰 때가 됐잖아!”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손발이 얼어붙은 소우희가 일부러 목청을 높였다. 오늘 어떻게든 반드시 소우연을 만나야 했다.“왕비님께서 만나 주시든 말든 아씨가 결정하시는 게 아닙니다!”정연이 언성을 높이던 그때, 소우연이 겉옷을 차려입고 나왔다.“정연아, 미안하지만 네가 부엌에 가서 식사 준비를 좀 해야겠다. 이따가 왕야께서 식사하러 오시기로 하셨거든.”눈치 빠른 정연은 이내 하인들을 데리고 물러났고 가면서 혜주도 끌고 갔다.그렇게 방 문이 닫혔고 소우희는 조심스럽게 소우연의 눈치를 살폈다.소우연이 대체 왜 이러는 거지?이때, 소우연이 탁자 앞에 앉아 소우희를 냉
“소우연! 너, 너 지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당황한 소우희가 소리를 지르자 소우연은 바로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소씨 가문 노부인은 예전부터 소우연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에 소우연이 만든 진정향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결국 소우희가 그 진정향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나서야 노부인은 그 진정향을 받아들였고 오랜 세월동안 괴롭히던 불면증도 싹 해결되었다.그렇게 소우희는 소씨 가문 최대 공신이 되었고 그 뒤로부터 소우연은 새로운 약을 만들어낼 때마다 소우희에게 주었고 그 약들을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에게 드리라고 했다.소우희는 분명 가족들에게 진실을 얘기할 기회가 많았지만 그러지 않았고 소우희가 무슨 꿍꿍이로 그러는지 소우연은 뻔히 알고 있었다.“더 말할 것도 없어. 난 더 이상 너에게 약을 주는 일은 없을 거야.”소우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우희를 내쫓으려고 하자 덜컥 겁이 난 소우희가 다급하게 외쳤다.“언니, 제발 부탁할게. 내가 어떻게 하면 언니가 진정향을 줄 수 있어?”진정향을 얻어가지 못하면 할머니는 소우희를 불효 자식이라고 나무랄 것이고 부모님과 오라버니들은 소우희가 일부러 약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이제 기껏해야 두 달만 더 버티면 소우희는 이민수과 결혼하여 세자빈이 될 수 있는데 절대 그 사이에 돌발 상황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좋아! 너에게 기회를 주지. 네가 사람들에게 진정향을 만든 사람이 나라는 걸 밝히고 군영에 보낸 약들도 전부 내가 조제한 약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진정향을 너에게 줄게!”소우연이 소우희를 힐끗 쳐다보며 말하자 소우희가 연신 고개를 저었다.“그, 그건 안 돼!”“왜 안 된다는 거지?”소우희가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난… 난… 언니처럼 멍청한 사람이 그런 대단한 약들을 만들어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내가 밝힌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을 것 같아?”소우연이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소우희는 그저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두려운 것뿐이다.잠시 침묵하던 소우연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눈은 아직도 펑펑 내렸다.소우희와 혜주는 마당에서 주운 진정향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은 핏기가 전혀 없었다.“큰 아씨가 정말 너무 하셨어요!”혜주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하자 소우희도 화가 나서 씩씩거렸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내가 아쉬운 상황이니 별 수 없지.”“둘째 아씨가 너무 착하셔서 그래요. 저택에서 큰 아씨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둘째 아씨밖에 없었는데 큰 아씨는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큰 아씨는 나중에 천벌 받으실 거예요!”“천벌을 받는다고? 신령님께서 얼마나 바쁘신데 그 많은 천벌을 언제 다 내리겠어. 차라리 계획을 세워서 벌을 주는 게 빠르지.”계획을 세운다고? 혜주가 소우희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그때, 소우희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한편, 회남왕 관저 서재에서.진규는 오늘 본채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육진에게 보고를 했고 조용히 듣고 있던 이육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부인이 정말 소씨 가문 사람들을 그렇게 싫어한다고?”“상황으로 봐서는 그렇습니다.”“사실일지 아닐지 아직 모르는 일이지. 부인이 연기하고 있는 걸 수도 있고. 영혼마저 내 것이라고 했으니 어디 한번 나에게 얼마나 진심인지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느냐?”진규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육진이 말을 이어갔다.“준비하라고 했던 사람들은 어찌 됐느냐?”“걱정하지 마십시오. 항시 대기하고 있습니다.”이날밤, 눈은 밤새 내렸고 경성 전체가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다음날 아침, 잠에서 깬 소우연은 옷을 깔끔하게 차려 입고 휠체어에 앉아있던 이육진을 보게 되었다.“난 오늘 운불사에 다녀올 것이오. 부인도 함께 가야 할 걸세.”소우연은 이육진이 왜 갑자기 운불사에 간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같이 가자고 하니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운불사에 왜 가는지 묻지도 않는 건가?”이육진의 물음에 소우연은 그제야 물었다.“운불사에는 왜 가시는 겁니까?”어이없다는
”부인!”피를 본 이육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그제야 이자들은 진규가 미리 준비한 자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소우연을 품에 꽉 끌어안은 이육진은 한 손 손목을 확 내두르자 자객 두 명이 바로 날아갔다.“부인, 괜찮소?”소우연이 어깨뼈를 부여잡은 채 미간을 확 찌푸리며 말했다.“아파요…”“아픈 걸 알면서 왜 함부로 나선 거야!”“전… 전 자객들이 왕야를 다치게 할까 봐 걱정돼서…”이육진이 죽으면 소우연은 이 소설의 결말을 함께 바꿔갈 아군을 잃게 된다.“저, 저자들이 날 다치게 할까 봐 걱정돼서 이렇게 무모한 짓을 했다고?”“네.”이육진은 생각이 복잡해졌다. 지금까지 그의 호위무사 외에 그를 향해 날아오는 칼을 막아준 사람은 소우연이 처음이었다.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소우연을 보며 이육진은 다급하게 외쳤다.“진규야!”자객들과 대충 싸우고 있던 진규는 이육진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고 마침 마차에서 떨어져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던 자객 두 명을 발견했다.설마 이자들이 진짜 자객이라는 건가?진규가 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상대방의 가면을 확 벗겨보니 이자는 진규가 미리 준비한 자객이 아니었다.순간, 미간을 확 찌푸린 진규는 빠르게 달려가 순식간에 자객의 발뒤꿈치를 전부 잘라버렸고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자객들은 바닥에 쓰러졌다.마차로 달려간 진규는 전투력을 상실한 자객을 힐끔 확인하고는 이육진에게 물었다.“왕야, 왕비님, 두 분 괜찮으십니까?”소우연 어깨에서 여전히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소우연은 힘겹게 말을 꺼냈다.“왕야는 괜찮아.”이 상황에서 이육진 걱정부터 하다니. 이육진은 도무지 소우연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이육진의 명령에 진규가 빠르게 말에 올라탔다.저택에 의원이 항시 대기하고 있기에 돌아가기만 하면 소우연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이자들을 전부 저택으로 끌고 가거라!”진규가 근처에 숨어있던 가짜 자객들에게 말한 뒤, 바로 마차를 끌고 저택으로
“그런데 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냐?”이육진의 물음에 임 어사가 대답했다.“해독약을 이제 막 드셔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해시 전에 무조건 깨어나실 겁니다.”임 어의의 확신에 찬 대답에 이육진은 그제야 시름이 놓였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까지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었다. 평서왕 세자 이민수를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이 왜 이육진을 위해 칼까지 막았을까?이런 생각을 하던 이육진은 주먹을 더욱 꽉 쥐었고 일촉즉발의 순간에도 소우연을 시험할 생각이 먼저였던 자신의 행동이 후회되기도 했다.몇 마디 당부를 마친 임 어의는 저택을 떠났고 진규는 바로 본채로 돌아와 이육진 앞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왕야, 소인을 죽여주십시오. 소인은 그런 줄도…”이육진이 진규의 입을 재빨리 막았고 더 이상 얘기하지 말라고 눈짓을 했다.“가서 확실하게 조사해보거라. 대체 어떤 겁 없는 미친놈이 감히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네, 왕야!”진규가 떠나자 이육진은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을 전부 내보냈고 휠체어에 앉아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소우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손을 뻗어 소우연의 이마를 만져보니 임 어의가 말한 것처럼 열이 심하게 나고 있었다.물리적으로 열을 내리기 위해 이육진은 바로 수건을 적셔 소우연의 이마에 올려놓았고 곁방에서 인기척을 들은 정연은 다리가 불편한 이육진에게 혹시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지만 이육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지금 이 순간만큼은 직접 소우연을 돌보고 싶었다.30분 뒤, 진규가 본채로 돌아와 자객이 실토했다고 전했고 이육진은 진규와 함께 방을 나서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자가 누구냐?”“그게… 자백했지만 안 한 거나 다름없습니다.”이육진이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확 돌리자 소름이 쫙 돋은 진규가 다시 한번 무릎을 털썩 꿇었다.“왕야, 자객들은 상대방이 여자라고만 자백했습니다. 큰돈을 주면서 왕비님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여자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생김새는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감히 겁도
”다른 단서는 없었습니다.”“왕비와 원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이육진의 말에 진규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저택 안에만 계신 왕비님이 어떤 자와 원한 관계가 있으시겠습니까? 대신 며칠 전에 소씨 가문 둘째 아씨가 왕비님을 찾아와 왕비님에게 큰 수모를 당하셨지요.”“소우희…”조용하게 듣고 있던 이육진이 손자락으로 휠체어 손잡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중얼거렸다.소우연은 명색이 소씨 가문 큰딸인데 어떻게 소씨 가문에서 이런 대우를 받고 살았을까? 생각해보면 소우연의 인생도 꽤 힘들고 외로웠을 것 같았다.“소씨 가문 사람들 잘 지켜보고 있어. 특히 소우희 그 여자의 움직임은 하나도 놓치지 말고 확실하게 지켜봐!”“네, 알겠습니다.”해시가 다 됐지만 아직도 깨어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소우연을 보며 마음이 급해진 이육진은 다시 어의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자 저택에 있던 의원이 그를 말렸다.“왕야,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비님은 이제 열도 내리셨고 소인이 진맥을 했을 때 맥박도 정상이셨습니다.”“그런데 왜 여태껏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냐!”“아마도…”의원이 대답하려던 그때, 침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쿨럭쿨럭…”“왕야, 왕비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의원이 손에 땀을 쥐던 그때, 다행히도 소우연이 눈을 떴다.소우연은 침대 곁에 지키고 있는 이육진을 힐끔 쳐다보고는 주위를 쓱 훑다가 힘겹게 물었다.“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겁니까?”소우연은 낮에 외출했을 때 자객에게 습격을 당했던 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왕야, 괜찮으신 겁니까?”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육진을 아래위로 꼼꼼하게 훑어보던 소우연은 깔끔하게 옷을 차려 입은 이육진이 멀쩡한 모습으로 앉아있자 이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괜찮으시니 다행이네요.”이육진은 아픈 몸으로 그를 먼저 걱정하는 소우연을 보며 마음이 착잡했다.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지려던 소우연은 어깨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에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제야 낮에 이육진을 향해 날아오던 칼을 막았다는
소우연이 대답을 하려던 그때, 이육진이 다시 한번 경고했다.“잘 생각해보고 대답하는 게 좋을 것이오. 날 속일 생각은 하지도 말고!”“제가 어찌 감히 왕야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전 소우희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곧 원한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그래, 알겠소.”전에 이육진은 언젠가 기회를 찾아 소우연을 포함한 소씨 가문 모든 사람들을 죽여버리려고 했지만 이제는 다르다.지금 이 순간부터 소우연이 3년 전 이육진을 구해준 사람이 맞든 아니든 소우연의 목숨은 살려둘 것이다.이육진이 휠체어를 끌고 밖으로 나가면서 정연에게 방으로 들어와 왕비의 시중을 들라고 명령했고 소우연은 이육진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착잡했다.알겠다고? 대체 뭘 알겠다는 거지?이때, 방으로 들어온 정연이 소우연에게 말했다.“왕비님, 의원께서 왕비님은 요즘 기름기가 없는 담백한 음식을 드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소인이 야채죽과 산삼차를 준비했습니다. 소인이 식사를 도와드리겠습니다.”고개를 끄덕이던 소우연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왕야께서는 식사를 하셨느냐?”흠칫하던 정연이 대답했다.“왕비님께서 다치시고 나서 왕야는 한 시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곁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직 식사를 못하셨습니다.”“그럼 왕야께서 혹시 지금 서재로 간 것이냐?”정연은 아마도 그랬을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아마도 그러셨을 겁니다.”“그럼 왕야께도 식사를 보내 드리거라.”“알겠습니다.”정연은 눈앞에 있는 이 왕비가 보면 볼수록 참 신기했다. 회남왕의 망가진 얼굴이나 못 쓰는 다리를 전혀 거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왕야 걱정만 하고 있다.이렇게 예쁜 미모를 가진 여인이 왕야까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으니 다른 여인 대신 시집왔다는 것만 빼면 너무 완벽했다.“난 이제 다 먹었으니 얼른 왕야께 가져다 드리거라. 왕야께서도 많이 시장하실 것이다.”“네, 소인 바로 서재에 다녀오겠습니다.”조금 뒤, 서재 밖에서.정연이 시
“소우연에게 전하거라. 걔가 의술을 익혔고 그 약들까지 전부 걔가 조제했다는 사실을 소씨 가문 사람들 전부가 알았다고. 예전에 서럽게 한 일에 대해 미안해서 아버지가 이렇게 나를 직접 보내기까지 했다고. 가족의 정이 일말이라도 남아 있다면 소씨 가문에 한 번 다녀가라고 똑똑히 전하거라.”“그건…”“혈연은 그렇게 쉽게 맺고 끊을 수 있는 게 아닌데 어떻게 그런 양심 없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냐? 난 애초에 그 아이를 낳지 말았어야 했다.”말을 마친 임진숙은 나인과 함께 돌아서서 떠났다.간석은 마차를 타고 멀리 떠나는 임진숙의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정신을 번쩍 차린 채 손에 들고 있는 선물을 힐끗 쳐다보았다.‘소씨 가문에서 저번에 보상으로 꽤 큰돈을 들였을 텐데 아직도 선물을 준비할 돈이 있나 보네?’본채로 돌아온 간석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한 뒤,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건넸지만 소우연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뒤늦은 가족애는 필요 없어.”곁에 서있던 이육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연이 네 말이 맞아.”대신 선물을 받은 이육진이 열어보니 안에는 화차 한 통이 들어 있었다.“말리화차네요.”씁쓸하게 웃던 소우연은 눈물을 살짝 보이기도 했다.“전에 소우희 덕분에 말리화차를 몇 번 마신 적이 있는데 마실 때마다 얼굴이 퉁퉁 부었습니다. 그런데 선물로 저에게 말리화차를 주시네요.”잠시 머뭇거리던 소우연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말리화차는 소우희가 가장 좋아하는 화차입니다.”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을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팠다.“그럼 연이 너는 어떤 차를 좋아하는 것이냐?”“전 국화차를 좋아합니다. 체내의 열을 내려주거든요.”“이 서방님이 잘 기억하고 있겠다.”이육진이 다정하게 말하자 소우연은 그런 이육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미소를 지으며 ‘서방님’이라고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듣기 좋았다.한편, 곁에 서있던 간석은 바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왕야는 왕비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거야!’이육진은
소홍범의 말에 임진숙은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에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우리 우희가 평서왕세자에게 시집가는 건 이미 확실하게 정해진 일이었는데 소우연 그 계집애가 훼방을 놓는 바람에…”“그 아이가 무슨 훼방을 놓았단 말이오? 우희에게 혼인을 하사한 사람은 덕빈마마인데 대체 소우연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소우희가 평춘왕과 결혼하게 된 건, 덕빈이 소우희 대신 소우연이 회남왕의 왕비가 된 일에 대한 보복이다!소우희 한 사람만 희생하고 소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덕빈은 충분히 자비를 베풀었다고 봐야 한다.이런저런 일들이 생각나자 머리가 아픈 소홍범은 대충 몇 마디 당부하고는 바로 돌아서서 떠났다.이날.조정을 나선 이육진은 저택으로 돌아갔다. 소우연이 약을 발라주자마자 이육진은 바로 지팡이를 짚고 걷기 연습에 돌입했다.이때, 간석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소씨 부인이 찾아왔다고 말을 전했고 이육진은 고개를 돌려 소우연에게 물었다.“만나고 싶으냐?”“만날 이유가 없습니다.”소씨 가문 사람들과 만날 때마다 기분만 나빠졌다.“가서 그자에게 전해라. 난 이미 오래전에 소씨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이제 더 이상 왕래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확실하게 얘기하거라.”눈치를 살피던 간석은 왕비의 맺고 끊음이 참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왕비는 왕야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지만 소씨 가문 사람들에 대한 태도로 보면 소우희 대신 왕야와 혼인을 치른 일로 소씨 가문 사람들을 많이 원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휴… 왕야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을 텐데…’방을 나서기 전, 간석은 몰래 이육진을 힐끗 쳐다보았다가 이육진과 눈이 딱 마주쳤고 결국 불쌍하게 이육진을 쳐다보던 눈빛도 들키게 되었다.화들짝 놀란 간석은 바로 정신을 번쩍 차렸다.‘왕야가 어떤 분인데 내가 감히 불쌍하게 여기고 있는 거지?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한편, 이런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던 소우연은 간석이 방을 떠나자마자 이육진에게 물었다.“왕야, 혹
“우희야,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임진숙은 황급히 소우희의 입을 막으며 말을 이어갔다.“그자는 이제 네 서방이야. 두 사람은 운명 공동체가 됐기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서로 존경하고 존중해야 해.”“운명 공동체… 허허…”예전에 소우연을 회남왕 저택에 시집 보낼 때에도 가족들은 똑같은 말로 소우연을 설득했다.소우희는 평춘왕 저택에서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데 아무도 그녀를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설마 지금까지 그녀에게 보여준 사랑과 관심이 전부 가짜란 말인가?소우희는 가치가 없어지니 헌신짝처럼 내버려진 자신의 신세가 소우연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우희야, 참아야 돼. 그래도 넌 지금 평춘 왕비잖아. 안주인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돼. 그게 여자의 삶이고 모든 여자들이 그렇게 살아왔어.”임진숙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막내 딸을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임진숙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그 고통을 대신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어머니, 정말 다른 방법이 없는 겁니까?”소우희가 임진숙을 보며 묻자 임진숙이 대답했다.“없어. 얼른 아이를 낳아야 너도 기댈 구석이 생기는 거야. 이러다가 나이가 많은 평춘왕이 어느 날 갑자기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아이를 낳으라고? 하지만 소우희는 결국 후처일 뿐이다. 더군다나 평춘왕은 소우희를 임신하게 만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으며 매번 합방을 하고 나면 소우희에게 피임 탕약을 먹였다.생각할수록 서러워진 소우희는 친정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기로 결정했다.하지만 이튿날, 소우희의 바람과 달리 평춘왕은 소우희를 데리러 직접 진원 장군 저택에 찾아왔다.이번에는 사위답게 선물까지 들고 왔지만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소홍범은 서재에 들어가 평춘왕을 만나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임진숙 혼자서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평춘왕을 보자마자 소우희가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어머니가 저를 하도 그리워하셔서 친정에 며칠만 더 있다가 돌아가도 되겠습니까?”그 말에
온몸을 덜덜 떨고 있던 소우희는 분노로 들끓고 있는 아버지의 눈빛을 보자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바로 이 순간, 오랫동안 마음속을 억누르고 있던 커다란 돌멩이가 드디어 사라진 듯 숨통이 트이기도 했다.“그럴 줄 알았어요. 다들 저를 버리려는 거잖아요. 저를 버리고 싶은 거잖아요…”소우희가 엉엉 울면서 말하자 소홍범은 손을 번쩍 치켜들었지만 결국 소우희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네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하는 것이냐!”소우희는 황급히 임진숙 품 안으로 파고 들었고 딸을 품에 안은 임진숙은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너무 아팠다.모든 면에서 훌륭하고 대견하던 아이가 어쩌다가 이런 처지가 됐을까!이때, 조용하게 서있던 소현준이 소홍범에게 말했다.“이 일을 형과 셋째 아우에게 얘기해야 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현재 산적을 소탕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집안일까지 신경 쓰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나중에 승리해서 돌아오면 그때 얘기하는 낫지 않겠습니까?”분통이 터진 소홍범은 가슴팍을 부여잡고는 소우희를 가리키며 물었다.“네가 우리에게 더 숨기는 것은 없느냐?”“없, 없습니다.”가여운 소우희의 모습에 소홍범은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 지금까지 사랑을 듬뿍 주고 애지중지 키운 딸이기에 소홍범도 더 이상 혼낼 수가 없었다.하지만 멀쩡하던 소씨 가문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소우희가 더는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넌 이제 평춘왕 저택으로 돌아가 평춘 왕비로 조용하게 살 거라.”말을 마친 소홍범은 하루아침에 10년은 늙은 듯 허리를 구부리고는 힘겹게 탁자를 잡고 일어섰고 초점도 잃은 채 넋이 나간 눈빛이었다.한편, 소우희는 아버지의 말에 너무도 서러웠다.“아버지, 제발 저를 내쫓지 말아주세요. 전 평춘왕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전…”“넌 이제 평춘 왕비의 신분이야.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혼인인데 돌아가지 않겠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하지만 평춘왕 그자는… 그 사람은…”
다만 소우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동시에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의 책임을 소우연에게 돌렸다.소우희가 서럽게 울고 있을 때, 소현준의 호위무사가 혜주를 데리고 대청에 나타났다.소현준이 혜주를 힐끗 쳐다보자 혜주는 바로 소우희가 지금까지 저지른 짓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술술 얘기하기 시작했고 마지막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소우희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아씨, 죄송합니다. 고문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소우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조금 전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지금쯤 감당할 수 없는 벌을 받았을 것이다.대청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헛기침을 몇 번 하던 소씨 노부인은 혜주와 소우희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는구나. 우리 가문에 어쩌다가 너 같은 멍청한 애가 태어난 것이냐!”노부인이 언성을 높이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곁에 있던 나인은 재빨리 노부인을 부축했다.“네 딸이니 네가 알아서 교육을 하거라!”노부인이 소홍범에게 말하자 안색이 어두워진 소홍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부인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네, 어머니.”숨을 크게 들이마신 소씨 노부인은 지금까지 두통 치료로 썼던 진정향을 자신이 제일 싫어하던 소우연이 조제했다는 사실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나중에 시간 나면 소우연 그 아이를 저택에 들라 하거라.”소씨 가문은 소우연에게 한번쯤은 확실하게 사과를 해야 한다.소씨 노부인은 지금까지 소우연이 소씨 가문의 저주라고 굳게 믿었는데 그 저주받은 아이가 자신에게 진정향을 조제해주고 군영에 치료약까지 조제해줬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뿐만 아니라 소현우가 예전에 전장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며칠동안 혼절 상태에 빠져 있었을 때에도 소우연이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란 말인가!“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가슴이 답답해진 노부인은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 화가 나서 기절할 것만 같았기에 나인의 부축을 받고 대청을 떠났다
딸의 뜻을 알아차린 임진숙은 서둘러 하인들에게 물러가라고 했다.그 뒤로 한참동안 엉엉 울던 소우희는 결국 모든 걸 사실대로 고백했고 임진숙은 너무 큰 충격에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넌 봉황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잖아. 네가 태어날 때 흠천감의 도사님이 직접 네 운명까지 점을 치셨는데 잘못됐을 리가 없어. 넌 어렸을 때 매일 의서를 곁에 두고 살았는데 어떻게 의술을 익히지 못했을 수가 있어?”“그 의서들은 하나같이 재미가 없어서 도무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어요.”“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면 안 되지!”“전 사람들을 속일 생각이 없었어요. 그때 당시 할머니 두통이 심해졌을 때 제가 의서를 많이 봤다고 저에게 두통을 고칠 수 있는 약을 지어오라고 하셨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약을 조제한다는 게 말도 안 되잖아요! 그러다가 나중에 소우연이 진정향을 조제해서 할머니께 드렸는데 할머니는 쳐다보지도 않으시고 버렸어요. 소우연이 그때 당시 할머니께서 나를 믿으시니 나더러 진정향을 할머니께 드리라고 했어요. 그 진정향은 예상보다 효과가 더욱 좋았고 그때부터 할머니께서는 그 진정향을 제가 조제했다고 확신하게 되신 거예요…”“그럼 나중에라도 사실을 밝혔어야지!”“그때 당시에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할머니께서 두통으로 고통을 덜 받았으면 하는 생각밖에 없었거든요.”임진숙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군영에서 쓰는 약들은 뭐야? 왜 네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은 것이야?”“그, 그 약들은… 어차피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은 소우연이 의술을 할 줄 안다는 걸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냥 제가 만들었다고 얘기한 거예요.”임진숙의 실망한 표정으로 보며 입술을 꽉 깨문 소우희는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어머니, 어머니까지 절 버리시면 전 정말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요. 어머니…”임진숙은 주먹으로 소우희의 등을 몇 번 때렸다.“바보 같은 계집애, 어떻게 이렇게 큰 사고를 칠 수가 있어!”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착했던 아
나중에 왕비를 들이고 나서도 계속 이 모양 이 꼴이었다.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본채 안을 쳐다보던 이지윤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소우희를 발견하자 이종대에게 버럭 화를 냈다.“아버지, 이젠 첩도 모자라서 왕비까지… 저 사람은 아버지가 이 집에 정식으로 들인 정실 부인입니다. 도대체 왕비를 몇 명이나 더 들여야 정신을 차리시겠습니까?”“지윤아, 네가 오해를 한 것이다.”이종대는 이지윤을 달래는 와중에 다급하게 손을 흔들며 손님들을 내쫓았다.“저기, 왕야, 저희는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말을 하던 두 사람은 급하게 저택을 나섰고 이종대도 대충 대답했다.“그래, 그래. 나중에 다시 보자고.”고개를 돌린 이종대는 아들이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자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지윤이 네가 아직 어려서 모르는 일들이 많아.”이지윤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모르는 일들이 많긴 무슨. 이 저택 안이 매일 조용하지 않으니 이지윤도 공부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어차피 꼴통 왕야로 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큰 죄를 짓지 않고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대충 살아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부자 두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서 밖으로 향했다.방 안은 순식간에 텅 비어 버렸다.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하인 두어 명을 보자 그제야 소우희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이종대 저자도 약점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네! 이지윤에게 저렇게 고분고분하다니!’멀어져가는 이지윤의 뒷모습을 보며 소우희의 마음속에 희망이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이지윤이 그녀를 이 지옥에서 구해줄 수 있을까?다음날.소우희는 시녀 두 명을 데리고 결국 진원 장군 저택으로 돌아왔다.너무 일찍 온 탓에 저택 안에는 소씨 노부인과 임진숙밖에 없었다.“할머니…”조심스럽게 입을 연 소우희는 노부인에게 큰절을 올렸다.식탁 앞에 앉아있던 노부인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어젯밤 소현준이 했던 말들이 떠오르자 머리가 지끈 아팠다.어젯밤, 소현준은 소씨 노부인에게 자신이 저번에
“연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냐? 그럼 조금 전에 했던 말도 진심이냐?”“당연히 진심이지요. 마음만 급하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특히 왕야께서는 4년 동안 거의 걷지 않으셨기에 더욱 천천히 적응해야 합니다.”“알겠다. 앞으로 연이 네 말을 잘 듣도록 할게.”잠시 고민하던 소우연이 말했다.“그럼 앞으로 매일 한 시간만 걷기 연습을 하십시오.”“그래.”휠체어에 앉은 이육진은 지팡이를 곁에 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우연이 말한 것처럼 마음만 급하다고 되는 일이 아니기에 소우연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했다.간단하게 목욕을 마친 뒤, 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약을 발라주고 침을 놓고 안마까지 해주었다.그러면서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기도 했다.이육진은 이민수가 얘기한 배꽃에 대해 생각하느라 정신이 팔려 소우연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왕야?”세 번째 부름에 겨우 정신을 번쩍 차린 이육진은 당황한 듯 물었다.“아, 그럼 소현준 그자는 왜 그냥 간 것이냐?”소우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저에게 소우희와 소씨 가문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차마 요구할 수가 없었겠지요.”“그래도 소씨 가문 나머지 사람들보다 자기 주제를 확실하게 알긴 아네.”이육진의 말에 소우연도 동의하듯 피식 웃었다.소현준은 소씨 가문의 유일한 장원 급제자로써 대리사경 일을 맡고 있었으며 소씨 가문에서 꽤 높은 지위를 자랑했다.만약 그때 당시 소현준이 소우연의 편에 들어 한 마디만 해주었다면 소우연은 소씨 가문에서 이렇게까지 처참한 대우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평춘왕 관저에서.만안당에서 큰 수모를 당한 소우희는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평춘왕 관저로 돌아왔고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손님 몇 명을 데리고 돌아온 평춘왕과 마주치게 되었다.화들짝 놀란 소우희는 말까지 더듬었다.“왕, 왕야…”“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왜 아직도 이 집에 있는 것이야?”평춘왕의 말에 소우희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친정에 갔다가 돌아온 겁니다.”“친정에 갔다가
“왕비께서는 그때 당시 매일 밖으로 외출하지 않으셨습니까?”소현준이 참다못해 묻자 소우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전 그때 겨우 한 시간씩 외출했던 것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왜 외출했겠습니까? 약을 지어야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소현준을 위해 약을 지으러 외출하면서 낡은 절에 쓰러져 있던 한 낯선 남자를 치료해주기도 했다.그 남자의 말투로 보아서는 경성 사람 같았는데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얼굴에 심각한 화상을 입고 온몸에 크고 작은 칼자국과 화상자국들이 가득했다.소우연과 그녀의 곁을 지키는 시녀 외에 소우희만 이 일에 대해 대충 알고 있었다.그때 당시 소우희는 남녀가 유별하니 소우연에게 그 남자를 치료하지 말라고 제지했지만 살아 숨 쉬는 생명을 그냥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소우희는 이를 모른 척해줄 수 있다고 했지만 그 남자를 살리는 조건으로 소우희는 소우연의 공을 빼앗으려 했다. 소우연이 매일 외출하면서 소현우를 7일동안 보살폈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소현우에게 그를 살린 사람이 소우희라고 생각하게 만들려고 했다.“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피곤합니다. 대감께서도 별로 듣고 싶지 않으신 것 같은데 이만 돌아가주십시오.”소우연이 피곤한 기색을 보이자 정연도 한걸음 나서서 말을 보탰다.“소 대감님, 이만 돌아가주십시오.”가족이 아닌 정연이 들어도 화가 치미는 대화였다.잠시 머뭇거리던 소현준은 자신이 단 한번도 관심을 주지 않은 여동생이 이제 그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는 것도 당연한 것 같아서 이내 돌아섰다.소현준이 진료실을 나서자 정연이 소우연에게 다가가 물었다.“왕비님, 오늘 진료를 계속 할까요?”손을 미세하게 떨고 있는 소우연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소현준은 모든 진실을 다 알고 나서도 소우희를 전혀 탓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소우희를 위해 소우연에게 찾아오기까지 했다.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진료는 이만해야 할 것 같다.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자.”소우연이 담담한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