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아무도 소우연이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이육진은 조용히 웃으며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 위를 토닥였다.그의 손끝엔 다정함과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용 대인이 말한 건, 이민수의 운세가 강하다는 거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야.”“맞습니다, 마마.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용강한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잔잔한 파문을 느꼈다.자신이 목숨을 걸고 되돌려준 이 생이, 정말 그녀에게 옳은 것이었을까.소우연도 그제야 자신이 다소 격해졌음을 자각하고, 목소리를 낮췄다.“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태자 전하께서는 이 나라의 정통 황태손입니다. 감히, 이민수 따위가 넘볼 자리가 아니지요.”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했다.“아니요, 비교조차 할 수 없어요. 그 자는 애초에 겨룰 자격조차 없습니다.”심소균이 손뼉을 치며 맞장구쳤다.“하하, 옳은 말씀입니다! 태자 전하께선 건강하시고 학식도 뛰어나시며, 전장에서 무공까지 세우신 분이십니다. 이런 분이야말로 진짜 황제가 되실 분이지요.”사실, 처음 용강한이 태자빈을 정치적 논의 자리에 부르자 했을 때 심소균은 회의적이었다.‘여인이 정사에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생각지 못한 강력한 우군을 얻은 느낌이었다.이육진이 예전처럼 무기력하게 지내고 있었다면, 평서왕부는 분명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아니다.그깟 이민수가 무슨 자격으로 황태손을 넘본단 말인가?심소균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이육진과 용강한은 왜 그토록 이민수를 경계하는 것일까.그 순간, 용강한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태자 전하, 이제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용강한을 믿었다.어릴 적부터의 우정도 있지만, 그보다도 그는 단 한 사람 황제의 뜻만 따르는 진짜 실세였다.사실 이육진이 소우연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진짜 신부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예를 갖춘 것도
“그러면… 어마마마께선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안 하신다는 거네요?”이육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방 안의 모두가 일제히 미간을 좁혔다.소우연은 애써 머릿속을 더듬었다. 원작의 내용을 떠올리려 했지만, 환생 이후부터였을까. 책 속의 많은 장면들이 이제는 희미하게만 남아 있었다.용강한의 말을 실마리 삼아 곰곰이 생각을 이어갔다. 대체 왜 평서왕부가 문제의 근원이라는 걸까.“폐하께선 겉으로 보기엔 덕빈마마를 총애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후궁으로 봉하지 않으셨을뿐더러 태자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셔도 어마마마를 태후로 올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지요. 총애가 아니라… 그건 분명 증오일 거예요.”소우연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어 이육진을 바라보며 조용히 덧붙였다.“감정 섞인 말이 아닙니다. 지금으로선, 이 설명 외엔 납득할 길이 없어요.”이육진 역시 예전부터 마음속으로 그 의문을 품고 있었다.하지만 덕빈은 언제나 말했다. 자신이 원하는 건 폐하의 마음이지, 자리나 명예 같은 건 의미 없다고.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지만, 황제가 그에게 어머니를 태후로 삼지 말라는 맹세까지 요구했을 때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아버지의 총애란 그저 꿈결 속 한순간의 착각이었음을 말이다.용강한이 말을 이었다.“평서왕부는 구조부터가 특별합니다. 세자인 이민수만이 정실 왕비 소생이고, 나머지 자식들은 모두 첩의 소생인데다 전부 딸들뿐이지요. 그리고 폐하께도 태자 전하 외엔 다른 아들이 없습니다.”이 모든 게 과연 우연일까?아니다. 용강한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핵심은 분명 평서왕부 안에 있을 터였다. 진실을 알아내려면 반드시 실마리를 찾아내야 했다. 그리고 그 실마리를 찢어내야만, 전모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황제가 덕빈을 증오하고 있다면, 그녀의 입에서는 결코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결국 평서왕부를 직접 건드릴 수밖에 없었다.“그동안 평서왕부를 지켜봤지만, 단 한 번도 의심할 만한 흔적은 없었다.”이육진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소우연은 누구보다
본채로 돌아온 뒤 잠시 지나지 않아 저녁상이 차려졌다.소우연은 이육진과 나란히 식사를 마친 뒤 바둑 한 판을 두었고 이후 함께 탕에 몸을 담갔다.그 시간이 흐르자 이육진의 눈빛은 뜨겁게 달아올랐다.“연아, 준비는 되었느냐.”그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소우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뻔히 알았지만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그러자 이육진은 고개를 갸웃했다.“아니, 명심이 네게 책을 하나 주지 않았더냐.”또 그 ‘품화보감’ 이야기였다.소우연은 고개를 들고 진지하게 책을 읽고 있던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태자 저하께선 나라의 황태손이십니다. 그런 책은… 덜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이육진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그녀가 점잖게 타이르는 모습은 마치 황후가 후궁의 법도를 이야기하는 듯했다.“그 말도 일리는 있지. 허나 황태손인 만큼 자손을 남기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겠느냐.”“그동안은 네가 아플까 염려되어 물러섰지만 이대로는 우리가 어찌 주공의 예를 이루고 자손을 이어가겠느냐.”소우연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반면 이육진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제는 과거처럼 차갑고 위협적인 얼굴이 아니었다.아니, 그가 싸늘한 얼굴로 병영에서 돌아왔을 때는 눈빛 하나에도 살기가 서려 있었으니 지금처럼 온화한 모습은 오히려 낯설 정도였다.“응?”그녀가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있자 이육진은 혹시 노한 건 아닌가 싶어 물었다.소우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맞는 말씀이십니다.”그 말에 이육진은 흐뭇하게 웃더니 베개 아래를 더듬었다.그녀가 말리기도 전에 그는 ‘품화보감’을 꺼내 들었다.“그게 거기에 있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분명 정연이 몰래 숨긴 건데 어떻게…“그냥… 감으로.”정말 기가 막히게도 잘 맞췄다.소우연은 한숨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옷을 벗어 옆의 행거에 걸고 침상 위에 올라 누웠다.“연아, 이리 오너라.”그는 손을
“태자 전하, 이건…?”물소리를 들은 것도 아닌데 무슨 일이지 싶었다.이육진은 손에 든 ‘품화보감’을 간석에게 던졌다.“없애라.”“…예?”간석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책을 받았다.이육진은 그를 힐끗 노려보고는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돌아갔다.간석은 품에 안긴 책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태자 전하와 태자빈 마마께서 이 책이 마음에 안 드신 건가?그럴 리가 없는데. 이건 지금 궁 안에서도 제일 유행하는 책인데.문장도 훌륭하고, 삽화는 또 어찌나 공들여 그렸는지… 작가의 재주가 범상치 않건만.“혹시 글 없이 그림만 있는 걸로 바꿔드려야 하나? 아니면 좀 더…”간석이 중얼거리며 고민하고 있을 때, 옆을 지나가던 정연과 명심이 그의 품에 들린 책을 보고는 동시에 얼굴을 붉혔다.“태감 나리, 괜찮으세요?”정연이 조심스레 물었다.“괜찮다. 다들 들어가 쉬거라.”간석이 손을 저어 보이며 대답했다.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간석은 책을 들고 어둠 속에 손짓했고, 이내 작은 내시 하나가 달려왔다.그에게 책을 맡긴 간석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방 안.촛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이육진은 자리에 올라 소우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그녀의 몸은 부드러워 손끝이 닿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으나, 여전히 자는 척하는 그녀는 깨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평춘왕이 붕어했으니 내일은 조문하러 가야겠지.”그가 조용히 말을 건넸지만 소우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육진은 살짝 상처받은 눈빛이었다.자신이 그렇게 무섭단 말인가. 요즘 들어 부부 사이의 일에 있어 그녀는 점점 더 소극적으로 변했다.……다음 날.소우연은 아침을 먹고 난 뒤 간석으로부터 이육진이 조정에서 바로 평춘왕부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시간을 맞춰 그녀도 곧 마차를 타고 평춘왕부로 향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정오 무렵이었다.왕부의 집사들과 함께 이지윤이 정중히 마중 나와 있었다.소우연은 간단히 조의를 표하며 말했다.“
당당하던 김조윤이 이렇게 허둥대는 모습은 처음이었다.이육진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인가?”김조윤은 급히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태자 전하, 미천한 신이 평춘왕비의 행방을 찾지 못했습니다. 세자 이지윤에게 물었으나 깊은 슬픔에 빠져 왕비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고 하였습니다.”뜨거운 바람이 한 줄기 스쳐 지나갔다.공기 속 태운 지전의 냄새가 희미하게 퍼져 있었고 주변 대신들은 말 한마디 없이 숨을 죽이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평춘왕은 생전에 좋은 평판이 없었다.그는 왕족이라는 지위를 등에 업고 온갖 추악한 짓을 서슴지 않던 인물이었다. 죽고 나서야 겨우 사람들 입에서 잘 죽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대부분은 관심도 없다는 듯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그런데 왜 이육진은 굳이 그에게 '공정한 조사'를 하겠다고 나서는 걸까?“땅을 파헤쳐서라도 반드시 찾아라.”그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그 한마디가 공기를 가르듯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김조윤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나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하지만, 도대체 어디로 숨은 걸까.소우연은 생각했다.자신이 대리 혼인을 결심한 순간부터 이 이야기는 이미 원작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그 이후로 일어나는 일은 더는 그녀가 알던 흐름이 아니었다.“대체 어디로 숨었을까요.”심소균이 옆으로 다가와 두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한 뒤 물었다.이육진은 그를 흘끗 보며 말했다.“심심하다면 너도 한번 찾아보는 게 어떻겠느냐.”“알겠습니다. 조문을 드린 뒤 바로 움직이죠.”이육진은 곁에 선 소우연의 손을 잡고 평서왕부로 향했다.이미 문 앞에는 이지윤이 무릎 꿇고 기다리고 있었다.영전에는 이미 평춘왕의 관이 안치되어 있었고 검은 관은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경을 외우는 소리만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태자 전하, 태자빈 마마. 분향해 주시지요.”주례의 안내에 따라 이지윤이 향을 건넸고, 이육진과 소우연은 정중하게 절하며 향을 올렸다.“세자 저하, 심신을 잘 추스르시길 바랍니다.”소우연의
이육진은 봉투 하나를 꺼내 소우연에게 건넸다.“밀서다.”“소우희가 평춘왕을 학대하고 해치려 했다는 내용을 담은 고발장이야. 평춘왕 본인의 필체로 쓴 거고 다만 그중 이지윤 관련 내용은 누군가 고의로 훼손했더군.”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이육진을 보며 소우연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되물었다.“설마… 이지윤이 스스로 그랬다는 건가요?”“그럴 가능성이 높아.”소우연은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왜요, 도대체…”“소우희를 방패로 쓰려는 거지. 둘 사이가 얼마나 얽혀 있었는지 숨길 수가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아바마마께서 그 자가 황후가 될 운명이었다는 사실까지 들키면, 넌 어찌할 것 같으냐?”“반드시 조사하실 거예요.”“그러니까 이지윤은 먼저 소우희를 제물로 바친 것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야. 단칼에 잘라낸 걸 보면 제법 결단력은 있더군.”하지만 소우연의 머릿속엔 오직 하나, 소우희의 행방만이 맴돌고 있었다.이 세계가 애초에 그녀를 선택한 ‘여주’였다면, 이번에도 또다시 도망칠 수 있을까.“그런데 말이지, 이상한 구석이 하나 있어.”이육진은 짧은 침묵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지윤은 줄곧 소우희에게 무관심했지. 그런데 이 밀서는 불과 며칠 전에 쓰인 거야. 그동안 그 자는 왕부에 없었고 소우희 곁을 돌보던 시녀는 이미 소우희에게 맞아 죽었다더군. 즉 본채엔 혜주 하나뿐이었단 소리지.”“혜주와 소우희는 특별히 깊은 주종 관계도 아니었잖아요. 그럼에도 이 밀서를 넘길 이유가 있었을까요?”“없어. 그런데 혜주가 팔려간 뒤 그 아이를 다시 사들인 사람이 바로 이지윤이야. 그러니 혜주는 오직 그에게만 충성하겠지.”소우연은 순간 떠오른 기억에 고개를 갸웃했다.“하지만 진우 말로는… 혜주를 데려간 건 청루의 어떤 아씨, 이름이 아령이었다고 했어요.”이육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제야 소우연의 눈이 커졌다.“…그 아령이라는 여인도 이지윤의 사람이었군요.”“열에 아홉은 맞을 거다.”“그
소우연은 약간의 망설임을 안고 이육진을 바라보았다.“부군, 제가 하는 말이 너무 뜬금없고 아무 근거도 없는 얘기라면… 그래도 믿어주시겠어요?”“믿지.”“혹시 도를 어긴 말이라면요?”“그 또한 상관없다.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할 것이다.”소우연은 입을 열려다 말고 고개를 떨궜다.“아마 제가 미친 소리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요.”그 말에 이육진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자신의 뺨에 가져갔다.“너는 다른 누구와도 달라. 나는 너를 나 자신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예전에 그러셨죠. 제가 제 고민을 털어놓는 날 부군도 마음을 열어주시겠다고.”소우연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가 막 태자로 봉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날, 황제가 그를 어전으로 불러 밤늦게까지 붙들어두었고, 돌아온 이육진의 눈빛엔 피로와 체념이 가득했다.어제 태자부 서재에서 용강한과 심소균이 나눈 이야기 끝에 이육진은 그날 밤 황제가 내린 명을 모두 털어놓았다.“나도 너에게 마음을 열겠다.”그녀는 그 말에 참지 못하고 이육진의 품에 안겼다.덜컹이는 마차 바퀴 소리, 청량하게 울리는 금종 소리, 말발굽 소리멀리서 들려오는 진규의 채찍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네, 저도… 마음을 열게요.”그녀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댄 채 등을 쓰다듬는 손길에 마음이 놓였다.“그래.”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미소 지었다.은은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고 그의 가슴은 또 한 번 따뜻해졌다.태자부로 돌아오자 하인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태자 전하, 흠천감의 용 감정께서 별채에서 오래 기다리고 계십니다.”“또 뭐라고 하더냐?”“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꼭 별채로 모셔달라고 전하셨습니다.”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소우연을 돌아보았다.“잠시 이야기 좀 나누고 오마.”“네.”두 사람은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소우연은 이육진이 별채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려던 참이었다.그런데 용강한이 마침 그때 별채에서 먼저 걸어 나왔다.소우연은 그가 자신을 보지 않았음에도 왠지
“저는…”소우연은 정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고, 그래서인지 뭐든지 자신이 더 잘 안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조언하려는 듯했다.잠시 고민하던 소우연은 조심스레 말했다.“그 일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하지만 마마, 나중이면 늦을 수도 있어요.”“정말 필요하다면,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소우연은 손을 뻗어 정연을 일으켜 세웠다.한편 이육진은 용강한을 서재로 데려갔다.온돌 위에 앉은 그는 기린 문양의 바둑판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둘은 바둑을 두며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예전의 넌 이렇지 않았지. 그런데 한 달 사이 벌써 세 번이나 혼자 날 찾아왔어.”이육진이 바둑알을 쥔 채 말했다.용강한은 흰돌을 놓으며 조용히 말했다.“이번엔 별수 없이 왔습니다. 명성이 뒤엉켜 있고 별자리도 불안정합니다. 이대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말하는 건… 그 ‘봉성’이란 것이냐.”“예. 그리고 태자 전하, 흑돌 차례입니다.”이육진은 주저 없이 흑돌을 내려놓았다.“계속 말해보지.”“오늘 제가 온 이유는 하나입니다. 싹을 자르려면 뿌리까지 제거해야 합니다. 그 아이가 도망쳤습니다.”“곧 찾게 될 거다.”용강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태자 전하, 요즘 운불사에는 다녀가셨습니까?”“장공 스님이 또 외지로 떠나셨다고 들었다.”“그건 태자 전하만 알고 계신 일이죠. 다른 이들은 모릅니다. 이번엔 운불사에 다녀오시지요. 단 태자빈 마마는 데려가지 마십시오.”이육진은 미간을 찌푸렸다.“그 아이가 운불사에 있다는 말이냐?”“확실치는 않지만 언젠가는 태자 전하를 찾아올 겁니다.”“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용강한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그 아이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이는 태자 전하와 평서왕세자 두 사람뿐입니다.”“…좋다. 내일 운불사로 가겠다.”두 사람의 바둑은 계속 이어졌고 어느새 승패가 갈렸다.이육진의 흑돌이 백돌을 포위했지만 마지막 한 수는 살려두었다.용강한은 백돌 하나를 들어 바둑판 중앙에 내
손을 뻗던 용강한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전에 소우연은 그와 단둘이 한 공간에 있는 것을 많이 두려워했는데 이렇게 저택까지 찾아온 걸 보면 그녀는 이육진을 많이 좋아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용 대감님은 확실히 태자 저하의 편이 맞으시지요?”소우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흠천감은 상운국의 가장 신성한 직위로 자리에 오른 모든 감정들은 한 명의 황제에게 충성한다.황태자인 이육진은 누가 봐도 다음 황제가 될 사람이다. 또한 용강한과 이육진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은 사이이기에 소우연은 용강한이 무조건 이육진의 편에 설 거라고 확신했다.최소한 이육진을 배신할 사람은 절대 아니다.“소인은 단지 태자빈 마마의 편일 뿐입니다.”이때, 용강한이 소우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하다가 싱그러우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저 말입니까?”소우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용강한이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소우연 때문에 용강한은 마음이 더욱 굳건해졌고 위험을 무릅쓰고 이육진과 함께 계획을 모색하고 운명을 거스르려고 하는 것이다.이 모든 건 전부 소우연을 위한 것이다.그녀를 위해 용강한과 이육진은 반드시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안 그러면 어떤 결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용강한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한편, 예상치 못한 대답에 소우연은 입을 뻥긋하다가 한 가지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제, 제가 예전에 대감께 장수 목걸이를 드린 것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가볍게 미소를 짓던 용강한은 소우연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소우연에 대한 감정은 절대 단순한 고마움이 아니었다.그때 당시 어린 소녀였던 소우연은 맑고 순수한 눈으로 용강한을 쳐다보았고 그 눈빛을 그는 지금도, 아니 평생 잊을 수 없다.용강한에게 장수 목걸이를 건네며 말을 하던 소우연의 목소리는 너무도 따듯했고 그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전 돈이 없습니다. 대신 이 장수 목걸이가 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이걸로 돈을 갚고 망자가 편히 쉴 수 있
”저하…”소우연의 시선이 이육진 손에 든 쪽지에 꽂히자 이육진은 이내 이를 소우연에게 건넸다.“일단 소우희 그자를 처리하고 오겠다. 돌아와서 다시 자세하게 얘기하자.”손에 쪽지를 든 소우연은 멀어지는 이육진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한편, 쪽지 속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고 그저 옥패 하나만 그려져 있었다. 이 옥패는 그때 당시 소우연이 남강에서 구해준 소년이 그녀에게 준 옥패였다.‘소우희가 이 옥패로 또 이상한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쓰려는 건 아니겠지? 이 나쁜 계집애는 어떻게 저런 처지가 됐는데도 날 걸고 넘어지려고 수를 쓰는 거지?’“태자빈 마마,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안색이 하얗게 질린 소우연을 지켜보던 정연이 조심스럽게 물었고 소우연은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쪽지를 확 꾸겨 버렸다.이내 정신을 번쩍 차린 소우연은 고개를 돌려 정연에게 말했다.“진우에게 외출 준비를 하라고 전하거라. 잠깐 어디 좀 다녀와야겠다.”엄숙하고 진지한 태자빈의 표정에 정연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방을 나섰다.‘저하께서도 조금 전에 급히 저택을 떠나셨고 태자빈 마마도 이렇게 갑자기 외출 준비를 하는 걸 보면 뭔가 심상치가 않은데? 대체 소우희가 쪽지에 뭘 썼기에 두 분께서 이런 반응을 보이시는 거지?’이내 저택 앞에 마차가 세워졌다. 소우연이 마차에 올라타자 진우가 그녀에게 물었다.“마마,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용 대감을 찾아 뵈어야겠다.”“용, 용 대감님 말입니까?”진우와 정연은 소우연이 흠천감의 용강한을 찾아가겠다고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태자가 예전에 자신을 구해준 소녀가 바로 태자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부터 집안 모든 하인들에게 앞으로 태자빈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명했다.만약 태자와 태자빈이 동시에 명을 내린다면 태자빈의 명령에 우선적으로 따르라고 하기도 했다.용강한의 저택은 멀리 떨어져 있기에 마차는 두 시간 정도 달리고 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소우연이 마차에서 내리고 진우가 문지기에게 말을 전하려고 할
다음날.소우연의 시중을 들려고 방에 찾아온 정연과 명심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소우연은 이들의 이런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그녀가 처음 이육진과 살을 맞닿은 그때였다. 진정한 합방을 한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만지고 애정을 나눴으며 이불을 적시기도 했다.그때 당시에도 정연과 명심은 이렇게 환하게 웃고 있었다.두 사람이 지내는 곁방이 본채와 이토록 가까운데 그들도 당연히 다 들었을 것이다. 소우연은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왠지 부끄럽기도 하고 남사스럽게도 했다.한편, 이육진이 소우희에 대한 체포령을 거두었기에 며칠동안 소우희에 관한 소식이 전혀 없었다.그러다가 이날, 한 거렁뱅이가 쪽지 하나를 들고 태자부 앞을 서성이다가 누군가가 이 쪽지를 직접 태자 저하께 전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면서 문지기에 쪽지를 건넸다.문지기는 당연히 거렁뱅이 주제의 쪽지를 태자에게 전할 리가 없었다. 한편, 우연히 이 일을 알게 된 명심은 바로 소우연에게 말해주었다.“문지기에게 얘기하거라. 나중에 태자 저하께서 돌아오시면 바로 저하께 드리라고.”“네, 알겠습니다.”명심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는 태자빈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정체도 모르는 이런 쪽지를 당연히 몰수할 거라고 생각했다. ‘겁이 없는 어느 가문 멍청한 아씨가 태자 저하께 추파라도 보내는 거면 어쩌려고 그러시는 거지? 태자 저하께서 다른 여인을 마음에 품게 될까 봐 걱정도 안 되시는 건가?’“나한테 무엇을 주라고 한 것이냐?”소우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육진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태자 저하께 인사를 올립니다.”정연과 명심은 바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고 이육진이 손을 쓱 흔들자 두 사람은 곁으로 물러나 조용하게 서있었다.소우연은 이내 이육진을 보며 말했다.“문지기 말로는 거렁뱅이로 보이는 자가 저하께 쪽지를 전해달라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마침 저하께서 오셨으니 그 쪽지를 한번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거렁뱅이가 나한테 쪽지를?”이육진은 직감적으로 이 쪽
”끄적거린 글이라… 소설이라…”소우연을 안고 있던 이육진의 손이 멈칫했다.“네, 소우희와 이민수 두 사람은 이 세계에서, 그러니까 이 소설 속의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저는 소우희가 이민수에게 향해 가기 위해 만들어진 디딤돌이고요. 부군은 이민수가 황위에 오르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부군은 이 소설 속 최대 악역으로 장래에 이민수가 휘두른 칼에 베여 목숨을 잃게 됩니다. 때문에 저는 작은 사고 하나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소우희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부군, 제 말을 듣고 계십니까?”말을 하던 소우연은 이육진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왠지 조금 후회가 되었다. 전생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도 조심스러운데 이 세상이 그저 소설 속 허상에 불과하다는 얘기까지 하다니.한편, 소우연이 걱정한 것처럼 이육진은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은은한 촛불로 밝혀진 방 안에서 이육진은 소우연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그녀의 이마와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듣고 있다.”마음속으로는 소우연을 믿고 싶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소우연에게 심각한 심리적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그녀가 꾼 악몽, 그리고 조금 전에 했던 말들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얘기들이다.“그럼 제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믿냐고?이육진은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입만 뻥긋거렸다.그리고 그 망설임을 눈치챈 소우연은 이육진이 그녀의 말을 여전히 믿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육진은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소우연도 이런 일들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고, 깨어났을 때 머릿속에 소설 원작 속의 내용이 대체적으로 스쳐 지나가지 않았다면 그녀도 자신이 사는 세상이 그저 한 편의 소설뿐이라는 사실을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또한 전생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부군, 믿든 믿지 못하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저와 부군의 공동의 적이 평서왕 관저의 이민수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지금은 원하지 않습니다.”소우연이 작은 손으로 이육진의 팔뚝을 툭 치며 말하자 이육진이 허리를 살짝 펴며 되물었다.“정말 원하지 않는 것이냐?”“네, 아직도 많이 아픕니다.”술이 거의 다 깬 소우연은 고개를 돌려 이육진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내가 약을 발라줄게.”“아니, 전…”소우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육진이 그녀에게 빠르게 입을 맞추고는 박력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거절은 사양한다. 약을 바르지 않겠다고 하면 그건 네가 아직 덜 아프다는 걸로 이해해도 되겠느냐?”어떻게 이렇게 막무가내인 남자가 있단 말인가!하지만 이육진의 품에 안긴 소우연은 감히 반항할 수도 없어서 빨개진 얼굴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그 모습에 이육진은 더할 나위 없는 성취감이 들었지만 일부러 입을 삐죽 내밀며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연아, 사실 나도 너와 똑같이 아프단다.”합방이 처음인 이육진도 아팠지만 그래도 너무 행복하고 기분이 좋았다.한편, 이육진의 말에 소우연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럴 리가? 남자도 이런 행위를 하면 아픈 건가?’전혀 믿지 않는 것 같은 소우연의 표정을 보며 이육진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정말이다.”‘어떻게 저렇게 진지하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정말 부끄럽거나 남사스럽지도 않은 건가?’조금 전에 침대 위에서 소우연은 자신도 모르게 이육진을 짐승이라고 나무라기도 했는데 그 말을 들은 이육진은 더욱 흥분했었다.“그래, 난 짐승이 맞아. 그래서 우리 연이는 짐승 같은 내가 좋은 것이냐?”너무 흥분한 탓인지 소우연은 본능적으로 좋아한다고 얘기하면서 이런 모습을 더 많이 보여달라고 하기도 했다.아무튼, 결론적으로 보았을 때, 이육진마저도 오늘 밤의 소우연이 평소와 너무도 다르게 느껴졌다.조금 뒤, 목욕을 마친 이육진은 소우연의 발이 땅에 닿지 않게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천천히 침대로 향했다. 그러고는 새로 편 이부자리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직접
소우연은 이육진의 몸과 맞닿고 있으면 갈증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나뭇가지에 핀 벚꽃 마냥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을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었다.한편, 밖에 서있던 간석은 방 안에서 들리는 야릇한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는 곁에 있던 정연에게 말했다.“얼른 하인들을 불러서 따듯한 목욕물을 준비하거라.”어느새 얼굴이 빨개진 정연은 명심을 데리고 바로 떠났다.태자와 태자빈은 처음에 합방을 전혀 하지 않다가 나중에 이불을 적시는 횟수가 잦아졌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침대에 핏자국에 남긴 적은 없었다.하여 간석은 두 사람이 지금까지 진정한 합방을 한 게 맞는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두 사람이 그동안 합방을 한 게 확실하다면 왜 아직도 회임 소식이 없는 걸까? 물론 부부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낀다면 언젠가 예쁜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간석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방 안에서 예사롭지 않은, 평소와 다른 움직임 소리가 들려왔으며 침대가 곧 부러질 것만 같았다.태자와 태자빈의 야릇한 신음 소리에 침대가 격하게 흔들리는 소리까지 들리자 간석은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이번에는 뭔가 다르다.간석은 입꼬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가고 있었다.한 시간 뒤, 이육진은 간석에게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했다.이육진이 소우연을 안고 욕실로 향했고 정연과 명심은 이부자리를 정리하다가 빨간 핏자국을 발견하게 되었다.흠칫하던 두 사람은 이내 서로를 힐끔 쳐다보았다.설마…전에 태자와 태자빈은 이불을 적신 적이 몇 번 있지만 이렇게 처음으로 핏자국을 남긴 걸 보면 오늘이야말로 진정한 합방이란 말인가?자세히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기도 했다.처음 핏자국을 남겼을 땐 태자가 자신의 손바닥을 베어 이불에 묻혀서 덕빈의 눈을 피한 것이다.그러고 나서 두 사람이 합방을 했을 때 만약 태자빈이 피를 흘리지 않았다면 태자는 꽤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하지만 태자가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는 걸로 봐서는 두 사람이 지금까
소우연은 조금 더운 게 아니었다. 그녀는 심지어 옷을 벗어던지고 싶은 심정이었으며 특히 이육진의 품에 이렇게 안겨 있으니 전에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청량감이 들기도 했다.이런 느낌은 말로 쉽게 형용할 수 없었다.소우연의 두 손은 자신만의 생각이 있는 듯 본능적으로 이육진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고 옆구리살을 살짝 꼬집으니 왠지 흥분되기도 했다.“연아, 준비되었느냐?”이미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설렌 이육진은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오늘 제가 술을 마신 건, 저하께 드릴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소우연이 몽롱한 정신으로 대꾸했다.“연아, 그러지 말고 오늘 해보는 건 어떻겠느냐? 네가 술을 마셨으니 어쩌면 전처럼 그리 아프지 않을 수도 있다.”두 사람은 각자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자신의 악몽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그저 작가가 쓴 이야기 속 허상이라고 얘기하고 싶었다.하지만 이육진은 지금 그녀와의 합방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전, 전…”“더 이상 거절하지 말거라. 저번에도 날 거절하지 않았느냐?”소우연이 입을 열던 순간, 이육진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과 귓볼 그리고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소우연은 마음이 나른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전…”이때, 이육진이 소우연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빠른 걸음으로 침대로 다가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부군, 이번에는 조금 더 살살해주세요.”소우연은 이육진을 바라고 있으면서도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저번의 경험이 아직 생생하기에 겁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한편, 소우연의 말에 다정하게 피식 웃던 이육진은 손바닥으로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또박또박 말했다.“너무 두려워하지 마.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 할 아픔이다.”그의 말에 이를 꽉 깨문 소우연은 어느새 두 팔이 이육진에게 잡혀 머리 위로 들어 올렸고 우연히 베개 밑에 있던 그 서책이 손에 닿았다.“태자 저하,
’아니, 이게 무슨 술이지?’소우연은 입안에 남은 술을 자세하게 음미했다. 뭔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비린내가 났다.“부군, 술 맛이 어떠합니까?”이육진도 술맛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하면 정연에게 다른 술로 바꿔오라고 할 생각이었다.이때, 이육진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나쁘진 않다.”‘나쁘지 않다고? 그럼 그냥 참고 마시지 뭐.’식사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소우연은 머리가 점점 무겁고 어지러웠지만 그녀와 달리 이육진은 전혀 아무 반응도 없는 듯했으며 심지어 바둑판을 들고 오기도 했다.“바둑이나 한판 두는 게 어떻겠느냐?”소우연은 그런 이육진을 보며 뭔가 할 말이 있었지만 입만 뻥긋거릴 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전에 마차 안에서 그녀는 이육진에게 솔직하게 얘기할 게 있다고 했는데 이육진은 왜 전혀 물어보지도 않는 걸까?그렇게 두 사람은 마주 앉아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연이 너부터 두거라.”이육진이 까만 바둑알을 소우연에게 건네자 소우연은 한 손으로 턱을 살짝 괸 채 대꾸했다.“전 하얀 바둑알이 좋습니다.”수정 같이 하얀 바둑알은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다.피식 웃던 이육진은 까만 바둑알을 한 알 꺼내 먼저 두면서 말했다.“조금 전에 간석을 시켜 소우희 그자를 수색하고 있는 호위병들을 전부 철수시켰다.”이육진의 말에 흠칫하던 소우연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왜 그러셨습니까?”“용 대감이 그자가 먼저 나를 찾아올 거라고 하였다.”“소우희가 저하를 찾아온다고요?”기다란 손가락으로 까만 바둑알을 바둑판에 살짝 내려놓던 이육진이 소우연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래. 소우희가 날 찾아올 거라고 하여 그자를 수색하고 있는 호위병들을 철수하였지. 그래야 소우희가 나에게 올 기회가 있을 테니까.”손에 하얀 바둑알을 들고 있던 소우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어차피 소우희를 끝까지 찾아내지 못한다고 해도 그자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다른 건 몰라도 소우연은
용강한이 멀리 떠난 뒤, 이육진은 바둑판에 놓인 바둑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왠지 용강한은 소우연을 꽤 많이 걱정하고 있는 것 같다.예전에 소우연이 소우희 대신 이육진과 혼인을 맺었을 때, 용강한이 이육진을 찾아온 적이 있는데 겉으로 보기엔 태연하고 차분했지만 속으로는 꽤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육진이 혹시라도 소우연을 괴롭히거나 힘들게 할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태자 저하, 태자빈마마께서 식사를 준비해도 되는지 저하께서 물으셨습니다.”이때, 문 밖에 서있던 간석이 물었다.이육진은 고개를 들어 조금 어두워진 하늘을 쳐다보다가 대답했다.“준비하거라.”그는 이내 일어서서 밖으로 향했다.한편, 밖에 서있던 간석은 돌아서서 명심에게 저녁 식사를 준비하라고 전하다가 밖으로 나온 이육진을 보게 되었다.명심은 이육진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린 뒤, 돌아서서 저녁 준비를 하러 떠났다.“태자 저하.”이육진이 벌써 나올 줄은 몰랐던 간석은 인사를 올린 뒤, 이육진에게 다가가 조용하게 그의 곁을 지켰다.한편, 이육진은 하늘에 둥둥 떠있는 구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해질 무렵의 풍경은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법이지만 아쉽게도 이 풍경은 늘 순식간에 사라지곤 한다.“간석아, 가서 진규에게 전하거라. 성문과 성밖을 지키고 있는 자들 외에 더 이상 소우희 그자를 수색할 필요가 없다.”“네, 소인 바로 전달하겠습니다.”간석은 이내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어리둥절했다.‘소우희를 체포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아닌데? 성문과 성 밖을 지키고 있는 자들은 그대로 두라고 하셨는데? 그건 소우희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으시겠다는 뜻 아닌가?’한편, 본채로 돌아온 이육진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우연이 한걸음에 다가와 그를 반겼다.“용 대감은요?”“돌아갔다.”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이육진의 시선은 미소를 짓고 있는 소우연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저하, 왜 저를 그렇게 쳐다보십니까?”“예뻐서 그런다.”입술을 살짝 오므린 소우연은 이육진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