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냐?”이육진의 물음에 임 어사가 대답했다.“해독약을 이제 막 드셔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해시 전에 무조건 깨어나실 겁니다.”임 어의의 확신에 찬 대답에 이육진은 그제야 시름이 놓였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까지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었다. 평서왕 세자 이민수를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이 왜 이육진을 위해 칼까지 막았을까?이런 생각을 하던 이육진은 주먹을 더욱 꽉 쥐었고 일촉즉발의 순간에도 소우연을 시험할 생각이 먼저였던 자신의 행동이 후회되기도 했다.몇 마디 당부를 마친 임 어의는 저택을 떠났고 진규는 바로 본채로 돌아와 이육진 앞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왕야, 소인을 죽여주십시오. 소인은 그런 줄도…”이육진이 진규의 입을 재빨리 막았고 더 이상 얘기하지 말라고 눈짓을 했다.“가서 확실하게 조사해보거라. 대체 어떤 겁 없는 미친놈이 감히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네, 왕야!”진규가 떠나자 이육진은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을 전부 내보냈고 휠체어에 앉아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소우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손을 뻗어 소우연의 이마를 만져보니 임 어의가 말한 것처럼 열이 심하게 나고 있었다.물리적으로 열을 내리기 위해 이육진은 바로 수건을 적셔 소우연의 이마에 올려놓았고 곁방에서 인기척을 들은 정연은 다리가 불편한 이육진에게 혹시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지만 이육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지금 이 순간만큼은 직접 소우연을 돌보고 싶었다.30분 뒤, 진규가 본채로 돌아와 자객이 실토했다고 전했고 이육진은 진규와 함께 방을 나서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자가 누구냐?”“그게… 자백했지만 안 한 거나 다름없습니다.”이육진이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확 돌리자 소름이 쫙 돋은 진규가 다시 한번 무릎을 털썩 꿇었다.“왕야, 자객들은 상대방이 여자라고만 자백했습니다. 큰돈을 주면서 왕비님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여자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생김새는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감히 겁도
”다른 단서는 없었습니다.”“왕비와 원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이육진의 말에 진규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저택 안에만 계신 왕비님이 어떤 자와 원한 관계가 있으시겠습니까? 대신 며칠 전에 소씨 가문 둘째 아씨가 왕비님을 찾아와 왕비님에게 큰 수모를 당하셨지요.”“소우희…”조용하게 듣고 있던 이육진이 손자락으로 휠체어 손잡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중얼거렸다.소우연은 명색이 소씨 가문 큰딸인데 어떻게 소씨 가문에서 이런 대우를 받고 살았을까? 생각해보면 소우연의 인생도 꽤 힘들고 외로웠을 것 같았다.“소씨 가문 사람들 잘 지켜보고 있어. 특히 소우희 그 여자의 움직임은 하나도 놓치지 말고 확실하게 지켜봐!”“네, 알겠습니다.”해시가 다 됐지만 아직도 깨어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소우연을 보며 마음이 급해진 이육진은 다시 어의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자 저택에 있던 의원이 그를 말렸다.“왕야,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비님은 이제 열도 내리셨고 소인이 진맥을 했을 때 맥박도 정상이셨습니다.”“그런데 왜 여태껏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냐!”“아마도…”의원이 대답하려던 그때, 침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쿨럭쿨럭…”“왕야, 왕비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의원이 손에 땀을 쥐던 그때, 다행히도 소우연이 눈을 떴다.소우연은 침대 곁에 지키고 있는 이육진을 힐끔 쳐다보고는 주위를 쓱 훑다가 힘겹게 물었다.“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겁니까?”소우연은 낮에 외출했을 때 자객에게 습격을 당했던 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왕야, 괜찮으신 겁니까?”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육진을 아래위로 꼼꼼하게 훑어보던 소우연은 깔끔하게 옷을 차려 입은 이육진이 멀쩡한 모습으로 앉아있자 이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괜찮으시니 다행이네요.”이육진은 아픈 몸으로 그를 먼저 걱정하는 소우연을 보며 마음이 착잡했다.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지려던 소우연은 어깨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에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제야 낮에 이육진을 향해 날아오던 칼을 막았다는
소우연이 대답을 하려던 그때, 이육진이 다시 한번 경고했다.“잘 생각해보고 대답하는 게 좋을 것이오. 날 속일 생각은 하지도 말고!”“제가 어찌 감히 왕야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전 소우희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곧 원한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그래, 알겠소.”전에 이육진은 언젠가 기회를 찾아 소우연을 포함한 소씨 가문 모든 사람들을 죽여버리려고 했지만 이제는 다르다.지금 이 순간부터 소우연이 3년 전 이육진을 구해준 사람이 맞든 아니든 소우연의 목숨은 살려둘 것이다.이육진이 휠체어를 끌고 밖으로 나가면서 정연에게 방으로 들어와 왕비의 시중을 들라고 명령했고 소우연은 이육진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착잡했다.알겠다고? 대체 뭘 알겠다는 거지?이때, 방으로 들어온 정연이 소우연에게 말했다.“왕비님, 의원께서 왕비님은 요즘 기름기가 없는 담백한 음식을 드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소인이 야채죽과 산삼차를 준비했습니다. 소인이 식사를 도와드리겠습니다.”고개를 끄덕이던 소우연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왕야께서는 식사를 하셨느냐?”흠칫하던 정연이 대답했다.“왕비님께서 다치시고 나서 왕야는 한 시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곁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직 식사를 못하셨습니다.”“그럼 왕야께서 혹시 지금 서재로 간 것이냐?”정연은 아마도 그랬을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아마도 그러셨을 겁니다.”“그럼 왕야께도 식사를 보내 드리거라.”“알겠습니다.”정연은 눈앞에 있는 이 왕비가 보면 볼수록 참 신기했다. 회남왕의 망가진 얼굴이나 못 쓰는 다리를 전혀 거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왕야 걱정만 하고 있다.이렇게 예쁜 미모를 가진 여인이 왕야까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으니 다른 여인 대신 시집왔다는 것만 빼면 너무 완벽했다.“난 이제 다 먹었으니 얼른 왕야께 가져다 드리거라. 왕야께서도 많이 시장하실 것이다.”“네, 소인 바로 서재에 다녀오겠습니다.”조금 뒤, 서재 밖에서.정연이 시
이날밤, 하늘에서 또다시 눈이 펑펑 내리시 시작했고 침대에 누운 소우연은 마음속으로 이육진이 이제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까 기대했다.바로 이때,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고 소우연은 재빨리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조금 뒤, 침대 위로 올라온 이육진이 낮은 목소리로 소우연을 불렀다.“부인.”흠칫 놀란 소우연은 이유진이 왜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건지 의아하며, 눈을 떠야 할지 고민했다.“이 눈이 그치면 나와 함께 궁으로 들어가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 인사를 드리게.”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던 소우연은 눈을 살짝 뜨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전 왕야 결정에 따르겠습니다.”이육진은 너무도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소우연을 보며 그녀가 예전에 이민수에게도 이랬을까 궁금해졌다.‘당연히 그랬겠지. 이민수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큰 약혼자인데.’한편, 이육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소우연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이육진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 정말 너무 무서웠습니다.”“난 부인이 전혀 안 무서운 줄 알았는데?”“그럴 리가요? 정말 엄청 놀랐습니다.”하지만 그렇게 긴박한 상황에서도 소우연은 이육진이 다쳤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연기가 너무 진부한 거 아닌가?이육진의 의심스러운 눈빛에 소우연은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왕야, 전 정말 놀란 겁니다. 나중에 혼자 외출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면 전 죽을 수밖에 없겠지요?”“그럴 리 없소.”입술을 살짝 오므리던 이육진이 소우연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앞으로 외출할 때 호위무사를 데리고 다니는 게 좋겠소.”그 말은 이제 이육진이 소우연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는 뜻인가?잠시 고민하던 소우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왕야, 외람된 요구지만 혹시 제가 진맥 한번 해드려도 되겠습니까?”“진맥은 왜?”“소자는 어려서부터 가족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였사옵니다. 하여 단 한 번이라도 칭찬을 받아보고자 밤낮없이 의서를 익혔고, 이
소우연은 창가에 앉아 창문을 열고는 시녀들이 장난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명심이와 아이들은 매년 눈이 올 때마다 눈사람을 만드는데 질리지도 않은가 봅니다.”곁에 있던 정연의 말에 소우연이 웃으며 대답했다.“즐거워 보여서 참 좋구나.”사람들은 회남왕 이육진의 성격이 난폭하고 감정 기복도 심하다고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저택에 있는 시녀들은 어떻게 저렇게 밝고 해맑을 수 있을까?“그러고 보면 왕야는 밖에 떠도는 소문처럼 그리 어려운 분이 아니지 않느냐?”정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왕야께서는 무서운 면을 외부인과 적에게만 보여주십니다.”정연은 고개를 돌려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왕야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신부를 바라보았다. 왠지 이번에는 왕야 곁에 진정한 배필이 나타난 것만 같았다.“적에게만 보여준다…”“그렇습니다. 왕야께서 감정 기복이 심하신 건 맞지만 이유 없이 화를 내시지는 않으십니다.”고개를 끄덕이던 정연은 소우연에게 따듯한 화차를 한 잔 따라주며 말을 이어갔다.“왕야께서 왕비님을 대하시는 태도가 남다르십니다.”소우연은 정연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정연이 말한 것처럼 소우연은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목숨 잃고 밖으로 버려진 신부가 아니기에 다들 소우연을 특별하다고 느꼈을 것이다.“그럴 수도 있지.”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연은 말머리를 돌려 소우연에게 화차를 마셔보라고 권했다.소우연은 옅은 미소를 띠며 화차 찻잔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그녀는 생각했다. ‘악인도 결국 사람이니, 칠정육욕이 없을 수야 없겠지?’그는 언제나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으니, 필시 사랑도 정마저도 끊어낸 자일 것이다.전생에서, 혈육의 정과 사랑은 마치 바늘처럼 그녀의 가슴을 찔러왔고, 그 고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다.그러나 이번 생의 그녀는, 그런 굴레를 모두 벗어던지고 오직 자신을 위해 살고자 했다.그리고 소우희와 이민수, 이 두 사람과는 다시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으리라!이로부터 며칠 뒤.눈이 녹기 시작했고 마당을 지키
이육진과 소우연은 가까이 다가가 덕빈 마마께 큰절을 올렸고, 덕빈 마마는 환히 웃으며 손을 가볍게 흔드셨다.“이만 고개를 들 거라.”“감사하옵니다, 어마마마.”소우연은 윗몸을 일으키자마자 손을 뻗어 이육진의 휠체어를 잡아주었고 한 치도 불만이 없어 보였다.그 아름다운 작은 얼굴은 길을 오는 동안 거센 눈바람을 맞았는지, 두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마치 도자기 인형처럼 보였다.어쩐지, 아들이 그녀를 맘에 들어한다더니.단귀비는 자리를 내리도록 명하였고, 곧이어 기 나인에게 작은 주방에서 만든 다과를 가져오게 하였다.“안 그래도 네 아바마마께서 며칠 전부터 네가 언제 처를 데리고 궁에 들어오는지 계속 물으셨어. 마침 잘 왔구나.”덕빈의 말에 소우연이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 걱정을 끼쳐드려 송구하옵니다.”이육진은 요즘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일찍 찾아뵙지 못했다고 설명했고 소우연이 다친 일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어차피 회남왕 관저에서 벌어지는 일은 어마마마도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다과와 차를 올린 기 나인은 시녀에게 조정 앞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주상이 논의를 마치면 바로 보고를 하라고 했다.그렇게 단향궁에 있는 세 사람은 가볍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수려한 외모에 차분한 성정을 지닌 소우연은 심지어 이육진을 각별히 신경 쓰는 듯 보였다.‘저 아이는 분명 평서왕의 아들과 혼약이 있었던 거 아닌가? 이렇게 빨리 그자를 버리고 내 아들에게 빠졌다고?’만약 이육진이 예전처럼 건강하고 외모도 수려했으면, 덕빈도 조금은 믿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이육진 얼굴에 저렇게 보기 흉할 정도로 상처가 크게 남았는데 소우연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걸까? 저러다가 이육진도 결국 공세에 넘어가지 않을까?덕빈은 소우연을 보며 이미 돌아가신 황후 언니가 떠올랐다. 경성 제일 미녀였던 황후 언니는 황제를 평생 제대로 홀렸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황제는 그 여인을 잊지 못하고 있다.이 생각만
방으로 들어온 황제는 이육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안타깝기도 하고 마음도 너무 아팠다.그러다가 시선을 돌려 소우연을 쳐다보았고 수려한 외모에 기품도 넘쳐 보이는 모습에 살짝 놀란 듯했다.황제는 진원 장군 가문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큰딸이 외모가 부족하거나 성격이 괴팍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그리고 아들 이육진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황제는 이 두 사람을 다시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다들 그렇게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네. 오늘은 그저 간단한 가족 모임일 뿐일세.”덕빈이 제일 먼저 고개를 들었고 곁에 서있던 기 나인에게 눈치를 주자 기 나인은 바로 궁녀와 내시들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한편, 소우연은 여전히 고개를 깊이 숙인 채 감히 황제의 용안을 올려다보지 못하였다.조금 뒤, 기 나인과 단향궁 내시가 황제 앞에 진수성찬을 차렸고 소우연은 그 음식들을 힐끗 쳐다보았다.나중에 주상께서 회남왕의 신부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소우연 그녀는 어떻게 되는 걸까?생각만 해도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였다.한편, 소우연의 긴장한 모습을 눈치챈 이육진은 그녀에게 귤을 건네며 말했다.“왕비, 식사전에 귤 하나 먼저 먹지 않겠소?”“감사하옵니다.”고개를 살짝 든 소우연이 휠체어에 앉아있던 이육진과 눈이 마주쳤고 손을 뻗어 귤을 받던 순간, 이육진이 소우연의 손을 살짝 잡은 채 낮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전했다.“겁먹지 마.”‘이 남자가 나한테 겁먹지 말라고 했어…’소우연은 진심 어린 이육진의 눈빛에 마음이 살짝 흔들렸고 이내 입술을 오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그 뒤로 이육진은 기미상궁을 시켜 소우연에게 이런저런 반찬을 잔뜩 덜어주었고 소우연은 덕분에 긴장은 많이 풀렸지만 황제와 덕빈의 뜨거운 시선에 점점 난감했다.겨우 식사 자리가 끝나고 황제와 덕빈에게 인사를 올린 소우연은 이육진과 함께 단향궁을 나섰다.한편, 단향궁에서.입가심을 하고 있던 황제가 덕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넷째가 이번 왕비를 꽤 마음에 들어
회남왕 관저의 마차가 번화한 거리에 나서자 거리를 오가던 마차와 백성들은 너도나도 양옆으로 물러섰다.한편, 마차 안에 앉아있던 이육진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소우연은 창문을 가린 천막을 살짝 열고는 밖을 쳐다보았다.거리에는 손님들로 가득 찬 주막과 보따리 장사를 하고 있는 장사꾼들로 북적거렸다.처녀였을 때, 소우연은 거의 외출한 적이 없었으며 어머니는 외출할 때마다 소우희만 데리고 나갔다.씁쓸하게 웃던 소우연은 이내 천막을 내렸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이육진과 눈이 딱 마주쳤다.얼굴이 빨개진 소우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왕야, 혹시 제 얼굴에 뭐가 묻은 겁니까?”“아니.”아닌데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걸까?소우연이 볼을 만지며 고개를 살짝 숙인 그때, 이육진이 말했다.“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나한테 한번 얘기나 해보지 그래?”소우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쳐다보자 이육진이 다시 물었다.“없는 건가?”“신경 써주셔서 감사드리지만 전 아직 두서가 없습니다.”‘두서가 없다… 대체 어떤 두서가 필요한 걸까? 더럽고 염치없는 것들은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하지만 이건 결국 소우연의 개인 사정이기에 소우연이 아직 소씨 가문과 완전한 결렬을 결정하지 못했다면 이육진도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회남왕 저택으로 돌아온 뒤, 이육진은 서재로 가기 전 소우연에게 외출할 땐 반드시 호위무사를 대동하라고 당부했다.“알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소우연은 깍듯이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한 뒤, 이내 반짝이는 눈빛으로 물었다.“혹시 왕야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을까요?”이육진은 소우연의 기대에 찬 눈빛을 보며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그래.”소우연은 떠나는 이육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소우연을 곁에서 지켜보던 정연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착잡해졌다.예전에 회남왕은 경성에서 외모가 가장 출중한 사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이제는…허나, 왕비의 눈빛에는
당당하던 김조윤이 이렇게 허둥대는 모습은 처음이었다.이육진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인가?”김조윤은 급히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태자 전하, 미천한 신이 평춘왕비의 행방을 찾지 못했습니다. 세자 이지윤에게 물었으나 깊은 슬픔에 빠져 왕비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고 하였습니다.”뜨거운 바람이 한 줄기 스쳐 지나갔다.공기 속 태운 지전의 냄새가 희미하게 퍼져 있었고 주변 대신들은 말 한마디 없이 숨을 죽이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평춘왕은 생전에 좋은 평판이 없었다.그는 왕족이라는 지위를 등에 업고 온갖 추악한 짓을 서슴지 않던 인물이었다. 죽고 나서야 겨우 사람들 입에서 잘 죽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대부분은 관심도 없다는 듯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그런데 왜 이육진은 굳이 그에게 '공정한 조사'를 하겠다고 나서는 걸까?“땅을 파헤쳐서라도 반드시 찾아라.”그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그 한마디가 공기를 가르듯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김조윤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나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하지만, 도대체 어디로 숨은 걸까.소우연은 생각했다.자신이 대리 혼인을 결심한 순간부터 이 이야기는 이미 원작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그 이후로 일어나는 일은 더는 그녀가 알던 흐름이 아니었다.“대체 어디로 숨었을까요.”심소균이 옆으로 다가와 두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한 뒤 물었다.이육진은 그를 흘끗 보며 말했다.“심심하다면 너도 한번 찾아보는 게 어떻겠느냐.”“알겠습니다. 조문을 드린 뒤 바로 움직이죠.”이육진은 곁에 선 소우연의 손을 잡고 평서왕부로 향했다.이미 문 앞에는 이지윤이 무릎 꿇고 기다리고 있었다.영전에는 이미 평춘왕의 관이 안치되어 있었고 검은 관은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경을 외우는 소리만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태자 전하, 태자빈 마마. 분향해 주시지요.”주례의 안내에 따라 이지윤이 향을 건넸고, 이육진과 소우연은 정중하게 절하며 향을 올렸다.“세자 저하, 심신을 잘 추스르시길 바랍니다.”소우연의
“태자 전하, 이건…?”물소리를 들은 것도 아닌데 무슨 일이지 싶었다.이육진은 손에 든 ‘품화보감’을 간석에게 던졌다.“없애라.”“…예?”간석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책을 받았다.이육진은 그를 힐끗 노려보고는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돌아갔다.간석은 품에 안긴 책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태자 전하와 태자빈 마마께서 이 책이 마음에 안 드신 건가?그럴 리가 없는데. 이건 지금 궁 안에서도 제일 유행하는 책인데.문장도 훌륭하고, 삽화는 또 어찌나 공들여 그렸는지… 작가의 재주가 범상치 않건만.“혹시 글 없이 그림만 있는 걸로 바꿔드려야 하나? 아니면 좀 더…”간석이 중얼거리며 고민하고 있을 때, 옆을 지나가던 정연과 명심이 그의 품에 들린 책을 보고는 동시에 얼굴을 붉혔다.“태감 나리, 괜찮으세요?”정연이 조심스레 물었다.“괜찮다. 다들 들어가 쉬거라.”간석이 손을 저어 보이며 대답했다.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간석은 책을 들고 어둠 속에 손짓했고, 이내 작은 내시 하나가 달려왔다.그에게 책을 맡긴 간석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방 안.촛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이육진은 자리에 올라 소우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그녀의 몸은 부드러워 손끝이 닿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으나, 여전히 자는 척하는 그녀는 깨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평춘왕이 붕어했으니 내일은 조문하러 가야겠지.”그가 조용히 말을 건넸지만 소우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육진은 살짝 상처받은 눈빛이었다.자신이 그렇게 무섭단 말인가. 요즘 들어 부부 사이의 일에 있어 그녀는 점점 더 소극적으로 변했다.……다음 날.소우연은 아침을 먹고 난 뒤 간석으로부터 이육진이 조정에서 바로 평춘왕부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시간을 맞춰 그녀도 곧 마차를 타고 평춘왕부로 향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정오 무렵이었다.왕부의 집사들과 함께 이지윤이 정중히 마중 나와 있었다.소우연은 간단히 조의를 표하며 말했다.“
본채로 돌아온 뒤 잠시 지나지 않아 저녁상이 차려졌다.소우연은 이육진과 나란히 식사를 마친 뒤 바둑 한 판을 두었고 이후 함께 탕에 몸을 담갔다.그 시간이 흐르자 이육진의 눈빛은 뜨겁게 달아올랐다.“연아, 준비는 되었느냐.”그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소우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뻔히 알았지만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그러자 이육진은 고개를 갸웃했다.“아니, 명심이 네게 책을 하나 주지 않았더냐.”또 그 ‘품화보감’ 이야기였다.소우연은 고개를 들고 진지하게 책을 읽고 있던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태자 저하께선 나라의 황태손이십니다. 그런 책은… 덜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이육진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그녀가 점잖게 타이르는 모습은 마치 황후가 후궁의 법도를 이야기하는 듯했다.“그 말도 일리는 있지. 허나 황태손인 만큼 자손을 남기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겠느냐.”“그동안은 네가 아플까 염려되어 물러섰지만 이대로는 우리가 어찌 주공의 예를 이루고 자손을 이어가겠느냐.”소우연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반면 이육진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제는 과거처럼 차갑고 위협적인 얼굴이 아니었다.아니, 그가 싸늘한 얼굴로 병영에서 돌아왔을 때는 눈빛 하나에도 살기가 서려 있었으니 지금처럼 온화한 모습은 오히려 낯설 정도였다.“응?”그녀가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있자 이육진은 혹시 노한 건 아닌가 싶어 물었다.소우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맞는 말씀이십니다.”그 말에 이육진은 흐뭇하게 웃더니 베개 아래를 더듬었다.그녀가 말리기도 전에 그는 ‘품화보감’을 꺼내 들었다.“그게 거기에 있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분명 정연이 몰래 숨긴 건데 어떻게…“그냥… 감으로.”정말 기가 막히게도 잘 맞췄다.소우연은 한숨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옷을 벗어 옆의 행거에 걸고 침상 위에 올라 누웠다.“연아, 이리 오너라.”그는 손을
“그러면… 어마마마께선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안 하신다는 거네요?”이육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방 안의 모두가 일제히 미간을 좁혔다.소우연은 애써 머릿속을 더듬었다. 원작의 내용을 떠올리려 했지만, 환생 이후부터였을까. 책 속의 많은 장면들이 이제는 희미하게만 남아 있었다.용강한의 말을 실마리 삼아 곰곰이 생각을 이어갔다. 대체 왜 평서왕부가 문제의 근원이라는 걸까.“폐하께선 겉으로 보기엔 덕빈마마를 총애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후궁으로 봉하지 않으셨을뿐더러 태자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셔도 어마마마를 태후로 올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지요. 총애가 아니라… 그건 분명 증오일 거예요.”소우연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어 이육진을 바라보며 조용히 덧붙였다.“감정 섞인 말이 아닙니다. 지금으로선, 이 설명 외엔 납득할 길이 없어요.”이육진 역시 예전부터 마음속으로 그 의문을 품고 있었다.하지만 덕빈은 언제나 말했다. 자신이 원하는 건 폐하의 마음이지, 자리나 명예 같은 건 의미 없다고.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지만, 황제가 그에게 어머니를 태후로 삼지 말라는 맹세까지 요구했을 때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아버지의 총애란 그저 꿈결 속 한순간의 착각이었음을 말이다.용강한이 말을 이었다.“평서왕부는 구조부터가 특별합니다. 세자인 이민수만이 정실 왕비 소생이고, 나머지 자식들은 모두 첩의 소생인데다 전부 딸들뿐이지요. 그리고 폐하께도 태자 전하 외엔 다른 아들이 없습니다.”이 모든 게 과연 우연일까?아니다. 용강한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핵심은 분명 평서왕부 안에 있을 터였다. 진실을 알아내려면 반드시 실마리를 찾아내야 했다. 그리고 그 실마리를 찢어내야만, 전모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황제가 덕빈을 증오하고 있다면, 그녀의 입에서는 결코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결국 평서왕부를 직접 건드릴 수밖에 없었다.“그동안 평서왕부를 지켜봤지만, 단 한 번도 의심할 만한 흔적은 없었다.”이육진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소우연은 누구보다
서재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아무도 소우연이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이육진은 조용히 웃으며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 위를 토닥였다.그의 손끝엔 다정함과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용 대인이 말한 건, 이민수의 운세가 강하다는 거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야.”“맞습니다, 마마.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용강한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잔잔한 파문을 느꼈다.자신이 목숨을 걸고 되돌려준 이 생이, 정말 그녀에게 옳은 것이었을까.소우연도 그제야 자신이 다소 격해졌음을 자각하고, 목소리를 낮췄다.“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태자 전하께서는 이 나라의 정통 황태손입니다. 감히, 이민수 따위가 넘볼 자리가 아니지요.”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했다.“아니요, 비교조차 할 수 없어요. 그 자는 애초에 겨룰 자격조차 없습니다.”심소균이 손뼉을 치며 맞장구쳤다.“하하, 옳은 말씀입니다! 태자 전하께선 건강하시고 학식도 뛰어나시며, 전장에서 무공까지 세우신 분이십니다. 이런 분이야말로 진짜 황제가 되실 분이지요.”사실, 처음 용강한이 태자빈을 정치적 논의 자리에 부르자 했을 때 심소균은 회의적이었다.‘여인이 정사에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생각지 못한 강력한 우군을 얻은 느낌이었다.이육진이 예전처럼 무기력하게 지내고 있었다면, 평서왕부는 분명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아니다.그깟 이민수가 무슨 자격으로 황태손을 넘본단 말인가?심소균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이육진과 용강한은 왜 그토록 이민수를 경계하는 것일까.그 순간, 용강한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태자 전하, 이제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용강한을 믿었다.어릴 적부터의 우정도 있지만, 그보다도 그는 단 한 사람 황제의 뜻만 따르는 진짜 실세였다.사실 이육진이 소우연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진짜 신부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예를 갖춘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간석이 찾아와 웃으며 말했다.“태자빈 마마, 태자 전하께서 마마를 서재로 모시랍니다.”“지금?”“예.”갑자기 지금이라니.서재엔 분명 용강한과 심소균이 있을 텐데, 자신이 끼어들어도 괜찮은 걸까?이육진이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소우연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어차피 피해갈 수 없다면, 부딪히는 수밖에.다만… 용강한.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그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소우연은 먼저 부엌으로 향해 다과를 준비하고, 차를 정성껏 우리어 정연과 함께 서재로 향했다.문을 두들기려던 순간, 문이 먼저 열렸다.놀란 마음에 움찔한 그녀를 보며, 이육진은 이마에 손을 얹어왔다.“왜 그러느냐? 얼굴빛이 좋지 않구나.”“작은 다과를 준비했어요. 전하께서 허기지실까 싶어서요.”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우연의 손을 잡아 서재 안으로 이끌었다.정연과 명심은 차와 다과를 조심스레 놓고는 손님들에게 예를 갖춰 찻잔을 올렸다.용강한과 심소균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태자빈 마마, 평안하셨습니까.”“편히 하십시오.”소우연이 가볍게 답례하자, 이육진은 정연과 명심을 물렸다.이 자리에 함께 있는 게 과연 맞는 일인지… 그녀는 점점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을 느꼈다.“태자빈 마마께서 꽤나 긴장하신 듯합니다.”걸상 위에 자연스럽게 앉아 청석 염주를 돌리던 용강한이 입을 열었다.마치 이곳이 제 집인 양 태연한 모습이었다.심소균은 그 아래에 둥근 의자를 가져다 앉아 있었고, 이육진은 그녀를 곁에 앉히고선 조용히 손을 꼭 잡았다.그 순간, 용강한의 말이 이어졌다.“마마, 제가 드린 말씀이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리죠.”소우연은 목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었다.“용 대인의 농이 조금 지나치셨습니다.”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요즘 소우희의 명운이 급격히 기울고 있습니다. 흐름은 모두 좋은 쪽으로 향하고 있지요.”왜 갑자기 소우희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소우연은 본능적으로 이육진을 바라봤고
“연아.”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뒤를 돌아보니, 흰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품에는 얼룩 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있었다.이민수가 곧장 다가오더니 물었다.“잘 지내고 있었느냐?”“세자 저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내가 여기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느냐?”소우연은 조용히 말했다.“방금도 들으셨겠지만, 평서왕께서 방금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조문을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조문은 나중에 해도 되지.”“나중에라…”소우연은 그를 지나쳐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날이 좋았다.하얀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비 갠 뒤의 하늘은 맑고 투명하게 펼쳐져 있었다.“소우희는 지금쯤 미쳐 있을 겁니다.”“그 아이가 왜?”이민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봤다.매일 똑같이 보던 하늘, 특별할 것도 없는 파란 하늘과 구름이었다.그가 아는 소우희라면, 평서왕 같은 까다로운 인물이 죽었다는 소식에 오히려 기뻐했을 것이다.소우연은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담담하게 말했다.“곧 연락이 불겠군요.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연아…”“세자 저하, 제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그래… 알았다.”“태자빈 마마. 태자 전하의 다리를 치료한 사람이,,, 마마가 맞으십니까?”소우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맞습니다. 제가 했습니다.”“그럼... 마마께선 절 속인 거군요.”“저하가 절 속인 것처럼, 저도 속였을 뿐이에요. 굳이 따질 이유가 있을까요?”이민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처음 소우희가 마마가 변했다고 했을 때, 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마마께선 정말 많이 변하셨군요.”“그래요. 전 변했어요. 안 변했으면, 진작 당신들 손에 뼈까지 발린 채 죽었겠죠.”이민수는 비웃는 듯 웃으며, 품 안의 고양이 배꽃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제 마음은 하늘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소우연도 웃었다. 조롱 가득한 웃음이었다.하늘이 안다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전생의 기억이
“어떻게 이 사실을 알았을까?”혜주는 난감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마음이 복잡해졌다.한때 자신이 모셨던 주인이 이렇게 몰락하고 처참한 모습이 되니 웃어야 할지, 동정해야 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동정하자니, 사실 진정 불쌍한 건 자신이었다. 평생을 얌전히 소우희 곁에서 충성을 다했건만 결국 혀까지 잘려 말을 잃었으니 말이다.그런데도 소우희를 전혀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럴 리 없었다.소우희는 말을 하지 못하는 혜주를 붙잡고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도 몸이 계속 가려워 혜주에게 등을 긁어 달라 부탁했다.왠지 모르게 자신에게 불운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기분이었다.“으악!”갑작스러운 비명소리에 그녀의 동공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두려움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소우희는 갑자기 등 쪽에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혜주의 손에 들린 피부 조각을 보고 말았다.순간 머리끝부터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소우희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혜주의 손톱에 걸린 자신의 살점을 바라보다 한참 뒤에야 비명을 터뜨렸다.……비는 꼬박 사흘 동안 내렸다.사흘 뒤, 드디어 날이 개었다.소우연은 만안당에서 무료 진료를 보고 있었다.임진숙이 나인을 데리고 찾아왔고, 정연은 급히 소우연에게 말했다.“마마, 그분이 또 여기까지 따라왔습니다.”비가 오던 지난 이틀 동안 임진숙은 태자부의 별채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오늘 날씨가 맑아 만안당으로 진료를 보러 나왔더니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진우야.”병풍 밖에서 기다리던 진우가 서둘러 들어와 주먹을 모아 예를 올렸다.“예, 마마.”“신경 써서 조용히 처리해라. 눈에 띄지 않게 보내거라.”어렵게 자신과 이육진을 위해 조금이나마 좋은 평판을 쌓아 올렸는데, 임진숙이 계속 이렇게 집요하게 따라오면 남들이 그녀를 불효녀라고 할 것이 뻔했다.지금 그녀는 태자빈이었다.이육진과 운명을 함께하는 처지인 만큼, 절대로 소씨 가문 사람들에게 휘둘려서는 안 되었다.진우는 명령을 받고 밖으로 나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니?”무슨 뜻이지?소우희는 아령의 청아한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아니, 지금은 화장을 한 것 같았다. 소우연처럼도, 평서왕세자빈처럼도 아닌 모습이었다.왠지 모르게 소우희는 이 아령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지금 다른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하인의 말이 떠올라 그녀는 급히 물었다.“하인이 네가 의술에 능하다고 하던데 사실이냐?”아령이 고개를 끄덕였다.“예.”“그럼 내 몸 좀 살펴봐라. 소우연 그년이 도대체 어떤 독을 썼는지.”소우희는 아령에게 손목을 내밀었다.손목 위로 검푸른 핏줄이 뚜렷이 드러나 있었고, 그 흑색의 기운이 팔꿈치까지 번져 있었다.아령은 별말 없이 그녀의 맥을 짚었다.“어떠냐?”아령의 미간이 자꾸 찌푸려지자 소우희는 초조해져 다급히 물었다.“왕비 마마, 맥상으로는 특별히 이상한 점이 없습니다만… 분명 독에 중독된 것이 맞습니다.”소우희의 얼굴과 온몸에 긁힌 자국을 보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그럼 치료할 수 있느냐?” 소우희가 간절히 물었다.치료할 수 있느냐고?치료할 수 있다 해도 소씨 가문의 사람을 도와줄 이유는 없었다.아령은 마음속으로 경멸하면서도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소녀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그 말에 소우희는 화가 나 테이블 위의 차와 찻잔을 모두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혜주가 황급히 바닥을 치우러 달려왔다.소우희는 의심의 눈초리로 아령을 쏘아보았다.“치료할 수도 없으면서, 오늘 여긴 왜 온 것이냐?”아령은 담담히 대답했다.“소장군의 상태를 보고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려 왔지만, 안타깝게도 소녀가 능력이 부족했습니다.”소우희는 아무래도 아령이 자신을 놀리러 온 게 아닌가 싶었다.하지만 아령은 이지윤의 사람이었고, 그동안 백화루에서 편히 지내왔으니 자신이나 소씨 가문과 원한을 맺을 일은 없을 터였다.밖의 천둥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지만 빗줄기는 여전히 거셌다.소우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