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규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육진이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왕비는 내 앞에서 항상 조심스럽고 온순한 모습이었거든. 그렇게 큰소리로 날뛸 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네.”“왕비님께서 화내실 때 꽤 무섭습니다. 당당하기도 하시고요.”진규가 대답했다.전에 진규는 소우연이 소씨 가문에 찾아갔을 때 회남왕 왕비의 신분을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소씨 가문 사람들을 상대했다고 했다.이육진은 왕비 신분을 꽤 유용하게 쓰는 소우연이 대견하기도 했다.한편, 소우연이 회남왕 관저로 돌아왔을 땐 이미 날이 꽤 어두웠고 하인들은 서둘러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명심이 소우연에게 찾아가 물었다.“왕비님, 식사 준비가 다 됐는데 이제 왕야를 모셔올까요?”소우연이 흠칫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왕야께서 아직도 저녁 식사를 하지 않은 것이냐?”“아직 안 하셨습니다. 태감께서 얘기하시길 왕야께서는 오늘 왕비님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시기로 약속했다고 하셨습니다.”“아니, 난…”제민 약방에 소우연이 원하는 약재가 없었기에 경성에 있는 다른 약방을 전부 돌아다니느라 시간이 늦어진 것이다.“그럼 얼른 왕야를 모시거라.”“네.”명심은 실실 웃으며 서재로 향했다. 왕비가 왕야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으니 앞으로 왕비의 시녀들도 그 덕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이와 반대로 소우연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늦게 돌아와서 왕야의 저녁 식사 시간이 늦어졌는데 혹시 왕야가 화내지 않을까?‘화를 내면 최선을 다해 어르고 달래야지. 따로 방법이 없잖아.”본채 문 앞에 선 소우연은 이육진을 기다리면서 정연에게 물었다.“혹시 이 저택에 비어 있는 방이 있느냐?”“혹 뭘 하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약을 제조해야 하는데 따로 방 한 칸이 필요하다.”소우연이 사온 약재들은 아직 마차 안에서 내리지 않았다.“곁채는 많습니다. 하지만 약초 향이 왕비님과 왕야의 수면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요?”정연의 말에 소우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초 향이 꽤 진하기에 이육진이 싫어할 수도 있을
“다음번에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뚜렷한 윤곽, 만약 얼굴이 망가지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절세미남이었을 것이다.소우연은 이육진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시면 왕야께서는 먼저 식사를 하십시오. 안 그러면 제 죄가 너무 커지지 않겠습니까?”찻잔을 들고 있던 이육진의 손이 흠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소우연을 힐끔 쳐다보았다.“내가 부인의 죄를 물을까 봐 그렇게 두려운 것인가?”“아, 아닙니다.”두렵지 않다는 건 사실 거짓말이다. 황실에서는 어떻게 이혼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설령 그녀가 도망칠 마음이 있다 해도, 그곳엔 아직 단귀비가 있다. 그녀는 아직도 전생에 도망친 혼인의 결과가 생생히 기억난다!이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이 혼인을 잘 유지하여 마음 편하게 사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다.한편, 이육진은 소우연의 대답에 속으로 피식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온순한 척, 순진한 척하는 게 힘들지도 않은 건가?“왕야, 저를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시면 제가 심장이 많이 떨립니다.”소우연이 손바닥으로 발그레한 볼을 만지며 난감한 표정으로 말하자 이육진이 대꾸했다.“심장이 떨린다는 건 뭔가 찔리는 게 있다는 뜻이지.”가볍게 미소를 짓던 소우연은 고개를 저으며 반대 의견을 제기했다.“왕야께서 모르시는 게 있는데 심장이 떨린다는 건 설렌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소우연이 이육진의 눈을 빤히 쳐다보자 이육진이 도발하듯 웃으며 대꾸했다.“그럼 왕비는 누구한테 설레는 것이오?”소우연은 입술을 살짝 오므린 채 대답을 하지 않았고 젓가락을 들어 이육진에게 반찬을 덜어주었다.“이것 좀 드셔 보십시오.”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소우연의 표정과 행동은 의미심장했고 그 모습에 이육진은 물론 곁에 서있던 정연과 명심도 왕비가 참 대담하다고 생각했다.그렇게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이육진은 소우연이 덜어준 음식을 입에 넣었다.“괜찮네.”“그럼 이것도 드셔 보세요.”소우연의 행동에 이육
만약 소우연이 평서왕의 아들 이민수와 혼약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면 이육진은 소우연이 그를 좋아한다고 착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자신을 좋아한다……이런 생각을 하던 이육진은 이내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명성이 이렇게까지 더럽혀지고 흉한데 어떤 여인이 그를 좋아할 수 있을까?이육진은 이내 화제를 돌렸다.“다음달 16일, 소우회와 평서왕 세자가 정식으로 혼약을 맺는다고 들었는데 부인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소우연은 두 사람이 혼약을 맺는 날짜를 알고 있었고, 소설 원작에 적힌 중요한 날짜들도 대략 기억하고 있었다.“네, 알고 있습니다.”고개를 끄덕인 소우연은 이육진이 갑자기 이 일에 대해 언급할 줄은 몰랐다.“부인은 후회한 적 없는가?”“뭘 후회하단 말씀이십니까?”“부인이야말로 평서왕 세자의 세자빈이 될 사람이지 않았는가?”소우연이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전 지금 회남왕의 왕비이고 품계로 따지면 소우희보다 신분이 훨씬 높지 않습니까?”회남왕비의 신분에 대해 꽤 많이 적응한 소우연을 보며 이육진은 왠지 기분이 좋았다.그 뒤로 며칠동안 소우연은 매일 배나무 별채 안에만 있었으며 심지어 삼시 세끼도 별채에서 해결했다.별채 안에 심은 납매에 꽃이 피기 시작하자 소우연은 가지 몇 개를 꺾어 꽃병에 꽂고는 정연에게 건넸다.“이 꽃병을 왕야가 계신 서재에 가져가거라. 그리고 본채에도 놓아두거라.”정연이 가볍게 미소를 짓다가 물었다.“왕비님께서는 배나무 별채에서 며칠이나 지내셨는데 오늘도 본채로 돌아가지 않으실 겁니까?”“하지만 왕야께서…”소우연은 이육진이 매일 서재 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왕야도 바쁘신 것 같은데 내가 괜히 신경 쓰이게 하면 안 되지. 나도 얼른 약을 만들어야 하고.”“왕비님께서 정말 왕야 얼굴의 흉터를 낫게 할 약을 만들어낼 수 있으신 겁니까?”정연의 물음에 소우연은 그저 피식 웃었다. 정연조차 믿지 못하는데 이육진이 그녀를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하지만 이육진이 치료를 받겠다고 동의
죽을 죄? 갑자기 무슨 죽을 죄?이육진은 그저 왕비가 그에게 어떤 열과 성을 다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인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정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한숨을 푹 내쉬던 이육진이 손을 내저으며 정연에게 일어나라고 했다.“넌 왕비가 어떻게 열과 성을 다하고 있는지 그것만 얘기하면 된다.”이육진이 직설적으로 묻자 정연이 바닥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왕비님은 왕야와 혼사를 치르고 나서부터 매일 왕야에 대해 물으셨고 요 며칠 동안은 매일 배나무 별채에만 묵으시면서 직접 약을 달이고 약을 자신의 몸에 발라 보시면서 가끔 왕야가 어디에 계신 지 뭘 하고 계신 지 물으셨습니다. 별채에 심은 납매가 꽃이 피자마자 왕비님께서는 바로 꽃을 꺾어서 소인에게 서재에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소인은 왕비님께서 왕야께 열과 성을 다하고 계시다고 말한 겁니다.”이육진은 탁자에 놓인 꽃병을 다시 한번 힐끗 쳐다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왕비는 오늘도 배나무 별채에서 밤을 보낼 예정이냐?”“말씀은 안 하셨지만 아마도 그러실 것 같습니다.”왕비가 하인을 시켜 배나무 별채 방 안에 이불까지 깔았고 며칠동안 그곳에서 밤을 보냈기에 오늘밤도 십중팔구 별채에서 잘 것이다.이육진은 어이없다는 듯이 허허 웃었다. 그를 그렇게 걱정하고 신경 쓴다는 사람이 며칠동안 본채로 돌아오지도 않는단 말인가?“이만 나가보거라.”이육진이 손을 내둘렀다.조금 뒤, 정연이 배나무 별채로 돌아와보니 소우연이 명심과 시녀 두 명, 그리고 내시 두 명을 데리고 마당에서 약을 빻고 있었다.정연이 다가가자 소우연이 바로 물었다.“왕야께서는 서재에 계시더냐?”“서재에 계십니다.”“그럼 내가 보낸 납매는 마음에 들어 하셨느냐?”소우연의 물음에 정연이 애매하게 대답했다.“아마도… 마음에 드신 것 같습니다.”확실하지 않은 정연의 대답에 소우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다가 다시 물었다.“왕야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느냐?”“왕야께서 왕비님이 오늘밤에도 별채에서 밤
“취침 준비를 어떻게 할 생각이오?”“전…”“부인, 잊지 마시오. 이 저택에 처가 부인 한 명밖에 없지만 어마마마가 항시 지켜보고 있다는걸.”“저는…”이육진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신혼 부부가 벌써 방을 나눠 쓰겠다는 뜻이오? 이로써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생각은 해보았는가?”소우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육진에게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말했다.“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그렇다고 내 뜻을 오해하지는 말게.”이육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자 소우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이육진을 쳐다보았다.뭘 오해하지 말라는 거지?“이 모든 건 그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오.”이육진의 직설적인 말에 소우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 악역과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낸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한편, 소우연이 실망한 듯 한숨을 살짝 내쉬자 이육진은 마음이 불편했지만 딱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정연에게 미리 가서 준비하라고 하고 저도 곧 본채로 돌아가겠습니다.”소우연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고 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을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이 방도 꽤 깔끔하게 잘 정리한 것 같은데 여기서 자도 괜찮겠네.”소우연은 흠칫 놀란 표정으로 이육진을 쳐다보았다. 원칙대로라면 소우연은 이 저택에 들어오고 나서 따로 별채를 정해서 지내야 한다.하지만 그 별채가 이런 방식으로 정해질 줄은 몰랐다.“네, 알겠습니다.”고개를 끄덕인 소우연은 바로 문 앞으로 가서 정연을 불렀다.“정연아, 왕야께서 씻을 수 있게 욕조 물을 준비하거라.”곁방에서 몸을 녹이고 있던 정연과 명심은 재빨리 대답한 뒤, 하인을 시켜 욕조물을 받아왔다.“전 약방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소우연의 말에 이육진은 어디선가 꺼낸 책을 쓱 훑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의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구나.”이육진 손에 든 책은 소우연이 오늘 읽었던 의서였다.“전 모든 일에 진심입니다. 재미로 대충 하는 게 아니니 왕야께서는 저를 믿으셔도
“안 돼… 안 돼…”뼛속까지 파고드는 극심한 통증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던 소우연은 희미한 신음을 내뱉다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악몽을 꾸었음을 깨달은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침대에 상반신을 일으킨 채 앉아 있던 이육진과 시선이 맞닿았다.“부인, 악몽을 꾼 것이오?”소우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저, 저 때문에 깨신 겁니까?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조심스럽고 망설이는 듯한 소우연의 목소리에 이육진의 심장은 순간 움찔했다.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태어나 단 한 번도 누구를 위로해 본 적이 없는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거릴 뿐이었다.겁에 질린 소우연이 점점 심하게 몸을 떨던 그때, 이육진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무서워할 것 없네. 내가 곁에 있잖소.”‘이 남자가 지금 날 위로해주고 있는 건가?’흠칫하던 소우연은 이육진의 다정한 손길에 조금씩 진정이 되고 있었다.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이육진의 손길은 너무 따듯했고 그 따스함은 어느새 마음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전생에 이렇게 그녀를 걱정해주고 위로해준 사람이 없었고 이번생에서도 처음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차갑지만 이육진은 그녀의 체면을 확실하게 지켜주었다. 만약 이육진이 소우연을 모른 척했다면 그녀는 손발이 잘리지 않더라도 이 저택에서 괴롭고 힘든 생활을 이어갔을 것이다.“왕야…”떨리는 목소리로 이육진을 부르던 소우연은 이육진의 손을 머리에서 내려 두 손으로 꼭 잡았다.“너무 고맙습니다.”툭.고요한 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이 이육진의 손등에 떨어졌고 그 촉감은 너무도 낯설었다.“무서운 꿈을 꾼 것이오?”이육진이 소우연의 손을 꼭 잡으며 묻자 소우연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무 끔찍한 꿈이었습니다.”사실 그것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전생에 소우연이 직접 겪었던 끔찍한 기억들이었으며, 비록 이번 일이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손발과 심장은 여전히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고, 숨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정신을 번쩍 차린 소우연은 머릿속에 모든 게 가짜라고 했던 이육진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저렇게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 그녀에게 손수건을 챙겨준 것만 해도 이미 너무 대단한 일인데 더 이상 욕심을 내서는 절대 안 된다.마음을 다잡은 소우연은 이육진을 쳐다보며 말했다.“왕야께서 이건 그저 꿈이라고 하셨지만 만약 신혼 첫날 제가 정말 도망쳤다면 이 꿈이 현실이 되지 않았을까요? 소씨 가문 사람들은 저를 가족으로 생각한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이육진은 말문이 막혔다.소우연이 말한 것처럼 신혼 첫날 그녀가 도망쳤다면 이육진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아도 어마마마가 나서서 소우연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이런 생각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이육진은 소우연이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은 게 천만다행으로 느껴졌다.“앞으로 부인이 본분만 잘 지키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이 저택에서 계속 이렇게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오.”이육진의 말에 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전 평생 왕야 곁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이육진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소우연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녀는 이번생에 이육진 곁에만 있을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혹 부인은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것이오?”혹시 소우연은 처녀였을 때 이육진을 마음에 품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육진이 이렇게 얼굴이 망가지고 다리가 못 쓰게 되어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닐까?아니다. 절대 그럴 일은 없다.진규가 조사한 사실에 따르면 소우연이 어렸을 때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사내는 평서왕의 아들 이민수이고 꽃가마에 오르기 전에도 분명 회남왕 관저에 시집오기 싫다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한편, 이육진이 이렇게 묻는 의도가 이해되지 않는 소우연은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깊이 알지는 못했지만 이 경성에 왕야를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분명 소우연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내가 따로 있다는 걸 알면서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조금이나마 기대
상대방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네.”앳된 어린 소녀의 목소리였다. 그 소녀는 부스럭거리며 뭔가 만지고 있었고 이육진을 위해 약을 발라주겠다고 했다.이육진은 정신을 번쩍 차렸고 이내 분노와 원망, 복수심으로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지만 지금 이런 몸으로는 아무런 방법도 없었다.“내 모습이 너무 흉하고 추하지 않느냐?”이육진의 물음에 소녀가 담담하게 대답했다.“도련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최선을 다해 고쳐드리겠습니다.”소녀는 이육진의 얼굴에 난 상처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육진은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 조금은 상상이 되었다.이육진은 자신이 가장 신임하던 이 부장에게 배신을 당하여 장막 안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겨우 정신을 차린 이육진은 힘겹게 기어서 장막을 벗어났지만 이 부장은 이육진을 살려둘 생각이 없는 듯 검을 빼서 이육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얼굴에 화상을 크게 입은 이육진은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기에 제대로 싸울 수도 없었다. 이 부장은 그 점을 이용하여 무자비하게 공격했고 검으로 이육진의 얼굴을 베었을 뿐만 아니라 다리를 몇 번이나 힘껏 찔렀다.이육진은 이를 악문 채 이 부장에게 반격했고 결국 이 부장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눈앞이 점점 흐려지던 이육진은 다친 몸을 끌고 무작정 앞으로 걸어가다가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자 바로 뛰어들었다.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이육진은 이 부장만 생각하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그런 일을 겪고도 그의 얼굴이 멀쩡할 수 있을까? 이 부장이 살해되긴 했지만 이육진은 도무지 분이 풀리지 않았다.이육진은 분명 황태자의 신분으로 상운국 차기 황제인데 이 부장이 미치지 않고서 이육진을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이육진을 잘 따르면 앞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텐데 대체 왜 이육진을 죽이려고 한 걸까? 그 배후에 과연 누가 있는 걸까? 이 부장은 또 무슨 이유로 그자에게 충성을 다한 걸까?예전 생각에 빠져 있던 이육진이 호위 무사에게 물었다.
“왕야…”씻고 나온 소우연은 책을 들고 멍하니 앉아있던 이육진을 보게 되었다. 손에는 책을 들고 있지만 신경은 다른 곳에 팔린 것 같았다.‘무슨 생각을 저렇게 하고 있는 거지?’이육진이 고개를 돌려 소우연을 쳐다보자 소우연은 빠르게 다가가 은은한 향기가 나는 손으로 이육진이 들고 있던 책을 거꾸로 돌렸다.“왕야,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책을 거꾸로 들고 있는 것도 모르다니.이육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다 씻은 것이냐?”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정연에게 목욕물을 새로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조금 있다가 해도 된다.”이육진의 말에 소우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왕야께서 조금 전에 씻고 싶으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조금 전에는 안마하느라 땀에 흠뻑 젖은 소우연을 보고 함께 씻고 싶었던 것이지만 이제는…“안 씻어도 될 것 같다.”말을 하던 이육진이 휠체어를 끌고 지팡이를 가져왔다. 그가 휠체어에서 일어나자 소우연은 본능적으로 부축하려고 했다.하지만 소우연이 부축하기도 전에 이육진은 스스로 일어나 지팡이를 짚고 소우연 앞에 서있었다.이육진은 키도 크고 몸매도 건장했다.소우연이 고개를 들었지만 이육진 어깨에도 닿지 않았다.“조심하십시오, 왕야.”소우연이 웃으면서 얘기하자 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휘청거리며 힘겹게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지팡이를 짚고 있는 두 팔에 힘줄이 튀어나올 만큼 걷기 연습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소우연은 이육진과 함께 몇십 분 정도 걷기 연습에 집중했고 어느새 이육진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 모습을 보며 소우연은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다시 일어서서 걸으려면 침술과 안마 외에 고통을 참고 재활 치료를 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왕야, 조금만 쉬었다가 하십시오.”소우연이 손수건을 들고 까치발을 들자 흠칫하던 이육진은 이내 소우연이 이마의 땀을 닦을 수 있게 허리를 살짝 숙였다.“한순간에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이렇게 한 달 사이에 왕
“소우연에게 전하거라. 걔가 의술을 익혔고 그 약들까지 전부 걔가 조제했다는 사실을 소씨 가문 사람들 전부가 알았다고. 예전에 서럽게 한 일에 대해 미안해서 아버지가 이렇게 나를 직접 보내기까지 했다고. 가족의 정이 일말이라도 남아 있다면 소씨 가문에 한 번 다녀가라고 똑똑히 전하거라.”“그건…”“혈연은 그렇게 쉽게 맺고 끊을 수 있는 게 아닌데 어떻게 그런 양심 없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냐? 난 애초에 그 아이를 낳지 말았어야 했다.”말을 마친 임진숙은 나인과 함께 돌아서서 떠났다.간석은 마차를 타고 멀리 떠나는 임진숙의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정신을 번쩍 차린 채 손에 들고 있는 선물을 힐끗 쳐다보았다.‘소씨 가문에서 저번에 보상으로 꽤 큰돈을 들였을 텐데 아직도 선물을 준비할 돈이 있나 보네?’본채로 돌아온 간석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한 뒤,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건넸지만 소우연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뒤늦은 가족애는 필요 없어.”곁에 서있던 이육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연이 네 말이 맞아.”대신 선물을 받은 이육진이 열어보니 안에는 화차 한 통이 들어 있었다.“말리화차네요.”씁쓸하게 웃던 소우연은 눈물을 살짝 보이기도 했다.“전에 소우희 덕분에 말리화차를 몇 번 마신 적이 있는데 마실 때마다 얼굴이 퉁퉁 부었습니다. 그런데 선물로 저에게 말리화차를 주시네요.”잠시 머뭇거리던 소우연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말리화차는 소우희가 가장 좋아하는 화차입니다.”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을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팠다.“그럼 연이 너는 어떤 차를 좋아하는 것이냐?”“전 국화차를 좋아합니다. 체내의 열을 내려주거든요.”“이 서방님이 잘 기억하고 있겠다.”이육진이 다정하게 말하자 소우연은 그런 이육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미소를 지으며 ‘서방님’이라고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듣기 좋았다.한편, 곁에 서있던 간석은 바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왕야는 왕비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거야!’이육진은
소홍범의 말에 임진숙은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에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우리 우희가 평서왕세자에게 시집가는 건 이미 확실하게 정해진 일이었는데 소우연 그 계집애가 훼방을 놓는 바람에…”“그 아이가 무슨 훼방을 놓았단 말이오? 우희에게 혼인을 하사한 사람은 덕빈마마인데 대체 소우연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소우희가 평춘왕과 결혼하게 된 건, 덕빈이 소우희 대신 소우연이 회남왕의 왕비가 된 일에 대한 보복이다!소우희 한 사람만 희생하고 소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덕빈은 충분히 자비를 베풀었다고 봐야 한다.이런저런 일들이 생각나자 머리가 아픈 소홍범은 대충 몇 마디 당부하고는 바로 돌아서서 떠났다.이날.조정을 나선 이육진은 저택으로 돌아갔다. 소우연이 약을 발라주자마자 이육진은 바로 지팡이를 짚고 걷기 연습에 돌입했다.이때, 간석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소씨 부인이 찾아왔다고 말을 전했고 이육진은 고개를 돌려 소우연에게 물었다.“만나고 싶으냐?”“만날 이유가 없습니다.”소씨 가문 사람들과 만날 때마다 기분만 나빠졌다.“가서 그자에게 전해라. 난 이미 오래전에 소씨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이제 더 이상 왕래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확실하게 얘기하거라.”눈치를 살피던 간석은 왕비의 맺고 끊음이 참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왕비는 왕야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지만 소씨 가문 사람들에 대한 태도로 보면 소우희 대신 왕야와 혼인을 치른 일로 소씨 가문 사람들을 많이 원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휴… 왕야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을 텐데…’방을 나서기 전, 간석은 몰래 이육진을 힐끗 쳐다보았다가 이육진과 눈이 딱 마주쳤고 결국 불쌍하게 이육진을 쳐다보던 눈빛도 들키게 되었다.화들짝 놀란 간석은 바로 정신을 번쩍 차렸다.‘왕야가 어떤 분인데 내가 감히 불쌍하게 여기고 있는 거지?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한편, 이런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던 소우연은 간석이 방을 떠나자마자 이육진에게 물었다.“왕야, 혹
“우희야,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임진숙은 황급히 소우희의 입을 막으며 말을 이어갔다.“그자는 이제 네 서방이야. 두 사람은 운명 공동체가 됐기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서로 존경하고 존중해야 해.”“운명 공동체… 허허…”예전에 소우연을 회남왕 저택에 시집 보낼 때에도 가족들은 똑같은 말로 소우연을 설득했다.소우희는 평춘왕 저택에서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데 아무도 그녀를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설마 지금까지 그녀에게 보여준 사랑과 관심이 전부 가짜란 말인가?소우희는 가치가 없어지니 헌신짝처럼 내버려진 자신의 신세가 소우연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우희야, 참아야 돼. 그래도 넌 지금 평춘 왕비잖아. 안주인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돼. 그게 여자의 삶이고 모든 여자들이 그렇게 살아왔어.”임진숙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막내 딸을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임진숙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그 고통을 대신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어머니, 정말 다른 방법이 없는 겁니까?”소우희가 임진숙을 보며 묻자 임진숙이 대답했다.“없어. 얼른 아이를 낳아야 너도 기댈 구석이 생기는 거야. 이러다가 나이가 많은 평춘왕이 어느 날 갑자기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아이를 낳으라고? 하지만 소우희는 결국 후처일 뿐이다. 더군다나 평춘왕은 소우희를 임신하게 만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으며 매번 합방을 하고 나면 소우희에게 피임 탕약을 먹였다.생각할수록 서러워진 소우희는 친정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기로 결정했다.하지만 이튿날, 소우희의 바람과 달리 평춘왕은 소우희를 데리러 직접 진원 장군 저택에 찾아왔다.이번에는 사위답게 선물까지 들고 왔지만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소홍범은 서재에 들어가 평춘왕을 만나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임진숙 혼자서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평춘왕을 보자마자 소우희가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어머니가 저를 하도 그리워하셔서 친정에 며칠만 더 있다가 돌아가도 되겠습니까?”그 말에
온몸을 덜덜 떨고 있던 소우희는 분노로 들끓고 있는 아버지의 눈빛을 보자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바로 이 순간, 오랫동안 마음속을 억누르고 있던 커다란 돌멩이가 드디어 사라진 듯 숨통이 트이기도 했다.“그럴 줄 알았어요. 다들 저를 버리려는 거잖아요. 저를 버리고 싶은 거잖아요…”소우희가 엉엉 울면서 말하자 소홍범은 손을 번쩍 치켜들었지만 결국 소우희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네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하는 것이냐!”소우희는 황급히 임진숙 품 안으로 파고 들었고 딸을 품에 안은 임진숙은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너무 아팠다.모든 면에서 훌륭하고 대견하던 아이가 어쩌다가 이런 처지가 됐을까!이때, 조용하게 서있던 소현준이 소홍범에게 말했다.“이 일을 형과 셋째 아우에게 얘기해야 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현재 산적을 소탕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집안일까지 신경 쓰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나중에 승리해서 돌아오면 그때 얘기하는 낫지 않겠습니까?”분통이 터진 소홍범은 가슴팍을 부여잡고는 소우희를 가리키며 물었다.“네가 우리에게 더 숨기는 것은 없느냐?”“없, 없습니다.”가여운 소우희의 모습에 소홍범은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 지금까지 사랑을 듬뿍 주고 애지중지 키운 딸이기에 소홍범도 더 이상 혼낼 수가 없었다.하지만 멀쩡하던 소씨 가문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소우희가 더는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넌 이제 평춘왕 저택으로 돌아가 평춘 왕비로 조용하게 살 거라.”말을 마친 소홍범은 하루아침에 10년은 늙은 듯 허리를 구부리고는 힘겹게 탁자를 잡고 일어섰고 초점도 잃은 채 넋이 나간 눈빛이었다.한편, 소우희는 아버지의 말에 너무도 서러웠다.“아버지, 제발 저를 내쫓지 말아주세요. 전 평춘왕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전…”“넌 이제 평춘 왕비의 신분이야.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혼인인데 돌아가지 않겠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하지만 평춘왕 그자는… 그 사람은…”
다만 소우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동시에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의 책임을 소우연에게 돌렸다.소우희가 서럽게 울고 있을 때, 소현준의 호위무사가 혜주를 데리고 대청에 나타났다.소현준이 혜주를 힐끗 쳐다보자 혜주는 바로 소우희가 지금까지 저지른 짓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술술 얘기하기 시작했고 마지막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소우희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아씨, 죄송합니다. 고문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소우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조금 전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지금쯤 감당할 수 없는 벌을 받았을 것이다.대청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헛기침을 몇 번 하던 소씨 노부인은 혜주와 소우희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는구나. 우리 가문에 어쩌다가 너 같은 멍청한 애가 태어난 것이냐!”노부인이 언성을 높이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곁에 있던 나인은 재빨리 노부인을 부축했다.“네 딸이니 네가 알아서 교육을 하거라!”노부인이 소홍범에게 말하자 안색이 어두워진 소홍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부인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네, 어머니.”숨을 크게 들이마신 소씨 노부인은 지금까지 두통 치료로 썼던 진정향을 자신이 제일 싫어하던 소우연이 조제했다는 사실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나중에 시간 나면 소우연 그 아이를 저택에 들라 하거라.”소씨 가문은 소우연에게 한번쯤은 확실하게 사과를 해야 한다.소씨 노부인은 지금까지 소우연이 소씨 가문의 저주라고 굳게 믿었는데 그 저주받은 아이가 자신에게 진정향을 조제해주고 군영에 치료약까지 조제해줬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뿐만 아니라 소현우가 예전에 전장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며칠동안 혼절 상태에 빠져 있었을 때에도 소우연이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란 말인가!“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가슴이 답답해진 노부인은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 화가 나서 기절할 것만 같았기에 나인의 부축을 받고 대청을 떠났다
딸의 뜻을 알아차린 임진숙은 서둘러 하인들에게 물러가라고 했다.그 뒤로 한참동안 엉엉 울던 소우희는 결국 모든 걸 사실대로 고백했고 임진숙은 너무 큰 충격에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넌 봉황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잖아. 네가 태어날 때 흠천감의 도사님이 직접 네 운명까지 점을 치셨는데 잘못됐을 리가 없어. 넌 어렸을 때 매일 의서를 곁에 두고 살았는데 어떻게 의술을 익히지 못했을 수가 있어?”“그 의서들은 하나같이 재미가 없어서 도무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어요.”“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면 안 되지!”“전 사람들을 속일 생각이 없었어요. 그때 당시 할머니 두통이 심해졌을 때 제가 의서를 많이 봤다고 저에게 두통을 고칠 수 있는 약을 지어오라고 하셨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약을 조제한다는 게 말도 안 되잖아요! 그러다가 나중에 소우연이 진정향을 조제해서 할머니께 드렸는데 할머니는 쳐다보지도 않으시고 버렸어요. 소우연이 그때 당시 할머니께서 나를 믿으시니 나더러 진정향을 할머니께 드리라고 했어요. 그 진정향은 예상보다 효과가 더욱 좋았고 그때부터 할머니께서는 그 진정향을 제가 조제했다고 확신하게 되신 거예요…”“그럼 나중에라도 사실을 밝혔어야지!”“그때 당시에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할머니께서 두통으로 고통을 덜 받았으면 하는 생각밖에 없었거든요.”임진숙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군영에서 쓰는 약들은 뭐야? 왜 네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은 것이야?”“그, 그 약들은… 어차피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은 소우연이 의술을 할 줄 안다는 걸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냥 제가 만들었다고 얘기한 거예요.”임진숙의 실망한 표정으로 보며 입술을 꽉 깨문 소우희는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어머니, 어머니까지 절 버리시면 전 정말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요. 어머니…”임진숙은 주먹으로 소우희의 등을 몇 번 때렸다.“바보 같은 계집애, 어떻게 이렇게 큰 사고를 칠 수가 있어!”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착했던 아
나중에 왕비를 들이고 나서도 계속 이 모양 이 꼴이었다.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본채 안을 쳐다보던 이지윤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소우희를 발견하자 이종대에게 버럭 화를 냈다.“아버지, 이젠 첩도 모자라서 왕비까지… 저 사람은 아버지가 이 집에 정식으로 들인 정실 부인입니다. 도대체 왕비를 몇 명이나 더 들여야 정신을 차리시겠습니까?”“지윤아, 네가 오해를 한 것이다.”이종대는 이지윤을 달래는 와중에 다급하게 손을 흔들며 손님들을 내쫓았다.“저기, 왕야, 저희는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말을 하던 두 사람은 급하게 저택을 나섰고 이종대도 대충 대답했다.“그래, 그래. 나중에 다시 보자고.”고개를 돌린 이종대는 아들이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자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지윤이 네가 아직 어려서 모르는 일들이 많아.”이지윤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모르는 일들이 많긴 무슨. 이 저택 안이 매일 조용하지 않으니 이지윤도 공부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어차피 꼴통 왕야로 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큰 죄를 짓지 않고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대충 살아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부자 두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서 밖으로 향했다.방 안은 순식간에 텅 비어 버렸다.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하인 두어 명을 보자 그제야 소우희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이종대 저자도 약점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네! 이지윤에게 저렇게 고분고분하다니!’멀어져가는 이지윤의 뒷모습을 보며 소우희의 마음속에 희망이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이지윤이 그녀를 이 지옥에서 구해줄 수 있을까?다음날.소우희는 시녀 두 명을 데리고 결국 진원 장군 저택으로 돌아왔다.너무 일찍 온 탓에 저택 안에는 소씨 노부인과 임진숙밖에 없었다.“할머니…”조심스럽게 입을 연 소우희는 노부인에게 큰절을 올렸다.식탁 앞에 앉아있던 노부인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어젯밤 소현준이 했던 말들이 떠오르자 머리가 지끈 아팠다.어젯밤, 소현준은 소씨 노부인에게 자신이 저번에
“연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냐? 그럼 조금 전에 했던 말도 진심이냐?”“당연히 진심이지요. 마음만 급하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특히 왕야께서는 4년 동안 거의 걷지 않으셨기에 더욱 천천히 적응해야 합니다.”“알겠다. 앞으로 연이 네 말을 잘 듣도록 할게.”잠시 고민하던 소우연이 말했다.“그럼 앞으로 매일 한 시간만 걷기 연습을 하십시오.”“그래.”휠체어에 앉은 이육진은 지팡이를 곁에 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우연이 말한 것처럼 마음만 급하다고 되는 일이 아니기에 소우연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했다.간단하게 목욕을 마친 뒤, 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약을 발라주고 침을 놓고 안마까지 해주었다.그러면서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기도 했다.이육진은 이민수가 얘기한 배꽃에 대해 생각하느라 정신이 팔려 소우연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왕야?”세 번째 부름에 겨우 정신을 번쩍 차린 이육진은 당황한 듯 물었다.“아, 그럼 소현준 그자는 왜 그냥 간 것이냐?”소우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저에게 소우희와 소씨 가문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차마 요구할 수가 없었겠지요.”“그래도 소씨 가문 나머지 사람들보다 자기 주제를 확실하게 알긴 아네.”이육진의 말에 소우연도 동의하듯 피식 웃었다.소현준은 소씨 가문의 유일한 장원 급제자로써 대리사경 일을 맡고 있었으며 소씨 가문에서 꽤 높은 지위를 자랑했다.만약 그때 당시 소현준이 소우연의 편에 들어 한 마디만 해주었다면 소우연은 소씨 가문에서 이렇게까지 처참한 대우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평춘왕 관저에서.만안당에서 큰 수모를 당한 소우희는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평춘왕 관저로 돌아왔고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손님 몇 명을 데리고 돌아온 평춘왕과 마주치게 되었다.화들짝 놀란 소우희는 말까지 더듬었다.“왕, 왕야…”“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왜 아직도 이 집에 있는 것이야?”평춘왕의 말에 소우희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친정에 갔다가 돌아온 겁니다.”“친정에 갔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