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단서는 없었습니다.”“왕비와 원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이육진의 말에 진규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저택 안에만 계신 왕비님이 어떤 자와 원한 관계가 있으시겠습니까? 대신 며칠 전에 소씨 가문 둘째 아씨가 왕비님을 찾아와 왕비님에게 큰 수모를 당하셨지요.”“소우희…”조용하게 듣고 있던 이육진이 손자락으로 휠체어 손잡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중얼거렸다.소우연은 명색이 소씨 가문 큰딸인데 어떻게 소씨 가문에서 이런 대우를 받고 살았을까? 생각해보면 소우연의 인생도 꽤 힘들고 외로웠을 것 같았다.“소씨 가문 사람들 잘 지켜보고 있어. 특히 소우희 그 여자의 움직임은 하나도 놓치지 말고 확실하게 지켜봐!”“네, 알겠습니다.”해시가 다 됐지만 아직도 깨어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소우연을 보며 마음이 급해진 이육진은 다시 어의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자 저택에 있던 의원이 그를 말렸다.“왕야,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비님은 이제 열도 내리셨고 소인이 진맥을 했을 때 맥박도 정상이셨습니다.”“그런데 왜 여태껏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냐!”“아마도…”의원이 대답하려던 그때, 침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쿨럭쿨럭…”“왕야, 왕비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의원이 손에 땀을 쥐던 그때, 다행히도 소우연이 눈을 떴다.소우연은 침대 곁에 지키고 있는 이육진을 힐끔 쳐다보고는 주위를 쓱 훑다가 힘겹게 물었다.“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겁니까?”소우연은 낮에 외출했을 때 자객에게 습격을 당했던 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왕야, 괜찮으신 겁니까?”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육진을 아래위로 꼼꼼하게 훑어보던 소우연은 깔끔하게 옷을 차려 입은 이육진이 멀쩡한 모습으로 앉아있자 이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괜찮으시니 다행이네요.”이육진은 아픈 몸으로 그를 먼저 걱정하는 소우연을 보며 마음이 착잡했다.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지려던 소우연은 어깨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에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제야 낮에 이육진을 향해 날아오던 칼을 막았다는
소우연이 대답을 하려던 그때, 이육진이 다시 한번 경고했다.“잘 생각해보고 대답하는 게 좋을 것이오. 날 속일 생각은 하지도 말고!”“제가 어찌 감히 왕야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전 소우희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곧 원한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그래, 알겠소.”전에 이육진은 언젠가 기회를 찾아 소우연을 포함한 소씨 가문 모든 사람들을 죽여버리려고 했지만 이제는 다르다.지금 이 순간부터 소우연이 3년 전 이육진을 구해준 사람이 맞든 아니든 소우연의 목숨은 살려둘 것이다.이육진이 휠체어를 끌고 밖으로 나가면서 정연에게 방으로 들어와 왕비의 시중을 들라고 명령했고 소우연은 이육진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착잡했다.알겠다고? 대체 뭘 알겠다는 거지?이때, 방으로 들어온 정연이 소우연에게 말했다.“왕비님, 의원께서 왕비님은 요즘 기름기가 없는 담백한 음식을 드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소인이 야채죽과 산삼차를 준비했습니다. 소인이 식사를 도와드리겠습니다.”고개를 끄덕이던 소우연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왕야께서는 식사를 하셨느냐?”흠칫하던 정연이 대답했다.“왕비님께서 다치시고 나서 왕야는 한 시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곁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직 식사를 못하셨습니다.”“그럼 왕야께서 혹시 지금 서재로 간 것이냐?”정연은 아마도 그랬을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아마도 그러셨을 겁니다.”“그럼 왕야께도 식사를 보내 드리거라.”“알겠습니다.”정연은 눈앞에 있는 이 왕비가 보면 볼수록 참 신기했다. 회남왕의 망가진 얼굴이나 못 쓰는 다리를 전혀 거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왕야 걱정만 하고 있다.이렇게 예쁜 미모를 가진 여인이 왕야까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으니 다른 여인 대신 시집왔다는 것만 빼면 너무 완벽했다.“난 이제 다 먹었으니 얼른 왕야께 가져다 드리거라. 왕야께서도 많이 시장하실 것이다.”“네, 소인 바로 서재에 다녀오겠습니다.”조금 뒤, 서재 밖에서.정연이 시
이날밤, 하늘에서 또다시 눈이 펑펑 내리시 시작했고 침대에 누운 소우연은 마음속으로 이육진이 이제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까 기대했다.바로 이때,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고 소우연은 재빨리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조금 뒤, 침대 위로 올라온 이육진이 낮은 목소리로 소우연을 불렀다.“부인.”흠칫 놀란 소우연은 이유진이 왜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건지 의아하며, 눈을 떠야 할지 고민했다.“이 눈이 그치면 나와 함께 궁으로 들어가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 인사를 드리게.”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던 소우연은 눈을 살짝 뜨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전 왕야 결정에 따르겠습니다.”이육진은 너무도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소우연을 보며 그녀가 예전에 이민수에게도 이랬을까 궁금해졌다.‘당연히 그랬겠지. 이민수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큰 약혼자인데.’한편, 이육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소우연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이육진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 정말 너무 무서웠습니다.”“난 부인이 전혀 안 무서운 줄 알았는데?”“그럴 리가요? 정말 엄청 놀랐습니다.”하지만 그렇게 긴박한 상황에서도 소우연은 이육진이 다쳤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연기가 너무 진부한 거 아닌가?이육진의 의심스러운 눈빛에 소우연은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왕야, 전 정말 놀란 겁니다. 나중에 혼자 외출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면 전 죽을 수밖에 없겠지요?”“그럴 리 없소.”입술을 살짝 오므리던 이육진이 소우연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앞으로 외출할 때 호위무사를 데리고 다니는 게 좋겠소.”그 말은 이제 이육진이 소우연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는 뜻인가?잠시 고민하던 소우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왕야, 외람된 요구지만 혹시 제가 진맥 한번 해드려도 되겠습니까?”“진맥은 왜?”“소자는 어려서부터 가족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였사옵니다. 하여 단 한 번이라도 칭찬을 받아보고자 밤낮없이 의서를 익혔고, 이
소우연은 창가에 앉아 창문을 열고는 시녀들이 장난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명심이와 아이들은 매년 눈이 올 때마다 눈사람을 만드는데 질리지도 않은가 봅니다.”곁에 있던 정연의 말에 소우연이 웃으며 대답했다.“즐거워 보여서 참 좋구나.”사람들은 회남왕 이육진의 성격이 난폭하고 감정 기복도 심하다고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저택에 있는 시녀들은 어떻게 저렇게 밝고 해맑을 수 있을까?“그러고 보면 왕야는 밖에 떠도는 소문처럼 그리 어려운 분이 아니지 않느냐?”정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왕야께서는 무서운 면을 외부인과 적에게만 보여주십니다.”정연은 고개를 돌려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왕야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신부를 바라보았다. 왠지 이번에는 왕야 곁에 진정한 배필이 나타난 것만 같았다.“적에게만 보여준다…”“그렇습니다. 왕야께서 감정 기복이 심하신 건 맞지만 이유 없이 화를 내시지는 않으십니다.”고개를 끄덕이던 정연은 소우연에게 따듯한 화차를 한 잔 따라주며 말을 이어갔다.“왕야께서 왕비님을 대하시는 태도가 남다르십니다.”소우연은 정연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정연이 말한 것처럼 소우연은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목숨 잃고 밖으로 버려진 신부가 아니기에 다들 소우연을 특별하다고 느꼈을 것이다.“그럴 수도 있지.”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연은 말머리를 돌려 소우연에게 화차를 마셔보라고 권했다.소우연은 옅은 미소를 띠며 화차 찻잔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그녀는 생각했다. ‘악인도 결국 사람이니, 칠정육욕이 없을 수야 없겠지?’그는 언제나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으니, 필시 사랑도 정마저도 끊어낸 자일 것이다.전생에서, 혈육의 정과 사랑은 마치 바늘처럼 그녀의 가슴을 찔러왔고, 그 고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다.그러나 이번 생의 그녀는, 그런 굴레를 모두 벗어던지고 오직 자신을 위해 살고자 했다.그리고 소우희와 이민수, 이 두 사람과는 다시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으리라!이로부터 며칠 뒤.눈이 녹기 시작했고 마당을 지키
이육진과 소우연은 가까이 다가가 덕빈 마마께 큰절을 올렸고, 덕빈 마마는 환히 웃으며 손을 가볍게 흔드셨다.“이만 고개를 들 거라.”“감사하옵니다, 어마마마.”소우연은 윗몸을 일으키자마자 손을 뻗어 이육진의 휠체어를 잡아주었고 한 치도 불만이 없어 보였다.그 아름다운 작은 얼굴은 길을 오는 동안 거센 눈바람을 맞았는지, 두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마치 도자기 인형처럼 보였다.어쩐지, 아들이 그녀를 맘에 들어한다더니.단귀비는 자리를 내리도록 명하였고, 곧이어 기 나인에게 작은 주방에서 만든 다과를 가져오게 하였다.“안 그래도 네 아바마마께서 며칠 전부터 네가 언제 처를 데리고 궁에 들어오는지 계속 물으셨어. 마침 잘 왔구나.”덕빈의 말에 소우연이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 걱정을 끼쳐드려 송구하옵니다.”이육진은 요즘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일찍 찾아뵙지 못했다고 설명했고 소우연이 다친 일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어차피 회남왕 관저에서 벌어지는 일은 어마마마도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다과와 차를 올린 기 나인은 시녀에게 조정 앞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주상이 논의를 마치면 바로 보고를 하라고 했다.그렇게 단향궁에 있는 세 사람은 가볍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수려한 외모에 차분한 성정을 지닌 소우연은 심지어 이육진을 각별히 신경 쓰는 듯 보였다.‘저 아이는 분명 평서왕의 아들과 혼약이 있었던 거 아닌가? 이렇게 빨리 그자를 버리고 내 아들에게 빠졌다고?’만약 이육진이 예전처럼 건강하고 외모도 수려했으면, 덕빈도 조금은 믿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이육진 얼굴에 저렇게 보기 흉할 정도로 상처가 크게 남았는데 소우연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걸까? 저러다가 이육진도 결국 공세에 넘어가지 않을까?덕빈은 소우연을 보며 이미 돌아가신 황후 언니가 떠올랐다. 경성 제일 미녀였던 황후 언니는 황제를 평생 제대로 홀렸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황제는 그 여인을 잊지 못하고 있다.이 생각만
방으로 들어온 황제는 이육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안타깝기도 하고 마음도 너무 아팠다.그러다가 시선을 돌려 소우연을 쳐다보았고 수려한 외모에 기품도 넘쳐 보이는 모습에 살짝 놀란 듯했다.황제는 진원 장군 가문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큰딸이 외모가 부족하거나 성격이 괴팍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그리고 아들 이육진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황제는 이 두 사람을 다시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다들 그렇게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네. 오늘은 그저 간단한 가족 모임일 뿐일세.”덕빈이 제일 먼저 고개를 들었고 곁에 서있던 기 나인에게 눈치를 주자 기 나인은 바로 궁녀와 내시들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한편, 소우연은 여전히 고개를 깊이 숙인 채 감히 황제의 용안을 올려다보지 못하였다.조금 뒤, 기 나인과 단향궁 내시가 황제 앞에 진수성찬을 차렸고 소우연은 그 음식들을 힐끗 쳐다보았다.나중에 주상께서 회남왕의 신부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소우연 그녀는 어떻게 되는 걸까?생각만 해도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였다.한편, 소우연의 긴장한 모습을 눈치챈 이육진은 그녀에게 귤을 건네며 말했다.“왕비, 식사전에 귤 하나 먼저 먹지 않겠소?”“감사하옵니다.”고개를 살짝 든 소우연이 휠체어에 앉아있던 이육진과 눈이 마주쳤고 손을 뻗어 귤을 받던 순간, 이육진이 소우연의 손을 살짝 잡은 채 낮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전했다.“겁먹지 마.”‘이 남자가 나한테 겁먹지 말라고 했어…’소우연은 진심 어린 이육진의 눈빛에 마음이 살짝 흔들렸고 이내 입술을 오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그 뒤로 이육진은 기미상궁을 시켜 소우연에게 이런저런 반찬을 잔뜩 덜어주었고 소우연은 덕분에 긴장은 많이 풀렸지만 황제와 덕빈의 뜨거운 시선에 점점 난감했다.겨우 식사 자리가 끝나고 황제와 덕빈에게 인사를 올린 소우연은 이육진과 함께 단향궁을 나섰다.한편, 단향궁에서.입가심을 하고 있던 황제가 덕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넷째가 이번 왕비를 꽤 마음에 들어
회남왕 관저의 마차가 번화한 거리에 나서자 거리를 오가던 마차와 백성들은 너도나도 양옆으로 물러섰다.한편, 마차 안에 앉아있던 이육진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소우연은 창문을 가린 천막을 살짝 열고는 밖을 쳐다보았다.거리에는 손님들로 가득 찬 주막과 보따리 장사를 하고 있는 장사꾼들로 북적거렸다.처녀였을 때, 소우연은 거의 외출한 적이 없었으며 어머니는 외출할 때마다 소우희만 데리고 나갔다.씁쓸하게 웃던 소우연은 이내 천막을 내렸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이육진과 눈이 딱 마주쳤다.얼굴이 빨개진 소우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왕야, 혹시 제 얼굴에 뭐가 묻은 겁니까?”“아니.”아닌데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걸까?소우연이 볼을 만지며 고개를 살짝 숙인 그때, 이육진이 말했다.“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나한테 한번 얘기나 해보지 그래?”소우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쳐다보자 이육진이 다시 물었다.“없는 건가?”“신경 써주셔서 감사드리지만 전 아직 두서가 없습니다.”‘두서가 없다… 대체 어떤 두서가 필요한 걸까? 더럽고 염치없는 것들은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하지만 이건 결국 소우연의 개인 사정이기에 소우연이 아직 소씨 가문과 완전한 결렬을 결정하지 못했다면 이육진도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회남왕 저택으로 돌아온 뒤, 이육진은 서재로 가기 전 소우연에게 외출할 땐 반드시 호위무사를 대동하라고 당부했다.“알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소우연은 깍듯이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한 뒤, 이내 반짝이는 눈빛으로 물었다.“혹시 왕야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을까요?”이육진은 소우연의 기대에 찬 눈빛을 보며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그래.”소우연은 떠나는 이육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소우연을 곁에서 지켜보던 정연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착잡해졌다.예전에 회남왕은 경성에서 외모가 가장 출중한 사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이제는…허나, 왕비의 눈빛에는
진규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육진이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왕비는 내 앞에서 항상 조심스럽고 온순한 모습이었거든. 그렇게 큰소리로 날뛸 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네.”“왕비님께서 화내실 때 꽤 무섭습니다. 당당하기도 하시고요.”진규가 대답했다.전에 진규는 소우연이 소씨 가문에 찾아갔을 때 회남왕 왕비의 신분을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소씨 가문 사람들을 상대했다고 했다.이육진은 왕비 신분을 꽤 유용하게 쓰는 소우연이 대견하기도 했다.한편, 소우연이 회남왕 관저로 돌아왔을 땐 이미 날이 꽤 어두웠고 하인들은 서둘러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명심이 소우연에게 찾아가 물었다.“왕비님, 식사 준비가 다 됐는데 이제 왕야를 모셔올까요?”소우연이 흠칫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왕야께서 아직도 저녁 식사를 하지 않은 것이냐?”“아직 안 하셨습니다. 태감께서 얘기하시길 왕야께서는 오늘 왕비님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시기로 약속했다고 하셨습니다.”“아니, 난…”제민 약방에 소우연이 원하는 약재가 없었기에 경성에 있는 다른 약방을 전부 돌아다니느라 시간이 늦어진 것이다.“그럼 얼른 왕야를 모시거라.”“네.”명심은 실실 웃으며 서재로 향했다. 왕비가 왕야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으니 앞으로 왕비의 시녀들도 그 덕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이와 반대로 소우연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늦게 돌아와서 왕야의 저녁 식사 시간이 늦어졌는데 혹시 왕야가 화내지 않을까?‘화를 내면 최선을 다해 어르고 달래야지. 따로 방법이 없잖아.”본채 문 앞에 선 소우연은 이육진을 기다리면서 정연에게 물었다.“혹시 이 저택에 비어 있는 방이 있느냐?”“혹 뭘 하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약을 제조해야 하는데 따로 방 한 칸이 필요하다.”소우연이 사온 약재들은 아직 마차 안에서 내리지 않았다.“곁채는 많습니다. 하지만 약초 향이 왕비님과 왕야의 수면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요?”정연의 말에 소우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초 향이 꽤 진하기에 이육진이 싫어할 수도 있을
“왕야…”씻고 나온 소우연은 책을 들고 멍하니 앉아있던 이육진을 보게 되었다. 손에는 책을 들고 있지만 신경은 다른 곳에 팔린 것 같았다.‘무슨 생각을 저렇게 하고 있는 거지?’이육진이 고개를 돌려 소우연을 쳐다보자 소우연은 빠르게 다가가 은은한 향기가 나는 손으로 이육진이 들고 있던 책을 거꾸로 돌렸다.“왕야,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책을 거꾸로 들고 있는 것도 모르다니.이육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다 씻은 것이냐?”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정연에게 목욕물을 새로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조금 있다가 해도 된다.”이육진의 말에 소우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왕야께서 조금 전에 씻고 싶으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조금 전에는 안마하느라 땀에 흠뻑 젖은 소우연을 보고 함께 씻고 싶었던 것이지만 이제는…“안 씻어도 될 것 같다.”말을 하던 이육진이 휠체어를 끌고 지팡이를 가져왔다. 그가 휠체어에서 일어나자 소우연은 본능적으로 부축하려고 했다.하지만 소우연이 부축하기도 전에 이육진은 스스로 일어나 지팡이를 짚고 소우연 앞에 서있었다.이육진은 키도 크고 몸매도 건장했다.소우연이 고개를 들었지만 이육진 어깨에도 닿지 않았다.“조심하십시오, 왕야.”소우연이 웃으면서 얘기하자 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휘청거리며 힘겹게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지팡이를 짚고 있는 두 팔에 힘줄이 튀어나올 만큼 걷기 연습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소우연은 이육진과 함께 몇십 분 정도 걷기 연습에 집중했고 어느새 이육진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 모습을 보며 소우연은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다시 일어서서 걸으려면 침술과 안마 외에 고통을 참고 재활 치료를 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왕야, 조금만 쉬었다가 하십시오.”소우연이 손수건을 들고 까치발을 들자 흠칫하던 이육진은 이내 소우연이 이마의 땀을 닦을 수 있게 허리를 살짝 숙였다.“한순간에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이렇게 한 달 사이에 왕
“소우연에게 전하거라. 걔가 의술을 익혔고 그 약들까지 전부 걔가 조제했다는 사실을 소씨 가문 사람들 전부가 알았다고. 예전에 서럽게 한 일에 대해 미안해서 아버지가 이렇게 나를 직접 보내기까지 했다고. 가족의 정이 일말이라도 남아 있다면 소씨 가문에 한 번 다녀가라고 똑똑히 전하거라.”“그건…”“혈연은 그렇게 쉽게 맺고 끊을 수 있는 게 아닌데 어떻게 그런 양심 없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냐? 난 애초에 그 아이를 낳지 말았어야 했다.”말을 마친 임진숙은 나인과 함께 돌아서서 떠났다.간석은 마차를 타고 멀리 떠나는 임진숙의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정신을 번쩍 차린 채 손에 들고 있는 선물을 힐끗 쳐다보았다.‘소씨 가문에서 저번에 보상으로 꽤 큰돈을 들였을 텐데 아직도 선물을 준비할 돈이 있나 보네?’본채로 돌아온 간석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한 뒤,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건넸지만 소우연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뒤늦은 가족애는 필요 없어.”곁에 서있던 이육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연이 네 말이 맞아.”대신 선물을 받은 이육진이 열어보니 안에는 화차 한 통이 들어 있었다.“말리화차네요.”씁쓸하게 웃던 소우연은 눈물을 살짝 보이기도 했다.“전에 소우희 덕분에 말리화차를 몇 번 마신 적이 있는데 마실 때마다 얼굴이 퉁퉁 부었습니다. 그런데 선물로 저에게 말리화차를 주시네요.”잠시 머뭇거리던 소우연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말리화차는 소우희가 가장 좋아하는 화차입니다.”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을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팠다.“그럼 연이 너는 어떤 차를 좋아하는 것이냐?”“전 국화차를 좋아합니다. 체내의 열을 내려주거든요.”“이 서방님이 잘 기억하고 있겠다.”이육진이 다정하게 말하자 소우연은 그런 이육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미소를 지으며 ‘서방님’이라고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듣기 좋았다.한편, 곁에 서있던 간석은 바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왕야는 왕비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거야!’이육진은
소홍범의 말에 임진숙은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에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우리 우희가 평서왕세자에게 시집가는 건 이미 확실하게 정해진 일이었는데 소우연 그 계집애가 훼방을 놓는 바람에…”“그 아이가 무슨 훼방을 놓았단 말이오? 우희에게 혼인을 하사한 사람은 덕빈마마인데 대체 소우연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소우희가 평춘왕과 결혼하게 된 건, 덕빈이 소우희 대신 소우연이 회남왕의 왕비가 된 일에 대한 보복이다!소우희 한 사람만 희생하고 소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덕빈은 충분히 자비를 베풀었다고 봐야 한다.이런저런 일들이 생각나자 머리가 아픈 소홍범은 대충 몇 마디 당부하고는 바로 돌아서서 떠났다.이날.조정을 나선 이육진은 저택으로 돌아갔다. 소우연이 약을 발라주자마자 이육진은 바로 지팡이를 짚고 걷기 연습에 돌입했다.이때, 간석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소씨 부인이 찾아왔다고 말을 전했고 이육진은 고개를 돌려 소우연에게 물었다.“만나고 싶으냐?”“만날 이유가 없습니다.”소씨 가문 사람들과 만날 때마다 기분만 나빠졌다.“가서 그자에게 전해라. 난 이미 오래전에 소씨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이제 더 이상 왕래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확실하게 얘기하거라.”눈치를 살피던 간석은 왕비의 맺고 끊음이 참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왕비는 왕야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지만 소씨 가문 사람들에 대한 태도로 보면 소우희 대신 왕야와 혼인을 치른 일로 소씨 가문 사람들을 많이 원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휴… 왕야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을 텐데…’방을 나서기 전, 간석은 몰래 이육진을 힐끗 쳐다보았다가 이육진과 눈이 딱 마주쳤고 결국 불쌍하게 이육진을 쳐다보던 눈빛도 들키게 되었다.화들짝 놀란 간석은 바로 정신을 번쩍 차렸다.‘왕야가 어떤 분인데 내가 감히 불쌍하게 여기고 있는 거지?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한편, 이런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던 소우연은 간석이 방을 떠나자마자 이육진에게 물었다.“왕야, 혹
“우희야,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임진숙은 황급히 소우희의 입을 막으며 말을 이어갔다.“그자는 이제 네 서방이야. 두 사람은 운명 공동체가 됐기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서로 존경하고 존중해야 해.”“운명 공동체… 허허…”예전에 소우연을 회남왕 저택에 시집 보낼 때에도 가족들은 똑같은 말로 소우연을 설득했다.소우희는 평춘왕 저택에서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데 아무도 그녀를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설마 지금까지 그녀에게 보여준 사랑과 관심이 전부 가짜란 말인가?소우희는 가치가 없어지니 헌신짝처럼 내버려진 자신의 신세가 소우연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우희야, 참아야 돼. 그래도 넌 지금 평춘 왕비잖아. 안주인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돼. 그게 여자의 삶이고 모든 여자들이 그렇게 살아왔어.”임진숙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막내 딸을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임진숙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그 고통을 대신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어머니, 정말 다른 방법이 없는 겁니까?”소우희가 임진숙을 보며 묻자 임진숙이 대답했다.“없어. 얼른 아이를 낳아야 너도 기댈 구석이 생기는 거야. 이러다가 나이가 많은 평춘왕이 어느 날 갑자기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아이를 낳으라고? 하지만 소우희는 결국 후처일 뿐이다. 더군다나 평춘왕은 소우희를 임신하게 만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으며 매번 합방을 하고 나면 소우희에게 피임 탕약을 먹였다.생각할수록 서러워진 소우희는 친정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기로 결정했다.하지만 이튿날, 소우희의 바람과 달리 평춘왕은 소우희를 데리러 직접 진원 장군 저택에 찾아왔다.이번에는 사위답게 선물까지 들고 왔지만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소홍범은 서재에 들어가 평춘왕을 만나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임진숙 혼자서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평춘왕을 보자마자 소우희가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어머니가 저를 하도 그리워하셔서 친정에 며칠만 더 있다가 돌아가도 되겠습니까?”그 말에
온몸을 덜덜 떨고 있던 소우희는 분노로 들끓고 있는 아버지의 눈빛을 보자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바로 이 순간, 오랫동안 마음속을 억누르고 있던 커다란 돌멩이가 드디어 사라진 듯 숨통이 트이기도 했다.“그럴 줄 알았어요. 다들 저를 버리려는 거잖아요. 저를 버리고 싶은 거잖아요…”소우희가 엉엉 울면서 말하자 소홍범은 손을 번쩍 치켜들었지만 결국 소우희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네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하는 것이냐!”소우희는 황급히 임진숙 품 안으로 파고 들었고 딸을 품에 안은 임진숙은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너무 아팠다.모든 면에서 훌륭하고 대견하던 아이가 어쩌다가 이런 처지가 됐을까!이때, 조용하게 서있던 소현준이 소홍범에게 말했다.“이 일을 형과 셋째 아우에게 얘기해야 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현재 산적을 소탕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집안일까지 신경 쓰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나중에 승리해서 돌아오면 그때 얘기하는 낫지 않겠습니까?”분통이 터진 소홍범은 가슴팍을 부여잡고는 소우희를 가리키며 물었다.“네가 우리에게 더 숨기는 것은 없느냐?”“없, 없습니다.”가여운 소우희의 모습에 소홍범은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 지금까지 사랑을 듬뿍 주고 애지중지 키운 딸이기에 소홍범도 더 이상 혼낼 수가 없었다.하지만 멀쩡하던 소씨 가문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소우희가 더는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넌 이제 평춘왕 저택으로 돌아가 평춘 왕비로 조용하게 살 거라.”말을 마친 소홍범은 하루아침에 10년은 늙은 듯 허리를 구부리고는 힘겹게 탁자를 잡고 일어섰고 초점도 잃은 채 넋이 나간 눈빛이었다.한편, 소우희는 아버지의 말에 너무도 서러웠다.“아버지, 제발 저를 내쫓지 말아주세요. 전 평춘왕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전…”“넌 이제 평춘 왕비의 신분이야.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혼인인데 돌아가지 않겠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하지만 평춘왕 그자는… 그 사람은…”
다만 소우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동시에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의 책임을 소우연에게 돌렸다.소우희가 서럽게 울고 있을 때, 소현준의 호위무사가 혜주를 데리고 대청에 나타났다.소현준이 혜주를 힐끗 쳐다보자 혜주는 바로 소우희가 지금까지 저지른 짓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술술 얘기하기 시작했고 마지막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소우희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아씨, 죄송합니다. 고문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소우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조금 전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지금쯤 감당할 수 없는 벌을 받았을 것이다.대청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헛기침을 몇 번 하던 소씨 노부인은 혜주와 소우희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는구나. 우리 가문에 어쩌다가 너 같은 멍청한 애가 태어난 것이냐!”노부인이 언성을 높이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곁에 있던 나인은 재빨리 노부인을 부축했다.“네 딸이니 네가 알아서 교육을 하거라!”노부인이 소홍범에게 말하자 안색이 어두워진 소홍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부인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네, 어머니.”숨을 크게 들이마신 소씨 노부인은 지금까지 두통 치료로 썼던 진정향을 자신이 제일 싫어하던 소우연이 조제했다는 사실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나중에 시간 나면 소우연 그 아이를 저택에 들라 하거라.”소씨 가문은 소우연에게 한번쯤은 확실하게 사과를 해야 한다.소씨 노부인은 지금까지 소우연이 소씨 가문의 저주라고 굳게 믿었는데 그 저주받은 아이가 자신에게 진정향을 조제해주고 군영에 치료약까지 조제해줬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뿐만 아니라 소현우가 예전에 전장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며칠동안 혼절 상태에 빠져 있었을 때에도 소우연이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란 말인가!“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가슴이 답답해진 노부인은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 화가 나서 기절할 것만 같았기에 나인의 부축을 받고 대청을 떠났다
딸의 뜻을 알아차린 임진숙은 서둘러 하인들에게 물러가라고 했다.그 뒤로 한참동안 엉엉 울던 소우희는 결국 모든 걸 사실대로 고백했고 임진숙은 너무 큰 충격에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넌 봉황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잖아. 네가 태어날 때 흠천감의 도사님이 직접 네 운명까지 점을 치셨는데 잘못됐을 리가 없어. 넌 어렸을 때 매일 의서를 곁에 두고 살았는데 어떻게 의술을 익히지 못했을 수가 있어?”“그 의서들은 하나같이 재미가 없어서 도무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어요.”“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면 안 되지!”“전 사람들을 속일 생각이 없었어요. 그때 당시 할머니 두통이 심해졌을 때 제가 의서를 많이 봤다고 저에게 두통을 고칠 수 있는 약을 지어오라고 하셨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약을 조제한다는 게 말도 안 되잖아요! 그러다가 나중에 소우연이 진정향을 조제해서 할머니께 드렸는데 할머니는 쳐다보지도 않으시고 버렸어요. 소우연이 그때 당시 할머니께서 나를 믿으시니 나더러 진정향을 할머니께 드리라고 했어요. 그 진정향은 예상보다 효과가 더욱 좋았고 그때부터 할머니께서는 그 진정향을 제가 조제했다고 확신하게 되신 거예요…”“그럼 나중에라도 사실을 밝혔어야지!”“그때 당시에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할머니께서 두통으로 고통을 덜 받았으면 하는 생각밖에 없었거든요.”임진숙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군영에서 쓰는 약들은 뭐야? 왜 네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은 것이야?”“그, 그 약들은… 어차피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은 소우연이 의술을 할 줄 안다는 걸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냥 제가 만들었다고 얘기한 거예요.”임진숙의 실망한 표정으로 보며 입술을 꽉 깨문 소우희는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어머니, 어머니까지 절 버리시면 전 정말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요. 어머니…”임진숙은 주먹으로 소우희의 등을 몇 번 때렸다.“바보 같은 계집애, 어떻게 이렇게 큰 사고를 칠 수가 있어!”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착했던 아
나중에 왕비를 들이고 나서도 계속 이 모양 이 꼴이었다.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본채 안을 쳐다보던 이지윤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소우희를 발견하자 이종대에게 버럭 화를 냈다.“아버지, 이젠 첩도 모자라서 왕비까지… 저 사람은 아버지가 이 집에 정식으로 들인 정실 부인입니다. 도대체 왕비를 몇 명이나 더 들여야 정신을 차리시겠습니까?”“지윤아, 네가 오해를 한 것이다.”이종대는 이지윤을 달래는 와중에 다급하게 손을 흔들며 손님들을 내쫓았다.“저기, 왕야, 저희는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말을 하던 두 사람은 급하게 저택을 나섰고 이종대도 대충 대답했다.“그래, 그래. 나중에 다시 보자고.”고개를 돌린 이종대는 아들이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자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지윤이 네가 아직 어려서 모르는 일들이 많아.”이지윤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모르는 일들이 많긴 무슨. 이 저택 안이 매일 조용하지 않으니 이지윤도 공부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어차피 꼴통 왕야로 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큰 죄를 짓지 않고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대충 살아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부자 두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서 밖으로 향했다.방 안은 순식간에 텅 비어 버렸다.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하인 두어 명을 보자 그제야 소우희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이종대 저자도 약점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네! 이지윤에게 저렇게 고분고분하다니!’멀어져가는 이지윤의 뒷모습을 보며 소우희의 마음속에 희망이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이지윤이 그녀를 이 지옥에서 구해줄 수 있을까?다음날.소우희는 시녀 두 명을 데리고 결국 진원 장군 저택으로 돌아왔다.너무 일찍 온 탓에 저택 안에는 소씨 노부인과 임진숙밖에 없었다.“할머니…”조심스럽게 입을 연 소우희는 노부인에게 큰절을 올렸다.식탁 앞에 앉아있던 노부인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어젯밤 소현준이 했던 말들이 떠오르자 머리가 지끈 아팠다.어젯밤, 소현준은 소씨 노부인에게 자신이 저번에
“연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냐? 그럼 조금 전에 했던 말도 진심이냐?”“당연히 진심이지요. 마음만 급하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특히 왕야께서는 4년 동안 거의 걷지 않으셨기에 더욱 천천히 적응해야 합니다.”“알겠다. 앞으로 연이 네 말을 잘 듣도록 할게.”잠시 고민하던 소우연이 말했다.“그럼 앞으로 매일 한 시간만 걷기 연습을 하십시오.”“그래.”휠체어에 앉은 이육진은 지팡이를 곁에 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우연이 말한 것처럼 마음만 급하다고 되는 일이 아니기에 소우연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했다.간단하게 목욕을 마친 뒤, 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약을 발라주고 침을 놓고 안마까지 해주었다.그러면서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기도 했다.이육진은 이민수가 얘기한 배꽃에 대해 생각하느라 정신이 팔려 소우연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왕야?”세 번째 부름에 겨우 정신을 번쩍 차린 이육진은 당황한 듯 물었다.“아, 그럼 소현준 그자는 왜 그냥 간 것이냐?”소우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저에게 소우희와 소씨 가문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차마 요구할 수가 없었겠지요.”“그래도 소씨 가문 나머지 사람들보다 자기 주제를 확실하게 알긴 아네.”이육진의 말에 소우연도 동의하듯 피식 웃었다.소현준은 소씨 가문의 유일한 장원 급제자로써 대리사경 일을 맡고 있었으며 소씨 가문에서 꽤 높은 지위를 자랑했다.만약 그때 당시 소현준이 소우연의 편에 들어 한 마디만 해주었다면 소우연은 소씨 가문에서 이렇게까지 처참한 대우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평춘왕 관저에서.만안당에서 큰 수모를 당한 소우희는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평춘왕 관저로 돌아왔고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손님 몇 명을 데리고 돌아온 평춘왕과 마주치게 되었다.화들짝 놀란 소우희는 말까지 더듬었다.“왕, 왕야…”“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왜 아직도 이 집에 있는 것이야?”평춘왕의 말에 소우희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친정에 갔다가 돌아온 겁니다.”“친정에 갔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