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그가 물었다. “평춘왕은?”소우희의 얼굴빛이 창백하게 질렸다.그때 임진숙이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볍게 누르며 소우희 대신 대답했다.“네가 아직 몰랐구나. 평춘왕의 병세가 심각해 네 동생 혼자서 왕부를 떠받들고 있단다.”“병세가 심각하다고요?”“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이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것 같더구나.” 임진숙은 짐작하는 말투였으나 소우희의 말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다.소한준은 비웃듯 웃으며, 소우희를 향해 독화살 같은 눈빛을 쏘았다.“소우희, 내가 처음 왔을 때 너는 뭐라 했지? 왕부에서 네가 힘도 없고 입지도 없으니 폐가에서 지내라며 나를 구석으로 몰아넣었지. 실상은 내가 귀찮고 성가셔서겠지. 내가 다쳤으니 곁에 두면 네가 의술 못 쓰는 게 들통날까 두렵고, 밤마다 아픈 내가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 네 잠을 방해할까 두려워서였겠지!”소우희가 억울한 듯 말했다. “아니에요, 오라버니, 그런 게 아니에요.”“다시는 날 오라버니라 부르지 마라! 정말 후회가 된다. 너만 아니었으면 내 우연이에게 그리 모질게 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후회도 소용없구나.”“저는…”소우희는 화가 치밀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과거 어머니도, 오라버니도, 아버지와 다른 오라버니들도 전부 다 자신만 좋아하지 않았던가.어째서 소우연이 태자빈이 된 이후로 사람들이 모두 달라졌단 말인가?‘두고 보십시오. 제가 훗날 태후가 되는 날, 여러분들이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지 참으로 기대가 되는군요!’“그만해라. 이제 네 오라버니는 누가 돌봐준단 말이냐?” 임진숙이 물었다.소우희가 손짓으로 아무 하인이나 불렀다.“앞으로 네가 오라버니를 잘 보살펴라. 만일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네 목숨은 없을 줄 알 거라.”하인은 부들부들 떨며 급히 고개를 숙였다. “예, 소인이 정성껏 모시겠습니다.”모든 것을 처리한 뒤, 임진숙은 그제야 안심하고 떠났다.소우희는 이미 소한준의 증오와 혐오 어린 눈빛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고, 더 이상 말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랬던 거군요.”이지윤은 소우희를 부드럽게 다독이며 위로했지만, 방 안에 널린 지저분한 파편들을 보고는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소우희의 성정이 이토록 괴팍할 줄은 미처 몰랐다.“그리고 그 개만도 못한 자식 말이에요,”“소우연이 왔을 때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려 했어요! 세자 저하, 이제 저 인간을 살려두면 안 됩니다!”소우희는 눈물을 닦으며 침상 위에서 증오의 눈초리로 그들을 쏘아보는 평춘왕 이종대를 가리켰다.“오늘 소우연이 이런 꼴을 보고 틀림없이 의심했을 겁니다. 만약 태자와 상의하여 사람을 보내 조사하기라도 하면, 우린 끝장이에요!”이지윤 역시 마음이 몹시 다급해졌으나, 얼굴에는 조금도 티를 내지 않고 침착하게 소우희를 바라봤다.‘이 여자… 교양이라곤 없고, 양심마저 결여되어 있구나. 정녕 하늘이 내린 ‘봉황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맞을까?’‘이런 사람이 과연 태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오늘 평춘왕부에서 벌어진 일은 너무도 심각했다. 소우희의 말대로, 소우연이 태자부로 돌아가면… 소우연은 오늘 일을 태자에게 이야기할 것이 분명했다.그렇게 된다면 평춘왕이 죽기 전이든 후든 간에, 그들은 반드시 이 사건을 빌미로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다.그는 지금껏 숨어 살며 어렵사리 목숨을 유지해왔다.그런데 이 귀한 인생을 고작 소우희 같은 여인 하나 때문에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이런 생각을 하며, 이지윤은 소우희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혔다.“개 같은 것들… 천벌을… 받을 것이다…!” 이종대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겨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바로 그 개 같은 놈이 아니 덥니까? 그때 왕비마마를, 또 첩실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이지윤이 차갑게 비웃었다.그는 다시 소우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그분들에게 인간 이하의 고통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아버지께서 당하는 모든 건 당연한 대가입니다.”소우희가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세자. 저 사람은
나인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뭐라고 했느냐?”“어느 의원이 낫게 해줬다고?”마차 안에 있던 임진숙은 더는 참지 못하고 마차 문을 열었다. 마부가 부축하자 서둘러 마차에서 내려왔다.소년이 당황하며 물었다. “지금… 뭘 하려는 겁니까?”임진숙이 온화한 척 웃으며 말했다. “꼬마야, 겁먹지 말거라.”그녀는 바닥에 던져진 동전들을 힐끗 보고 나인을 노려본 뒤, 얼른 미소를 지으며 나인을 시켜 은자 두 냥을 가져와 소년을 달랬다.“방금 네가 말하길 네 아버지 다리가 의원 덕에 이제 겨우 붙어 다시 걷게 되었다고 했느냐?”소년은 미간을 찌푸리며 끄덕였다. “예.”“그 의원이 누군지 말해줄 수 있겠느냐?”소년은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만안당의 의원이셨습니다. 아, 이제는 태자빈 마마가 되셨지요.”“태… 태자빈 마마?”임진숙은 입이 벌어진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소우연이 정말 다리를 고칠 줄 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그렇다면 태자 전하의 다리도 소우연이 고친 것이란 말인가?그러나 아직 그녀가 의심하고 있는 사이, 소년은 곁에 있는 중년 남자에게 물었다.“아버지, 걸을 수 있으시겠어요?”중년 남자가 조심스럽게 표정을 찡그리며, 소년의 부축을 받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입을 모았다.“태자빈 마마는 정말 살아있는 보살님이셔! 무료로 진찰도 해주시고, 약 값도 싸게 받으시고… 의술은 또 얼마나 뛰어나신지, 끊어진 다리 힘줄도 이으셨다잖아. 진짜 신의 시라니까!”“그것뿐인가? 태자 전하께서 회남왕이셨을 때 다리가 여러 해 불편하셨는데, 그걸 고친 것도 태자빈 마마 아니냐!”“우리 상운국에 또 신의가 나타나신 거지!”“태자 전하께서 정말 하늘이 내린 태자빈을을 얻으셨구나. 태자빈 마마가 아니었으면 전하께서는 아직도 자유롭게 걷지도 못하셨을 거야…”이런 온갖 소리가 임진숙과 나인의 귀에까지 그대로 들어왔다.그 사이 소년은 아버지를 부축하며 서서히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우희 걔는…”“그 애 얘긴 내 앞에서 꺼내지도 마라! 걔가 거짓말로 우리를 속이지만 않았어도 진원 장군부가 이 꼴이 됐겠느냐?“그 애가 중간에라도 정신 차리고 한준이에게 그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면, 어찌 한준이가 걔를 도와 우연이를 납치했겠느냐!”“그 애가 그런 짓만 벌이지 않았더라면, 한준이의 두 다리가 망가지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진숙은 입술을 깨물며 억울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아이를 저 혼자 낳은 것도 아닌데, 왜 죄다 나 혼자 책임지란 거예요…” 임진숙이 투덜거렸다.소홍범은 이를 갈며 말했다. “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어느 집안 안주인이 자식을 안 돌보는 사람이 있더냐?”그제야 임진숙은 입을 다물고 나인을 보며 말했다. “계속 말해봐라. 한준이 다리를 고칠 방법이 있지 않더냐.”나인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장안거리에서 만난 다리가 다친 사람을 태자빈 소우연이 치료했다는 일을 하나하나 자세히 전했다.“우연이가 치료할 수 있다고?”소홍범의 얼굴에 희망이 서렸다. 이틀 동안이나 사람을 시켜 유명 의원들을 수소문했지만, 힘줄이 끊어진 다리라는 소리를 듣고는 누구 하나 치료하겠다는 의원이 없었다.더욱이 요즘 조정 내에서 태자의 명성이 크게 높아졌는데도, 태자의 장인인 자신은 아무도 반기지 않았고, 큰아들과 둘째 아들 역시 조정에서 발붙이기조차 어려워졌다.몇 차례 이육진을 찾아가 관계를 좀 풀어보려 했으나, 이육진은 냉정하게 한 마디로 거절했다.“태자빈이 내게 분명히 말했소. 자신에겐 친정이 없다고 말이오.”“그러니 이 일은 진원 장군부가 태자빈에게 잘못한 것이고,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는 오직 태자빈의 뜻에 달려있소.”소홍범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우연이가 정말 독하게 마음을 먹었더구나. 내가 직접 태자부에 찾아가도 보지도 않으려 하였다.”임진숙이 말했다.“저도 하루종일 문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어요.”소홍범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는데, 자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체면 없이 버티고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던 소현우가 갑자기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연이가 딱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온 집안이 무릎 꿇고 빌어도 결코 마음을 돌리지 않을 거예요. 한준이 다리를 고쳐줄 생각은 애초에 없을 겁니다.”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서재 안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소현우가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시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한참 후에야 임진숙이 입을 열었다.“한준이가 평춘왕부에 있으니, 제가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소홍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당신이 다시 한번 태자부를 찾아가 간곡히 부탁해 보는 게 어떻겠소. 우리 부자 셋도 태자 전하께 간청해서 하루빨리 한준이를 데려오는 방법을 찾아보겠소.”방금 전 나인의 말을 들어보니, 소한준이 평춘왕부에서 얼마나 비참하게 지내는지 충분히 알 만했다. 소우희 그 아이는 정말이지 피도 눈물도 없는 아이였다!소홍범이 다시 무겁게 말을 이었다.“어찌 됐든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소. 한준이는 엄연한 장군인데, 두 다리를 못 쓰게 된 장군이 장군이라 할 수 있겠소?”“당신이 내일 다시 가서 부탁해 보고, 만약 거절당하면 모레 또 가고, 그래도 안 되면 매일 찾아가 보시오.”임진숙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었다.……소우연이 태자부로 돌아오자, 명심이 얼굴을 붉히며 천으로 싼 물건 하나를 건넸다.“이게 뭐냐?”소우연이 궁금해하며 포장을 풀었다. 명심은 볼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태감께서 태자빈 마마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태자 전하의 뜻이라고 전해달라고요.”“태자 전하?”책 표지를 보니 제목이 ‘품화보감’이었다. 처음 몇 장은 그저 미인을 칭송하는 시구뿐이라 괜찮았다. 그런데 조금 더 넘기자 남녀의 행동이 점점 애매모호하게 묘사되더니, 다음 장에선 아예 옷이 흐트러진 남녀가 서로 끌어안고 있는 노골적인 그림이 나타났다.“어머나!”소우연은 깜짝 놀라 책을 떨어뜨렸다.정연이 황급
소우연은 얼굴을 붉혔지만, 고개는 잊지 않고 끄덕였다.두 사람은 침실로 들어갔다. 정연이 책을 소우연의 베개 밑에 넣으며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께서 좀 더 마음을 쓰셔야 합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워낙 뛰어나시니, 앞으로 각 가문의 세력가들이 미인을 보내올 일이 많을 것입니다.”소우연의 뺨이 다시 붉어졌다. 이토록 좋은 사람이니, 앞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은 미녀들이 그에게 다가오겠지.그런 상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장차 이육진은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오직 자신만의 여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이렇게 생각하니 방금 받은 책 같은 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마마?”정연은 소우연의 표정이 어두워진 걸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그때 명심이 탕을 가져왔다.소우연은 반 그릇 정도만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육진에게 발라줄 약고가 다 떨어져 가는 걸 떠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별채로 가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해가 서쪽으로 지도록 약을 거의 다 완성했으나, 아직 이육진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저녁을 먹고 잠시 책을 보았으나 바깥 하늘은 이미 별이 가득했다.“전하께서는 아직 안 돌아오셨느냐?”소우연이 의서를 덮으며 작은 탁자 곁에 앉아 졸고 있던 정연에게 물었다.정연은 졸다가 소우연이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네, 아직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 제가 한번 나가서 확인해 볼까요?”정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소우연이 손을 들어 말렸다.“아니다, 됐다. 씻고 쉬자.”“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정연이 급히 다가와 보고했다.“마마, 방금 태자 전하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오늘 밤엔 궁에 머무시고 내일 돌아오신다고 하셨습니다.”“무슨 일이라도 있다더냐?”“그 말씀은 없었습니다.”“알겠다. 너희도 이제 쉬어라.”오늘 밤 돌아오지 않는다니…왜인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이육진을 보자마자 나인들이 서둘러 예를 올리려 했으나, 그가 손가락을 들어 작은 소리로 막았다.“태자빈은 아직 자고 있느냐?”정연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 시각까지 일어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평소 소우연은 잠이 많긴 했지만, 이렇게 정오까지 자는 일은 없었다.정연이 어젯밤 소우연이 갑자기 놀라 깬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전했다.이육진은 순간 말이 없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음식을 정연에게 건네주며 말했다.“부엌에 가져가 따뜻하게 데워두거라.”“예, 전하.”이육진은 가볍게 방문을 밀고 들어갔다.그는 침상 위에서 잠든 소우연을 깨우지 않으려 발걸음마저 조심스러웠다.어젯밤, 황제는 그를 궁에 남게 하고는 한 가지 약속을 요구했다.장차 그가 황제가 되면, 덕빈을 태후로 책봉해서는 안 되며, 오직 태비로만 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이육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누구나 황제가 덕빈을 가장 아낀다는 것을 아는데, 어째서 태후의 자리를 덕빈에게 주지 않는 것일까.심지어 앞으로 그가 황위에 오르더라도, 결코 덕빈을 태후로 삼아서는 안 된다니.황제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그를 어서 결단을 내리라며 어서 돌아가도 좋다고 하였다.이육진은 밤새도록 이 문제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정신을 차렸을 때는 날이 환히 밝았고, 이미 조회도 한참 전에 시작된 뒤였다.그에게 과연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황제의 말을 따른다면 온 상운국 백성들이 그를 욕할 것이고, 따르지 않는다면 황제의 명을 어기게 되니, 진퇴양난이 따로 없었다.그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소우연의 아름다운 얼굴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녀는 늘 소우희와 이민수가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했다. 심지어 꿈에서도 늘 불안해하는 아이였다.그때 문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태자 전하께서는 아직 서재에 계십니까?”덕빈 곁에 있는 기 나인의 목소리였다.문밖의 내시가 바로 대답했다. “예, 아직 계십니다.”기 나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태자 전하, 덕빈 마마께서 전하를 단
이육진은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다가, 목이 쉰 듯 낮게 속삭였다.“별로 좋지 않았다.”“무슨 일입니까?” 소우연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그의 손을 부드럽게 주물러 주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던 거예요?”“지금 당장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그럼,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녀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사실 저도 당장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일이 있거든요.”이육진은 작게 웃으며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그렇다면 우리 이렇게 약속하자. 서로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정리되면 그때 함께 말하기로.”“좋아요.” 소우연은 망설임 없이 바로 수락했다.“네.”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옷을 벗고 침상으로 올라가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사실 이육진은 오래전부터 소우연이 자신에게 숨기는 비밀이 있음을 느꼈다.그녀가 먼저 말하지 않는다면 굳이 묻지 않았다.게다가 지금은 자기 자신조차 궁에 있었던 일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모든 일의 시작은 어쩌면 두 분이 혼인했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르지만, 그토록 오래전의 일이라 어디서부터 조사해야 할지조차 막막했다.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것을 보고 소우연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이육진은 그녀의 손을 잡아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난 괜찮아.”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부군, 아침은 드셨어요?”이육진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을 정도로 피곤했지만, 우연이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았을 생각에 이내 간석을 불렀다.“부르셨습니까, 전하.”밖에서 기다리던 간석이 곧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상을 들이거라.”“예, 전하.”간석이 물러나자, 정연과 명심 등 나인들이 곧바로 들어와 두 사람의 세수를 도왔다.함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난 뒤, 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좀 쉬라고 권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우연아, 나랑 조금만 더 자자.”그녀는 잠시 말을
소우희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마침 침상 위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던 이종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씁쓸하게 비웃으며 말했다.“그러게 일찍이 죽지 그러셨어요.”하지만 평춘왕을 직접 죽일 생각은 없었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서둘러 목욕탕으로 가서 몸에 묻은 피를 깨끗이 씻었다. 방으로 다시 돌아온 후, 소우희는 사람을 시켜 혜주를 데려오게 했다.난장판이 된 방 안은 시녀들이 깨끗하게 정리해 놓았지만, 공기 중에 가득 퍼진 피비린내는 숨길 수가 없었다.혜주는 잔뜩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소우희는 주변 사람들을 전부 물러가게 한 뒤, 갑자기 그녀를 껴안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아아아…”혜주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고 그저 소우희의 등을 살살 두드리며 달래주었다. 소우희의 공포와 무력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소우희는 한참이나 울고 나서야 혜주의 손을 붙잡고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어머니와 셋째 오라버니가 자신에게 얼마나 실망했는지도 전부 말했다.혜주는 찡그린 채 그 마음에 깊이 공감했다.과거에 소우희가 잘 나갈 때는 그녀도 덩달아 영광을 누렸지만, 지금처럼 소우희가 몰락하니 그녀 역시 처참해졌던 것이다.“이 모든 게 다 소우연 때문이야.”소우희는 중얼거리며 미친 듯이 자신의 목과 얼굴을 긁었다. 얼굴에는 금세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생겼다.혜주는 놀라서 과감히 소우희의 손을 붙잡았다. 더 긁으면 얼굴을 망치고 말 거라고 온 힘을 다해 말리고 싶었지만, 혀가 잘린 탓에 그저 급하게 ‘아아’ 소리만 낼 뿐이었다.“혜주야, 나… 나 정말 느낌이 안 좋아…”“나 너무 두려워.”“누가 날 해칠 것만 같아. 소우연이 내 목숨을 노리고 있어. 내가 알던 소우연이 아니야, 너무 독해졌다고!”소우희는 횡설수설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좋지 않은 예감이 마치 거대한 산처럼 그녀의 가슴을 짓눌러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혜주야, 이러다 정말 죽을지도 몰라…” 소우희의 눈에는 공포만 가득했다.“아버지, 어머니,
몇 바퀴를 더 산책한 후, 소우연은 이육진의 다리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부군의 다리는 앞으로 무리만 하지 않으시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이육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그럼 예전처럼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까?”그의 깊고 검은 눈동자는 소우연을 간절히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기색이 보일까 봐 불안해하는 눈빛이었다.“물론이죠.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내가 묻는 건… 완전히 예전처럼 무공을 다시 익힐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는 걸 말하는 거야.”소우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가능해요. 하지만 무공 수련은 내년 봄이 지나고 난 후부터 하시는 게 좋겠어요.”내년 봄이라…그때까지는 아직 반년 정도 남아 있었다.하늘엔 달이 뜨고, 별들이 밤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정연이 등롱을 들고 조용히 다가와 길을 밝혔다.소우연은 이육진이 너무 오래 걷다가 피곤할까 봐 걱정돼 곧장 본채로 돌아왔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이튿날.소우연이 일어났을 때는 이육진이 이미 조정으로 조회를 나간 뒤였다.아침 식사를 하면서 소우연은 일부러 한 번 물어보았다.“어머니께서 오늘 또 왔느냐?”정연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안 오셨습니다.”잠시 생각한 뒤 정연이 다시 말을 이었다.“어쩌면 앞으로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소우연은 고개를 흔들었다.“분명 다시 올 거다. 오늘 오지 않은 건 평춘왕부에 가서 소한준을 장군부로 데려오는 문제로 바빴기 때문일 거다.”정연이 깜짝 놀랐다.“앞으로 매일 와서 마마를 귀찮게 하시면 어떡하죠?”“그러니 다음번엔 그냥 뒷문을 열어주고, 앞으로 올 때마다 뒷문으로 들어와 별채에서 기다리라고 전하거라.”정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될 듯했다.……평춘왕부.평춘왕 이종대는 이미 하루 종일 물 한 모금조차 넘기지 못했다.그의 입술은 메마르고 갈라져 창백했고, 옅은 핏자국만 희미하게 보였다. 온몸에서 죽음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육진은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다가, 목이 쉰 듯 낮게 속삭였다.“별로 좋지 않았다.”“무슨 일입니까?” 소우연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그의 손을 부드럽게 주물러 주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던 거예요?”“지금 당장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그럼,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녀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사실 저도 당장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일이 있거든요.”이육진은 작게 웃으며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그렇다면 우리 이렇게 약속하자. 서로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정리되면 그때 함께 말하기로.”“좋아요.” 소우연은 망설임 없이 바로 수락했다.“네.”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옷을 벗고 침상으로 올라가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사실 이육진은 오래전부터 소우연이 자신에게 숨기는 비밀이 있음을 느꼈다.그녀가 먼저 말하지 않는다면 굳이 묻지 않았다.게다가 지금은 자기 자신조차 궁에 있었던 일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모든 일의 시작은 어쩌면 두 분이 혼인했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르지만, 그토록 오래전의 일이라 어디서부터 조사해야 할지조차 막막했다.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것을 보고 소우연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이육진은 그녀의 손을 잡아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난 괜찮아.”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부군, 아침은 드셨어요?”이육진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을 정도로 피곤했지만, 우연이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았을 생각에 이내 간석을 불렀다.“부르셨습니까, 전하.”밖에서 기다리던 간석이 곧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상을 들이거라.”“예, 전하.”간석이 물러나자, 정연과 명심 등 나인들이 곧바로 들어와 두 사람의 세수를 도왔다.함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난 뒤, 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좀 쉬라고 권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우연아, 나랑 조금만 더 자자.”그녀는 잠시 말을
이육진을 보자마자 나인들이 서둘러 예를 올리려 했으나, 그가 손가락을 들어 작은 소리로 막았다.“태자빈은 아직 자고 있느냐?”정연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 시각까지 일어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평소 소우연은 잠이 많긴 했지만, 이렇게 정오까지 자는 일은 없었다.정연이 어젯밤 소우연이 갑자기 놀라 깬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전했다.이육진은 순간 말이 없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음식을 정연에게 건네주며 말했다.“부엌에 가져가 따뜻하게 데워두거라.”“예, 전하.”이육진은 가볍게 방문을 밀고 들어갔다.그는 침상 위에서 잠든 소우연을 깨우지 않으려 발걸음마저 조심스러웠다.어젯밤, 황제는 그를 궁에 남게 하고는 한 가지 약속을 요구했다.장차 그가 황제가 되면, 덕빈을 태후로 책봉해서는 안 되며, 오직 태비로만 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이육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누구나 황제가 덕빈을 가장 아낀다는 것을 아는데, 어째서 태후의 자리를 덕빈에게 주지 않는 것일까.심지어 앞으로 그가 황위에 오르더라도, 결코 덕빈을 태후로 삼아서는 안 된다니.황제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그를 어서 결단을 내리라며 어서 돌아가도 좋다고 하였다.이육진은 밤새도록 이 문제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정신을 차렸을 때는 날이 환히 밝았고, 이미 조회도 한참 전에 시작된 뒤였다.그에게 과연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황제의 말을 따른다면 온 상운국 백성들이 그를 욕할 것이고, 따르지 않는다면 황제의 명을 어기게 되니, 진퇴양난이 따로 없었다.그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소우연의 아름다운 얼굴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녀는 늘 소우희와 이민수가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했다. 심지어 꿈에서도 늘 불안해하는 아이였다.그때 문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태자 전하께서는 아직 서재에 계십니까?”덕빈 곁에 있는 기 나인의 목소리였다.문밖의 내시가 바로 대답했다. “예, 아직 계십니다.”기 나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태자 전하, 덕빈 마마께서 전하를 단
소우연은 얼굴을 붉혔지만, 고개는 잊지 않고 끄덕였다.두 사람은 침실로 들어갔다. 정연이 책을 소우연의 베개 밑에 넣으며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께서 좀 더 마음을 쓰셔야 합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워낙 뛰어나시니, 앞으로 각 가문의 세력가들이 미인을 보내올 일이 많을 것입니다.”소우연의 뺨이 다시 붉어졌다. 이토록 좋은 사람이니, 앞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은 미녀들이 그에게 다가오겠지.그런 상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장차 이육진은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오직 자신만의 여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이렇게 생각하니 방금 받은 책 같은 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마마?”정연은 소우연의 표정이 어두워진 걸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그때 명심이 탕을 가져왔다.소우연은 반 그릇 정도만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육진에게 발라줄 약고가 다 떨어져 가는 걸 떠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별채로 가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해가 서쪽으로 지도록 약을 거의 다 완성했으나, 아직 이육진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저녁을 먹고 잠시 책을 보았으나 바깥 하늘은 이미 별이 가득했다.“전하께서는 아직 안 돌아오셨느냐?”소우연이 의서를 덮으며 작은 탁자 곁에 앉아 졸고 있던 정연에게 물었다.정연은 졸다가 소우연이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네, 아직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 제가 한번 나가서 확인해 볼까요?”정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소우연이 손을 들어 말렸다.“아니다, 됐다. 씻고 쉬자.”“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정연이 급히 다가와 보고했다.“마마, 방금 태자 전하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오늘 밤엔 궁에 머무시고 내일 돌아오신다고 하셨습니다.”“무슨 일이라도 있다더냐?”“그 말씀은 없었습니다.”“알겠다. 너희도 이제 쉬어라.”오늘 밤 돌아오지 않는다니…왜인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던 소현우가 갑자기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연이가 딱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온 집안이 무릎 꿇고 빌어도 결코 마음을 돌리지 않을 거예요. 한준이 다리를 고쳐줄 생각은 애초에 없을 겁니다.”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서재 안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소현우가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시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한참 후에야 임진숙이 입을 열었다.“한준이가 평춘왕부에 있으니, 제가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소홍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당신이 다시 한번 태자부를 찾아가 간곡히 부탁해 보는 게 어떻겠소. 우리 부자 셋도 태자 전하께 간청해서 하루빨리 한준이를 데려오는 방법을 찾아보겠소.”방금 전 나인의 말을 들어보니, 소한준이 평춘왕부에서 얼마나 비참하게 지내는지 충분히 알 만했다. 소우희 그 아이는 정말이지 피도 눈물도 없는 아이였다!소홍범이 다시 무겁게 말을 이었다.“어찌 됐든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소. 한준이는 엄연한 장군인데, 두 다리를 못 쓰게 된 장군이 장군이라 할 수 있겠소?”“당신이 내일 다시 가서 부탁해 보고, 만약 거절당하면 모레 또 가고, 그래도 안 되면 매일 찾아가 보시오.”임진숙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었다.……소우연이 태자부로 돌아오자, 명심이 얼굴을 붉히며 천으로 싼 물건 하나를 건넸다.“이게 뭐냐?”소우연이 궁금해하며 포장을 풀었다. 명심은 볼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태감께서 태자빈 마마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태자 전하의 뜻이라고 전해달라고요.”“태자 전하?”책 표지를 보니 제목이 ‘품화보감’이었다. 처음 몇 장은 그저 미인을 칭송하는 시구뿐이라 괜찮았다. 그런데 조금 더 넘기자 남녀의 행동이 점점 애매모호하게 묘사되더니, 다음 장에선 아예 옷이 흐트러진 남녀가 서로 끌어안고 있는 노골적인 그림이 나타났다.“어머나!”소우연은 깜짝 놀라 책을 떨어뜨렸다.정연이 황급
“우희 걔는…”“그 애 얘긴 내 앞에서 꺼내지도 마라! 걔가 거짓말로 우리를 속이지만 않았어도 진원 장군부가 이 꼴이 됐겠느냐?“그 애가 중간에라도 정신 차리고 한준이에게 그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면, 어찌 한준이가 걔를 도와 우연이를 납치했겠느냐!”“그 애가 그런 짓만 벌이지 않았더라면, 한준이의 두 다리가 망가지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진숙은 입술을 깨물며 억울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아이를 저 혼자 낳은 것도 아닌데, 왜 죄다 나 혼자 책임지란 거예요…” 임진숙이 투덜거렸다.소홍범은 이를 갈며 말했다. “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어느 집안 안주인이 자식을 안 돌보는 사람이 있더냐?”그제야 임진숙은 입을 다물고 나인을 보며 말했다. “계속 말해봐라. 한준이 다리를 고칠 방법이 있지 않더냐.”나인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장안거리에서 만난 다리가 다친 사람을 태자빈 소우연이 치료했다는 일을 하나하나 자세히 전했다.“우연이가 치료할 수 있다고?”소홍범의 얼굴에 희망이 서렸다. 이틀 동안이나 사람을 시켜 유명 의원들을 수소문했지만, 힘줄이 끊어진 다리라는 소리를 듣고는 누구 하나 치료하겠다는 의원이 없었다.더욱이 요즘 조정 내에서 태자의 명성이 크게 높아졌는데도, 태자의 장인인 자신은 아무도 반기지 않았고, 큰아들과 둘째 아들 역시 조정에서 발붙이기조차 어려워졌다.몇 차례 이육진을 찾아가 관계를 좀 풀어보려 했으나, 이육진은 냉정하게 한 마디로 거절했다.“태자빈이 내게 분명히 말했소. 자신에겐 친정이 없다고 말이오.”“그러니 이 일은 진원 장군부가 태자빈에게 잘못한 것이고,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는 오직 태자빈의 뜻에 달려있소.”소홍범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우연이가 정말 독하게 마음을 먹었더구나. 내가 직접 태자부에 찾아가도 보지도 않으려 하였다.”임진숙이 말했다.“저도 하루종일 문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어요.”소홍범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는데, 자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체면 없이 버티고
나인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뭐라고 했느냐?”“어느 의원이 낫게 해줬다고?”마차 안에 있던 임진숙은 더는 참지 못하고 마차 문을 열었다. 마부가 부축하자 서둘러 마차에서 내려왔다.소년이 당황하며 물었다. “지금… 뭘 하려는 겁니까?”임진숙이 온화한 척 웃으며 말했다. “꼬마야, 겁먹지 말거라.”그녀는 바닥에 던져진 동전들을 힐끗 보고 나인을 노려본 뒤, 얼른 미소를 지으며 나인을 시켜 은자 두 냥을 가져와 소년을 달랬다.“방금 네가 말하길 네 아버지 다리가 의원 덕에 이제 겨우 붙어 다시 걷게 되었다고 했느냐?”소년은 미간을 찌푸리며 끄덕였다. “예.”“그 의원이 누군지 말해줄 수 있겠느냐?”소년은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만안당의 의원이셨습니다. 아, 이제는 태자빈 마마가 되셨지요.”“태… 태자빈 마마?”임진숙은 입이 벌어진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소우연이 정말 다리를 고칠 줄 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그렇다면 태자 전하의 다리도 소우연이 고친 것이란 말인가?그러나 아직 그녀가 의심하고 있는 사이, 소년은 곁에 있는 중년 남자에게 물었다.“아버지, 걸을 수 있으시겠어요?”중년 남자가 조심스럽게 표정을 찡그리며, 소년의 부축을 받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입을 모았다.“태자빈 마마는 정말 살아있는 보살님이셔! 무료로 진찰도 해주시고, 약 값도 싸게 받으시고… 의술은 또 얼마나 뛰어나신지, 끊어진 다리 힘줄도 이으셨다잖아. 진짜 신의 시라니까!”“그것뿐인가? 태자 전하께서 회남왕이셨을 때 다리가 여러 해 불편하셨는데, 그걸 고친 것도 태자빈 마마 아니냐!”“우리 상운국에 또 신의가 나타나신 거지!”“태자 전하께서 정말 하늘이 내린 태자빈을을 얻으셨구나. 태자빈 마마가 아니었으면 전하께서는 아직도 자유롭게 걷지도 못하셨을 거야…”이런 온갖 소리가 임진숙과 나인의 귀에까지 그대로 들어왔다.그 사이 소년은 아버지를 부축하며 서서히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그랬던 거군요.”이지윤은 소우희를 부드럽게 다독이며 위로했지만, 방 안에 널린 지저분한 파편들을 보고는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소우희의 성정이 이토록 괴팍할 줄은 미처 몰랐다.“그리고 그 개만도 못한 자식 말이에요,”“소우연이 왔을 때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려 했어요! 세자 저하, 이제 저 인간을 살려두면 안 됩니다!”소우희는 눈물을 닦으며 침상 위에서 증오의 눈초리로 그들을 쏘아보는 평춘왕 이종대를 가리켰다.“오늘 소우연이 이런 꼴을 보고 틀림없이 의심했을 겁니다. 만약 태자와 상의하여 사람을 보내 조사하기라도 하면, 우린 끝장이에요!”이지윤 역시 마음이 몹시 다급해졌으나, 얼굴에는 조금도 티를 내지 않고 침착하게 소우희를 바라봤다.‘이 여자… 교양이라곤 없고, 양심마저 결여되어 있구나. 정녕 하늘이 내린 ‘봉황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맞을까?’‘이런 사람이 과연 태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오늘 평춘왕부에서 벌어진 일은 너무도 심각했다. 소우희의 말대로, 소우연이 태자부로 돌아가면… 소우연은 오늘 일을 태자에게 이야기할 것이 분명했다.그렇게 된다면 평춘왕이 죽기 전이든 후든 간에, 그들은 반드시 이 사건을 빌미로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다.그는 지금껏 숨어 살며 어렵사리 목숨을 유지해왔다.그런데 이 귀한 인생을 고작 소우희 같은 여인 하나 때문에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이런 생각을 하며, 이지윤은 소우희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혔다.“개 같은 것들… 천벌을… 받을 것이다…!” 이종대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겨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바로 그 개 같은 놈이 아니 덥니까? 그때 왕비마마를, 또 첩실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이지윤이 차갑게 비웃었다.그는 다시 소우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그분들에게 인간 이하의 고통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아버지께서 당하는 모든 건 당연한 대가입니다.”소우희가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세자. 저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