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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작가: 주 한잔

제1화

작가: 주 한잔
“안 돼!”

극심한 통증에 소우연은 큰소리로 외치며 눈을 번쩍 떴다.

소우연 앞에 펼쳐진 건 화려하게 꾸며진 방이었으며 향초가 불에 타고 있는 소리가 들렸고 은은한 향도 퍼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온몸을 괴롭히던 통증도 전부 사라진 것만 같았다.

소우연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방을 쓱 훑어보았고 단번에 이 방이 신혼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고개를 숙여보니 자신은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

이 혼례복은 소우연이 쌍둥이 여동생 소우희를 위해 3년에 거쳐 직접 만든 혼례복이었는데 결국 소우연이 이 혼례복을 입고 시집가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소우연의 결혼 상대는 악명이 자자한 회남왕 이육진이다.

상운국에서 명망 높은 전쟁의 신이었던 이육진은 3년 전 전쟁에서 부하에게 배신을 당해 위험한 상황에 처했었다. 결국 목숨 걸고 싸워서 위험한 상황을 벗어났지만 그 과정에서 온몸의 신경들이 전부 잘려 폐인이 되고 말았다.

그 뒤로 이육진은 성격이 난폭해지기 시작했으며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노비와 시녀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해하기도 했다.

황제가 이육진에게 혼인을 몇 차례나 하사했지만 신부들은 혼사를 치른 이튿날 바로 싸늘한 주검이 되어 회남왕 관저 밖에 버려졌다.

그러다가 한 달 전, 이육진의 모친 덕빈은 황제 앞에서 난동을 부리며 다시 한번 혼인을 하사해달라고 했고 그 상대가 바로 진원 장군 가문의 둘째 딸 소우희였다.

어렸을 때부터 소우희를 애지중지 키운 소씨 가문에서는 당연히 사랑하는 딸을 이육진에게 보낼 수 없었기에 결국 소우연이 쌍둥이 여동생 대신 이육진과 혼인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소우연은 오래 전부터 연모하는 사내가 있었으며 어렸을 때부터 함께 큰 두 사람은 혼인을 약속한 사이이기도 했다.

때문에 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시집을 가기 싫었고 더군다나 회남왕에 관한 소문이 너무 흉흉한 탓에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혼사가 이뤄진 당일 날, 소우연은 소우희의 꼬드김에 넘어가 결국 도망을 결심하게 되었는데 멀리 도망치기도 전에 다시 잡혀오게 되었다.

크게 노한 덕빈은 소우연의 사지를 부러트린 뒤, 그녀를 소씨 저택 대문 앞에 던져 버렸다.

소우연은 가족들이 자신을 집에 데리고 가서 상처를 치료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바람과 달리 소씨 저택의 대문은 끝까지 굳게 닫혀 있었으며 아무도 나와보지 않았다.

그렇게 살을 에이는 듯한 겨울 바람에 온몸에 상처까지 심각했던 소우연은 결국 대문 밖에서 얼어 죽고 말았지만 소씨 가문에서는 그녀가 죽고 나서 시체를 거둬가지도 않았다.

소우연은 죽는 순간이 되어서야 자신은 그저 소설 속의 하찮은 조연이고 자신의 쌍둥이 여동생은 소설 속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여자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때문에 소우연은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쳐도 소씨 가문 사람들은 절대 그녀에게 신경 쓸 리가 없었으며 그녀는 그저 소우희 대신 희생하기 위해 존재한 사람이었다.

한편,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소우연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침대에 멍하니 앉아 예전의 기억들을 되돌려보고 있었다.

소설 속 내용에 의하면 이육진은 최대 악역이다. 얼굴이 망가지고 몸 전체가 폐인이 된 탓에 이육진은 성격이 변태적이고 포악했으며 소설 속 남녀 주인공들을 괴롭히다가 결국 처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어있다.

소우연은 이육진을 생각하면 조금 안타깝기도 했다. 명성이 자자한 전쟁의 신이 결국 그런 최후를 맞이하다니. 그의 인생도 소우연 못지 않게 불행하고 처참했다.

소우연과 소우희는 모친 뱃속에 있을 때부터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 점쟁이는 소우희가 귀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날 아이이고 이와 반대로 소우연은 태어나는 순간 소씨 가문에 불행을 불러올 거라고 했다.

점쟁이가 말한 것처럼 소우연이 태어난 뒤로 소씨 가문에는 사건 사고들이 유난히 많았기에 가문 사람들은 점쟁이 말을 굳게 믿은 채 소우연을 홀시하고 냉대했다.

소우연은 평생 소씨 가문을 위해 희생했지만 결국 대문 앞에서 처참한 죽음을 당했고 심지어 시체 일부가 들개들에게 먹혔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결국 소우연의 시체를 거둔 사람은 이육진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방 문이 열렸고 휠체어에 탄 남자가 덤덤한 표정으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혼례복을 입고 있는 이 남자의 얼굴은 절반 이상이 심각한 화상을 입었고 화상을 입지 않은 반대쪽 얼굴에는 어마 무시한 칼자국 흉터가 나 있었다.

그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공포스러웠다.

살짝 겁을 먹은 소우연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옷을 꽉 잡은 채 조심스럽게 이육진의 눈치를 살폈다.

이번 생에는 절대 섣불리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회남왕 관저에서 도망치는 순간, 소우연은 또다시 처참한 죽음을 당하게 된다.

덕빈은 아들 이육진을 그 누구보다 걱정했기에 아들을 모욕하는 사람은 절대 가만두지 않았다.

소우연은 이제 이육진이 떠도는 소문처럼 성격이 그리 난폭하지 않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그만 물러가거라.”

낮게 깔린 이육진의 목소리에 뒤에 서있던 호위무사는 소우연을 경계하듯 쳐다보다가 이내 돌아서서 방을 나섰다.

그렇게 방 안에는 이육진과 소우연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소우연은 조금 긴장이 되긴 했지만 사실 이육진이 그리 무섭지는 않았다. 전생에 그녀의 시체를 거둔 것으로만 봐도 이육진은 소문처럼 그렇게 악마 같은 사람은 아닐 것이다.

“소인이 시중을 들어도…”

잔뜩 긴장한 소우연은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 모습에 이육진은 소우연의 말을 끊으며 담담하게 물었다.

“내가 무서워?”

“아닙니다. 소인은… 소인은 그저 조금 긴장이 돼서…”

말까지 더듬는 소우연을 보며 이육진이 피식 웃음을 보였다.

“당연히 내가 무섭겠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안 무서운 게 더 이상하지 않겠어?”

소우연은 고개를 살짝 들어 이육진을 힐끗 쳐다보았다.

얼굴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심하게 망가졌지만 치료가 안 될 정도는 아니었다.

어렸을 때 소우희가 장난을 치다가 화상을 입게 되었는데 그때 당시 가족들은 세상이 무너진 듯 엉엉 울면서 발만 동동 굴렀고 소우연은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밤낮없이 치료제를 연구했었다.

그 결과, 흉터 치료에 효과가 매우 훌륭한 약을 조제해냈고 덕분에 소우희는 몸에 난 화상 흉터가 깔끔하게 없어졌다.

이육진의 흉터가 소우희보다 훨씬 심각하지만 그래도 흉터가 꽤 많이 치료될 수는 있을 것이다.

소우연이 침대에서 내려와 이육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하지만 손이 휠체어에 닿기도 전에 이육진이 소우연의 손을 툭 밀쳐냈고 화들짝 놀란 소우연은 얼른 해명했다.

“소인에게 나쁜 의도는 없습니다. 이제 밤도 깊었는데 왕야께서도 이만 쉬셔야 할 것 같아서 도와드리려고 한 것뿐입니다.”

이육진은 말없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소우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그 눈빛에 소우연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서 이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소씨 가문에서 큰 결심을 했네.”

코웃음을 치던 이육진은 직접 휠체어를 끌고 침대 곁으로 가더니 두 손으로 휠체어 손잡이를 툭 쳤다.

다음 순간, 허공 위로 날아오른 이육진은 손바닥을 빠르게 앞으로 뻗었고 그대로 침대 위에 완벽하게 착지했다.

소우연은 그런 이육진을 보며 너무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이육진은 완전히 폐인이 된 게 아니었어! 두 다리는 더 이상 쓰지 못하지만 무술 실력은 여전히 대단해! 그럼 지금까지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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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2화

    소우연은 침대에 누운 이육진을 보며 한참동안 넋이 나간 표정을 짓다가 자신도 저 침대에 올라가야 하나 망설여졌다.이육진의 태도로 보면 소우연과 잠자리를 가질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지만 내일 아침 덕빈이 시녀를 보내어 가채를 살펴보고 두 사람이 합방하지 않은 걸 발견하면 소우연을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올라와.”소우연이 이런저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침대에 누워 있던 이육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고 움찔한 소우연은 자신의 옷을 꽉 잡고 있다가 우물쭈물하며 다가갔다.소우연이 침대에 스스로 올라가려던 그때, 이육진이 갑자기 돌아눕더니 손을 뻗어 방 안을 비추던 초를 꺼버렸고 이내 방 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다음 순간, 소우연의 손목을 덥석 잡은 이육진은 그대로 확 잡아당겼고 화들짝 놀란 소우연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순식간에 침대 위로 올라와 이육진 품에 와락 안기게 되었다.보기보다 훨씬 튼튼한 이육진의 몸매에 소우연은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소리 질러.”이육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고 소우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들었다.하지만 바로 이때, 이육진이 손을 뻗어 소우연의 허리끈을 확 풀어헤쳤고 소우연이 반응을 하기도 전에 빠르게 그녀의 옷을 벗겼으며 결국 내의밖에 남지 않았다.“악!”화들짝 놀란 소우연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가슴을 가렸고 찬바람이 느껴지자 온몸을 덜덜 떨었다.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의 허리를 손으로 꽉 쥔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난 네 몸에 손대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알아서 큰소리로 신음소리를 내.”한 번도 신음소리를 낸 적이 없는 소우연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계속 망설였다가 이육진이 직접 나설까 봐 걱정이 된 소우연은 가까스로 입을 열어 소리를 냈다.한편, 소우연의 나른한 목소리에 이육진은 미간을 확 찌푸렸고 냉랭하고 덤덤하게 다시 말했다.“멈추지 말고 계속해.”소우연은 너무 억울하고 서러웠지만 그만큼 살고 싶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최소한 이육진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화

    “이 약은 상처 치료에 꽤 효과가 좋습니다. 제가 얼른 상처에 발라드리겠습니다.”소우연은 하얀 고약을 손가락에 조금 묻혀 이육진의 상처에 발라주었고 손가락에서 통증이 살짝 느껴진 이육진은 고개를 숙여 소우연을 빤히 쳐다보았다.고개를 푹 숙인 채 상처를 꼼꼼하게 살피던 소우연은 본능적으로 입을 삐죽 내민 채 상처에 바람을 후후 불었다가 자신이 실례를 범했다는 생각에 재빨리 입을 꾹 닫았다.한편, 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을 보며 왠지 기억 속에 있던 그 사람이 떠올랐고 특히 소우연이 발라준 이 고약은…조금 뒤, 소우연은 휠체어에 탄 이육진을 모시고 덕빈에게 인사를 올리러 갔다.황제께서 이육진의 혼사를 잘 마무리 지으라고 덕빈을 회남왕 관저에 3일 머무를 수 있게 허락했다.소우연은 이육진의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덕빈이 머무른 방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신혼방을 떠나자마자 나인 한 명이 몰래 신혼방으로 들어가 침대보에 묻은 핏자국을 확인한 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떠났다.소우연과 이육진이 덕빈이 머무른 방에 도착했을 때, 신혼방에 들어가 핏자국을 확인하던 나인이 두 사람보다 먼저 와있었고 덕빈의 방 안에 들어가 덕빈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었다. 그러자 덕빈은 만족스럽게 피식 웃었다.“소인 덕빈 마마께 인사를 올립니다.”덕빈 앞에 서서 잔뜩 긴장한 소우연은 손바닥에 땀이 잔뜩 맺혔다. 소우연은 자신이 혹시라도 말실수를 저질러서 덕빈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할까 봐 너무 두려웠다.한편, 덕빈은 몸을 잔뜩 움츠린 소우연을 힐끔 쳐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이육진에게 돌렸다. 이육진은 표정이 덤덤했지만 조금 전 소우연이 인사를 할 때 본능적으로 소우연을 쳐다보았기에 그래도 자신의 부인을 신경 쓴다는 뜻이다.“고개를 들고 가까이 오너라. 네 얼굴을 자세하게 보고 싶구나.”덕빈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소우연은 덕빈이 혹시라도 수상한 낌새를 눈치챌까 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소씨 가문에서 아무도 모르게 소우희 대신 소우연을 이육진에게 시집보냈기에 만에 하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4화

    “네가 어떻게 돌아온 것이냐?”소홍범이 굳은 표정으로 딱딱하게 물었고 소우연은 아버지의 그런 표정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소씨 가문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어렸을 때부터 우러러봤던 아버지인데 지금 소우연을 쳐다보는 눈빛에는 혐오와 불만밖에 남지 않았다.한편, 이민수도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소우연을 쳐다보았다.그들은 회남왕 관저에 보내진 소우연이 살아서 돌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아버님 질문이 참 이상하네요? 제가 이집에 돌아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오늘은 혼인을 치른 제가 친정에 인사를 드리러 와야 하는 날입니다. 설마 아버님께서 이를 잊으신 겁니까?”소우연의 말에 안색이 조금 나아진 소홍범이 태연한 모습으로 말했다.“돌아왔으면 저기 뒤뜰에 가 있거라.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소우연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예전이라면 소우연은 아버지가 시킨 대로 바로 뒤뜰로 갔을 것이지만 이제는 신분이 다르기에 아버지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아버님, 혹시 제가 들으면 안 되는 얘기라도 있는 것입니까?”소우연이 태연한 모습으로 천천히 대청 안으로 들어갔고 예전에 모든 면에서 조심스러운 소우연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그리고 더 이상 소씨 가문 사람들의 비위도 맞추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리 노력해도 이 사람들은 그녀를 사랑해주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대문 앞에서 죽음을 당해도 시신조차 거둬주지 않을 사람들이다.한편, 소우연의 행동에 화가 난 소홍범이 언성을 높였다.“이게 지금 버릇없이 무슨 짓이냐? 넌 애초부터 우리 대화에 끼어들 자격도 없었어. 이만 물러가라는 말 안 들려?”소우연은 그저 눈을 깜빡이며 소홍범을 빤히 쳐다보았다.“아버님, 혹시 제 신분을 잊으신 겁니까? 전 어제부터 회남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럼 아버님께서도 저를 보시면 예를 갖춰 인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흠칫하던 소홍범은 화가 더욱 치밀었고 감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5화

    “이해? 내가 왜?”소우연은 싸늘하게 굳은 눈빛으로 소우희를 쳐다보았고 소우희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흠칫 놀랐다가 이내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언니 아직도 날 많이 원망하고 있는 거잖아. 내가 어떻게 해야 언니가 날 용서해줄 수 있어?”소우연이 아무런 대답도 없이 소우희를 빤히 쳐다보자 소우희가 눈물을 쓱 닦으며 말을 이어갔다.“내가 죽어야 화가 풀리겠어?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날 더 예뻐했다는 걸 나도 알아. 오라버니들도 그렇고. 다들 언니에게 신경을 많이 쓰지 못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래도 언니는 소씨 가문 딸이잖아. 회남왕과 결혼한 것도 마냥 나쁜 일은 아니야. 어찌 됐든 회남왕은 왕실 사람이고 신분도 높잖아. 내가 민수 오라버니와 혼사를 맺은 게 문제라면 난 이 혼사를 취소해도 돼. 언니 기분만 좋아질 수 있다면 난 상관없어.”소우희가 엉엉 울면서 몸을 휘청거리자 소우연은 미간을 확 찌푸린 채 동생이 또 무슨 꿍꿍이를 계획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갑자기 찾아와서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며 앞을 가로막는 걸 보면 뭔가 속셈이 있는 게 분명하다.바로 이때, 소우희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갑자기 손을 들고 자신의 뺨을 강하게 때렸고 백옥같이 하얀 소우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벌겋게 부어 올랐다.소우연은 소우희의 돌발 행동에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혼자서 갑자기 미쳤을 리는 없고 주변에 누군가가 있는 게 확실히다.이때,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다음 순간 누군가에 의해 옆으로 확 밀린 소우연은 하마터면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너무도 익숙한 한 남자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소우희를 부축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우연을 째려보았다.“소우연! 네가 아무리 불만이 많아도 우희에게 손을 대서는 절대 안 돼! 우희가 네 일로 얼마나 많이 자책하고 있는 줄 알아? 어젯밤에도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밤새 울었어. 네가 회남왕 저택에 가서 고생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네가 어떻게 우희한테 이럴 수 있어!”소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6화

    한편, 소우연은 약들을 서랍 안에 잘 정리해둔 뒤, 의서 한 권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이때, 창문이 바람에 흔들렸고 방 안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 들자 소우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굳게 닫았다.“왕비님, 혹시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밖에 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고 소우연이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다.”의서를 내려놓은 소우연은 그제야 날이 어두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육진은 어디 갔지? 왜 아직도 안 돌아오지?’소우연이 방 문을 열자 밖에 서있던 어린 시녀 한 명이 소우연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왕비님.”“저기… 왕야께서 오늘 외출하셨느냐?”“왕야께서는 현재 서재에 계십니다.”하긴, 다리가 불편한 이육진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거의 외출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품을 하던 소우연은 방으로 돌아가 겉옷을 걸치고는 다시 방을 나섰다.“네 이름은 무엇이냐?”“소인 명심이라고 합니다.”“명심이 네가 길을 좀 안내하거라. 왕야께 겉옷을 가져다주려고 한다.”소우연의 말에 흠칫하던 명심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왕비님, 소인이 일단 물어보고 나서 안내해드리겠습니다.”“물어본다니? 누구한테 물어본다는 것이냐?”이 저택에서 소우연이 도망치지 않는다고 해도 그저 그 어떤 행동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꼭두각시일 뿐이다.숨을 깊이 들이마신 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가서 물어보거라.”“네, 왕비님.”명심은 이내 곁채로 향했고 마침 한 여인이 곁채 안에서 걸어 나왔다.“정연 언니, 왕비님께서 왕야께 겉옷을 드리러 가시고 싶다고 하십니다.”명심의 말에 정연은 본채를 힐끗 쳐다보고는 빠르게 다가와 소우연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소인, 왕비님께 인사를 올립니다.”“날씨가 많이 추운 것 같은데 혹시 내가 왕야께 겉옷을 드리러 가도 되겠느냐?”소우연의 말에 정연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예전에 이 관저에 시집온 여인들은 하나같이 나쁜 꿍꿍이를 품고 있었으며 의도를 가지고 회남왕에게 접근했기에 결국 이튿날 싸늘한 주검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7화

    이육진의 말에 고개를 살짝 든 소우연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고 있습니다.”대답을 하자마자 소우연의 얼굴이 다시 빨갛게 달아올랐고 이육진은 한참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옷도 벗어야 돼.”말을 마친 이육진은 태연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웠고 소우연은 눈치를 보다가 결국 내의만 남긴 채 옷을 다 벗었다.초가 꺼지자 방 안은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어두워졌고 소우연은 더듬거리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소우연 전에 이육진과 혼사를 치렀던 여인들은 전부 간첩이기에 결국 이육진에게 살해된 것이다.이육진은 소문처럼 무고한 생명을 함부로 죽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기에 그가 소우연에게 신음소리를 내라고 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소우연은 아직 알 수 없었다.이불을 덮은 소우연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첫날밤처럼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별다른 생각 없이 기다리고 있던 이육진은 소우연의 신음소리를 듣자 머릿속에 갑자기 조금 전 소우연에게 그 물건을 잡혔을 때의 촉감이 떠올랐다.순간 몸이 뜨거워진 이육진은 미간을 확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려 소우연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설마 내가 벗겨주기를 바라는 건가?”소우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그럼 첫날밤 소우연이 잠들고 나서 이육진이 그녀의 옷을 전부 벗겼다는 뜻인가?이런 추측에 소우연은 창피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지만 자신은 이미 회남왕비이기에 거절할 수도 없었다.잠자리를 가지자고 해도 거절할 수 없는데 옷을 벗으라는 건 너무도 당연한 요구였다.이불 속으로 숨어든 소우연은 옷을 전부 벗은 뒤 내의를 곁에 놔두려고 했지만 이육진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소우연은 입술을 살짝 오므린 채 옷을 건넸고 이육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옷을 바닥에 툭 던졌다.가만히 누워있던 소우연은 옆에 있던 이육진이 본인 옷도 벗고 있는 게 느껴지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합방하자는 뜻인가?소우연은 너무 긴장해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고 이불로 몸을 꼭 덮은 채 꿈쩍도 못했다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8화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소우연은 의서를 읽고 있었고 정연은 곁에서 찻잔을 정리하면서 은근슬쩍 말을 꺼냈다.“오늘 아침 덕빈 마마께서 저택을 떠나시면서 왕야께 왕비님을 모시고 궁으로 들어가 주상께 인사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주상?소우연은 오늘 아침 정연이 이육진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 말을 소우연 앞에서 한번 더 꺼내는 걸까?소우연이 정연을 힐끔 쳐다보자 정연은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다시 찻잔 정리에 집중했다.조금 전까지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던 소우연은 살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소설 속에 적힌 내용에 의하면 덕빈은 아들 이육진을 끔찍이 아낀다고 했는데 이렇게 소우연을 데리고 궁에 들어오라고 한 걸 보면 단순히 인사만 받으려고 하는 건 아닐 것이다.간단하게 말하자면 만약 이육진이 소우연을 데리고 궁에 들어가기 싫어한다면 그것은 곧 이육진이 소우연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다.이육진이 소우연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덕빈은 절대 소우연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소설 원작에 덕빈이 소우연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지 확실하게 언급되지 않았지만 언젠가 알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고 그때가 되면 신부를 함부로 바꾼 소씨 가문뿐만 아니라 소우연도 저번 생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잃을 것이다.이번 생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이육진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이런 생각에 소우연은 고개를 들고 정연을 쳐다보았다. 보통 시녀와 달리 얼굴도 예쁘장한 정연은 남다른 기품이 느껴졌고 말과 일 처리도 깔끔하고 확실했다.“정연, 혹시 내가 지금 서재에 왕야를 만나러 가도 되겠느냐?”소우연의 물음에 정연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대답했다.“왕야께서 왕비님은 뭐든 하셔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소씨 가문의 장녀가 시녀한테까지 말을 이렇게 조심스럽게 한다고?정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고 소우연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정연에게 물었다.“혹시 부엌에 다과 같은 건 있느냐?”“있습니다. 왕야께 드리실 겁니까?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9화

    “내가 걱정된다고?”이육진이 소우연을 향해 손을 살짝 흔들자 소우연은 조심스럽게 앞으로 두 발짝 다가갔고 이육진은 그대로 소우연의 턱을 덥석 잡았다.그리고는 소우연의 고개를 아래로 잡아당기더니 이육진의 눈을 직시하게 했다.“그럼 날 어떻게 걱정해줄 생각이야? 응?”이육진이 실눈을 살짝 뜬 채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망가진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고 그 모습은 마치 저승길에 서있는 악마 같았다.“저… 저에게 약이 있습니다. 왕야께서 그 약을 발라 보시기를 권합니다. 얼굴 상처가 많이 연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다치신 다리도… 어쩌면 고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소우연은 이육진의 눈빛이 너무 무서웠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소씨 가문 둘째 딸이 의술을 조금 익혔다고 하던데 그럼 소우연이 가지고 있는 약도 동생한테서 얻은 건가?이육진의 다친 다리와 얼굴의 흉터는 태의도 방법이 없다고 했는데 집에서 홀로 의술을 독학한 소씨 가문 둘째 딸이 고칠 수 있다는 게 말이나 될까?이육진은 소우연의 턱을 꽉 잡은 채 좌우로 돌리며 빤히 쳐다보았다.“난 똑똑한 척하는 여자를 싫어해.”손을 놓은 이육진은 손가락을 툭툭 털어냈고 그런 이육진을 보며 소우연은 왠지 서러운 감정이 들었다.“왕야, 전 왕야가 밖에 떠도는 소문처럼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밖에 어떤 소문이 떠도는데?”흠칫하던 이육진이 이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고 소우연이 진지하게 대답했다.“최소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습니다.”소설 속에 적힌 내용에 의하면 이육진이 죽인 사람들은 전부 저택 안에 숨어있는 간첩들이었다.“허허…”이육진이 어이없다는 듯이 허허 웃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대체 누가 이런 말을 소우연에게 해준 걸까? 분명 이육진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닌데 누군가에게서 이런 평가를 받아보는 건 처음이었다.“왕야, 전 영원히 왕야 편에 서있을 겁니다. 왕야께서 어떤 결정을 하시든 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왕야 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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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70화

    “왕비가 말해보시오.”이육진은 손에 낀 청옥 반지를 굴리며 무심한 듯 말했다. 그는 방금 전 소씨 가문의 사람들이 소우연을 바라보던 그 경고의 눈빛, 그 모든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진규에게서 들었던 바에 의하면, 소우연이 친정에 갔던 날 이들의 태도가 심히 불손했다 하였으나, 그때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의 가슴속 분노는 억누를 수 없이 타올랐다. 화로 속 은탄이 파직 파직 소리를 내며 타올랐고 조용한 실내에서는 숨소리마저 크게 울려 퍼졌다.소우연은 담담히 미소 지었다.“왕야, 저는...”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육진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듯한 태도이기도 했다.“왕야께서는 제가 누구인지가 그리도 중요하십니까?”이육진의 차가운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왕비는 이미 내 마음을 사로잡았소. 그대가 누구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소.”그 말이 떨어지자, 소씨 가문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문밖에서 폭죽 소리가 울려 퍼지고 예식 진행자가 소리 높이 외쳤다.소홍범은 이육진에게 예를 갖춘 후, 온 가족은 서둘러 평서왕부를 맞으러 나갔다. 이민수는 붉은빛 예복에 담비 털망토를 걸치고, 뒤에는 중매인과 예물을 운반하는 하인들이 있었다.수십 대에 걸친 화려한 예물 행렬은 매우 화려했다. 그러나 이는 단지 혼약식 예물일 뿐. 진정한 혼례가 치러지는 날, 그가 준비할 채단과 예물은 경성 여인들의 부러움을 살 것이다.게다가 소씨 가문이 소우희를 위해 준비한 혼수 역시 십 리를 채울 정도로 화려했으니. 하지만 소우연은? 소우연은 한때 소씨 가문의 적녀였음에도 정작 혼인할 때 받은 것은 변방에 있는 두 채의 가게뿐이었다.그마저도 아직까지 임진숙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비교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었다.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만약 이민수와 소우희가 결국 혼인한다면, 내 운명을 바꾸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겠지.' “왕야……”소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69화

    이육진은 혹여나 소우연이 진원장군 댁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염려하여, 진우 한 명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진규도 보내는 것인가? 소우연은 마차에 오르고 나서야 이 마차가 이육진의 전용 교자였음을 깨달았다. 보통 마차보다 크기가 두 배는 넉넉했다. 마차 문이 열리는 순간,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은색 가면을 쓰고 검은색 예복을 걸친 이육진이었다.마차 내부는 충분히 넓어서 그의 휠체어도 있었다.“왕야?”소우연은 그가 마차에 타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지난번 친정에 갈 때도, 그는 동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소우희의 혼약식에 가려는 것인가?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이육진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하는 수없이 자신의 손을 올렸다.“왕야께서도 소씨 가문을 방문하시려는 겁니까?”그러면서 그녀는 그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시선은 은색 가면을 쓴 남자에게 향했다.흉터들은 가려져 있었고 오직 깊고 서늘한 눈동자와 뚜렷한 턱선만이 드러나 있었다. 순간,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가 본래의 얼굴을 되찾으면, 분명 절세의 미남일 터였다. 이육진은 가볍게 “그래.” 하고 답했다. 정연이 마차에 올라 이육진에게 예를 갖춘 후, 진우가 마차를 몰아 진원장군부로 향했다. 진원장군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소우연은 직접 이육진의 휠체어를 밀며 열여섯 해를 살아온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곳곳에서 마주치는 하인들과 오라버니들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녀가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거짓일 것이다.소홍범은 임진숙과 아들들을 대동하여 이육진을 맞이했다. 비록 그가 지금은 흉측한 얼굴에 불구가 되었어도 황제의 유일한 친자인 만큼 결코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이육진이 상석에 앉고 소우연은 그의 우측에 자리했다. 모두가 혼약을 축하하는 가운데 이육진이 입을 열었다. “소 장군, 나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소.”소홍범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68화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한참 후, 이육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깊고 짙은 눈동자가 소우연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소우연, 너는… 알고 있느냐?”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소우연의 고운 눈썹이 찌푸러졌다.“무엇을 말이옵니까?”그녀는 그와 시선을 맞추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그녀의 온기는 실로 매혹적이었다.“소녀 궁금하오니 말해 보시옵소서.”그녀의 목소리는 잔잔한 물결처럼 그를 조용히 감싸안았다. 그녀의 단호한 눈빛은 마치 그에게 용기를 주는 듯했다.이육진은 몇 번이고 말을 삼켰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모두가 내 얼굴을 두려워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냐? 그토록 울며불며 나와의 혼인을 거부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어찌하여 변한 것이냐? 모든 것이 거짓이냐?”소우연은 입을 떼려다 멈칫했다.눈앞의 이 사내는 한때 황태자였고 전장을 누비던 무패의 전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리도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거듭 확인하고 있었다.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들은 그저 소설 속 배경에 불과한 인물들, 누군가의 발판이 되어줄 뿐인데 말이다.“위엄이 넘치시는 왕야를 제가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사옵니까?”이육진의 심장이 단단히 죄어왔다.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오래 잠들어 있던 감정이 며칠 사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단순히 경성을 뒤흔들고 배후를 처단하는 것만을 원하지 않았다.그는 그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이민수는 어쩔 셈인가? 너희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고, 한때는 네 약혼자이기도 하였는데, 이리 쉽게 잊을 수 있단 말이냐?”“이미 잊었사옵니다. 여인은 남편을 하늘로 섬기는 법. 다른 이의 남편은 저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왕야께서는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다 생각하시는 겁니까?”다시 태어난 그녀는 그저 소설 속 희생될 조연에 불과했다. 설령 이 모든 사실을 이육진에게 털어놓는다 해도 그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전생에,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67화

    “만약 내 상처가 낫지 않고 내 다리 또한 영영 회복되지 않는다 해도 왕비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인가?”그는 스스로가 지나치게 탐욕스러워졌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 감정을 도무지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잠깐이라도 스치는 아주 미세한 후회나 거짓마저 놓칠까 두려우면서도 그는 조용히, 또 간절히 그녀를 응시했다. 몇 번의 숨결이 흐르고, 소우연은 여느 때처럼 잔잔한 미소를 띠며 그의 손을 조용히 감쌌다.“왕야께서는 제가 도망갈까 두려우신 것이옵니까?”그녀는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과거, 자신이 믿던 가족들에게 버려졌던 그날의 공포는 여전히 가슴 한편에 서려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육진이 버려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비록 그녀는 무사히 살아남았지만, 언젠가 이육진마저 그녀를 버린다면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적이 있었다.하지만 소우연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번 생을 이육진에게 걸어보기로 했다.하늘이 그녀를 다시 살게 한 이유가 다시금 비극을 되풀이하라는 것은 아닐 테니까.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들은 서로의 짙은 외로움을 보았다.이육진의 손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소우연은 손수건을 꺼내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왕야께서 저를 내치지 않는 한 저는 평생 왕야 곁에 있을 것이옵니다.” “절대 내치지 않을 것이다.”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을 혐오하고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만약, 그의 몸이 끝내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녀는 그와 온전히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일 터. 그럼에도… 그녀가 그의 곁에 남아준다면... “저 또한 그러하옵니다.”소우연은 그의 손을 끌어올려 자신의 볼에 살며시 가져갔다. 이육진은 입술을 달싹였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그대로 믿을 것이다. 설령 거짓이라 해도, 그는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 깊이 빠져 들것이다.오랜 시간이 흐른 뒤, 소우연은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66화

    소우연은 태연한 듯 보였지만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서재가 있는 뜰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 청색과 백색 차림의 두 실루엣이 스쳐 지나갔다.심소균과 용강한? 그들이 방금 일부러 멈춰 서서 자신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하지만 이미 사라진 그들에, 소우연은 다시 발길을 돌려 서재에 들어섰다.“매화가 너무 아름다워 꽃병에 꽂아 왕야의 책상 위에 두려 하옵니다. 그러면 왕야께서 감상하시기에 좋을 듯하옵니다.” 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방금 용강한이 했던 ‘왕비는 그대의 복성이오.’란 말을 떠올리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그의 시선이 그녀의 품에 있는 노란 매화로 향했다. “참으로 어여쁘게 피었구나.”“왕야께서는 늘 본채에 계셨으면서도 매화가 피어난 것을 보지 못하셨사옵니까?” 이육진은 잠시 멈칫하더니, 멎쩍은 미소를 지었다.“한 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었다.”“왕야께서는 꽃을 즐기지 않으십니까?”그녀는 꽃병을 이육진에게 건넸다. “나는 매화는 좋더구나.”“저도 역시 매화가 가장 좋습니다.” 그녀는 휠체어에 밀어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그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이육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방금 전 지나간 두 사람 중 흰옷은 흠천감 용강한이고 푸른 옷은 진국 공부 심소균이다.”소우연은 깜짝 놀랐다. 무빈과 정연은 그녀에게 일부러 말해주지 않았는데 말이다.“왜 그러는 것이냐?”그녀가 아무 대답이 없자, 이육진이 살짝 몸을 돌렸다.“저들을 알고 있었느냐?” 소우연은 고개를 저었다.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사옵니다.”그녀의 도움으로 이육진은 어느새 책상 앞까지 다가갔다.방 한켠, 온돌 위는 아직도 바둑판과 찻잔이 놓여 있어, 방금 전까지 셋이서 차를 마치며 바둑을 두면서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책상 위에는 며칠 전에 꺾어 온 매화가 이미 시들어있었다. 소우연은 새 꽃병으로 바꿨다. 그러다 문득 그곳에 놓인, 오래된 거울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65화

    정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이육진이 화상을 입은 이후, 왕부의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졌다.적어도 더 이상 웃음소리는 감히 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왕부에서 이유 없이 목숨을 빼앗는 일은 없었다.소우연은 조용히 매화를 꺾었고 정연은 그 꽃들을 모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정연의 손은 더 이상 꽃을 들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왕비 마마, 본채로 가서 꽃들을 정리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어차피 본채는 매일 사람들이 청소하고 있으니 이참에 시든 매화도 새것으로 갈아 두는 것이 좋을 듯했다.소우연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본채로 향해 발을 옮겼다. 소우연은 문득 서재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마침 무빈과 눈이 마주쳤다. 무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를 표했다. “왕야께서는 진국공부의 심소균 장군과 매우 가까운 사이겠지?”방에 들어서자, 그녀는 손에 든 가위로 매화 가지를 정리했다. 꽃병을 가져와 꽃꽂이를 하려던 정연이 그녀의 말에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왕비 마마께서… 이를 알고 계신단 말인가?소우연은 태연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왕야께서 출정하셨을 때, 진국 공부의 공작 어르신과 함께하셨고, 심소균 역시 그때 참전하였으니, 그들이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라는 사실을 경성에서 모른 이가 없단다.”사실 이야기 속에 이육진에 충성을 다하는 신하들이 언급된 바 있었다. 하여 진국공부와 심소균, 심장군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정연은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대답했다.“진국 공부의 심 장군과 소 장군, 모두 예전에 왕야와 함께 전장에 나섰기에 각별한 사이입니다.”소우연은 이들이 그녀와 이육진에게 있어 중요한 사람이라 생각했다.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의 운명은 이미 이육진과 하나로 묶여 있었다.그렇다면, 차라리 미리 준비하여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정연은 소우연의 속마음을 알 리 없었다.“여러 해 동안 왕야께서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64화

    무빈은 그 웃음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소우연에게 곧바로 밝힐 수 없어 그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인 알아챌 길이 없사옵니다.”‘심장군께서는 평소에 활달한 성격이시나 왕야께서 사고를 당한 후로는 결코 왕부에서 이처럼 거리낌 없이 행동한 적이 없었는데...’소우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이따가 다시 오는 것이 좋겠다”그녀는 이미 본채의 정자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찬바람이 옷깃을 스미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무빈은 그녀를 따라가며 정중히 권했다. “왕비마마, 차라리 본채로 돌아가 좀 더 따뜻한 곳에서 쉬시는 것이 어떠하옵니까?”정연 역시 이에 동의하며 거들었다. 그러나, 소우연은 정원의 매화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매화가 아름답게 피었구나. 몇 가지를 꺾어 왕야의 서재로 가져가야겠다.”정연: “……”무빈: “……”항상 왕야를 생각하고 계시는 왕비의 모습에 두 사람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럼, 제가 다시 모시러 오겠사옵니다.”정연이 소우연의 뒤를 따랐다. 정연은 왕비께서 혹여 사고를 당하기 전의 왕야를 은밀히 사모하신 적은 없으셨는지 묻고 싶었다.그렇지 않고서야, 지금의 왕야를 진심으로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그러나 왕비께는 본래 정인이 있었으나 강제로 대신 시집와야 했다는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왕비는 아주 현명한 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왕야에게 시집온 이상, 왕야만을 바라보며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길이기도 하였으니까.아이라도 낳게 된다면 왕비의 미래는 더욱 창창할 터, 어쩌면 머지않아 황태후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는 것이다.정연은 말없이 가위를 가지러 갔다.그녀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서재 쪽 한 모퉁이가 희미하게 보였다.그녀는 무빈이 서재로 들자, 곧 어린 내시가 조용히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그때, 매화 향이 은은하게 코끝을 스쳤다.소우연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63화

    ‘그런데 왕비마마께서 과연 치료할 수 있겠는가?’ “내 얼굴에 난 상처… 자세히 보거라.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 같으냐?”그는 겉으로는 태연한 듯 보였으나, 내심 회복에 대한 희망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무엇도 아닌 소우연의 진심 어린 마음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무빈은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얼굴은 전처럼 창백하지 않사옵니다. 며칠 동안 햇볕을 쬐셨기에 좀 더 건강해 보이는 것 같사옵니다.”“본왕이 묻는 것은 상처를 말하는 것이다. 흉터가… 옅어졌느냐?”“저는… 그것이…”“거짓말은 하지 말거라!”그러자 무빈은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답했다. “소인 감히 거짓말은 할 수 없사옵니다! 다만… 전에 왕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사오니, 잘 알지 못하겠사옵니다.”잘 알지 못하겠다… ‘그건 아직 변화가 없다는 뜻이겠지.’이육진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손을 가볍게 흔들어 무빈에게 퇴거를 명했다.“물러가거라.”“오래된 상처이오니 아무리 신묘한 의술을 지니셨다 하더라도 그리 빨리 나을 수는 없사옵니다. 부디 너무 조급해하지 마옵소서..”무빈은 조심스레 이육진을 위로했다.차라리 왕야의 고통을 대신 받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그는 그저 내시일 뿐이니 얼굴이 흉해지든, 몸이 불편하든 큰 상관이 없었으니까.이육진이 아무런 말도 없자 무빈은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그는 몸을 숙여 예를 갖춘 뒤, 살며시 문을 닫았다.책상 위에는 무빈이 남겨둔 거울이 놓여 있었다.거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갑자기 공포가 밀려왔다.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그는 거울을 집어 오랜 세월 동안 외면해 왔던 자신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그러나 손끝이 심하게 떨렸다.머릿속에는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본 순간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에 난 붉은 칼자국은 마치 거대한 지네처럼 꿈틀거리고 있었고 화상 자국은 울퉁불퉁하게 일그러져 있어 마치 팔순 노인의 주름진 피부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62화

    “저는 그저 버리는 것이 아까워서 그럽니다.”소우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 마치 한 송이 탐스러운 꽃처럼 곱게 피어났다.“필요 없느니라.”이육진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예.”소우연은 살짝 시선을 내리깔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어차피, 얼굴과 다리가 회복된다면, 그때는 자연스레 답이 나오겠지.’그녀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이육진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는 것이었다.“왕비는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그녀의 붉어진 얼굴에 이육진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우연의 손을 이불 속으로 끌어당겼다.“.....!”손끝이 닿는 순간, 소우연은 불에 덴 듯이 화들짝 손을 홱 빼내고는 이불 속으로 얼른 몸을 숨겼다.이육진은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누운 채, 그녀를 여유롭게 내려다보았다.온몸을 이불 속에 꼭꼭 감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더없이 귀여웠다.“그러다 숨 막혀 쓰러질 것 같구나.” 그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휠체어에 앉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빈을 불러 시중을 들게 했다.아침 식사 후. 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약을 바르며 물었다. “요 며칠 피부가 가려우시거나 찢어지는 듯한 감각이 있으셨사옵니까?”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그렇더구나.”“그렇다면 제대로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옵니다. 왕야의 피부가 서서히 회복되고 있는 증거이니 걱정하지 마옵소서.”“참말로… 회복되고 있단 말이냐?”“그러하옵니다.” 이육진은 이 가려움이 햇빛에 오래 노출된 탓이라 여겼었다. 약을 바른 후, 이육진은 바로 서재로 향했다. “무빈아.”무빈은 급히 차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여기에 있사옵니다.”“거울을 가져오거라.”“거울 말이옵니까?”왕부에서 거울을 찾다니… 얼굴에 화상을 입은 뒤, 그는 왕부에 있던 모든 거울을 부수어버렸고 한 점도 남겨두지 않았다. “왕야, 지금은 거울이 없사옵니다. 즉시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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