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명희를 죽이려고 사람을 사주했던 임원 또한 그녀와 똑같은 모습으로 생을 마감했다.이런 걸 인과응보라고 했던가?임원이 저지른 모든 죄악들은 결국 그녀의 피와 죽음으로 돌아왔다.주변을 둘러싼 몸종들과 하인들은 이미 공포에 질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이 대낮에 대청 한복판에서 피 튀기는 살인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 와중에도 임씨 부인은 임학의 품에 안겨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방금 전까지 짐승처럼 울부짖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그녀는 이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순진한 얼굴로 임학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학아, 우리 단이는? 단이가 사라졌어... 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가 않아.”그 말에 임학의 가슴은 칼로 도려내듯 아팠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김단을 바라보았다.김단은 그 자리에 말없이 서 있었다.임씨 부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그때 임씨 부인의 시선이 김단에게로 향했다.그녀는 마치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기억났소! 낭자는 우리 큰 마님의 친척이지 않소?”그 말에 김단은 가볍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맞습니다 마님. 기억력이 정말 좋으시군요.”임씨 부인의 얼굴에는 한 줄기 빛이 번졌다.“그럼 혹시 우리 단이를 본 적 있소? 우리 단이가 안 보여서 말이오.”그 순간 김단의 얼굴은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못 봤습니다.”임씨 부인이 찾는 단이는 지금의 자신이 아닐 것이다.그녀가 기억하는 단이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사랑스러운 딸일 것이다.자신의 품에 안겨 환하게 웃던 바로 그 아이.임씨 부인의 얼굴은 금세 실망감으로 물들었다.그 쓸쓸함은 진산군과 임학의 눈에 그대로 번졌다.그때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있었던 일, 부디 명확하게 처리하거라. 전하께서 아시게 된다면 무고한 이들까지 해를 입을 수 있다.”최지습이었다.그는 조용히
임원의 사건은 결국 조정에까지 보고되었고 그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전하가 임가를 어떻게 벌할지 김단도 알 수 없었다.다만 최지습의 말에 따르면 며칠 안으로 임학이 그와 함께 전장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그게 무슨 뜻입니까? 임학 도련님을 백 도령님의 종사관으로 임명할 생각인 가요?”김단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임학은 어릴 때부터 무예를 익히긴 했지만 최지습의 직속 종사관이 될 그릇은 아니었다.병법은 암기 수준에 머물렀을 뿐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무엇보다 성격이 거칠고 성급하기에 감정에 잘 휘둘리는 편이었다.그런 그가 전장에 나가게 된다면 누군가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그러나 최지습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종사관이 아니라 솔선자.”그 한 마디에 김단의 눈빛이 흔들렸다.”솔선자?”잠시 숨이 멎을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그녀는 임학이 걱정되어 미간이 살짝 찌푸러졌다.임가의 장남인 그가 솔선자라니.그가 전장에서 맨 앞자리에 선다는 것은 단순한 벌이 아니었다.말 그대로 인간 방패가 되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최지습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임원 낭자가 한양에 몰래 돌아온 일은 파장이 컸소. 동래 쪽에서도 이 일을 수습하느라 꽤 애 먹었거든. 다행히 임가에서 임원 낭자를 숨겨주었다는 증거는 불충분했고 전하는 그걸 받아들였소.”그 불충분한 증거는 김단이 직접 마련해 둔 것들이었다.두식이를 포함한 거지 무리들이 증인이 되어 임가를 감싸주었고 그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만약 이 사건에 임가 전체가 연루되었다면 그 결과는 참혹했을 것이다.최지습은 김단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하지만 임원 낭자가 임학의 저택에서 숨을 거둔 건 사실이오. 그 때문에 임학은 대역 죄인을 숨겨주었다는 의혹을 벗기 어려워졌지. 전하는 임학에게 솔선자라는 이름으로 책임을 묻으려고 하는 것이오. 일종의 형벌이라고 생각해도 좋소. 임학이 계속 한양에 남는다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오. 그래서 전
술병이 자신의 손에 쥐어진 순간 임학은 그저 멍하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어쩌다 술병이 자신에게까지 전달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임학은 다시 김단을 쳐다보았다.그녀는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히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그 웃음이 무슨 의미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용서였는지, 마지막 인사였는지,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는 웃음이었는지.하지만 그 짧은 미소에 임학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그녀가 여전히 자신에게 미소를 보여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는 손에 들린 술병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꿀꺽 삼켜버렸다.김단이 직접 건넨 술이 아니어도 괜찮았다.오늘 이 자리에 김단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위로받았다.어쩌면 오늘의 이 작별은 그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전장으로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궐문이 열렸다.김단은 숙희와 함께 사람들 뒤편으로 물러났다.말고삐를 움켜잡은 최지습과 그의 뒤를 따르는 병사들을 묵묵히 지켜보았다그녀의 마음속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그들은 이제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러 갈 것이다.그중 누군가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김단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들의 뒷모습을 끝까지 눈에 담으려고 애썼다.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은 채 그저 오래도록 바라보기만 했다.최지습의 모습이 궐문 너머로 사라지는 순간까지 그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리려던 찰나 그녀의 시야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소한.오늘의 그는 전장에 나서는 병사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단정한 도포 차림에 검은 머리를 단정히 묶은 채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녀를 발견한 소한은 조심스럽게 미소를 짔더니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김단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소 장군, 평안하셨습니까?”그녀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그 속엔 어떠한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한발 물러선 거리만큼이나 그와 명확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소한의 미소가 어색하게 굳어졌
다음 날 아침 김단은 급히 궐로 불려갔다.이유는 다름 아닌 임씨 부인 때문이었다.그녀를 안내하던 내시가 곧장 덕빈의 침전으로 향했다.그녀가 덕빈에게 인사를 올리기도 전에 수 어의가 허둥지둥 달려 나왔다.“임씨 부인께서 밤새 고열에 시달렸소. 어떻게 해도 열이 내리질 않아.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 낭자를 부르게 되었다네.”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어쩌다 임씨 부인이 덕빈의 침전에서 하룻밤을 지샜던 걸까?수많은 의문과 불안으로 뒤엉킨 채 그녀는 이를 악물고 방으로 들어섰다.침상 위엔 임씨 부인이 누워 있었다.그 곁에는 덕빈이 초췌한 얼굴로 눈물을 훔치며 앉아 있었다.“단아 어서 와서 네 어머니를 좀 살펴보거라.”김단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조심스럽게 임씨 부인의 맥을 짚어 보았다.덕빈은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원래는 너희 어머니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서 불렀던 건데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더구나. 그래서 이곳에 며칠 함께 지내며 어의들에게 진료도 받게 했단다. 혹시 조금이라도 좋아지지 않을까 해서... 그런데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갑자기 이렇게 열이 오른 것이다. 어의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기에 너를 불렀어. 예전에 소 장군의 열을 내리게 한 적이 있다고 들었어.”말을 이어가던 그녀의 눈가가 점점 젖어갔고 목소리도 가늘게 떨렸다. “난 그저 너희 어머니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내 무슨 염치로 너희 아버지한테 설명을 해주어야 할지...”김단은 말없이 침을 꺼내 들었다.그녀의 눈빛엔 슬픔도,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그녀는 침착하게 은침을 꺼내들더니 임씨 부인의 두정부 혈자리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이번 고열은 소한 때와는 달랐다.그러기에 다른 방식으로 침을 놓아야 했다.그렇게 꼬박 반 시진이 지난 후에야 임씨 부인의 열은 천천히 가라앉았다.곁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덕빈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열이 내렸구나. 다행이야. 정말이지 못 본 사이에 네가 이렇게 뛰
덕빈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세상 부모 마음이란… 참 딱하지. 나는 이미 자식을 잃었다. 내 주위 사람들까지 나처럼 자식을 잃는 걸 보고 싶지 않구나. 너무 고통스럽거든.”그녀는 말끝을 흐리더니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다.김단은 더 깊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가까스로 감정을 추슬렀다.“소녀, 마님께 드릴 약을 지으러 가겠습니다.”김단의 냉정한 태도에 덕빈은 아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머금은 채 손을 내저었다.김단이 물러가자 그녀의 눈빛이 묘하게 달라졌다.임씨 부인은 위중한 고열에 시달렸지만 한 번의 침만으로 열이 거짓말처럼 내렸다.덕빈은 임씨 부인이 눈을 뜨자마자 진산군 댁으로 돌려보냈다.이제 자신도 궐을 떠날 수 있었기에 김단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나 아직 궐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김단 아가씨, 잠시만요!”김단이 고개를 돌리니 작고 왜소한 체구의 내시 하나가 정중히 다가와 허리 숙여 인사했다.“공주님께서 낭자를 뵙고 싶어 하십니다.”그 말에 김단의 심장이 조여들었다.왜 하필 지금 자신을 부르는 걸까?“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그녀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물었다.“그저 주인의 뜻을 따르는 저희가 어찌 알겠습니까? 아가씨, 이쪽으로 가시죠.”그의 표정은 여전히 온화했고 말투도 부드러웠다.하지만 그 속에서 김단은 오싹한 위화감을 느꼈다.공주가 부르면 거절할 수 없었다.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공주의 침전에 들어섰을 때 서원 공주는 한 손에 다과를 든 채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김단이 조심스럽게 인사를 올리자 공주는 손에 들린 다과조차 내려놓지 않은 채 느긋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김 낭자, 앉으세요.”그녀가 손으로 가리킨 자리는 다름 아닌 자신의 바로 옆자리였다.김단은 순간 망설였지만 공주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기에 자리에 앉았다.“공주님께서 저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공주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김단은 눈앞의 서원공주를 바라보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대체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있는 그대로 말했다간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그렇다면 아무 이상 없다고 둘러대는 게 맞는 걸까?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면 결과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서원 공주는 즐겁다는 듯 웃고 있었다.김단은 결국 깊은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공주님, 도대체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공주는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능청스럽게 웃었다.“그게 무슨 뜻이지? 난 그저 요즘 식욕이 너무 좋아서 낭자를 부른 것인데. 설마 진맥도 제대로 못하는 건 아니겠지?”김단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공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는 식욕이 강한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공주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그러나 이내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네 처지를 모르는 모양이구나.”말을 마친 공주가 주변 몸종들에게 눈짓을 보내자 일제히 물러났다.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오직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공주는 김단에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원군님께서는 이미 전장으로 가셨다지? 언제 돌아올지도 알 수 없고. 그렇다면 지금 이 궐안에 널 지켜줄 사람이 있을까?”그 말에 김단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공주님께서는 어찌하여 저를 이토록 미워하십니까?”진심이었다.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과거 소한 도련님과의 일 때문이라면 노여움을 푸세요. 이제 저는 그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저를 이토록 적대시하는 건가요?”서원 공주는 코웃음 치며 얘기했다.“사람을 미워하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 나는 그냥 네가 싫다. 꼴 보기가 싫어. 말투도 행색도 전부 맘에 안 든단 말이다. 그냥 네 존재 자체가 싫은 걸 어떡하라고 그러는 것이냐?”김단은 깊은 숨을
“난 그런 거 모른다! 없으면 만들어 오거라! 아버지한테는 평양관저에서 며칠 머문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니 넌 내 아이를 없앨 방법을 찾아내. 안 그러면... 결과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서원공주의 말은 김단의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낙태,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공주는 알고 있을까?그런데 그 대상이 전하가 애지중지하는 공주라니...김단이 감당해야 할 무게는 더욱 막중했다.만약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모든 책임은 아무 잘못도 없는 최지습에게 돌아갈 것이다.김단은 이를 악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원군님께서 전장에 나가셨으니 저는 작은 저택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원 공주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네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어. 하지만 나는 반드시 평양관저에서 이 일을 끝낼 것이다.”그 말에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었다.서원공주는 알고 있었다.김단에게 최지습은 어떤 존재인지를 말이다.그래서 그를 미끼로 삼아 김단을 이용하려 했다.왕권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저 공주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다.김단은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으로 공주의 침전에서 나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아 익숙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금군총령의 관복을 입고 허리에 긴 검을 찬 소하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침상에 누워 지내던 지난 시간들이 무색할 만큼 그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김단을 발견한 소하가 먼저 다가왔다.“어땠소? 공주가 낭자를 곤란하게 하진 않았소?”그의 물음에 김단은 잠시 멈칫했다.“혹시 일부러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까?”소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공주의 침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병사가 이 사실을 소하에게 알렸고 그 얘기를 듣자마자 단숨에 여기까지 달려왔다.남자인 그가 공주의 침전으로 들어갈 순 없었기에 그저 문밖에서 묵묵히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그 사실에 김단의 가슴속엔 알 수 없는 따뜻함과 감동이 차올랐다
이 궁궐 안에서 전하를 제외하고 감히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 바로 금군뿐이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소하의 눈빛이 매섭게 흔들렸다.그제야 김단이 공주의 침전에 불려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얼마나 되었소?”“석 달이 조금 넘었습니다.”김단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며칠 뒤 공주가 평양관저로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지울 수 있게 도와달라더군요.”“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오?”그의 물음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단호했다.“어쩔 수 없습니다.”김단은 낮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평양관저에서 처리해야겠지요. 하지만 조금만 잘못되어도 목숨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그 말에 소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김단을 바라보았다.“잘 처리해도 목숨을 잃을 수 있소.”미혼인 공주가 임신을 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왕실의 치욕이었다.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공주는 그 누구든 없앨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그래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그 남자를 꼭 찾아주세요.”그녀의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다.“그 자를 찾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제가 살아남을 수 있어요.”소하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소. 낭자는 이만 돌아가시오. 난 바로 움직일 거요.”“조심히 다녀오세요.”김단은 조용히 인사를 올리고 몸을 돌려 평양관저로 향했다.그녀가 돌아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숙희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맞이했다.숙희는 그녀의 얼굴빛을 살피더니 이내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아가씨, 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김단은 고개를 저었다.곧 공주가 평양관저로 들이닥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녀는 가만히 숙희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작은 저택 말이다. 오랜만에 손 좀 봐야겠어. 며칠 동안 거기 가서 정리 좀 해주거라. 특히 그 붉은 매화. 병이 들었을지도 모르니 꼭 정원사를 불러서 확인해 보도록 하거라.”숙희는 자신을 이 저택에서 떼어내려는 김단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했다
윤이의 말에 서원 공주가 코웃음을 쳤다.곧이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본궁도 같은 생각이다. 이전에는 큰 소리도 치더니, 어제 겸인의 시체를 보고는 조용하기 그지없다.”윤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뇌리에는 평양 원군 관저에 있을 때,김단이 그녀를 위해 해준 말이 맴돌았다.그 말 때문인 것일 까.공주 마마께서는 김단을 해하려고 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를 더 신뢰하기 시작했다.마냥 좋은 일은 아닐 수 있다.하나 공주 마마께 신뢰를 얻었으니,살 길은 하나 생긴 것이 아닌가.마침 공주 마마의 곁에 일을 할 자가 필요하다.김단은 서원 공주의 침소에서 나간 뒤, 어의원으로 돌아갔다.돌아가는 내내, 김단은 마음이 불안했다.방금 공주의 앞에서 한 말이, 소하 오라버니를 도울 수 있는 말이었을까.이번에는 넘어갔다 하여도, 다음에는 쉽게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그녀는 자신이 계속 ‘수’의 입장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하나 ‘수’ 에서 ‘공’으로 바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곧이어 어의원 안으로 들어갔다.문을 열자마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드디어 김 낭자께서 도착하셨나이다,소 장군께서 낭자를 오래 기다리셨나이다!”김단이 걸음을 멈추었다.고개를 들어 방 안을 바라보았다.곧이어 소한이 교의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는 동시에,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건넸다.“의녀 김단, 소 장군을 뵙습니다. 소 장군께서 어찌 어의원에 행차 하셨나이까?”“낭자를 찾아 왔소.”소한이 부드럽게 답했다.하나 그의 미간에는 강렬한 감정이 숨겨 있었다.“낭자가 의녀로 봉직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소. 경축하는 마음에 가져왔소.”그리고는 보석함 하나를 건넸다.김단은 받지 않았다.계속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감사하옵니다. 하나 소인은 그저 마음만 받겠나이다. 오는 것이 있다면 주는 것이 응당한 터인데, 소인은..”“낭자와 그리 생소한 사이는 아니지 않소?”소한은 김단의 말을 끊었다.보석함을 쥐
김단은 서원 공주의 살기를 느꼈다.하나 당황하지 않았다.“소신은 소 장군을 감싸는 것이 아니옵니다. 소 장군께서 총령으로 봉직된 지 얼마 되지 않았사옵니다. 어떤 자가 금군을 이리 다스렸는지, 내막을 알아야 하지 않겠사옵니까?”곧이어 서원 공주의 눈빛이 변했다.“이전에 금군을 맡은 자가 누군지 알고 있소?”옆에 있던 윤이가 서둘러 답했다.“공주 마마께 아룁니다. 덕빈의 친 아우인 손헌이라는 자 이옵니다.”“그래, 손헌 이구나!”서원 공주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그래. 자신의 누이가 덕빈 인 것을 핑계 삼아, 그 손헌 이라는 자가 본궁을 몇 번이나 무시했는지 모른다.”서원 공주는 무언가를 떠오른 것처럼,말투에 냉기가 돌았다.“어쩌면 그 일은 모두 그놈이 계획 한 일이지도 모른다!”김단은 공주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다.그녀는 그저 소하의 억울함을 풀고 싶었을 뿐이다.이때, 서원 공주가 물었다.“손헌은 지금 어디 있는가?”윤이가 대답했다.“노비가 듣기로는 손 대감께서 파직 되신 이후에, 덕빈과 주상 전하가 많은 대화를 나누셨다 하옵니다. 하나, 전하께서는 좀처럼 윤허를 내리지 않으셨다 합니다.”서원 공주가 코웃음을 쳤다.“본궁에게 그러한 수모를 겪게 하고도, 어찌 감히 위로 오를 생각을 하는 것이야?”그녀는 금방 어찌 손헌을 해칠지 생각을 끝냈다.김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 순간이라도 마음을 약하게 먹어서는 안된다.서원 공주의 방식은 흉악하기 그지없다.만일 소하 오라버니에 대한 살의를 품었다면, 아무리 무예가 좋은 그도 그녀에게 꼼짝 당하고 말 것이다.소하 오라버니와 손헌 중에 한 명만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 하는 자는 손헌이다!김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원 공주는 그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자네의 뜻은 소하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오?”김단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한번 바라보았다.떠보려는 서원 공주의 말에도, 김단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소한 총령께서 여러 도움을 받
김단은 말을 멈추고, 서있는 궁녀 몇 명을 바라보았다.소리를 낮추어 자신과 서원 공자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공주 마마께서 실혈이 과다하였나이다. 제대로 추스르지 않으시면, 단시일에 기력이 회복되지 않사옵니다.”김단의 말에 서원 공주는 그제야 눈을 떴다.그리고는 서 있는 궁녀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는 그들을 보며,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곧이어 김단에게 물었다.“본궁이 어찌하면 좋소?”서원 공주가 의술에 대해 까막눈이라고 해도, 낙태를 하고 먹어야 하는 약은, 한풍을 맞아 먹는 약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어선방의 사람들은 약방에 대해 잘 알지 못하나, 궁녀의 여인들이 낙태를 하면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만일 다른 이가 눈치라도 채면, 귀찮아지기 마련이다.김단은 잠시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공주 마마의 보양을 핑계삼아, 소신이 친히 약을 끓어 드리겠나이다. 손수 다룬 약재이기에 다른 이가 발견하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서원 공주는 만족하지 않았다.“수 어의가 때를 맞추어 약재를 정리하니, 어떻게든 알게 될 것 이오.”김단이 미간을 찌푸렸다.“공주마마, 소신이 빈궁들의 보양을 핑계삼아, 처방을 몇 가지 더 내리면 되옵니다. 약재도 섞으면 수 어의 께서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옵니다.”서원 공주는 그제야 미소를 지어 보였다.“좋은 생각이오.”김단이 답했다.“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빈궁들은 공주 마마께서 나서야 할 것 같사옵니다.”고작 칠품 의녀가 빈궁들의 보양을 도와준다 하여도, 귀를 기울이는 자는 없을 것이다.서원 공주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작은 일에 마음 둘 필요 없소, 술시에 사람을 보내겠소.”“예.”김단이 공손하게 대답했다.어쩌면 그녀의 공손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서원 공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김단을 향해 말했다.“또 한 가지 일. 자네와 상의할 게 있소.”그리고 옆에 있던 윤이를 한 번 바라보았다.윤이는 눈치를 채고 궁녀들과 함
늦은 밤.김단은 악몽을 꾸었다.꿈에서 그녀는 세답방 시절로 돌아갔다.다른 이에 의해 채찍질을 당하던 곳이었다.그녀는 개울가 근처로 끌려가 매질을 당하고 있었다.하나 가장 두려웠던 것은 매질이 아니었다,김단의 곁에 숙희의 시체가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김단은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익숙한 침장 너머로, 뛰어오는 숙희를 발견하고 나서야 꿈인 것을 알아챘다.생생한 꿈 탓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숙희가 지극정성으로 그녀를 살펴도,자신의 눈앞에 있어도 가쁜 호흡은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아씨, 노비를 놀라게 하지 마지 옵소서!”숙희는 김단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노비,노비가 의원을 데려오겠나이다!”그리고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김단이 그녀를 저지했다.“나는 괜찮다.”혹여 숙희가 걱정을 할까하여,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지금 시진이 어느 즈음이냐?”“묘시이옵니다.”숙희가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더 누워 계시렵니까?”김단이 고개를 저었다.“어의원에 가야한다.”의녀이기에 어의원의 규칙을 따라야만 했다.숙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노비가 부축해드리겠나이다.”그리고 김단의 세수를 돕고, 뒤이어 옷을 갈아입혔다.반 시진이 지나고 나서야 김단은 어의원에 도착했다.수 어의는 김단이 의녀로 봉직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뒤였다.하나 그녀를 축하하기는커녕, 김단을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가고는 충고를 건넸다.“서원 공주는 불손한 성격을 가지고 있소, 눈치도 보면서, 주의 있게 대답을 해야 할 것이오. 이전처럼 공주를 화나게 만들면 아니되오, 알겠소?”수 어의가 말한 이전은 임금이 평양 원군에게 열어준 연회때 일어난 일을 뜻한다.그 날도 김단은 곤란한 처치에 빠졌었다.다행히도 최지습과 구연평이 도와주었다.수 어의도 이전의 일을 전해 들은 듯했다.하나 오늘날에는 최지습이 외지로 출정을 나갔고, 구 낭자도 매번 김단을 대신하여 나설 수 없는 일.어쩔 수 없이
하나 김단은 멈추지 않고, 서둘러 궐 밖으로 향했다.이전에 의원이 목숨을 살리는 환약을 두 개 건네 주었었다.소한에게 주고 나서,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김단은 서둘러 평양 원군 관저로 돌아가야만 했다.겸인이 숨을 멎기 전에, 그 약을 겸인에게 먹여야 한다!김단은 다급한 마음에 관저로 뛰어갔다.사실 그녀는 겸인과 그저 몇 마디만 나눈 사이다.하나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선한 태도로 사람을 대한다.최지습도 겸인을 칭찬한 적이 있었다.절대로 죽게 해서는 안되었다!드디어 김단이 궐 문에 도착했다.곧이어 관저의 마차에 올라타 다급하게 말했다.“어서! 관저로 돌아가시오!”마부는 영문을 모르고, 밧줄을 세게 흔들었다.그 덕에 처음 달리는 속도로 관저로 돌아갔다.하나, 김단이 한발 늦었다.그녀가 마차에서 내리자, 내시 하나가 호위병사 두 명과 함께 관저에서 나왔다.내시가 김단을 보고는 예의를 차렸다.김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호위병사들의 대곤에 피가 묻어있었기 때문이다.순간, 심장이 세게 요동쳤다.그녀는 내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상관 없었다.서둘러 관저 안으로 들어갔다.안에는 시체 하나가 놓여져 있다.그 위로 하얀 천이 덮여 있었다.천 위로는 붉은색으로 가득 물들었다.“아씨!”숙희는 김단을 보고, 서둘러 달려왔다.어찌 된 영문인지 모를 것이라 생각하여,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궐에서 사람이 왔사옵니다, 겸인께서 공주 마마께 불경한 언행을 하셨다 하여 형벌을 집행하였나이다. 허나 겸인께서 나이가 있으신 탓에 열세 대를 맞으시고, 그대로 숨을 거두셨나이다…”숙희는 울먹거리며 말했다.관저의 하인들이 시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모두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김단은 무엇이 크게 잘못되었다 생각했다.또 한편으로는 숙희가 아닌 것에 다행이라 생각이 들었다.어쩌면 마당에 누워있는 자가,열세 대도 넘기지 못하는 자가, 숙희 일 수도 있었다.김단의 안색에 이상을 느낀 숙희가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소곤도 아니고 대곤 삼십 대였다.대곤은 비교적 넓은 모양을 갖춘다.또한 형벌을 집행하는 자들은 군부대의 사람이기에, 힘이 세서 뼈가 저릴 정도의 아픔을 느낄 것이다.삼십 대를 맞고 나면, 겸인이 어찌 살아남을 수 있는가.김단이 서둘러 입을 열려고 하자, 손등에서 무언가에 쏘이는 통증이 느껴졌다.다름 아닌 서원 공주가 그녀의 손등을 꼬집고 있었다.김단이 고개를 들자, 서원 공주가 경고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김단은 그제야 서원 공주가 자신을 상대로 시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서원 공주를 성심성의껏 그녀를 도운 것은, 이후에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한데 어찌 겸인을 처리하려 한 단 말인 가.서원 공주는 김단이 다른 이 때문에 자신을 배신하는지 시험하는 것이다.동시에 임금에게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그녀에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그녀의 한 마디, 작은 애교에도 사람의 생사가 왔다갔다 한다.그 자가 평양 원군의 겸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그 자는 외지로 나가 있는 평양원군의 신뢰를 받고 있는 겸인이다!어떠한 증거도 없으면서, 김단의 말을 끊고, 백 세를 넘긴 관리에게 막대한 벌을 내렸다.삼십 대가 아닌 열 대라고 할지라도,겸인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김단은 서원 공주와 임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겸인을 위하여 다급하게 해석을 하려는 자신의 모습을, 임금은 보지 못한 것일까.평양 원군의 겸인이 어찌 감히 국가의 공주에게 불경스러운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임금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는가.혹여 그저 친 자식을 너무 사랑하는 탓에, 평양 원군 관저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인가.아니면 겸인의 일을 빌미로, 다른 것을 경고하는 것인가.김단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하나 겸인의 오해를 풀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아챘다.“그만하거라. 짐도 돌아가 문서를 읽어야 하느니라!”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단을 바라보았다.“그저 작은 겸인에 불과하다, 짐이 다시 사
사실 임금은 이전부터 김단을 눈여겨보고 있었다.신의에게 의술을 배운 자가 아닌가.임 씨 부인이 궐 안에서 고열이 내려가지 않았을 때, 김단이 침을 놓아 열이 내려갔다는 사실은 임금도 전해 들었다.당시에는 신의의 실력에 혀를 내둘렀다.또한 짧은 기간 동안 배운 의술로 김단은 어의원들을 제쳤다.그 덕에 서원 공주의 칭송에 임금도 동의했다.고개를 끄덕거리고는 김단에게 물었다.“짐이 생각하기에는 아주 좋은 제안이네. 김 낭자는 어떠한 가.”임금과 공주가 좋다고 하는 데. 어찌 김단이 싫다고 할 수 있는가.하물며 의녀로 봉하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은가.곧이어 김단은 그들에게 절을 했다.“소인, 성은이 망극 하옵니다.”그녀의 모습에 임금이 웃음소리를 냈다.“소인이 아니라 소신이라 하거라.”“예. 소신, 성은이 망극 하옵니다.”김단은 한번 더 절을 했다.임금은 그제야 그녀에게 일어나라, 명했다.그리고는 공주를 보살핀 공으로, 귀한 약재를 적지 않게 하사했다.그 덕에 김단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조모가 남긴 많은 금은보화와 땅이 있었지만, 유일하게 약재가 부족했었다.오늘 궐에 온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서원 공주가 입을 열었다.“아바마마, 사실 아뢰올 말씀이 있사옵니다. 소녀가 평양 원군 관저에서 머무는 동안, 김 낭자의 보살핌을 보살핌을 입었사오나, 소녀에게 불경스러운 언행을 보인 자가 있었나이다.”그녀의 말에 김단이 깜짝 놀랐다.웃음을 짓고 있던 임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가 감히 공주에게 그러한 언행을 한 것이지?”“평양원군 관저의 겸인이옵니다!”서원 공주는 살을 덧붙여 말했다.“가장 낙후한 방을 소녀에게 내어 줄 뿐만 아니라, 윤이가 몇 마디 한 것을 빌미로 삼아 불경한 언행까지 일삼았사옵니다. 마치 관저가 제 거처인 것 마냥 행세하였사온데, 졸개가 호랑이 행세를 하는 격이옵니다. 아바마마, 부디 소녀를 위하여 나서 주셔야 하옵니다.”서원 공주의 말에 김단은 바닥 ㅣ
서원 공주는 나흘간 한풍을 맞았다는 이유로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나흘 동안 윤이를 제외하고, 김단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나흘 이후.서원 공주의 안색이 돌아왔다.그녀는 그제야 평양 원군 관저를 떠나, 궐로 돌아갔다.때마침 숙희도 마당에서 돌아왔다.하나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아 보였다.김단을 보자, 눈가가 벌겋게 변했다.“아씨, 노비가 원림장를 찾아갔나이다. 적매 나무가 아주 잘 크고 있다 하였사옵니다. 이듬해 겨울에 나뭇가지에 가득 피울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마당에 정리해야 할 곳은 노비가 손을 써 두었나이다.”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숙희의 모습에 김단은 걱정이 되었다.“왜 그러느냐, 누가 괴롭히기라도 한 것이야?”숙희는 고개를 저었다.곧이어 눈물을 터트렸다.“노비도 압니다. 노비를 위하셨다는 것을요. 그래서 노비를 떠나셨지요. 하나, 노비도 아씨가 걱정이 됩니다.흑흑흑..아씨, 노비도 고된 일 정도는 할 줄 압니다. 이후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노비를 내보내시지 말아 주시 옵소서.”숙희는 이러한 기분이 싫었다.아씨가 장양강에 몸을 던지고, 한양에 홀로 남은 사실에 견디기 힘들었다.우연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하나 이번에는 어떠한가.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다.그저 아씨 홀로 감내해야 한다는 것에 걱정이 되었다.적어도 자신이 곁에 있다면, 아씨가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며칠 동안 김단이 홀로 관저에 남아,서원 공주의 수발을 들었을 생각에 숙희는 마음이 아팠다.김단은 서둘러 숙희를 품에 안았다.“알겠어, 알겠어. 다음에는 내보내지 않겠다고 약조하마.”숙희는 훌쩍거렸다.“흑흑..약조 지키셔야 합니다!”울면서도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것은 잊지 않은 모양이다.마치 어린아이 같았다.김단은 숙희를 다독이고는,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숙희의 안색은 그제야 한결 밝아졌다.그 다음 날.김단은 호출을 받아 궐로 들어갔다.길을 안내하는 내시는 김단을 데리고 어화원으로 향했다.초가을의 날씨.쌀쌀한 바람이 불
서원 공주가 차가운 눈빛으로 김단을 바라보았다.눈빛에는 그녀를 향한 비웃음이 담겼다.“다른 이를 엮지 말라니, 그러하면 내 노여움은 자네가 감내하겠다는 뜻이오?”김단은 서원 공주의 눈을 직시했다.그녀는 조금이라도 물러 날 생각이 없었다.“만일 소인이 공주 마마를 이 고난에서 무사히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지켜 드린다면, 소인 또한 마마께 요긴한 인재라 할 수 있지 않사옵니까.”무슨 재앙이 닥칠 지 모르는 것처럼,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으랴.김단의 말에 서원 공주도 머리를 굴렸다.위아래로 그녀를 훑어보고 물었다.“본궁이 자네를 세답방에 보냈소. 자네를 괴롭히라고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을 보냈소. 어찌 본궁이 밉지도 않소?”“원한이란 본디 근원이 있기 마련이며, 그에 따른 업보가 따르옵니다. 소인이 당한 수모는 모두 임원이 시작한 일이옵니다. 오늘날 임원은 죽었으니, 그 업보는 갚았다고 할 수 있사옵니다.”더 이상 캐묻지 않겠다는 뜻이다.서원 공주는 김단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빛에서 작은 가식이라도 찾아내고 싶은 모습이다.하나, 김단의 눈빛에는 진심밖에 보이지 않았다.짧게 탄식을 내뱉고는 말했다.“잘만 한다면, 본궁도 자네에게 무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공주 마마께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곧이어 김단은 손에 쥐고 있던 그릇을 건넸다.윤이가 그릇을 건네받고, 공손하게 서원 공주에게 가져다주었다.곧이어 김단이 입을 열었다.“공주 마마,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옵니다. 이 약을 드시면 두 시진 동안 잠에 드시고, 두 시진이 지나면 제자리를 잡을 것이옵니다.”두 시진 동안 잠에 든다는 말에 서원 공주는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하나 김단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고는, 평양 원군의 관저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잠시 뒤, 그릇을 건네받고는 한번에 들이켰다.약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서원 공주는 약을 마시자마자 어지러운 증상을 보였다.윤이가 서둘러 그녀를 부축하여, 침상으로 향했다.다행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