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단은 서원 공주의 살기를 느꼈다.하나 당황하지 않았다.“소신은 소 장군을 감싸는 것이 아니옵니다. 소 장군께서 총령으로 봉직된 지 얼마 되지 않았사옵니다. 어떤 자가 금군을 이리 다스렸는지, 내막을 알아야 하지 않겠사옵니까?”곧이어 서원 공주의 눈빛이 변했다.“이전에 금군을 맡은 자가 누군지 알고 있소?”옆에 있던 윤이가 서둘러 답했다.“공주 마마께 아룁니다. 덕빈의 친 아우인 손헌이라는 자 이옵니다.”“그래, 손헌 이구나!”서원 공주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그래. 자신의 누이가 덕빈 인 것을 핑계 삼아, 그 손헌 이라는 자가 본궁을 몇 번이나 무시했는지 모른다.”서원 공주는 무언가를 떠오른 것처럼,말투에 냉기가 돌았다.“어쩌면 그 일은 모두 그놈이 계획 한 일이지도 모른다!”김단은 공주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다.그녀는 그저 소하의 억울함을 풀고 싶었을 뿐이다.이때, 서원 공주가 물었다.“손헌은 지금 어디 있는가?”윤이가 대답했다.“노비가 듣기로는 손 대감께서 파직 되신 이후에, 덕빈과 주상 전하가 많은 대화를 나누셨다 하옵니다. 하나, 전하께서는 좀처럼 윤허를 내리지 않으셨다 합니다.”서원 공주가 코웃음을 쳤다.“본궁에게 그러한 수모를 겪게 하고도, 어찌 감히 위로 오를 생각을 하는 것이야?”그녀는 금방 어찌 손헌을 해칠지 생각을 끝냈다.김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 순간이라도 마음을 약하게 먹어서는 안된다.서원 공주의 방식은 흉악하기 그지없다.만일 소하 오라버니에 대한 살의를 품었다면, 아무리 무예가 좋은 그도 그녀에게 꼼짝 당하고 말 것이다.소하 오라버니와 손헌 중에 한 명만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 하는 자는 손헌이다!김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원 공주는 그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자네의 뜻은 소하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오?”김단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한번 바라보았다.떠보려는 서원 공주의 말에도, 김단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소한 총령께서 여러 도움을 받
윤이의 말에 서원 공주가 코웃음을 쳤다.곧이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본궁도 같은 생각이다. 이전에는 큰 소리도 치더니, 어제 겸인의 시체를 보고는 조용하기 그지없다.”윤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뇌리에는 평양 원군 관저에 있을 때,김단이 그녀를 위해 해준 말이 맴돌았다.그 말 때문인 것일 까.공주 마마께서는 김단을 해하려고 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를 더 신뢰하기 시작했다.마냥 좋은 일은 아닐 수 있다.하나 공주 마마께 신뢰를 얻었으니,살 길은 하나 생긴 것이 아닌가.마침 공주 마마의 곁에 일을 할 자가 필요하다.김단은 서원 공주의 침소에서 나간 뒤, 어의원으로 돌아갔다.돌아가는 내내, 김단은 마음이 불안했다.방금 공주의 앞에서 한 말이, 소하 오라버니를 도울 수 있는 말이었을까.이번에는 넘어갔다 하여도, 다음에는 쉽게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그녀는 자신이 계속 ‘수’의 입장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하나 ‘수’ 에서 ‘공’으로 바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곧이어 어의원 안으로 들어갔다.문을 열자마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드디어 김 낭자께서 도착하셨나이다,소 장군께서 낭자를 오래 기다리셨나이다!”김단이 걸음을 멈추었다.고개를 들어 방 안을 바라보았다.곧이어 소한이 교의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는 동시에,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건넸다.“의녀 김단, 소 장군을 뵙습니다. 소 장군께서 어찌 어의원에 행차 하셨나이까?”“낭자를 찾아 왔소.”소한이 부드럽게 답했다.하나 그의 미간에는 강렬한 감정이 숨겨 있었다.“낭자가 의녀로 봉직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소. 경축하는 마음에 가져왔소.”그리고는 보석함 하나를 건넸다.김단은 받지 않았다.계속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감사하옵니다. 하나 소인은 그저 마음만 받겠나이다. 오는 것이 있다면 주는 것이 응당한 터인데, 소인은..”“낭자와 그리 생소한 사이는 아니지 않소?”소한은 김단의 말을 끊었다.보석함을 쥐
김단이 한숨을 내쉬었다.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눌렀다.“어찌 마노로 만든 이환 이옵니까?”소한은 그제야 김단의 분노의 근원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고개를 숙였다.마치 무언가를 잘못한 아이와 같은 모습이다.“그 이환은 낭자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오. 내가 가져온 이환으로 마음을 달랠 수 있지 않을 까 하여..”이전에 그가 김단에게 이환을 전해 주었을 때, 그녀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생생하게 기억한다.어쩌면 마노로 만들어진 이환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라는 마음에 가져 온 것이다.하나 그 이환은 결코 좋은 기억이 없기에, 다른 장식의 이환을 사왔다.혹여 김단이 알아차렸을 까.이환의 금장식은 매화다.소한의 이러한 모습에 김단은 그제야 눈치를 챘다.새로운 기억으로 이전의 안 좋은 기억들을 덮으려는 의도다.그녀는 고개를 떨구고는, 보석함을 닫았다.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그가 다 아는 것처럼 굴어도, 다 아는 것은 아니었다.김단이 말한다고 할지 언정, 소한이 이해를 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그녀는 그저 감사 인사를 건넸다.“잘 받았 나이다. 장군께 감사 인사드리옵니다.”김단은 소한이 금방 자리를 뜰 줄 알았다.하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약을 갈아야 할 듯 하오.”김단이 움찔했다.“군의관을 찾아 가시 지오!”군의의 약이 어의원의 약보다 좋은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소한은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군의관이 약을 다 썼다 하여, 어의원으로 보낸 것이오.”김단은 그의 말이 거짓이라 생각했다.하나 군의관이 거짓을 고하는 것 인지, 소한이 거짓을 고하는 것 인지 알수 없었다.그저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사람을 시켜 약을 갈아 드리겠나이다.”그리고 자리를 떠나려 하자, 소한이 다시 그녀를 잡았다.“다 시간이 없다 하오.”김단이 그를 바라보았다.“그걸 어찌 아십니까?”소한은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방금 전, 김단이 자리에 없을 때
김단은 머리속의 혼란을 잠재우고 앞으로 나아갔다.소한은 꼿꼿하게 앉아 있었고, 표정에는 약간의 초조함이 느껴졌다.김단은 이를 못 본 척 소한의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하지만 그의 덩치가 매우 컸기에 등쪽 붕대를 풀 때 김단은 그의 앞으로 다가가야 했다. 얼핏 보면 그녀가 그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녀는 숨을 죽인 채 최대한 그의 몸에 닿지 않도록 노력했다.그 역시 그녀의 거부감을 눈치챘고,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실망을 들어냈다.붕대가 풀리자 가슴 위 흉한 상처가 김단의 눈에 들어왔다.김단은 끝내 한숨을 내쉬었다.이 모습을 본 소한은 황급히 말했다. “이제 아프지 않소.”김단은 멈칫했다. 그녀는 걱정하지도 않았는데, 왜 안심시키려는 걸까?하지만 김단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약을 꺼내 상처에 조심스럽게 발라주었다.방 안은 조용했다.두 사람의 숨소리가 또렷하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그리고 그의 심장 박동 소리도 점점 더 크게 들렸다.김단의 심각한 표정을 보며 소한은 자신이 왜 과거 소중함을 몰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그의 곁에 있었고, 십여 년 동안 그를 중심으로 곁에 맴돌았다.끝내 그는 그녀를 밀어냈다.하지만 지금,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서 더 멀어질까 두려워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다.자업자득 아닌가!소한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김단은 그에게 약을 발라주고 다시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역시 안는 듯한 자세였다.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 김단은 더욱 여유롭게 붕대를 감았다.심지어 그녀는 소한의 귓가에 속삭였다. “공주가 오라버니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말을 마친 김단은 몸을 일으켜 소한을 바라보았다.순간 소한의 표정에 방금 전까지의 남녀 간 애틋한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싸늘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오?”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김단은 밖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붕대를 감는 척하며 귓가에 속삭였다. “세 달 전에 공주가 금군에게 농락당했습니다.”
김단은 너무 깊이 생각에 빠진 나머지 손동작을 잠시 멈췄다.김단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소한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오?”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소한은 옆에 있는 옷을 집어 입고 그녀를 한 번 쳐다본 후 말을 이었다. “형님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낭자가 나설 필요 없소. 서원 공주는 낭자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오.”김단은 소한의 말에 호의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소한은 그녀가 이미 공주를 처리할 마음을 먹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병서에 기록되어 있기를 ‘적을 공격하는 것보다 좋은 방어는 없다’고 했다.물러서는 것만으로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할 수 없을 때, 공격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을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이다!김단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과거 십여 년간 함께 지낸 세월 탓에 소한은 김단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김단이 아무 말 없이 침묵하는 것을 본 소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이오?”김단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소한을 바라보았다.이미 들킨 이상 숨길 필요도 없었다.어찌 됐든 소씨 집안 두 도련님들은 주상을 등에 업고 잘나가는 사람들이었고, 그녀보다 더 많은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서원 공주가 주상에게 이간질하여 그로 하여금 소씨 집안에 원한을 품게 하는 것보다 지금 당장 소한과 손을 잡고 서원 공주를 주상의 눈 밖에 나게 하는 편이 나았다.이에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주상의 신임을 얻고 싶습니다.”그녀가 말한 것은 총애가 아니라 신임이었다.총애를 얻는 것은 사실 쉽다. 그 예로 그녀의 의술로 주상의 눈에 들면 총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주상의 신임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렵다.그녀는 이에 대한 방법을 몰랐으나, 소한은 알고 있을 것이다.소한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김단을 바라보았다. “낭자가 서원 공주를 상대하려는 것이오?”그녀가 이렇게 커다란 야심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
그말에 중전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김단은 이 방 안에서 다른 사람이라면 아마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했다!안타깝게도 그녀는 황후와 맞설 용기가 없었고, 지금은 공주만을 상대할 생각이었다.이에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하지만 서원 공주는 김단을 보며 질책하듯 말했다. “김씨 낭자,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오?”지금 상황이라면 당황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김단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서원 공주를 보며 말했다. “소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서원 공주는 당황했다.중전이 거의 김단을 저격하며 그녀가 해칠 마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말했는데,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단 말인가?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일단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중전을 바라보았다.중전은 김단을 바라보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궁궐에서는 김씨 낭자가 명의에게 사사받아 의술이 매우 뛰어나다고 소문이 나있소. 더욱이 지금은 공주의 신임을 얻어 궁궐에 들어와 의녀가 되었지. 하지만 낭자가 세답방에서 나온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나는 낭자의 의술을 믿을 수가 없소.”비록 소씨 집안 큰 아들의 다리를 그녀가 치료했다 하더라도 중전은 여전히 의심을 품고 있었다.김단은 대답했다. “주상 전하께서 소신에게 마마님들의 몸조리를 도우라고 명하셨지만, 마마님들께 꼭 소신의 약을 드셔야 한다고 강요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중전 마마께서 소신을 믿지 못하신다면 소신의 약을 받으시고 바로 버리시면 됩니다.”그녀들의 몸조리를 돕는 이유는 어의원에서 약재를 점검할 때 공주의 유산 후 몸조리를 위한 처방을 내렸다는 것을 숨기게 하려는 것뿐이었다.그러니 중전이 그걸 마시든 안 마시든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중전은 김단이 적어도 두세 마디의 변명이라도 할 줄 알았지, 이렇게 바로 약을 버리라고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사실 그녀는 주상이 갑자기 궁궐 비빈들의 몸조리를 명한 것에 의심을 품었다.
김단의 말에 중전과 서원 공주는 깜짝 놀랐다.서원 공주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 “낭자, 자네가 나를 위해 입바른 말 몇 마디를 해줬다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시오! 우리 어마마마는 그 누구보다 건강하신 분이오. 1년 전쯤 한 번 편찮으셨던 것 말고는 아무 이상이 없으셨는데, 어떻게 독에 중독될 수 있단 말이오?”김단도 불안했다!그녀는 서원 공주의 몸조리를 해주려고 왔다가 우연히 중전의 맥을 짚은 것이지, 이렇게 큰 일이 벌어질 줄은 생각도 못 했다!사실 그녀도 이를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어쨌든 중전은 서원 공주의 친어머니고, 중전이 독살되면 서원 공주는 뒤에서 그녀를 도와줄 사람이 줄어드는 것이다.하지만 의원으로서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중전의 신임을 얻으면 훗날 자신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이에 김단은 사실대로 말한 것이다.“공주 마마께 아룁니다. 소신이 감히 거짓말을 할 수는 없사옵니다. 중전 마마의 맥은 특이하여 소신이 명의께서 주신 의서를 보지 않았더라면 맥에 아무 이상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이 말을 들은 중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니까 낭자 말은 내 맥을 다른 사람이 짚었더라면 내가 중독되었다는 것을 알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오?”어조에는 김단을 향한 불신이 뚜렷하게 느껴졌다.서원 공주도 말을 거들었다. “김단, 자네가 공을 세우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은 알겠지만, 중독이라는 것은 자네가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오!”“소신은 그런 생각을 한 적 없습니다.”김단은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중전 마마의 맥을 보니 중독되신 지는 이미 10년도 넘은 것 같습니다!”“말도 안 되는 소리!”중전은 분노하며 소리쳤다. “난 지난 10년 넘게 건강했단 말이오!”“그것이 바로 이 독이 무서운 이유입니다!”김단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독은 안색을 붉게 만들 뿐, 천천히 몸 속으로 잠식합니다. 겉보기에는 건강해 보이지
그 말인 즉, 김단은 이미 중전이 월경불순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하지만 김단은 계속해서 말했다. “월경불순 외에도 마마께서는 복통 증상이 있으셨을 것이고, 최근 몇 달 동안 더욱 심해지셨을 겁니다. 월경량은 적고 그 색은 검은색을 띠며, 종종 진행이 끊겼다 이어졌다 하며 보름 간 지속되셨을 겁니다.”이 말을 들은 중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의원에 궁궐 여인들의 월경 기간을 기록하는 담당자가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자세하게 기억할 수는 없을 것이다.김단이 이렇게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어딘 가에서 본 내용만으로 말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순간 그녀의 표정이 험악하게 바뀌었다.서원 공주는 중전의 안색을 살피고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미간을 찌푸린 채 김단을 보며 말했다. “또 할 말이 있는 것이오?”김단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중전 마마께서는 최근 잠자리에 드는 것이 매우 어려우셨을 것이고, 간신히 잠들어도 악몽에 시달리셨을 겁니다. 다음 날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셔도 기력이 없으셨을 겁니다.”모두 맞는 말이었다.하지만 중전은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네가 말한 것들은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다.”수 어의가 말하기를 걱정과 생각이 너무 많아도 잠자리에 들기 어렵고 악몽을 꿀 수도 있다고 했다.그럼에도 김단은 이어서 말했다.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신기한 것은 중전 마마께서 잠을 잘 못 주무시는데도 안색이 붉고, 기력이 없으심에도 정신은 매우 또렷하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상들이 바로 방금 소신이 말한 독이 몸 안에 잠복하여 겉모습을 정상으로 보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말이 끝나자 방 안은 조용해졌다.중전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서원 공주도 입을 꾹 다물었다.다만 두 사람의 표정에는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김단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렸음에도 두 사람이 입을 열지 않자, 김단이 참다 못해 말했다. “중전 마마께서 소신을 믿지 않으신다면 좀 더 기다려 보시지요.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