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학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김단을 쳐다보았다. 김단이 철없다고 여겼던 그는, 자기 모친께서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습에 그는 진실을 알 수 있었다.김단의 입에서 나온 말이 믿기지 않았다.어릴 적부터 하나뿐인 여식을 누구보다 아끼셨던 부친께서 그런 선택을 한 게 실로 믿기지 않았다.그는 뒤늦게 깨달은 진실에 가슴이 찢기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방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혼자 남은 소한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그는 어색하게 큰 마님에게 인사 올렸다.어린 나이에 늠름한 호국 장군이 된 사내를, 용맹과 지혜를 겸비한 자를, 예의 바른 사내를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소 장군, 어서 앉으시게! 어제 보내준 귀한 약재들은 잘 받았네. 내가 직접 감사 인사를 해야 했거늘.”소한은 임원의 곁에 앉았다. “소인의 부모님들은 정년이라 귀한 약재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주상전하께서 하사하신 인삼과 녹용이니 좋은 품질일 것입니다. 큰 마님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정말 효심이 깊구려. 마침 소 장군의 혼사에 대해 논의 중이었소. 소 장군이 직접 부모님께 여쭤보게. 적절한 날을 골라 상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소.”소한의 시선이 임원에게 향했다.임원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임씨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변론했다.“아이고, 아직도 이런 것에 얼굴을 붉히면 어쩌자는 게냐?”임씨 부인은 얼른 소한에게 말을 돌렸다.“나이도 어느 정도 찼으니, 이젠 혼사를 진행할 때가 된 것 같네.”그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소한의 시선이 김단에게 닿았다.“낭자 생각은 어떻소?”갑작스러운 질문에 김단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그녀는 물론, 옆에 있던 임씨 부인과 임원도 상당히 놀란 눈치챘다.소한과 김단을 번갈아 쳐다보던 임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혹
한편, 김단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들어온 큰 마님의 병세가 악화하였다.임씨 부인의 말대로 큰 마님의 건강은 예전 같지 않았다.금일 무리를 해서인지 눕자마자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다행히 큰 마님을 모시고 있던 몸종이 미리 의원을 불러왔고 침소에 누운 그녀에게 침을 놓기 시작했다. 한 시진이 훌쩍 지나서야 그녀는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김단은 처음 보는 모습에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큰 마님은 당황한 김단에게 손짓을 했다.김단은 혹여 자신 때문에 그녀의 병세가 악화할까 봐 눈물을 참으며 곁으로 다가갔다.“많이 놀랐느냐?”부드러운 목소리에 김단은 코를 훌쩍이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무병장수하시겠다고 약조하셨잖아요.”하지만 큰 마님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아 보였다.“이 할미도 오래오래 네 곁에 남아 널 지켜주고 싶구나.”큰 마님은 불현듯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 할미가 너에게 좋은 혼 자리를 알아봐도 되겠느냐?”건강이 그리 악화되지 않았을 때, 이 집안에서 자리를 잡고 있을 때, 손녀를 위한 좋은 혼사를 찾아주는 게 그녀가 김단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그 뜻을 모를 리 없었던 김단이었지만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소녀는 조모님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3년간 그녀는 많은 것들을 깨달았다.15년간 함께한 가족도 하루아침에 버리는 마당에 피도 섞이지 않은 부군에게 자신의 일생을 맡길 수 없었다.이번 생은 조모님의 곁을 지키기로 결심했다.조모님이 세상을 뜨면 이 집을 나가 홀로 살기로 했다.절에 들어가 수행을 하는 게 이 집안 사람들과 얽히는 것보단 나았다.큰 마님도 그녀의 성정을 모를 리 없었다.한번 결심한 일은 누가 뭐라 해도 할 성정이기에 큰 마님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아꼈다.김단은 큰 마님이 잠들 때까지 곁을 지키다가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그녀가 별당으로 들어가자마자 숙희가 다가왔다.“아씨, 둘째 아씨께서 찾아오셨습니다.”‘임원이?’미간을 살짝 찌푸린 김단에게
그녀의 질문에 임원은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임원은 연신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아니오. 그런 적 없소. 그때 공주자가의 유리잔을 깨트린 게 나인 것은 맞지만, 낭자를 모함한 것은 내 몸종이오…”그녀는 억울한 듯 말했다.문에 비스듬히 기댄 임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한데 3년 전에는 왜 진실을 고하지 않은 것이오?”말문이 막힌 임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김단이 조롱어린 어투로 말했다.“낭자가 유리잔을 깨트렸다고 중전마마와 공주자가께 고하면 됐을 터인데, 왜 하지 않았소?”당황한 임원은 자리에서 휘청거렸다.“무, 무서웠소. 처음 궐에 들어 중전마마와 공주자가를 뵙는 자리에서 내 죄를 고하는 것이 두려웠소. 하여…”“이제 와서 왜 이런 말을 하오?”김단은 임원의 말을 중도에서 가로챘다.어떤 말로든 3년 전의 일을 무마시킬 순 없었다.임원은 흐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낭자가 날 용서만 해준다면 원하는 건 전부 돌려줄 수 있소. 아버님과 오라버니에게도 말씀해 낭자의 오해를 풀겠소. 매화당도 돌려주겠소. 그리고, 그리고 장군님도 돌려주겠소.”김단은 그제야 임원이 여기까지 찾아온 까닭을 눈치챌 수 있었다.김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내 분명히 말했소. 낭자의 부모님이고 낭자의 오라버니요.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분이오. 매화당은 내 비록 좋아하긴 하나, 대감의 심혈이 깃든 곳이니 낭자의 것이어야 하오. 만일 이곳이 탐난다면 알려주게. 낭자 말 한마디면 언제든지 가질 수 있소.”임원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오. 낭자와 거처를 다투려고 온 것이 아니오.”“알고 있소.”김단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장군님 때문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소.”잘못을 빌러 왔다고는 했지만 결국은 남자 때문이었다.임원의 속내를 알아차린 김단의 말에, 임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3년 전, 세답방에 가기 전부터 낭자의 혼처였네. 내 비록 지금 여기에 묶고 있긴 하나 그것 또한 조모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 때문이오. 하물며 난 더는
김단은 방금 벗어 놓았던 옷을 걸칠 새도 없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무슨 일이냐? 누가 이리 소리치는 것이냐?”숙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뒤를 바짝 따랐다.“쇤네도 모르겠습니다. 아씨 옷을 걸치십시오. 밖이 많이 찹니다!”하지만 김단은 자신의 옷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임원이 물에 빠졌다면 아마도 자기 별당에 있는 연못일 것이기에.그 옛날 유리잔 깨뜨린 죄로 세답방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었다. 만일 임원이 이번 사고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임학이 당장 그녀를 죽여버릴지도 모른다.김단이 도착했을 땐,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임원이 보였다.얼어붙은 물속에서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돌다리 위에 몰려든 하인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성큼성큼 다가간 김단이 그들에게 외쳤다.“뭣들 하는 것이냐? 당장 구하지 않고 뭐 하는 것이냐?”몇 명의 몸종들이 난처한 표정으로 답했다.“쇤네 때문에 아씨께서 정절을 잃으시면 어찌합니까?”“정절을 지키는 것이 생명보다 중하더냐?”김단은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몸종을 노려보더니 망설임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연못은 깊지 않았으나 찬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얼음장 같았다.연못 바닥은 진흙투성이라 발을 딛기가 어려웠다. 조금만 방심하면 가라앉을 수 있다.힘겹게 임원을 구해낸 김단이 밖으로 나오자, 숙희는 얼른 두터운 옷으로 두 사람을 단단히 감쌌다.“뭣들 하는 거야? 어서 의관을 불러와! 내가 두 분을 모시고 방으로 갈 테니 뜨거운 불을 지피고 따뜻한 생강차를 내오거라!”숙희의 화난 목소리에 구경하고 있던 다른 몸종들이 제각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임원의 몸종이 이곳으로 달려왔다. 몸종의 뒤에는 임학도 있었다.얼음물에 빠져 얼굴이 창백해진 자기 주인을 발견한 명희는 황급히 임원을 감싸안았다.“아씨 괜찮으시옵니까? 어찌 물에 빠지신 겁니까?”명희는 곧장 김단을 노려보며 따졌다.“아씨께서 우리 아가씨를 밀치신 거지요?”억울한 사람을 몰아가는 것은 3년 전 그대로였다.그녀가 뭐라
김단의 말에 임학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의 머릿속에 물속에서 발버둥 치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나인들이 떠올랐다.그는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임학이 정신을 차렸을 땐 김단이 이미 자리를 뜬 뒤였다.“아씨…”명희의 울음소리가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임원은 명희를 노려보며 말했다. “울기만 할 것이냐? 어서 의원을 불러오거라!”명희는 그제야 황급히 의원을 데리러 갔다.임학은 임원을 부축하여 매화당으로 향했다.얼마 뒤 의원은 임씨 부인과 함께 매화당으로 들어왔다.의원이 한편에서 임원의 진맥을 하고 있을 무렵 부인이 임학을 끌고 밖으로 나가 물었다.“어찌 된 일이오? 갑자기 물에 빠졌다니? 혹… 혹 단이가…”“어머님!”임학이 미간을 찡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단이가 원이를 구했습니다.”그는 한쪽에 서 있던 명희에게 손짓했다.“이리 오너라.”숙희에게 뺨을 맞아 얼굴이 부어있던 명희는 임학의 부름에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달려왔다.의도적으로 부인에게 자신이 맞았다는 것을 알리기 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임씨 부인은 명희의 얼굴이 부어오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네 얼굴은 왜 또 그 모양이냐?”명희는 말없이 임학의 눈치를 살폈다.임학은 명희를 한 번 흘겨보더니 물었다.“단이와 원한이 있는 사이냐?”속으로 깜짝 놀란 명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쇤네가 감히 아씨와 무슨 원한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면, 단이를 계속 모함하려 드는 연유가 무엇이더냐?”임학이 싸늘하게 물었다.자기가 알고 있는 누이는 절대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다른 이를 해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게다가 임원과 김단이 밖으로 나온 뒤에야 임학은 명희와 함께 그곳에 도착했다.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3년 전에도 이 몸종의 증언 때문에 김단의 죄가 확실시되면서 세답방으로 끌려갔다.명희는 임학이 화를 참고 있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입을 잘못 굴렸다간 꼼짝없이 죽을 것
임씨 부인의 오랜 친우 덕빈이었다.물에 빠져있던 나인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울부짖었다.“덕빈마마…”“마마, 살려주시십시오.”상황을 파악한 덕빈은 얼굴을 찌푸리며 옆에 있던 상궁을 쳐다보았다.상궁은 얼른 아랫것들에게 지시했다.“당장 환복부터 하거라! 아랫것들이 고뿔에 걸리면 마마님들을 무슨 수로 모시단 말이야?”상궁의 불호령에 나인들은 울음을 멈추고 각자의 침방으로 돌아갔다. 나인들이 모두 흩어진 뒤에야 덕빈은 손에 막대기를 들고 있는 임학에게 차갑게 말했다.“본궁마저 때릴 작정이오?”정신을 차린 임학은 그제야 손에 든 막대기를 던지고 예를 갖췄다.“당치 않사옵니다.” “궐에조차 이리 막무가내로 구는데, 본궁에겐 그리하지 아니한다는 보장이 있소?”덕빈은 화가 나 보였다.임학은 그제야 자기가 성급하게 행동한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세답방은 궐 내에서 가장 계급이 낮은 곳이지만, 어찌 되었든 궐의 일부였다.이 안에서 발생했던 일이 외부로 퍼져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면 임학은 물론 진산군댁이 고초를 겪을 것이다. 임학은 궐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다.3년 전 김단이 큰 처벌을 받았던 것도 공주자가의 가장 소중한 유리잔을 깨트린 죄를 물은 것도 있었지만 주상께서 진산군에게 경고하는 의미도 있었다.그렇기에 3년 간 아무도 김단을 찾아가지도 않은 것이다. 그녀의 안위도 궁금해하지 않았다.그들은 주상에게 충심을 표하기 위해 어심을 달래기 위해 항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이가 고문당했던 것처럼 고초를 겪고 있는 나인들을 본 임학은 이성을 잃고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바닥에 꿇었다.“죽여주십시오, 마마. 소인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벌은 기꺼이 받겠나이다.”덕빈은 화가 났지만 어릴 적부터 봐왔던 친우의 아들을 벌하는 게 쉽지 않았다.그녀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이만 돌아가시게. 주상께는 본궁이 아뢰겠으니 이제부터 세답방에는 얼씬도 하지 마시오.”임학은 그녀의 명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나인들을 혼내주긴 했
진산군은 김단과 임학을 번갈아 바라보았다.“덕빈마마께서 나서주지 않았으면 너는 물론이고 이 늙은 아비도 의금부로 끌려갔을 것이다!”바닥만 바라보던 김단은 헛웃음이 났다.임학에게 하는 말 같았으나, 이 말은 그녀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바로 그때, 밖에서 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버님…”숨넘어가는 듯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고 김단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임원은 몸종의 부축을 받아 비틀거리며 들어왔다.얼굴이 피로 범벅된 임학을 발견한 임원은 눈물을 떨구며 그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아버님, 노여움 푸세요. 콜록…”격렬하게 기침을 하며 애원하는 여식의 모습이 애처로웠던 진산군은 그녀의 몸종에게 고함 질렀다. “당장 너희 아씨를 모시고 나가거라!”아들의 얼굴을 살피던 임씨 부인도 다급히 여식에게 다가가 부축했다.“고뿔이 다 낫지도 않았거늘, 어찌 이리 무모하더냐?”“오라버니를 벌하신다 들었습니다.”하염없이 눈물을 흘려대며 애원하는 임원이다.“오라버니를 용서해 주셔요. 오라버니가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아버님께서도 이리 화나셨겠지요. 하오나 오라버니는 결코 불효자가 아니옵니다. 분명 말 못 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소녀를 봐서라도 오라버니를 용서해 주세요.” 여식의 간청에 진산군의 화가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자신을 위해 아버님에게 간청하는 누이에게 큰 고마움을 느낀 임학의 시선이 다시 김단에게 향했다.그러나 김단은 무표정한 얼굴로 어떤 감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냉정한 모습에 임학은 가슴이 아팠다.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 부친에게 간청하는 누이와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누이는 완전히 상반되었다. 그녀를 괴롭혔던 나인들과 상궁에게 똑같이 갚아준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자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분노가 많이 사그라든 진산군은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알겠다! 오늘 있었던 일은 교훈으로 삼거라!”말을 마친 진산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임씨 부인은 임학의 몸종에게 일러주었다.“어서 의원을
김단은 덕빈궁의 뜰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서 있었다.세답방에는 3년 있었지만 덕빈궁은 처음이다. 그러나 덕빈궁은 세답방과 느껴지는 기운이 비슷했다. 숨 막힐 듯한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3년 전처럼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얼마나 서 있었을까, 차가운 날씨 때문에 발가락은 점점 감각을 잃었다. 그때 덕빈궁의 나인이 그녀를 안으로 안내했다.문을 열자, 따듯한 공기가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김단은 코끝이 찡해냈다. “과연 빨래를 잘했더군.”덕빈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고 김단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춰 말했다.“마마,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덕빈은 가볍게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과연, 자네 모친 말대로군.”그녀가 말하는 모친은 임씨 부인이었다. 김단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다보았다.덕빈은 방안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방문이 닫히자 따뜻한 기운이 그녀를 감쌌지만 김단은 마냥 편안하지는 않았다. 알 수 없는 불길함만 들었다.덕빈은 섬섬옥수 같은 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자.”부드러운 덕빈의 목소리가 이질적으로 들렸다.김단은 어리둥절해서 덕빈의 손을 잡았다.그녀를 자리에서 일으킨 덕빈의 시선이 동상에 걸린 김단의 손에 머물렀다.“어제 빨래를 하라 명한 것에 속상하진 않았소?”덕빈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녀를 걱정하는 듯한 어투에 김단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그녀가 세답방에서 3년간 겪었던 수모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김단을 자기 옆에 앉힌 덕빈이 계속해서 물었다. “본궁을 탓하지 말게. 세답방 궁녀들이 누구의 명 때문에 그리 한 것인지 잘 알고 있으리라 믿소. 하나, 낭자의 오라비가 충동적으로 군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오. 본궁이 낭자를 벌하지 않았다면 전하께서 진산군댁을 가만두진 않았을 것이오.”김단도 이해했다.진산군댁의 지위는 예전 같지 않았다. 그들의 생사는 덕빈이나 다른 후궁들의 말 한마디에 좌지우지될 정도였
김단이 눈살을 찌푸렸다.소정원이 그녀를 오해하고 있었다.하지만 소정원과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아무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자신의 말을 믿어줄 리가 없다.하지만 소하의 눈빛도 같이 어두워졌다.소정원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분노가 들어있었다.“진상을 밝히기 전까지, 말을 아끼는 것이 좋을 것이야.”하지만 소정원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그녀의 말투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진상이 어찌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당시에 저는 모친과 있었사옵니다, 자칫하면 그 사람들한테 죽을 뻔했습니다! 만일 작은 형수님이 아니었다면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모르옵니다!”그때의 일을 떠올리자, 소정원의 눈가가 붉어졌다.놀란 마음이 아직 진정이 되지 않은 모양이다.그리고 억울한 말투로 다시 말을 이었다.“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찾으려고 했는데, 먼저 도망갔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그녀의 말에 소 씨 부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정원과 함께 김단을 찾기 위해 다급하게 움직였다.허나 김단이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서운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잠시 감정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그만하거라. 네 형수도 쉬어야 하지 않겠느냐.”소정원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몸을 돌려 김단을 보지도 않았다.김단은 귀찮은 마음에 자리를 떴다.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이 돌아오셨습니까?”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임원이었다.김단이 눈살을 찌푸렸다.임원은 몸종의 부축을 받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얼굴에는 눈물자국이 가득했다.“누이, 어찌 이리 되셨습니까. 홀로 숲으로 도망쳤을 때,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흑흑흑..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옵니다..”임원은 엉엉 울었다.진심 어린 행동을 하며, ‘누이’ 라며 친근하게 부르는 모습에 김단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옆에 있던 소정원은 화를 내며 다가왔다.“형수님, 저런 사람을 어찌 걱정하시옵니까?”임원은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정원, 그런 말 하지 마시오. 누이는 어쩔 수 없이 그
과거의 기억이 다시 몰아치자, 김단은 그만 묻혀 버리고 말았다.그 순간 만큼은 저항할 생각도 없었다.마치 상황에 홀린 것 같았다.어찌 자신의 말을 믿을 것이라 생각했을까,그가 한 번도 자신의 말을 믿은 적이 있었는 가.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기운이 퍼졌다.김단의 자신의 두 팔로 자신을 끌어안았다.작은 따뜻함이라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차가운 기운은 사방곳곳에서 퍼졌다.김단은 자신을 더욱 감싸안았다.그녀의 몸은 벌벌 떨기 바빴다.옆에 있던 소한은 김단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어쩌면 오늘 일에 화가 나서, 순간 차가워졌다고 생각했다.그는 손에 쥐고 있는 겉옷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마부에게 앞으로 가라는 지시만 내릴 뿐이다.진상은 자신이 돌아가서 직접 조사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해시가 되기 전에 마차가 관저 앞에 멈췄다.김단이 가림천을 들췄다.소한이 밖에 서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그녀의 발목이 다쳤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정성을 다하는 것일지도 모른다.하지만 김단은 그를 무시했다.아픔을 꾹 참고 마차에서 내렸다.소한은 눈살을 찌푸렸다.어찌 된 일 인지 알 수 없었다.숲에서는 자신의 등에 기대어 있었지 않았는 가.그때는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았는 가.“아씨!”큰 목소리가 들려왔다.숙희가 서둘러 관저에서 뛰쳐나왔다.그녀는 김단을 보자 눈물을 쏟아냈다.“흑흑, 아씨, 다쳤사옵니까? 흑흑흑..”숙희의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김단도 자신의 모습이 꼴사나울 것이라 생각했다.머리가 풀려 있고 치마도 찢어졌으며, 팔목에는 여러 상처가 그어져 있었다.숲에 가시나무가 많았던 탓이다.그저 도망치기 바빠서 상처는 볼 시간도 없었다.숙희가 알려주고 나서야,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김단은 숙희에게 몸을 반쯤 기대었다.농을 하며 웃었다.“울지만 말고, 네 아씨를 데려가야 하지 않겠느냐.”숙희는 그제야 눈물을 닦고, 김단을 부축하여 관저 안으로 들어갔다.곧이어 소
주변이 어두운 탓에 소한은 김단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하지만 쫓아오는 길 내내,나뭇가지에 걸린 천, 나뭇가지에 묻은 피, 심지어 나뭇가지에 걸린 머리카락을 보면서 그녀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몸 어느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을 것이다.김단은 아프다고 하지만 어디가 아픈 지는 정확히 말해주지 않았다.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 소한도 마음이 아팠다.그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마치 십 몇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올라타시오.”그리 익숙한 넓은 등을 보자, 김단은 여러 생각에 잠겼다.하지만 곧바로 손을 뻗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그리고 익숙하게 그의 등에 몸을 기대었다.소한은 그녀를 업었다.한 손으로는 그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춤에 있는 긴 검을 뽑아냈다.검을 휘두르며 가시나무 길을 향해 걸어갔다.달빛이 여전히 얼룩덜룩했다. 동시에 밤의 바람도 유난히 추웠다.하지만 지금 만큼은 달랐다.김단은 열여덟의 소한에게 업혀 있는 것 같았다.이로 말할 수 없게 안심이 되었다.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두 사람은 숲을 빠져나왔다.그리고 산 동굴 앞에서는 불을 피우고 있었다.몇 명의 아전들이 시체를 밖으로 옮기고 있는 중이다.바람에 의해 천이 들춰지더니 시체의 얼굴이 드러났다.그 사람은 구서였다.김단이 깜짝 놀랐다.“저, 저 자가 어찌..”혹여 자신이 구서를 돌로 죽인 것일까.그리 세게 힘을 주었나.소한은 김단을 멀지 않은 마차까지 업어다 주었다.그리고 천천히 마차 위에 올려놓고 대답했다.“구서가 원이를 범하려고 하였소, 그래서 원이가 죽였소.”임원이 죽인 것이다.김단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임원은 어디 있습니까?”“걱정하지 마시오, 원이는 무사하오. 어머니와 정원이를 데리고 돌아갔소.”소한의 말투는 다정했다.임원을 입에 올려도 며칠 전처럼 차갑게 굴지 않았다.김단의 마음이 내려앉았다.“임원이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소한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김단의 몸에 덮어 주었다.“아무 말
김단이 다시 한번 더 은침을 꺼내 구서의 다리를 향해 찔렀다.매일 소하에게 침을 놓기 때문에, 수법이 손에 익숙했다.구서의 허벅지를 찌른 이유는 제일 아픈 부위이기 때문이다.그는 고통스러움에 바닥을 굴렀다.“아!”비명소리가 동굴 안에 가득 퍼졌다.김단은 무리들에게 들킬까 봐, 구서의 몸에 올라타 그의 입을 막았다.구서는 힘껏 저항했다.그의 힘은 김단보다 훨씬 강했다.김단이 그의 몸 위에 올라탔어도, 온 몸의 힘을 써서 두 손을 눌렀다고 해도 곧 한계였다.이때, 그녀의 눈에 돌이 들어왔다.서둘러 떨어진 돌을 주워 구서의 머리를 향해 공격했다.그러자 살이 벗겨진 탓에 머리에서는 피가 났다.그 탓에 김단의 눈에 피가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곧이어 그녀의 뇌리에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이전에 숲에서 산적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던 일이 있었다.순간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은 마음에, 손에 들고 있던 돌을 내던졌다.다행인 것은 구서가 기절했다는 것이다.김단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밖에 나갔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다.김단은 구서가 그들을 어디에 가두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하지만 구서의 하인들에게 잡혀서는 안되었다.잡히면 그의 말대로 끔찍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해가 빠르게 지고, 하늘이 어두워졌다.숲의 길도 점점 걷기 어려웠다.차가운 바람과 달의 빛이 숲을 비추자 더욱 음산해보였다.허나, 김단은 멈출 수 없었다.분명 구서의 하인들이 자신을 쫓고 있을 것이 아닌가.임원과 오랫동안 계획하였기에 절대로 쉽게 놔주지 않을 것이다.멈추면 아니된다…멈추면 아니된다…김단은 이 한 마디만 계속 읊을 뿐이다.도망치는 길에서 얼마나 넘어졌는지 알 수도 없었다.왼쪽 발목의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 같았다.고통스러움에 발을 절뚝절뚝 걸어야만 했다.얼마 가지 않아, 뒤쪽에서 바스락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김단은 구서의 사람들이 쫓아왔을 거라 생각했다.그녀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왼쪽 발목의 고통이
김단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산 동굴 속 안에 쓰러져 있었다.주위는 깜깜했다.머리도 어지러웠다.이때, 옆에 누워있는 사람이 소정원이라는 것을 알아챘다.쓰러지기 전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납치를 당했다는 사실에 김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리고 소정원을 세게 흔들었다.“정원, 일어나 보시오!”혹여 들킬까 봐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하지만 너무 많은 가루를 들이마신 탓에 요지부동이었다.김단은 순간 자신의 머리가 풀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머리를 조금 움직이자 머리카락이 밑으로 흘러내렸다.누군가가 비녀를 가져간 것이었다.심지어 소정원의 비녀도 사라지고 없었다.어찌 그녀들의 비녀를 가져간 것일까.혹여 비녀로 그들을 공격할 것을 알아챈 것일까.김단은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그리고 그들을 납치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맞히었다.구서!이전에 김단이 비녀로 그의 눈을 찔러 실명하게 했다.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을 때,동굴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아직도 안 깬 것이야?”구서의 목소리였다.곧이어 한 사람이 그에게 답했다.“작은 도련님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약에 취해서 정신도 못 차립니다!”구서는 코웃음을 쳤다.“저 계집들이 얼마나 거센 줄 알아? 쓰러진 척하면서 내 눈을 찌른 거라고!”그때의 일을 떠올리자, 구서는 깊은 분노가 밀려왔다.또 다른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그래서 노비가 계집들의 비녀까지 다 빼냈사옵니다.”그의 말에 구서는 그제야 미소를 지어 보였다.“하하, 역시 네가 일을 제일 잘 하는구나! 저 ‘김’ 씨 계집, 내가 오늘 결판을 내겠어!”그리고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구서는 먼저 바닥에 누워있는 김단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옆에 있는 소정원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죽고 싶어? 이 계집을 왜 데리고 온 거야?”상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아니, 둘째 도련님은 여러 명이랑 하시는 걸 즐겨..”“짝!”구서가 상대를 향해 뺨을 내리쳤다.“나는 복수를 하려 했단 말이다! 소정원을 데리고 오면 소
김단은 소 씨 부인이 그녀를 거절할까 봐 갑자기 찾아왔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소정원도 오늘 오전에서야 들은 것이었다.그녀가 고개를 저었다.“몰랐습니다! 본래 송백선이랑 호숫가에 놀러 가려 했단 말입니다.”소정원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스님이 경을 읽어준다는 것도 어디서 들은 건지 전혀 모르겠나이다. 하는 말이 집안의 여인이 다 같이 가야 기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김단은 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불안함이 생겨났다.그녀는 허리춤에 있는 돌과 은침을 무심코 만지작거렸다.그리고 머리에 꽂은 비녀를 만지며 눈살을 찌푸렸다.하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법화사에는 유명한 스님이 경을 읽고 있었다.그곳에는 소 씨 집안뿐만이 아니었다.김단은 소 씨 부인의 뒤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공간에 꽉 찬 사람들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경을 다 듣고, 소 씨 부인은 몇 명을 데리고 스님을 찾아가 절을 했다.그리고 평안부를 받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다른 집안 몇몇은 이미 자리를 떴다.또 다른 집안은 법화사에 남아 스님의 기도를 받기를 기다렸다.법화사 밖에는 소 씨 집안의 마차 두 대만 남았다.한편, 소정원은 차에 기대 잠을 자고 있었다.김단도 피곤하기 마찬가지였다.잠시 눈을 붙이려 쉬려했지만 차가 갑자기 흔들렸다.그 바람에 소정원도 벌떡 일어났다.마차 밖에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뭐하는 놈들이냐!”그 바람에 소정원과 김단도 깜짝 놀랐다.그들이 서둘러 마차의 천을 걷어치우자, 검은색 옷을 입은 열몇 명의 무리가 앞길을 막고 있었다.무리는 관저의 시위병의 질문에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긴 검을 꺼내 들고는 시위병들을 향해 공격했다.시위병들도 검을 꺼내 공격에 맞섰다.허나, 검은 옷의 무리들은 마차 안을 노렸다.시위병들의 저지 아래, 무리들 중 몇 명이 마차를 향해 공격했다.소정원은 깜짝 놀라며 소리 질렀다.“형수님, 조심하십시오!”말을 끝나기가 무섭
소한과 임원의 등장은 그저 작은 일에 불과했다.김단과 소하의 일상은 아무 이상 없이 흘러갔다.숙희가 의원에게서 두 권 의서를 가져왔다.한 권은 소하의 다리 관리에 대한 내용이었다.나머지 한 권은 두꺼웠다. 내용은 의원이 오랜 세월 정성스럽게 쓴 기록이었다.숙희가 김단에게 알려주기를, 의원은 김단에게 재능이 있다고 믿기에 많이 배웠으면 하는 마음에 책을 전했다고 했다.하지만 김단은 자신을 어릴 때부터 보았기에, 편애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자신의 신분을 들킬 수도 있는 의서를 감히 누구에게 보여줄 수 있을 까.그녀는 의원의 호의를 저버리지 않고,시간이 날 때면 의서를 꺼내보고는 했다.마치 소한과 임원을 깨끗하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어느 날, 소 씨 부인이 집으로 찾아왔다.법화사에 절을 하러 김단을 데려가려고 하던 참이다.“절이요?”소하는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그리고 김단과 눈을 한번 마주치고는 질문을 던졌다.“오늘이 부처님 온 날도 아니지 않사옵니까, 어찌 절을 하러 가시옵니까?”소 씨 부인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니다. 허나, 오늘 법화사에 스님들께서 경을 읽어주신다고 한다, 듣자하니 도를 이룬 스님이라 한 번 가보려고 한 것이다. 너와 한이의 평안을 부탁할 생각이지.”혹여 김단이 가기 싫어 할까봐 다시 말을 이었다.“원이도 같이 가기로 했지.”그 말에 소하가 김단을 바라보았다.임원이 법화사에 간다면 김단은 가지 않을 것이다.“단이는 제 다리의 치료를 위해 남아야 하옵니다.”그는 질병에 관한 변명을 대면 자리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반대로 소 씨 부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치료가 아니라 네가 단이를 보내기 싫은 것이 아니더냐.”그리고 김단의 곁으로 다가갔다.그녀의 손을 잡고는 소하에게 고개를 돌렸다.“다리를 보살 피는 것은 큰 일이지. 허나, 절을 하는 것도 작은 일은 아니지 않느냐. 하물며 단이는 아직 싫다고도 하지 않았다, 어찌 단이를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냐?
익숙하지만 낯선 그림자였다.김단의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거리가 가까워질까 봐 김단은 몸을 돌리지 않았다.그저 앞에 있는 책장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내 대신 몇 마디 하려 오셨습니까?”소한은 그녀의 뒤에 서있다.쪽진 머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그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억누르는 듯한 말투도 답했다.“내가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소.”“모르옵니다.”김단이 차갑게 대답했다.“소 장군의 작은 일도 알고 싶지 않습니다.”“단아..”소한의 목소리가 떨렸다.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생각이 트인 듯 목소리가 한층 가벼워졌다.“괜찮소. 천천히 들려주겠소. 알고 싶지 않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다음에 모두 들려주겠소.”하지만 그의 대답에 김단은 그저 코웃음을 칠 뿐이다.다음?“저와 소 장군 사이에 다음은 없습니다.”김단은 그녀가 말한 대로 더 이상 소한을 신경쓰지 않았다.분노를 참고 있던 소한에게 불이 붙은 것 같았다.“누구와 다음이 있고 싶은 것이오?”질투 섞인 질문에 김단은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소한은 그녀의 어깨를 잡아 자신의 방향으로 돌리려 했다.김단도 버텨 보았지만 힘이 상대가 되지 않았다.결국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그의 눈가가 붉었다.“누구, 누구와 다음이 있고 싶소?”소한이 다시 물었다.평소의 눈빛과는 다르게 다급함과 애원함이 들어있다.“내 아우와 계속 지낼 생각이오? 낭자,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니오!”김단은 소한의 눈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심지어 그의 눈동자에서 자신의 침착한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마치 이전에 김단이 소한을 찾으러 갔을 때와 같았다.자신이 혼인을 바꾸지 말라고 부탁했을 때, 그의 반응과 같았다.“제가 누구와 함께 하든지, 소 장군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그리고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소 장군의 이러한 행동이 저에게 얼마나 해로운 지 아십니까.”소하의 집에 하인이 없기에 망정이다.만약 그
임원이 소리를 한 바탕 질렀다.하지만 방 안의 두 사내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방법이 이제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이전에는 자신이 눈물 한 방울만 흘려도, 진산군 관저의 사람들이 다가와 위로해주기 바빴다.소한도 마찬가지였다.허나 오늘의 소한은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임원은 이미 소한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허나...작은 측은지심도 없는 것인가.김단은 임원의 시선을 따라 방 안을 바라보았다.소한의 준수한 얼굴에는 냉기가 가득했다.김단도 마음 한편이 좋지 않았다.허나, 소한은 항상 이러지 않았는 가.그녀를 지켜줄 때에는 한양 전체를 둘러보며 복수를 해주곤 했다.하지만 더 이상 지켜 주지 않을 때는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김단이 고개를 돌려 임원을 바라 보았다.“기억하시오. 이 세상에서 잘난 척 할 자격도 없는 자가 자네라는 것을. 나는 자네와 싸우지 않을 것이오,ㅜ자네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내가 싫소. 작은 며늘 아씨의 본분을 지키시고,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자네도 편히 지내지는 못할 것이오.”김단을 말을 끝내고 자리를 떴다.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임원의 몸이 떨기 시작했다.분노였다.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두려움도 섞여있다.임원은 김단이 무섭다.삼년 전에 김단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무서웠다.임원의 모든 것은 김단으로부터 훔쳐 온 것이 아닌가.허나..지금은 두려워 할 때가 아니다.본분을 지키라니,소한이 방금 자신에게 한 경고가 아닌가.어찌 본분을 지킬 수 있을까.하늘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면 각자의 본분을 지킬 수 있을 터,김단이 죽으면 자신의 본분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분노로 가득 찬 두 눈은 김단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이때, 그림자 하나가 그녀의 시선에 나타났다.소한이었다.소한이 방 안에서 나와 김단을 쫓아갔다.임원은 더 크게 분노했다.하지만 입가에는 냉기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