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단의 말에 임학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의 머릿속에 물속에서 발버둥 치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나인들이 떠올랐다.그는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임학이 정신을 차렸을 땐 김단이 이미 자리를 뜬 뒤였다.“아씨…”명희의 울음소리가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임원은 명희를 노려보며 말했다. “울기만 할 것이냐? 어서 의원을 불러오거라!”명희는 그제야 황급히 의원을 데리러 갔다.임학은 임원을 부축하여 매화당으로 향했다.얼마 뒤 의원은 임씨 부인과 함께 매화당으로 들어왔다.의원이 한편에서 임원의 진맥을 하고 있을 무렵 부인이 임학을 끌고 밖으로 나가 물었다.“어찌 된 일이오? 갑자기 물에 빠졌다니? 혹… 혹 단이가…”“어머님!”임학이 미간을 찡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단이가 원이를 구했습니다.”그는 한쪽에 서 있던 명희에게 손짓했다.“이리 오너라.”숙희에게 뺨을 맞아 얼굴이 부어있던 명희는 임학의 부름에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달려왔다.의도적으로 부인에게 자신이 맞았다는 것을 알리기 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임씨 부인은 명희의 얼굴이 부어오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네 얼굴은 왜 또 그 모양이냐?”명희는 말없이 임학의 눈치를 살폈다.임학은 명희를 한 번 흘겨보더니 물었다.“단이와 원한이 있는 사이냐?”속으로 깜짝 놀란 명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쇤네가 감히 아씨와 무슨 원한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면, 단이를 계속 모함하려 드는 연유가 무엇이더냐?”임학이 싸늘하게 물었다.자기가 알고 있는 누이는 절대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다른 이를 해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게다가 임원과 김단이 밖으로 나온 뒤에야 임학은 명희와 함께 그곳에 도착했다.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3년 전에도 이 몸종의 증언 때문에 김단의 죄가 확실시되면서 세답방으로 끌려갔다.명희는 임학이 화를 참고 있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입을 잘못 굴렸다간 꼼짝없이 죽을 것
임씨 부인의 오랜 친우 덕빈이었다.물에 빠져있던 나인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울부짖었다.“덕빈마마…”“마마, 살려주시십시오.”상황을 파악한 덕빈은 얼굴을 찌푸리며 옆에 있던 상궁을 쳐다보았다.상궁은 얼른 아랫것들에게 지시했다.“당장 환복부터 하거라! 아랫것들이 고뿔에 걸리면 마마님들을 무슨 수로 모시단 말이야?”상궁의 불호령에 나인들은 울음을 멈추고 각자의 침방으로 돌아갔다. 나인들이 모두 흩어진 뒤에야 덕빈은 손에 막대기를 들고 있는 임학에게 차갑게 말했다.“본궁마저 때릴 작정이오?”정신을 차린 임학은 그제야 손에 든 막대기를 던지고 예를 갖췄다.“당치 않사옵니다.” “궐에조차 이리 막무가내로 구는데, 본궁에겐 그리하지 아니한다는 보장이 있소?”덕빈은 화가 나 보였다.임학은 그제야 자기가 성급하게 행동한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세답방은 궐 내에서 가장 계급이 낮은 곳이지만, 어찌 되었든 궐의 일부였다.이 안에서 발생했던 일이 외부로 퍼져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면 임학은 물론 진산군댁이 고초를 겪을 것이다. 임학은 궐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다.3년 전 김단이 큰 처벌을 받았던 것도 공주자가의 가장 소중한 유리잔을 깨트린 죄를 물은 것도 있었지만 주상께서 진산군에게 경고하는 의미도 있었다.그렇기에 3년 간 아무도 김단을 찾아가지도 않은 것이다. 그녀의 안위도 궁금해하지 않았다.그들은 주상에게 충심을 표하기 위해 어심을 달래기 위해 항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이가 고문당했던 것처럼 고초를 겪고 있는 나인들을 본 임학은 이성을 잃고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바닥에 꿇었다.“죽여주십시오, 마마. 소인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벌은 기꺼이 받겠나이다.”덕빈은 화가 났지만 어릴 적부터 봐왔던 친우의 아들을 벌하는 게 쉽지 않았다.그녀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이만 돌아가시게. 주상께는 본궁이 아뢰겠으니 이제부터 세답방에는 얼씬도 하지 마시오.”임학은 그녀의 명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나인들을 혼내주긴 했
진산군은 김단과 임학을 번갈아 바라보았다.“덕빈마마께서 나서주지 않았으면 너는 물론이고 이 늙은 아비도 의금부로 끌려갔을 것이다!”바닥만 바라보던 김단은 헛웃음이 났다.임학에게 하는 말 같았으나, 이 말은 그녀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바로 그때, 밖에서 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버님…”숨넘어가는 듯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고 김단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임원은 몸종의 부축을 받아 비틀거리며 들어왔다.얼굴이 피로 범벅된 임학을 발견한 임원은 눈물을 떨구며 그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아버님, 노여움 푸세요. 콜록…”격렬하게 기침을 하며 애원하는 여식의 모습이 애처로웠던 진산군은 그녀의 몸종에게 고함 질렀다. “당장 너희 아씨를 모시고 나가거라!”아들의 얼굴을 살피던 임씨 부인도 다급히 여식에게 다가가 부축했다.“고뿔이 다 낫지도 않았거늘, 어찌 이리 무모하더냐?”“오라버니를 벌하신다 들었습니다.”하염없이 눈물을 흘려대며 애원하는 임원이다.“오라버니를 용서해 주셔요. 오라버니가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아버님께서도 이리 화나셨겠지요. 하오나 오라버니는 결코 불효자가 아니옵니다. 분명 말 못 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소녀를 봐서라도 오라버니를 용서해 주세요.” 여식의 간청에 진산군의 화가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자신을 위해 아버님에게 간청하는 누이에게 큰 고마움을 느낀 임학의 시선이 다시 김단에게 향했다.그러나 김단은 무표정한 얼굴로 어떤 감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냉정한 모습에 임학은 가슴이 아팠다.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 부친에게 간청하는 누이와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누이는 완전히 상반되었다. 그녀를 괴롭혔던 나인들과 상궁에게 똑같이 갚아준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자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분노가 많이 사그라든 진산군은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알겠다! 오늘 있었던 일은 교훈으로 삼거라!”말을 마친 진산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임씨 부인은 임학의 몸종에게 일러주었다.“어서 의원을
김단은 덕빈궁의 뜰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서 있었다.세답방에는 3년 있었지만 덕빈궁은 처음이다. 그러나 덕빈궁은 세답방과 느껴지는 기운이 비슷했다. 숨 막힐 듯한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3년 전처럼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얼마나 서 있었을까, 차가운 날씨 때문에 발가락은 점점 감각을 잃었다. 그때 덕빈궁의 나인이 그녀를 안으로 안내했다.문을 열자, 따듯한 공기가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김단은 코끝이 찡해냈다. “과연 빨래를 잘했더군.”덕빈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고 김단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춰 말했다.“마마,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덕빈은 가볍게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과연, 자네 모친 말대로군.”그녀가 말하는 모친은 임씨 부인이었다. 김단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다보았다.덕빈은 방안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방문이 닫히자 따뜻한 기운이 그녀를 감쌌지만 김단은 마냥 편안하지는 않았다. 알 수 없는 불길함만 들었다.덕빈은 섬섬옥수 같은 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자.”부드러운 덕빈의 목소리가 이질적으로 들렸다.김단은 어리둥절해서 덕빈의 손을 잡았다.그녀를 자리에서 일으킨 덕빈의 시선이 동상에 걸린 김단의 손에 머물렀다.“어제 빨래를 하라 명한 것에 속상하진 않았소?”덕빈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녀를 걱정하는 듯한 어투에 김단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그녀가 세답방에서 3년간 겪었던 수모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김단을 자기 옆에 앉힌 덕빈이 계속해서 물었다. “본궁을 탓하지 말게. 세답방 궁녀들이 누구의 명 때문에 그리 한 것인지 잘 알고 있으리라 믿소. 하나, 낭자의 오라비가 충동적으로 군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오. 본궁이 낭자를 벌하지 않았다면 전하께서 진산군댁을 가만두진 않았을 것이오.”김단도 이해했다.진산군댁의 지위는 예전 같지 않았다. 그들의 생사는 덕빈이나 다른 후궁들의 말 한마디에 좌지우지될 정도였
순간 김단은 가슴이 철렁했다. 나인도 깜짝 놀란 듯 김단과 소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알겠사옵니다.”나인은 곧장 떠났다.소한은 김단에게 손짓했다.“낭자, 가지요.”김단은 어쩔 수 없이 소한과 함께 입구로 향했다.오늘따라 궁궐 안의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아무리 걸어도 커다란 궐문이 보이지 않았다.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앞으로만 나아갔다.둘 사이에는 신발 밑창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나는 소리만 있었다. 소한의 기억 속엔 언제나 시끄럽게 떠들던 그녀만 있었다. 종일 쉬지 않고 떠들었던 그녀이기에 이런 침묵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결국 참다못한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낭자 오라버니의 일은 나도 들었소. 어심이 어지러웠던 것은 사실이나 크게 노여워하시진 않으셨소.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오.”자기를 위로하는 소한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임학의 걱정은 하지 않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소한이 다시 말을 이었다. “덕빈마마도 진산군댁의 안위를 위해 그리한 것이니 마음에 두지 마시오. 큰 마님 생각도 해야지 않겠소.”덕빈의 의중도 그녀는 알고 있다. 이런 것은 그녀가 3년 전에 겪었던 고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기에.소한의 목소리가 그녀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단 낭자.”순간, 그녀의 심장이 뛰었다. 3년이나 지난 뒤에도 자신을 불러주는 소한에게 심장이 반응할 줄 그녀도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얼른 자기 감정을 억제했다.소한은 조만간 임원의 낭군님이 될 사람이었고 명목상 그녀와 사돈이 될 사내였다.그에게 감정을 품어서는 아니 되었다.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소한은 미간을 찌푸렸다.“언제부터 말수가 준 것이오?”소한은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싫었다.그의 질문에는 항상 대답했던 김단이다. 하나, 오늘 김단은 인사 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김단은 살짝 당황했다. 그녀는 뒤늦게 자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답방에선
김단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큰 마님을 살펴보았다.자신을 바라보는 큰 마님의 시선에서 소한과 다시 잘되길 바라는 큰 마님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한에게 아무 감정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음에도 큰 마님의 눈에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주상전하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소한가 그녀의 정혼자로 딱 맞았다.하지만 둘 사이의 감정은 오래전에 끝났고 소한의 곁에는 임원이 있었다. 이제 와서 그녀가 끼어들 수도 없었고 둘 사이에 끼어들 생각도 없었다.김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조모님, 소 장군께서 임원 낭자에게 줄 수정과를 쇤네에게 부탁하여 전달하게 했습니다. 두 사람이야말로 부부의 연이지요. 하오니 더는 그런 생각 마십시오.”큰 마님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한탄했다.“아이고! 남녀 사이의 정이 어디 한 번에 끊어지더냐? 난 그저 너희 둘이 전부터 잘 지내왔기에 아쉬워서 그런 것이다.”김단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올렸다.“소녀는 그저 조모님과 함께하고 싶사옵니다. 진심이옵니다.”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다시피 했기에 큰 마님이 이리 아쉬워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둘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더는 소한 때문에 괴롭게 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조모님의 곁을 지키며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어둠이 깃들자 김단은 큰 마님을 모시고 방에서 나왔다. 몸종들은 풍성한 음식을 갖춰놓았고 진산군과 정부인은 진작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김단의 부축을 받으며 나오는 큰 마님을 발견한 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큰 마님은 김단의 부축을 받으며 원탁의 상석에 천천히 앉았다.“모두 자리에 앉게.” 큰 마님은 오늘 유난히 기분 좋아 보였다. 그간 김단의 자리가 계속 비어 있었던 탓에 그녀는 항상 우울했었다. 다행히 올해는 김단도 자리에 있었다. 흥이 난 큰 마님에 부부는 김단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아, 너도 앉거라.”고개를 살짝 끄덕인 김단은 어색하게 자리를 둘러보았다. 예전에는 모친의 곁에 앉았지만 지금은
사실 김단도 이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그러나 그녀는 가진 돈이 한 푼도 없었고 알고 있는 친구도 없었기에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었다.게다가 조모님은 아직 여기에 계셨다. 조모님을 홀로 남겨두고 맘 편히 떠날 순 없었다.그렇기에 진산군과 임학이 아무리 듣기 싫은 소리를 해도 묵묵히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그릇에 닿았다. 이 사달이 난 원인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릇에 있는 고기를 한 점 집어 입에 넣었다.임학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먹을 마음이 생긴 것이냐? 진산군댁 첫째 아씨 성정 한 번 맞추기 어렵구나.”김단은 임혁을 한 번 쳐다본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진산군에게 예바르게 말했다. “노여워 마십시오. 의도적으로 도련님께서 집어주신 음식을 피한 것이 아닙니다. 몇 해 전에 몸이 상하면서 비린내가 나는 음식을 먹으면 발진과 아양으로 견딜 수 없었사옵니다. 하여 금일도 음식을 먹지 못한 것입니다. 다른 해산물에도 손을 대지 않았사옵니다.”김단의 말에 진산군 일가는 깜짝 놀라 그녀의 앞에 놓인 접시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어떤 해산물도 먹지 않았다.임학은 믿기 어렵다는 듯 말했다.“위병이 나 먹지 못한다면 믿었을 것이다. 한데 네가 제일 좋아하는 생선을 먹고 발진이 났다는 것을 나더러 믿으라는 것이냐? 내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김단은 조용히 옷소매를 거둬 자신의 팔을 보여주었다.매질에 상처가 가득 팔에는 발진 증세가 보이기 시작했다.“이럴 수가! 어서 의원을 부르거라!”부인이 다급히 외쳤다. 바로 이때, 임원의 기침 소리가 거세졌다.목에 무엇이 걸리기라도 했는지 숨이 가쁘게 기침하는 임원의 모습에 부인은 김단은 뒷전에 두고 임원부터 살펴보았다.그러나 임학의 시선은 여전히 김단의 팔에 향해 있었다. 이런 꼴을 보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그저 가족들에게 체면을 주지 않는 그녀가 얄미워 모질게 말했던 것이다. 생선을 좋아했던 누이의 얼굴에 어느새 발진 증세가 일어나기
갑작스러운 제안에 소한은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그러나 그가 답하기도 전에 임학은 소한에게 주먹을 날렸다.소한은 재빨리 몸을 옆으로 피했다.허공에 주먹을 휘두른 임학의 몸이 술상에 엎어졌고 음식들이 바닥에 떨어졌다.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음식을 들어 소한에게 던졌다.소한은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섰다.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미친 것이오?”이것은 취기가 아니었다. 아무리 술에 취해도 이런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임학의 옷자락이 어지럽혀있었다.임학은 신경 쓰지 않는 듯 손가락으로 소한을 가리키며 말했다.“원이의 마음에 상처를 줄 시 내 자네를 가만두지 않겠네!”소한은 차가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옷 정리를 했다.“전에도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군.”그때는 김단을 위해 말했었다. 멈칫하던 임학이 말을 이었다.“이제는 원이의 정혼자이니 탐욕 부리지 말게.”“자네가 먼저 제안했소. 난 아무 말도 안 했소.”소한은 차분하게 다른 쪽에 앉았다.임학은 헛웃음을 지었다.“우리가 알고 지낸 지가 몇 해인데 내가 자네 속셈을 모를 것 같소? 단이가 그날 수정과를 가져가지 않아 오늘 특별히 챙겨주지 않았소?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수정과를 원이에게 보냈다네. 단이는 자네에게 마음이 없네. 그만 질척거리시오!”‘내가 질척거려? 먼저 질척거린 게 누구인데.’소한은 마음속 말을 삼킨 채 술잔을 들이켰다.소한의 옆에 털썩 주저앉은 임학은 술병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소한의 뇌리로 상흔과 발진이 얼기설기 자리 잡은 김단의 팔이 스쳐 지났다. 옆 방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얼마 뒤 밖에서 폭발음이 들렸고 불꽃놀이가 시작한 듯 시끌벅적해졌다.사람들은 하늘에 터지는 화려한 불꽃을 바라보며 환호성을 질렀다.두 사람도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보았다.창가에 기대 손을 흔드는 여인의 형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불꽃을 즐기는 형체가 두 사람의 시야로 다가왔다.올해의
임씨 부인도 얼른 나서 구슬렀다.“대감, 원이가 좋은 뜻으로 한 일인데 결과가 나빴던 거죠. 보세요, 단이가 얘를 때려서 이 지경을 만들어 놨는데, 그런 원이를 어떻게 매정하게 또 벌하실 수가 있어요?”임원의 빨갛게 부어오른 반쪽 얼굴을 보자 진산군은 문득 3년 전 임원이 돌아왔을 때가 떠올랐다. 말라서 거의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임원은 그들이 15년간이나 헤어져 지낸 딸로, 헤어져 있던 15년간 그녀는 내내 고생만 했구나!그래, 그런 아이한테 진산군이 어떻게 매정하게 굴 수 있겠어?심호흡을 하고 진산군은 결국 임학에게 눈을 돌렸다.그러고는 다짜고짜 발로 찼다.“전부 이 못난 놈이 저지른 짓이야!”하지만 이번엔 임학도 벌써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어서 낼름 피했다.진산군은 발길질을 해도 차이는 게 없자 다시 걷어 차려고 하는데, 임학이 임씨 부인 뒤로 쏙 숨을 줄 몰랐다.“어머니, 아들이 어제 발길질을 당해서 지금도 가슴이 이렇게 아픈데! 또 차였다가는 죽을 거예요!”임씨 부인에게 막혀 진산군은 발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임씨 부인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분위기로, 그 말은 바로 임학을 용서해 달라는 것이었다.바로 그때 진산군이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부인! 이 못난 놈을 좀 보라고, 당신이 오냐오냐해서 어떻게 됐는지? 당신이 저 놈을 계속 감싸고 돌면 그야말로 수 나인이 말한 대로 우리 가문에 큰 화가 미치고 말 거야!”임씨 부인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없지만, 임학은 오히려 입을 삐죽거렸다.“제가 뭘 어쨌다고 그러세요? 그저 단이와 명정 대군의 혼사를 망치려던 것 뿐이잖아요! 누가 걔더러 황제께 사혼을 명 받고 그렇게 기고만장하래요? 걔가 먼저 어머니와 원이를 울리지 않았으면, 제가 뭘 그렇게까지 했겠어요?”임씨 부인도 맞장구를 쳤다.“단이가 사혼을 받고 확실히 좀 방자하게 굴었죠. 학이가 잘못했지만 저와 원이를 아껴서 그런건데,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는 법 아니겠어요. 대감,
임학의 말에 아픈 곳을 찔렸는지, 임씨 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임학을 가리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내가 언제 단이를 죽이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고 그래? 내 손으로 걔를 키웠어!”울먹이느라 마지막 말은 제대로 맺지도 못했다.임씨 부인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임학도 당황해서 얼른 잘못했다고 했다.“제가 말 실수를 했습니다. 어머니, 화내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임학이 용서를 구해도 임씨 부인은 듣기 싫다는 듯 임학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어머니의 태도에 임학은 미간을 꿈틀거렸다.그의 눈이 임원에게 향하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사실 똑바로 말하면 단이 자신을 탓해야지, 어떻게 이렇게 모질 수가 있어. 어떻게 원이한테 이렇게 심한 짓을 할 수가 있냐고!”멀쩡한 얼굴을 때려서 이 지경이 되다니!그때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옆방에서 들려왔다.“둘째 아가씨께서 이말 저말 옮기지만 않으셨어도 큰 마님께서 쓰러지실 일은 없었습니다. 큰 아가씨께서 큰 마님을 대신해 둘째 아가씨께 가르침을 줬을 뿐이라, 큰 마님이 깨어나신 뒤에 큰 아가씨 행동을 칭찬하실 거라 생각합니다.”수 나인의 목소리였다.그녀는 이 말을 하며 네 사람 앞으로 오더니, 진산군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수 나인은 나이가 지긋한 사람으로, 큰 마님이 진산군댁으로 시집올 때 따라와서 진산군이 자라는 것을 쭈욱 지켜봤다. 비록 명목 상은 하인에 불과하나 진산군에게 있어 수 나인은 어른 중 하나였다. 따라서 그도 바로 손을 모아 읍하며 답례했다.이윽고 수 나인이 말을 이었다.“최근 집안에 벌어진 일은 둘째 아가씨 덕분에 쇤네도 큰 마님과 함께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 말을 듣고 진산군은 뒤를 돌아 임원를 째려봤다.임원이 여전히 불쌍하고 가련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진산군 마음 속에는 울컥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자리에 모두가 오늘 큰 마님이 쓰러진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진산군이 입을 열가도 전에 수 나인이 말을 계속했
수 나인은 차가운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임씨 부인이 어디론가 달려가는 게 보였다.‘구원병이라도 청하러 가는 건가?’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임씨 부인이 금방 다시 달려왔으나, 손에 매우 큰 돌멩이를 들고 있었다.수 나인이 너무 놀란 나머지 채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진산군이 소리쳤다.“부인, 안 돼!”하지만 한 발 늦었다.커다란 돌멩이가 세차게 김단의 머리를 내리쳤다.김단은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끼고 귀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더니 예리하게 윙윙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핏방울이 눈가를 타고 한방울 뚝 떨어지더니 이어서 두방울 세방울….그녀는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하고 서서히 고개를 들어 임씨 부인을 쳐다봤다.선혈로 물든 김단의 두 눈을 본 임씨 부인도 뭔가 깨달았는지 얼른 손에 든 돌멩이를 던져버렸다.“아니, 그게 아니라, 단아. 어미 말 좀 들어봐.” 임씨 부인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이 어미는 그저 네가 그만 뒀으면 해서,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어…”“털썩!”김단은 눈 앞이 깜깜해지더니 바닥에 쿵하고 쓰러졌다.진산군이 제일 먼저 나섰다.“전부 뭘 멍하니 있는 게야! 의원을 불러 오너라! 어서. 아가씨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고!”마당에 시녀들도 수 나인의 지휘 하에 허둥거리긴 했지만 김단을 방 안으로 옮기는데 성공했다.수 나인도 바짝 붙어 들어갔으나,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임씨 부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이때 임씨 부인은 놀란 나머지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진산군의 품에 안겨 있었다.임원도 이미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일어났는데 얼굴 반쪽은 팅팅 부어올랐고 입술에는 피가 베어나왔다.그녀는 임씨 부인 곁으로 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흐느낄 뿐이었으나, 임씨 부인은 한 팔로 그녀를 품에 안고 꺼이꺼이 대성통곡했다. 세 식구가 한데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이 사건으로 제일 깊게 상처를 입은 건 바로 자기들 셋인 양 보였다.하지만 화가 치밀어 거의 죽을 뻔한 사람은 큰 마님이고, 머리가 깨져서 피를
김단은 전에 자신을 괴롭히던 무수리들에게 달려들 때처럼 맹렬하게 임원을 덮쳤다. 임씨 부인은 눈 앞에 뭐가 휙 지나갔나 싶었는데, 벌써 임원이 김단 아래 깔려 있었다.“악!”임원이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자, 곧바로 김단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할머니께서 안에서 쉬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할머니께서 쉬시는데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김단의 가슴 속에 활활 타오르는 분노의 불길은 밖으로 표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김단은 한 손으로 임원의 입을 틀어막고, 그녀를 꽉 눌러 발버둥치지 못하게 했다.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따귀를 때렸다.김단이 임원을 패주고 싶은지는 오래 됐지만 그동안 억지로 인내해왔다.임원이 비록 악랄하고 못됐어도 그건 전부 성격이 그런 거라 생각했다.임원에게는 임씨 집안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다들 임원을 싸고돌고 임원도 매사에 임씨 집안 사람이 먼저였을 거라고 말이다.그들이 저지른 짓 하나하나가 김단을 아주 깊이 상처입혔어도, 김단은 매번 임원에게 손찌검을 하고 싶은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더이상 참는 건 불가능한 것이, 임원이 그녀의 참을성의 한계를 건드렸기 때문이다!“찰싹!”따귀를 때리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지며 임원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놀라 멈춰서 있던 임씨 부인이 달려나와 김단을 뜯어말렸다.“단아! 이게 무슨 짓이니! 어서 동생을 풀어줘!”하지만 임씨 부인이 김단을 말리는 정도는 사실 아무 소용없었다.예전에 세답방에 있을 때 그녀가 다른 사람을 올라타서 때릴 때, 적어도 열댓명의 나인들이 달려들어 그녀를 말렸다.누구는 그녀의 목을 잡아 조르고, 누구는 그녀의 머리끄댕이를 낚아채고, 전부 그녀가 상대의 몸에서 내려오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김단은 철천지원수에게 대항하는 능력을 키워,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절대로 쉽게 놔 주는 법이 없었다!임씨 부인이 몇 번 잡아당겨봤지만 김단을 끌어내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동안 김단은 임원의 얼굴에
“맞아 맞아, 다들 좀 비켜봐!”하녀들이 수선을 떠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김단은 오히려 따스함을 느꼈다. 그녀는 줄곧 이 집은 너무 차갑다고 생각했다. 빙고처럼 차가워서, 오직 할머니만 그녀의 몸을 따스하게 덥혀주며 온기를 느끼게 해주는 분이셨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께서 지금 편찮으시므로, 그녀의 억울한 사정이나 고통을 할머니께 얘기해 충격받으시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밤 자기 혼자 이 감정을 삭여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별당에 발을 들이자마자 마음이 벌써 차갑지 않아졌다.게다가 그녀가 다친 곳은 손인데, 숙희는 굳이 그녀를 방까지 부축하겠다고 우기기까지 했다.자리에 막 앉자 하녀 하나가 뜨거운 차를 가져왔다.“아가씨, 오늘 분명 많이 놀라셨을 거예요. 이건 쇤네가 끓인 안정차로, 마시고 편히 한숨 주무시고 나면 내일 아침엔 모든 일이 다 끝나 있을 겁니다!”“쇤네 아가씨께서 세수 하시게 뜨거운 물 떠올 게요.”“아가씨, 이불 따듯하게 데워놨으니 차 드시고 머리 빗으신 뒤 푹 쉬세요.”이런 일은 전부 숙희가 하던 것인데, 숙희도 다치자 어린 하녀들이 숙희의 일을 자진해서 맡아준 것이다.아마도 어린 하녀들이 너무 열정적이기 때문일 거야. 김단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숙희에게 가서 좀 쉬라고 하고 차를 마신 뒤, 하녀들이 머리를 빗겨주는 가운데 자리에 누웠다.좋은 냄새가 나는 부드러운 이부자리에 눕자, 복잡한 머리 속까지 이불 속에 쏙 넣고 싶었다. 임씨 집안의 모든 사람을 머리 속에서 끄집어 내고, 자신은 진산군의 금지옥엽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난 임씨 집안 사람과 아무 관계도 없어!’안정차 효과가 상당히 괜찮았다.김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지만 밤새 꿈에 시달렸다.꿈 속에서 그녀는 두 명의 건장한 괴한에게 쫓기고 있었다. 막 달아나려는 순간 갑자기 임학이 나타나 그녀를 심연으로 밀어넣었다.김단은 놀라서 꿈에서 깨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이, 방 밖에 숙희가 놀라서
이 말을 마친 뒤 김단은 임학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것을 똑똑히 봤다.아주 웃겨!김단을 망가뜨리려고 할 때는 그렇게 말발을 세우고 당당했으면서, 이제 자기가 끌려들어가니까 당황하는 꼴 좀 봐!임학뿐 아니라 임씨 집안 사람 거의 다 당황했다.오히려 계속 질질 짜던 임원이 일어서서 김단에게 말했다.“언니 오늘 큰 일을 당했으니 일찍 돌아가서 쉬어! 시간도 꽤 됐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내일 다시 얘기하는 게 어때?”임원의 말을 듣고 임씨 부인도 얼른 맞장구를 쳤다.“그래 그래, 단아, 봐 날이 벌써 이렇게 저물었구나. 소 장군까지 이 일에 말려들어 아직 돌아가지도 못하셨지 뭐니. 우리 내일 일찍 다시 논의하는 게 어떨까?”김단은 그제서야 대청에 아직도 소한이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건너다봤다.대청의 촛불이 소한의 냉담한 얼굴 위에 일렁이자, 깎은 듯 날카로운 이목구비는 전보다 더 냉정하게 보였다.소한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어두운 눈동자에 김단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용솟음치고 있었다.김단은 왠지 가슴이 시큰거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그녀도 오늘 엄청난 일을 당해, 기력이 하나도 없는 게 사실이었다.만약 임씨 집안 사람들과 말다툼을 계속해 나간다면 먼저 쓰러지는 쪽은 그녀 자신일 게 틀림없었다.하룻밤 쉬어도 그녀는 절대 임학을 가만 두지 않겠어!이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소한에게 걸어가는 것을 본 임원이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김단이 모든 걸 팽개치고 소한 품에 안기기라도 할까봐, 김단과 소한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자 임원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언니!”임원의 목소리에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걸 모두가 느꼈으나, 김단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곧장 소한 앞으로 걸어갔다.거리가 꽤 가까워졌다.임원에게 좀 삐졌던 김단은 임원의 두려움에 찬 외침에 속이 시원했지만 결국 도를 넘는 행동은 하지 않고 소한에게 감사의 예를 표했다.“오늘 정암 종사관께서 구해
“왜냐면 절 해치는 편이 쉽기 때문이죠, 절 속이는 쪽이 쉬우니까요.”“미래의 제 행복을 위해 천 냥이란 거금을 써 가며, 장정 둘을 고용해 제 정절을 더럽히고자 했다는 건데, 본인이 생각해도 웃기지 않으세요?”“임학, 토 나올 것 같은 표정 집어치워요. 당신은 애초에 저따위한테 관심조차 없었으니까. 그저 제가 당신보다 높은 자리에 서는 게 싫었던 거잖아요! 조금도 저를 위한 게 아니라, 제가 잘 되는 꼴이 못마땅했던 거죠!”가볍게 몇 마디 던지는 것에 불과했지만, 임학의 마음 속 가장 추악학 구석을 들춰냈다.임학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네가 잘 되는 걸 내가 못마땅해할 이유가 어딨어? 명정 대군께 시집가는 게 좋은 일인 것 같아? 그리고 네가 정절 좀 잃는 게 뭐? 우리 집안이 너 하나 시집보내는 거 못 받쳐줄까봐 겁나?”말이 떨어지자 대청 안은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임원이 훌쩍이는 소리 외에 모두 숨소리도 내지 않는 듯했다.김단의 주변을 쭉 둘러보고 임씨 부인에게 눈길을 주고, 다시 진산군을 쳐다보고 마지막으로 암학을 향해 낮은 소리로 비웃었다.“이제야 알겠습니다. 진산군 마님과 정부인께서는 아슬아슬 위태롭던 지위에서 진산군 가문을 지키기 위해, 제 치마폭을 선택하셨던 것이로군요.”살랑살랑 나부끼는 한마디 말이, 모든 임씨 가문 사람의 얼굴을 후려쳤다.김단의 비아냥거리는 눈빛이 한층 심해졌다.“당신처럼 머리에 든 게 없는 아들을 뒀으니, 진산군 가문이 자산몰수와 멸문을 당하는 것도 시간문제겠군요.”“김단 너 지금 뭐라는 거야!” 김단이 진산군 집안을 저주하고 있다고 생각해 임학은 분노했다.그런데 오히려 진산군이 자신을 꾸짖을 줄 생각도 못했다.“이 짐승만도 못한 놈, 닥치지 못할까!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아직도 네 동생에게 가타부타할 낯짝이 있어? 네 동생이 죄를 묻지 않기로 했으니 망정이지, 넌 벌써 감옥에 끌려가고도 남았어!”‘응?’거참 이상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임학은 진산군의 꾸중에 입을 다물고 가슴을 움켜쥔 채
임학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오히려 임씨 부인이 몸을 떨며 한걸음 한걸음 임학 곁으로 걸어가, 임학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학이야, 어서 동생에게 이 모든 게 오해라고 얘기하렴.”임학은 차가운 얼굴로 침묵했다.그러나 그가 침묵하면 할수록 애가 타는 임씨 부인이 더욱 세게 임학의 옷자락을 잡아 당기다 못해 거의 밀다시피했다.“얘기 해! 어서 얘기하라니까!”목소리가 흐느끼고 있었다.임씨 부인이 이렇게 흥분한 것을 보고 임원이 얼른 다가와 임씨 부인을 끌어 안았다.“어머니, 이러시지 마세요. 앉으셔서 오라버니가 천천히 얘기하게 두세요. 전 오라버니께 반드시 무슨 이유가 있는 게 확실하다고 믿어요!”이 말을 듣고 있던 김단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임원을 바라봤다.임학은 김단의 정절을 더럽히고자 했던 진범이었다. 그런 임학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니, 이게 도대체 말이야 방귀야? 두 사람은 어떻게 돼먹은 인간들이지?임원은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그따위 말을 주워섬길 수가 있단 말인가?하지만 임학은 임원의 말에 정신을 차린 듯했다.심지어 감동의 눈빛으로 임원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김단을 노려봤다.“그래, 이 일은 확실히 내가 한 거야.”그는 떳떳하고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편지는 내가 뜯었고, 복래 차관이라고 내가 바꿨어. 그 두 명의 강호인도 내가 고용했지! 하지만 김단,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해봐, 두 사람이 널 해쳤어?”그는 두 사람에게 절대로 김단을 해쳐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에 김단이 입은 상처는 스스로 밧줄을 빠져나오다 생겼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얌전히 날이 밝기만 기다리고 있었으면 아무 상처없이 돌아왔을 텐데, 괜히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게 뭐야!임학은 사건은 전부 김단 본인이 자초한 것처럼 말했다.전에 자신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얼굴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보자, 김단은 아주 세게 따귀를 갈겨 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정말 귓방망이를 날려도 시원치 않은데, 임학의 말에 기가
어쨌든 여자에게 정절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니까.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모두 그게 사실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소한은 진산군의 인사에 화답하고 김단을 향해 말했다.“명정 대군은 연래 차관이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복래 차관으로 바뀐 겁니까?”김단은 한 켠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는데, 손에 상처는 처치를 마쳤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여전히 아팠다. 의원 말로는 상처가 심각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기볍게 여겨 함부로 행동하지 말고 적어도 한 달 간은 손에 힘을 주지 말라고 했다.이때 소한의 질문을 받고 김단은 일어나 소한에게 말했다.“제가 서신을 받았을 때 서신에 분명 복래 차관이라고 쓰여있었습니다. 그 서신은 아직 분명히 제 화장대에 들어 있습니다.”여기까지 말하고 김단은 고개를 돌려 임학을 바라봤다.임학은 별로 멀지 않은 후미진 구석에 서 있었는데, 사람들 눈에 띌까봐 몸을 사리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임학이 들어올 때 벌써 김단은 그를 눈여겨 봐뒀다.그녀가 사뿐사뿐 임학에게 걸어갔다.“도련님께서는 오늘 아주 얌전하시네요. 어떻게 된 거죠? 무슨 일 있으셨어요?”임씨 부인은 김단이 왜 갑자기 임학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어리둥절해 하며 그녀의 앞을 막아서려 했다.“네가 아주 큰 봉변을 당했는데 가만 앉아서 쉴 일이지, 오라비 일에는 신경쓰지 않아도 돼.”하지만 김단은 임씨 부인을 밀쳐냈다.손에 힘을 전혀 주지 않고 임씨 부인의 손은 뿌리친 뒤 가려던 것 뿐인데, 임씨 부인 뒤에 하필 태사의가 놓여 있어 김단에게 밀쳐진 순간 태사의에 철퍼덕 주저앉는 꼴이 되었다.이를 보고 임원이 바로 달려나왔다.“언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어머니는 언니를 걱정해서 그런 거잖아! 어떻게 이럴수가….”“닥쳐!”김단이 날카롭게 소리치며 임원을 노려봤다.“이 일에 네가 관련이 됐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네가 한마디만 더 지껄였다간 맞을 줄 알아.”임원은 무공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녀가 임원을 때리기로 마음 먹으면 식은 죽 먹기였다.그러나 김단